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6-25 09:01
전능한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를 믿는 우상숭배자들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7  


 우상숭배

 

 

 

 

 

 

 

 

 

 


관리자 24-06-25 09:01
답변  
만군의 여호와, 여호와 하나님, 전능한 하나님을 믿는 우상 숭배자들

만군의 여호와라는 신명은 사무엘상 1:3절에 처음 등장합니다. 이전까지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였고, 출애굽 전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이라고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바알, 아세라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노아 홍수 심판 이후에 바벨탑이 등장했고, 흩어진 자들은 모두 우상, 곧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우상 숭배 가운데 있는 아브람을 선택하셔서(수 24:2)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했을 때 아브라함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들이 만든 신의 이름은 각자 고유 역할이 있습니다. 물론 그 역할이 상황에 따라 확대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하고, 서로 섞이기도 합니다.

이미 인간들은 하나님(우상)을 인정하고 믿고 있는 상태에서 아브람을 선택하신 겁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상 숭배에 불과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우상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지시하신 말씀을 아브라함이 믿고 따랐을 때 아브라함의 선택은 우상 하나님을 믿는 방식으로 선택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다메섹 엘리에셀이 자신의 상속자라고 했을 경우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아 상속자로 우기는 태도입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의 뜻에 굴복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나온 신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아브라함 마음속에 담긴 우상을 끄집어내시고, 그 우상들을 깨시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계시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 마음속에 담긴 우상을 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로마서 1:21-23절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잇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선택하시기 전에는 우상을 섬겼지만, 이후에는 우상을 섬기지 않았다고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보면 선명합니다. 로마서 1:21-23절 말씀이 이방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알고, 여호와의 이름을 아는 자들이 우상을 섬겼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했을 때는 약속을 하시고 언약을 세우셔서 그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인데, 이 말씀 속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때 그 약속을 자기 방식, 곧 우상을 믿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한 것이 포함 되어 있습니다.

즉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 전체를 통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계시하신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후손들, 히브리 민족들은 근 400년 동안 애굽 신들을 두 눈으로 목격합니다. 각 신들은 이름을 갖고 있었고, 그 기능은 명확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모세가 왔을 때 모세를 보낸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겁니다.

출애굽기 6:3절입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창세기 17:1절에 나옵니다. 전능한 하나님으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아브라함이 구십구세 때인데,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말씀을 엉터리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전능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직접 알려주신 이름입니다. 여기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불신에서 전능한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다는 겁니다(물론 이방인들도 전능한 하나님을 압니다. 그들이 말하는 전능과 다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도 마찬가지지요. 여호수아 24:2-3절입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며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여호수아 22:22절입니다.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 이스라엘도 장차 알리라 이 일이 만일 여호와께 패역함이거나 범죄함이거든 주는 오늘날 우리를 구원치 마시옵소서.”

룻기에서 이 말씀이 그대로 실행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과 전능자의 이름을 동시에 사용합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룻 1:20).”

흥미로운 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모르는 욥과 세 친구도 전능자를 압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이들이 말한 전능한 하나님은 우상 하나님이 됩니다(욥 40:2). 그렇다면 욥이 여호와의 이름을 알았는가? 몰랐습니다. 하지만 욥기 1:21절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은 출애굽기 3장에서야 알려주십니다. 아브라함조차 몰랐습니다. 그런데 욥이 어떻게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욥 1:21) 라고 합니까?

창세기 2:4절에서부터 여호와 신명이 사용됩니다. 욥은 여호와 신명을 불렀고, 창세기 4:26절에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롯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부른 이름이 올바른 이름이냐는 겁니다. 아닙니다. 하지만 욥은 자신에게 나타나신 전능한 하나님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던 전능한 하나님은 우상에 불과하며, 자신이 부른 여호와조차 우상임을 알게 된 겁니다. 그리고 난 후 여호와를 불렀다는 것을 다시 해석해야 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서도 반복됩니다.

욥은 욥의 전생애를 통해 전능한 하나님과 여호와를 증거하고 알게 된 겁니다. 즉 세 친구를 위해 번제를 드리고 기도했습니다. 전능한 하나님의 의미, 여호와 신명의 의미가 욥을 통해 부정되고 새롭게 규정됩니다. 따라서 신명은 부정되는 것을 반드시 포함해야 합니다.

여호와 신명은 출애굽기 3장에서 처음 알려 주십니다. 13-15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로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이름을 왜 영원한 이름이고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라 하셨는지 아실 겁니다. 여호와 신명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기 위해 모세를 보냈을 때, 구출 받을 자들이 이름을 물었기 때문에 알려주신 이름입니다. 전능한 하나님을 알려주실 때도 아브라함의 불신이 있었고, 조상의 여호와라는 신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왜 애굽에 있는 자들이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전능한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이름을 원할까요? 그들이 사백년 동안 배운 것이 신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뭐라고 합니까?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 32:4하).” 모세가 내려 오지 않자 백성이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러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엇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를 갈라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시고, 바로의 군대를 몰살하신, 만나와 물을 주신 여호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의 눈에는 여호와가 자신들을 위한 우상 여호와였던 겁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봐도 동일 합니다. 두 눈으로 목격하고 체험한다고 해도 여호와를 알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의 눈으로 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만족 못하고 이름을 묻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겁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각종 동물에게 이름을 줍니다. 선악과를 먹은 후에 이 습성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게 합니다. 그래서 신들의 이름을 인간이 직접 짓는 겁니다. 놀랍게도 참 하나님은 인간이 이름 짓는 그 자리로 들어오셨습니다.

참되신 여호와가 여호와를 믿는 자들에 의해 조롱받습니다.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자신을 위한 여호와 신명을 붙인 겁니다. 우상 숭배는 나를 위한 것이 우상 숭배라고 십계명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이들은 자신들을 인도할 황금 송아지를 여호와로 부름으로 말미암아 이 계명에 위배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자신들은 여호와만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불붙은 산 아래, 십계명을 받은 산 아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면 이해가 될 겁니다.


만군의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은 사무엘상 1:3절에 처음 등장합니다.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 이 시대는 사사시대입니다. 그 때에 왕이 없음으로 소견에 옳은대로 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왕입니다. 열방과 같은 왕입니다.

그런데 한나가 만군의 여호와라고 처음 부릅니다(삼상 1:11). 자식이 있는 브닌나가 자식이 없는 한나를 괴롭혔습니다. 이에 한나는 울었고, 괴로워했습니다. 우린 한나가 자식 없는 설음에 대한 울음과 괴로움이라 생각하지만, 한나의 기도를 보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나는 철저하게 율법정신을 따르고 있습니다. 율법을 제대로 해석하는 겁니다. 율법대로라면 한나가 범죄해서 자식이 없고, 브닌나는 그렇지 않은 겁니다. 출애굽기 22:22-24절을 보면 과부와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해롭게 하면 너희 아내가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율법을 보는 안목이 어떨까요? 과부를 볼 때 왜 과부가 되었는지를 생각하겠지요. 율법대로 살지 않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브닌나가 한나를 보는 안목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한나는 이런 상황이 율법이 율법대로 되어지는 상황으로 본 겁니다. 한나의 고통은 누구의 고통입니까? 율법을 멸시하기에 여호와의 고통입니다. 한나가 잘났다고 아닙니다. 죄가 없다가 아닙니다. 율법을 버리고 소견에 옳은대로 하는 시대라는 겁니다. 한나의 모습은 마치 나오미가 말하는 전능한 하나님이 쫄딱 망하게 하셨기에 다시 자신의 기업으로 돌아오게 하셨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나오미가 뭘 잘했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한나가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을 새롭게 지어 부를 필요가 있을까요? 만군이라는 뜻은 하늘의 군대, 군대, 전쟁하는, 전진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용어의 출발은 마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군대입니다(창 32:3).

천군을 대동하여 전쟁하시는 여호와를 부르는 이유가 뭘까요? 지금 누가 한나를 괴롭게 합니까? 브닌나와 그 남편 엘가나입니다. 대제사장 엘리입니다. 이들이 현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천군을 대동하여 전쟁하시는 여호와를 부른 목적이 누구와 싸워달라는 겁니까? 이방 민족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싸워 진멸해달라는 겁니다.

실제로 대제사장 엘리 가문을 영원토록 심판하시고(삼상 3:13), 여호와께서 분노함으로 왕을 주시고, 진노하시므로 왕을 폐했습니다(호 13:11).
 
다윗 왕 때까지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다윗의 대적들과 싸우십니다(대상 11:9, 17:7). 소년 다윗이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블레셋 사람 골리앗이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워 이깁니다(삼상 17:45). 사실은 누가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했습니까? 사울 왕입니다. 이후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 왕과 싸우십니다(왕상 18:15, 왕하 3:14). 다윗의 시편에도 만군의 여호와가 많이 나오는데  앞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둘로 쪼개시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멸하십니다.

이사야 1:1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라고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싹만 남기도 다 진멸하신 겁니다.

이사야 37:32절입니다.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이다.” 이제 이스라엘의 구속자가 만군의 여호와가 되십니다(사 44:6). 학개서를 보더라도 만군의 여호와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과 싸웁니다(학 1:2,5,9). 그리고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한나가 처음 불렀던 만군의 여호와의 원칙이 그대로 역사 속에서 펼쳐집니다. 스가랴 13:1-2절입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약속의 자손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분입니다. 여호와의 이름, 곧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여전히 전쟁을 하시는데, 그 방식은 약속의 땅에서 피신하는 방식입니다.

야곱의 자손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 용사이신 여호와는 바로의 군대를 수장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출애굽은 예수님 대신 두 살 아래의 아기들이 살해당하는 전쟁입니다.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함을 이루셨습니다(호 11:1, 마 2:15). 예수님의 전쟁 방식은 피하는 방식이요, 잡혀서 고난받고 죽는 방식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신명인 전능한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의 모습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으로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로 전쟁에서 승리하셨고, 십자가로 새언약을 세우셨고, 십자가로 전능함을 보이시고 새 창조를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전능한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 의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 의해, 만군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 의해 발생한 사건입니다.

이러함에도 오늘날 교회는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가르치고, 만군의 여호와를 힘들 때 찾으라고 하며, 자신의 탐심을 이루기 위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었다면 전능한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라는 신명들이 왜 새롭게 등장했는지를 알 터인데, 여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 이용해 먹겠다는 겁니다.

교회가 여호와를 경외하라, 여호와를 찬양하라, 만군의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라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곧 교회가 우상 숭배의 전당이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 이름 외에는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다고 하니 인간들은 예수 이름은 구원용으로 이용해 먹은 후, 여호와 하나님, 전능한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를 다시 찾는 겁니다. 이들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가 되심을 위한 세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시어 주가 되신 예수님은, 이들에 의해서 멸시당하고 조롱당하는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전쟁을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십자가로 승리하신 그 승리의 전쟁에 참예한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