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9-13 11:45
20230913 마태복음 강해 마 17:22-23 인자의 죽움,부활과 제자들의 슬픔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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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09-14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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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3 마태복음 강해 인자의 죽음, 부활과 제자들의 슬픔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날마다 저희와 함께 동행하시면서 주님의 죽으심만을 자랑하게 하시고
확인하는 현장으로 증인을 삼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저희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사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알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17장 22절에서 23절 말씀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17:22~23)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아주 짧은 본문인데, 이 사건은 갈릴리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말씀을 마가복음에서는 9장 30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조금 더 길게 설명하고 있죠.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마태복음에서는 마가복음보다는 너무나 짧게 기록되어 있죠.

누가복음에서는 또 다르게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9장 43절을 보면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여기에서는 갈릴리라는 지명이 나오지 않아요.
흔히 성경을 가장 먼저 기록한 것이 마가복음이라 이렇게 주장을 하거든요.
그거는 어디까지나 주장일 뿐입니다. 여러분도 다 그런 얘기 들어보셨죠?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은 그렇게 배웠는데,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왜 이렇게 짧게 기록되어 있느냐? 라는 건데
우리 같으면 마가복음 식으로 기록하는 것이 이해하기에 훨씬 쉽잖아요.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앞뒤, 전후 이런 것들에 대해서 너무나 축약을 해놨어요.

“갈릴리에 모일 때에”
그러면 누가 모였느냐? 그건 뒤에 보면 제자들이죠.
마가복음에 근거하면 갈릴리에 모일 이 시점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만나지 않았다.
마가복음에서는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고”
제자들을 집중 가르쳤다라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어요.

여기서도 마찬가지죠. “모일 때”라고 하면 제자들이 모인 겁니다.
그들이 모여서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이때 여기에서는 가르쳤다라는 내용은 없고, 무엇만 나오는가? 하면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니”
이게 다예요.

마가복음을 다시 볼게요. 9장 30절.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심이요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여기에서 조금 다른 점이 나오죠.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제자들을 가르친 것과 그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 라고 할 때는
마가복음에서는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죠. 무엇이 선명합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과 그 가르치신 내용과 무엇이 일치합니까?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삼일 만에 살아날 것’
이 내용과 가르치신 내용을 일치시키고 있는 거예요.

문제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그 내용. 지금까지 가르쳐 오셨잖아요.
산상 설교를 가르치든지 여러 가지 말씀들을 이렇게 가르칠 때
그 가르침의 내용을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다’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그들을 알지 못하게 했다라고 하죠. 아예 눈을 감겼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의미, 우리는 단순히
‘사람들 손에 넘겨서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실 것을 제자들이 깨닫지 못한다.’
이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 전체 가르침에 대해서 제자들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 수 있는 겁니다.

다시 마태복음으로 돌아와서, 예수님께서 ‘인자’라고 자기 자신을 소개를 하고 있죠. 인자.
‘인자’라는 이 의미가 마태복음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로 말씀하고 있는 것 같아요.
마태복음 8장 20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20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습니다.
이것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인자를 기다리는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말씀이죠.
구름 타고 오시는 분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왕노릇하셔야 되는데
‘머리 둘 곳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셔도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고요.

마태복음 9장 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중품병자를 이렇게 고치시는 사건인데,
사실은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먼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6절에 보면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머리 둘 곳 없고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분이 인자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마태복음 10장 23절을 보면 조금 성경을 오늘 조금 찾아야 될 것 같은데요.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인자는 어떤 분으로 오시는 겁니까?
“심판주로 오신다”라는 그러한 의미를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고요.

마태복음 12장 8절에서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리고 12장 40절에서는
“요나처럼 밤낮 사흘을 땅속에 묻혀야 된다”라는 그러한 말씀들을 말씀을 하셨고,
씨 뿌리는 비유에 있어서는 그 여러 비유에 있어서
“씨를 뿌리는 자가 인자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7장에 넘어오기 전에 16장에서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인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인자는 자기 자신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데
“인자는 머리 둘 곳 없고, 심판하러 오실 거고,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고.”
이렇게 소개를 했어요.
그런데 이 제자들의 그 답변이나 아니면 주변 사람들의 답변은 어떻습니까?
먼저 주변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 하고, 예레미야라고도 하고, 선지자라고도 하고
뭐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이렇게 평가를 하는 겁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죠. 너희는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예수님이 칭찬을 하거든요.
“이를 알게 한 이는 (네가 아니고)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
이 말씀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죠. 왜 못 알아듣냐? 하면
“네가 아니라(혈육이 아니요)”고 할 때는
너는 지금 예수님의 말씀조차 전혀 깨닫지 못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요.
마치 아브라함이 아브람을 불러서 약속을 주셔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시는 그 과정 속에서
자기는 그냥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그것을 증거하기 위한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걸 이 로마서에서는 믿음이라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나는 믿음이 없는데, 로마서로 와버리면 그리스도의 믿음이 아브라함을 끌고 가는 거예요.

그러한 것들을 지금 예수님께서 여기에서도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제 예수님께서 먼저, 처음 이 신앙 고백을 듣고 난 뒤에
그다음 “교회를 세울 것이다.”

그 이후에 예수님께서 자신이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쳤어요.
가르치셨는데 베드로가 멱살을 잡고 안 된다라고 이렇게 방어를 합니다.
그러면서 이 베드로를 필두로 한 제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단의 일을 하는 그러한 자들임을
예수님께서 밝혀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들을 하시면서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도 있다”라고 말씀을 하셨죠.

그래서 이 거룩한 산, 베드로전서에서는 거룩한 산이라 하죠.
변화산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거룩한 산에서 예수님이 변모하신 모습을 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보았고
베드로는 이 모습을 보고 초막 셋을 짓겠다라고 할 때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그다음 하신 말씀이
“인자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본 것을 말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이후에 이제 땅에 내려왔을 때, 예수님께서 이 제자들 앞에 데리고 온 한 사람이
‘제자들이 자기의 아들을 고치지 못하더라’ 이렇게 비아냥대는 그 사건 속에서
예수님께서 “믿음이 적은 까닭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여러분이 지금 제가 성경을 8장부터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살펴봤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느냐? 라는 겁니다.
우리들이야 이미 좀 들었기 때문에 알아들었는데,
제자들은 앞서서 한번 경험을 했잖아요.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잡혀서
고난을 받고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렇게 하시고 난 뒤에 갈릴리에서 다시 이 말씀을 하신 거예요.
이때는 어떤 때입니까?
여기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함께 합류해 있죠.
이들은 예수님께서 변모한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을 했잖아요.
그것을 목격을 했을 때 그다음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인자가 살아나기 전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이런 말씀을 들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이 말씀을 하시니까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이렇게 말합니다. 심히 근심하더라.
이 헬라어 성경을 보면 “근심한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슬퍼한다’라는 이런 표현입니다.

왜 슬퍼하겠어요? 한 번은 막았어요. 안된다고. 그런데 또 들었거든요.
거룩한 산에서 내려올 때 그 얘기를 또 들었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들었습니다.
‘아이, 아닐 거야 아닐 거야’

근데 이번에는 제자들만 모아서 한 번 더 말씀을 하셨어요.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우리 성경은 이렇게 돼 있는데 헬라어 단어를 조금 더 들어가면 슬퍼하죠. “심히 슬퍼하더라”
여러분 슬픔이 극에 달하면 무엇으로 바뀝니까?
기대를 잔뜩 가졌는데 그 기대가 무너질 때 슬프죠?
슬픔이 뭘로 바뀌어요? 분노로 바뀌는 겁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분노’, 화내는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거예요.
마지막에 가룟 유다가 그것을 폭발시켜버리죠.

그러면 이들이 도대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제자가 되면서 무엇을 노리고 있었을까?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시편 91편을 한번 보겠습니다.
시편 91편은 마태복음 4장에 마귀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성경 말씀대로 너를 보호할 것이라”라는
말씀이에요. 이 말씀이 마귀의 말인데

그 마귀가 예수님을 떠나서 어디로 갔느냐? 라고 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들어간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들어갔다라는 표현을 해도 되고
원래 아버지가 누구예요? 저들의 아버지가?
마귀니까, 그가 아버지면 그 아들은 뭐예요? 마귀라니까요.
사람들이 자꾸 오해를 하는데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잖아요.
그럼 너희 아비가 마귀면 우리가 마귀잖아요.
‘아니 마귀가 우리한테 들어와서...’ 그 말이나 그 말이나.
예수님의 말씀이 우선이죠.

지금 이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던 그 내용이 무엇과 맞물려 있느냐?라고 할 때는
죽음과 맞물려 있거든요.
‘네가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보호할 거라’는 거예요.
이 사상이 누구의 사상이냐? 라고 하면
지금 남은 자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죠.
그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그 메시야가 오신다면 죽음과는 담을 쌓고 산다’라는 이야기입니다. 표현을 하면.

흔히 말하는 ‘마귀가 선악과를 따먹게 해서, 따먹은 이후에 저주 아래에 놓여 있었는데,
그 저주와는 우리는 이제는 결별할 시간이야. 그 저주와는 점점점점 멀어져 가네.’ 누구 노래처럼.
그런 생각을 사람들이 갖고 있고, 이 제자들이 그 생각을 갖고 있고,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메시야 왕국이 그러한 성격을 담고 있거든요.
그러한 기대를 갖고 예수님을 쫓아다녔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거예요.

우리가 볼 때는 예수님이 불러서 되었다라고 하잖아요.
근데 제자들한테 물어보면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선택했다라고 하지 주님이 선택했다라고 말을 하지 않아요.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내가 선택했다’라고 합니다.

그럼 성령을 받은 이후에는 뭐라 할까요?
나의 선택을 주님의 선택이 박살 내버리는 그런 상태에서 주님이 나를 주님의 증인으로 삼으셨다.
이렇게 바뀌는 거예요. 자기의 선택이 없어요. 본래.
사도바울을 부르실 때 보면 사도바울의 선택이 있습니까?

신학에서 심심하면 나오는 게 자유 의지잖아요.
사도바울만 보더라도 자유 의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근데 막상 내 실존을 보니까 ‘자유 의지가 있는 것 같아.’ 그럼 ‘있다’라고 하세요.
어떻게 인간이 표현해도 나오는 건 뭐밖에 없습니까? 죄밖에 없다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표현해도 돼요? 자유 의지가 있다고 해도 되고, 없다고 해도 되고.
그걸 갖고 십자가를 자랑하면 되는데 그걸 갖고 뭘 자꾸 이야기하고 싶습니까?
성령이 없으니까 자꾸 자기가 하나님을 변호하려고 하고,
인간 구원에 대해서 자기가 변호하려고 하는 거예요.

시편 91편을 봅시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은밀한 곳, 피난처, 지존자, 지극히 존귀한 분의 그 하나님이죠.
하나님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보호 아래 있다라는 거예요.
전능하신 자의 보호 아래 있으니까 어떻겠습니까?
아~ 저 이런 사람 진짜 많이 봤어요. 카톡이나 이런 데 보면,
이 구약의 구절들을 빡빡하게 써놓은 사람 많거든요.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이것보다 신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면 망한다는 말이에요, 망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망하지 않는다는 거거든요.

시편을 지금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면 어디로 갈까요? 그 도착 지점이? 유대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교가 이 마귀를 대표하는 자들이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4장에 보면
그 유대인들이 마귀 짓을 하는 것을 마귀가 실제로 나타나서 대변하는 거예요.
나중에 마귀가 사라지니까
주변의 무리들이나 거라사인 지방 사람들이나 제자들이나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 사두개인들,
헤롯, 본디오 빌라도, 이들이 이러한 모습을 본격적으로 보여줍니다.

2절에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야~ 정말 놀랍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하라”라는 그 바탕이,
근거가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냥 그렇게 말한 게 아니라
정말 네 아버지가 하나님이고 네가 하나님이라면 너에게는 전능한 능력이 있을 거라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어요.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서 옆에 있는 사람들과 똑같이 죽어가고 있어요. 똑같이.
우리 같으면 뭔가 달라야 될 것 아닙니까?
피가 나다가 갑자기 휙 멈춰버리고... 누구처럼? 류승룡처럼.
무슨 tv에 나옵니까? 그게. 스타벅스에 가면 뭐 그거 볼 수 있게 해준다는데...
안 죽어요. 물속에 빠져도 안 죽고. 불사신이 되는 겁니다.
그러한 모습으로 예수님이 보였다면
거기에 있는, 십자가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믿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내용이 이방인의 사고가 아니라
시편 91편에 나오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그늘 아래서 보호받는 자.
‘정말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라면, 정말 그 메시야라면, 너는 십자가에서 내려와야 된다’라는
거예요.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내려보라’는 거예요.
‘뛰어내리면 보호하는지 보자’라는 얘기예요.
얼마나 오늘날 교회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 믿는 사람다워야 된다’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답습니까?’라는 질문부터 먼저 해야 돼요.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답습니까?
진짜 하나님이잖아요.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잖아요.
병 고칠 때는 신이 나죠. 죽은 자 살릴 때는.

그런데 그것이 중요합니까? 결말이 중요합니까? 우리도 흔히 이야기하잖아요. 잘 죽어야 된다고.
실컷 병 고치고 죽은 자 살리다가 자기는 구원하지 못해.
그러면 그 예수를 볼 때 누가 그 예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겠습니까?
누가 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겠느냐? 얘기예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교인들이 이런 하나님을 믿잖아요. 그죠?
그런 하나님 믿고 계셨죠? 옛날에. 그죠?
형편이 어렵고 힘들고 이럴 때 얼마나 위로와 치료가 됩니까?
요즘 대부분이 정신병자들이잖아요. 교회에 와서 뭘 듣고 싶어 합니까?
이런 말씀을 듣고 싶어 하죠.
‘여러분이 (요즘은 예수님도 빼버리죠.)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신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보호자가 되시고 요새가 되십니다.’
조금 더 강력하게 표현하면 요새라는 것은 방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격할 때 최대의 무기처럼 작동하는 겁니다.
얼마나 신이 납니까? 그런 말씀들이에요.

3절에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새 사냥꾼의 올무’라 비유죠.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는 피할 길이 없는데 그 속에서조차도 건지시고
‘염병에서 건진다.’ 염병은, 전염병은 골라 잡습니까? 피해 갑니까? 피해가지 않죠.
그러한 곳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건지신다라는 겁니다.
코로나 안 걸린다는 얘기예요.

그렇게 하다가 걸린 사람 있잖아요. 광화문에서 맨날 대모하던 사람.
왜 그 사람이 그렇게 당당하게 말을 하느냐? 하면 이런 말씀 때문에 그래요.
그 교인들이 왜 그걸 믿느냐? 라고 하면 말씀을 믿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의 원수고 예수님을 살해한 신학이었다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 못하는 겁니다.

제 어릴 때 생각해 보면, 복음을 모를 때 보면 이 신앙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없어요.
십자가도 믿어요. 피도 인정하고요. 죄인임도 인정하는데 하나님은 어떠해야 됩니까? 하나님은.
가난 가운데서도 부유하게 하시고 아픈 가운데서도 (어떻게?) 위로해 주시고
근데 주님은 아픈 가운데 아프다가 죽으라 해요.

제 이야기가 아니라 사도 바울이 사단의 가시가 있을 때 기도를 했잖아요.
세 번이나 할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하잖아요.
그런 논리라면 사도 바울에게 사단의 가시를 다 빼주고 무병장수하면서
지금도 살아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4절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독수리 날개가 떠오르죠)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이게 밤에 전쟁을 할 때 기습을 하잖아요. 그러면 놀랄 거 아니에요. 그죠?
새벽에 웽 흘리니까... 휴대폰을 끄고 자는 게 제일 편합니다.
그런 놀람이 없을 것이고 그다음

“낮에 흐르는 살과 (이 화살 같은 것들이죠)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왜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방패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손이 되셔서 그 손이 방패가 된다고 했잖아요.

손으로 어떻게 합니까? 만화, 영화, 웹툰 같은 거 보면 나오잖아요.
한데 빵 치면 다 싹쓸어 버리는, 그러한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구약에는 그런 하나님으로 등장을 하죠. 실제로.
그런데 그것이 그들이 원할 때마다 그렇게 하나님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때에 따라서 그런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지금 다윗의 시편이거든요.
다윗의 시편의 특징이 무엇이냐? 라고 하면
성령 없이 읽게 되면 유대교처럼 시편을 읽게 되고
성령을 받고 읽게 되면 이 다윗 자체가 십자가에 의해서 부정당해버립니다.
그래서 방금 이 다윗이 이런 식으로, ‘다윗의 시’라는 이 이름이 안 나오지만,
다윗이 썼든 아삽이 썼든 누가 썼든 간에 이 모든 인물들은 다윗 언약 속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 시편의 고백대로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자들이 남은 자 유대인의 신학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돼요.

잊지 말아야 된다는 것은 우리는 못 잊거든요.
왜냐하면 인간 본성 자체가 다 남은 자 유대교 신학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성경을 읽게 되면 깜짝 놀라는 이유가 뭐냐? 하면
성령 못 받은 사람은 안 놀라지만, ‘야, 내 모습이 여기에 이미 다 담겨 있네.’
아예 박제를 해놔버렸죠. 박제.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이것보다 신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천인, 만인이 내 옆에서 다 염병에 전쟁에 죽어 나자빠지는데
나는 그런 죽음에서 철저하게 보호를 받는다는 겁니다.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악인은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 심판받는 모습이 염병이고 전쟁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목도한다는 거예요. 목도.
목도하는 건 신이 납니까? 안 납니까? 신이 나죠.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서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로 그들이 선언을 하잖아요.
그것을 목도하는 자들이 지금 이 기분인 거예요.
‘예수 너가 나무에 달려 죽는 이유를 아느냐?’
‘지금 이것은 너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다’라는 거예요.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끝내주잖아요. 마치 누구를 보는 것 같습니까?
아람 군대가 엘리사를 잡으러 왔을 때 그 게하시는 눈이 감겨가지고 안 보이죠.
그런데 엘리사는 이 불말과 불병거들이 누구를 오히려 둘러싸고 있어요?
그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불살라버릴 수 있는 그런 군대를 지금 보고 있죠.
지금 그러한 내용들을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제가 이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 그 메시야 왕국의 메시야는 어떤 모습을 보여야 되느냐? 라고 하면
이러한 모습을 보여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는다라는 것은 그들 사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 죽는다는 게 어디 있어요? 보호한다고 돼 있지.

여러분 성경은요
‘아, 다른 데 ‘죽는다’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에서 다 모든 말씀이 증거가 돼야 돼요.
시편 91편 말씀을 왜 마귀가 끌고 오겠어요?
그 말씀 안에, 요 한 구절 안에 유대인의 신학이 다 담겨 있는 거예요.
첫째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의 사상이 다 담겨 있는 겁니다.
네 가는 곳곳마다 천사가 보호하죠.

실제로 성령이 오신 이후에 이 사도행전을 보면 천사들이 보호를 합니다.
천사들이 어떻게 보호를 하느냐? 그게 중요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일곱 교회의 사자들이, 천사들이 있잖아요.
천사들이 뭘 해요? 천사들이 있으면 우리는 보호할 거라 생각을 하잖아요.
교회를 보호할 거라 생각하잖아요. 나를 보호할 거라 생각하잖아요.
그게 아니에요.

그 ‘보호’라는 의미는 주께서 자기 백성은 철저하게 십자가 사건 속으로 내몰아버려요.
그래서 철저하게 보호하셨기에 야고보는 빨리 죽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는 거예요.
그게 보호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보호는 어떤 보호입니까?
천사들이 골목마다 길마다 다 보호한다는 거예요.
오늘 먼 길에서, 제천에서 여기까지 오시다가 혹시 돌아가실 때, 돌아가셨다. 그 자체가 보호예요.
기분 나빠도 어쩔 수 없습니다. 복음 자체가 그렇게 됐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 자체가 영광이잖아요.
말로는 영광 해놓고 자기가 그 길 가는 것은 영광이 아니래.
그래서 마귀가 당당하게 요구하는 겁니다.
12절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마태복음 4장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왜 심히 근심하느냐? 왜 심히 슬퍼하느냐?
왜 심히 슬퍼하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느냐? 화가 끓어오르느냐?

복음을 듣는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어요.
복음을 안다라고 해놓고 ‘내가 복음을 아는데 주님 이럴 수 있습니까?’
뭔가 노림수가 따로 있었던 거죠.
‘왜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듭니까?’
‘복음을 전하는데 왜 교인 한 명도 없습니까?’ 이게 무슨 소리예요? 이거 지금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첫 번째 시험에서 마귀가 와가지고 사십 일 동안 주리셨을 때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게 현실적인 문제거든요. 그렇죠. 그죠?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이 떡덩이 되도록 만들어 줘야 돼요.
이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만나를 내리셔서 먹이셨고 살리셨잖아요.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하나님다운 면모를 보여달라는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만나를 먹을 것을 계속해서 먹여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라는 거예요.
그러자 마귀가 ‘그래 말씀 좋지’
그래서 시편 91편 12절을 갖고 온 거예요. 갖고 와서 이렇게 합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런 말씀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안 해요.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데려갈 때 예수님이 안 가면 되잖아요.
여러분 이런 생각 안 해봤죠?
왜냐하면 설교자들이 이런 말을 안 하거든요.

우리가 아셔야 되는 게 이거예요.
성도는 마귀가 가고자 하는 모든 곳으로 가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마귀가 있는 곳에만 무엇이 분명하게 드러납니까?
무엇이 분명하게 증거돼요? 십자가가 증거돼요.

‘에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마귀가 데려가는데 마귀와는 동행을 안 해야 되잖아요?’
그게 우리들의 논리잖아요.
‘마귀를 멀리하라.’ 성경에도 나오니까, ‘마귀와 싸워라’ 하니까
자기가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도바울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마귀와 동행을 하죠. 죽을 때까지 동행을 하는 거예요.
그 마귀를 주님이 절대로 내쫓지 않습니다.
내쫓아버리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내가 메시야다’라는 거예요.
‘내가 예수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다 그런 인간들입니다.
복음을 모르고 성령을 못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철저하게 자기 증인들에게는 이 마귀를 주님만 동행하는 게 아니라
마귀가 함께 동행을 해요.
그래야 주님이 하신 일을 그 성도 속에서 증거할 거 아닙니까?
죄가 없는데 어떻게 은혜를 전할 거예요?
성령을 못 받은 자들은 이 말도 못 알아듣죠. 무슨 말인지.
자기 아는 죄밖에 몰라요.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그래서 이렇게 하면 돼요.
데리고 가면, 시험 받는데 가가지고 올라가세요. 그리고 말씀 얘기하면 돼요.
뭐라고?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참 희한하죠? 우리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뭐예요?
말씀을 이야기했을 때 말씀으로 피해 가는 게 제일 싫어하잖아요. 맞죠?

‘에이 말씀 이야기 그만하고 이 말씀대로 해봐’
이 서로가 모순되는 이야기잖아요. 그죠?
마귀가 말씀을 갖고 왔을 때 예수님이 모순되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시는가? 하면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인데
‘네가 하나님을 시험할래? 뛰어내려서 다치지 않는 거 볼래?’ 이 얘기거든요.

우리 같으면 뭘 선택하겠어요?
‘그래도 보호하는지 한번 볼 거야.’
‘시험하지 말라.’ 이 얘기를 하면 오늘날도 마찬가지예요.
병자 고치고 뭐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시험하지 말라.’ 이렇게 이야기하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너는 그런 능력이 없으니까 그렇지.’

나중에 예수님이 어떤 꼴을 당합니까? 똑같거든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하라” 하니까
예수님은 안 하시잖아요. 그러니까 뭐라고 합니까?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이 거기에 있는 거잖아요.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승리하시고 다 이루신다라는 그 말씀에 대한 말씀이거든요.
오히려 이러한 보호 자체가 십자가를 경유함으로 말미암아,
종말이 됨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이 전복이 돼요. 완전히 뒤바뀌어버립니다.

성도들은 주님이 동행을 하시잖아요.
성령이 함께하시잖아요. 땅 끝까지 동행하시기 때문에 성도의 삶은 어떤 삶이 돼요?
간단하잖아요. 예수님이 성령을 받으셨잖아요.
성령 충만을 받으니까 어디로 갑니까? 십자가의 길로 가잖아요.

나오는 말씀마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얘기를 하시고
나오는 말마다 사람들이 분노를 일으키는 말씀을 하시잖아요.
가끔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도 하지만, 오히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병을 고쳐줘 놓고 하시는 말씀이
“내 피와 내 살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라고 해보세요.
상대가 뭐라고 주장하겠습니까? ‘나 병 고쳤으니까 당신을 믿겠다’라고 하잖아요. 그죠?
그러면 이 말씀은 ‘너는 영생이 없어’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은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이나 아니면 남은 자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그 메시야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하는 그러한 메시야를 기다린 게 아니고
죽으면 안 되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거예요.
만일에 죽어버리면 말씀이 엉터리가 되잖아요.
시편 91편하고도 안 맞잖아요.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으면 전능한 하나님이 보호를 해야 되잖아요. 보호.

제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은 이 본문을 갖고 제자들은 삼일 만에 부활하는
그 부활의 능력을 몰라서 제자들이 근심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들어보면 맞는 말 같잖아요.

지금 이들이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말한 그들에게 요한계시록이나 사복음서나 서신서 내용을 다시 설교를 하면
그 전체 내용이 어떤 내용입니까?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십자가 사건 속에 성도가 합류하는 내용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뭐가 없어요? 부활이 없어요.
그걸 그대로 갖고 와서 ‘이들이 부활을 안 믿어서 그렇다’
그 부활을 믿는 당신은 안 죽냐? 이 얘기예요.
죽거든요. 부활 믿는 본인도.
반드시 죄의 삯은 사망이에요.
가장 앞장서서 보여줘야 될 사람이 성도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을 안 믿기 때문에 두려워했다’라고 이야기하는데
부활을 몰라요.
부활을 모르는 자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부활을 믿는다’는 겁니다.
부활을 아는 자, 부활 속에 합류당한 자,
예수님과 함께 죽고 그의 살으심과 함께 살림을 받는 자들의 특징이 뭐냐? 라고 하면
어린 양의 피를 자랑해요.
매사가 십자가의 피를 자랑하는 사건으로 보는 겁니다.

이게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라고 해야 될까요? 그 주님을 증거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본인이 똑같이 자기가 증거한 그 십자가 속으로 합류 당하는 자들이 성도인 거예요.
‘부활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 없어야 돼. 근심이 없어야 돼.’
뭘 노리는 겁니까? 그 부활한 주님을 전능한 하나님, 보호하는 하나님과 동일시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 신학은 개나 줘버리고 부활 신앙을 가져야 된다’ 그걸 가르치는 거거든요.
‘기독교는 부활 신앙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부활의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 이야기하는데, 다른 종교에도 부활의 종교 다 있어요.
그 부활의 종교가 주장하는 게 뭡니까?
시편 91편처럼 우리가 어느 길로 가든 보호를 하고 어디를 가든, 무얼 하든 축복을 해주시고
건강하게 해 주시고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시고.

13절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놀랍죠?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예수님께 적용해 볼까요?
다윗은 승리자가 되었죠.
근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된 거예요.
인간들이 보기에는 실패자입니다.

14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이 말씀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힘이 나잖아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니까 하나님이 나를 건질 거다.’
‘사업이 지금 망해가는데 언젠가는 때가 되면 성공하게 해주실 것이다.
질병 가운데 있는데 언젠가는 고쳐주실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것이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이런 모습을 보여주셨잖아요.
그러면 보여주신 이유가 뭐냐? 라고 하면
제자들이 지금 삼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자기들의 실체가 드러난 거예요.
자기들이 누구였어요? 예수님을 시험하는 그 마귀의 아들이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자가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해야 된다’라는 이 말씀을 듣고 심히 슬퍼하는 거예요.

성령을 받게 되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어떤 말씀이 되었어요?
너무나 기쁜 복음이 되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으면 성도는 못 만들어지죠.
사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갇혀 있죠. 철저하게 갇혀 있어요.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자로서 세례요한이 왔잖아요.
그러면 세례요한이 이사야 말씀에 그 외치는 자로서 외칠 때
세례요한조차도 소경으로 그 기능을 감당을 해야 되고
세례요한의 외침을 통해서 모두가 다 귀가 닫히고 눈이 감겼다라는 그것이 확정이 돼야 되는 거예요.
그들 중에 누가 들어 있는가? 하면 제자들이 들어 있는 겁니다.

15절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네가 하나님 아들이라면 하나님께 구해봐라. 구하면 들어줄 거라.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성경적이잖아요. 그죠?

지금 마귀가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그 얘기를 한 거예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내리면 보호한다”라는 거예요.
‘그 보호하는 걸 보여주면 내가 아들로 인정하겠다’라는 거예요.
그럼 이 논리라면 보호하는 걸 보고 믿는 자들은 모두가 다 뭐예요? 악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고 믿는 것은 다 악마예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보여달라고 하잖아요.
이 전체가 십자가를 증거하는 말씀이거든요.
왜 십자가 사건이 발생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면모를 보여라”는 겁니다.
안 보여주니까 어떻게 합니까? 팔아먹어 버리는 거예요.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메시야를 기다렸죠.
기다려서 예수님을 따라다녔잖아요.
따라다니면 이 메시야가 보여줘야 될 것은 다윗과 같은 모습이거든요.
시편 91편에 나오는 이 모습. 어디를 가든 보호를 해주셨잖아요. 다윗을.

그러한 보호 속에서 이 강력한 왕권을 가지는 그 모습을 꿈꿨는데, 예수님은 죽으러 가시는 거예요.
죽는다라고 자꾸 이야기를 하니까 슬픈 겁니다.
그러니까 슬픔에 대한 분노가, 슬픔이 뭘로 바뀐다고 했습니까? 분노로 바뀐다고 했죠.
그러니까 팔아먹는 거예요.

15절 한번 봅시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보여주는 것이 영화로운 모습이 아닌가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게 영화로운 겁니까?
그래서 구약을 모르면 십자가의 영광을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이 구약을 읽어보면 십자가가 영광이라는 이 말이 엉터리라는 걸 알아야 돼요.
구약을 알게 되면 십자가가 영광이라는 말이 안 맞는 겁니다. 이게.

그래서 이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구약을 읽거든요.
신약은 부정적인 내용이 꽤 많아요.
그런데 이 구약은 긍정적인 내용이 훨씬 많습니다.

16절 ‘내가 장수함으로 (옛날 성경에는 내가 너를 장수케 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장수해야 돼요. 하나님이 보호하시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이 33살에 돌아가셨어요.
말씀과 하나도 안 맞는 겁니다.
시편 91편의 말씀대로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 천사들이 보호하는 모습을 보여야 돼요.

예수님께서 이제 이 시험을 받은 이후에 복음을 전하시잖아요.
천국 복음을 전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셔서 함께 동행을 하실 때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셨죠.
죽은 자도 살리셨죠. 그죠?

그렇게 했을 때 이 심지어는 이 거룩한 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까지 보여주셨잖아요.
보여주셨을 때 이 제자들은 예수님을 어떤 예수님으로 생각을 했느냐? 라고 하면
시편 91편에 나오는 그 말씀에 해당되는 인물로 본 거예요. 그게 다윗이니까.

그래서 제자들만 따로 모였을 때, 예수님께서... 한 번 더 읽어볼게요.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면 사람의 손에 넘기움을 당하지 않아야 되잖아요.
전염병에서도 건지시고, 전쟁터에서도 활과 창. 이런 쪽에서도 다 건져내시는데
이 정도 못 건지시겠습니까?

그러니 제자들은 지금까지 따라다니면서
여기에 심지어 예수님의 거룩한 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까지도 목격을 하면서도
여전히 이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자기의 야심과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왜 십자가 복음을 거부하고 싫어할까요?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우울할 거라 생각하거든요.
십자가 복음이 들리는 것이 얼마나 신이 나고 감사한 일입니까?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삼십육계 도망을 치죠.
왜 그럴까요? 자기를 슬프게 하는 겁니다.

‘야, 나도 예수 믿고 십자가 은혜를 알고 이제 폼나게 한번 살아볼 것이라’고 왔는데
십자가 복음은 우리를 날마다 죽이시고 부인케 하시는 복음이고,
대신 죽임을 당하신 주님만을 자랑하기 때문에
그들은 복음을 들으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심히 슬퍼하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해서 분노를 내는 겁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제자들이 성령을 받게 되니까 어떻습니까?
죽은 자들 가운데서 죽고,
사람들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이게 이것보다 기쁜 소식이 없는 거예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나사렛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삼일 만에 살아나신 이것이 복음임을 저희들에게 알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십자가의 이 복음이 진정한 복음이 되게 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기쁨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십자가 복음이 들려질 때 슬퍼하며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가 흘러나오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