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11-09 07:12
20231108 마태복음 강해 마 18:21-35 일흔번씩 일곱번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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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11-09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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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8 마태복음 강해 마 18:21-35 일흔번씩 일곱번

기도드리겠습니다.
먹을 것을 찾는 우는 사자와 같이 믿는 자들조차도 잡아 삼키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온갖 일들을 일으키시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확정하기 위해서,
우리의 인생을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상황으로 인도하심을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18장 21절에서 35절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마18:21~35)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예수님께서 천국 비유를 말씀을 하셨는데,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베드로가 질문을 했죠.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유대인들은 그들 모두가 형제예요.
아직까지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 받은 공동체를 베드로는 알지 못합니다.
물론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그 교회라는 것도 베드로가 상상하는 거거든요.
성령이 와야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교회가 드러나게 돼요.

앞서 예수님께서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개인 관계예요.
한 사람이 교회에 대해서 죄를 범한 게 아니에요. 전체 공동체에 대해서.
어느 뉴스를 보니까
강원도의 어느 교회 장로가, 재정 집사, 재정을 한 10년 맡았는데 5억을 횡령했다.
그런 사람을 두고 지금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15절에 어떤 사본에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범하거든”
제가 보기에는 그게 타당해요.
그러니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라”라는 거죠.
교회에 어떤 사람이 죄를 범했는데 목사 한 사람이 가서... 이 얘기가 아니고
사람들은 그렇게 지금 이 본문을 보고 싶은 거예요.

왜 그렇게 보고 싶으냐?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이러한 말씀을 보게 되면 교회를 권력 조직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앞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는 이 잃어버렸다가 찾은 바 된 그 양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것이고, 그게 뜻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범하거든” 이야기를 할 때
이 생각이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나에게 죄를 범한다’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누가? 지금 베드로가.

베드로도 신기한 게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그 사람과만 상대하고”
우리가 볼 때는 한 번이잖아요.
그다음 말을 듣지 않으면 책망을 했는데,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증참케 하고
그다음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에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같이, 세리와 같이 여겨라.

그런데 베드로는 “내 형제가 너에게 죄를 범하거든 그 사람과 상대하여 용서를 하는데 일곱번까지 하면 됩니까?”라고 질문을 해요.
놀랍지 않습니까?
어느 누가 마태복음 18장 15절에 나오는 이 말씀을 일곱 번으로 해석하는 거 봤습니까?
뒤에 있어도 그렇게 해석을 안 해요.

지금 이 본문을 잘라버리면 베드로의 질문과 예수님의 비유로 답변하신 것과 연결이 안 되고
그 앞에 나오는 실족케 하는 이 문제와도 연결이 안 돼요.
그리고 이렇게 되면 십자가가 나오지 않고 뭐가 나오는가? 하면 조직밖에 안 나와요. 조직.

인간이 모이는 곳에는 조직이 있어야 되죠.
조직 없는 모임은 모임이 아니에요.
이 조직이라는 것이 건축으로 치면 이 골조잖아요.
골조 없는 교회, 그 꼬라지가 잘 돌아가겠습니까?
지금 말씀 자체를 성령을 받기 전에 보기 때문에
성령을 받지 않고 보게 되면 자기가 상상하는 바를 계속해서 가미를 시키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곧장, 곧장 나에게 죄를 범한 그에게 가서 책망을 했을 때 안 들으면
사실 죄가 뭔지도 몰라요.
안 들으면 두 세 증인을 증참케 하여서 왜 두 세 증인입니까?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두 세 증인이거든요.
두 세 증인으로 해서 확정하여서 한 번 더 가요.

사실은 구약에는 두 세 증인이 나타나면 회중이 판결을 내립니다.
재판관이 판결을 내려요.
그런데 교회에서 한 번 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구약과 다르죠.
한 번 더 얘기를 하면 지금 몇 단계를 거칩니까? 1, 2, 3단계를 거치잖아요.

그런데 베드로는 그때에 이 말씀을 듣고
“그 때에 내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이렇게 질문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가볍게 듣는 게 아니죠.
왜 그러냐? 라고 하면 구약 이스라엘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 얼마나 참으시고 참았습니까?

그건 잘 아시죠?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고 참으시지 않으셨다면 광야에서 끝장이 난 거예요.
약속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참으시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던 겁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일곱 번 정도 하면, 칠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라 그러니까
피를 속죄제에, 피를 뿌릴 때도 일곱 번 뿌린다. 이렇게 하니까
그건 이 원천은 어디 있는지 몰라요.

나중에 성령을 통해서 보게 되니까 베드로는 육이잖아요. 그죠?
육의 입장에서 칠이라는 숫자를 갖고 와서
내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일곱 번 용서하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용서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우리는 한 번 만에 끝장내려고 하는데 베드로는 그 정도 수준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남은 자거든요. 예수님의 말씀을 좀 나름대로 배워왔거든요.
그러니 “내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면 책망하라” 했을 때
책망을 몇 번이나 해야 되느냐? 라는 거예요.

한 번 했죠. 그래서 들었어요. 그런데 또 죄를 범했어요.
그래서 또 책망을 합니다. 책망이라는 말이 아니죠.
베드로 입장에서는 ‘너 그거 나에게 잘못했지?’ 이거거든요. 그래서 ‘미안하다’ 한 거예요.
근데 또 사기를 치는 거예요. 사기를 일곱 번 쳤다 칩시다. 여섯 번, 여섯 번까지는 내가 하고
일곱 번도 나에게 사기를 쳤는데
전세 사기친 사람들 몇 번까지 용서하면 돼요? 여러분이라면 몇 번까지 용서하겠습니까?
한 번도 안 될 건데

지금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범한다” 할 때 이 죄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와 있지 않아요.
베드로는 이 죄가 너에게 죄를 범했을 때, 사적인 죄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여기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칠십 이레가 나왔어요.
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것을 헬라어 성경에서 어떤 사람은 칠십칠로도 해석하고
칠십 곱하기 칠로도 해석하고 어떻게 해도 돼요.
제가 보기에는 칠십 이레인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라는 거예요. 창세기 4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16절 이하를 보면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라멕의 아들들을 보면 라멕의 위치가 어느 정도 위치인지 알겠죠.
권력의 정점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 아내들에게 노래를 부르는데 어떤 노래를 부르느냐? 하면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노래, 나를 조금이라도 건드린 놈들은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이 상함과 창상, 어느 정도까지?
지나갔는데 턱 부딪혔어요. 그 사람이 라멕의 위치에 있으면 죽여버립니다.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자기를 밀치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그 사람을 죽여도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오히려 칭송, 지금 노래가 불려지거든요. 찬양이 되거든요.
죽인 것에 대한 찬양이 불려진다면, 아마 살아남을 인간 아무도 없을 겁니다.
누구나가 다 죽여버릴 거예요.

분노 조절 장애의 문제가 아니에요.
자기들은 분노 조절을 잘해 가지고 사람을 안 죽인다는데
분노 조절을 못해서 사람을 죽입니까?
사기꾼들 한번 보세요. 분노 조절을 얼마나 잘합니까?
그 얼굴빛 하나 안 변하면서 사람에게 사기를 치잖아요.
사기 당한 사람들, 멀쩡한 사람들이 다 사기를 당하거든요.

이 라멕의 노래가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서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하나님께서 가인이 “나는 땅에 유리하는 자가 되는데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일 겁니다”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응답을 하시는데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인 자는 벌이 칠 배나 받을 것이다”

‘칠 배나 받는다’라는 말씀은 ‘가인을 죽일 자가 없다’라는 말이에요.
‘가인을 만일 죽인다면 일곱 배나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다.’
이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피를 흘린 자는 그 피 값을 본인이 감당을 해야 됩니다.
그게 민수기 35장에 나오거든요.

도피성에 피할 수 있는 자든, 고의로 살해한 자든,
모두가 다 피 흘린 값은 자신이 그 피 값을 치러야 돼요.
그런데 이 우연히 살해한 자가 도피성에 피하잖아요.
‘피했으니까 나는 피 값을 안 치러도 되겠네’라고 생각을 하는데
대제사장이 대신 피 값을 치러서 속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만일에 그가 도피성에 있는데
속전을 내어서 죗값을 치른다. 대신 속죄제 드리면 그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이 ‘칠십칠 배’ 이렇게 해석했잖아요. 칠십 이레에요.
다니엘서 예언에 칠십 년이 칠십 이레로 바뀐 게 우연이 아니에요.
신약 성경에 칠십 이레가 나오는 장면이 유일한 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에요.

라멕이 왜 이 이야기를 합니까?
왜 칠십칠 배를 이야기합니까?
지금 라멕이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 모든 인류의 모델입니다.
‘나는 라멕과 다르다’라고 하지 마세요.
‘나는 히틀러와 달라’ 이런 말을 하면 안 돼요.

그 상황으로 몰아가면 헤롯왕이 되고,
예수님을 살해한 대제사장이 되고, 본디오 빌라도가 되는 거예요.
그게 죄 아래 갇힌 자의 모습입니다.

라멕이 뭘 보여주느냐? 라고 하면
이 죄의 종노릇 하는 그 인간의 끝자락을 보여주는 거예요. 끝판왕입니다. 끝판왕.
이 끝판왕이라는 말은 ‘이런 사람이 이 세상에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얘기가 아니라
우리 누구나가 라멕과 같은 사고 방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나를 건드리는 자는 벌이 칠십 이레, 무한대.

완전히 이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을 할 때 “나에게 절을 하면 세상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
마귀가 노리는 지점이 이 라멕과 똑같은 거예요.
자기 자신이 하늘 보좌 위보다 더 높은 보좌에 앉는 겁니다. 하나님 보좌보다.
그게 라멕의 모습이에요.

그 라멕의 모습이 폭력적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폭력적으로.
살짝 건드리려는데 죽여버립니다. 이거는 칠십칠 배가 아니잖아요.
한 대를 쳤으면 칠십칠 배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칠십칠 배를 때리든지 안 그러면 칠십 곱하기 칠 해가지고 490대를 때리든지...
한 칼에 죽여버립니다. 이게 라멕의 모습이거든요.

이 라멕의 모습에서 인간이 벗어날 수 있느냐? 라는 거예요.
못 벗어나죠.
‘나는 법도 없이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악한 마음이 없을 거라’
그 법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 (물론 율법이 있는 바리새인들이지만)
바리새인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본디오 빌라도도 나름대로 양심이 있었거든요.

어젯밤에 설교를 했지만 그들이 알고 예수님을 죽입니까?
알았다면 죽이지 않았죠.
그런데 그것을 뭐라고 고발합니까? 심판주를 죽였다라는 겁니다.
모르고 죽였으니까 용납이 돼요? 용서가 됩니까? 용서가 안 돼요.

예수님을 향해 화가 나고 분노가 일어나는 이유가 뭐냐?
예수님이 그들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했을까? 악하다 했죠.
“너희들은 악하고, 악하기 때문에 내 피와 살이 아니면 영생이 없다”라고 한 거예요.
그게 분노로 일어난 거예요.

그 말인즉슨 ‘너희들이 의지하는 성전, 너희들이 의지하는 율법, 그 모든 것들이 내게 대해서 전한다’
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 같으면 ‘자기가 그냥 하나의 이론을 펼칠 뿐인데 왜 죽여’
이방인에게 그런 말을 하면 안 죽이죠.
근데 그것이 복음이 되어서 전파가 되면 그런 태도가 예수님을 살해한 태도다라고 합니다.
가만히 있겠습니까?

지금 베드로는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앞부분에 실족케 한다는 얘기가 나왔잖아요.
그럼 실족이 뭐냐? 라는 것도 알아야 되잖아요.
나를 믿는 소자잖아요. 나를 믿는 소자.
예수님을 믿는 소자는 피를 덮어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아들의 피를 덮어썼어요.

그러면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범한다” 할 때 그 죄라는 것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습니까?
어떤 내용을 담고 있어요?
내 쪽에서도 피를 덮어썼고 저쪽에서도 피를 덮어썼잖아요.
그러면 ‘그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한다’ 할 때 무슨 죄인가요?
이것부터 해결되면 뒤의 문제가 다 해결이 되거든요.

나한테 죄를 범할 게 있습니까? 상대가.
물론 이 서신서로 넘어가면 이 내용들이 다 나오지만,
나 자신이 피를 덮어썼잖아요. 그러면 저쪽에서 어린 양의 피를 삭제하는 걸 갖고 온 거예요.
“세리와 이방인같이 여기라”라는 것은 무엇을 제거하는 거예요?
저에게는 피 덮음이 없다라는 얘기잖아요.

이것도 참 어려운 게 뭔가? 하면
한 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가
용서받았다가 용서 못 받는 일이 있느냐? 이 질문이 나와야 돼요. 여기에서.

왜냐하면
“너희들도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똑같이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거예요. 이미 용서받은 자끼리 다 들어왔는데.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말씀으로,
순종할 수 있는 말씀으로 본다면 베드로처럼 질문을 해요.
내가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 칠십 이레, 이건 무슨 얘기입니까?
영원히 용서하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너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 못한다’라는 겁니까?
안 된다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 이 베드로가 생각하는 것은 자기가 살아 있잖아요.
자기가 죽었으면 형제가 일곱 번 정도가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 아니라
칠백 이레 해도, 주님의 말씀의 표현이 맞죠.
칠십 이레 해도 자기가 용서할 입장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감사함으로 받아야 될 거 아니에요.

문제는 이 베드로의 사고방식이에요.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이 말은 이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였다라고 할 때는 율법적 사고를 갖고 있는 거예요.
선악 구조를 갖고 있는 겁니다. 그렇죠? 본인이 하나님인 거예요.

왜 하나님이 되느냐? 하면 이 악마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일곱 번씩 하리이까” 물었을 때
 예수님이 “일흔 번씩 일곱 번 하라” 했잖아요.
그럼 목사들이 뭐라고 설교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영원히 용서를 해야 됩니다.’
이 말이 뭐예요? 자기가 신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너희들은 용서할 위치에 있지 않다’라는 겁니다.

용서할 위치에 있지 않는데 이 말씀의 세계 속으로 베드로를 끌어당겨버려요.
어떤 방식으로? 성령을 주시는 방식으로.
성령을 줘버리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대신 사는 그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 상태가 되니까 십자가를 자랑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이것만 해도 기겁하겠죠.
근데 부처라면 뭐라 하겠습니까? 그렇지. 성철이라면 당연히 해야 되는 거지.

지금 말씀을 읽을 때, 지금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법으로 읽어요.
복음으로 읽혀야 되는데 법으로 읽기 때문에 계속해서 무엇이 튀어나옵니까?
행위가 계속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럼 행위가 없는 믿음이 있습니까? 없죠. 반드시 행위가 나와야 되는데,
이 행위가 한쪽은 십자가를 증거하고
다른 한쪽은 지금 방금 행위가 튀어나온다는 것은 이들은 십자가를 제거하겠다는 거예요.

이런 걸 갖고 ‘교회는 이러해야 됩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나에게 죄를 범했을 때 용서하면 나는 의인이네요?
그럼 이 말씀 속으로 들어가면 나에게 범죄할 게 없잖아요.

누가 그렇게 기도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좋아하는 다윗이 그렇게 기도했잖아요.
“내가 주께만 범죄했다.” 시편 51편에 보면.
베드로가 시편 51편을 모르겠습니까? 알아도 그렇게 적용을 못하죠.
이 말씀이 필요 없다라는 게 아니라 이 말씀으로 들어가게 되면 모든 자가 주께만 범죄하게 돼요.
주께만 범죄하는 것이 형제에게 나타나는 거예요.

주께 범죄하는 것은 뭐예요? 십자가를 부정하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부정하는 것, 이거 하나뿐입니다.
이거 하나가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에요. 모든 것 자체가.
나중에 우상의 제물을 먹는 그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다 나와요.
성령을 받게 되면 죄인이 되잖아요.
죄인인데 상대도 죄인이라 해놓고 자기는 뭘 끄집어내겠어요?
십자가를 싹 날려버리고 행위를 끄집어낼 것 아닙니까. 그게 형제를 범죄케 하는 거거든요.
‘나는 우상이 없는 걸 알아. 그러니까 나 우상 제물을 먹겠어.’ 이거 뭐예요?
의롭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잖아요. 나 잘 아니까.

여기에 대해 바울이 뭐라 합니까?
“내가 그러하다면 내가 영원히 우상의 제물을, 고기 먹지 않겠다” 라고 해버려요. 아예.
그러면 또 사람들이 “나 바울처럼 될래.”
지금 모든 것들이 십자가를 증거하고 있는데 이 라멕과 같은 자들이에요.
라멕과 같은 자들이기 때문에 십자가로 말씀을 대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 행위로 말씀을 대하는 겁니다.

그래서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7번만 해도 대단하거든요.
여러분 우리 개인적 인간관계에서 7번 용서할 수 있겠어요?
세 번만 해도 학을 떼고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아니 전셋집을 얻었는데 이게 나에게 그 형제예요.
원래 교회에서 사기를 많이 치잖아요. 그죠? 몇 년 전에 강남에서 그 교회 무슨 복음은 복음인데
순수한 복음 교회에서 그 목사하고 작당해서 사기를 쳤잖아요.
몇 번까지 쳐도 용서하라? 영원히 사기쳐서... 형제라면, 형제라면.

이것도 문제예요. 형제의 증거가 뭐냐? 이거예요. 형제의 증거.
“난 죄인입니다.” 그게 다예요.
근데 우리 쪽에서는 뭐라고 생각합니까?
‘네가 그렇게 죄인이라 하는 것도 내가 보기에는 가짜야’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왜? 용서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십자가에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 있거든요. 용서의 근거가.

사기를 쳤어요. 나에게 5천만 원을 주면 매달. 5천만 원의 한 달 이자가 얼마입니까? 요즘?
50만 원인가요? 그만큼 안 되죠. 예를 들어 20만 원을 주는데 자기는 50만 원을 준다 해가지고
원래 다섯 번은 주거든요. 3번에서 5번.
원래 그렇게 해요. 그렇게 해야 그다음에 1억을 넣고 10억을 넣거든요.
사기 수법이 다 그렇습니다. 원래.

단수가 낮은 사람들은 한 번 받아먹고 그냥 끝나지만,
좀 크게 노는 사람들은 한 다섯 달 정도는 줘요. 그래서 한 500억인가 그 사기를 쳤잖아요.
그래서 책망을 했어요.
그러면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하면 끝났어요. 근데 우리 그 사람을 성도로 보겠어요?
소소한 거는 책망을 받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성도로 볼 수 있잖아요.

근데 그런 경우에는 어떨까요? 과연 그게 가능할까요?
여러분의 전재산을 다 뺏아 갔다라고 하면 될까요? 개인적으로?
그러면 상대는 또 머리가 좋을 것 아닙니까?
여기 보면 책망을 받으면 ‘죄인입니다’ 하면 그러면 받으라 했잖아요.
받으라 하면 당연히 ‘그러면 너는 거기에 대한 값을 치러야지’ 감옥 가야죠. 그죠?
그것도 안 하고 ‘죄인입니다.’ 이거는 가짜잖아요. 뭐 그렇게 했을 경우에 용서가 될까요?

이 말씀 자체를 간단하게 뭔가 나에게 조그마한 해코지로 보게 된다면 용서가 되지만
이것을 확장해버리면 불가능해요.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금 우습게 여기는 거예요.

무슨 얘기인가? 하면
인간은 라멕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하는 용서는 다 라멕과 같은 용서예요.
벼르는 용서라는 거예요.
‘내가 한 번 용서해줬어.’ ‘내가 또 한 번 더 받아줬어.’ ‘내가 또 한 번 더 받아줬어.’
그다음 어떻게 합니까? 폭발해 버려요.
내성적인 사람이 폭발을 하잖아요. ‘천하 법이 없어도 산다’는 칭찬을 들어보신 분 있어요? 여기에.
내성적인 사람들, 집사님은 그러셨다고 그러잖아요.
폭발 한번 해보셨죠? 속일 필요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폭발하면요 성질 좀 더러운 사람 저리 가랍니다. 아무도 갈지 못해요. 그런 사람.
라멕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성질 더러운 사람은 맨날 폭발하면 라멕이 아니겠네요? 똑같아요.

결국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지킬 수 있는 것만 지키려고 하죠.
자기들이 뭐가 되는가 하면
자기들의 결정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결정이라 이렇게 돌려버려요.
교회 권징이라 하잖아요.

근데 뒷부분을 봐야 되죠. 몇 번이나 할까요? 7번까지 할까요?
“아니 아니 70번씩 7번까지 할지니라”
교회가 어떻게 되겠어요? 권징이 제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인데.
그게 가능할까요? 불가능해요.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게 뭔가? 하면
이런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다’라고 자꾸 주장하려고 하는 거예요.
‘교회가 이러해야 된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여기에 사도 베드로가 찬물을 끼얹는 거예요. 질문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래 그래 너 질문 잘했다. 일흔 번씩 일곱 번”
그러면서 “천국은~” 비유를 듭니다. 이 천국 비유를 들면 더 선명해져요.

아마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이 비유를 이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1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고 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있어요.
1만 달란트는 어느 정도의 가치냐? 하면 한 달란트가 6천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1일 품삯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그러면 육천 데나리온이 6천일 동안 일한 품삯이에요.
그게 한 달란트예요.

근데 1만 달란트입니다. 그러면 6천만 일 품삯.
그걸 누가 계산 다 하겠어요? 제가 이런 것까지 할 수 있는 수준은 안 되고.
그래서 1년에 300여일 일을 한다면 20만 년 동안 일을 해야 된대요. 20만 년.
엄청난 액수의 빚을 진 사람 회계하는데, 회계하는 임금이죠.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이들 팔아봤자 얼마 받겠어요? 이 당시에.
한 달란트도 안 돼요. 두세 달란트?
노예 값이 2천 데나리온에서 6천 데나리온. 이런 얘기를 하긴 하는데 정확하게 모르잖아요.

“다 팔아 갚게 하라.”
이러면 모두가 뭐가 돼요? 종이 돼버리죠. 자기들이 사라지잖아요. 여기에 대해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다”
뭐 어떻게 갚아요? 어느 세월에 갚습니까? 이 말 듣고 용서합니까? 아니죠.
거기에 보면 불쌍히 여겨,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매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불쌍히 여기는 것뿐이에요.
‘다 갚겠습니다.’ ‘니 마음을 보니까 참 괜찮구나’ 그래서 불쌍히 여긴 게 아니고
되도않는 소리를 하잖아요.
이것은 주인이 일방적으로 불쌍히 여긴 거예요.
불쌍히 여겨서 그 빚을 탕감해 줬습니다.

이 종이 한 일이 뭐예요? 한 일 없어요.
당연히 ‘다 갚겠다’ 라고 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또 한 놈은 더 튀어나가 ‘다 갚겠습니다. 주인님이여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아 인간의 잔머리는 방법이 없습니다.
어찌 되었든지 이 주인이 일방적으로 불쌍히 여겨서 빚을 다 탕감해줬어요.

그런데 이 사람에게 같은 종입니다. 동료 종이죠. 동료 종에게 백 데나리온을 빌려줬어요.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100 데나리온은 얼마 안 돼요?
그런데 한 데나리온이 1일 품삯이잖아요.
그러면 100데나리온은 100일 품삯입니다. 만만치 않아요.
일당 10만 원 같으면 천만 원입니까? 100일인데 맞아요? 천만 원 정도 되죠. 적은 돈 아닙니다.
지금도 적은 돈이 아니죠.

그런데 빚 탕감받은 것은 다 잊어버리고 보자마자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려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주소서 갚으리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빌었기 때문에 탕감해 준 거 아니죠. 불쌍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똑같이 동관이 빌었잖아요.
똑같이 빌었으면 그러면 똑같이 불쌍히 여겨줘야 될 것 아닙니까. 논리적으로. 
문제가 뭡니까? 이 사람의 문제가.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이 비유죠. 주인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너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이 말씀을, 이 비유로 말씀을 하셨거든요.
네가 저를 불쌍히 여기지 않기 때문에 옥졸들에게 붙였어요. 감옥에 집어넣어버렸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 비유를 예수님께서 왜 말씀할까요? 그 35절입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여기 중심이라 하죠. 마음입니다. 헬라어 단어.
“마음으로 용서하지 아니하면” 가능한 말입니까?
타인에 대해서 용서하는 마음이 가능한 말이에요? 마음으로.

겉으로는 용서가 돼요. 마음은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나요?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는데 그 마음을 누가 붙들고 있어요? 악마가 붙들고 있잖아요.
로마서 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마음이 자기 마음대로 돼요? 안 돼요?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베드로 너의 논리를 갖고 7번 용서하죠.

근데 예수님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영원히 용서를 네가 한다면 뭘 모른다는 거예요?
니가 용서를 해버리면 뭐가 삭제됩니까? 십자가가 삭제돼 버려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거예요.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잖아요.
‘우리는 크게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용서하는 자로 살아야 된다.’ 이 말이 맞아요?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나한테 어떻게 대하든 용서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여기에 무슨 십자가가 나옵니까? 내가 용서해버리면.
우리는 용서할 수 없는 자입니다.
모든 죄는 주께만 범하는 죄일 뿐입니다.

앞서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 했잖아요.
“실족케 하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이 말씀에서 못 벗어나요. 어떤 인간도.
말씀을 지킬 능력이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인간들이 이렇게 읽으면서
계속해서 이 말씀을 교회를 위한 말씀으로, 성도의 삶의 표준으로, 법을 계속해서 내세우는 거예요.
산상 설교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죠. 마치 하나님 나라의 법인 것처럼.
말은 맞아요. 십자가를 증거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헛된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헛된 말이 아니라
성령이 오시면 죄인이 되죠.
죄인이 되니까 십자가를 자랑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계속해서 기준으로 책망을 하고요.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짓을 했느냐?’ 가 기준이 아니라
십자가가 기준이 되어서 십자가를 갖고 책망을 하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되잖아요.
그러면 나도 십자가를 전하는 죄인이요 저쪽도 죄인이면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현장이 되잖아요.
나는 마음으로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없는데, 주님이 용서하셨죠.

우리 흔히 이 본문에 이 비유를 갖고
‘많이 용서받았으니까 우리도 용서하는 자로 삽시다.’
교회는 형제가 죄를 범하면 개인적으로 가서 책망을 하고, 그걸 받지 않으면 두세 증인으로 하여서
증인을 삼고 교회까지 데리고 와서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세리와 이방인처럼 여기는
그런 말씀을 지키는 자로 살려고 해요.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서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기 위해 오셨거든요.
베드로가 아직 성령을 못 받았잖아요.
성령을 못 받은 그 입장에서 이러한 본문들을 해석하고 적용하기 때문에
교회가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서
인간은 말씀을 지킬 입장에 있지 못하다라는 것을 분명히 하지 않는 겁니다.

사도행전에 가게 되면 성령을 주시잖아요. 깜짝 놀랄 일 한 번만 보고 마치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입니다.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를 잡기 위해서, 핍박하기 위해서 가는 중에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났어요. 사울에게 나타난 이후에 동시에 이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에게도
주님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서 지시를 내립니다. 10절에 보면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라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니라” 서로서로 보게 하신 거예요. 근데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소문을 들었죠. 소문을 들었는데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왜 이 말을 합니까?
주께서 환상 중에 말씀을 해도 누구랑 비슷해요?
베드로랑 비슷하거든요. 고넬료와 만나는 장면에서.

못 받아들이는 겁니다. 왜 못 받아들이느냐?
자기가 갖고 있는 정보가 있잖아요. 정보가 있기 때문에 못 받아들이니까
주께서 일방적으로 어떻게 합니까? 받아들이게 만들어버리죠. 그게 15절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인간으로는 이게 희한하잖아요.
아나니아도 성령을 주시면 그 사람이 누가 되었든 주님을 믿을 수 있다라고 알고 있죠.
그 알고 있는 것과 실제 상황이 달라요.

주께서 지금 이 사울에게 가서 안수하게 하신 거고, 또 하나는 그 뒤에 19절에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이 사람이 가짜로 이런 행세를 할 수 있잖아요.
사울이 정말 회개하고 돌아왔는지 누가 판단합니까?
주님이 판단하는 거예요. 주님이 이 아나니아에게 직접 지시를 하는 거예요.
인간의 힘으로는 못 받아들여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말씀은
십자가의 영이 임한 자들이, 성령을 받은 자들이 이 말씀 속으로 합류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이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자들에 의해서 핍박을 당하죠. 거꾸로.

마치 이런 자들이죠. ‘우리는 크게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하는 자로 삽시다.’
근데 복음을 전하는 자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용서받아도 용서할 수 없는 인간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예요.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는 자만이 용서할 수 있는 그러한 모습을 보여요.
그 용서도 나의 용서가 아니지만.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복음을 전할 때 항상 어떤 모습으로 전합니까?
십자가의 피로 용서를 받았잖아요.
그러니 이 사두개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바리새인들에게도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잖아요.

그 전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말씀의 현장 속으로 그들이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의 사고방식과 사람의 이해로는 도무지 그들이 복음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겁니다.
여기서 형제라는 이야기를 한 것도 마찬가지죠.
우리의 판단 기준과 주님의 판단 기준이 달라요.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죄인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이 말씀을 다 이루셔서 우리를 말씀의 세계 안으로 인도하셔서
날마다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는 죄인으로 살아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미 용서받았기에 용서하는 자가 아니라
용서받았기에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기에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