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9-20 18:18
20230920 마태복음 강해 마 17:24-27 성전세와 아들들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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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09-21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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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0 마태복음 강해 성전세와 아들들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십자가의 사랑을 알아가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날마다 주님께서 확인시켜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사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다 이루신 일을 보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의 깊이를 알아가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17장 24절에서 27절 말씀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17:24~27)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굉장히 유명한 말씀이죠. 복음을 모르는 목사들이 설교하기에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 본문을 보면 막막하죠.
단순히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기적적으로 물고기를 명하여서 한 세겔을 베드로에게 전달하게 하시고
성전세를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의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면, 같이 기도 제목을 갖고 기도하면 얼마나 편하고 좋겠습니까?
그리고 교회에 오신 분들도 다 찌들리고 힘들잖아요.

제가 가끔 뒷산에 산보를 하면
그저께는 어떤 분을 이렇게 지나치면서 봤는가 하면 설교를 듣고 있는 것 같아요.
찬송가를 이렇게 담임 목사가 부르는 것 같아요.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어릴 때 정말 많이 불렀거든요.
이런 찬송가를 부르면 사람들이 감동을 하잖아요.
‘불쌍히 여겨 날 구해줄 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가서 물고기가 그 입에 한 세겔을 물고 있을 것이니 그것을 갖고 오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이 사건에 대해서
우리도 ‘예수님이 구하기만 한다면 이러한 능력과 기적을 우리에게 허락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신앙은 누가 갖고 있느냐? 라고 하면 베드로가 갖고 있어요.
베드로가 왜 이러한 신앙을 갖고 있느냐? 라고 하면 베드로는 유대인입니다.
여기에서 유대인이라는 것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남은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어요.

우리가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나오잖아요.
남편이 7명이나 됩니까? 그 여인이 성경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해박한지를 확인하잖아요.
성경을 보면 베드로뿐만 아니라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성경에 대해서, 구약에 대해서,
메시야 사상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죠.
베드로가 믿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구약에서 살펴보게 되면 천지를 창조하셨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독수리 날개로 구원해 내셨습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허점이 많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그것도 뱀을 만들어서, 그것도 그 에덴 동산에 마귀까지 들어오게 했는데,
그러한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데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은 저리 가라라고 하죠.
부실한 하나님이잖아요.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

기독교계와 과학계가 싸우면, 서로 논쟁을 하면
예수 믿는 과학자들이 무슨 주장을 하는가? 하면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라는 거예요.
그 완전한 하나님은 사실은 우상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난 분이
신약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분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래요.
이렇게 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느냐? 라고 하면
십자가 지신 분을 창조주로 믿지 않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지옥 갑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이슬람교요 유대교입니다.

왜 이러한 전복이 발생하느냐? 라고 할 때는 마귀 때문에 그래요.
마귀는 하나님을 알아요.
그런데 예수님을 잘 몰라요.
그래서 마귀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자기 졸개인 인간들에게 계속해서 소개해 주는 겁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사건도 사실은 그러한 내용을, 내막을 담고 있는 겁니다.

지금 가버나움에 예수님께서 도착을 하셨는데 반 세겔을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말을 하죠.
당시에는 성전세를 거두러 다녔답니다. 갈릴리 지역의 중심이 가버나움이니까
어쩌면 성전세를 거두는 자들이 노리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성전세를 거둔다라는 것은 그들이 어느 파에 속했다라는 거예요? 사두개파죠.
이 성전세 하나를 갖고
그 예수님을 향해서 성전을 인정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지금 확인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성전세, 이 반 세겔을 받는 자들,
(‘반 세겔를 받는 자들’이라고 했을 때는 조금 이따가 살펴보겠지만)
이들이 성전을 위하여 드려야 되는 하나님의 율법이거든요.

그 율법을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않느냐?”라고 물어요.
이 말의 뜻은 ‘너희의 선생은 이 성전을 인정하느냐?’라는 겁니다.
지금 이 성전은 무슨 성전이에요? 헤롯 성전이죠.
헤롯 성전이라면, 아마 우리같이 똑똑한 사람들이라면,
헤롯은 에돔 사람으로서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성전을 BC 26년입니까?
그때부터 짓기 시작을 한 거거든요.

예수님이 33세 가까이 오니까, 거의 50년, 60년 동안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 중이었고
주요 건물들은 다 세워졌다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예수님이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똑똑하잖아요. ‘헤롯 성전은 가짜야’라고 이야기할 거예요.
성전세를 걷으러 오는 자에게 한 수 가르쳐 주겠죠. 뭘? 옳은 것을 가르쳐주려고 하겠죠.
우리가 예수님이라면 말이에요. 그렇게 하고도 남아요.

왜냐하면 우리의 사고 방식은 올바른 지식, 올바른 근거를 갖고 진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은 누구를 닮았느냐?라고 하면요
자기 아버지 마귀를 닮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진리는 인간이 범죄한 자리로 들어오시는 겁니다.
예상하지 못하는 거죠. 목사들이 설교를 할 때 이걸 다루지 못하죠. 머뭇머뭇거린단 말이에요.
헤롯 성전이 세워지고 있다라는 것은,
그 땅 자체가 약속의 땅이잖아요. 그 정도로 죄가 만년하고 죄의 깊이가 깊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의 깊이가 깊기 때문에
‘그거 필요 없어. 그건 성전 아니야’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주님께서는 여기에 대해서 성전세를 냅니다.

그전에 먼저 베드로의 태도를 보게 되면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이 질문이 왔을 때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내신다” 제가 연극을 하면 그런 거예요. 왜 버럭 낸다라고 할까요?
저쪽이 지금 시비를 걸려고 들어온 거잖아요.
만일에 예수님이 성전을 부정하면 어떤 사태가 발생합니까? 죽임을 당할지 모릅니다.
아직까지, 아직까지 마태복음에서는 성전을 노골적으로 부정한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2장을 기억하고 있는데
지금 마태복음에서는 성전을 노골적으로 부정한 게 나오지 않아요.

단지 마태복음 12장입니까? 거기에 보면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라고 말씀을 하신 내용은 나와요.
후반부로 넘어가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기도하는 집을 도적의 굴혈로 만들었다”라는 말씀이 나오고요.

이후에 이 거짓 증인들, 자기들 입장에서는 참 증인이고요.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다’라고 예수님을 고발하는 내용이
이후에 마태복음 26장 41절에서 나옵니다.
아직까지는 예수님께서 노골적으로 성전을 부정하시는 내용은 없어요.
제자들이 지금 성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는 대목이에요.

앞서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말씀을
베드로나 나머지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했다라는 겁니다.
요즘 교인들도 못 알아듣는 것 같아요.
왜 그러냐 하면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배당을 성전으로 부르잖아요.
성령을 못 받았다는 증거거든요.

지금 베드로에게 “너희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않는다”
반 세겔을 내지 않는다 라는 말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라는 거예요.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성전을 부정하는 것이고
성전을 부정하면 어디까지 나가느냐라는 거예요.

출애굽기 30장 11절부터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 개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스라엘 자손의 숫자를 계수를 합니다.
여기에 보면 뒤에 보면 20세 이상이 나오거든요. 민수기에도 20세 이상의 숫자를 세잖아요.
계수를 할 때 반드시 이들이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명령을 하십니다. 이 반세겔은 생명의 속전이 돼요.
돈이, 반 세겔 돈이 속제물이 되는 겁니다. 그걸 ‘속전’이라고 하죠. 속전. 돈 전(錢)자를 써서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성소의 세겔대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성소의 세겔을 정한 겁니다.
왜냐하면 도량형이 다 다르잖아요. 각 나라마다. 각 지역마다 시대마다 다 다르잖아요.
그래서 고정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 고정을 해놓으니까 환차손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사두개인들이 떼돈 버는 겁니다. 떼돈.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 곧 이십세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니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
영원히 이 율법은 지켜져야 합니다. 생명의 속전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생명의 속전은 어디에 사용되느냐? 라고 하면 회막의 봉사에 사용됩니다.

“회막의 봉사에 사용된다”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약간 다르게 이렇게 와닿죠.
속전이라 하면 어디로 가야 돼요? 피 흘리는 곳으로 가야 되잖아요.
피가 흘리는 그 직접적인 연관을 짓잖아요. 직접적인 연관을.
그런데 이 속전이 회막을 섬기는 데에,

그러면 어떤 데 사용되느냐? 하면 회막을 성막을 보수한다거나
그 천이라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 낡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이전에는 그냥 자원해서 드렸지만
그것을 구입해서 보수를 하는 겁니다. 이후에 솔로몬 성전이 지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성전에 들어가는 모든 돈들은 모두가 다 속전과 관련돼 있어요.
우리가 민수기를 살펴보면서 레위인들이 요제로 들여지고,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이 모두가 다 무엇과 관련돼 있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물로서의 역할로 연관되어 있잖아요.
성전세의 반 세겔은 속전입니다. 생명의 속전.

나중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그들이 느헤미야 10장 32절 한번 볼까요?
여기에서는 그들이 따로 하나님께 성전을 위하여 드리는 돈의 액수가 나옵니다.
“우리가 또 스스로 규례를 정하기를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의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되 곧 진설병과 항상 드리는 소제와 항상 드리는 번제와 안식일과”
지금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율법 시스템은 다 무너져 있는 상태죠.
그래서 새롭게 지금 이러한 법을 정한 겁니다.
본래는 여기에는 세겔의 3분의 1이잖아요. 원래는 반 세겔인데. 이렇게 바뀐 거예요.

그러면서 다시 에스라 느헤미야를 지나서, 말라기를 지나서, 400년이 지난 이후에
이들은 다시 원칙대로 어디로 돌아가자고 합니까?
‘모세 시대로 신명기 정신으로 출애굽기 정신으로 돌아가자’라고 그들은 주장을 하면서
반 세겔을 내고 있는 거예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반 세겔을 내는 부분에 대해서
문제를 삼았습니까, 삼지 않았습니까? 삼지 않았죠.
그리고 여기에서 베드로가 뭐라 했습니까? 내신다 했죠.
그 얘기를 좀 더 하면, 왜 ‘내신다’라고 했느냐 하면,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전세를 내지 않으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 되느냐 하면
앞서 이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했잖아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고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잖아요.

그 이후에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죽고 3일 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사단의 짓을 했잖아요.
그러한 경험을 한 이후에 거룩한 산에 올라가서
변화된, 변모된 예수님의 영광을 눈으로 목격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구름 사이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죠.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그 이후에 지금 이 베드로가 과연 어떤 변화를 갖고 있느냐? 라고 하면
여전히 소경이라는 사실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지금 ‘인자’라는 의미를 베드로는 여전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인자,
말씀을 했잖아요? 하면 알아먹어야 될 거 아닙니까? 이거 쉽잖아요. 사실은.
애들한테 말하면 말 알아먹습니까? 권사님 그랬어요? 못 알아먹죠. 애들이.
(애를 키워봐야... 안 키워본 사람은 안 키워봐도 말씀 속에 다 나오니까) 못 알아먹죠.

우리는 말씀으로 가르쳐 주면 알아먹을 거라 생각하는데 못 알아먹습니다.
왜? 그의 아비가 마귀거든요. 마귀를 자꾸,
마귀는 신입니다. 신.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신이에요.
욥기를 보면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해요. 물론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 되지만,
돈을 주기도 하고 병을 걸리기도 하고 낫기도 합니다. 누가? 마귀가.

지금 베드로는 성전이 사라지면 자기들이 기다리는 메시아 왕국에 문제가 생겨요.
왜냐하면 에스겔에서 보면 에스겔 성전이 약속이 되어 있잖아요.
그 성전은 성전대로 가야 되고,
그리고 메시야는 메시야대로 오셔야 된다는 겁니다.
투 트랙이잖아요.

성전이 사라진 상태에서, 메시야가 왕으로 된다라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맞지 않죠.
왜냐하면 다윗의 씨로 오시는 분이니까
다윗이 이후에 솔로몬에서 완전히 무화과 나무 아래로 서로 거기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그러한 시절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에 솔로몬 시절에는 성전이 있었잖아요.

그와 함께 예수님이 만일에 성전세를 내지 않는다라고 하면
예수님은 성전을 부정하는 일이기 되기 때문에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그 십자가의 길이 발생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 “(짜증스럽게) 내신다” 예수님께 묻지도 않았어요. 베드로는.
꼭 우리 같지 않습니까?
어떤 사태가 벌어지면 물어보고 해야 되는데 주님께 물어보지 않고 내가 결정하잖아요.
그게 우리 인간입니다.

이걸 시제적으로 표현하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를 그 사태로 몰아가시고,
몰아가신 상태에서 주님이 우리의 그 죄를 다 용서하신 그 희생의 피공로를 자랑하는 현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겁니다.
지금 베드로가 “내신다”라는 거예요. 내신다.
‘왜 우리 스승을 모함하려고 하느냐?’
‘우리 스승은, 예수님은 결코 성전을 부정하는 분이 아니야.’ 그것 때문에 내신다라고 나온 거예요.
우리가 성경에 짧게 나오기 때문에 이걸 그냥 쉽게 지나쳐 갈 수 있는데
이 내용이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이 내용과 무엇과 맞닿아 있느냐? 라고 하면
물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끄집어낸 그 사건과 맞닿아 있는 거예요.
베드로는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내 생각이 맞다’라는 거예요. 내 생각이.
‘내신다’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이제 베드로를 가르칩니다.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밖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예수님이 다 아셨죠.
그래서 베드로가 말도 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요즘은 부모가 집주인이면 자녀들에게 세를 받는 경우도 있어요. 세금 포탈하려고.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왕자가 세금을 내느냐?’ 얘기예요. 왕의 아들이.
오늘날 시대와는 조금 맞지 않죠. 오늘날은 대통령이 되어도 세금을 내야 되잖아요.
왕이 통치하는 그 시대에는, 임금이 통치하는 시대에는 세금을 안 내죠.
세자가 세금 내는 거 봤습니까? 세금 안 내거든요.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다른 사람에게만 세금을 받는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아들들은 새를 면한다는 거예요. 이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는 어떤 생각을 했느냐? 가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했으니까 이 아들들을 누구로 생각하겠습니까? 자기죠. 자기.
자기와 함께하는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가 생각하는 것과 달라요.
말은 맞죠. 아들들이 맞잖아요. 여기에서 우리들이 놓치기 쉬운 부분이 이런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세를 안 내셔도 되네.’

그다음 나오는 게 “저들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이렇게 말씀이 흘러가버리니까 사람들은 여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성전세를 내실 필요가 없다’ 이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과연 맞을까요? 그게?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아들은 어디로 가야 돼요?
이미 답이 나왔잖아요.
“인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잡혀 고난을 받고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 내용이 성전을 말씀하고 있잖아요.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앞서 출애굽기를 우리가 살펴봤을 때
성전세를 왜 낸다 했습니까? 그건 생명의 속전이잖아요.
생명의 속전으로서 성전세를 내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성전세를 낸다’라는 것은 ‘생명의 속전을 낸다’라는 거죠. 그죠?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죠.

예수님은 속죄물로 이 땅에 오셨잖아요. 화목 제물로.
‘지금 성전세를 내지 않느냐?’ 라고 따지는 그런 인물들이나
그들이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지금 제자들밖에 없거든요. 바깥에서 물었으니까
그 제자들이 안에 있으니까
이 베드로로부터 시작하여서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어떻게 듣느냐? 하면
‘맞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지.’ 아들들이지.

아들들이라면 세를 낼 필요가 없는데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서” 이 말을 못 알아들어요. 상대가.
해석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해석이 안 돼요.
그러면 자기들 방식으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어떻게?
‘아 예수님께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서...’
이 ‘오해케 한다’는 말이 이 ‘걸림돌이 된다’ 뭐 ‘넘어지게 한다’ 이런 의미인데
이것도 해석이 분분하거든요.

“저들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서 물고기를 낚시를 해서 첫 번째 잡히는 물고기 입을 열면
한 세겔이 있을 것인데 너와 나를 위하여 성전세를 주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사람을 실족케 하는 분이 아니라는 식으로 해석을 해요.
지금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모든 사람을 어디로 끌고 갑니까? 걸림돌로 끌고 가죠.
십자가가 걸림돌이잖아요.

성경 해석을 왜 그렇게 하느냐? 라고 할 때는
계속해서 성경을 자기 구원 중심으로 사람을 위한 복음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한 사고 방식을 누가 갖고 있느냐? 하면 베드로와 제자들이 갖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저들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서”
‘저들’ 속에 누구를 집어넣느냐? 하면 베드로를 집어넣어요. 베드로는 못 알아듣거든요. 지금.
‘목사님 말씀대로 봐야 되지 않습니까?’
그 말씀대로 보면 어떻게 할 건데요? 그러면 베드로는 알아들었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이 지시하신 그 말씀에 대해서 오해를 했어요? 하지 않았어요?
오해를 했잖아요.

어떻게 오해를 합니까? 예수님은 속전물로 오셨잖아요. 속죄물로 오셨잖아요.
본인이 속제물이에요. 본인이 성전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은 성전을 인정하시네요.’
그러니 여기에 이제 자신감이 더 붙은 겁니다.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했으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이잖아요. 그리고 ‘아들들’이 되잖아요.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다.’
그러니까 자기 방식으로, 자기 논리로, 막 끼워 넣는 겁니다. 밀어 넣는 거예요.
사람들이 성경을 해석을 할 때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거든요.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성경을 다 꾸깃꾸기 끼워 넣듯이.
베드로도 다르지 않은 겁니다.

그러면 낚시를 했는데 물고기 한 마리 속에서 한 세겔이 나왔다.
‘야 예수님은 창조주의 능력을 갖고 계셔서 보라 우리 이 예수님이 성전세를 이렇게 주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만물이 누구를 위해 있다라는 걸 지금 소개하는 겁니까?
주를 위해 있거든요. 그 주가 어떤 분이에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심판주예요.

지금 물고기도 마찬가지고, 인간들이 서로 통용하는 돈도 마찬가지예요.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것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위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AI까지도.
그저께 어떤 분이 저한테 어떤 목사를 소개해 줬어요. 어떤 목사님을 소개했는가? 하면
‘요즘 이 목사를 모르면, (나는 성이 이씨 인 줄 알았어요.) 간첩이다’ 라고 언론에 나온 거거든요.
이 목사가 누군가? 하면 AI 목사예요.
돈벌이 하기 쉬워요. 목사들이. 목사들 필요도 없어요. 이제는.

성경 지식을 조금 갖고, 그것도 필요 없습니다. 인터넷 들어가면요 성경 구절 구절마다
설교문이 다 나와요. 그 구글에 나오는 챗봇입니까? 오늘 본문 하는
‘마태복음 17장 24절에서 27절에 대한 설교를 해달라’라고 하면요
기존에 지금까지 나왔던 자료 있죠? 2년 전까지인가 나온 목사들이 올린 그 모든 자료를 걔들이
괜찮은 걸 뽑아 나와요. 한 가지가 기분 나쁘면 ‘다시 올리세요.’

정 안 되면요 한글을 쳐가지고
그 한글을 갖고 ‘이것을 영어로 번역해달라’고 질문을 바꿔요. 그럼 영어로 번역을 하잖아요.
그럼 영어로 번역한 그걸 갖고 질문을 그대로 들어가면요
미국에서 이렇게 미국이나 영어권을 쓰는 모든 사람들이 올린 설교문이 다 올라와요.
그럼 영어로 올라올 거죠. 그럼 영어를 갖고 다시 번역해달라 하면 다 해줘요.
돈을 조금만 투자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걸 갖고 뭐 하느냐?
그걸 갖고 ‘야 이거 니가 설교를 해봐라’ 이야기합니다. 말로. 돈 주면 되거든요. 언어로.
그러면 그걸 갖고 유튜브에 올리는 거예요.

마치 그런 거 있잖아요. 어떤 유튜버가 10만 수십만 100만이 되니까 짝퉁 유튜버가 나오듯이.
똑같습니다. 유명한 목사들 설교를 똑같이 하면 고소당하니까. 자기들도 다 뺏기거든요.

베드로가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못 알아듣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를 못 알아들어요.
예수님은 지금 성전세를 갖고 온 그 위치에서 성전세를 내시는 그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본인 자신이 진짜 성전세라는 것을, 속전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 본문이 어렵다라는 거예요.

왜 이렇게 해석을 해야 되느냐? 라고 하면
베드로가 성령을 받았잖아요. 성령을 받은 이후에 이 사건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어떻게 보겠어요?
나의 그때 죄악을 그대로 노출시키시고,
“성전세 내신다.” 내가 꿈꾸는 메시야 왕국을 기다리는 그것을 주님은 그대로 받으시면서
그 요구 때문에, 그들의 욕망 때문에, 그 욕망 때문에 예수님이 제거당하거든요.
자기의 꿈을 이루어주지 않는 메시야는 메시야가 아니에요.
성령 받은 마태가 지금 이걸 기록하고 있잖아요.

성령 받은 베드로가 지금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와 전혀 다르게 보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복음이 되겠죠.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이 이 본문을 보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게 아니라, 화목 제물이 보이는 게 아니라, 뭐가 보일까요?
능력이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어. 그래서 우리를 그 무식한,
복음을 모르는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성전세를 내셨어.’
그 어떤 목사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 예수님을 본받아서 우리도 세상에 세금을 잘 내자.’
지금 세금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이건.
세금 이야기는 뒤에 이야기합니다. 시비를 걸잖아요. 그 말을 갖고 와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합니까? 가하지 않습니까?” 이 질문이 나오거든요. 그건.
지금 이것은 그 이야기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비유로 “세상 임금의 아들이 세금을 내느냐 안 내느냐” 이렇게 하니까
이 무식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으니까
‘이거는 세금과 관련되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최소한 기본적인 도리를 하고 살아야 된다.’
그렇게 설교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잖아요. 그죠?
기본적인 도리를 하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 안 돼요.

그 당시의 권력자들이 누굽니까? 법 집행자들이 누굽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이잖아요. 그러면 그들의 법을 따라야 되죠.
왜 그들이 싫어하는 말을 하고, 왜 그들이 원치 않는 그러한 행동을 하시느냐? 는 거예요.
자기들이 예수님을 조작해내는 겁니다.

이 베드로도 마찬가지죠.
베드로도 지금 “내신다”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진짜 내주시는 겁니다. 왜?
예수님의 말씀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서, 저희로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문제는 누굽니까? ‘너’예요. 너. 베드로.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물고기를 낚시를 해서 성전세를 내게 하신 거예요.
지금 이것이 왜 중요하냐? 라고 하면
이 구약을 보게 되면, 성전세라는 것이 누가 냅니까? 내가 내죠. 내가. 내가 내는 거예요.
‘내가 낸다’라는 것은
속죄를 받을 때 나의 행위가 개입될 수 있다라는 여지를 주는 것 같아요.

그러나 구약 말씀을 제대로 보게 되면
속죄물로 드리는 모든 것들이 출발점이 어디입니까? 출발점이? 성전이죠.
대제사장으로부터 출발을 합니다. 내가 드리는 게 없어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 당시가 되면, 이 마태복음 이 시절이 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모든 것들이 자기가 해야 돼요.
왜냐하면 조상들이 멸망당한 이유가, 지금 로마 제국에 지배당하는 이유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이 말도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왜 안 되는가? 하면
분명히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죠. 맞죠?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러면 아들들은 세를 면해야 되죠.
그런데 세를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출애굽기 30장에 세를 받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해야 되면
그러면 출애굽기 30장에 나오는 그 반 세겔을 하나님이 내라고 하셨을 때
이 예수님의 말씀과 충돌이 일어나잖아요.
그러면 그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은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 라고 하면
“반 세겔을 내라”는 것은 ‘너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베드로가 반 세겔을 내잖아요. 예수님에 의해서.
‘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들은 세를 면한다 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셨잖아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셨다면 구약에 나오는 그 말씀이 폐해지면 안 되잖아요. 그죠?

그러면 그 말씀을 예수님은 정반대로 정면으로 부딪혔는데
부딪힐 때 사람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방금 그런 식으로 해석이 돼야 되는 겁니다.
제가 자꾸 해석을 하니까 자꾸 마치 뭐 가르치는 듯한데, 어쩔 수 없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가르치는 형식으로 전파되기 때문에.

그 당시에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야 돼요.
왜냐하면 ‘그러면 출애굽기 30장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성전세, 반 세겔을 내지 말아야 되느냐?’
이 얘기예요. 왜? 자기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거든요.
지금 반 세겔을 지역마다 돌아다니면서 수금하러 다니잖아요.

옛날에는 수금하러 다닌 것 같은데, 전기세 비슷한... 제 기억으로는.
막 돌아다니면서 메타기 보고 그랬었죠? 옛날에. 집집마다 이렇게 보고 돈 주고 막 그런 것 같은데
똑같은 거거든요. 돈을.
이들이 지금 헤롯 성전이 있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이 있잖아요.
그들이 다 있는데,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너거들은 출애굽기 30장에 의하면 반 세겔을 바쳐야 되는데”
예수님이 인자로 오셨잖아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잖아요.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세를 면한다”라고 선언을 해버립니다.
베드로도 “맞죠.” 라고 했거든요.
“맞죠.”라고 해놓고 자기도 그 말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성전세를 낸다라고, 말도 끝나기도 전에 그렇게 대답을 한 겁니다.
그러니 성전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이 예수님의 이 말씀 자체가 얼마나 분노를 이야기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거예요.
방금 제가 여러분 그렇게 들리지 않나요? 말씀 자체가?
“아들들은 세를 면한다”면 세를 낸 것은 아들들이 아니라는 선언이에요.

지금 헤롯 성전에서 열심히 제사를 드리고, 어쨌든 그것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으면서,
이 성전에 대해서 부정한 자들은 쿰란 공동체라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어쨌든 이들은 이 시스템 자체에 대해서 예수님이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거예요.
그러니 예수님을 가만히 둘 리가 없는 겁니다.

놀랍게도 베드로가 성령을 받게 되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되죠.
양자가 됩니다. 양자가 되었기에 세를 면한 겁니다.
어떻게 양자가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인자로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받고 잡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죽음에 참예시키시고 이 부활의 능력 속으로 합류시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양자가 된 거예요.

그 양자로서는 세를 낼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라는 거예요.
이것이 왜 중요하냐? 라고 하면
하나님께 속전물로 드릴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어떤 인간의 속전물도 안 받아요. 속전물은 예수님뿐이에요.

우리는 이걸로 설교를 끝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왜? 낼름 이것만 받아먹으면 되니까.
문제는 이 내용이 성도 속에 그대로 담긴다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고린도전서 3장을 보겠습니다. 1절부터 보면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오”
여기에 보면 어린아이와 같이 대한다라고 하죠.
아직까지 너희들은 어린아이에 속하여서 장성하지 못했다라는 그러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이 본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 라고 하면
‘우리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된다’라고 가르치는 거예요.
그게 성화론이거든요.

그런데 성화론을 주장하는 그 사람들에게 제가 질문하고 싶은 게
‘당신은 시기와 분쟁이 없습니까?’ 라고 물어보고 싶어요.
시기와 분쟁이 없는 인간이 있나요? 사태가 벌어지면 반드시 발생하게 됩니다.
지금 이 고린도전서 말씀을 읽으면서 십자가가 보이지 않고 무엇이 보입니까? 그들에게는?
‘괜찮은 인간상’을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 사도 바울은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그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해서, 그 현실에 대해서 인간이 갖고 있는 사고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말씀을 하면 우리는 다 어른이 되고 싶잖아요. 맞죠? 단단한 음식을 먹고 싶잖아요.
그런데 시기, 분쟁 그 사태로 내몰려 보세요. 그건 누구도 못 빠져나갑니다.

우리는 ‘고라당 이 바보 같은 자들이라’ 이렇게 할지 모르지만
자기 옆에 자기와 똑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 똑같이 딸이 있다 쳤을 때
자기 딸보다 더 괜찮은 대학을 다닌다. 더 괜찮은 직장이 있다. 그러면 어떨까요?
당해봐야 알거든요.
지금 사도 바울이 ‘너희는 시기도 하지 말고, 분쟁도 하지 말아라’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는 현장이 교회예요.
그런데 십자가를 날려버리는 것이 교회 아닌 거예요.
그것이 정당하다라는 게 아니에요.
‘시기가 있는 것이 정당하고 분쟁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사도바울은. 그것도 깨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주시는 거죠.

이 말씀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우리를 다 뭘로 보는 겁니까?
육신에 속한 자로 보는 거예요.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있다라는 것은.
여러분이 만일에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찢어서 버려야 돼요.

그러면서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각각 주신 대로 복음을 전했어요.
바울이든, 아볼로든, 게바든, 누가 되었든, 모두가 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맞죠?

그런데 바울이 원하든 원치 않든, 게바가 아볼로가 원하든 원치 않든, 파벌이 생겼어요.
파벌이 생기면서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시기와 분쟁이 일어나요.
이건 뭐 우리 모임에 몇 명 안 되지만 마찬가지입니다.
‘분쟁을 없애자. 시기를 없애자’ 이것은 완전히 악마의 발상입니다.
십자가 제거한 세상을 만들자는 거고.

날마다 책망받음으로 빛으로 나아오는 그러한 사태가 벌어지는 곳이 성도고 교회거든요.
지금 복음을 전했는데 복음을 전한 자리에 비 복음의 모습이 나오는 겁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성령을 받았다면, 복음을 들었다면, 비 복음적 이 주님을 대적하는 모습이 안 나와야 되는데
오히려 주님을 대적하는 모습이 나오는 현장이 돼요.
왜 그러냐? 라고 하면 십자가의 증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의 증인.
나의 증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증인이라면 내가 복음을 들은 이후에 ‘나 잘났다’가 나와야 되는데
복음을 들은 이후에 복음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보니까 뭐가 나옵니까?
시기가 나오고 분쟁이 나온 겁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시기와 분쟁이 나오느냐? 희한해요. 이게.
복음을 알면 이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이잖아요.
지금 주께서 각자에게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라 하잖아요.
각자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서, 믿게 한 것도 믿음도 은혜로 말미암은 거잖아요. 로마서에 보면.
모든 게 은혜에서 은혜로 진행되고 출발이 되고 끝나야 되는데

은혜를 받은 자에서 뭐가 나옵니까? 갑자기 자랑거리가 툭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 자랑거리가 뭔가? 하면 바로 은혜를 뭘로 바꾼 거예요? 행위로 바꾼 거예요.
바울의 행위, 아볼로의 행위, 게바의 행위로 바꾼 겁니다.
그러니 이들이 시기하고 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7절에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하나님뿐이니라” 라고 하면 또 우리는 하나님으로 가죠. 그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주님이 다 이루셨잖아요. 주님이 동행을 하시잖아요.
주님이 친히 자라게 하시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친히 자라게 했는데
‘바울이 그랬어. 게바가 그랬어. 아블로가 자라게 했어.’
여기에 인간의 행위를 집어넣는 겁니다.
이걸 오늘 본문과 연결시키면, 주의 일에 자기는 보탤 게 없거든요.
십자가에서 주님이 다 이루셨기 때문에 어떤 것도 보탤 게 없는데
놀랍게도 복음을 들은 자리에, 복음을 서로서로 들어놓고, 거기에 뭘 끄집어내는 겁니까?
뭔가를 보태는 거예요.
복음을 전한 사람을 끌고 와가지고
‘나, 우리 스승이 누군지 알아? 우리 스승이 게바야. 우리 스승이 바울이야. 우리 스승이 아블로야.’
은혜를 뭘로 돌려버립니까? 은혜 되지 못하게 만드는 자들이죠.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이 말도 사람들을 유혹하죠. ‘뭔가 행한 게 있어야 받을 거 아닙니까?’
로마서에 나오잖아요. 행한 것이 없는데 의로 여기심을 받았잖아요.
각자 여기에 행한 대로,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는 의미는
여기에 주님의 일에 의해서 은혜 속에 참예하여서 자기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 자들은
하나님을 상으로 받죠. 상급을 받잖아요. 하나님을.

그런데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했어요.’ 마태복음에 나오듯이. ‘귀신을 쫓아냈어요.’
‘내가 아볼로로부터 복음을 잘 들어가서 전수를 받아서 내가 잘 전했어요.’
이건 일한 대로 받아야 되죠.
행한 대로 심판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잖아요. 말씀이 유혹거리가 된다고요.
마귀가 말씀을 갖고 오거든요.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은혜를 따라 터를 세웠으면 그 위에도 뭐가 무엇이에요? 은혜죠. 은혜, 은혜, 은혜, 은혜...
이걸 오해를 해요. 사람들이.
건축물로 표현을 하니까 ‘아 기초, 그리스도를 닦아놓으니까 그 위에 뭔가 올라간다’라고
자꾸 생각을 하는데 그 이야기가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지금 표현하는 게.

오히려 건축물이 올라갈수록 뭐만 남아요? 은혜가 높아지죠. 맞죠?
은혜 위 은혜를 따라 터를 쌓았으니까 그 은혜가 계속 쌓여지면 이걸 달리 표현하면
죄의 깊이가 더 깊어지는 겁니다.
그 죄의 깊이가 더 깊어지는 세계로 지금 인도함을 받은 게 고린도 교회입니다.
얼마나 감사해요?
‘에이 우리는 바울파 게바파 이런 거 하지 마.’ 이러면 뭘 몰라요?
사랑의 깊이를 모르는 겁니다.

10절에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우리의 본성은 더 이상 우리가 주의 일에 보탤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은혜를 주셨는데,
은혜로 받은 것을 내어놓으면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그것을 보탠다라고 생각을 해요.

‘내가 주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면서,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고 봉사했습니다.’
그런 의식을 늘 갖잖아요. 안 갖나요? 육이 있는 한 그것이 계속해서,
나도 몰라요. 그게 올라옵니다.
그걸 지금 주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을 부지런히 묵상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쪼개지죠.
쪼개져야 십자가만 밝히 보이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예수 그리스도가 터를 닦았죠?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틀을 닦았으면 그다음 누가 터를 닦아요? 바울이 닦습니까?
아니죠. 주님이 동행을 하잖아요.
주님이 계속해서 거기에 쌓아가시잖아요.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사도바울이 기도를 하잖아요.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를 알아가기를 원합니다”
그걸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근데 그건 천지 쓸데없죠. 인간들의 눈에는.
자랑거리도 안 되고, 돈도 안 되고, 죄인 중에 괴수. 그거 자랑하고 앉았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조롱하겠습니까? ‘네가 한 업적을 내놔라.’

사도바울이 말년에 업적 보면
아시아 교회도 떠나가고 데마도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가고... 남은 게 없어요.
예수님의 업적은 한 사람이 있죠.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 그 강도가 업적입니다. 살아계셨을 때.
얼마나 조롱거리입니까?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나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이런 말씀들도 사람들에게 유혹거리가 되죠.
여러분 불 가운데서 구원 얻고 싶습니까? 아니면 제대로 구원 얻고 싶습니까?
지금 사도바울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그 얘기가 아니에요.
이 책망을 하는 겁니다. 책망을.

성도는 책망을 받는데 책망을 받을 마음이 없어요.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것이나 롯이 구원받은 것이 어떻게 구원받았어요?
모두가 다 불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잖아요. 심판 속에서의 구원이에요.
‘에이 롯은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구원받았으니까 부끄러운 구원이야.’
그러면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은 믿음 하나도 없는데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았는데요.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읽으면서
‘공력이 탈 거니까 공력 안 타는 것을 준비해야 된다’
다시 또 뭘 내려고 합니까? 성전세를 내려고 해요.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물고기요, 베드로요, 성전세라는 이 사실을 깨닫지를 못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어도 계속해서 무엇을 욕망합니까?
자기가 하나님께 뭔가를 드릴 수 있다라는 거예요.
드릴 수 있다라는 것은, 뭔가를 바칠 수 있다라는 것은, 누구와 같은 태도이냐? 하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태도입니다.
‘뭔가를 바칠 수 있다’라는 것은 자기들이 어디로 올라가고자 하는 겁니까?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거예요.

“바울파다 게바파다 우리의 스승은 아볼로다.” 이 말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어요?
‘내 잘났으니까 너희들 까불지 말라’는 거예요.
‘어느 교회 다니느냐?’ 묻잖아요.
묻는 이유가 그 교회 다니니까 ‘너는 이름도 없는 교회 다니지?’ 지금 이 논리거든요.
주님이 홀로 속전물이 되셨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홀로 속전물이 되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그 일에 참예시켜 주셔서 속전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삼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것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피로 주신 은혜의 선물들만을 마음껏 내어놓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