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2-13 22:31
2021 십자가 마을 겨울 수련회 안내
 글쓴이 : 관리자 (61.♡.61.129)
조회 : 1,051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를 아래와 같이 개최합니다.


일 시: 2021년 1월 10일(일) ~ 12(화)

장 소: 가야산호텔 (경북 성주군 수륜면 가야산식물원길 52)

강 사: 이근호 목사

주 제: 두 종류의 구원 (사무엘상 강해)

회 비: 10만원 (유,초등생은 5만원)
-----------------------------------------

각 지역 책임자

서울 경기: 이미아 선생 (010-9998-4171)

부산 경남: 이창섭 목사 (010-4800-4654)

대구 경북: 이상규 집사 (010-2685-8211)

광주 전라: 김을수 집사 (010-2627-7800)

대전 충청: 김종인 집사 (010-8808-7111)

강원 제주: 정인순 목사 (010-2676-6823)

울산 기타: 이능우 집사 (010-5109-2969)
-----------------------------------------

수련회에 참석을 원하시는 분들의 각 지역 해당 책임자께 12월 27일까지 신청하시면 됩니다

관리자 20-12-13 22:33
 61.♡.61.129 답변  
2021 겨울수련회 교재
                 
            두 종류의 구원

            - 사무엘상 속의 그리스도 -       
               

Ⅰ 서론

1. 현실의 진실 

인간은 자신이 더럽다는 생각을 못한다. 그저 의미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여긴다. 가끔은 의미없는 기쁨에 환호하지만 본인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모른다. 고통만이 현실이고 인간은 거기서 출생한 것이다. 즐거움이란 고통을 잠시 잊은 경우다. 그래서 장난이나 익살이나 놀이를 원한다. 현실에서 잠시 비켜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현실이 아니라 고통이 현실이다. 더러움이 현실이다. 여기에 ‘나’가 등장한 것이 화근이다. 그 ‘나’는 고집스럽게 고통이나 슬픔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고통을 삶의 진실로 삼은 적이 없다. 그만큼 우리는 내부로부터 망상을 꾸며내고 있고 그 망상 안에서만 돌아다니고 싶어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는 자세가 인생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악과 선은 여기서 시작된다. 자신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경우나 대상체를 악이라고 정해놓았다. 선이란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경우나 대상체로 정해놓았다. 이러고서 진실을 짜맞춘다. 이렇게 되면 진실은 악의 모서리와 아귀가 맞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현실은 저주받은 것으로 퍼즐 그림이 짜맞춰지는 것이다.

여기서 낯선 발자국을 만난다. 두 개의 구원의 길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먼저 그 길을 가신 주님의 길, 십자가의 길을 답습하는 자가 성도다. 진실이 등장하게 되면 사람들은 고통을 느낀다. 상주한 악이 악다운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다. 거짓이 진실의 둘레를 회전한다. 저주가 인간을 어떤 식으로 변모시켰는지가 거짓과의 만남에서 드러난다. 저주의 독가스가 가득한 어항 안에서 인간들은 진실에 목말라 한다.

삶의 공허함(진공 느낌)⟶ 신경질적인 열광⟶ 그룹 형성을 촉구함⟶ 이념에 집결됨⟶ 계급 형성⟶ 전쟁⟶ 승리자로 환생

승리자가 되는 즐거움으로 고통을 잊으려고 허망함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를 해석한다. 차라리 ‘벌써 죽은 유령으로 살라’고 말씀하신다. 비로소 성도는 비-자발적으로 진리에 합류되었음을 안다. 고통과 즐거움이란 반복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2. 자아가 문제다

나는, ‘너는 존재한다.’라는 대답을 듣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의지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인지는 사실상 알 수 없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자신으로부터 달아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과 마주하는 법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의 광기는 편집병, 즉 동일성의 광기이자 자신의 절대적인 예외성을 손상시킬 수 있는 일체의 것을 무조건 지키려는 광기이다. 자기를 으뜸가는 기원성으로 설정한다.

타인을 대할 때도 이런 성향이 발동한다. 자신이 상대하는 타인의 이면에 달라붙어 자신이 만나게 된 모든 경우의 항(項)들을 통해 통합적인 관계망을 구성한다.

누군가를 향하여 말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내가 말을 하는 순간, 본인이 사라지고 가상 자아가 대신한다. ‘나’, ‘이것’, ‘여기’, ‘지금’은 경험이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나는 대명사 ‘나’를 사용하여 동일한 자아인 나를 나 자신으로 명명하지만 나는 언제나 이미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내 발언의 형식은 그것을 지시하는 것과 같지 않다.

이 논리는 사물, 어떤 것, 어느 것에나 다 적용된다. 사용하는 말과 그 말의 내용 사이에 존재하는 역설이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복화술의 허구다.

나는 누구인가? 나란 실제로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그 사람이 누구든지 특정 말하는 행위 속에서 스스로를 말하는 자로 지칭하는 인물이다. 한편 상대방은, 스스로를 ‘말하는 자’로 일컫는 사람에게 말 걸기로 걸려든 사람이다. 제대로 ‘남’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상대방’이 내가 한 말을 다 들어주기를 고집한다. 하지만 상대는 진정 나와 상관되는 자가 아니기에 나의 뜻은 절대로 대답의 형식으로 상대방의 반응을 얻어낼 수가 없다. 의사소통에 있어 결정적인 사실은 소통이 결국에는 가능하지 않다는 점과 적절한 대답이 실패해야 한다는 점이다. 상대 품 안으로 제대로 닻을 내릴 수 없다.

의사전달에 늘 실패한다는 것은 ‘나’와 ‘타인’ 사이의 간격 문제가 아니라 ‘나’와 ‘나’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지만 그자가 누구인지 아는 데 실패하고 다시 본인에게 되돌아온다. 궁극적으로 본인은 가상 본인을 자기를 지키는 보호막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보호막과 자기 사이의 간격 안에는 나의 것으로 마저 돌릴 수 없는 여분의 것이 생긴다. 그 차이를 온전히 나의 것으로 돌릴 수 없다면 그로 인해 ‘나’는 ‘가상의 나’와 결코 일치되지 않음이 증명된다. 타인을 의식해서 나를 지키기 위해 장만한 나의 보호막이 온전히 나를 가려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 원인은 자신이 이미 거대한 질서 안에 삼켜져 있기 때문이다. ‘나’라고 여기는 것이나 ‘남’이라고 여겼던 것들도 실은 거대한 질서의 활동 일부가 되어 있다. ‘나’는 ‘나’라는 가면을 쓰고 활동 중이다. 거대 질서 안에 나만의 것을 따로 챙기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쓴 가면이다. 가면은 ‘나’만의 것을 챙기기 위한 구원 활동의 일환이다.

맹렬히 이 거대 질서에서 따로 빠져나오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이 벌리는 모든 활동이나 말들도 온전히 자기만이 절대가 되기 위한 노력이다. 이 노력을 통해서 그동안 인간을 지배해온 공적 질서의 실상이 드러난다.

모든 것을 다 묘사할 필요는 없고 알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온전한 구원의 동지를 만나게 되면 그분과 비교해서 나의 구원 노력이 얼마나 가짜요 헛수고에 불과한지 알 수 있다.

3. 공적 세계의 모순

지배자들이 통치하는 이유는, 왜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지배 행위는 궁극적으로 지배할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백성은 그것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박탈한다.

개인은 근원적으로 자기 일 말고 남의 일에 간섭할 권리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어떠한 권리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의 권리이며 결국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될 수 있는 권리자다.

즉 지배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들로 이루어진 잉여 공동체가 지배자를 지배한다. ‘지배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란 모든 사람(everybody)을 의미하는 동시에 누구나 (whoever)를 의미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평등을 보장할 지배를 원한다. 누구나(anybody)와 다른 모든 사람(everybody else)과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 정치적인 것(통치성)이 사라지는 조건으로 빈번하게 조건들을 다시 제정함으로써 정치적인 것의 한계를 변경해 나가려는 것이다.

즉 실제적 평등과 형식적 평등 간의 대립을 항상 생각한다. 형식적 평등은 현실 불평등의 겉모습이다. 현실상 가차 없이 내몰리는 경쟁 마당에서 이미 출생부터 차이 난 불평등한 명백한 불공정 속에서 가혹한 경쟁자들은 그 격차를 더 벌려놓으려고 안달이다. 여기에 인정사정은 일절 없다. 따라서 인간들은 하소연할 곳을 찾고 매달리기 마련이다.

겉으로는 엄격한 법에 대한 헌신으로 평등이 마련된 것처럼 보이지만 평등 밑에는 사유재산을 통한 쾌락과 고통의 셈법이 있다. 법적인 평등 세계를 극찬하는 것이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적 평등을 위해 형식적 법 제도를 끊임없이 흔들어대야 한다. 이상적인 평등을 위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 국가 형식은 계속 분열 조짐을 보여야 한다.

형식적 평등을 극복해서 실제적 평등으로 들어섰다고 여길 때에 나타나는 것은 ‘사목(司牧) 정치’다. 소위 ‘장로(長老) 정치’다. 연장자의 이미지를 지닌 자만이 국가의 수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성한 목자가 우리 세상을 지배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국가 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병폐에 대해서도 신성한 목자는 전지전능한 처방전으로 해결책을 낼 수 있음에 대한 믿음의 가치가 살아 있기를 원한다.

‘타인을 다스릴 권리가 없는 자’의 ‘다스리지 않겠다’는 겸손의 가치를 사적으로 고이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4. 하나님의 통치 방식

하나님께서는 이런 백성들의 의도에 틈새를 벌리신다. 백성들이 고대하는 이상 세계를 미래에 도착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간 안에서 구성해서 개입시키신다. 이 시간은 약속을 실어나르는 시간이 두 개의 통치가 같은 시간 안에, 같은 공간에 겹쳐지게 하신다.

누구에게나 오는 약속의 시간도 아니요 아무에게나 오는 시간도 아니다. 어느 누구도(nobody) 알지 못하게 오는 시간층이다. 그것은 공적 통치 안에서 공개적으로 행해지는 ‘제비뽑기’ 방식의 통치다. ‘제비뽑기’란 인간 세계의 일체의 근원을 부정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everybody)의 기대를 피해가신다. 모든 인간을 좌절시키신다. 심지어 선택받은 당사자까지! “사무엘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삼상 10:20)” 공적으로 제비뽑기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하여 미리 사울 머리에 사적으로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셨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 맞추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 기업의 지도자를 삼지 아니하셨느냐(삼상 10:1).”

즉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들의 근원성을 공격하셔서 일체 인정하지 않으신다. 인간 세계 구성 자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들만의 세계가 따로 형성되는 것을 묵과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5. 준비해두신 나라

하나님의 이야기가 지상에서는 ‘죽은 자의 이야기’가 된다. 자기를 향해 달아오는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여서 그 죽음으로 온통 세상을 훑고, 쓸고 다녀야 하는 자들의 이야기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에피소드도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사건 안에서는 ‘죽음 이야기’로 후끈 달아오르게 된다.

다윗은 ‘이미 죽은 자’ 신세가 되어 사울 왕에게 쫓긴다. 다윗은 늘 죽음에 포위되었으며 어디를 가든지 죽음이 주변에 형성되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예상치도 않는 약속이 마중 나오고 그 안에서 생존한다. 거룩한 떡을 먹게 된다(삼상 21:6). 쫓겨가면서 다윗이 구성해내는 세계는 마치 인간 세계 밖의 세계로서 유령 같은 세계며 인간 세계로부터 공격 대상이다.

사무엘은 망령이 되어 현실에 개입한다.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 모양이 어떠하냐 그가 가로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삼상 28:14).”

망령이란, 어떤 상황을 거쳐서 제대로 돌아올 자기 자리에 찾아오는 것이 당연함을 말해준다. 죽으면서도 영원히 떠나서는 아니 되는 요소를 다윗이나 망령이 지정해준다. 다윗의 여정은 세상 밖에 나가 있던 자가 예전에 없는 새로운 나라 형성을 위해 다시 찾아드는 과정이다. 이러한 여정이, 이 세상 나라 사람인 사울 왕에게는 공포다. 마치 사무엘 망령을 맞이해야 하는 경우와 같다.

세상 사람들에게 공포를 유발하는 망령의 나라, 바로 이런 나라가 주님이 준비해두신 나라다.
죽음이 나를 향하여 달려오는데 그 죽음을 향해 달려갈 것을 명받은 자들이 주님이 준비해두신 나라의 백성들이다. 이 지상에 이미 죽어 사라진 자로서 발자국을 남긴다. 더 이상 세상 짐을 질 필요가 없다. 인간 세상을 하나님께서 안 받으신다는 흔적만 남기자.

 
Ⅱ 본론

1. 사울의 등장
사울이 카리스마적인 인물이라는 데서 사사와 영속성을 갖는다(삼상 9:15-16/ 10:6, 12-13/ 11:
6). 하나님이 사울을 통해 보여 주시고자 하는 뜻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결코 사울 개인의 자질이나 능력에 기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울은 사사와 같은 계열에 서 있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왕 제도 자체는 백성을 왕 개인의 것으로 사유화(私有化)하는 동시에 운명도 같이 되는 제도이므로(삼상 8:9-18) 만약 왕 제도가 구성되고 난 뒤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언약의 땅의 법칙에 부합되게 살지 못할 경우에는 왕 개인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무너지는 위험성을 갖게 된다(신 17:14-20/ 삼상 12:13-15/ 13:13).

여기서 사사의 한계성이 드러난다. 사사 임무 수행은 개인의 자질과 상관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백성의 운명이 이방의 왕 제도처럼 한 인간에 예속된다면 그 인간의 한계와 무능으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가 책임져야 한다. 그들을 사용하신 것은 그들의 변변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승리를 가져온 것을 봐서 이스라엘의 보호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한 인간이 출중해서 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허락하신 것은 왕 제도가 이방 나라와는 달리 이스라엘에서는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고자 함이다. 소위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처신은 어떠해야 하는가?

언약 안에서의 왕이 되기 위한 기름 부음을 입는 것이 아니라 기름 부음을 위한 왕이어야 한다. 그러면 언약 안에 기름 부음이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기름 부음이란 성별(거룩)과 관계되고(창 28:18/ 출 29:2, 30:23, 26) 부름이란 선택과 관계된다(출 28:41, 30:23/ 레 8:30). 따라서 기름 부음 받은 자(또는 기름 발린 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일반인과는 달리 구별되도록 선택된 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보편성만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특수성을 두어 그 특수성 안에 보편성을 흡수, 집약시켜 구원을 이루어 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단, 이 특수성의 등장이 보편성에 어떤 취약점이 있다든지 제도상 모순 된다거나 문제점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보편성을 유지해 나가는 기반이 특수성이 내포하는 본질과 관련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기름 발린 자가 하는 특수하고 거룩된 작업에 무관심하면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선택도 무너진다.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간택할 때 기름을 부으라는 명령을 사무엘에게 내린 것은(삼상 9:16, 10:1) 왕이라는 제도와 직능이 제사장과 같은(삼상 2:18) 차원에 두어지는 것이며, 이는 구원이 그동안 카리스마를 입은 사사 본인의 자질과 무관했던 시절은 지나가고 왕이 모세 율법의 기준으로 봐서 백성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책임을 홀로 져야 하고 회복시켜 주어야 할 형편에 놓여 있다.

이스라엘의 성패가 왕이라는 인격 하나에 예속된 이 시점에서 왕이 취할 태도는 율법의 완성이라는 차원에서 카리스마적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삼상 12:13-16). 이제 왕이 하는 일은 사사시대 때 백성들이 어떤 위기와 외부의 침입에 대해 자신들의 무기력에 절망하고 있을 때와 거의 동일한 역할을 한다. 자기의 왕을 구한 죄악도 포함된다(삼상 12:19). 이스라엘은 왕을 얻어 놓고서야 비로소 우리에게는 왕이 필요 없음을 안다.

결국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고발하기 위한 왕이었다(삼상 12:5). 이제 사울 왕 개인의 신앙적 위기는 곧 이스라엘 전체의 위기로 여겨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된다. 사울 왕은 개인적 자질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의 법보다 백성의 동향에 더 신경 썼다. 그는 백성의 편에 서지 않아야 한다는 카리스마적인 임무를 망각했다. 백성을 고발하기 위해 세워진 왕이기에 왕의 바른 자세는 늘 백성들로부터 호응받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율법을 선택해야 한다. 사울은 이점에 실패한 것이다(삼상 13:8, 14:9, 15:24). 사울과는 달리 아들 요나단은 여호와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신앙고백을 한다(삼상 14:6). 이는 왕의 기능을 바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왕 자신도 이러한 왕적 직능에 예속되어야 한다. 왕적 직능이란 제사나 수양의 기름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있다(삼상 15:22-23). 이 순종이 바로 약속의 땅에서 구현하고자 한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체제이다.

2. 사울의 실각
     
다윗 이전에 사울 체제에 도전한 자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요나단이다. 사무엘상 14장에 보면 왕만이 행사할 수 있는 전쟁 개시를 그가 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카리스마적인 맹세를 그는 무시한다. 그것을 무시하는 이유는 왕이란 왕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백성의 구원을 위한 왕이라는 것이다(14:29). 조금 후에 백성들이 기다리기에 지쳐 율법을 어기고 송아지를 피채 먹는 일이 발생한다(14:32-3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미 전쟁에 성공한 후였다. 여기서 무엇이 범죄인가 하는 문제가 관심거리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14:38). 이 사실을 두고 사울은 하나님께 물어본다. 그 결과 백성들은 면제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이 남게 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만약 죄라면 그것은 사울 왕가의 책임임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최후에 남은 자는 사울이 아니라 요나단이다(42절).

사울은 요나단을 죽이고자 하나 백성들은 요나단을 통해서 승리하여 구원을 가져왔는데 어떻게 구원자를 죽일 수 있느냐고 송사한다. 사울은 자신의 맹세에 입각하여 죄를 결정하지만 백성들은 구원의 성취 능력을 가지고 죄를 결정하려고 했다(45절). 꼭 왕이 아니더라도 구원자는 따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울 왕이 가진 카리스마의 일부가 붕괴됨을 나타낸다. 즉 왕의 고유 권한이 상대화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 꼭 사울 왕을 통해서 일하지 아니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왕가의 균열은 도전받는 왕위의 조짐이다. 이것은 후에 또 다른 왕, 다윗 등장의 정당성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 틀림없다. 왕과 그 아들 요나단의 갈등은 다윗 통치 이후 여러 번 나타나는 모반이 다만 왕가의 대를 잇는다는 구실이라면 그 부당함이 쉽게 밝히는 데도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요나단조차도 다윗의 정통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20:16). 이토록 다윗 등장의 정당성은 사울 왕가인 요나단에게도 지지받는 일이었다. 요나단이 이해하는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다.”라는 것인데 이는 어린 다윗과 일치된 생각이었다(14:6/ 17:47).

이스라엘에게 왕이라는 직능은 하나님이 왕 없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그 방식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세 언약이 겨냥한 도달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한 언약의 땅의 유지책이다. 거기에 비해 사울 왕은 율법이 지닌 고발의 기능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아니했다. 이것은 직능에 위배되는 것이다.

다윗의 선택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사울의 어떤 점을 고발하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카리스마적인 사무엘의 선택마저도 거부하고 하나님이 직접 선택에 나섬으로써 인간과의 어떠한 접촉점도 허락하지 아니한다(16:6-13).

제사와 율법의 노선에서 벗어나 있다(16:2-5). 제사와 율법마저도 다윗의 자의적 행위에서 재해석 되어야 한다. 사무엘의 등장이 엘리 제사장 가문을 고발하기 위해서라면 다윗의 등장은 사울 왕가와 거기에 고착되어 있는 백성들의 현 사고체제에 대한 고발이다.

인간의 선택행위가 얼마나 부실했으며, 율법해석에 얼마나 큰 실수를 하고 있는지 새로 등장한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선택과 활동으로 분명해진다. 이방 나라들처럼 왕을 달라는 요청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바로 이해했다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주장이다. 왕은 하나님이 선택하는 것이지 인간이 선택할 권리가 없다.

왕이란 직능은 율법이 추구하고 목표로 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왕은 단순히 백성의 대표자만이 아니라 율법에 의한 중보자적 기능도 있다. 따라서 왕이란 제사장직까지 흡수하게 된다. 왕을 세움으로 자신들의 부르짖는 행위를 대신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왕직 자체가 율법의 속성으로서 백성들에게 죄를 들추어 저주하는 기능이 있음을 망각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제 무(無)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카리스마적인 직능까지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율법과 마찬가지로 그것도 새로운 선택 안에 흡수한다(16:13). 사울과는 달리 다윗의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전개하는 것은 어린 사무엘의 의미와 맥을 같이하고 있음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이다.

여기서부터 문제는 다윗이 보여주는 왕적 사역이 어떠하며 여기에 대한 이스라엘의 양분된 정치 상황과 태도를 검토하는 일이다. 동시에 두 왕이 존재하면서 나타나는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생성되며 발전되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서서히 해체되면서 그 속에서 숨소리를 내고 있는 또 다른 실체를 지닌 이스라엘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일까?

3. 다윗의 등장

다윗이 사울에게 배척받게 된 것은 백성들로부터 직접 주목을 받을 때부터이다(18:7-9). 사울 자신이 이스라엘에게 있어 백성들을 향한 유일한 통치양식으로 지속시켜나가고 싶은데 다윗으로 인해 차질을 빚고 있다고 여겼다. 특히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 이 시점에서 다윗의 긍정적 활동으로 백성들의 눈에 자신은 버림당한 결정적 증거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울은 스스로 자신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다윗을 사위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를 전쟁터에 내보냄으로 다윗 죽음에 대한 책임회피의 구실도 됨을 염두에 두고 다윗을 위험한 전쟁터에 보낸다(18:25-27). 그러나 그것이 사울과 다윗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쳐지는 계기가 되는데 원인은 한쪽은 하나님이 같이 하지만 다른 한쪽은 같이하지 아니한다는 차이 때문이며 원수 관계로 표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18:28-29).

이후부터 다윗의 편이 아닌 것이 곧 하나님의 원수란 등식이 성립된다(시편에서). 따라서 다윗의 활동에 따라 하나님의 원수가 새로운 양상으로 정리된다. 다윗이 쫓겨 다니면서 사울 왕, 즉 기름 부음을 입은 자에게 행하는 태도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면 곧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뜻에 무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윗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도망자로서 살면서 그는 무엇을 이스라엘에 남기며 보여 주고자 했던가? 그것은 모든 것을 무(無)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도 다윗에게는 해당이 된다(21:1-6). 거룩과 비거룩을 다윗의 활동에서 다시 봐야 하며(23:9/ 30:7), 원수로부터 배척받은 것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의 심정과 동일한 차원이기 때문이다(23:21/24:17). 그때부터 다윗은 없이 지내는 왕, 악인들에게 쫓겨 다니는 왕, 비천하고 소외된 자로부터 환영받는 왕(22:1-2), 그런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카리스마적인 구원자의 역할을 수행한다(30:7-20).

여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그 전리품(헤렘)을 유다 장로들에게 나누어준다(30:26). 이는 여호와 전쟁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여호수아와 동일한 차원에서 이루어짐을 유다 지파에 알리는 셈이 된다(수 22:8). 이처럼 그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카리스마적인 직능인 기름 부음에만 기대를 건다(24:5-6). 그는 왕 직능을 원초적인 이스라엘의 모습을 대변하는 가운데서 발견하고자 한다. 그 원초적 모습은 긍휼 이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이스라엘은 구원될 수 없는 존재로서의 이스라엘을 규정한 모습이다. 따라서 구원이란 곧 긍휼이다. 긍휼을 이해 못하는 자는 비-이스라엘적이다.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은 다윗이 왕으로서 보여준 긍휼에 무관심함으로 하나님이 그를 친히 치신다(25:38). 그뿐 아니라 사울 왕도 그 아들과 함께 블레셋 전쟁에서 사망한다. 한 왕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를 경험하고(28:18) 새로운 왕이 그 사실을 애도함으로서 앞으로 새 왕이 등장해서 통치하는 방식은 이스라엘의 실패로 받아들임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기대를 거는 방식임을 알게 된다(삼하 1:16-27).

Ⅲ  결론

단지 성도이기에 제대로 죽는다. 주님과 동류라는 이유로 제대로 죽는 것이다. 세상이란 거대 질서는 주님을 비참하게 만들고 성도를 비참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반면에 악마는 세상을 격려한다. 희망을 제시한다. 마치 거대한 용의 몸통 같다. 악마는 인간들에게 말한다. “내 등에 올라타라. 살려줄게. 딱 붙어서 떨어지지 말라”고 하지만 복음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생애가 악마로부터 과격하게 거절당한 삶임을 알린다. 이를 근거로 세상은 악마와 더불어 불바다가 된다.

스스로 만든 관점과 말과 질서체제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인간을 가리는 그 어떤 것도 소용없다. 사람이 죽는 것은 죽을 만하기 때문이다. 죽음 앞에서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지 말자. 죽음을 지연시켜도 소용없다. 그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 것에 감사하자(롬 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