작성일 : 22-01-10 21:48
20220109 십자가 마을 겨울수련회 여호수아 강의 녹취 1-9강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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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수아 지도1.pdf (27.2K) [0] DATE : 2022-01-10 21:5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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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2-01-10 21:48
답변  
여호수아 20220109 십자가 마을 수련회 이근호 목사
1강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생각할 수 있도록 기회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 안에서 주께서 어떤 일을 하셨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성도임을, 그 과정을 모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수아를 보면
땅 분배 이전에 땅 뺏기가 먼저다. 여기에 창조능력이 개입 되어야 땅 분배가 된다. 창조능력이란 없는데서 있게 하는 능력이다. 현재 있는 것을 없애고 없음에서 있게 한다. 있는 것을 없애버리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것이다. 그럴 때 창조능력이 들어간다. 그냥 능력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결합해서 있게 한다. 전에는 내가 있다가 되는데, 이제는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있음에 대한 주인공인 주님이 계시다가 된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주님이 계신 땅이다. 주의 땅이다. 주의 땅이 될 때 천국이 된다.

여호수아에서는 땅에는 인간들이 있다. 인간들이 있으면 천국이 될 수 없다. 인간들을 없앤다. 이 없애는 이동경로를 따라 주의 땅, 천국이 된다.

땅의 인간들을 없게 만들고 없는 곳에 하나님이 동행하면 하나님이 계신 땅이 되어 천국이 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 창조의 능력으로.

이것을 표현할 때 1. 알기 쉬운 표시는 언약궤 이동경로다.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있는 장소. 언약궤의 이동에 따라서 그 땅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땅이 된다. 민 14:39-45, 신 1:41-46 너희들이 살기 전에 언약궤가 먼저 들어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언약궤에서만 만난다. 언약궤 있는 곳이 성막이다. 성막 있는 곳이 성전이 된다. 성전이 불탄다는 것은 나는 너와 같이 있기 싫다는 것이다.

성전이 있다가 없어진다는 말은 이 땅에서 주께서 잠시 있다가 다른 땅 갈 거야라는 표시이다. 언약궤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으니, 나중에는 상자로 이름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몸, 죄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언약궤가 오신다. 잠시 삼십삼 년 사시다가 너와 안 논다 하시고 가신다. 그러자 베드로가 어디로 가십니까? 다시 오신다. 성령이 오셔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신약적으로 설명하면 급작스럽다. 구약 때는 땅을 갖고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친절하시다. 이차대전 독일군들이 작전 모형 판을 갖고 탱크를 이동하고 잠수함을 이동한다. 그 모형판이 구약이다. 구약은 모형이다. 모형 판에서 언약궤를 들이민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들이민다. 하나님의 이름이 상자와 관련되어 있다. 상자란 물체다. 인간이 다루는 물체다. 인간이 함부로 다루다간 웃사 처럼 죽게 된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창조주이신데 예수님을 함부로 대하는 것처럼 언약궤 상자를 함부로 대한다. 언약궤를 갖고 움직인다. 대적은 칼과 활과 말이 있지만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있다. 저들과 붙어 싸워라 하신다. 이게 말이 되는가?

신약에는 십자가로 이기라는 말이 없다. 십자가로 이긴 것을 확인하라. 십자가가 무기가 아니다. 십자가 지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무기를 갖는 시점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십자가란 다 이긴 후 무엇으로 이겼지? 십자가이다. 십자가로 사탄아 물러가라는 식이 아니다. 진짠 복음을 아는 사람이 귀신들려 목이 팩팩 돌아가는 사람을 만나면 그냥 살다 죽어라 하는 것이 승리다. 얼마나 편한가? 퇴마사, 신부가 성경책 등을 갖고 퇴마하려고 한다. 라틴어를 사용하면서 귀신을 쫓아내려고 한다. 귀신은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에 기죽지 않는다.

언어학을 백날 해도 진리가 나오지 않는다. 헬라어, 히브리어 백날해도 진리가 나오지 않는다. 기호학에 포함되어 있고 몸짓과 손짓으로. 몸짓 손짓으로 표현한 기호 그 이상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기호이다.

문자는 나타나는 표상이고 그 뒤에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기호학에서 말한다. 언어학에서는 이것이 없다. 기호학에서는 이중분절을 말한다. 표현하는 것과 내용이 완전히 다른 분야다. 딴 세상이다. 이렇게 기호학에서는 이야기한다.

원어 이런 것에 속아 넘어 가지 마세요.

언약궤는 기호다. 사물이다. 내용은 나타나는 표상 없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냥 하나님 하면 인간 상상에서 나오기 때문에 언약궤를 주셨다. 표상을 주셨다. 그러니 인간들은 하나님의 숨어있는 의미를 모르기에 언약궤를 인간들이 알고 있는 기호로 여기고 거기에 빠진다. 인간들의 기호는 인간이 고대하는 바를 얻기 위해 기호를 사용한다. 그러나 주님은 있는 것을 없게 하시고 없는데서 있게 하신다. 언약궤를 주어도 언약궤를 모른다. 십자가를 주어도 모른다.

십자가로 네가 제거 되어야 한다. 그냥 죽어도 괜찮다. 십자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죽는 욕망 외에 다른 것이 있으면 안 된다. 내가 이제는 여기서 힘들게 살 필요가 없다. 이게 바로 십자가 주신 기쁨이다.

민 14:39-44
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에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을 떠나지 않았더라
신 1:41-46
정탐을 한 후 못 올라가겠다고 하여 올라가지 말라고 하는데 땅이 있기 때문에 올라가서 크게 패배했다. 통곡한다. 통곡해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 주인공 언약궤가 올라가지 않겠다는데.

땅 있으니 ‘땅 주겠지’라는 라는 것은 화천대유한테 이야기 하라. 살 땅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거주할 만한 땅이어야 한다. 그래서 언약궤 취지를 잘 들어내는 방법이 있다.

두 번째
알기 어려운 방법은 갈렙의 이동경로를 추적하는 것이다.
갈렙은 민수기 26:65절에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고아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다.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모두 제거되어야 된다.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지분을 갖게 된다. 민 26:62
레위인의 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함을 입은 모든 남자가 이만 삼천 명이었더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 계수에 들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그들에게 준 기업이 없음이었더라.

레위지파가 빠져 나오면서 열두지파가 된다. 레위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한다. 그런데 레위 지파 숫자는 난지 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함, 여기에는 홍해를 건너온 사람은 한 사람도 해당되지 않는다. 일 개월 이상 된 사람은 땅을 분배받지 못한다. 갈렙과 여호수아밖에 땅을 분배받지 못한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약속을 대변하기 때문에 여호수아의 땅은 집단적 단위를 표시한다.

갈렙은 개인이고, 여호수아는 집단이다. 갈렙 개인이 어떻게 기업을 차지하는 기적을 보라는 것이다. 나머지는 여호수아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갈렙을 따라 우르르 갈렙처럼 땅을 얻을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레위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한다. 레위지파는 왜 땅을 분배받지 못하는가? 왜 갈렙과 레위지파와 같이 취급하는가? 땅이 없는 레위지파와 갈렙이 동일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땅을 차지하면, 땅에는 창조능력이 있다.

뷔페가 있다. 사자, 상어, 기린이 먹으려고 한다. 상 위에 먹을 것이 있다. 상어에게 먼저 먹어보라고 한다. 상어가 지나가면 물고기만 비게 된다. 빠진 것을 통해 이것은 상어가 먹었다라고 판정된다. 선 스펙트럼이라고 한다. 물리학에서 수소가 빠지면 광자가 나오고 그 빈자리가, 빠진 부분에 누가 들어가는가? 레위지파가 들어간다. 레위 지파가 48곳에 들어간다. 빠진 부분에 넣는다. 너희들은 빠진 부분을 기억 못하면 이 땅에 살 자격이 없다.

레위지파가 땅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자기 고유의 땅은 없다. 그러나 각 지파 속에 띠처럼 집어넣는다. 열두 지파 우린 땅이 없어야 마땅한데 레위지파의 은혜로 땅을 얻게 되었음을 안다. 레위 지파는 기업이 없다. 기업이 없는데 기업을 주신다. 없음에서 있음이 된다. 이 땅은 너희들이 차지할 자격이 없음을 레위지파가 땅을 가짐으로 표현해 준다.

레위지파와 동급이 되는 갈렙은 어떤가? 갈렙은 정탐할 때 우리에게는 언약궤가 있다고 한다. 언약궤가 자기자리 찾겠다는데, 우리가 되고 안 되고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능히 거뜬히 들어간다고 믿은 사람은 갈렙과 여호수아뿐이다. 이 이야기의 근본적 문제는 현재 있는 내가 어떻게 구원받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이 모든 것은 아무 의미 없다. 다 사라진다.

오히려 우리가 왜 천국에 가지. 이상하게 생각해야 된다. 우리 모습이 천국에 갈 사람인가?

이 띠, 레위지파, 십일조를 주어야 하는데 주지 않는다. 레위 지파가 띠 속에 살지 못하고 돌아다닌다. 킬로만자로의 하이에나처럼. 썩은 고기를 찾는. 배고프니 빠진다. 불연속성이 되어야 하는데 연속성이 된다. 통합된 이스라엘로 생각한다. 통합된 이스라엘은 가짜다. 통합된 교회는 가짜다. 이빨이 숭숭 빠져야 된다. 십자가 마을도 이빨 다 빠져야 한다.

주님 나라 좋아요 하다가 십자가 마을 좋아요, 우리교회 좋아요가 되면 이스라엘 범죄와 동일하다. 있을 수 없다.

땅 뺏기는 천지창조의 능력이 제공되어야지 힘으로 뺏는 것이 아니다. 값나는 땅을 얻는 교회처럼 하는 것은 화천대유다. 예배당 터 넓히는 것은 부동산 계산하는 것이다. 교육관 짓고 주차장 넓혀 구원되는 교회가 없다. 사람이 공을 들이면 정신이 거기에 다 빼앗긴다.

선 스펙트럼, 빠진 부분에 레위지파가 들어간다. 나중에 레위지파가 빠지면 선지자를 보내고, 이방 룻을 보내어 그 자리를 매꾼다. 그 때는 땅이 토한다. 땅이 토한다는 것은 진정 이스라엘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생소한 것이 나올 때, 토할 때, 이방 여인이 토해진다. 이방 여인 룻이다. 룻이 다윗의 증조모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신다.

왕은 이 땅을 차지한 곳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없음에서 왕이 나온다.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분이 우리의 왕이다. 이 땅에 존재하는 왕은 본디오 빌라도다. 나는 너를 풀어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권세가 있다고 한다. 주님은 이 있음에 주목한다. 빌라도가 죽일 권세가 있다고 할 때 주님은 있음을 공격한다. 내 아버지가 허락지 않으면 너는 권세가 없는 것이다. 너희들은 너의 소유, 있음으로 살지만, 나는 없음으로 산다. 없음이 있음을 이긴다.

갈렙을 계속 따라가 보겠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 갈렙은 40세이다. 여호수아 때는 85세(수 14:10)다. 아낙 자손의 땅을 달라고 여호수아에게 요청한다. 모세를 통해 주신 약속이다. 갈렙의 땅의 중요성은 여호수아 끝나고 사사기에 갈렙이 이스라엘을 이어주는 중추적 역할을 한다. 갈렙의 가족이 첫 번째 사사가 된다. 사사기 1:20 헤브론을 갈렙에게,

삿 3:9절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삿 1:13 갈렙의 딸 악사의 남편이 된다. 옷니엘이 갈렙의 정통성을 잇는다.

일이 터지면 사사에게 부탁한다. 사사가 없으면 지분을 지킬 수 없다. 사사의 등장방식은 지분이 없는 레위지파가 실제로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언약적 내용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중에 레위지파도 본연의 모습을 상실한다.

공간의 이동.
언약궤가 공간을 이동한다. 공간을 갈렙을 통해 이동한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자리에 있기에 전체를 책임진다. 여호수아가 승리하면 여호수아로부터 지분을 부여받게 된다.

언약궤와 갈렙이 도드라진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이름이고 갈렙은 사람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동행할 때 비로소 공간이 주어진다. 땅이 주어진다.

그러면 시간은 어떻게 흘러갑니까? 언제 이 땅은 모두 이스라엘 차지가 되는가? 시간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시간이 없다. 시간은 언제 생기는가? 속도가 공간 쪽으로 치우칠 때 비로소 시간이 등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차원이 다르시다. 예를 들면 여기에 면적이 있다면 여기에 손가락으로 짚으면 일차원에 사는 사람은 선만 보인다. 한 사람의 손이라는 것은 더 높은 차원에 가야 알 수 있다. 차원이 낮은 곳에서 가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차원에 있으면 시간이 걸릴 것이 없다. 하나님께는 시간이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동행하시니 하나님께서 시간의 저촉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안에 시작과 끝을 다 갖고 계신데 인간에게 필요해서 하나님께서 시간을 경험하신다. 이미 죽었고 하늘에서는 살아있다고 할 때 시간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땅에 있으나 하늘에 있으나 그리스도 안의 차원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없다. 시간은 땅이라는 공간 때문에 느끼고 겪게 된다. 몇 년 살았고, 오래 살았다는 것과 영생은 아무 상관이 없다.

태어나자말자 죽어도 그리스도 몸으로 들어가면 영생이다. 천사가 무슨 나이가 있는가? 천사에게 나이를 묻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저촉을 받지 않는다. 시간이 있는 이 세상은 임시적 연극무대로 보면 된다. 연극이 끝난 후에는 꿈같다.

주님의 새로운 창조의 능력을 주기위해서 이 땅에 살게 하셨다. 인간에서 성도로. 성도는 시간이 없다. 성령 안이라고 한다. 십자가 안, 예수 안이라고 한다. 성령 안이 되면 어디서 봐도 십자가다. 인간일 경우에는 십자가가 지나갔고 부활이라고 한다.

전부다 십자가인데, 어디에도 십자가인데 그렇게 보지 못한다. 무슨 십자가를 건너뛰는가?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구경거리로 봤다. 흥밋거리고 봤다. ‘어떤 인간인지 보자.’ 오늘날 교회도 예수님을 구경거리로 본다. 성도는 내 자신이 예수님께 구경거리가 된다. ‘오늘도 얼마다 개판으로 살았는지 한번 보자.’ ‘오늘도 시간이라는 스케줄에 쫓기는지 보자.’ 스케줄이 뭐가 필요한가?

십자가로 하니 장고에 나오는 공동묘지 같지요. 이것을 아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스데반 집사가 그 중에 한 사람이다. 스데반 집사에겐 돌이 돌로 보이지 않고 귤로 보인다. ‘귤 맞고 죽어라.’ 이미 죽은 인간이 이미 산 인간에게 죽어라고 돌을 던진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이 고자질 한다.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한다. 용서해 주세요. 저들은 무엇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 세상이 예수님으로 인해 어떤 차원의 변화가 일어났는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될 때 공간도 의미 없다. 분배도 의미도 없다. 시간도 공간도 아니라 인간이 성도되는 것이다. 땅 분배는 어떤 인물로 변환되어서 들어가는가가 중요하다. 천국이라는 공간에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으로 달라져서 들어가야 한다. 언약궤의 취지를 아는 자. 레위 지파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아는 자. 죽음을 다루는 지파가 땅 갖지 못하고 맨날 제사 드리는 일을 해야 하는 이유, 취지를 이해하는 자, 그것이 엔진이다. 날마다 생명이 나오는 엔진부위가 레위지파다. 레위지파의 취지를 아는 자가 성도다. 그것을 아는 경우에만 그 땅을 유지할 수 있다.

여호수아 주변을 조심스럽게 보는 이유가 있다.
신 8:19절“ 또 두렵건데 내가 마음에 이르기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 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 이니라

사람들은 땅에 대한 욕심이 있기 때문에 언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언약을 이용해 땅을 얻은 후 언약을 버릴 것이다. 광야를 통해 땅의 중요성을 알았다. 생존이 중요한 것을 알았다. 광야를 통해 언약이 나보다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이 언약 안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이 스스로 이루시는 언약 성취가 나의 꿈의 성취보다 우선됨을 알아야 한다. 광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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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했는데 쫓겨났다. 그냥 고생만 했다.

세상 철학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한다. 고생해도 낙이 안 오면 누가 책임지나. 죽도록 고생한다. 카자흐스타에 가서 선교한다고 죽도록 고생한다. 학교 세우고 병원세우고, 고아원 세운다. 죽도록 고생했는데, 그들은 백날 해봤자 고생한 나는 제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들은 죽도록 고생할수록 고생한 내가 더 소중해진다. 고생한 것이 아까워 자기를 버릴 수 없다.

여호수아가 집단의 단위다. 감사한 것은 여호수아가 고생을 해도 혼자 하지 않고 집단적으로 고생하게 한다. 어느 누가 더 고생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한다. 요단강 건널 때 언약궤를 제사장이 앞장서 건넌다. 언약궤 앞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취급당한다.

왕자표 크래파스. 모두 한통에 다 들어간다. 밑바닥엔 제사장, 레위지파가 받치고 있다. 레위 지파를 통해서 언약이 발생되면 그 조건 하에서 너희들은 살아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유지되는 조건이다. 이 조건은 내가 생존할 조건과 대비된다. 내가 이 땅에서 무엇을 먹고 사는가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조건은 날아갔다.

여호수아가 인도한다. 여호수아는 모세 언약에 중첩되어있다. 여호수아는 하나의 기호다. 진짜 실내용은 모세언약이다. 모세 언약이 주인공이다. 모세는 비록 죽었지만 모세를 죽이게 한 언약은 모세를 죽임으로 모세 언약이 인간에게 구애받지 않음을 모세를 통해 드러냈다. 모세보다 언약이 중요함을 크레파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신명기 9:5절
내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크리파스 안에 있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다. 목이 곧은 백성을 왜 집어넣는가? 약속의 땅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는 레위지파가 없다. 이스라엘에는 레위지파, 언약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려 함이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서 이스라엘을 쫓아낼 수 있는 악함과 죄성이 뿜어져 나온다.

우리는 자꾸 의로워지려고 한다. 내 생계보장을 받을 권한이 생긴다고 한다. 이만큼 복음 알고 착한데 나 죽일 겁니까? 죽일거다. 복음 안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다. 복음이 내 천당 보내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언약이 언약대로 드러나기 위해 ‘나 착한데 지옥 보낼 겁니까라.’는 것을 죄가 되도록 인도하신다.


2강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크레파스 밑 부분을 담당한다면 언약은 개인적으로만 주어지는 언약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만 달랑 구원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여기서 반드시 집단이라는 것이 형성된다. 그 이유는 개인적인 악은 어떤 경우에만 하나님께서 의미 있게 주느냐면 집단적이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반발하면서 튀어 나올 때다. 그 예가 아간이다. 나는 여호와께 바치는 것이 아까워 외투와 금을 챙긴다. 집단에서 나와 개인적 이익을 추구할 때 악이 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은 항상 집단적으로 움직인다. 나중에 땅 분배 이후 내 땅 네 땅이라는 싸움이 일어나면 안 된다. 집단적으로 부여 받았다. 사적으로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에 와서 나 천국 간다하면 안되고 우리가 간다고 해야 한다. 이 나라에 한 사람밖에 없어도 우리란 표현을 써야 한다. 예수님은 홀로 오셨지만 우리라고 하셨다. 아버지와 우리가 된다.

집단성이라는 것은 무엇을 계속 악으로 규정하는가? 개별성을 악으로 규정한다. 개별적이 되면 자연을 볼 때 카운트 한다. 수를 헤아린다. 수를 헤아림에서 수학이 나온다. 수학은 하나 둘 셋, 개별적으로 헤아림에서 수학이 시작된다. 헤아림 속에서 헤아리는 당사자에게 모든 의미가 응집되도록 헤아린다. 형제들에게 호빵 다섯 개를 줄 때 엄마가 사이좋게 잘 먹어라 한다. 이것이 엄마의 실수다. 인간은 개별성이기 때문에 사이좋게 할 줄 모른다. 예, 어머니 해 놓고 형제들끼리 카운트한다. 형이기 때문에 세 개, 동생이기에 두 개라고 하면 동생이 발끈한다. 우리나라 헌법에 그런 것이 없다. n 분의 1이다. 두 개씩 먹고 하나를 나누자고 한다. 찐빵 갖고 유산 나누는 연습을 한다.

여기에 형이 복잡한 계산을 들이댄다. 지난번 집 청소할 때 네 노동력과 나의 노동력을 비교하면 내가 2.5배 많았다. 내가 많이 일했으니 많이 먹어야 하고 너는 적게 일했으니 적게 먹으라는 것이다. 합리적이기에 동생이 쑥 들어간다. 그러면서 다시 따진다.

아버지가 유산을 남기고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형에게 많이 주라고 유언을 했을 때 많이 주라는 것이 추상적이라 동생들이 따지게 되면 문제가 커진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의미를 구축할 때 숫자로 세면서 자기 자신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기는 없고 몸만 있다. 그런데 자아성은 밖에 나가 수를 세면서 만들어진다. 내 것, 내 것, 네 것으로 센다. 찐빵 두 개 먹을 때 동생의 자아는 찐빵 두 개의 나가 된다. 이것을 무산 시키는 것이 레위지파다.

레위지파는 양을 대신 죽음으로, 양과 소를 대신 잡음으로 이러한 개별성을 완전히 무산시킨다. 인간과 인간의 비교와 대조를 통해 되는 구원은 없다. 개별적 구원은 없다.

만약 개별적 구원이 있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두 사람이 있을 때 내가 아는 예수와 네가 아는 예수가 다르면 둘 다 천국이 다른 천국이다. 이런 천국은 없고 받아주지도 않는다.

포도원 비유는 천국비유다. 혼인잔치도 천국비유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도 천국비유다. 천국비유의 특징은 하나의 가치를 배분하는 것이다. 오후 다섯 시, 세시에 온 사람 모두 동일한 품삯을 받는다. 주인의 뜻을 배분받는다. 주인의 의향이 분배받은 그들 속에 동일하게 자리 잡게 하기 위함이다. 네 안에 네 아닌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주님이 개별적 노동해서 얻은 것이 네 안에 안 들어 있다는 것이다. 개별적 공로는 없애버린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나온다. 부부가 사이좋게 한날에 죽었다. 약속한 헌금을 반밖에 내지 않아서 죽었다. 차라리 헌금을 안 했으면 부부는 살았을 것이다. 지금 문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헌금을 하면서 개별성을 담았다. 내 것을 낸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나의 것을 안 받으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는 주님의 돈이 없기 때문에 자기 돈을 내겠다는 것이다. 인심 쓰겠다는 것이다. 주님의 것이 없으니 자신도 신자 흉내 내려고 자기 것을 낸다. 주님은 자기 것을 내는 자를 죽임으로 너희들이 내든 내지 않던 다 주의 것이라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다 주님의 것이다. 주님의 것을 유지할 때 천국 백성과 왕의 관계가 유지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갖고 교회 헌금과 관련지어 헌금 많게 하려고 설교할 순 없다. 안 내면 죽는다고 하면서 돈 내라는 것은 강도다. 너희들은 내나 안내나 죽었다는 것을 감사하는 곳이 교회다.

교회는 헌금을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의 것을 내가 갖고 있고 네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끼리 주고받고 해 봐야 다 주의 것이다. 혹시 돈 갖고 있는 것이 번거로운가? ‘내 돈 갖고 갈사람 없습니까?’ 광고해 보세요.

크리파스 안에서는 개별성을 일체 용납하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악을 끄집어낸다. 열 족속, 토착민들의 악이 관영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악이 무엇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토착민들은 자기 땅에 살기 때문이다. 악을 먼저 알고 들어가야 살 수 있는데, 이스라엘은 아무리 봐도 악이 보이지 않는다. 애굽에서 살듯이 그냥 살고 있을 뿐이다. 무엇이 악인가?

이럴 경우 악을 드러내는 방법이 있다. 원자핵이 있다. 플러스 전자가 있고, 주변에 마이너스 전자가 있다. 전자는 고유의 궤도를 갖고 있다. 그런데 그 옆에 하나 더 있으면 겹친다. 전자의 힘이 하나 있을 때에는 촘촘하지 않는데 여러 전자가 있으면 촘촘해 진다. 밴딩이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해 놓고 그 신들을 섬긴다면 너희들조차 멸망하신다고 하신다. 고유의 띠가 나와야 한다. 선 스펙트럼처럼 빠질 것은 빠지고 들어갈 것은 들어가야 하는데, 이방인과 겹쳐 버리면 밴딩 현상이 되어 얼싸 안아 버린다. 결혼, 종교문화가 겹치면 순결을 잃어버린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망하지 않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서 죄악을 끄집어낸다. 죄악을 끄집어내어 주어야 레위지파가 담당하는 제사의 의미가 부합되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어야 죄가 어떻게 죄가 사라졌는지를 알게 된다. ‘왜 제가 천국 갑니까?’와 같은 말이다. ‘내가 죄를 지었는데 왜 저에게 죄가 없다고 합니까? 저보고 왜 의인이라고 합니까?’ 따지고 싶은 것이다. 이런 별종도 더물지만.

주님의 뜻은 우리를 의인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죄인을 의인되게 하신 분, 기여하신 분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다. 너는 이방민족을 선호하는 너의 죄를 드러나게 함으로써 그 죄와 더불어서 같이 투입되는 주님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 언약의 구현이다.

언약 구현의 예
이스라엘, 곧 전자가 광자를 만난다. 광자는 빛의 입자다. 광자를 하나님으로 보고 전자를 인간으로 보자.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만나면 왜 이방민족이 이 땅에 살아서는 안 되는가가 나온다. 전자가 튀어 나온다.

파이만 다이아 그램.

두 번째 방향은 이스라엘과 이방인과 만나서 하나님이 튀어 나온다. 둘이 합세해서 사사가 핍박받는다. 선지자가 핍박받는다.

이방민족과 하나님과 만나 이스라엘 땅에서 이스라엘을 팅겨 나가게 한다. 바벨로 포로로 잡혀가게 한다.

이스라엘, 이방민족, 하나님 세 가지 조합이 이스라엘의 역사, 공간이다. 공간에서 일이 벌어지면 시간이 발생된다. 이 시간이 이스라엘의 역사다. 하나님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와서 이방인과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드러내신다.

출렁이다 우연한 입자의 등장으로 우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플레이장이다. 138억 년 전에 빅뱅, 지구는 46억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요동치는 이유는 옆 동네 우주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물리학 이야기는 개별자와 관련되어 있다. 카운트 한다. 수학적으로 계산한다. 자연의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한다. 찐빵 더 먹고 싶은 동생의 입장이다. 자신도 두 개 반 먹고 싶은데 형이 훅 들어와서 네가 나보다 덜 일했잖아라고 하면 카운트 적으로 맞게 된다. 이것이 이성적이다. 판단. 판단의 모든 의미는 판단하는 나에게 모든 의미가 쏠린다. 이것이 악마의 모습이다.

천국은 달란트 비유나 혼인잔치 비유에서 각자 개별자로 있는 자는 다 와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곳에 개별은 죽이고 전체로 참석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신랑은 한명, 신부는 열 명이다. 이것이 천국이다.
 
마귀가 인간을 어떻게 훈련하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헌금을 카운트 한 겁니다. 넣을까 뺄까 한 것이다. 누가 달라고 했습니까? 그냥 갖고 있으면 죽는 일 없다. ‘감사합니다’하고 살면 아무 일 없다. 죽고 싶거든 헌금하라.

언약은 이스라엘도 이방민족도 꼬이게 되어 있다. 광자가 진행하게 되면 이스라엘의 의미와 이방인의 의미가 같이 등장한다. 이 때 이스라엘은 오해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오해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이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다. 그래서 이방민족을 집어넣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면 이스라엘 집단이 하나의 개별자로 움직인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니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까가 된다. 이렇게 되면 이방민족을 쫓아내지 못한다.

지도를 보면

중부전선이다. 느보산에서 모세가 죽는다. 죽은 후 언약궤 위치가 길갈에서 실로, 마지막엔 세겜으로 간다. 여호수아 마지막에 언약궤가 세겜에 있다. 언약궤가 있는 곳이다.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이 결합해야 언약궤의 취지가 드러난다. 왜 성도를 죽이지 않고 세상을 살게 하느냐? 세상 사람과 접촉되어야 십자가가 얼마나 감사한지가 계속해서 드러난다.

물 퍼내기. 계속해서 물을 퍼내니 바닥에 예수님이 어디까지 낮아져야 하는가가 나온다. 내가 죄지었다는 것도 죄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 나온다. 내가 바로 하나님을 죽였다는 죄까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언급하신다. 가룟유다의 죄까지도 주께서 용서하신다. 언약이 드러나기 위해 가룟유다와 예수님이 반드시 만나야 한다. 그 사이에서 하나님의 요소가 나온다. 하나님의 의가 된다.

왜 자꾸 죄 지었는데 나보고 의인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의라는 조건하에 네가 들어가는 것이다. 이방민족을 만나고 세상을 만나고, 육과 만나 십자가가 의가 되게 한다.

느보산에서 모세는 죽는다. 모세가 죽는 이유도 본인 입장에서는 참 억울하다. 모세가 평생  나쁜 짓 한 적 없다. 그런데 한번 성질냈다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성질을 하나님이 유도하셨다. 물이 자동적으로 나오면 되는데 그렇지 않았다.

모세 입장에서 반석 안에 물이 있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다는 것은 모세가 아는 바이다. 두 번 치면 안 된다는 것이 없었다. 내가 어떤 여자와 결혼할 것인가 할 때 일단 결혼했다 치고 자식을 낳았다 치고 그러면 저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것이 성립될 수 없다. 어떤 자식이 나올지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식이 나올 것을 아시고 때를 맞추어 협력하여 이런 적들을 붙여 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겐 공간적으로 자기 터전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간이 있다는 것은 시간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는 시간이 없다. 따라서 나의 뒷모습을 보고 결정한다. 이미 일을 다 끝낸 뒤에, 끝난 상태에서 우리를 찾아오신다. 그러니 우리 계획과 차질 나게 찾아오신다.

모세는 예상도 못했다. 모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세를 떨어내고 모세 언약이 들어가게 한다.

여호수아 5:12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여호수아 5:13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얍복 강가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자와 같았고 떨기나무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과 같다. 내가 살 땅에 나의 백성을 집어 넣어라는 명령을 받는다. 신발을 벗음으로 내가 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땅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 땅에 들어가는 모든 경우는 하나님이 옆에 서서 지팡이로 연속적 기적이 있어주어야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 기적이 놀라운 자연현상으로 생각했지만 점차 기적이 내 속에 있는 천국의 요소가 아닌 악, 내가 손댈 수 없는 악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내가 외부적으로 도움 얻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다. 그래야 감사가 된다. 도와 줘서 감사가 아니라 빼앗겨도 감사다. 예수님의 모습으로 닮아간다. 빼앗겨도 감사가 된다. 내가 이런 죄가 있었구나를 드러낸다.

그래서 모세가 느보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가지 못했다. 지금은 요르단 땅이다. 싯딤 길갈 여리고 벧엘 아이성으로 간다. 중간에 치고 들어간다. 인천상륙작전이다.
첫 번째는 중부, 남부, 북부전선으로 진행한다. 북부는 메롬 중심의 전쟁이다.

남부전선 여호수아 10장에 나온다. 여기에 이방과의 전쟁에서 언약적 취지가 드러나는가를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도 죄가 있고 이방인도 죄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궤를 동행함으로 이스라엘이 거룩이 되고 의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똑 같은 의롭지 않고 목이 곧은 백성인데 악한 민족을 만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이 땅에 살게 하는 취지가 드러나게 하신다.

선 스펙트럼, 땅이 없는 레위 지파에 땅을 주라는 것은 없음이 있음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유일하게 통하는 요소다. 없음의 자리가 유일한 통로다. 땅이 있다고 해서 힘으로 유지하려면 이방민족과 동일하다.

이스라엘에게 맡기지 않고 여호수아 5장에 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등장하는가? 하나님이 하시는 대리 전쟁에 나서기 때문이다. 여호수아 5:15절에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네 선 곳이 거룩하니라고 한다. 거룩이 너와 함께 움직이면서 전쟁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전쟁은 너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쟁이라 하니 우린 팽팽 놀고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이 부딪히는 것이다.

그래서 갈렙이 중요하다. 갈렙이 약속의 땅을 정탐할 때 빈 땅이 아니라 아낙 자손,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땅을 언약으로 이길 수 있는 땅으로 봤다. 기가 죽지 않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더 확실성을 갖게 되었다. 저 정도 적이 있어 줘야 하나님답다는 것이다. 시시하다면 자신들이 알아서 하면 되는 것이다.

여리고성 칠 때와 아이성 칠 때 이스라엘의 태도가 다르다. 작은 아이성 전쟁이 그러했다. 그래서 패했다. 이스라엘 내에 있는 건방짐과 교만함과 자만심을 계속 끄집어낸다. 자만과 교만으로 뭉쳐 있는 너희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솜씨를 보라고 해서 이방민족을 붙이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다루시고 이방민족은 본인이 본인을 다룬다. 이것만 차이다. 인간으로는 둘 다 아담의 자손이기에 둘도 동일하다. 달리기, 주식투자하면 누가 이기고 돈을 벌겠는가? 인간적 차이는 없다.

민수기에서 요단강 동편은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는 땅이다. 르우벤, 갓, 므나셋 반지파가 차지한 땅이다. 이들이 이 땅을 차지한 이유는 그 만큼 믿음이 없어서다. 이들은 이 땅이 너무 좋아 보였다.

초등학교 때 소풍갈 때 좋은 지점을 선점해서 놀았는데 나중에 끝나고 보니 더 좋은 자리가 있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하나님이 주신 땅이 아닌데 이 땅이 좋아 이곳을 달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말은 이들 속에 죄가 혹같이 튀어 나올 만큼 풍부하다는 것이다. 지금 누구를 나무랄 입장이 아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혈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너희를 통해 언약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에게 땅을 차지하게 한다.

이방 민족을 다 쫓아내지 못했다. 여호수아는 나이 많아 늙었다. 분배해주고 차츰 알아서 정복하라고 하면서, 정복되지 않았는데 지도에 기업을 분배했다. 아프리카의 국가들의 국경선을 점령국들이 일방적으로 그었다.

신앙적인 의무로 남겨준다. 여호수아는 죽어야 한다. 여호수아가 죽어야 모세언약이 살아 있다. 하나님이 살아 있다. 눈에 보이는 지도자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살아 있고 언약이 살아 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 사사시대가 된다.
사사들의 특징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나타난다. 레위지파도 배고파 다 흩어져버렸다. 불연속성이 다 깨져버렸다. 밥 먹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이방민족과 화친하지 말라고 했는데 화친하여 밴딩이 되어 한 덩어리가 되었다. 누가 누군지 모르게 되었다.

사사기 6:24
이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비의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삿 6:25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바알의 단, 우상이 나오지요. 약속의 땅에서 우상과 어떻게 전쟁해서 이기는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이 와해되듯이 무너지고 그 때 여호수아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우상을 처리하고 승리하는 원리 원칙을 여호수아가 언약궤를 진행하면서 다 이야기 했다.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의 방식을 설명한 후 다시 여호수아로 돌아가 언약궤가 어떻게 약속의 땅에 의미 있게 들어갔는지는 8시부터 하겠습니다.
관리자 22-01-10 21:49
답변  
3강  우상을 다루는 법

같은 차원에서는 변화를 설명 못한다. 낙엽이 있다면 낙엽이 녹색에서 붉은 색으로 변할 때 어느 때에 녹색에서 붉은 색으로 변하는지를 알 수 없다. 아무리 잘라도 변화되는 부분을 도려내도 그 부분에서 또 잘라내야 한다. 수학에서 미분이라 한다. 무한대로 갖고 간다. 잘라내고 잘라내어, 무한대로 잘라내면 변화를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는데, 같은 차원에서는 변화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사사기 6장에 나오는 우상문제입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볼 때 신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우상은 무가치하다(이사야). 허망하다. 우상은 인간 그 자체다. 인간이 있고 신이 있는데 여기에 언약의 하나님이 개입해서 우상은 신이 아니다, 무가치 하다, 허무하다, 너랑 똑같다, 너 자신이 허망하다 고 하신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을 맞닥뜨리게 한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과 동급으로 생각한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은 인간이다. 동급이 될 수 없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보다 우상을 섬기는 것이 본성에 맞다. 이것이 본성에 맞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갖고 오신 공간과 시간이 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이 거주하는 땅이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하니 마치 자신들도 거주할 자격이 있는 것처럼 여긴다.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아는 시간과 공간을 동일하다 생각했다. 자격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공간과 시간의 특수성을 알려면, 우상의 자리에 가서 그 자리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을 생각해 보라. 우상과 너와 이방인이 같은 차원에 있다. 그러니 너희는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왜 늙는가, 죽는가의 변화를 설명 못한다. 어디서, 왜 태어났는가? 천지창조는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 차원에서 나와야 하는데 우상 차원에서 천지창조를 설명한다든지, 심판이 어떻다든지, 이 세상 종말을 언급하는 것을 잘못되었다. 이것은 허망한 사고방식 속에서는 주님께서 주신 변화를 자신의 차원에서 설명하지 못한다. 여호수아에 나오는 전쟁에서 인간이 예상한 변화 말고 인간이 예상 못한 변화에 집중해서 신경 써야 된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10:13절에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태양이 하늘에 멈추었다. 태양이 고장 난 것 같다. 자기 길 잘 가다 가지 않는다. 이 변화를 인간 차원에서, 우상 믿는 차원에서 설명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다.

여호수아 5:10-12절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만나가 왜 그치는가? 만나는 유월절과 관련되어 있다. 1월 14일 유월절을 지켰다. 1월 14일  날짜를 두고 이방민족의 1월 14일과 이스라엘의 1월 14일이 다르다. 이 변화가 삽입된 1월 14일이다. 유월절이다. 이스라엘이 이방민족과 접근하면서 유월절날 초월적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 개입변화를 빠뜨리고 그냥 형식적으로 유월절을 지켰다. 이렇게 되면 유월절의 시간은 인간의 이성으로 납득되는 1월 13일과 15일 사이의 평범한 14일이 된다. 율법에서 말하는 유월절을 통째로 날아갔다. 같은 차원에서 변화를 설명 못한다. 변화를 설명 못한다에서 약속의 땅에서 살 권한이 있느냐 없느냐를 설명 못한다. 내가 이 약속의 땅에 살 권한이 있느냐, 없느냐를 설명 못한다.

어디에 살고 있어요? 목포에 살고 있어요? 본인이 목포에 살아야 되는 이유를 초월적으로 설명해 보라. 전라남도에 있는 도시다. 차이가 없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설명하는 것이지 주님이 십자가 지신 개념 갖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목포와 십자가의 관계는? 설명이 안 된다.

예를 들어 목사님이십니까? 목사와 십자가의 관계는? 신학교 나와서 자격증 주면 목사 된다. 이것은 일반 자격증 얻는 것과 같은 것이네. 만나가 그침으로 말미암아 만나를 내려주심을 초월적이라는 사실을 새삼 받아들여야 한다. 만나가 주어졌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살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다.

성령이 오지 않으면 예수님의 죽음은 이순신 장군 죽음과 동일하다. 당신 죽고 나도 죽겠지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죽음으로 네가 살았다고 하신다. 일반인들에게 통하는 이야기인가? 시이소오하는 것인가?

여호수아 주석을 보면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나와서 땅을 정복하고 분배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라고? 옛날에 한때. 그래서 어쩌라고. 지금 땅이 있잖아요. 시온니즘이라해서 땅을 차지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됐다고 한다.

우상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변화 설명을 못한다. 우상은 허망하다. 너희들이 여호와를 믿든, 예수를 믿든, 성령을 믿든 십자가의 변화를 설명 못하면 허망하다. 이것은 나 자신의 생존과 미래 계획을 내가 믿는 것이다. 이것이 우상의 실체다. 

이스라엘의 정체가 점점 더 드러난다.

사사기 6:25
이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비의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세 번째 제목은 우상을 다루는 법
여호와 하나님과 우상.
무와 무가치.
바알 이름과 아세라 이름이 나온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이름과 연결된 실체가 있다고 본다. 실체가 있기에 이름을 붙인다. 실체가 없는데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이름은 허망한 이름이다. 기드온이 살고 있던 당시 사람들이 미디안 이방민족에게 점령을 당했다.

이스라엘을 미디안이 포위했다. 미디안이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긴다. 이스라엘 동네에 바알과 아세라가 만들어져 있다. 이 지배가 실제 상황이다. 홍콩을 실효적으로 홍콩이 지배하는가, 중국이 지배하는가? 중국이 지배한다. 실제상황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알과 아세라를 무가치한 것으로 본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무가치 한 것, 실체 없는 것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천사가 이스라엘에게 이야기한다. 천사가 이것을 기드온에게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서 신발을 벗어라 했다. 땅에서는 여호수아요 그 위에는 하나님의 군대장관이다. 중첩된다. 땅의 일이 다른 차원에서 설명된다. 태양이 멈추는 것은 지상에서는 설명이 안 되지만 하늘에서는 설명이 된다. 땅에 있다고 땅의 사람이 아니라 땅에 있어도 이스라엘은 하늘에 속한 백성임을 집어넣으면 충분히 설명이 된다. 설명이 되는데 왜 이스라엘은 사사시대에 미디안에게 지배를 당하는가? 무엇을 양보했는가? 어떤 점을 양보했는가? 변화를 설명해야 될 터인데 이스라엘은 본인의 생계, 생존, 가진 것만 있으면 다른 차원은 필요 없다. 이미 도움 받았기에 고맙습니다 한 후 자기 것을 챙긴다. 그러면 중복된 하늘의 차원이 떨어져 나간다.

한 달 수입이 이천 오백 만원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한 달 수입이 이천 오백 원 되는 사람이 있다. 둘 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천 오백 원 받는 사람이 간절하겠느냐, 이천 오백만원 받는 사람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겠느냐?

어느 사람이 간절하겠느냐? 없는 사람이 더 간절하다. 넉넉히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간절하지 않다. 신명기 8장에 나온다. 네가 네 힘과 능으로 재산을 얻었다 할 때 필히 우상숭배를 한다. 본인 생각에 넉넉하기에 다른 차원이 더 이상 필요 없다. 하나님의 실체가 내가 여기 살아 있음의 실체로 바뀐 것이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차원을 떼어 내 버렸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실체다. 주변에 이방 나라의 실체와 동급이 된다. 잘 먹고 잘 사는데 하나님을 왜 믿느냐? 이방인과 동급이 된다. 동급이 되면서 내가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고 이유이기에 하나님이 도와주든 아세라, 바알이 도와주든 나만 도와주면 좋게 지낼 용의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내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장난삼아, 진실하게 미디안이 믿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다. 이름을 여호와 하나님, 예수님으로 바꾸어 보라. 이름을 여호와, 예수이지만 실제로는 내 생계를 위한, 절박하거나 다급하지 않는 신, 바로 우상이다.

만나가 그친 시점이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끊어진 것이 절박한가, 광야에서 끊어진 것이 절박한가? 광야가 절박하다. 광야에서는 만나 아니면 먹을 것이 없다. 그 때는 우리의 생존권을 만나를 주신 여호와가 쥐고 계신다. 이스라엘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변화,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에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소설을 쓴다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면서 말을 건넨다 치면 만나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다. 너 만나 먹으니 살 수 있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네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만나 주시는 하나님 없이는 못 산다는 마음을 유지할 것이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는 유지하겠다고 할 것이다.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분인가? 우리가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만나 주시는 하나님 없이는 못 산다.

베드로처럼 모든 사람이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이 약해 보이지 않고 권력의 실체라 믿어질 때, 예수님이 모든 권세보다 세다고 보여질 때 믿지 말라고 해도 믿는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가? 예수님은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 쥐불놀이하는 것처럼 다 튕겨나갔다.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홀로 돌아가셨다. 사도바울은 그 변화를 너희들이 해석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 사도바울의 편지다. 성령 받은 자만이 십자가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우상과의 관계에서 우상은 무가치하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없음이 된다. 왜냐하면 있음은 무가치에 합류된 상태다. 있음을 갖고 우상을 읽을 수 없다. 무가치 하다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무가치하다. 아무리 있음을 해 주어도, 이스라엘을 살려주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있음 자체가 무가치와 동급이기에 있으면 있을수록 바알과 아세라를 섬길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이방민족이 성경에 나오는데. 이방민족을 이해하려면 이방을 떼고 민족으로 보면 된다. 그냥 민족이다. 민족의 속성은 부모가 일하는 이유는 네모다. 부모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 때문인가? 상속하기 위해서다.

자녀 있는 부모가 일하는 보람이 상속하는 것이다. 오늘도 찬바람 부는데 열심히 일한다. 상속하면 자식과 부모사이가 있음에서 있음으로 이어진다. 있음에서 못 벗어나기에 부처가 되었든 예수가 되었든 도와주면 목적에 달성하기에 감사하고 충성하게 된다. 인간은 우상에서, 무가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식이 일하는 이유는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일한다.

이 전체가 혈육이다. 베드로에게 나를 누구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네가 복이 있다고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다. 혈육이 아니면 없음이 되어야 한다. 혈육이 없으면 없음이 된다. 없음의 자리에 천사가 나타난다.

여호수아를 어떻게 읽으렵니까? 이방민족은 있음에서 있음으로 이어진다. 이들과 싸운다면 이방민족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나님 쪽에서 내미는 카드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없음이다. 없음이라는 말은 들쑥날쑥이다. 있음이 붙잡을 수 없는 들쑥날쑥이다. 일방적으로 들어갔다 나갔다하는 것이다. 이것을 붙잡을 수 없다. 이것을 사건이라 한다. 사건이다. 사건을 인간이 어떻게 붙드는가? 바람 같은데. 바람을 어떻게 붙드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은 좋은 분이다. 이스라엘은 오케이, 압니다. 너를 도와주었다. 만나 주었다. 오케 압니다.’ 이것이 아니라 이방 민족과 비교하면서 하나님과 우상이 어떻게 차이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방민족을 붙여 이방민족을 물러나지 않게 한다.

이방민족이 물러나지 않는다. 르우벤 갓 므나셋 반 지파는 목초지가 좋아 자기 맘대로 요단 동편을 차지했다. 자기 자손에게 좋은 것을 상속하기 위함이다. 사람이 상속하는 이유는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게 밝혔다. 사람이 상속하는 이유는 DNA가 불멸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죽어도 DNA는 불멸의 존재로 만들기 위해 계속 자식 번식을 해 나간다. 도킨스의 말도 사실 맞지 않다. 염기서열이다. 분자구조식이다. 원자가 되고 원자는 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 전자는 면적 부피가 없다. 그런데 영향을 준다. 그래서 숫자 1이라 하는데 1도 맞지 않아 스핀을 말한다. 아무것도 실체가 없는데 이것들이 모여 DNA 구성에서 이것들이 모여 육이 되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육이 되었다. 육을 설명 못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육의 원형을 예수님이라 한다. 육은 여기에 있다가 아니라 죄 있는 모습으로 있을 때 육이 된다. 난국에 빠졌다. 난국에 빠진 이유가 우리가 이방민족을 욕하면서 본인이 이방민족의 사고방식에서 못 벗어나기에 이런 설명에 대해 난감하기 짝이 없게 된다. 이스라엘은 이방민족과 혈육에 대해서 대립관계에 있다.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 그런데 겉멋만 이스라엘은 이방민족과의 차이가 전혀 없다. 이스라엘이라 하기에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러면 그 차이는 누가 만드는가? 하나님의 개임으로 이스라엘과 이방인과의 차이를 만든다. 차이를 만들기 위해 다른 차원, 천사의 개입으로 우상이 우상답게 노출된다. 우상이 우상답게 등장해서 이스라엘은 이러해야 하고 이방민족으로 분류가 된다.

사사기 6:27
이에 기드온이 종 열을 데리고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아비의 가족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기드온은 우상을 정면으로 대면했는가, 비대면 했는가? 비대면 했다. 우상은 결코 실체 없는 것이 아니고 실제적이다. 홍콩을 지배하는 중국은 허망한 것이 아니라 군사력을 실제로 가졌다는 말이다. 중국에 있는 지하교인들에게 예수님이 센가? 주님이 센가? 배운 대로는 예수님이 세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국가가 세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 칼, 창, 말도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한다. 생존 보탬을 위해 성경을 보는데 이런 말은 생존에 보탬이 안 된다. 그러니 하나님 저는 안 싸울래요 한다. 기드온이 그 꼴이다. 천사님이여 하기는 하는데 내가 안 싸우는 방법으로 밤에 할께요라고 한다. CCTV 없는 곳에서. 밤에 해도 곧 아침이 된다.

삿 6:27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바알의 단이 훼파되었으며 단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
삿 6:28서로 물어 가로되 이것이 누구의 소위인고 하고 그들이 캐어 물은
후에 가로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삿 6:30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단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기드온이 죽을 위기는 기드온 본인 때문인가, 천사 때문인가? 천사 때문이다. 천사가 와서 시킨대로 했는데 기드온을 잡아 버린다. 우상은 무가치하다. 그런데 천사는 없음이다. 무가치하게 있는 있음에 대해 없음에서 공격, 전쟁한다. 없는 쪽에서 있는 쪽을 공격한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해 냈어야 했다. 이 약속의 땅에서. 약속의 땅이란 만나만 있고 땅은 없는 땅이어야 정상이다. 광야다. 만나만 있고 땅이 없는 땅. 그 때 그 시절, 처음 사랑, 처음 마음을 왜 유지를 못했는가를 따지고 계신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약속의 땅에 만나만 있으면 된다는 분이 예수님이다. 예수님뿐이다. 만나는 말씀이고 말씀대로 산 분은 예수님뿐이다. 나머지 모든 사람은 허망한 우상이다.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성도는 흔쾌히 동의한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렇게 알고 싶었든 나는 누구냐? 예수님과 비교하면서 예수님이 진짜고 모든 만물이 예수님 중심으로 움직이니 나는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무가치한 우상으로 드러날 때 성도는 아주 신이 난다.

주님 취직하게 해 주세요라는 것조차 이래서 안 된다. 굶는데 밥이라도 한 끼, 이것이 기도할 내용이 아니다.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는데 장사되어 아버지 값 한다고 상속해 주려고 했는데 그게 바로 우상이었다는 사실.

무가치함을 숨길 수 없도록 노출시키신다. 없음의 차원에서 볼 때 있음이 허망한 이유는 있게 하는 원바탕에 대해서 우상은 아무런 설명을 해 내지 못한다. 왜 여기 있고 왜 사는지 어디로 가는데 우상은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으니까 있어보자는 식이다.

이제 여러분들이 복음을 들어야 될 이유를 아시겠지요. 나의 민낯, 나의 뒤통수, 내가 아무리 연구해도 모르는 나는 누구냐? 가 여호수아를 통해서 밝혀진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 없이 죽었다. 누구누구 없으면 죽은 것이다. 하나님이 먼저 있고 그 다음 생긴 것이 이스라엘이다.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다. 그분이 있다면 내가 있다. 주님의 십자가 있다면 나는 죄인으로 관계되어 있다. 제대로 있음, 바탕에는 있음, 미래를 아는 있음, 무가치 하지 않다. 우상을 붙여준 이유는 인간이 왜 우상으로 변해 가는지, 왜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는 지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준다. 

기드온이 위기에 빠졌다
사사기 6:31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쟁론하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는 자는
이 아침에 죽음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 단을
훼파하였은즉 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 하니라

바알이 실제로 신이라면 아들에게 찾아온 신은 찾아왔잖아. 그런데 너희에게 바알이 찾아 왔느냐고 묻는다. 너희들은 바알들을 만들었지 바알이 너희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기드온은 하나님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 왔어. 그러니 어느 신이 진짜 신인가? 기드온 아버지가 이렇게 설명한다.

사사기 6:34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

운짐 달았다라는 표현이 좋아요. 움찔되면서 어쩔 줄 모른다. 조급증 갖고 그 땅 약속의 땅에 살아야 된다. 우상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지만 만들어진 신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없는데 찾아오신다. 이것이 사건이다. 사건이 먼저 있고 있음이 된다. 사건이 이스라엘을 만든다. 이 사건이 유월절 사건이다. 유월절 사건이 차이남이다. 유월절 사건은 피 발라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차이남이다.

이 차이를 가지고 성경에서는 거룩이라고 한다. 천국 가는 사람과 지옥 가는 사람의 차이를 계속 유발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보낸다. 어떤 차이가 나는가? 변화를 다른 차원에서 설명이 가능한가? 내가 여기에 사는 삶의 변화를 주님 입장에서 설명이 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 생각하듯이 그렇게 설명하는가를 묻는다.

너는 어떻게 좋은 곳에 취직했는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해서. 이런 답은 이방인들이 다 한다. 십자가와 관계없는데요. 아이고 답답해라.

머리가 좋아서 공부 잘했어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내 취미는 책 읽기에요. 그 바탕을 설명해야 한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만 붙이면 되잖아요. 어떤 경우라도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훌륭하고 하지 않음과 관계없이 그냥 영토가 다르다. 사는 동네가 다르다. 이쪽은 무조건 천국, 저쪽은 무조건 지옥이다. 인간과 인간의 경쟁은 의미 없다. 윤석렬 찍으나 이재명 찍으나 안철수 찍으나 의미 없다. 세상 중에서 내가 대선에 나간 것은 다 주님의 은혜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나요? 없지요. 거룩하지 않다. 차이가 없다.

기드온이 운짐 달아서, 조마조마해서 하나님을 테스트 한다.
사사기 6:37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다른 차원에서 오심을 인정할테니 내 선에서, 있음에서, 나의 무가치선에서 이해되는 식으로 문제를 내가 출제 할테니 그 문제를 맞추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을 내가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양털에만 이슬이 있고 땅은 마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찾아오심을 진짜임을 믿겠다고 한다.

전에 찾아온 것이 존재가 아니라 지나가 버린 사건이기 때문이다. 본인의 존재성을 문제 삼아야 하는데 찾아온 것이 너무 감질나게 찾아오셨기 때문이다. 자기 무너질 생각하지 않고 사건이 너무 갑작스럽게 떠나 버리니 나는 그것이 환상인지 꿈인지 착각인지 주의 일을 어떻게 하는지 혼자 궁시렁 한다. 이게 우상성이다. 주의 일은 주님이 하시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딱 되고 나니 기드온이 자기 무가치로 설명을 못한다.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성은 이스라엘 전부에게 퍼졌다고 봐야 된다. 그 중에 하나가 사사 기드온이다. 기드온마저 하나님을 측정하고 시험하여 자신이 다루어 자신이 무가치하지 않음을 도와 달라고 하니 이 자체가 잘못 되었다.

이제는 더 어려운 문제를 낸다. 솜이니 과학적으로 따지니 물을 흡수하니, 양털을 바짝 마르고 땅은 젖도록 요구한다. 하나님께서 양털에는 이슬이 없고 땅만 젖게 하셨다. 이 말은 이미 우상에서 너희들이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것이 바로 차이남, 사건, 하나님께서 변화를 주시되, 그 결과에 대한 공로자를 인간에게 절대 넘겨주지 않으시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4강 백신

성경에서 땅을 이해하려면 노아 홍수부터 이야기가 제대로 되어야 된다. 노아홍수는 땅 주인이 와서 다 나가라는 것과 똑 같다. 이 땅은 내 것이니 다 나가라. 이 땅을 더럽히는 것을 눈 뜨고 못 보겠다고 하면서 다 나가라 하신다. 홍수로 인하여 다 죽었다. 땅은 인간이 살기 위해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왔는데 하나님께서 그 땅에 관여하니 홍수로 말미암아 땅 위에 사람들이 다 죽었다.

땅은 살 수 없는 곳.
인간은 어디서 살아야 하는가? 땅에서 홍수 나서 다 죽었다면 인간은 어디서 살아야 합니까? 주의 뜻은 살지 말라. 살지 말라는 것이다.

여호수아 1: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이렇게 되어 있다. 그 땅의 주인들이 있는데, 그 땅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이 말은 율법을 모르는 자, 율법을 안 지키는 자들은 살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원래 땅이 갖고 있는 본연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율법을 아는 자로 하여금 율법을 모르는 자를 다 추방하고, 몰살, 학살하라, 어린아이, 여인, 가축까지 다 진멸하라.

집에 쥐가 귀엽다고 살려주느냐? 진멸한다. 쥐는 좀 죽어줘라고 해서 죽인다. 이 땅은 율법이 율법대로 실현되는 곳이기 때문에 율법 모르는 너희들은 죽어 달라는 것이다. 죽이는 전사가 이스라엘이다.

여호수아 1:5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이 싸움을 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싸움을 부추긴다. 죽이라고 하신다. 그러면 신약시대에 이 전쟁이 유효하냐? 가능하냐? 신약시대에는 오지 마. 천국 오지 마. 이것이 신약이다. 살지마 가 아니라 불로 멸망당할 땅에서 살아. 천국에는 오지마. 저리가. 이 전쟁을 하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말씀을 모르기 때문이다.

신명기8:3을 보면 만나를 주었는가? 말씀을 주었는가? 말씀을 주신 것으로 이해해야 된다. 사람이 말씀으로 산다. 말씀으로 살지 않는 자는 죽이고 말씀으로 사는 자가 그 땅을 차지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다.

여호수아 1:7절에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율법을 지키는 방법
율법을 지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내가 먼저 율법 앞에 죽임을 당하면 된다. 율법이 승리하고 나는 율법 앞에서 패배한다. 그러면 내가 거북이처럼 움직이면 거북이 등 껍데기에 율법이 움직인다. 이것이 탱크 아닌가? 말씀 앞에서 난 못 지켜. 십계명 못 지켜. 십계명 걸어 놓은 것은 어떤 주일학교도 못 지킨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목사부터 어린아이까지 아무도 못 지킨다. 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방법은 내가 먼저 율법 앞에서 죽는 것이다. 이것이 백신이다. 백신은 죽은 코로나 균을 집어넣어 코로나 균이 들어왔을 때 ‘내 친구 여기 있네’ 해서 다시 들어오지 않게 하는 것이 백신이다.

어찌되었든 무슨 백신이든 율법에 의해서 먼저 죽은 나를 내가 율법 지켰다고 할 수 없게 만드는 율법의 위력으로 세상에 나간다. 율법의 완성이 십자가다. 십자가에 죽게 된 성도는 십자가를 운반하는 탱크 운전병이다.

마태복음 19장에서 부자청년이 율법을 어릴 때부터 지켰다고 한다. 이렇게 지키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못 지켰다고 하면 영생을 얻는데, 혈우병 걸린 여인이나, 문둥병자, 자진해서 문둥병 걸려도 마땅하다고 이야기한다. 율법을 못 지킨 사람은 율법만 쳐다본다.

실효성 있는 율법이 실제적인가? 아니면 홍콩을 지배하는 중국공산당이 실효적인가? 북한에 성도가 있다면 김정은 정치를 무서워할까요, 무서워하지 않을까요? 김정은 보다 십자가 지신 주님을 더 무서워하면서 행복하게 살 겁니다.

주 예수 계신 곳이 어디든지 하늘나라잖아요. 무슨 신앙의 자유를 찾아오는가? 한국에 무슨 신앙의 자유가 있는가? 여자가 결혼을 하던 남자가 장가를 가든, 시집, 친정 탓 하지 마세요. 모든 것은 본인의 마음이 낮아지지 않아서다. 환경이 우리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주제넘게 자신을 너무 부풀게 이해했기 때문에 환경과 맞지 않는다.

여호수아 1장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율법을 지켜 행하라고 하신다. 율법을 지킨 분은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지키기 때문에 이방민족이 율법이 있는 이스라엘을 이기지 못한다.

여호수아 1:8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가는 길이 아니라 주님의 언약궤가 가는 길이다. 율법의 완성이 가는 길이다. 시공간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공간이 아니라 주님의 시공간으로 다스리는 세계가 점점 가까이 온다.

언약 안에 율법이 들어 있다. 언약이 이동한다. 언약이 이동할 때는 이스라엘의 진행경로를 통해서 언약이 이동하게 되면 언약의 적이 발생한다.

적이 있고 적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진행하게 되면 없든 적이 발생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차원이다.

여호수아 2: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이 내용이 어렵다. 여리고 성의 기생라합이 무슨 뜻인가? 기생라합은 구원자의 원래 모델이다. 인간이 구원받으려면 기생 라합과 같은 절차가 필요하다.

여리고 성에 기생 라합이 살고 있다. 그런데 언약이 시행이 되면 적이 만들어진다. 언약으로 포위하니 갇혀 산다. 갇혀 있으니 구출이 발생한다. 구원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공격해 오지 않았다면 구출이, 구원이 있을 리 없다. 구출, 구원은 곁에 이스라엘이 공격해 왔을 때 가능하다.

막대자석이 그냥 있으면 엔 에스극을 모른다. 엔 극이 왔을 때 반발하면 엔극이 되고 당기면 에스극임을 안다.

혈육대로 평범하게 사는데 복음이, 율법이 들이닥침. 우리가 갇혀 있었다. 여호수아 2: 9-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홍해를 건너오고 요단강을 건너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면서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켰음을 들었다고 한다. 이것을 듣고 여리고 사람들의 간담이 녹았다.

저지할 어떤 세력이 없었다. 홍해, 요단강이 물이 많을 때 건너왔다. 이길 수 없는 이스라엘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하루에 한 바퀴씩 언약궤를 맨 제사장이 앞장서고 나팔을 불며 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언약궤를 저지할 자연도 인간도 없다. 언약궤 진행 방향, 하나님이 가시는 방향을 바꿀 수 없다. 여리고 성에 왔을 때 여리고 사람들은 공포에 싸여 있었다.

두 정탐꾼이 왔을 때 기생라합에게는 그들이 자신을 구원할 구원자이다. 두 정탐꾼이 구원자라 했을 때, 예수님은 구원자로 시작했지만 구원대상이 되었고, 구원 대상이 되었기에 구원자가 되셨다. 예수님은 아기 예수로 오셔서 보호를 받으시고 구원대상이 되셨기에 구원을 받으셨다. 구원대상이 되지 않으면 구원자가 구원할 어떤 소스가 마련되지 않는다. 자신이 친히 구원대상이 되는 것을 경유했기에 구원자는 우리의 어떤 형편도 개의지 않고 구원하실 수 있다. 이럴 경우에 구원못하지요 라는 말을 주님 앞에서 함부로 하지 말라. 주님께서는 인간이 겪을 것을 모든 것을 다 겪으셨기에 어떤 경우라도, 우리 조건이 난감해서 구원 못 받는 경우는 예수님에게 있을 수 없다. 두 정탐꾼이 기생 라합에게 왔을 때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의 일원이기에 이스라엘로 받아들였다.

두 정탐꾼이 기생 라합에게 신세를 진다. 그러면 절차가 만들어진다. 정탐꾼이 여리고 성 안에서 갇혀있는 형국이다. 여리고성을 포위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일원이 여리고성 안에 갇혀 있는 형국이다. 그러면 기생 라합이 구원되기 전에 정탐꾼부터 구원되어야 된다. 정탐꾼이 어떻게 구원되는가? 여기에 도와주는 기생라합이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쪽에만 있는가, 아니면 기생라합에게도 작용하셨을까요? 기생라합에게도 작용하셨다. 기생라합이 두 정탐꾼을 살려주는 절차가 구원절차다. 숨겨주고 창에서 줄로 내려 왔다. 기생 라합이 구원자가 구원받는 자 정탐꾼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 도움 받음. 그러면 구원의 절차는 그들이 빠져나간 이 창에 잘 보이도록 붉은 줄을 내려놓으면 너를 내가 와서 구원하겠다는 것이다.

여리고성이 있다. 밖에 이스라엘이 포위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다. 언약궤는 유명했다. 요단강을 건넜다. 언약궤의 요소가 들어 왔다. 여리고 성은 기생라합이 없다고 치면 정탐꾼들은 빠져 나올 수 없다. 그러면 여리고성은 실효적 권세를 갖고 있다. 그런데 기생라합이 실효적 권세에서 차이나게 정탐꾼을 숨겨주었다. 여기에 출구를 만들었다. 그 출구가 기생 라합이 구원될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된다.

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실 때 예수님 앞에 포위되어 불로써 심판 받아야 된다. 출구가 없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무사히 탈출하는 그 구멍이 바로 천국 가는 좁은 문이 된다. 그야 말로 좁은 문이다. 좁은 문으로 빠져나가심. 그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예수 이름 외에는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구원은 누가 오셔야 되고 빠져 나가셔야 된다.

그런데 기생 라합은 왜 정탐꾼을 도와주었을까요?

여호수아 2:10-11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이것이 기생라합만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여리고성 모두가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다 이렇게 생각했지만 왜 기생라합이 정탐꾼을 살려 주었는가?

그것은 정탐꾼과 밖에 있는 이스라엘과 동일한 하나님이 관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을 도와준다면 홍해를 건너온 하나님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과 접촉할 기회를 기생 라합은 놓치지 않았다. 자신의 것을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음을 알았기에 정탐꾼을 살려줌. 이것이 율법정신이다.

율법을 지키는 정신은 현재 자기가 속해 있는 위치와 여호와의 위치가 분명하게 차이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야고보서 2장에 기생라합은 정탐꾼을 숨기는 순간에 경찰이 들이닥친다. 이럴 때 기생라합이 묻는다.

하나님께서 구원 작업을 하실 때 율법이냐 아니면 평소에 갖고 있는 너의 힘이냐는 계속해서 대조시키면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경찰이 와서 들이닥치면서 정탐꾼 봤는데 어디로 갔느냐고 할 때 기생라합이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이 참말인가 거짓말인가? 거짓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짐이 참말인가 거짓말인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이 거짓말임을 받아들여야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래야 내가 사는 현상이 망상이고 허상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실 때 내가 속한 이 땅에서 멸망당해야 하는 안목을 유지한다면 내가 이 땅에서 진실로 살아간다는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거짓말이 된다. 내가 내 세계를 내가 붙들고 있겠다는 거짓된 모습밖에 안 된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거짓말이 여러분 속에 있는지 수사해 보라. 수사반장이 되어 진실만을 외치는지 거짓말을 찾아다니는지? 나 어찌 거짓말만 좋아하지. 성경이라는 거짓말.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겠다는 것이 무엇인가? 차이남이다. 같은 여리고성에 살면서 기존 여리고성 사람과 차이가 난다. 이스라엘과 여리고성이 차이가 나는만큼. 차이의 발생, 거룩의 발생, 이것이 구원자의 원형, 롤모델이다. 양심대로 살아서 천국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양심은 나를 생존케 하는 힘이기에 위험한 것이고 옳지 않다.

여호수아 2: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유월절 정신의 재현이다. 애굽에 히브리인들이 갇혀있다. 여기에 모세와 아론이 들어온다. 여기서 차이남을 일으킨다. 히브리인들은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애굽 사람들은 피를 바를 이유가 없었다. 애굽을 포위한 천사가 공격할 때 천사는 피만 쳐다본다. 피가 절대기준이다. 이 기준에 어떤 다른 기준을 첨가하거나 빼면 안 된다. 절대 기준만 달랑 남아야 한다. 다른 기준을 필요치 않다.

기준 더하기 양심하면 안 된다. 기존 세계에 눌러 앉겠다는 것이다. 절대 기준만 유지해야 한다. 절대 기준만 유지하면 주님께서 그 기준에 준해서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새로운, 피에 동참한 우리를 구원해준다. 이것이 차이남이다. 히브리인들이 피를 발랐다. 그러면 히브리인들이 피를 발랐을 때 힘이 세졌는가? 스스로 탈출했는가? 뽀빠이처럼 시금치 먹고 힘이 나서 탈출 했는가? 그냥 피만 발랐다. 기생 라합이 대모를 했는가, 시위를 했는가? 그냥 붉은 줄만 창에 내렸다. 피를 보고 천사가 건너가듯이 창에 내려진 붉은 줄을 보고 구원했다. 우리의 유월절 사건을 여리고 안에 재현 시킨 이 놀라운 사건을 보았다. 기생 라합의 가족만을 구원하라. 이 방법이 오고 오는 세대에 이루어진다.

여러분이 주이 할 것은 피 발랐다고 잘난 체하지 말고, 창에 붉은 줄 있다고 동네방네 우리 집에 붉은 줄 있다 하지 마시고 그냥 주님이 와서 데려 가도록 우리가 설치지 말라는 말을 드리는 겁니다. 유난떨지 말고 호들갑 떨지 말고. 절대 기준만 자랑하고 그냥 사세요. 주식을 하든지 땅 투기를 하든지, 그냥 절대 기준만 유지하세요.

기생라합에게는 본인의 의가 없다. 여리고 성은 멸망당하는데, 멸망당할 사람 중 한 사람인데 무슨 자랑할 것이 있는가? 창틀에 붉은 줄만 내려달 뿐이다. 여러분의 모습과 흡사함을 보지요. 우리 살아가는 모습과 똑 같지요. 피만 내세우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는 것. 살면서 가정적으로 경제적으로 힘들 때 딱 한 가지 피만 생각하면 된다. 주님께서 피만 보시고 구원하신다.

아무것도 보지 않으신다. 이것이 바로 유월절의 반복이다.

여호수아 3:1-2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여호수아 3:16
삼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4,5월 달에 요단강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25킬로 상단에서 물이 흘러내리지 않는다. 아래쪽은 물이 빠져버린다. 여기에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열두 지파의 대표들이 함께 동참을 한다. 이 말은 요단강을 건너가야 약속의 땅이 된다. 약속의 땅에서 분배를 받는데 이것이 누구를 통과해서 분배를 받는가? 제사장 안에 요단간이 흐른다고 보면 된다. 비가 제일 많이 올 때의 요단강.

이것은 홍해의 재현이다. 그전에 홍해를 건너온 사람들이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실패했다. 홍해를 건너 왔는데 왜 실패했는가? 홍해 건너 올 때 하나님께 하나님과 함께 건너오지 않고 하나님이 다 만들어준 곳을 건너왔다. 자기 뜻을 유지하면서도 홍해를 건너 올수 있었다. 길 있네. 건너가자. 어렵지 않았다. 고마워 모세. 모세는 지팡이를 물에 대고 있었고.

그런데 요단강을 건널 때는 열두 지파가 참여한다. 약속의 땅과 자신들 사이에서 제사장이 빠지면 안 됨을 안다. 제사장은 언약궤를 모신다.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 열두 지파는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분배받을 수 없다.

요단강은 헤엄 쳐 건널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을 통과했다는 의미가 없는 한 이렇게 들어가 봤자 소용없다. 목적을 달성한다고 해서 의미까지 달성할 수 없다. 약속의 땅이 목적이 아니라 누구 없이는 이 땅을 얻을 수 없음을 장착해야 약속의 의미를 이들이 알 수 있다.

그래서 제대로 비가 많이 올 때 맨 땅으로 만들어 제사장으로 하여금 건너가게 했다.

여호수아 3:12-14
제사장은 요단강을 멈추게 했고 제사장 안에 열두 지파가 몽땅 다 들어 있다고 보시면 된다. 물을 건너갈 수 없는데 하나님과 함께 하시면 죽음의 바다도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 차원에서 설명이 가능하게 된다. 이러하나 저래하나 땅 차지하며 되지가 아니다. 내 안에 누가 계셔야 천국에 갈 수 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셔야 천국 갈 수 있지 주님 빼고 도와 주세요라는 식으로는 천국에 갈수 없다.

그래서 성경 쓰기 한다든지 종교적 감수성을 키우기 위한 철야기도라든지, 간증집회를 좋지 않게 보는 이유가 목적이 우선되기 때문이다. 떼를 쓰고, 애쓰고, 순수하게 하고, 솔직하게 하고, 부족합니다라고 하게 되면 그것이 효과를 주는 줄 생각한다. 기존교회에서 목사가 나올 때 할렐루야 하면서 나오지요. 믿습니까 하면서 나온다. 생뚱맞게 믿습니까? 아멘하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찬송합시다. 이거 미친것도 아니고.

이것은 이미 인간들의 소원은 어떤 미친 짓을 해도 천당만 보내 주세요라는 것이다. 하라는 대로 다할테니. 천국에 가기 전에 천국이 우리 마음을 쑤시고 들어와야 된다.

백신.

먼저 우리가 율법에 죽어야 된다. 우리가 죽어야 율법이 율법대로 살지 나도 살고 율법도 사는 것은 없다. 집안싸움 좋겠다. 율법은 예수님을 가르친다. 우리는 부자 되게 해 주세요라고 한다. 이게 무슨 꼬리진가? 주님은 십자가 피의 절대적 기준을 말하는데 교회 부흥되게 하옵소서. 백신을 맞아도 소용없어. 벌써 돌파했어요.

요단강 건널 때에 열두 지파가 함께 한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할 때. 언약궤, 하나님이 가라할 때만 가야하고 그렇지 않을 땐 가면 안 된다.

잠언20:24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여호와께서 걸음을 인도하시지 자신이 가고 싶다고 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아무 일도 안한다. 너 왜 안 해. 주께서 나에게 계시를 주지 않아서 안하겠다는 것이다. 길은 내가 죽을 때만 나오는 길이다. 내가 죽었다고 치고 ‘주님 내가 뭘 하면 됩니까?’라고 할 때 길이 나온다.
 

혼처 자리가 세군데 나왔다. 직접은 성형외과 의사고 하나는 법원 판사고, 하나는 삼성 주식 많은 사람일 때 세 사람 중에 골라라 하면. 잠언서 20:24절을 동원시키지 말고 내가 어떤 남자라도 내가 죽겠나이다라고 하면 주께서 인도하셔서 판사랑 결혼하게 하셔서 죽을 만큼 고생하게 하신다.

말씀을 적용할 때는 백신을 염두에 두고 피가 묻어 있는 언약궤가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우리가 가는 길은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관리자 22-01-10 21:50
답변  
5강
언약의 변천과정을 보면 노아홍수에서는 물로 사람을 죽인다. 물로 사람을 죽였을 때 노아 식구도 사실상 죽은 것이다. 땅을 떠났기 때문이다. 땅에 살았던 기억을, 땅과 결별했다. 땅에서 방주로 이동했다. 이 방주를 언약이라고 한다. 땅에 사는 것에 익숙한 그들에게 땅에 살지 않고 방주 안에 살게 하여 노아의 이동경로가 언약의 변천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노아는 어떻게 구원받았는가로 이야기할 수 있고, 노아는 죽는데 왜 죽는 자들과 합세해서 그들 가족은 왜 안 죽었지? 어떻게 살았지가 아니다. 죽어야 하는데 그들은 왜 안 죽었지? 그 때 노아가 하는 말은 언약 때문에 내가 안 죽었다. 언약을 언약대로 살리기 위해 나를 이용했다. 언약이 나를 품어주어서 나를 살린 것이 아니라 언약 자체를 살리기 위해 나를 활용했다. 언약의 주인공은 노아가 아니다.

노아가 주인공이라면 땅의 추억과 기억을 보장했을 것이다. 노아마저 떠나게 했다는 것은 노아가 주인공이 아니다. 언약의 주인공은 방주 안에 있는 거룩한 짐승이다. 새나 양이다. 거룩한 짐승이 나중에 언약의 변천과정에서 중간에 끼어든다. 중간에 끼어든 새나 양이 최종상태에서 인물, 사람이 된다.

여기서 멸망당해야 마땅한 이 사람, 시작은 사람 다루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최종인물과 차이 짓는다. 여기 있는 인물과 현재 우리가 포함된 사람과 어떤 차이가 나는가? 로마서 5장에서 첫째 아담에 속해 있고 둘째 아담은 새로운 인물이다. 언약이 보통 인간에서 하나님이 지목한 인간까지 과정에 언약변천과정을 보여준다.

물로써 죽이셨고, 그 다음 피로써 사람을 죽인다. 방주역할을 피가 한다. 노아가 방주 안에서 살았다고 하지 말고 노아는 방주 안에서 죽어야 되는데 안 죽었다는 것처럼 피 안에서, 정결한 피 안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피 안에서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죽어야 하는데 안 죽었다. 죽어야 하는 것이 진실이고 안 죽어야 하는 것은 거짓이다.

인간은 출발을 거짓에서 출발한다.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것을, 내가 살아야 된다는 것을 진실로 여기고 안 죽어야 한다는 것을 거짓으로 여긴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예수님께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진실과 거짓이 어떻게 바뀌는가를 보여준다.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심으로 진실은 거짓이었고 거짓은 진실이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거짓을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너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전해야 한다.

거짓을 진실되게 믿으면 믿음 좋은 것이고 거짓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퇴출당한자다. 노아홍수 전 홍수 온다고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거짓으로 보았다. 거짓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했지만 기생 라합이 내 뱉은 것은 거짓말을 내뱉었고 그 거짓말을 새로운 방주, 안식처로 여겼다. 기쁨으로 스스럼없이 거짓말할 수 있는 이 용기, 이 자유, 거짓을 인정할 줄 아는 자유!

고등학교 졸업 후 복음을 아는 친구와 모르는 친구가 만났다. 어느 쪽이 성공한 사람인가? 취직했는가? 살아야 한다는 진실에 충실한 자다. 다른 한쪽은 고등학교 졸업 후 복음을 들었는데 네가 말하는 것이 다 거짓된데.

주께서 언약의 변천과정에 우리를 그대로 집어넣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주께로 가는 과정을 그대로 복제 해 버린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 나 위주로 살다가 나중에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이끄시는 대로 가는데 까지 다루시는 분이 계신다. 언약의 변천과정을 통해 다루신다.

야구 스탠드 위에 공을 두면 한꺼번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떨어진다. 위치 에너지로 떨어지면 바닥은 안정 상태로 간다. 위로 올라갈수록 들뜸 상태다. 불안정하다. 하나님께서는 속히 안정 상태로 떨어지게 하신다. 십자가다. 인간이 가장 거짓되다고 자부해서 오신 메시야를 죽였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 자기 결정이 옳다고 생각해서 죽였다. 나중에 성령이 와서 너희들의 의, 죄, 심판에 대한 판단이 거짓이었다고 고발한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안정 상태인가 들떠 있는가? 성령 받고 들떠 있는 것을 보면 희한해. 죽어 마땅한 자리가 네 자리야. 안정 상태다. 탄소와 산소가 만나면 산소는 자기의 본자리를 찾아간다. 환원이라고 한다. 탄소는 co2 산화되었다고 한다. 안정을 찾아갈 때 에너지가 방출된다. 이것이 불났다.

불났다는 말은 들뜬 에너지가 밖으로 튀어 나왔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하신다는 것은 다 죽여 버리라는 뜻이다. 품지 말아야 할 에너지를 품고 있으니 밖으로 나오니 불이다.

이 세상은 불바다 되어야 할 이유는 본인이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거짓이 진실로, 진실을 거짓으로 보기 때문이다. 오신 메시야까지 죽였다. 복음은 예수님의 존재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님의 존재해 놓고 성화 그려 비는 것은 갖바위에 비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언약의 에너지로 내속에 들어올 때 복음이다. 살려주는 대로 살아라. 더 살려고 하지 말고.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에너지 레벨이 더 불안해간다. 원자핵이 있고 전자가 있을 때 전자가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의 띠를 이룬다. 공통점이 진멸하라. 다 죽여라. 언약이 개입되면 들뜬 에너지는 진노로 나온다.

여호수아 11:13-15절
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또 불로 하솔을 살랐으며 여호수아가 그 왕들의 모든 성읍과 그 모든 왕을 취하여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여호와의 종 모세의 명한 것과 같이 하였으되 여호수아가 하솔만 불살랐고 산 위에 건축된 성읍들은 이스라엘이
불사르지 아니하였으며


언약의 변천과정에서 진멸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이 여기에 나온다. 왜 진멸해야 하는가? 하나님과 인간과 좋게 지내면 되지 않는가? 왜 하나님이 인간을 과격하게 다루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반발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대해 여호수아 11:20절에 나온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여호수아를 참기름 짜내듯이 짜내면 왜 그렇게 진멸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 가지 않아야 할 자에겐 가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다. 은혜주고 안 주고가 주님 마음이다. 그들로 하여금 저주 받는자 되게 하기 위함이다.

첫째 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야기 한 것은 언약이 말하는 죄악이 무엇이냐? 언약 없이 단독적으로 땅에서 살수 있다는 개별적 의식이 악이다. 언약을 드러내는 표상으로서의 피조물이 아니라 언약이고 뭐고 저리 가라, 나는 내 자체가 주체로써, 실체로써 살겠다고 고집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살겠다는 것이 언약의 적이다.

여호수아에서 언약의 적은 이스라엘 내부에도 있었다. 여리고성 점령후 아간이 등장한다.
여호수아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이스라엘 이름으로 아간을 돌로 쳤다. 외투 한 벌과 금덩어리를 탐을 내고 취한 아간을 돌로 쳤다. 집단이 개인을 쳤다. 집단이 되어야 될, 하나의 언약 밑에 모든 것이 종속되어야 하는데 아간은 종속되기 싫어 빠져나왔다.

돌로 치고 그 위에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다. 여호와께서 격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괴로움의 골짜기라 했다.

일반사람들은 이해가 안 된다. 죽어 마땅함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언약 때문에 겨우 살아남는 것이지, 언약 없이 단독으로 산다는 것은 언약 입장에서는 죽어 마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명한 인물에 비해 우리는 가짜기 때문이다. 가짜가 인간 행세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복음 모르는 것들이 사람 행세하는 것은 가관이다. 백신 맞으세요. 백신 삼차 맞는다고 인간이 되는가? 인간의 어떤 행동도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다.

에너지가 들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은혜를 은혜 값으로 못 돌리니 하나님께서 불로써 다 태워 버리신다. 옛날에는 물로써 멸했다면 앞으로는 불로써 멸한다. 물과 불 가운데서 백성 될 사람을 피로써 뽑아낸다.

여호수아 5장에 할례가 나온다.
언약의 변천과정에서 하나님이 지정한 인물을 따로 있다. 참된 인간은 예수님뿐이다. 우리는 가짜기 때문에 가짜가 진짜를 가리도록 하나님께 허용치 않는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다. 가짜 인간이 인간 행세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멸하신다. 호흡하는 자는 다 죽인다. 제발 죽은 자로 있어라.

여호수아 5장에 할례가 나온다. 할례는 한마디로 차이짐, 차이남이다. 유월절 사건 일어날 때 먼저 조건이 할례 받는 조건으로 유월절 피를 발라야 한다. 할례 받지 않으면 유월절 피 발라도 소용없다. 할례는 제거한다. 생식기 끝, 혈육을 제거한다. 혈육을 제거하면 빈자리가 된다. 그 빈자리에 예수님의 거룩한 피가 그 자리에 삽입해 들어간다. 참 쉽지요. 너무 쉽잖아요.

로마서 11장에 접붙임이 나온다.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에 젖붙임을 받는다. 성령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돌 같은, 완악한 우리 마음에 쑥 들어온다. 하늘의 요소가 땅의 요소 속에 개입된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만 주시하는가? 하나님은 자기의 것이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가를 보신다. 그것 당기니 비엔나 소시지처럼 줄줄이 거기서 구원받는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에 나의 영이 될 수 없다.

나는 개별자다. 성령은 예수님의 개인의 영이기에 공유하는 것이지 독점할 수 없다. 오순절 성령이 올 때 불의 혀같이 오셨다. 죽어 마땅함을 미리 경험하는 자다. 성령 받은 자의 특징은 어떻게 살아요가 아니라 내가 왜 살아 있지, 그 희한하네.

희한한 일이다. 어떻게 내가 매일 살아 있지. 두려움에서 신기함으로, 범사에 감사로 이어진다. 두려움에서, 내가 어떻게 살지? 그런데 내가 왜 살아있지? 신기함. 주의 일에 가담하게 되었다. 감사.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했음을 감사한다. 천국의 특징은 단수에 모든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엮여져 있다. 개인이 있을 수 없다. 우리밖에 없다.


할례,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할례는 제거하는 것이다. 제거할 때 피가 발생된다. 할례 언약은 출애굽기 4장에서 십보라가 아들 할례를 한 후에 모세에게 던지니 모세가 죽었다가 살아났다. 애굽에서 내려가는 모세가 죽었는데, 죽은 모세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대로 가 봐야 죽은 모세요. 이 모세는 언약의 운반체로 애굽에 들어 가야된다. 애굽에는 언약이 없다. 차이남이 거룩이 되기 때문이다. 차이남은 다른 차원에 계신 하나님이 개입할 때 일어난다. 이스라엘을 보라 하늘의 요소가 들어왔잖아요. 추가 되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땅의 것이 거짓이고 죽어 마땅함이 하늘의 요소로 파악된다.

신나는 일이다. 남이 없는 것을 갖고 있는 것이 얼마나 뿌듯한가?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신보라 개그우먼이 이 모든 것을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은혜라고 했다. 보통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데. 진짜 복음을 안다면 제가 왜 이 상을 받아야 됩니까? 신기하여라. 상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나로 하여금 십자가 일에 참여시킴을 아는 것이다. 상 받아서 감사가 아니라 십자가가 유효하게 계속 작동함을 감사하는 것이다.

피가 나면서 죽은 모세는 언약 운반체로 등장한다. 그래서 십보라가 모세에게 당신은 피남편이라고 한다. 당신에게는 할례 언약이 있는 남편이다. 하나님의 차이나는 백성으로 애굽에 들어간다.

할례 행한 사람들이 언약궤를 운반해야 한다.
여호수아 5:2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할례언약은 피를 내는 것이다. 그러면 피는 하나님의 율법이다. 언약이다. 할례언약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의해서 인간의 육적인 것은 제거되었다. 여호수아 1장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을 설명할 때 율법을 지킨다 할 때 미리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로 살면 그 율법은 우리 대행해서 움직이고 우린 그 안에서 율법만 의지하여 따라가게 된다. 냄비가 움직일 때 그 안에 쥐나 고양이가 있다. 드러나는 것은 율법만 드러나고 너의 육은 할례 언약을 통해 없는 것으로 여겨라. 율법이 너를 지배했기 때문에 전쟁할 때 율법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니 진멸이 가능하다. 노아만 살았든 이유가 노아는 언약안, 방주 안에 있기 때문에 죽어야 되는데 살았다.

노아는 자기 집에 산 것이 아니라 방주에서 살았다. 나의 것이 없다. 방주의 주인공도 자신이 아니라 정결한 짐승이었다. 나중에 나와 제사를 드렸다.

할례 언약을 행한다는 것은 율법이 모세를 주장한다, 지배한다, 통치한다, 예속되었다는 관점에서 들어간다. 모세가 들어가 다수가 따라 나온다. 육십만 명. 이러면 모세를 따라 나온 것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따라 나왔다. 모세 죽어도 여호수아가 있으니, 여호수가 죽어도 괜찮다. 사사가 있다. 율법이 언약변천과정에서 인물을 바꾸면서 언약은 새로운 양상을 보인다. 지금은 율법의 완성이 십자가다. 십자가로 완료가 되었기에 어떤 상태에 있든지 드러나는 것은 십자가뿐이기에 율법적 기능을 다할 수 있다.

율법을 가지고 애굽에 들어간다. 애굽의 바로고 마주나온다. 할례 언약은 혈육과 관련되어 있다. 유월절 피를 바르지 않을 때 받는 징벌은 무엇일까? 둘째 아들 죽는다. 첫 딸 죽는다. 집에 개 죽는다. 맏아들을 죽이셨다. 이스라엘도 맏아들이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맏아들은 하나님께 새로운 빈자리로 내어 주어야한다. 새로운 족보노선이 갈라진다.

할례언약의 원형은 아브라함 언약이다. 하늘의 차원과 땅의 차원을 최초로 연결시킨 사람이다. 인간들 쪽에서 자기 이름을 하늘에 닿고자 했다. 하나님께서 차단하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그 준비 과정은 할례 언약이 되어 있다. 할례 언약 다음에 주어지는 것이 할례언약의 완성 인물이 이삭이다.

이삭은 유에서 난 자식이 아니고 약속을 따라 난 자식이다. 로마서 4장에 나온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원할 때, 모든 인간은 나를 닮은 자식을 나의 자식으로 원했다. 그렇게 알고 있다. 하나님도 그렇게 알고 계신다. 알고 계시면서 여기에 하나님께서 변칙을 가하신다.

네가 사랑하는 아들을 내게 받치라. 할례언약을 행세함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네 혈육에서 나오는 이스마엘이 아니다. 할례언약과 동치. 언약구현 인물이 이삭이다. 아브라함에게 구세주는 이삭이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이삭을 죽은데서 살렸기 때문이다. 할례 언약을 입구로 해서 언약 깊숙이 들어간다. 언약의 최종자리까지 들어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란 인간이 공간적으로 좌우로 이동하면서 시간이 지연되기 시작한다. 아무생각 없을 때는 시간 가는지 안 가는지 모른다. 어떤 목표, 계획이 있으면 시간이 초조하게 된다.

이삭은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다. 그전에 이스마엘,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 여호수아 5장에서는 단체로 할례를 받는다. 할례는 개인적이 사항이 아니고 단체적이다. 하나의 할례언약에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들어가서 할례를 행했다. 할례라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지 적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런데 적들에서 이것을 요구한 사람이 있다.

창세기 34:25절에 디나가 강간당했을 때 레위와 시몬이 할례를 요구하여 삼일에 성읍을 엄습하여 죽였다. 할례를 고통을 주어 죽이기 위해. 적들에게는 할례가 용납이 되지 않는다.

야곱이 축복할 때 레위와 시몬에게 벌을 주는데 너희에겐 땅이 없다. 언약 취지를 놓쳤기에 약속의 땅에 살 가치가 없어. 타 지파에 얹혀 얻어먹고 살아라. 언약 위반했을 때 그 다음 언약은 위반을 제대로 보일 수 있는 증거로써 시몬, 레위의 성깔을 사용하신다.

복 받았다. 다만 까불면 맞는구나. 언약을 내 편의 위주로 사용할 수 없다. 성도끼리 주의할 것, 난 십자가 아는데 십자가로 콕콕 찍으려 한다. 십자가는 누굴 이기고 승리하려 함이 아니다. 자기 자존심 챙기는데 십자가 이용하면 안 된다.

할례언약은 제거가 되어 빈자리가 되고 빈자리에 언약이 실린다. 여호수아에서는 언약궤가 실린다. 광야에서는 할례를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호수아 5장에서 할례를 행했다.

여호수아 5:9절에 길갈 지명이 나온다. 굴러갔다. 엄마 김천 지명의 이름이 뭐야? 굴러갔다.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민족은 할례가 없고 이스라엘은 할례가 있어야 하는데, 차이가 나야 하는데 차이가 없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수치다. 그래서 떨어져 나갈 것이 떨어져 나가게 하기 위해 길갈에서 집단적으로 떨어져 나가게 했다.

드디어 빈자리가 있는 이스라엘이 되었다. 하나님의 언약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된 존재가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전쟁에 나가게 된다. 독일 사람들이 유대인을 색출할 때 바지를 내려 확인한다.

여호수아 5: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언약의 변천과저에서 언약과 결부될 때 언약백성이 되고 장차 한 인물, 왕에 예속된 백성이 되는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

이렇게 굴러갔다면, 빈자리에 언약궤가 들어온다면, 아브라함 시대는 멜기세덱의 족보가 들어온다. 이 땅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 멜기세덱에 흡수통합이 되면 이 땅의 아비나 어미를 잊어버려라. 너의 너됨은 부모의 DNA를 받아서 된 것이 아니라 그것 외에 따로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네가 하나님의 백성 됨을 멜기세덱 족보를 통해서 언급된다. 멜기세덱 족보가 결합된 장소고 바로 할례 언약이다.

여호수아 5장에 보면 만나가 그쳤다. 광야시절 끝났다는 말이 아니라 광야시절을 만나 없는 상태에서 지속할 수 있는냐는 묻는 것이다.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곡식을 먹었다. 이스라엘이 있는 한, 할례가 있는 한 유월절은 반복된다. 피를 내는 제사에서 반복된다. 할례언얀은 인간의 몸에서, 제사에서는 제물에서 피가 나온다. 피를 말미암아 진멸당할 쪽과 건짐 받을 자만 건져내는 언약원칙이 나온다.

그러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건진다. 죽었다고 살아나신 주님, 그 사건을 본질로 하는 새로운 종족의 탄생이다.

만나를 그쳤으니 이스라엘이 다시는 만나는 얻지 못한다. 이제부터 만나 없는 광야생활이 시작된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왔다. 하늘나라의 천사장이다. 군대의 종류가 몇 종류인가? 지상에서는 이스라엘, 천상에서는 군대장관이 인솔하는 천사들의 부대, 마하나임. 어느 것이 주력부대인가? 땅인가 하늘인가? 하늘이다.

여호수아 5:15절에 신발을 벗어라고 한다. 여호수아가 거룩하지 않다. 그러니 신발을 벗어라. 거룩은 종속관계다. 개인적으로 거룩은 존재하지 않는다. 빈자리에 거룩이 들어올 때 거룩이 된다. 내가 빈자리 가졌다고 거룩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할례 행했다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할례언약의 완성이 들어와야 거룩하다. 신발을 벗어라.

신발은 군대 장관이 가져간다. 신발은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라는 용도다. 우리가 신발 신는 것이 아니라 신발에 우리가 얹혀사는 식이다. 거룩이 이동하는 경로에 따라 따라와. 그 뒤의 전쟁은 어떻게 되겠는가? 언약을 앞장세우는, 율법을 앞장세우는, 거룩을 앞장세우는 전쟁이다. 할례 없고, 율법 없는 자들과 어떻게 진행되는가?


6강

하나님께서 전쟁할 때 할례 없고 언약 없고 율법 없는 그들과 어떻게 치르는가? 여호수아 7장을 보면 여리고성을 치는 전쟁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을 할례를 행했다. 할례를 행한 자리에 언약궤가 실린다. 할례를 한 입장에서 그냥 언약궤만 앞장세우면서 들이 미는 것이다. 언약궤 들이미는 방식에 대해서는 민수기 10:35-36절에 나온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상자가 무엇인데, 아무것도 아닌 상자가 이동함에 따라 적들이 물러가는가? 궤에 대해서 집중할 때는, 언약에 대해서 집중할 때는 자기 자신에게는 어떤 무기도 없음을 전제로 해야 된다.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없어야 된다. 시편 20:5-7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칼과 힘과 병거를 갖고 본디오 빌라도가 나올 때에,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다. 이렇게 나올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자랑한다. 이것이 말이 안 된다. 공간적 좌표에서 X,Y좌표 어디에 있는가? 실체가 있다는데 어디에 있는가? 주님께서 공중에 떠 있으신가? 미륵보살인가? 칼, 창, 말, 병거는 물체다. 활 모두 사물이다. 사물이란 에너지 집약이다. 장소가 좁으면 에너지 압력이 높아 잘 뚫고 나간다. 스티로폼으로는 때로도 아프지 않다. 단면적이 넓어. 뾰족해야 잘 들어간다. 이것을 민족들이 안다.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긴다. 너무나 구체적이지 않다. 그러니 이방민족이 볼 때 여호와의 이름을 거론하는 자체가 인식의 벽이 생긴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기자가 아니라 교인수로, 헌금 액수로 이기자고 한다. 남을 기죽이자는 식이다.

이것이 왜 잘못되었는가? 헌금액수 교인수로 왜 안 되는가? 세상의 모든 권력은 한쪽이 올라가면 한쪽이 비게 되어 있다. 로또에 담첨되었다는 것은 한쪽이 날렸다. 주식 대박 났으면 한 쪽은 날렸다.

한쪽은 모르다. 돈 벌었으니 기분 좋다. 주식이 울렁울렁 거린다. 오를 때가 되었으니 모두 주식투자하세요. 이것은 인공지능이, 유명수학자가 추천했다. 그때 왕 몰리는 순간 훅 떨어진다. 인간 세계란 희한한 것이 모든 것이 허상인데 사람은 실체로 본다. 실체로 알고 가보니 푹 꺼졌다. 예를 들면 오늘 내말 안 들으면 분명 일 터질거야. 아무리 봐도 일 날일 없다. 그냥 엄포다. 이 추운 날 나가지 말라고 엄포했는데, 아무리 봐도 일 날 일 없어. 후딱 갔다 올게. 일 났다. 마스크를 안 썼다. 아무 일 일어날 것이라는 것에 대응한다고 마스크를 안 썼다. 평소에는 마스크 잘 쓰는데. 일 날 것이라는 말이 일 나게 만들고, 주식 대박 날 것이라는 것이 폭락하게 만든다. 인간은 허상이다. 함부로 덤볐다가 다 같이 허상으로 드러난다.

칼, 창 물질의 무게, 그 무기로 자기를 공격받는 식이다. 기드온 전쟁이다. 사사기 7장이다. 여호와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사물화 된 것이 언약궤다. 여호와의 이름은 언약궤에 있다. 여호와의 이름이 언약궤에 있기에 언약궤를 이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언약궤 가는 곳에 여호와의 이름이 가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말을 안 듣는다. 인간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안 듣고, 기도 안하면 주님께서 기도 응답해 주신다. 그러니 기도하라. 내 기도가 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가를 알게 하기 위해 기도하라.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하라고 압박이 들어온다. 기도했는데 소용이 없다. 처음부터 소용없는 기도를 했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 여호와께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현존이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내가 있으나 마나한 존재일 때, 현존이 떠오른다. 인간은 고집이 있어 하나님은 허상이고 내가 실상이기에 어지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하라고 목 조르면 결국 내가 허상인 것을 자인한다. 이것을 통해 주께서 살아계신 실체로서 활동하신다. 보라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너무나 모호하고 애매하고, 구체적이지 않고 실감나지 않는다. 함께하는 존재는 육하원칙 하에.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

여섯 가지 조건에서 존재가 확인되는데 이것을 거부하시고 계신다. 주님은 어디 계시는가? 내 조건을 아무짝 소용없게 만드는 자리 여기에 계신다.

여호와께서 이미 군대장관을 보내셔서 여호와께서 계시는 땅이다. 이스라엘은 차지해야 전쟁에 이기는 것으로 생각한다. 전쟁의 무기는 언약궤다. 그런데 언약궤로 해도 이스라엘의 인식이 난감하다.

길갈에서 실로, 실로에서 세겜에 멈추어 있다. 북방 쳤을 때 세겜에 안착함. 언약궤 이동여부와 전쟁 승부와 관련이 있는가? 관련 있다.

실제적인 무기는 나팔이다.
사사기 7장에 기드온 전쟁에서 미디안 135000명을 삼백 명이 이긴다. 기드온의 칼이 삼백 명의 나팔수다. 삼백 명이 간 것은 칼 잡고 싸우라는 것이 아니라 나팔 불라고 삼백 명을 모집했다.

이 나팔은 출애굽기 19장에 시내산에서 아무도 올라갈 수 없는 하나님의 산에서 나팔소리가 들린다. 아무도 없는 곳에 누가 계신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나팔을 불었다. 데살로니가 4:16절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 땅에 있는 자들이 휴거하는데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코스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항상 사다리. 헬리콥터의 레펠을 잡으시고 끌고 가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가신 코스 그대로 걸려 들 사람이 걸려든다. 하늘에서 나팔 소리가 들린다. 출애굽기 19:13절
손을 그에게 댐이 없이 그런 자는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거나 살에
쐬어 죽임을 당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


출애굽기 19:18-19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나팔을 불려면 누가 불어야 된다. 하나님께서 나팔소리는 곳에 계시다는 뜻이다. 그 나팔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내려올 때 나팔도 함께 이동한다. 민수기 10:3
두 나팔을 불 때에는 온 회중이 회막 문 앞에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요
하나만 불 때에는 이스라엘 천부장 된 족장들이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며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과 만났다.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가 성립되려면 율법이 체계가 되면서, 하늘 설계가 땅에 내려오면, 하나님께서 그 체계를 따라 땅에 내려오시는데, 회막, 만남의 장소가 된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나는 유일하게 만나는 장소가 회막이다. 그 회막 안쪽에 궁금해서 들어가면, 지성소에 언약궤가 있다.

시내산에 있을 때는 회막 설계도, 언약궤 설계도가 있다. 이 주변에 나팔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회막이 땅에 오면, 길갈, 실로, 세겜으로 옮기면서 주변에 천사들의 군대, 곧 이스라엘로 대체할 때 이 안에 관계가 나팔소리로 소집해야 된다. 제사장이 나팔을 분다는 것은 하나님의 군대여 소집하라. 우리에게 내리는 명령과 지시는 제사장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다. 제사장은 파이프 불과하다.

그러면 언약궤 이동마다 확대된다. 레이다 망이 중부, 남부, 북부로 확대된다. 스텔스도 다 여기에 걸리게 되어 있다. 미리 진멸할 수 있는 증거, 근거를 나팔소리와 함께 찾아낸다. 퍼뜨린다. 민수기에 제사 지낼 때 나팔을 분다. 민수기 10:18절 레위기 25:9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시내산에서 있었든 일을 땅에서 재현하라. 시내산에서 있었든 그 상황이 재현되면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 어떤 자세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했는가? 모세는 어떤 장치에 걸렸기에 감히 하나님과 독대할 수 있었는가를 땅에서 실현시킨다. 그것이 바로 제사다.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어린양의 피가 들어가니 독대가 가능했다. 모세는 물에서 건져냄을 당했다. 어릴 때부터 출생의 비밀이다. 모세를 뒤따라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 운명의 복제다. 그들도 홍해를 건너왔고 요단강을 건너왔다. 육적으로 도저히 건널 수 없는데 그곳을 통과해 왔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람이 통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건너오니 이스라엘이 뒤따라 온 것이다.

홍해를 건널 때 모세가 건너게 했는가, 모세의 지팡이인가? 모세의 지팡이다. 지팡이가 있는데 모세가 있다. 모세는 지팡이 종속적 존재다. 지팡이 없으면 열 가지 재앙, 홍해 가르는 것, 반석에서 물이 나오지 않는다. 지팡이를 자신이 지배한다고 생각했기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모세는 하나님과 만났으면 모세 본인을 증거하면 안 된다. 우리가 우리를 증거하면 안 된다. 나는 하나님과 어떻게 되었는가, 십자가 피로 화해되어 종이 되었다면 십자가를 증거해야지, 십자가 믿는 나를 증거하면 오히려 십자가를 가리는 것이다. 나팔을 불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가능하고 그 성사가 차이남, 거룩한 백성이 된다.

하나님이 이 땅을 진멸할 때 자기 구역 영토에 해당되는 사람은 구원, 구별하여 살려내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 쳐들어가게 한다. 땅 차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 얼마나 유효한가를 실습시킨다.

나팔은 제사장이 언약궤 앞에 모든 사람을 소집할 때 부는 것이 나팔이다.

그런데 사사기에 들어가는 십일조를 내지 않으며 레위인들이 온 곳으로 돌아다닌다. 안 먹히니. 백성들이 땅이 있으니 살만하다. 이방민족들이 사는 방식으로 살고 싶다. 그들이 잘 사는 이유는 왕이 있다. 그러면 우리도 왕이 필요하다.

인간의 왕이 하나님과 인간을 만나게 해 주는가? 인간의 왕이 나팔 잘 부는가? 인간의 왕이 제사 지내는가? 아니다. 인간의 왕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이름, 장차오실 예수님, 예수님의 희생으로 살려 주신다. 하나님의 언약의 현존, 하나님이 여기 계심을 드러내기 위해 이스라엘을 만드셨는데 이스라엘 배부르니 버리고, 아쉬울 때는 부르짖는다.

사사시대 기드온에게 전쟁을 시킨다. 그러면 레위지파는 소용없다. 사사에게는 성신이 추가된다. 성신은 언약의 현존성에 종이 되도록 주는 그러한 능력이다.


언약이 바뀌면 성신도 기존 언약 종속된 성신이 아닌 바뀐 성신이 주어진다. 골리앗을 사울이 이기지 못했다. 사울이 왕이 될 때 성신이 임했다. 사울이 왕이 될 때 성신이 임했지만 골리앗을 이기지 못했다. 골리앗을 이길 때는 다윗이 등장한다. 사울에게는 악신이 다윗에게 성신이 온다. 언약의 이동에 따라.

성령은 무엇이냐? 이미 최종 확정되었다. 더 이상 새로운 언약이 없다. 십자가로 고정되었다. 구약에서는 언약이 이동적이다. 트럭을 운전해 전달해야지. 언약은 십자가로 완성될 때까지 이동 중이기에 성신은 그때그때 달라요.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고 없어진다.

구약 때 언약은 율법, 율법이 완성하기 전에 율법적 작용에 따라 성신이 주어진다. 성령은 이미 율법이 완성되었다. 완성된 상태에서 성령이 온다. 성령 받은 사람은 율법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수시합격후 수능칠 필요 있는가? 칠 필요 없다. 합격했잖아요. 왜 치는가? 실력 자랑하려고. 사람은 성령을 성신으로 이해한다. 시험 치면서 도와 달라고 한다.

율법이 완성되었기에 너는 개고, 안개고, 쥐뿔도 아무것도 아님이 확정되었다. 시험쳐봐야 빵점의 연속이다. 십계명 지킬 수 없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율법 못 지키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못함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가리지 않는다.

지키면, 노동에 관심을 갖는다. 나의 노동을 검토하고 측정하게 되어 있다. 측정이란 사물이 멈추었을 때 나오는 것이다. 붙잡아서 측정한다. 시속 50인데 90이다. 경찰 차 앞에 멈추었는데, 지금 속도가 0인데, 그렇게 말하면 카메라 찍힌 순간을 볼까요? 당신 90나왔네. 그 때는 그때고 지금은 0인데 왜 벌금을 내라고 하는가? 그때는 맞는데 지금은 아니잖아요.

변화에 대해서 인간이 해석할 능력이 없다. 인간이 자아를 생각할 때 자기를 멈추고 측정하기에 틀렸다. 내가 나를 측정하는 것은 모조리 인정받지 못하는 오답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답에 휘둘린다. 그 이유는 타인의 시선 때문이다. 타인이 나를 멈추어 측정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에 타인의 욕망이 들어있다. 너는 우리 가문의 영광이다. 타인의 욕망에 맞추어 준다고 하니 나도 선악체제로 측정을 하니 선악체제를 못 버린다.

성령이 임한 이방인들이 의인이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꼬장들, 유대인들이 화를 낸다. 이방인이 뭔데 율법을 쓰레기 취급해. 이것 때문에 화가 났다. 그래서 나는 율법도 지켜봤고 성령도 받은 사람이 등장한다. 사도바울이다. 서울대학교도 나왔고 하버드도 나왔고 최재천 교수. 사도바울은 율법도 지켰봤고, 성령도 받았다. 그런데 저쪽은, 꼬장은 성령을 받아보지 못했다. 그러니 성령을 모독했다고 화를 낸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누구에게 화를 내는가? 자기 선배격인 베드로에게 화를 낸다. 아직도 할례언약이 십자가로 완성된 것을 모르는가? 의를 드러내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 이미 성령을 받아 의인 되었다. 의인되었는데 왜 수능을 치게 하는가? 왜 그런 시선으로 이방인들을 비난하는가? 복음이란 어떤 누구로부터 비난받는 것이 깨끗하게 청산된 것이 복음이다. 아무도 너를 정죄하지 말라. 왜 나 자신이 나를 정죄하는가? 타인이 신자인가? 남의 장단에 맞춘다고 주님이 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모독하고 있다.

성령 받아 놓고 성신 받은 자처럼 살지 말라. 성령 받았는데 율법 지키려고 하지 말라. 율법은 누가 지키는가? 율법 지키라고 다른 한 분을 따로 세웠다. 이분 외에는 율법 지켰다는 소리 하지 말라. 그분 오셔서 모든 율법을 자기 것을 수거해도 주님이 다 지켰다. 우린 그분의 공로를 믿습니다. 이 말은 내 공로는 없다. 도려낸다. 성령이 오면 주님의 공로가 나의 성과와 공로를 날마다 도려낸다. 가위로. 또또 자랑거리 있으면 또 도려낸다. 남들이 네 신자인가?  난 불신자다. 그녀는 내 여자다고 왜 말을 못하는가? 왜 우리는 진실에 대해서 화끈하게 못하는가? 그 이유는 어릴 때부터 타인의 안목과 시선에 놀아났기 때문이다. 세상과의 화해하기 위해서다.

화해는 이성적 조치가 아니다. 주님의 비극적이 사태, 십자가를 받는 것이 화해다. 타인과 좋게 지는 관계는 사람을 이용하는 관계다. 모든 인간의 만남은 폭력적이다. 가다가 건드리고, 오면서 건드리고.

2학년 2반 친구가 한마디만 했으면 되는데. 네가 날 알아. 몰라. 그러면 안 건드리는데. 참아야 하느니라. 뭘 참아. 인간은 만나면 좋은 친구가 아니라 모든 만남은 폭력적이다.

기드온 전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기드온 전쟁에서 주님께서 이만 이천 명이 왔을 때 어떤 절차를 보여준다. 삼백 명 될 때까지 과정을 보여준다. 기드온은 약간의 걱정을 없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상대가 십만 명이 넘으니,

기원전 6000년부터, 아라랏산, 흑해근처 아리아 유목민이 1700년 경 인도 점령할 때 마차를 갖고 점령했고, 이집트도 마차로 점령했다. 무기가 얼마나 발달했는가? 그러면 이 전쟁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레위인들은 기대할 것이 없고. 기드온에게 성신이 왔다. 성신이 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앞에 소집한다. 하나님의 군대장관등 모든 보이지 않는 군대들은 기드온에게 집중한다. 하나님의 적은 둘이다. 하나는 미디안 135000도 적이고 이스라엘도 적이다.



주님이 들어오면서 이스라엘다운 이스라엘과 이방민족, 거짓된 이스라엘이 갈라진다. 

이미 시간적으로 차이가 없는 하나님의 군대장관과 마하나임. 나팔을 부니 미디안 군대가 자신들의 칼과 창에 찔려죽었다. 이스라엘 군대 삼백 명에게는 칼이 없다. 기드온은 칼이 없고 여호와도 칼이 없다. 칼이 없는 여호와가 적들을 칼에 찔려 죽는 방법이 무엇인가? 본인들을 미치게 만든다. 적을 분간 못하게 혼란에 빠뜨린다. 내가 가진 주식, 돈, 부동산이 나를 지옥으로 보낸다. 내가 가졌다, 채웠다는 것으로 타인을 찌르려고 한 것이, 이기려고 한 그것이 자신을 파멸로 보낸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여러분 가운데 재산 3500억 이상 되는 사람이 있는가?

부자가 천국가기 어렵다는 말을 현장에서 제자들이 들었다. 모든 인간은 천국 못 간다고 이해했다. 모든 사람들이 부자 되기를 원한다. 부자가 못 가면 부자 되려는 사람도 못간다.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 이제는 하나님이 나설때다. 하나님이 건지면 구원이 된다. 하늘의 요소가 지상에 십자가로, 성령을 통해서 하늘의 요소를 주셔서 구원하셨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거꾸로 올라간다. 부자도 당당하게 천국 간다. 엽기적 그녀 영화를 보면 고등학교 졸업 후 술집에 들어갈 때 당당하게 들어간다.

부자인데 당당하게 천국에 들어간다.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부자가 자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돈이 있음이 다 이루었다 함이 아니다. 재산 있음이 다 이루었다함이 아니다.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타인이 욕망에 관심 있기에 나 부자다. 하나님과 인간 만남의 관계를 가능하게 했던 체제를 누락시킨다. 체제에 이바지 하고 종속되어 하는데 나 따로 칼, 총, 재산, 부동산 가지고 나 이렇다, 나 건들지 말라가 되면 그 가진 것이 자기를 파멸시키는 이 방법이 진멸의 원칙이다.

나팔이라는 것은 내 백성 다 모이라고 소집하는 것이다. 나팔 부는 장소는 모세가 하나님과 만난 장소, 그 체제에서, 하나님의 언약궤와 성막 설계도가 있는 자리, 모세 언약, 율법, 제사법이다.

제사장이 나팔을 분다. 여호수아가 불지 않는다. 여호수아는 사라질 존재다. 모세율법이 있는 한 제사장은 있다. 제사장이 있다는 것은 나타난 왕이 필요치 않고 왕이 없음을 감사하는 체제가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알려준다.

무기란 인간 대 인간이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싸움이다. 싸우는 이유는 내 백성만 남기도 나머지는 진멸한다.

여호수아 11:20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이다.
관리자 22-01-10 21:51
답변  
7강
무엇을 믿을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계속해서 티걱티걱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호수아 1장부터 율법, 언약의 주도적인 인도와 이끄심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살 것인냐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는 철저하게 용납하지 않았다. 율법의 현존, 언약의 살아 있음을 믿으라.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땅에 거주하기인가? 아니면 언약에 거주하기인가? 땅에 거주한다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언약에 거주한다는 것은 무엇을 믿을 것인가?

전쟁 중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에 거주하는 자들이고, 무엇을 믿을 것인가는 광야를 통해, 죽음과 실패를 보았기에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위해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고 생각해 왔다. 이스라엘에게는 무엇에 거주하기와 어떻게 살 것인가가 없다.

언약 백성만 살면 되는데 여호수아 9장에 들어가면 기브온 사람들이 등장한다. 기브온 족속이 등장해서 이스라엘에게 없다고 생각했든 어떻게 살 것인가의 요소가 언약만이 지배해야 하는 땅에 이스라엘을 속이면서 쑥 들어왔다. 어떻게 살것인가? 어떻게 거주할 것인가? 기브온 족속들이 그전에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처참하게 무너뜨리니 기브온, 히위족속에 속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야, 전쟁의 신이라고 평가했다. 전투력 하나는 끝내준다. 우리가 알아서 기어야지 덤비다가는 망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스라엘 앞에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가 이 땅에 해야 이 땅에서 살 것인가? 적들이 너무 세다. 홍해, 요단강 통과했고 여리고성 무너뜨리고 아이성 작살냈다. 그러니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표면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한다. 그래서 그들은 위장술을 펼쳐 자신들은 먼 곳에서 왔다고 거짓말하여 위장 항복을 했다.

가나안 전쟁과 전혀 무관한 족속인데 원치 않는데 말려들었다는 식으로 우리는 여호수아의 종이라고 약속의 땅에 쑥 들어왔다. 여기에 이스라엘이 속아 넘어갔다.

출 34:15-17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며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너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지니라

맹세하지 말라고 분명히 했다. 이 말씀을 들을 때는 그럴 리는 없다고 대답한다. 우리가 의지할 때는 하나님밖에 없고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 이런 처지에서 다른 민족과 언약을 세우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럴 리가 없다. 언약을 세우는 백성으로만 존재합니다고 자부하고 싶지만, 언약을 전개하는 이 과정 속에서 그냥 믿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선택과 결정이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냥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며 하나님을 믿고 살면 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단출하게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 그래 네 의견이 어떠냐고 훅 들어오신다. 그러면 우리는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한다. 하나님은 믿는 것을 인정하는데 이럴 경우 네 생각이 어떠냐고 훅 들어올 때, 예상 못한 상황이 벌어질 때, 하나님 주신 것을 받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믿으려고 준비해도 내가 선택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믿겠다는데 하나님과 괴리될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을 의도적으로 조장하시나. 잘 믿겠다는데, 목숨 받쳐 믿겠다는데 네 목숨 잘못 받쳤다고 할 때 그 결과 어떻게 처신하겠는가?

여호수아 할 때 이상한 일은 신나게 승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고 찬미하고, 파티 열고 끝날 문제인데, 왜 이질적인 요소, 출애굽기 34장에 위반되는 이방민족이 정당함을 갖고 들어오는가? 고난도 없는 비언약적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사는 일을 획책하시는가? 이런 일을 허용하시는가?

의문점을 가질 수 않을 수 없다. 여호수아 신나게 해석하다가 기브온 사건에 걸린다. 잘하겠다는데 왜 이물질이 끼었는가? 이스라엘이 기브온을 죽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기브온이 속였다. 이 동네가 아니라 먼 동네에 왔기에 이스라엘의 대적이 아니라고 한다. 오랜 여행 가운데나 볼 수 있는 곰팡이를 보이면서 먼 곳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런 우리가 당신의 적인가? 아닐 것이다라는 의견이 나온다.

여호수아가 이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니 대적하지 말자고 한다. 그러자 기브온 쪽에서 말로 떼우지 말고 서류로 작성해 달라고 한다. 실제로 이스라엘 당신들이 가장 신봉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해서 우리를 다시는 해치지 않겠다고 우리와 맹세해 주시고, 모든 족장들에게 이야기 해 달라고 한다. 족장들도 여호수아의 말을 들은 후 살려 두자고 한다. 족장까지 다 속아 넘어갔다. 속이는 자를 누가 이기는가?

알고 보니 기브온 사람들 히위족속은 정복 리스트에 들어 있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하나?왜 하나님께서 난처한 상황을 의도적으로 일으켜서 이스라엘만이 살아야 될 땅에 이방민족이 섞여 사는 결과를 왜 낳습니까? 궁금하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할 때 믿음 자체를 주님께서는 둘로 나누셨다.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할 때 믿음을 확장 시킨다. 너를 믿지 말라. 너를 믿지 말라는 내용이 새끼 쳤다. 내가 믿습니다라는 말은 주님의 믿음이 아니라 나의 신념이 된다. 하나님을 믿는 나에 대한 믿음, 이것은 신념이다. 이 세상에서는 구분이 안 되지만 주님 나라에서는 구분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을 이야기 하지만 아브라함을 이스마엘을 낳는다. 분명히 야곱과 에서 가운데서 장자가 야곱이 되어야 하지만, 이삭은 에서를 장자로 세우려고 할 때 야곱은 형을, 아버지를 속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훅 들어온다. 그때 아버지 이삭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균열이 일어나야 한다. 균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내 신념이 쪼가리 나지 않으면 신앙이 아니다. 믿습니다 할 때 하나님 믿는 나를 믿는 것을 동반했음을 놓치기 쉽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사대성자중의 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너를 믿지 말라는 것이다. 너를 의심하라. 너를 의심의 대상으로 믿는 믿음을 하나님 믿음에 집어넣어라. 합체해라. 나를 의심하는 데는 네가 어떤 흔들림이 없어야 된다. 그래서 내가 제거 대상이 된다.

하나님께서 기브온 족속을 주는 것은 이스라엘도 언제든지 제거대상임을 기브온을 집어넣음으로 약속의 땅에 정착한 것이 하나님의 일이 마무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약의 끝이 아니라 중간과정에 불과하다.

여호수아 7장에서 아이성을 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관성의 법칙을 사용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셔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다. 나팔을 불 때 내외벽이 모두 무너졌다. 그러면 이 추진력으로 그냥 가는 거야. 여리고 성이 강하고 견고한 성이었는데 무너뜨렸으니 아이성은 작으니 아이성은 그 추진력으로 밀어붙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니 여리고성 점령할 때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는 것을 파생시킨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은 우리와 동업자 정도로 생각했다. 하나님 믿습니다라고 하면 대견스럽고 동업자 자질이 좋고 태도가 양호하다고 스스로 믿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믿었다. 결과를 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무너졌으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동업자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이 빠뜨린 것이 있다.

여호수아 6:2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붙이시니라는 뜻은 빈 쇠꼬챙이만 들고 있으면 닭고기, 어묵, 햄도 끼어주신다. 우린 딴청 피우고 있는데, 줄줄이 다 끼워져 있다. 변화가 일어났다. 빈 쇠꼬챙이에 무언가가 채워질 때,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누굽니까? 왜 나에게 붙였습니까라는 질문을 내가 했다를 대신해서 다른 분에게 질문을 해야 된다. 여리고 성 함락은 우리가 새삼스럽게 질문할 분이 따로 계신다는 것이다. 내 선에서 이 결과를 가져올 일이 없었습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내가 강의 시간에 졸고 있는 것이 내 뜻이 아닙니다. 내 선에서 설명할 수 없다. 내 쪽에서 설명할 수 없을 때 나는 나를 평소에 나를 의심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한결같습니다. 이것을 네 자로 하면 ‘붙이시매’ 이다. 이것을 붙이시는 전쟁이다. 여호와 전쟁은 붙이시는 전쟁이다. 가기만 하면 자석에 철이 붙듯이 떡떡 붙는다

고린도전서 15:8절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내가 구원받은 것은 주님 오셔서 사울을 주님께 붙이셨다. 너 이제부터 사도야. 그 순간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이 자기 믿는 믿음 안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함되었다. 나는 불신자라는 내용이 내가 믿어야 되는 내용 속에 합류된 기쁨, 나는 불신자라는 것, 내가 쏟아내는 것은 더러운 배설물에 지나지 않음을 사도바울은 고백하게 된다. 배설물과 주께서 행하심이 같이 결합이 될 때 믿을 내용이 완성된다. 참 쉽지요. 나를 의심하면 된다.

식사기도 할 때 믿음의 내용을 확장하면, 귀한 양식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되면 내가 밥 먹기 위해서 주님을 이용했다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이여 저는 이것을 먹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것을 먹는 것은 제 자격이 없습니다. 허겁지겁 먹는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괴리현상을 일어나게 하셨다.

그런데 7장에 넘어가면 관성의 법칙, 습관의 법칙이다. 한번 인정받았으니 계속 인정받을 것이라는 교만을 떨었다. 여호와께 묻지 않고 믿고 쳐들어갔는데 패배했다.

그 이유가 여호수아 7:12절에 나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는 말은 너 자신도 하나님께 다 바친 물건과 동급이다.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스스로 취소할 수 없다는 원칙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물건에 대해서 함께 바친 것이 되어야 된다. 붙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쟁 승리의 전리품으로 하나님의 공로만 영광 돌리기 위해 전리품을 모을 때 자기도 놓아라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도 놓아라는 말이다.

그런데 귤이 먹도 쉽다고 귤을 가져가면 네가 하나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네 자리로 돌아가라. 너는 바치운 자다. 내가 귤 좋다고 내가 해 버리면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었다가 되니 믿음의 내용에서 자신을 의심하라, 믿지 마라가 빠진 것이 되니 탈락이다. 생명책에서 탈락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마치 형사가 도박장에 급습해서 도박현장에서 열 명을 잡았는데 아홉 명은 인정하는데 열 번째 도박하는 사람이 형사님 제가 제보해서 승진하셔야지요. 제가 협조 안했으면 건수 못 올렸다고 하면 너도 수사 대상이야. 네 자리에 가.

아이성을 정복할 자격은 이스라엘에게 없다. 여리고성이 하나님의 전리품이라면, 기생라합이 전리품이라면, 이스라엘도 전리품으로 유지되어야 된다. 주님의 공로로만 구원되어야 된다. 우리 물건 훔치지 않았다고 할 때 아간이 그 짓을 했다.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망령되이 행했다. 아간을 돌로 치고 불사르고 돌무더기를 만들었다.

아이성 점령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한 것이 매복 작전이었다. 여호수아 8:7절
너희는 매복한 곳에서 일어나서 그 성읍을 점령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에 붙이시리라

구원받은 자나 받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도구에 불과하다. 28절에 이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불살라 그것으로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황폐하였으며
불사르고 영원한 무더기로 만든 것은 아간에게 한 조치와 똑 같이 했다. 이스라엘 속에 아이성 요소가 있다면 이스라엘 속에 이방 요소를 끄집어내고, 이방요소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이방민족을 심판할, 붙이시는 전쟁에 흠집이 나지 않는 전쟁을 벌이셨다. 처참하게 하셨다.

8:29절에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질 때에 명하여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

아간의 돌무더기가 있듯이 아이성 왕의 돌무더기가 있다.

여호수아 8:30절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여리고 지나 아이성 이기고 에발산에 도착했을 때 해야 할 일을 이미 신명기 27:13-15절에서 말씀하셨다.
에서 미리 다 이야기 했고 그 때 가서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단을 쌓는데 에발산 밑에 단을 쌓는다. 단이 두 개가 아니다. 언약궤가 둘이 될 수 없다. 그리심 산은 축복 산이고 에발산은 저주 산이다. 어느 쪽에 제단을 쌓는 것이 복을 받을 수 있는가? 단이 저주 산에 있을 때 축복의 미사일을 흠뻑 받을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할 때, 주님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죄인의 자리에 들어설 때 안보이는 천국, 영생이 보인다. 한껏 저주스러울 때, 내가 죄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정하신 저주의 자리, 나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그 행복한 자리, 그 기쁨의 자리다.

사람이 자기를 의심하는 것이 왜 기쁜가?  자아가 자기를 믿기에 나가 둘로 갈라져 두 어르신을 다 모실 수 없다. 인간은 내가 이상적인 자아, 이상자아를 내가 달성할 수 없어서 사회에, 세상에 나간다. 가정에서 꿈꾸는 것을 이루기 위해 서울로 올라간다. 사회에서 내가 되고 싶은 나의 이상 자아 말고 나의 자아이상을 꿈꾼다. 나는 스스로 갭을 느끼고 결핍을 느끼기에 세상에 나가 내 꿈을 이루리라. 서울, 경기도에 가면 내 꿈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할 때, 꿈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양보하고 자아 이상을 파괴해야 하는가? 그만큼 상처가 더 깊다. 이런 결핍 때문에 사는 것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자기 욕망을 좁힐 수 없으니 아무리 밥 먹고 살아도 사는 게 비참하게 느낀다.

여기서 나오는 적절한 예는 존재의 이유 가요다.

내가 굳이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김종환이라는 작곡가. 내가 왜 이리 사는 거야. 이것말도 다른 대안이 없는 거야 하나밖에 없는 인생인데, 왜 이래 구질구질해. 왜 나의 인생이 이렇게 되었어. 촌에서는 잘나갔는데 서울 와서 이게 뭐야.

점점 더 자기를 감추고, 숨어들어가고, 음지로 들어가고, 남 눈에 띠지 않으려고 하고, 전화도 끄고, 나 찾지 말라하고 나 성공할 때까지는 가족도 멀리한다. 내부적으로 행복한 것이 아니다. 자아 속에 도피 생활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이 만들어낸 죄고 저주다.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저주가 아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저주는 율법아래서 누구나 축복 산에 설 자격이 없다. 하나님과 함께 하고 싶으면 축복산과 저주 산에서 어디에 앉아 있는가를 참여하면 된다. 제가 바로 죄인입니다. 저주받아 합당한 사람입니다. 참여하면 어떤 미사일이 날아와도 전부다 축복이다. 여기서 범사에 감사한다.

이런 논리라면 축복 산에 있는 사람은 손해가 아니냐고 할 것이다. 상대에게 축복을 날렸지만 자신들은 온 몸으로 저주를 받게 되는 손해라고 생각할 것이다. 제단은 저쪽에 있기에 저주를 거쳐서 보기 때문에 이미 축복받은 상태에서 그 까짓것 저주받아도 제단에서 이미 해결했음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어느 쪽에 서더라도 이스라엘은 말씀 안에 있다는 자체가 축복이다. 쓸데없이 걱정할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나 자체도 전리품이다

신명기 27장의 에발산과 그리심 산에 대한 예언에 의하면 율법은 늘, 항상 살아있다. 그것을 인정하기 위해서 공중에 축복과 저주가 날아다닌다. 이 상황이 주님과 함께 있는 상황이다. 내가 원하는 복 달라는 것이 아니라 축복과 저주의 율법이 계속 튀어나온다. 그러면 나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나는 저주의 제단과 함께 한다. 제단에서 제물이, 어린양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 저주의 피를 내고 홀라당 다 태워진다. 있음에서 제물이 없음이 되면서 잉여 에너지, 여분의 에너지인 용서가 나온다. 언약이 나온다.

양이 있다가 죽어 없어진다. 제물 안에 내장된 하나님의 약속이 축복으로 나온다. 이런 공식이 제단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 제단에 여호와의 이름이 있다. 하나님께서 지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본인 자신이 지시 대상으로 합류하신다. 그분이 바로 나중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다. 본인이 출제한 문제를 본인을 정답으로 주셨다. 예수님을 만나야 출제경향도 알고 정답도 미리 다 안다. 우리는 그 정답노선에서 이미 의롭게 되었다. 수학정석이라는 책에서 수학문제보고 끝에 있는 답보고 문제보고 답보고 하는 식이다. 자신이 풀려고 끙끙거려봐야 자기 신념이다.

문제를 알고 저주를 받든지 복을 받든지 중요한 것은 언약이 살아 있다, 말씀이 살아있다는 용도로 살면 된다.

여호수아 8:34
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그리고 9장에 기브온 거민 이야기가 나온다. 기브온 거민이 왜 위장으로 속이면서 들어왔는가? 이스라엘의 전투력을 뛰어난 국가의 전투력으로 생각했지 붙여주는 전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살고보자. 비언약적 요소다. 이스라엘은 말씀 중심이다. 기브온은 목숨 붙여 살면 그만이다. 그러니 비언약이 예루살렘에서 멀지도 않는 곳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미 여호수아가 맹세를 했다. 맹세 후 비로소 기브온이 자기 정체를 드러낸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언급하는 것은 왜 너희들은 나에게 묻지 않았느냐고 하신다. 왜 경솔하게 네 마음대로 약조했느냐?

우리가 하나님 편에 합세해서 여호수아를 나무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왜 너는 내 지시도 안 받고 기브온 사람을 받아들였느냐? 우리가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있느냐? 주님께서 네가 왜 그 자리에 있느냐고 하실 것이다.

여호수아는 앞일에 대해 예측하고 정답을 내릴 자격이 전혀 없다. 닥쳤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 내에서 새로운 사태 내에서 어떻게 하든 결정과 선택이 인간의 한계다. 그 한계가 이스라엘 내부의 한계로서 쑥 들어왔다. 깔끔하게 우리편끼리 살면 좋은데 인간의 한계를 의도적으로 집어 넣으셨다.

여호수아 9:14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묻지 않고 언약을 맺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사람이 뒤늦게 지적할 때 사람들은 그 때 물을 걸 한다. 인간이 물어서 이것을 대체할 수 없다. 모든 사항은 지나간 뒤에 해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우리 존재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은 내가 제대로 여호와께 물었고 기도해서 공로로 존재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헛발질이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헛발질이다. 헛발질 했는데 결과가 나왔다면 우리 존재를 더럽게 봐야 한다. 결과가 깨끗하게 나왔다면 하나님의 복음적인 효과와 능력이 개입되어 결과가 나왔다. 결과에 대해 후회하거나 반성하지 말고 감사하면 된다.  세상에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한 달 수입이 2500원이다. 아침저녁 라면 끓어먹으면 없다. 그런데 범사에 감사하면 된다. 그때 물어 봤으면 250,000원 받을 것이라는 후회를 하지 말라. 후회해도 소용없다. 하나님은 우리와 의논한 적이 없다. 하나님의 도와주심만 부각된다. 너 참 의논 잘하네, 네 알아서 잘하네 가 없다.
 
여호수아 9:22
여호수아가 그들을 불러다가 일러 가로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
거주하거늘 어찌하여 우리는 너희에게서 심히 멀다 하여 우리를
속였느냐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가 되리라

인간 쪽에서 대책한 결론이 이것뿐이다. 만일 맹세 자체를 위반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34:15-16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며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이 본문을 보면서 만약 만일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맞는데, 우리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속여서 맹세했다면 그 때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는 후속조치가 출애굽기 34장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 말라만 나오지 상대가 모르게 했을 때 어떤 조치를 취하라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이 말은 곧 너는 원래 말씀 위반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너는 항상 율법을 어기게 되어 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지킨 것이 없다. 우리는 구별할 자격도 없고 항상 뒷북친다. 이제 죄, 이게 문제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웃고 있다.

실수는 우리가 하고 구원은 우리가 받는다. 이런 이상한 상황에 속한다. 율법의 완성이 우리 가운데 작용하기에 우리를 항상 실수하는 자로 우리를 다루신다. 어찌 감사하고 기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이런 현실에 대해서.

기브온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끼어들게 되었다.
여호수아 9:24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 모든 거민을
당신들의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을 인하여 우리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하였나이다

이들이 언약을 알아서가 아니라 살 궁리로 이스라엘 가운데 박혀 있다는 말은 기브온 사람들의 본성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 언약하지만 속셈을 보면 약속의 땅이 좋아 하나님의 언약보다는 우리가 살고 싶은 것이 우선이었다는 것이 나중에 폭로된다. 언약에 거주할 것인가? 땅에 거주할 것인가? 예수님이 좋으냐? 부동산이 좋으냐? 예수 안 믿고 십년 더 살래? 예수 믿고 지금 죽을래? 이건 본성적으로 툭 나온다. 이질성이 들어왔지만 이질성이 우리 가운데 내장되어 있다. 계륵처럼 이스라엘 내부에 있다.




8강
집에 초대받지 않은 어떤 사람이 집안 식구를 속이고 들어 왔을 때 현재 있는 식구들이 자비를 베풀어 먹고 살기 위해 얼마나 애썼으면 신분까지 속이고 들어왔겠느냐고 하면서 앞으로 그런 거짓말 말라고 나무라고 친구로 받아준다. 여기서 유명한 문장이 나온다.  머리 검은 짐승은 받아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근본이 없는 것들은 받아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디서 상고출신이 재벌 삼세와 결혼하는가? 뿌리도 근본도 없는 것들이 복수하려고. 어디서 아기 낳아 재벌을 뒤 엎으려고 하는가? 수애 나오는 드라마.

기브온을 불쌍하다. 얼마나 살고 싶어서 속였겠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경솔하게 했다마는. 하나님께 맹세했기에 받아 줄게.

맹세라는 것은 주님이 주인공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친구 왔는데 내 집에 들어오면 아버지에게 통치를 받아야 되는 것처럼 아버지에게 물어 보지 않고 경솔하게 받아들였더라도 이 땅은 언약대로 통치하기에 통치 능력이 계속 유지되기를 기대하고 원했던 것이다.

기브온이 들어옴으로, 기브온이 배신했다는 소리를 듣고 주변국이 연합군을 결성해 쳐들어온다. 여호수아 10:5 다섯 왕이 기브온을 대적하여 싸울 때에. 이제 기브온은 이스라엘 속에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스라엘이 불쌍하다고 도와주었는데 나중에 보니 일진이라. 기브온을 공격하러 왔을 때 받아들인 이스라엘이 지켜 준다. 이 전쟁에 누구도 협조하는가. 협조 정도가 아니다. 자연현상도 여기에 동원된다.

르우벤 갓 므나셋 반지파가 먼저 나선다. 여호수아 4:12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는 모세가 그들에게 이른
것같이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들보다 앞서 건너갔으니

이들이 선봉에 섰다. 땅은 너희들이 먼저 전쟁에 나서서 이 전쟁이 끝나면 그제서야 이 땅을 얻을 것이다. 땅에서 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붙이시는 전쟁이 더 우선이 되어야 된다. 천국 탐내지 말고 주께서 붙이시는 영적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주의 뜻이다.

다시 여호수아 10장을 와서 의도적으로 기브온과 주변 다섯 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 여호수아 10:12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이것이 중부전쟁에서 남부전쟁으로 가는 것이다. 막게다에 다섯 왕이 동굴에 숨어 있다(수 10:17). 벧호론, 게셀, 막게다 이 경로가 아모리 다섯 왕이 기브온을 공격하면서 전투 경로로 나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전재에 대해서 인정하시고 붙여주셨다.

여호수아 10:12절에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여호수아 10:13절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수아 10:14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이처럼 여호와께서 붙여주셨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싸우실 때에 태양이 동원된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도무지 설명이 안 된다. 물리적으로 산소 원자가 헬륨으로 전환되면서 에너지가 나와 에너지를 활용해서 계속 불타는 것이 태양이다. 여기에 여호수아가 들어가지 않는다. 태양의 참전. 이 말이 됩니까? 태양이 왜 인간 사는데 끼어드는가? 남들 보기에 인간들 전쟁인데 이것은 여호와의 전쟁이다.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이다. 여호와는 언약을 앞장세워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다. 궁창에 있는 해 달 별이 하나님을 위한 군대가 되고 소속 부대원이 된다.

정말 신기한 일이지요?
태양과 별과 달이 소속부대원이 된다는 것은 언약 안에 천지창조를 하신 중심되신 분이 여기 계신다. 태양 바다 같은 것을 천지라 한다. 하늘과 땅이라면 여기 계신 분을 천지의 주재라고 이야기한다. 천지의 주인공. 이것이 다니엘 5:23절에 나온다. 막장전쟁이다. 끝까지 가는 전쟁이다. 이 세상 나라를 유지하느냐 아니면 천지의 주재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 나라를 멸망시키느냐가 다니엘 9장에 나온다.

다니엘 9장에서 전쟁하시는 이유가 너희들이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하늘에 있는 줄 알았는데 땅 이스라엘과 연결되어 있다. 땅 이스라엘을 건드리면 모든 피조물이 오 분 대기조, 비상대기조에 들어간다.

골로새서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의 핵심 중심축이 있다. 구름타고 오시는 인자 같은 분, 땅에 오시면 인자가 된다. 땅에 온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함께 오르셨다. 그 사이에 천지가 다 끼어 있다. 하늘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성전이 있다. 이스라엘을 건드린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성전을 건드렸기에 위에 있는 하나님이 반응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해 동원해라.

여호수아가 기도한 것은 하나님은 언약대로 하기 때문에 이번 전쟁에도 언약요소를, 언약시스템을 가동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한다. 붙이시는 전쟁은 언약이 현존하고 있고 언약대로 드러내는 것에 이스라엘이 가담되었음을 하나님이 나타내 주옵소서 라고 할 때 태양까지 동원되었다. 홍해, 요단강 갈라졌을 때 언약이 동원되었다. 하나님이 이름을 하나님이 보호하신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면 보호받지 못한다. 다른 신들을 섬기면 보호받지 못한다. 너희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만든 나라이기에 내 이름을 버리면 보호대상이 아니다. 하나님 날 지켜주옵소서라고 하면 네가 뭔데가 된다.

전쟁 중이다. 전쟁의 성과는 여호와 이름의 승리로 끝나게 되어 있다. 붙여주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평소에 여호수아가 심심풀이로 태양에게 오 분만 멈춰달라면 멈추는가? 여호수아 10:12절에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물러라. 달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 대통령이 지나가면 신호등을 조절한다. 태양, 달, 이스라엘 피조물들이 같은 시스템의 직원이다. 같은 처지에 있다. 세상의 움직임과 성도의 움직임이 함께 돌아간다. 누구를 위하여? 성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은 주의 것이다. 세상은 성도를 위해 있고. 세상은 자재과 직원들을 위해, 직원들은 회사를 위해, 사장을 위해, 회장님을 위해 있다. 세상은 층층이 구조적으로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택한 백성만 건질 뿐이다. 여호수아 전쟁을 보면서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다는 것을 볼 때 수월하게 되는 것 같지만 현장에서 여호수아가 느끼는 자기를 믿지 않아야 된다는 갈등,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여기서 오는 갈등, 이것은 정말 이스라엘의 능력,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다. 태양과 달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배포가 센 건지 미친 짓인지 상상이 안 간다. 여호수아의 노림수가 아님을 이스라엘에게 두 번 다시 이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 있기 때문이다.

붙이시는 전쟁이 끝났다. 전쟁 선봉장으로 르우벤, 갓, 므나셋 반지파가 나섰다.
여호수아 22장에서 이들이 전쟁한다고 고생했으니 르우벤 갓, 므나셋 반지파가 요단 동판을 차지한다.

민수기에는 이 땅을 주지 않게 되어 있다. 요단 동쪽 땅은 얼마가지 않아 이방민족이 차지하고 만다. 정복했을 그 당시 땅과 사사기에 오면 엉망진창이 된다. 이방민족이 침투한다. 그것은 땅에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언약 안에 들어오는 것이 목적이기에 땅이 어떻게 되든 언약은 흐른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흐른다. 우리 생활형편이 어려운 것이 구애받지 말라.

여호수아 14:13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헤브론을 기업으로 준다.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첫째시간에 이야기 했죠. 선 스펙트럼. 뭔가 빠진 요소가 있다. 빠진 요소를 통해서 그 원소의 성질이 분명히 드러난다. 상아가 다녀가면 물고기는 빠지고 채소만 남아있듯이. 이스라엘은 땅에 구애받지 않는 레위 지파가 있음으로, 땅이 없어야 마땅함을 유지함을 유지하면서 각 지파 속에 집어넣는다. 그래서 얻은 성읍이 48곳이다. 유다 베냐민 지파에 13개, 에브라임 단 므낫세 반 지파에 10개,  앗셀 잇사갈 납달리에 13개 스블로 르우벤 갓 지파에 12개, 합쳐 48곳에, 마치 지부를 두듯이 배치한다. 레위지파가 있다면 자기 상속분의 땅의 유지는 레위지파의 활동이 유지와 연동된다. 레위지파의 땅 분배를 할 때 제비뽑는다.

뽑는다는 것은 창세기 49장의 야곱의 예언이 먼저다. 신명기 33장에 각 지파마다 예언하셨다. 신명기에 나오는 모세의 예언은 야곱의 예언에 따라 주어진다. 이것은 이스라엘은 땅에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예언위에, 예언과 더불어 사는 자들이다. 땅에서 예언 나올 때 제비뽑기를 한다. 땅에 살고 싶은 인간의 여망을 사정없이 허물어 버리고 예언 안에 들어오라고 제비뽑기를 한다. 뽑기를 하라는 것은 감사하라는 정도가 아니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예언대로 된 것이라는 것을 자기가 기거하는 땅에서 마음껏 증거해야 된다. 크레파스가 열두 색이 있지만 노란색이 노란색을 좋아라고 할 수 없다. 파란색이 난 노란색이 좋다고 남의 것을 탐낼 수 없다. 뽑기 위해 각 위치에 색깔대로 있어야 한다. 열두 지파라 하는 것은 서로서로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탕에 레위지파의 정신이 녹아져 있다. 레위지파가 녹아 있다. 땅 없는 자가 우리에게 땅 있게 했다. 따라서 땅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땅 없는 쪽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라. 예수님은 이 땅에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님이 땅에 머리 둘 곳이 없다면 성도들도 머리 둘 곳이 없다. 잠시 120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잠시 살고 있지만 여러분이 영원히 머리 둘 곳이 아니다. 여러분이 땅에 산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예언위에 산다고 생각하세요. 오늘밤 주무시면 말씀위에 누워 주무시면 된다. 왜냐하면 이 집은 주의 제비뽑기로 주신 것이다. 비가 셀 수도 있고, 영하 십도에 수도관이 터질 수도 있고, 담배연기가 올라올 수 있고, 층간소음도 나오고, 싸울 수도 있다. 네 마음대로 사세요.

제지 뽑기만 아니라 레위 지파 중에서 여섯 개의 도피성이 만들어진다. 이곳에는 제사장이 있는 곳이다. 요단 동편에 세 곳, 요단 서편에 세 곳이다. 도피성은 억울하게 살인누명을 뒤집어 쓴 사람이 피하는 곳이다.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뒤집어 쓴 것이니 살인자다. 살인자는 율법에 의하면 죽어 마땅한다. 죽어 마땅함을 율법내부에서 안 죽어도 되는 존재로 전환 시키는 장치가 도피성이다. 살인했으니 죽어 마땅하지만 죽이는 것이 율법 위반이 된다. 이렇게 되려면 제사장 존재가 개입된다. 제자장과 함께 있으면 친족들의 복수에서 면죄된다. 제사장 살아 있을 때 도피성에 들어간다. 이런 특별한 공간을 만드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것은 율법이지 땅 소유로 이스라엘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다.

땅 분배할 때 맨 먼저 하는 지파가 유다지파다. 그 다음 요셉지파, 에브라임, 므나셋 지파, 베냐민 지파 분해 후에는 네 마음대로 분배한다. 르우벤, 갓, 므나셋 반지파는 이미 요단 동편을 가져갔다. 유다지파와 요셉지파는 투톱이다. 상벽이다. 어디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나오는지 모른다. 맨 먼저 요셉지파가 나서고, 나중에 유다지파로 바뀐다. 요셉 지파가 맨 먼저 나서기에 에브라임, 므낫세 지파의 땅이 가장 넓다. 에브라임 므낫세가 요셉의 손자인데 이들이 상속권을 받는다.

나중에 요셉지파가 북이스라엘이 된다. BC722년에. 남쪽 유다 지파는 BC586년에 망한다. 둘 다 망한다. 둘 다 망하는 것도 신명기에 예언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망했는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은 새로운 차원을 맞이한다. 이스라엘 망하면서 혼자 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니엘 9장에 보면 이방민족과 마지막 전쟁을 이스라엘이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싸우지 못한다. 이스라엘이 와해되고 깨어진다. 이스라엘 복숭아 깨면 단단한 구조가 나온다. 이스라엘을 건드리면 언약의 하나님을 건드린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 이스라엘의 메시야, 이스라엘의 왕을 건드린 것이다.

다니엘 전쟁에 보면 그 방식대로 줄곧 이어진다.

여호수아 15장에 유다 지파가 먼저 받는다.
15:8절에 힌놈의 골짜기가 나온다. 예루살렘 남쪽에 있다. 이곳은 우상이 유명하다. 우상을 불태우는 곳으로 유명하다. 지옥이다. 게헨나이다. 여호수아 당시에는 이럴 줄 몰랐다. 유다지파 한 복판에서 지옥의 표상이 나올지 상상도 못했다. 가장 사랑받는 유다 안에 가장 하나님을 싫어하는 우상숭배가 이루어진다. 우상숭배 집합소가 된다. 힌놈의 골짜기.

이것은 땅을 가졌다고 해서 언약이 완료된 것이 아니다. 언약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언약은 변한다. 여호수아 15:1절에 제비 뽑았다. 16:1절에도 제비 뽑았다. 예언대로 되었다. 실컷 두 사람이 아마추어 주제에 바둑을 두는데 나중에 보니 예언대로 되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실컷 자기 딴에 공들여 심사숙고해서 살았는데 결국 나중에 보니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이다. 제비뽑는 것은 사람이 뽑으나 결정은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의 결정은 우리가 미리 알 수 없고 결과 자체가 하나님의 뜻임을 소급해서 우리가 받아들여야 된다. 우리의 결정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된다.

므낫세 지파는 요셉지파다. 18장에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실로에 모여 회막을 세운다. 나주에 여호수아가 죽을 때는 세겜에서 발표하면서 죽는다.

여호수아 18장에서 여섯 지파는 지도를 갖고 오라 해서 제비뽑기해서 나누어준다. 레위지파는 여기서 뺀다. 여호수아 18:7절 레위지파 너희는 분깃이 없다. 이것을 레위지파는 레위지파끼리 모여서 살아서는 안 된다. 파견근무만 있고 본부를 가져서는 안 된다 것이다. 땅을 가졌더라도 하늘의 차원은 속속들이, 파이 안에 들어 있는 건포도처럼 속속들이 들어가 있어야 된다.

오늘날 왕같은 제사장이 성도들이다. 성도는 따로 모여서 지리산에 회관지어 자체적 공동체 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 하면 운영이 됩니까? 제가 과거에 본 책 지금까지 공동체를 실시했던 사례 책을 읽었다. 신앙공동체, 성령공동체를 읽었는데 마지막에 돈 잔치로 끝난다. 처음에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떡을 떼지만 나중에는 돈을 뗀다. 지분 따진다. 공동체가 실패가 끝난다는 것은 곧 교회가 돈 품파이로 끝난다. 교회가 주식회사랑 똑 같다. 너 지분 얼마나 갖고 있나. 목사가 개척교회 시작하면서 사모가 번 돈 이천만원을 낸 후 나중에 교회가 된다 싶으면 내 자본금 내어 달라고 한다. 자기가 자기에게 바쳤다. 여기에 대해 교인들이 당연하게 여긴다. 그 목사의 그 교인이니. 사고방식이 똑같다. 예수님께서 열두지파에게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스카이 콩콩처럼 여기 갔다, 저기 갔다 돌아다니면서 주님가신 길로 죽어 버려라 하신다.

여호수아 21장에 레위지파 중  고핫자손에게 땅의 선택권을 먼저 준다.
레위의 아들 고핫 므라리 게르손이 있다.
고핫 자손에게서 모세와 아론이 나온다. 그쪽부터 먼저 땅을 준다.

여호수아 22장을 좀 더 하면, 요단 동편에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곱게 살면 되는데 자신들이 제단을 만들겠다고 나온다. 그러니 다른 아홉 지파가 들고 일어났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모세가 말하지 않는 땅에 들어가면 절대로 제단을 쌓지 말라는 율법이 있었다. 이 제단은 나사 우주센터처럼 하늘과 연결하는 단 한곳, 언약궤가 있는 곳이어야 된다. 다른 곳을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데 이곳에 제단을 쌓으면 요단 동편은 그쪽에서, 요단 서쪽에서는 언약궤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라가 9와 3으로 나누어진다. 우리생각에는 나누어지면 나누어지지 이게 무슨 상관있느냐고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실 때 열두 요소, 열두 색깔이 있을 때 크레파스 전체에 복을 주지 아홉 지파나, 세 지파에게 복을 주는 법은 없다. 열두 지파가 유지되어야 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이 그러하다.

열둘이 안 되면 열한 지파만 남으면, 사사기 끝에 베냐민 지파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을 때 강제로 아내 삼아 베냐민 지파를 유지시킨다. 사사기는 구멍 난 치즈 같아. 좋은 곳은 이방인들이 다 차지하고 있다. 이방인지 이스라엘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다. 그만큼 땅에 대한 집착은 아담의 타고난 본성이다. 땅이 있어야 안전성이 있지 땅 없이 돌아다니면 기가 차지요.

아들이 캠핑 차타고 돌아다니면 왜 정주하지 못하느냐? 왜 한 곳에 못 사느냐? 청춘을 즐기려고 합니다. 가는 곳이 내 땅이라고 낭만적이 이야기 한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성도를 이 땅의 나그네로 본다. 그만큼 땅이 있으면 땅을 소유하려고 한다. 사람이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자식에게 상속하기 위해서다. 아닌 척 하지 마세요.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이유는 다 자식에게 상속하기 위해서다. 손자에게 주기 위해서다. 숨길 수 없는 본성이다. 자식이 없으면 사회 환원한다. 그때 사기꾼이 확 달려 들 것이다.

사사기가 되면 구멍 난 치즈처럼 뻥뻥 구멍이 뚫렸다. 자신들에게 문제 있음을 모르고 이들은 율법을 찾지 않고 왕을 찾는다. 왕을 찾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기에 왕이 있는 민족이 이스라엘을 더욱더 괴롭히게 된다.

도피성 이야기는 여호수아 21장에 나온다.
여호수아 21:44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기에 말씀대로 다 응했다. 미리 예언한 그 모습은 아니지만 적들은 다 물러갔다고 한다.

땅을 차지하고 안식을 얻었다.

여기에서 정복이란 무엇인가? 믿음의 승리가 무엇인가? 정복한다는 것은 지배받는 것인가, 소유권이 넘어가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내가 저 사람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지배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복에 해당될까, 안될까를 생각해 봐야 한다. 정복자가 예수님이시다. 내가 예수님께 소유되는 것과 지배받는 것의 차이가 있는가? 있다. 예수님의 소유가 되면 내 일은 없고 주님의 일만 있다. 그러나 지배를 받는다면 내 것은 따로 있고 주님의 지시를 따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파탄으로 끝난다. 구약에서는 지배를 받고 상속분이 따로 있는 시대다. 구약이 끝나고 신약시대는 주님의 지배를 받는 시대가 아니라 주님의 소유가 되는 시대다. 내가 죽은 자가 되어야 된다.

믿음이란 내가 죽었기 때문에 나의 믿음은 있을 수 없다. 주님이 나를 소유할 때 그 관계를 믿음이라 한다. 사래의 태가 죽었기에 임신을 기대하지 않았다. 인간의 한계가 죽음이다. 죽음 이후 문제는 인간이 손댈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우리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네 운명에 대해서 네가 손대지 말라. 네가 어떻게 되든 내 소유권의 문제지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내가 지옥가면 어떡하지? 그걸 묻지마. 왜? 너는 내 소유이기 때문이다. 소유가 좋아 천당 가는 것이 좋아? 소유가 좋습니다가 되어야 되는데 천당 가는 것이 좋다는 말은 아직도 죽은 척 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누가 죽었나를 보니 눈 감고 있다가 지나갔나 하면서 눈을 뜬다. 우리 육적인 것이 맨날 이렇다. 주님께서 그런 육적인 것까지 드러내셔서 이게 아니고 이것이라 해서 다 소유했기에 다 이겼다가 아니라 항상 자기를 부인하게 하신다. 이런 육적인 요소, 기브온 같은 요소를 항상 유발시켜서 끊임없이 내가 무엇을 얻었다가 아니라 주께서 이미 가져갔음을 매일같이 확인하는 그것이 진정한 주님의 승리다. 주께서 붙이시는 전쟁이다.
관리자 22-01-10 21:51
답변  
9강
여호수아는 1장부터 모세의 죽음으로, 마지막에 24장에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되어 있다. 죽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모세가 죽었지만 언약을 살아있고 여호수아가 죽었지만 언약은 살아 있다. 여호수아가 죽으면서 당부하는 것이 언약이다. 세겜에 돌을 세워 율법을 기록했다. 율법을 기록하면서 나는 비록 죽으나 110세에 죽더라도 언약이 살아 있다. 언약이 살아 있다는 말은 인간은 죽어죽어야 한다.

인간이 죽을때마다 언약은 리셋된다. 쇄신된다. 언약이 종착적 인물로 접근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언약, 예언, 율법이 살아 있기에 인간은 죽어야 된다. 이 예언에 해당되는 인간, 율법에 해당되는 인간이 죽어나갈 때 마다 율법도 죽고 예언도 죽고, 언약은 살아나고. 이러한 현상을 보인다.

여호수아처럼 모세의 죽음에서 모세언약이 살아 있고, 여호수아는 모세 언약에 의해 죽는다. 모세 언약은 산에서 율법을 받았다. 율법이 끝난 시점이 되면 여호수아와 갈렙이 갈라진다. 갈렙이 차지한 땅이 헤브론이었다.

무대가 있고 커튼이 있으면 퇴장하는 곳이 두곳이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에게 속한 산 가아스산 북쪽에 묻힌다. 그러나 갈렙은 헤브론에 묻히게 된다. 여호수아 마지막에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끝나야 하는데 요셉의 뼈가 세겜에 장사되었더라고 한다(수 24:32). 에브라임 지파는 요셉지파다. 갈렙과 여호수아와 갈라진다. 갈렙은 유다지파다. 율법과 예언과 언약이 언약 변천과정에서 열두 지파가 균등하게 나가야 할 이스라엘이 특정지파가 주도권을 쥐는 것으로 방향이 바뀌면서 야곱의 열두 지파의 의미가 상실한다.

요셉지파에서 유다지파로 바뀌는 과정에 여호수아가 있다. 시편 78:67-68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지금까지 여호수아는 뭐냐? 여호수아는 요셉, 에브라임 지파다. 여호수아가 들어간 자리는 모세의 자리다. 모세는 레위지파다. 율법이 지속되기를 뒷받침 하면서 율법대로 다스려지는 이스라엘 땅이 되기를 원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여호수아가 죽고 요셉도 세겜땅에 묻힌다. 그러면 그 뒤에 바통을 받는 것은 율법이냐, 율법이 아니냐 갈림길에 여호수아가 있다. 율법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는데, 문자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율법이 인격화에 접어들면 율법 완성 인물이 요셉 지파에서는 나오지 않고 유다 지파에서 나온다.

율법이 인격화 되면서 율법외에 한 의가 등장한다. 이스라엘 말고 이스라엘 밖에서 한 여인, 룻이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룻이 유다지파와 결합되면서 유다지파가 율법에 매이지 않고 왕체제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형성하면서 언약은 살아 있다가 된다. 요셉지파를 버리면서 언약은 살아 있다.

시편 78편 요셉 장막을 싫어하시고,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언약의 형성 과정에서 지파의 변화가 일어난다. 문자적으로 율법지키는 이스라엘은 아 옛날이여. 율법적 나라를 이룰 것 같았었는데 율법이 땅에 정착하지 않고 다시 날라가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런 과정을 거치시는가?
갈 3: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강의 내내 작살낸 이방민족이 이제는 복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반증이다. 그럴 줄을 몰라지롱이 된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 그 안에 이방민족도 구원된다고 단순히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 율법을 모르는 자도 구원된다고 아브라함을 복 줄 때 들어 있다. 이방인 입장에서 복이 무엇인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이 이방인에게도 값없이 제공된다는 것이 복이다. 아브라함 자손에게 준 복이 이방민족에게 주신다. 율법을 잣대로 해서 너는 내 백성이다 아니다를 주님께서 말소시켰다. 골로새서 2장에 십자가에 달릴 때 율법을 찢었다. 악사 다이렉트 보험증서를 찢어 버렸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데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복이 어떤 복인지 그 본질을 드러낸다. 내백성 아님에도 내 백성되었다 하기 전에 그동안 율법을 잠시 사용했다.

내가 북쪽 이스라엘을 택하지 않고 남쪽 유다를 택했다.
여호수아 맨 마지막 24:32절에 요셉의 뼈가 등장한다. 요셉의 뼈가 세겜에 장사되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요셉의 뼈를 들고 나온다. 요셉의 뼈의 이동경로가 압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미래의 예언도 함께 동행해서 이끌어진다. 죽은 사람 뼈를 왜 갖고 나오는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의 끝은 요셉의 뼈가 묻히는 세겜, 열두지파의 땅 분배는 끝났다는 것이다. 율법으로 만들어진 이스라엘은 종결되었다.

이제부터는 열두 지파에서 한 지파가 부각된다. 요셉 지파의 주도권이 여호수아가 죽고 난후 주도권이 바뀐다. 원래대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취지대로 돌아간다.

요셉의 장지는 세겜이다. 에브라임 땅이다. 여호수아와 같이 정탐한 갈렙이 차지한 땅은 헤브론이다. 갈렙이 차지한 헤브론은 아브라함의 가족묘지다. 이스라엘의 시조 아브라함의 가족묘지가 헤브론 막벨라 굴이다. 막벨라 굴에 누가 묻혔는가?

사라(창 23:9), 아브라함, 이삭(창 35), 리브가, 레아, 야곱이 묻혔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계통은 열두지파 있기 전에 막벨로 굴을 누가 차지하는가가 중요하다. 여기를 유다지파 갈렙이 차지한다. 벌써부터 유다지파와 요셉지파는 갈길 따로 가자는 것이다. 나라 주도권이 어느 쪽이 원천으로 통하는 노선인가? 유다 노선인가, 요셉 노선인가가 암시되어 있다.

창세기 49장에 야곱이 예언할 때 유다와 요셉이 누가 우위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 오리로다

유다지파는 49:8-10
유다에게는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유언을 하면서 모호하게 유언했다. 유다자식은 잘될 것이다. 요셉 자식은 멋지게 될 것이다. 모호하다. 그러고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셨다. 멋진 것이 세냐, 잘 될 것이 세냐? 강한 것이 세냐, 더 큰 것이 세냐?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진행과정에서 처음 먼저 요셉이 이스라엘의 반석의 자리를 차지하다 그것을 유다에게 인수인계하는 방법으로 이스라엘이 진행된다. 왜냐하면 모세의 후계자가 레위지파가 아니라 요셉지파 여호수아다. 요셉지파로 가버린다.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약속의 땅을 차지한다. 그래서 여호수아의 죽음이 중요하다. 마지막 까지 잔소리 할 수 있는 자격자는 여호수아다. 갈렙은 자기 것 챙기고 가만있다.

그러나 가만있다가 이방나라가 약속의 땅을 짓밟아 버릴 때 사사시대가 끝나면서 사무엘 상 진행되면서 서서히 레위 지파나 다른 지파보다 유다 지파가 드디어 두각을 나타낸다. 다윗 조상을 따라 가보니 열두 지파에는 없다. 왜냐하면 모압여인 룻에게서 태어 났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일을 그런 식으로, 족보가 순차적으로 흐르지 않게 하는가?

그 내용에 대해서 아예 어렵다고 단서를 붙이면서 하신 말씀이 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로 오셨다.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는 사람은 모른다. 장성한 사람에게는 멜기세덱을 안다고 한다. 히브리서 7장이다.

레위지파에 아브라함의 정신이 온 것 같지만 레위지파를 뚫고 유다가 독보적으로 등장한다. 왜 이렇게 뚫고 들어와야 되는가? 아브라함의 족보는 아브라함의 혈통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열두 지파로 평등하게 가는데, 문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족보 없는 멜기세덱의 족보가 어디에 징후를 드러낼 족보가 나와야 된다. 수직적인 요소가 아브라함 속에 개입되어 있는 사실을 아브라함 후손들 가운데, 족보 바뀜, 족보 교체 현상을 통해 수직적인 것이 여기에 드러나게 되어 있다.

처음에는 아브라함의 족보에서 레위지파가 일어나야 된다. 제사 담당이다. 율법이 있어야 자기 의미가 발생한다. 율법을 먼저 주고 레위지파가 율법을 쥐고 있으니 레위 지파 없으면 이스라엘이 망한다. 정치적으로는 요셉 지파가 다스렸 지만 이스라엘 전역에 레위지파가 파견되어 있다. 땅은 없지만 이 땅을 보존할 엔진 원동력은 하나님의 율법이 살아 있어야 하나님의 복과 연결된다. 그래서 레위지파가 중요하다. 그런데 그 중요한 레위지파를 빼 버리면 이스라엘 역사가 진행될 수 없지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를 제치고 유다지파가 나왔다. 변화되었다. 율법의 시효가, 용도가 끝났다.

갈라디아서 3:17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율법이란 아브라함에게 주신 원래 내용에 대해서 보조적 위치에 있다.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복이 온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이다.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아브라함에 있는 내용 속에 너희가 복을 받을 만해서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있는 복이 복을 받을 가치가 없는 자에게 복이 온다는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취지를 아브라함에게 복으로 제공했다. 지파의 바뀜을 통해 하늘의 멜기세덱의 족보를 따라 메시야 온 것이 맞잖아라고 이야기한다.

이스라엘 모르고서 하늘나라 가는 것이 납득이 안 된다. 이스라엘이 지파가, 주도권이 교체되는 과정자체가 신약에 와서 왜 우리 능력으로,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지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시범적으로 다 보여주셨다. 이스라엘 역사는 율법이 주도권을 쥔다. 모세가 하나님과 독대하여 율법을 받았다. 율법을 지키면 복 받고 못 지키면 저주 받는다. 여기에는 저주만 있다.

인간들이 못 지키고 저주받으니, 저주 받는지 아닌지 이스라엘이 시범조교로 가나안 땅에 살아봤다. 살아오고 있었는데 나름대로 복 받았다고 여겼는데, 말씀대로 지켰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예수님이 오시니 예수님을 죽였다.

마지막 시간에 하는 모든 이야기는 당신은 죽을 때 무슨 구멍으로 들어가서 죽습니까? 죽을 때 성공적이 죽음을 해야 마지막 웃는 자로 승자가 된다. 죽을 때 두 개의 죽음의 구멍이 있다. 여호수아 13:22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도륙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술사 발람도
칼날로 죽였었더라

발람이라는 사람이 여호수아 전쟁 가운데 죽는다. 발람의 죽음은 저주로 통하는 죽음이다. 그런데 모세도 죽고 여호수아도 죽고 엘르아살 제사장도 죽는다. 이 죽음은 발람의 저주스런 죽음과 대비되어 하나님의 예언에 따라서 죽는다.
그러면 발람의 죽음이 왜 중요한다. 이 발람이 이스라엘과 어떻게 엮였는가?  이스라엘에 대해 왕의 존재를 예언한 사람이다.

민 24:17
내가 그를 보아도 이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바알이 왕이 나온다고 예언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현재 왕이 없다.
민수기 23:21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발람이 이스라엘이 끝날 때 등장하는 왕을 발람이 예언했다. 발람이 예언하고 저주스런 죽음을 당한다. 하나님의 예언은 저주스런 죽음과 축복된 죽음을 양상한다. 두 죽음은 예언에 준해서 결정된다. 쉽게 말해서 복음 전한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뀌는 절차가 있어야 하는데 발람은 바뀌지 않았다. 돈 받고 예언했다. 복음을 전하고 예언을 전해도 본인이 사는데 급급했지 어디에 죽을 것인가가 본인의 희망사항이 아니었다. 성도의 희망사항은 어느 구멍에 빠져 죽는가에 있지 어떻게 주님 덕분에 밥 먹고 사느냐에 있지 않다. 그것은 발람이나 하라 하세요. 수직적인 멜기세덱의 연결고리가 되지 않음에도 그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 바른 말인데 전하는 본인은 지옥가고 있다. 그것이 어느 상황인가? 이스라엘 상황에서 벌어진 상황이다.

여호수아 24장에 여호수아가 무엇을 암시하는가? 내가 죽고 난 후에 너희들은 다른 신들을 섬긴다고 예언을 한다. 이에 백성들이 16절에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런 말하는 것을 보아 걸렀다. 여호수아는 언약의 끝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나타날 때 끝이다. 아직 왕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미래에 대해서 본인이 아는 것이 없다. 율법을 지켜라. 율법이 임시적 조치로 있는 것을 여호수아는 모른다. 결국 아브라함에게 주신 처음 약속으로 돌아간다.

율법이 쫙 내려온다. 율법이 내려올 때 저게 방주다. 구원의 방법이다. 저것을 믿어야 된다는 자들이 이스라엘인데 잡으려하는데 율법이 붕 떠서 날아가 버렸다. 날아가면서 저주를 뿌린다. 너희들은 율법을 못 지킨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신 후 430년 후에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인간이 저주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너희 들이 지옥 가는 것을 당연시 해야지 지옥 가는 것을 아쉬워해야 할 자격자는 아무도 없다. 본인이 지옥가야 된다. 지옥가거라.

이것이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계시를 받아 전체적으로 총괄적으로 이야기 한다.

여호수아가 이것을 미리 암시하고 있다. 자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고 이방인과 혼인하지 말라는 것은 내가 떠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장만 넘기면 사사기가 나오지요. 사사기가 나오면서 그들은 끝났다.

지도자가 없다. 열두 지파가 평등하게 나갔기 때문이다. 레위지파 제사장도 있어도 돈 주지 않으면 제사장 못한다. 레위지파가 밥 먹고 살기 위해서 돌아다닌다. 레위지파가 붕괴하니 베냐민 지파가 날아가 버린다. 레위지파가 첩 열두 토막으로 잘라 보내자 베냐민이 날아가 버렸다. 왕이 없어서 그랬다. 왕을 주세요. 이방나라와 같이 되었다.

살기 위해서 사는가, 언약 때문에 사는냐? 살기 위해 사는 것은 그냥 삶이다. 언약 때문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죽는가? 막벨라 굴에 갈 것인가 아니면 발람처럼 이 세상 살다가 허무하게 남들 가는 것처럼 그냥 죽을 것인가?

여러분에게 장래희망사항은? 잘 죽자. 제대로 죽자. 주님께서 성령께서 마련해 주셨다. 성령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 다른 희망 사항은 품지 말라.

세상적인 희망사항은 이미 성도로써 확정되었다. 다른 희망사항은 없다. 제대로 보고 죽자.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매일 십자가에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은 막벨라 가족장지에 주제넘게 초청받아 들어가는 셈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묘지로 오셨다. 죽을 때 나와 더불어 죽자. 내 안에 들어와서 죽어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 다른 수가 없다. 내가 바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멜기세덱의 족보를 따라, 그 노선을 따라 온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유다지파는 열두 지파와 접촉점이 없게 된다. 독보적이 된다. 유다 지파 안에 모압 여인 룻이, 율법체계에서 용납되지 않는 개 같은 이방여인 룻이 유다지파에 들어오면서 유다지파가 둘로 나누어진다. 지상의 유다지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다. 예수님이 오신 족보다. 모압여인 이방인 룻, 외부인이 들어온다.

외부인의 특징이 무엇인가?
율법 없다. 율법에 의하면 모압여인 룻은 인간 취급을 못 받는다. 개 같은 존재이기에.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 백부장 같은 경우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다. 그런데 누가 천국백성인가? 마태복음 8장에서 백부장이 천국 백성 자리를 차지한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행함이 아니다.

여호수아에서는 이것 까지 설명 못하고 여호수아 24:19절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마지막 시간은 19절로 끝났다. 너희들은 여호와를 섬기지 못한다. 내가 받은 계시가 이것이다. 이렇게 말하니
21절에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입은 살아서 들은 풍월은 있어가지고. 인간의 과거의 기억에 매여 있다. 조금만 잘살고 잘 사면 앞으로 잘 될 것이다. 과거 연속이 미래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은 미래를 모른다. 미래는 예언에, 약속에, 언약에 속한 문제다. 우리가 본 것은 여호수아다. 신약이 아니다. 십자가에 준해서 여호수아를 해석하자 이 말이다. 그들이 못 지키면서 지키겠다고 큰 소리 치는 이 모습이 오늘날 우리모습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는가? 나는 열심히 지키면 복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지 맙시다. 복을 못 받았는데 왜 살았지. 그게 복이다. 이방인인데 왜 구원받지. 그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주께서 봉사했다고 하신다. 밀대 들고 청소 좀 했는데 봉사라고 하신다. 이게 봉사야. 교회 헌금 이천 육백만원 했는데 이게 헌금이야. 아무리 봐도 돈낸 적이 없고, 돈을 이동했을 뿐인데 그것을 헌금이라 해 주시니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복으로 다 쳐주신다. 우리가 예뻐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을,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자신의 약속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 쓰레기 같은, 별 볼일 없는 이방인인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다.
 
네 율법 없지. 없습니다. 죽어 마땅하지. 마땅합니다. 천당 가라. 이렇게 됩니다.
끝으로 마태복음 5,6장에 금식할 때 찡그리지 말고 구제할 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기도할 때 이방인처럼 달라고 하지 말라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왜 하시는가?

이 말씀에 의하면 이런 구제, 금식, 기도를 네가 못한다. 못하기에 한 것으로 쳐 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복이다. 아브라함의 복이 어떤 복인가? 창세기 12장에 나온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축복을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할 것이다. 축복과 저주가 너의 삶, 너 중심의, 너 기준을 나는 절대 인정하지 못한다.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님이 오셔서 복과 저주를 새롭게 규정하신다.

재규정. 다시 규정하신다. 다시 규정하려면 기존 우리 규정은 주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스스로 선하다 악하다는 매일 같이 주께서 삭제시키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결과물로서 우리 삶 자체를 복으로 간주하신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고집이 있다. 내가 착하기 때문에 착하다고 한다면 일단 한번 맞고 보자고 하신다. 네가 무슨 짓이든 착하다고 하면 우리는 아니옵니다라고 하면서 착한 일을 할 때만 착하다고 하면 일단 두 방 맞자고 하신다. 네가 무엇을 해도 착하다. 내가 행동한 것에 대해 책임지기 위해 착하다고 했는데 주님은 네 행동에 대해 책임 지지마라고 하신다. 그 때문에 너는 착해. 사람 찔러 죽여도 착해. 너는 어떤 판정도 하지마. 네가 거짓말을 하든 너는 착해. 이것은 성령이 안 오면 믿을 수 없다. 육으로 살게 되면 자기 판정에 매료당한다. 자기에게 미친다.

자기 환상에 빠져 있다. 너 말고 아브라함, 네가 스스로 결정한 삶의 결정 말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 율법 없이 주신 복, 저주받은 자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그냥 집어 넣어주신다. 아브라함의 복의 역할이다. 그냥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율법과 상관없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셨다. 유다 지파 아닌 초월적 유다지파 오셔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셨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다.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이라 한다. 기쁜 소식이다. 내가 너에게 기쁘다는 말은 내가 너에게 준 것으로 기쁘다. 내가 너로 인하여 기쁘다. 네가 주님의 사랑의 받아서 내가 기쁘다가 아니라 내가 일방적으로 너를 예쁘다 하기 때문에 예쁘다 하는 그것이 내가 기쁘다. 

구약과 연결시키면 아가다. 이유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예쁘다. 아가서의 특징은 시간이 정지되어 있다. 늙지도 않는다. 서른 되어도, 팔십 되어도 예쁘다. 그냥 내가 예쁘면 예쁘다. 죽음을 이길 정도로 사랑한다. 죽음에 들어가도 아름다움으로 튀어 나올거야. 이것을 지혜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랑의 지혜를 완성했다. 구약 전체를 완성하러 오셨다. 구약에서 룻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룻은 이방여인이라 율법도 없는데 보아스로 하여금 혼인하게 했다. 율법 없는 쪽에서 왕이 등장했다는 것은 하늘의 초월적 왕이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하기에 시점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서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제사장 역할을 한다. 율법이 왕이란 인격으로 구체화 된다. 그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오셨다.

언약의 변천과정에서 맨 마지막에 어떤 인물이 등장한다.
시작은 아담의 존재들이 있다 이것을 거쳐, 주님의 언약을 거쳐, 요동치면서 교체되어  예수그리스도로 최종 종결된다.

언약과정인 여호수아 한 대목을 잘라서 본 것이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전체를 보고 부분을 보게 하옵소서. 십자가 안에서 성경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모든 것이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 완료시키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쓰여 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의 이름을 위해서 어떻게 활용되는 것을 도리어 우리의 구원보다 더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