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9-10 21:10
20230910 이사야 강해 10강 사 3:13-4:1 많이 사랑 받은 자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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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09-1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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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0 이사야 강해 10강 많이 사랑 받은 자

하나님 말씀 이사야 3장 13절에서 4장 1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3:13~4:1)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을 국문하시되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 너희 집에 있도다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뇨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리라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 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지환과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와 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 너희 장정은 칼에, 너희 용사는 전란에 망할 것이며 그 성문은 슬퍼하며 곡할 것이요 시온은 황무하여 땅에 앉으리라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오직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하여 우리로 수치를 면케 하라 하리라”

남 유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하실 내용, 그것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그 심판의 결과가 어떠할 건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3장 1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여호와의 대적이 누군가?
여호와의 대적이라면 이스라엘이 아니어야 한다는 게 우리들의 생각이죠.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출하신 이후에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면
이 포도원의 주인인 여호와께서 책임지고 지켜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 포도원을 삼킨 자들에 대해서 여호와께서 국문하시겠다라고 하시는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죠. 백성들도 마찬가지인데
이 포도원의 주인이 누굽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잖아요.
그러면 포도원을 만들었으면 주인이 지켜야 되잖아요.
그것이 우리들이 갖고 있는 논리예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으면 그 약속대로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
그 땅에서 강대한 나라를 이루어 주셔야 된다라는 것이 그들의 신앙인 거예요.
그러나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기를 시작합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자신들이 왕을 요구했죠.
그 왕을 요구했을 때 그 왕은 누구를 닮았느냐? 하면 왕을 요구한 그들을 닮은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이들은 그 왕 자체가 사람을 위한 왕이잖아요.
열국과 같은 왕을 달라고 했기 때문에
이 왕들의 행세조차도 누구를 닮게 되느냐? 할 때는 이방 나라를 닮게 됩니다.
왕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 밑에 있는 고관들은 볼 것도 없겠죠.

이 당시에는 왕 중심이잖아요.
왕의 말이 곧 법이 되는 그러한 시대니까, 율법은 이미 물 건너갔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 믿으면 밥을 먹여줍니까? 취직을 하게 해줍니까?
시험 성적을 잘 나오게 해줍니까? 사업을 잘 되게 해줍니까?’ 이런 논리와 같은 거예요.

율법보다는 그들이 들어간 그 땅의 속성을 고스란히 닮아서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멸시하는 그런 태도를 취합니다.
장로들과 방백들 이렇게 나오죠.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
방백들이라고 하면 고관들이에요.
고관들이라는 것은 이 정치 체계에 있어서 이 권력이 높은 자들이고

장로들이라고 하면 말씀에 대한 두려움 이런 것들이 많은 자들이 장로거든요. 성경에 보면.
말씀을 많이 아는 자가 장로가 아니고.
하나님에게 엄청나게 얻어터졌으니까 장로가 된 거예요. 표현을 하면.

그런데 이 장로들과 방백들을 국문하시겠다는 거예요.
장로들이라고 하면 말씀에, 율법에 대해서 으뜸이어야 되고 본을 보여야 되는 위치에 있지만
이들이 앞장서서 율법에 대적하는 짓을 한 겁니다.
‘포도원을 삼켜버렸다’ 라는데 삼키는 방식이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 너희 집에 있도다”
여기에서 가난한 자라고 했을 때는 우리가 말하는 가난한 자와 달라요. 이 땅에서.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게 이 선지서를 보게 되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나라를 원하신다. 정의로운 나라를 원하신다’ 이렇게 주장을 하거든요.
정의 구현 사제단인가 윤석열 정권 퇴진하면서 돌아다니면서 미사를 하잖아요. 그죠?
그 사람들의 그 모습이 이런 본문들을 보고 흉내를 내는데,
흉내 낸 자들이 예수님을 살해했다라는 것을 그들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두려워한 자들이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입니다.
이 당시에 가난한 자들은 이 율법에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이라고 소개하면서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를 돌아보라 하셨거든요.

왜 돌아보라고 하는가? 하면 ‘너희도 저들과 똑같았다’라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 게 아니고
똑같았는데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출을 받았다라는 거예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말씀하시기 위해서 고아와 과부, 이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라는 겁니다.
그 돌아보는 행위 자체가 유월절 어린 양의 그 피 사건을 반복하는 행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 얘기예요. 먹고 사는데.
요즘 우리 민수기 28장 29장을 보잖아요.
제사가 1월달부터 시작하여서 7월달로 끝나는데 이제 월요일, 내일 장막절을 보게 될지 모르지만
장막절에 제물은 가득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손들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그렇게 하면 뭘 주시겠습니까?’예요.

어떻게 말씀대로 지켜도 인간은 말씀대로 살 수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들은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 자체를 버려버린 거예요.

우리는 이 말씀을 보고 ‘가난한 자를 돌아보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하는데
가난한 자를 돌아보면 주님은 다른 쪽에 와서 이야기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온갖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모든 율법을 범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구약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잘 하지 않잖아요.
율법을 보게 되면 제가 설교를 할 때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율법을 보면 나한테 해당되는 말씀이 있고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 있잖아요.

여러분이 QT를 해보셨잖아요.
QT를 하면 해당되는 말씀은 내가 적용을 하지만 상관없는 말씀은 적용하지 않잖아요.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간음이 해당됩니까? 안 됩니까?
물론 다른 유부남 유부녀와 하면 간음이 되겠지만, 관련이 없잖아요.
자녀에 대한 관련 말씀이 나오면 ‘나 아기 없는데’ 그럼 나와 관련없는 말씀들이 되잖아요.

그러나 이 말씀 전체는 이스라엘 집단에게 하신 말씀이고
그중에 하나라도, 한 사람이라도 지키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범죄한 것이 돼요.
아마 우리 개인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이런 말씀들이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될 겁니다.

아마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죠.
그러면 가난한 자들은 억울하게 당했지 않습니까?
그들은 왜 심판받아야 됩니까?
말씀을 오해를 하는 거예요.
인간은 이 빵구가 나면,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보수하고 땜질을 하면 괜찮아질 거라는데
그 땜질 자체가 과연 땜질이 되느냐? 할 때는 땜질이 안 된다라는 게 율법을 주신 취지예요.

이 말씀을 이제 “가난한 자들에게 탈취한 물건이 집에 있도다”
그 말은 돈에 미친 거죠.
돈에 미쳤으니까 오늘날 우리들도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이렇게 설교하면 안 돼요.
만일에 그렇게 설교하게 된다면 복음이 되는 게 아니고
새로운 법을 이야기하고 십자가를 날려버리는 겁니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뇨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리로다”
만군의 여호와가 나오면 전쟁하는 여호와입니다.
누구와 싸우겠다는 거예요? 자기 백성들과 싸우겠다는 겁니다.
자기 백성들과 싸운다는 것은 이방 나라는 말할 필요도 없다라는 거예요.

그들이 지금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 앞에서
철저하게 여호와의 원수로 대적자로 등장을 했다라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이사야가 이렇게 외친다는 것은 상대가 어떤 자들이라는 겁니까?
듣지 않는 자들로 확정시키는 외침이에요.

듣지 않는다라고 했을 때 계속해서 제가 반복을 할게요. 이사야를 할 때.
“눈은 감기고 귀는 닫히게 하라”는 게 이사야의 외침의 목적이에요.
그러면 이 말씀을 외치면 눈은 감겨져야 되고 귀는 닫혀야 되죠.
그러면 눈은 감긴 상태, 귀는 닫힌 상태가 어떠하냐? 라는 거예요.
여기에서는 듣지 않죠.
이사야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왕부터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게 눈이 갇힌 자의 모습인데

이것이 바벨론 포로를 지나와서 예수님 당시로 넘어오게 되면
눈이 갇힌 모습이 새롭게, 이 소경의 모습이 새롭게 나타나요.
말씀이 이렇게 중첩이 돼 있다라는 것은 인간들은 예상을 못해요.
중첩이 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이 답을 찾을 수 없다라는 얘기입니다.
그게 철저하게 소경을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그 시대에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모습이나,
그 시대를 지나서 칠십 이레의 완성의 지점에서 이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나,
모두가 다 소경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전에도 설교했다시피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라는 이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라는 질문을 한다는 것은 나도 어떠할 수 있다는 거예요?
어떻게 살 수 있다라는 질문이에요.
자기가 죄인인 주제에 뭘 어떻게 살아야 되냐고 물어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 것이고,
악령을 받은 자들은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십자가가 나오지 않겠죠.
자기의 의로움과 자기의 잘남이 나오겠죠.
그것이 예수님을 살해한 유대인들의 모습인 겁니다.

구약을 보면서 계속해서 우리는 시험에 든다라고 해야 되나, 어떻게 해야 되나?
이게 오전에 설교도 했지만, 이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성전 개념이라든가,
예수님이 행하시는 행동을 볼 때 제자들이 해석하는 성경 해석법,
유대인들이 해석하는 성경 해석법, 그 해석법대로 성경을 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말씀대로 믿자’는 자체가 얼마나 악마적인지를 알아야 돼요.
 
놀라운 것은 구약에서 심판받는 대상이야말로
신약에서는 가장 주님의 용서함을 받기에 가장 적절한 대상이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또 머리 좋은 우리는 ‘그러면 우리가 죄인 됩시다’ 그런 자들은 지옥 보내요.
왜 그러냐? 하면 육이기 때문에 그래요.

육은 계속해서 뭘 추구하는가? 하면
받은 걸 내놓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구원을 추구해요.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자기 구원을 강화해요.
자기의 의로움을 더 강력하게 쌓아가요.

그중에 하나가 뭐라 했습니까? 말씀을 배우는 거라 했죠.
그러니 우리들은 말씀을 배우면 배울수록 죄인 중의 괴수가 되는 겁니다.
아, 말씀이 너무 어렵게 가죠.
이걸 모르는 거예요.
죄인 중에 괴수가 된다라는 말이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결코 죄인 중에 괴수가 될 수가 없어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내세우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사건이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뭔가? 하면
구원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라는 겁니다.
구원 자체가,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제자들을 부를 때부터 시작한 거잖아요.
제자들을 왜 불렀어요?
구원하기 위해서 불렀어요? 주님의 증인 삼기 위해 불렀어요? 증인 삼기 위한 구원이에요.

아브라함을 ‘의롭다’ 여기셨잖아요.
그럼 아브라함을 의롭게 하기 위한 의롭게 여기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 로마서로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자랑케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하신 거예요.
그래야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그 믿음 자체는
나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증거하는 믿음이 되는 겁니다.
이 논리를 따라오랴거든 오세요. 말씀은 다 쪼개버립니다.
똑같이 복음을 이야기하는데 복음이 아닌 게 있고요. 복음인 게 있어요.
그걸 어떻게 분별하느냐? 여러분 다 성령 받으셨잖아요.

16절에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기에 보면 시온의 딸들이 ‘창기 행세를 한다’ 하거든요.
앞부분에 이 이사야 1장에서도 ‘창기가 되었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끄러움을 심판으로 내리신다라고 했잖아요.
이것이 역사적 사건으로 일어나거든요.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로로 끌려가게 하고 심판 속에 내몰았잖아요.
심판을 행하셨잖아요.
그러면 심판받은 자들은 이 말씀들을 어떻게 해석해내느냐? 이 얘기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어려운 거예요.
말씀이, 우리 오늘 우리 있는 쪽에서 성경을 읽어버리면 말씀이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
창기 짓을 안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창기 짓을 안 한 자들이 예수님을 살해했거든요.
그럼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창기 짓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아요.

그러면 창기 짓 안 한 사람은 구원을 못 받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구원을 못 받아요.
왜냐하면 주님의 부르심에 합류한 자들은 이 말씀 속으로 합류하기 때문에
이사야를 읽는 이 말씀 속에 이 상대가 누가 돼요? 나 자신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행했던 모든 일들이 우리의 일이에요.

그러면 이 창기 짓 하는 짓만 창기 짓이냐? 라는 것이 아니라
한 대 얻어터지고 반성해가지고 ‘나는 이런 짓 안 합니다’라는 것도 창기 짓이 돼요.
선악과를 먹은 자들은 이런 말씀을 듣기가 어려워요.
왜냐하면 은혜를 받았다면 받은 모습을 내놔야 되잖아요.

신약을 설교를 할 때 구약을 빼버리면 어떤 문제가 되느냐? 하면
마찬가지죠.
신약 사도행전 이후에 설교를 할 때 사복음서를 빼는 것과 똑같은 원리인데
성령 받기 전에는 엉망진창이었는데 성령 받은 이후에는 완벽하게 살더라.
이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논리고
성령이 하는 일이 그러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잖아요.

유희가 목사님이 이렇게 설교를 크게 하니까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 이야기하는데.
우리 딸이 ‘내 어릴 때와 똑같다’하는데... ‘아빠는 왜 자꾸 화가 났어요?’
화가 나죠. 복음을 완전히 악마의 복음으로 다 바꿨으니까.

말씀대로 산다고 하는 자들이 가장 악마적인 겁니다.
말씀대로 산다고 하는 자들.
지금도 정통 유대인들이 이사야를 외우거든요.
왜 외우겠습니까? 이걸 읽으면 답이 뭐예요? ‘말씀대로 살자.’
사는데, 그냥 살아서 될 문제가 아니라 ‘약속을 붙들고 믿고 살자’는 얘기예요.

바리새인들이 지금도 그들이 안식일을 지킬 때 얼마나 제대로 지킵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살해한 이유는 간단해요.
‘왜 성경대로 너는 해석하지 않느냐?’ 이 얘기예요. 예수님께.
이사야대로 해석하면 누구를 심판합니까?
여호와를 대적하는,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자기 집안의 가난한 자들로부터 탈취한
재물을 가득한 자들을 심판하시잖아요.

누가복음을 한번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7장입니다. 7장 36절.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이 여자인 줄 알았으면 향유를 들고 오는 순간 선지자였으면 ‘척 보면 압니다.’ 이거거든요.
부채도사처럼.
그러면 거리두기를 했을 거라는 거예요.

왜? 선지서가 있기 때문에 그렇죠.
선지자였다면 그들의 친구가 될 수가 없는 거죠.
책망을 했으니까, 하나님이 심판을 외쳤으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여기에서 많고 적음을 말씀하셨지만 사랑을 받은 자와 받지 않는 자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주기 위해 오셨잖아요.
그러면 그 대속물의 사랑을 받은 자가 누구냐? 라고 하면 모든 사람은 이 여인과 같은 사람이에요.

에베소서에서는 그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까지 깊다라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 앞에 사랑을 받을 자는 죄인인 자 외에는 사랑받을 조건이 안 되는 겁니다.
자격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죄인이 됩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주님이 찾아오셔야 돼요.
그게 사도행전 9장 이야기입니다.
이 누가 복음이나 이런 쪽에서는 죄인들이 등장을 하잖아요.
죄인들이 등장을 하고 바리새인은 철저하게 어떤 자로 나타납니까? 악한 자들로 등장을 하죠.
말씀대로 사는 자로.

주님은 누구한테 찾아옵니까? 세리와 창기,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찾아오시잖아요.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어떻게 오해를 하는가? 하면
주님은 죄인을 찾아오시기 때문에 죄 짓자라고 하든지
죄를 안 지은 사람은 아무리 자기를 돌아봐도 죄인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을 찾아오신 주님을 보게 되면 찾아오니까 어떤 자가 됩니까?
찾아 오자 말자 죄인 중에 괴수가 되었다라고도 볼 수 있지만
찾아오셔서 그를 복음 전하는 자로 죽을 때까지 몰아가니까
사도바울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죄인 중에 내가 대장이로다.

주님이 찾아오지 않고 주님이 시키신 일을 하지 않는 자들은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아는 것은 기껏해야 구약에서 말하는 죄인,
신약에서 말하는 창기, 세리 이 정도의 죄인이죠.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시게 되면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 안으로 주께서 인도하셨기 때문에
안을 구약적으로 표현하면 이 바깥이 그리스도라고 잡혀 있으면 이 안이 우리라 치면, 성도라 치면
바깥은 언약의 피로 덮인 세계예요.
이 피를 보면서 자기를 보는 거죠. 죽으심 앞에서 죄인이 되는 거예요.
그건 ‘내가 죄인이 됩니다’라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그걸 보고 ‘믿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자들은 반드시 어떻게 흘러가게 되는가? 하면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믿음을 내세우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구약을 해석하게 되면 해석이 안 되죠.
왜? 그런 신앙을 갖고 구약을 보면 안 맞거든요. 논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
이걸 거꾸로 이야기하면 세상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이냐? 라는 거예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심판주시다.’
심판주가 어디에서 됩니까? 십자가에서 되거든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어요.

오늘날 한국 기독교 신학에 의하면 ‘부활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주장하거든요.
그 성경에 없어요.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는지를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요.
처음부터 그들의 신학은 이 미국 신학처럼 번영신학에 미쳐 있는 겁니다.
자기 구원,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이런 논리를 펴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자랑케 하기 위해서
주님의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 불렀다면 성도는 어떤 삶을 살아가든
성경에 나오는 삶의 모습이 다양하잖아요.
사도바울처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게 살든, 복음을 전하며 살든, 창기처럼 살든,
어떻게 살든 간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피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로서 살려지는 인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보면서 나를 가꾸기 위하여 회개하며 반성하는 그러한 자의 모습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세리의 모습임을 말씀을 통하여 들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이 사랑하셨기에 세리의 모습이오. 창기의 모습이오.
죄인 중에 괴수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하셔서
십자가만 자랑하는 주의 백성으로 삼아주심을 날마다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관리자 23-09-12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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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