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6-07 09:06
새관점의 악마성 (새관점 칭의론의 악마성)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9  

관리자 24-06-10 11:58
답변  
새관점의 악마성(새관점 칭의론의 악마)

새관점에서 말하는 주장은 나름 타당성이 있다. 새관점에서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와 씨름했고, 선행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실제로 바리새인들의 신학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사울(사도바울)의 신학이요 신앙이었다. 사도바울은 혈통뿐 아니라 율법의 의로도 흠이 없는 자라 말한다. 이러한 모습이 로마서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문제는 사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향해, 유대인을 향해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심판하신 외식이라는 단어는 당시 바리새인들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도바울이 말했듯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기에 그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자신들은 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두고 외식이라 하셨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는 자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가서 세례를 받았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세례를 받지 않았다.

여기에서 세례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할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주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7-9).”고 했다. 이 외침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회개할 죄가 없다. 바리새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이 살고 있고, 사두개인은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는 성전을 중심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선지자 역할을 한 것이다. 세례요한의 지적은 예수님의 지적 속으로 합류당한다.

기독교 이천년 신학의 문제는 칼빈주의든, 알미니안 주의든 이 본문에 대한 해석이 엉터리였다는 것이다. 세례요한의 신앙과 신학이 예수님과 부딪쳐서 어떤 문제가 일어났는지에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성경을 구원론 중심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새관점 주의나, 기존 칼빈주의는 유대교다.

세례요한은 남은 자의 대표다. 마지막 선지자다. 모든 선지자들이 세례요한 뒤에 선다. 열두 제자도 그러하다.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리라(사 10:21)’는 선지자의 예언은 종말에 실현된다. 제자들이나 세례요한은 곧 그들이 기다리는 종말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했다. 물론 바리새인도 하나님 나라를 소망한다. 모든 유대인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한다. 영원한 다윗 왕국이 시온에 세워지는 것이다. 세례요한이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남은 자들이라 인식했다. 자신들에게는 결코 심판이 없다.

세례요한이 말하는 천국, 하나님 나라는 ‘죄를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여전히 약속의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다.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예수님이 천국의 심판주 되심을 증거 한 그가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고 질문한다. 이는 세례요한이 증거하고 기다린 천국과 예수님의 천국이 다르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이 외친 천국은 심판으로 이루어진다. 그 심판은 죄를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이지만,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이미 세례요한은 천국 백성이 될 자와 심판받을 자의 기준이 명확하다. 자신은 천국 백성이다.

실상 오늘날 기독교가 세례요한의 신학이다. 이것은 사실 유대인의 신학이요 바리새인의 신학이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가? 이것은 세례요한의 율법 해석 기준이다. 우리가 알듯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다 알지만, 율법을 어떻게 지켜야 하느냐가 문제다. 사도바울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할 때 우린 시비를 건다. 예수님은 외식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아서 한 고백이다. 그렇다면 그 말이 진심이다. 문제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 기준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기준이다.

로마서에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이 있고 유대인에게는 율법이 있다. 문제는 율법조차 양심에 따라 지킨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상상도 못했다. 왜냐하면 율법을 온전히 이해할 분은 율법 주신 분뿐이다. 인간들은 율법이 예수님을 증거 한다고 해석하지 못한다.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자가 유대인 자신들이다. 그렇다면 그 해석의 기준은 선악과를 먹어 하나님과 같이 된 양심이 기준이다.

세례요한이 외친 천국에 들어갈 자는 행위로 들어간다. 이 행위에는 약속과 언약을 믿는 믿음이 포함되어 있고, 메시아를 믿는 믿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례요한 자신이 믿고 증거했고, 삶으로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한 것이다. 성경은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한다. 믿음으로 의롭게,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도 있고, 행한 대로 심판받는다고 하신다. 이 둘을 어떻게 조화롭게 할 것인가가 인간의 관심이다. 그런데 신학은 골라잡는다. 자기 필요와 편리한 것을 골라잡는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기 구원을 포기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할 인간은 없다.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 구원을 포기하지 못한다. 여기에는 유대인들이 기다린 하나님 나라도 포함된다.

그래서 이신칭의를 믿는 상태까지 도달했다. 이신칭의는 주님의 일방적 행위요 선언인데, 그 선언을 내가 믿는 믿음으로 소유해 버렸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을 내가 믿고 빛이 있게 되었다는 주장과 동일하다. 단어는 믿음인데, 행위다. 또 다른 부류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주장한다. 슈바이츠의 하나님 나라는 유명하다. 하나님 나라가 뭔지도 모르고, 사랑의 나라가 하나님 나라라고 하니 육이 아는 사랑을 실천하려고 한다.

유대인들이 기다린 메시아 왕국, 제자들이 기다린 메시아 왕국, 세례요한이 기다린 천국의 공통점은 언약대로, 약속하신대로 이루어지는 천국이다. 그 천국은 ‘내가’ 말씀을 믿고 기다린 천국이다. 나의 천국이다. 나의 천국이라 하니 너무 개인적이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새언약은 율법을 모든 사람 속에 주시기에 율법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자신만만한 것이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게 살기에 새언약의 일부는 성취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다윗의 자손만 오시면 된다. 다윗의 자손은 율법이 자기들 마음들 속에 들어온 바리새인의 판결을 받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 당시 어부인 베드로 같은 자들도 마찬가지다. 메시아이냐, 아니냐는 자신이 판결한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다. 자신들이 기다린 천국에는 계급이 있다. 율법이 각 사람의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느 자리를 차지하느냐가 문제다. 영생은 기본이 되고 천국이 약속의 땅에 이루어지면, 그 천국에서 왕 다음가는 자리에 내가 앉고 싶은 것이다. 이들이 아는 천국은 다윗 왕국, 솔로몬 왕국 뿐이기 때문이다. 실은 바벨론, 메데파사, 알렉산드리아, 로마제국이 그들이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다. 그래서 기독교를 국교로 만든 로마제국이 인간의 악마성을 제대로 드러낸 것이다.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가종교로 만든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필연이다.

그 이유는 짐승의 나라에 사로잡힌 남은 자 유대인들이 짐승 중의 짐승으로 예수님을 살해했고,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자들이 남은 자 유대인들이 못 이룬 꿈을 보여준다. 그 나라가 바로 로마제국이다. 곧 하나님 나라다. 다니엘의 70이레 예언 속에 다 들어 있는 내용이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공동체, 곧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공동체, 하나님 나라를 흉내 낸 공동체나 나라가 얼마나 많은가? 주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셔도 들을 귀가 없기에 듣지 못하고, 듣지 않고, 자신들이 꿈꾸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려고 한다. 성경 말씀을 엮어서.

세례요한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고 물은 것은 예수님이 회개하지 않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는 자는 심판을 하시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는 구원하셔야 하는데, 자신이 기다린 메시아의 면모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저는 자가 걷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당시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이 가난한 자들에게는 복음이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복음이었다. 세례요한도 이 복음을 기다렸는데, 세례요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일의 완성, 곧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 했다. 맛 배기만 보여주는 이사야 예언을 행하지 말고, 그 예언의 실체인 하나님 나라를 예수님이 세우시길 기대한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세례요한이 감옥에 있을 때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을 그대로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이 영이라는 말씀이다. 십자가를 동일하게 보지만, 한 쪽은 십자가로 율법을 완성하셨음으로 본다. 다른 한쪽은 죄인이니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한쪽은 십자가에 달린 분이 유대인의 왕이요 온 우주의 주님이라고 하는데, 다른 한쪽은 나의 구원을 위해 피 흘린 예수로 본다. 아니면 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행할 일이 더 있다고도 한다.

성경이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 안에 영생이 있다고 하시니,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는다. 그 이유가 영생 얻기 위해서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목적과 동일하다. 유대인들이 잘못 찾은 영생의 길을 이젠 우리는 제대로 찾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육이다. 예수님의 증인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약속의 땅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주, 곧 심판주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으신 후 부활하신 주님은 자신이 구원할 자들에게만 보이셨기 때문이다.

약속의 땅에서 나타난 주와 그리스도의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유대인의 왕이시다. 그런데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는 핑계로 이 땅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모습이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이심을 전하지 않고, 다른 예수를 전한다. 스데반 집사님을 보라. 부활의 종교라 하면서 결국 유대인들이 꿈꾸는 천국을 가르치고, 결국 종교와 정치권력을 동시에 잡은 자들은 자신이 심판주에 자리에 올라 통치한다.


율법은 주신 당사자인 예수님만 지킬 수 있다. 어떻게 지켰는가? 특이하다. 선악과를 먹은 자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바로 십자가다. 왜 십자가가 율법의 완성인가? 율법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그러나 이 사랑이 없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항상 저주가 따라다닌다. 율법의 성취는 사랑과 저주다. 동전의 양면이 아니라 동시성이다. 인간은 동시성이 불가능하다.

인간은 율법 조항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옳다. 그런데 율법을 지켰다면 반드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나와야 한다. 이 둘이 동시에 나오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여기에는 또한 저주도 나와야 한다. 어렵겠지만 예를 들면, 말씀대로 창조된 세상을 보라. 율법을 말씀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말로 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 즉 율법을 인간 구원을 위한, 축복을 위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율법을 주신 목적이 출애굽 시킨 목적과 동일하다. 여호와만 유일한 하나님, 곧 심판주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이다.

율법의 완성은 심판주의 자리가 여호와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님으로 바뀐다. 심판 주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삼위일체를 믿는 믿음이 장악한 종교계에서는 이런 소리를 하면 이단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이단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물론 오늘날 이단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의 문제와 저들의 문제는 동일하다. 자신들이 진짜 택한 백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특징은 자신을 죄인 중 괴수라 한다. 죄인으로 드러날 뿐이다. 즉 모든 인간이 십자가 앞에서 이단인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바리새인의 율법 중심의 신학이 이 신학이요, 사두개인의 성전 중심의 신학이 이 신학이다. 두 신학의 공통점은 유일하신 한 분이신 여호와를 믿는다는 것이다. 열심당도 다르지 않다.

율법을 지킨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했다. 즉 이들의 관심은 하나였다. 영생이었다. 자기 영광을 구하였다. 이 신앙이 주님을 찾아오기 전 사울의 신앙이요, 주님이 찾아온 이후에도 이 신앙은 포기되지 않는다. 로마서에서 잘 나타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는 고백을 보라.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이나 교인들은 로마서가 십자가만 증거함을 알지 못한다.

인간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 말씀을 믿는다. 그렇게 되면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이라는 말씀을 삭제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로마서 9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요라는 말씀이 율법과 선지자를 관통하고 있다. 즉 인간 쪽에서 ‘나는 약속의 자녀요, 내가 긍휼을 입은 자라는 선언’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그 모습은 남은 자 유대인들이 다 보여주었다.

문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이런 사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참 감람나무, 돌 감람나무를 젖붙이고 꺽는 말씀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새관점을 주장하는 자들은 여기에 또 인간 행위를 집어넣는다. 육에 속한 자들은 무슨 말씀을 보더라도 자기 구원을 포기못한다. 자기 구원을 포기않는 자들은 반드시 자기 행위를 내민다. 믿음이라는 행위, 믿고 행하는 행위다. 이들은 로마서 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뭔지를 모르는 자들이다. 로마서 9장에도 나온다. 하나님 아들의 행위 곧 십자가에 죽으신 행위를 자랑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신칭의 교리를 배운 자들은 이신칭의 교리를 믿는 행위를 보이고, 이와 다른 쪽에 있는 자들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 한다. 여기에 양다리를 걸친 자들도 있다. 믿기만 하지 말고 행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홍해만 건너서 되는 것이 아니라 요단강도 건너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 자들이 언약궤를 앞세워 들어갔음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언약궤 안에 죄의 증거물이 고장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율법이 뭔지를 모르는 자다. 이것이 종말, 마지막 날, 곧 첫째 아담의 최후에 드러난 인간의 모습이다. 이들에겐 저주만 남았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리고 심판이 동시에 이루어진 자리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새관점의 문제는, 이신칭의를 갖고 인간구원을 값없이 제공한 자들과 동일하다. 값없이 주신 은혜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값이 들어있는데, 이들이나 저들이나 아들의 피 값만을 자랑하는 자들이 아니라 구원에 이용하고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려 한다. 구약 이스라엘의 문제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자랑하도록 구출하시고 광야로 인도하셨는데, 그들은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 능력, 곧 유월절은 이스라엘 가운데 반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이신 여호와는 이렇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성도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뿐이다. 말은 맞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십자가에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과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왜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하지 않고,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는가(갈 6:14)? 왜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시는가?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것은 곧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나를 자랑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는 십자가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으로 축소했다. 그 이유는 성령도 받기 전에 구원 얻는데 급했고, 성령도 받지 않은 자들이 성경을 연구해서 구원 얻는 비법을 알려주고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가 그러했다. 구원의 소유권을 십자가 지지도 않는 자들이 소유하도록 하고 소유하고 있다. 지옥도 마찬가지다.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말씀과 사람이 듣고 마음으로 믿어 구원에 이런다는 말씀을 조화시킬 능력은 인간에게 없다. 왜냐하면 이미 이 구조는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 다 깨어졌기 때문이다. 로마서 9장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로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약속의 자녀조차 약속의 자녀가 아님을 선언한다. 그 이유는 말씀의 소유권이 십자가 지신 주님께 있지, 십자가를 지지 않은 인간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을 주시고,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말씀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새관점이나 옛관점이 노리는 것은 교인들 통제다. 한쪽은 죽을 때까지 행위를 요구함으로 죄밖에 나오지 않는 행위에 구원을 걸게 하고, 다른 한쪽은 교리를 만들어 교리에 얽매이게 한다. 여기에서 파생상품이 등장하는데, 인간의 구원욕망과 천국욕망을 채워주는 이단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기성교회와 달리 확실한 구원과 확실한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의 믿음 행위와 함께 다른 행위들을 통해 믿음을 더 확고하게 하도록 유도한다.

달리 표현하면 마귀는 십자가만 제거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십자가의 피 공로 자리에 인간 행위를 집어넣는다. 고소자들이 마귀다. 예수님 옆에 달린 구원받은 강도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죽지 말고, 살아서 이제부터는 강도 짓을 하지 말고 가난한 자를 도와 주면서 구원받은 자의 삶을 보이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을 향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하라는 말과 동일하다. 십자가 안에 거하는 성도는 두 강도이며 구원받은 한 강도다. 일생 육체가운데 살기에 죄의 삯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십자가의 피 공로를 자랑하며 살아간다.

이 말을 구원론으로 듣는 자들이 잊기에 첨언하면,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다. 의와 평강과 희락이 쏟아진다. 하지만 의가 나오는 자들은 반드시 바리새인과 같은 태도를 보인다. 성령의 열매는 말씀대로 열매다. 자기 백성을 책망하니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되고, 죄인으로 드러난 자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사랑이요 희락등이다. 즉 사랑과 희락이 나오는, 자비 양선이 나오는 자들은 십자가만 자랑한다. 그래서 양선이 공격을 당하고 미움을 받는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서 제거당하셨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흔히 말하는 율법대로 살아서인가? 로마 권력에 시비를 걸어서인가? 왜 예수님을 제거하는가? 인간을 악하다 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도움 안 되는 예수는 이 땅에서 영원히 제거해야 한다. 그것이 십자가다. 그래서 십자가의 영을 받은 자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미움받는다. 십자가로 이 세상을 모두 악하다고 하기 때문이다. 뱀처럼 지혜롭게 그 죄를 후벼파니 돌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둘기같이 순결하게 복음을 전한다.

주님이 이 세상에 사람은 없고 뱀의 자손들만 있다고 하셨다면 그 시각으로 이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