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11-15 23:01
20231115 마태복음 강해 마 19:1-2 병고치심과 십자가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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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11-16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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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5 마태복음 강해 마 19:1-2 병고치심과 십자가

기도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저희들을 온유한 자로 만드시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기에 날마다 저희들을 십자가 사건 속으로 인도하셔서
온유한 자로 드러나게 하심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19장 1절에서 2절까지만 보겠습니다.

(마19:1~2)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큰 무리가 좇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오늘 미리 나간 광고에는 뒷부분에 나오는 결혼과 관련된 율법, 이 부분이 나왔는데
이 1, 2절을 도저히 지나칠 수 없어서
이 본문이 해석이 안 되면 뒤에 나오는 결혼과 관련된 율법에 대한 해석 문제가 해결이 안 돼요.

우리가 마태복음이나 이런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간략하게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셨다” 이러한 대목들을 볼 수가 있죠.
‘아 예수님께서 능력이 있으시니까 병을 고치셨구나’ 이렇게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이 짧은 이 말씀 안에 사실은 신구약 전체가 담겨 있는 말씀이죠.

우리들은 (제가 설교할 때마다 말씀드립니다마는) 유대인이 아니잖아요.
입양이 돼가지고 유대교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이 사복음서는 그리고 모든 성경은 유대인들을 바탕으로 깔고 있습니다.
그걸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방인들이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마찬가지예요.

로마서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섞어버리잖아요.
섞어버리면 뭐가 나옵니까? 모두 다 심판 아래에 있고,
심판 아래 있는 자 중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가 다 하나님의 양자가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이 기쁜 복음의 소식은 반드시 이 유대인들의 그 배경을 바탕으로 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걸 알아서 구원을 얻느냐?’ 우리 인간들의 관심은 구원에 있거든요.
‘그걸 알면 무슨 도움이 되느냐?’ 또 질문 보세요. 도움이 되느냐?
알면 죄의 깊이를 알아가요.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말씀을 받아서,
율법을 받아서 살아간 그 모습이야말로 우리의 본 모습이에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모습만 죄의 모습이 아니라
구약 이스라엘 전체의 그 흔적들이,
궁극적으로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모습으로 이렇게 모아지게 되는 겁니다.

역사는 길게 이렇게 누워 있다라고 보면 이 역사를 세워버리면 한 시점이에요.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거야 관점이 아니냐?’ 관점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라고 주님이 말씀을 하셨거든요.

다 이루어버리면 이전에 있던 창세 전 모든 그 언약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룬 속으로 빨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심지어 창세 전 언약조차도 사기꾼들이 써먹는 언약이 돼요.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이후에 복음을 전하시는데
병을 고치시는 그러한 일들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 모를 때 성경을 읽어보면
가장 우리의 시선을 끄는 대목들이 병 고치는 거잖아요.
죽은 자 살리는 겁니다.

지금도 시선을 끌잖아요. 몸이 안 좋고 수요일마다 병원 다니시는데
병원비는 누가 내는지 모르지만, 아픈 것도 문제지만 돈이 더 큰 문제거든요.
그럼 이런 말씀들을 보면 ‘주님께서 좀 고쳐주면 안 되느냐?’ 그런 상상을 생각을 많이 해봤죠.
해봤다라는 것은 앞으로도 보장할 수 없다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위한 성도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 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믿는다라는 것이 무너지게 돼 있어요.
주께서 우리에게 환경을 계속해서 부여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을 믿지 말라는 거예요.
믿을 수 없다라는 겁니다.
그러니 영원한 대제사장이 따로 있다라는 겁니다.

이거 조금 더 과격하게 표현하면 안 믿어도 돼요.
근데 인간은 안 믿는다는 말이 더 믿는다라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러면 믿어야 되는데 그 믿음은 언제나 가짜로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병을,“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좀 이상하잖아요. 무리가 쫓는데 저희 병을 고쳤다.
그러면 이 모든 무리들이 병자냐? 얘기예요. 다시 한번 읽어볼게요. 2절에

“큰 무리가 좇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저희가 누구예요? 우리가 국어를 배우면 과장법이 있잖아요.
이거 과장하는 걸까요? 아니면 진짜 저희 병을 고치신 걸까요?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바탕색이 무엇으로 깔려 있는가? 하면
악마의 교육을 받은 바탕색을 깔고 있죠.
거기에 있어서 말씀이 바탕이 돼야 되는데 말씀이 바탕이 되지 않으니까
이런 말씀들을 읽으면서 ‘아 무리 중에 병자들도 있었지 않았느냐? 그 병을 고치셨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렇게 보는 게 아니에요.
먼저 출애굽기를 보겠습니다. 15장 26절입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죠. “정녕 죽으리라”
그 죽음의 모습을 2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애굽에게 내린 모든 질병, 출애굽 하기 전에 모든 질병의 끝자락은 장자를 죽이는 거였죠.
독종도 있었고 악질도 있었고 전염병도 있었고 그런 것들이 있었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망한 이후 물이 써서 먹지 못하니까 모세를 대하여 원망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고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까 물이 달아졌어요.
거기에서 여호와께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시험하셨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육에 속한 자들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면 그 말씀을 말씀대로 믿으려고 해요.
말씀대로 받아들여야 된다라고 생각을 해요.
이 말씀에 ‘법도를 지켜야 된다. 그러면 내가 질병을 내리지 않겠다’라고 하면
이 말씀을 주신 시점이 언제입니까?

얼마 전만 해도 이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 몰살시켰거든요.
그래서 이들이 “여호와는 용사시니”라고 하면서 여호와께 찬양을 드렸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수르 광야로 들어갔을 때 사흘 길을 갔어요.
그중에 그들이 물을 들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사흘 길을 갔는데 물이 없습니다. 마실 물이.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원망이 안 나오겠어요?
성경을 볼 때 관람하는 사람은 원망이 안 나온다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말씀 속으로 집어넣어 버리면 우리가 이들이 되거든요. 죄인들이 됩니다.
반드시 원망이 나올 곳으로 이 불과 구름 기둥이 인도를 한 거예요.
잘 안 믿으시는 분위기인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면
이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도무지 자기를 부인할 수 없는 곳으로 인도하셔서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현장으로 자기를 부인시키면서
십자가 안 지려고 하는데 지게 하셔서 강제 십자가거든요.
주님을 따르게 하는 겁니다.
말씀은 그렇게 이루어져요.

사람들은 그런 본문을 보면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하면
‘나 이미 부인했어요. 부인했어요.’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것을 믿는 사람은요 자기 부인이 필요 없는 사람이에요.
근데 괴상한 인간들이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해놓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섬겨야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자기를 부인할 능력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우리에게 없잖아요.
그러면 영단번 제물이 되신, 제사를 드리신 그분이 직접 살아계셔서 자기를 부인케 하시는 거죠.
십자가 사건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출15:26)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럼 질병은 무엇 때문에 발생합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애굽에 내린 그러한 질병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내려진다라는 거죠.

그러면 광야 이스라엘을 보면
40년 동안 그들이 율법에 순종했나요? 안 했죠.
그래서 이 앞부분에 쓴 물이 나왔을 때 모세를 원망한 이 사건이 중요한 거예요.
그러면 율법을 이렇게 주셨다라는 것은 너희들은 다 질병에 걸려서 죽어야 마땅한데
하나님의 긍휼이 그들을 계속해서 건강하게 하시고 그들을 살려주시는 거예요.

물론 40년 광야 기간 동안 호렙산에서 출발해서
이 요단 동편, 모압 평지에 도달할 때까지 이 군사를 다 죽여버립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말씀대로 그대로 시행을 하시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은 언약대로 이루시겠다라는 게 하나님의 방식이에요.

여기에 내가 이 골라잡아서 뭐 ‘지키면 질병에 안 걸린다’하니까...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어요. 아니 개가 어떻게 사람이 만든 법을 지킵니까?
개 보고 차도로 다니지 말고 인도로 다니고 아무 곳에나 똥 누지 말고...
말 들어요? 언제 말 듣습니까? 패면 말 듣죠. 그 학대입니다. 학대.
아무 데나 그 변을 누는 게 개인데 지정한 곳에 가서 누라고 하니까 얼마나 스트레스 받겠어요.

하나님께서 약속은, 언약하신 대로 약속은 반드시 이루시는데
그 약속을 이루실 때 그 이루심 속에 들어가는 자들은 누구냐? 라고 하면
없어요. 없단 말이에요.
왜냐하면 이 말씀대로라면 모두가 다 질병에 걸려서 다 죽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들어간 거예요. 누가? 그 후세대들이.

그러면 그들은 지켜서 질병에 안 걸려서 들어갔습니까?
아니면 언약 때문에, 그 언약 안에는 희생물이 있잖아요.
그 희생물 때문에 어제 민수기 마지막을 봤는데
36장에 나오는 슬로브핫의 딸들, 그러한 희생물로 인하여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들어간 자들은 뭐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자격이 있어서 들어갔습니까? 자격이 없어서 들어갔어요? 자격이 없는데 기업을 받았잖아요.
자격이 없는데 기업을 받았으니까
그 유업을 받은 자는 그 자격이 없는 자에게 기업을 주시게 된,
그 희생물을 증거하는 희생물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신명기 7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다 읽을 수는 없으니까 12절부터 보면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케 하시리니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우승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붙이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고 진멸하고 그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여기서도 똑같이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어떤 경우에? 율법을 지킬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경우에
이런 말씀이 있어도 질병이 걸려도요 회개하지 않습니다.
우상에게 찾아가서 내가 어떻게 될지 묻는 그러한 모습을 보여요.

말씀이라는 자체가, 말씀을 주신 것이 죄를 더욱더 짓게 하기 위함이거든요. 율법을 주신 것이.
다 율법이에요. 모든 말씀이. 신명기를 보면 아예 율법이라 해버리거든요. 신명기 전체를.
사건 전체를 율법이라 한다고요
율법을 주신 목적이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이거든요.
근데 그렇게 못 봐요. 왜냐하면 그들의 눈이 가려졌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지키면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겠다”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9장에서
많은 무리가 쫓을 때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셨다”라고 할 때 그들은
그들 중에 질병이 있는 자죠. 그들 중에 병자가 있을 거 아니에요.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을 할 거 아닙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이 병도 고치시고
병의 종류가 뭐예요? 질병의 종류.
방금 출애굽기 15장에서도 그러하고
나오는 내용이 “율법대로 살지 아니면 모든 질병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했잖아요.

창세기에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그 과실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잖아요.
이 말씀이 같은 맥락에 있는 겁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 라는 거예요.

애굽에서 야곱의 후손들이 번성하여서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하여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잖아요.
그 들어간 이후에 왕이 세워지고 선지자들이 활동하고
그러한 가운데 그들은 어디로 계속해서 내몰려가게 되느냐? 라고 하면
이 율법에 대해서 순종하지 않았다라는 결론이 납니다.
율법에 대해서 순종하지 않았다.

그럼 율법에 대해서 순종하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무엇이 임한다 했습니까?
질병이 내려진다라고 했죠.
그래서 이 질병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듯이 전체적인 모든 사람의 질병이냐? 아니에요.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쳤다’라는 것은
그 ‘이스라엘 중에 어떤 자의 문둥병도 고치지 않았다’라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문둥병에 걸렸다라는 거예요.

왜 전체로 못 보느냐? 하면 우리는 말씀을 볼 때 나 중심으로 보거든요.
나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전체로 못 봐요.
아간이 범죄하여 죽었을 때 누가 먼저 죽임을 당합니까?
여호와 전쟁에 열심을 낸 자들이 죽어요.
하나도 안 훔쳤는데 죽임을 당한다니까요.

이 질병에 대해서 어떻게 분석하느냐? 이 얘기입니다. 질병 자체를.

이사야 53장을 보겠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누가 믿을 수 있느냐라는 거예요. 누가?

그러면 뒤에 보면 4절에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이렇게 나오죠. 우리의 병을 지고.
질병의 고통이거든요. 질고라는 말이.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러면 예수님께서 질병을 고쳐주셨잖아요.
그러면 고쳐주시면 그분이 메시야임을 증명하는 거잖아요. 그죠?
질병을 고친다 했잖아요.
이사야 선지자가 여기만 말씀한 게 아니고, 이 기름 부음 받은 자가 어떤 일을 합니까?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이런 예언들을 하고 있거든요. 이사야 61장에서도.
그러면 이 모습을 보면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아무도 믿지 못했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지금 이걸 전하면 믿잖아요. 예수님을. 베드로도 그러잖아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라고.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하면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사13:1)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라고 하면
뒤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서, 아니면 이사야 61장에 나오는 말씀을 끌고 와서
‘아 이렇게 하시는 분이 메시야다. 그리스도다라고 믿으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53장 1절에서는 “우리의 전한 것을 아무도 안 믿는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병을 고치실 때 누군가 믿는다고 할 때는 그건 믿음이 아닌 거예요.
믿음이 아니에요.

좀 더 보겠습니다. (사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참 희한하죠.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주 앞에서 자라나면 연한 순이어야 돼요? 굉장히 튼튼한 순이어야 됩니까?
아니면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가 어때요? 요즘은 땅을 볼 일이 없으니까
제 어릴 때만 해도 마른 땅에 있는 그 뿌리, 줄기 이런 것들은 볼품없거든요.
볼 가치가 없다라는 겁니다. 여기 나오는 것이.

그래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희한하잖아요. 주 앞에서 자라나는데.
그래서 ‘믿을 만하다, 인정할 만하다, 따를 만하다’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하는 겁니다.

그다음 뒤에 봅시다. 좀 더.(사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람들은 이 본문을 보면서 뭘 생각하는가? 하면 십자가만 생각을 해요. 말은 맞아요.
십자가만 생각을 하니까
사복음서 마태복음, 예를 들어 1장부터 나오는 그 내용들이 하나도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시는 이 병을 고치는 것도 이렇게 봐야 되거든요.
이렇게 안 보죠. 왜 안 보는가? 하면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곳이 없다”라고 했잖아요. 그죠?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야 되잖아요. 병을 고치는데.
병을 고쳤는데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안 보려고 합니까?
오병이어로 장정 5천 명을 먹이셨을 때 임금 삼으려 했잖아요.

그러면 그런 사건들이 이 말씀과 만나게 되면
그 사건 속에 무엇이 등장해야 되는가? 하면 십자가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는 영생이 없다”라고 하니까
고개를 획 돌리는 겁니다. 4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여기에 보면 질병의 고통을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심은 무엇과 연결돼야 돼요? 십자가와 연결이 돼야 되죠.
그러면 십자가와 연결하는 순간, 병 고친 예수님을 좋아할까요? 싫어할까요? 싫어하죠.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병 고치는 걸 봤잖아요. 오병이어의 기적도 봤단 말입니다.
그러한 많은 능력들을 봤을 때 예수님께서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잡혀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시니까
그걸 싫어하잖아요.
십자가는 지지 말고 병을 고치라는 거예요. 십자가는 지지 말고.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면서 내가 바로 메시야다라고 외쳤습니까? 예?
병을 고치시면서 지금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까? 병을 고치시면서?
예수님은 아무 말씀 안 하세요.
누가 해석을 해요? 병 고침을 받는 자들이 다 반응을 하고 해석을 해요.

그 해석법은
이 이사야에 나오는 이 53장에 나오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라는 이런 의미도
61장에 가면 “소경을 보게 하고 절름발이를 걷게 하는” 그런 말씀이 등장하기 때문에
“질고를 진다”라는 말의 의미가
“십자가의 저주를 받는다”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겁니다.

십자가에 저주받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 버림받은 분에 의해서
함께 죽고 죄를 용서받아 구원을 얻는 그들이 남은 자라고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아무도 안 믿어요.
심지어 이사야 선지자가 전해도 안 믿잖아요. 안 듣잖아요.
귀가 막혔고 눈이 가렸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리의” 여기에 ‘우리’가 누구예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전하거든요. 그 전했는데 아무도 안 믿어요.
그 ‘아무도 믿지 않는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저희 병을 고치셨다”라는 겁니다.
“저희 병을 고치셨다”라는 것은 이게 또 이 이중으로 돼 있어서...
병을 고치신 건 맞아요. 그 고치심.
보이는 것을 통하여서 주님께서 자신의 피로 죄를 용서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병을 고치면 문제는 병을 고친 건 맞잖아요.
그 병을 고친 그 예수님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보여주는 일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쳤는데 육의 눈에는 뭐로 보이는가? 하면
병 고침으로밖에 안 보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에 53장에 의하면
이 병 고침이라는 자체가 우리의 질고를 알고 우리의 질고를 담당한 거잖아요.
그것을 병 고침으로 예수님께서는 보여주는 거예요.

보여주니까 누가 믿겠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병자 고치고 좋은 말씀을 하니까 그분을 그리스도로 믿었잖아요.
그런데 그 모든 말씀들이
‘예루살렘에서 고난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하여 내가 심판주가 된다’라는 말씀으로
그들이 봤느냐? 얘기입니다. 못 보죠. 그걸.
그리고 근본적으로 그걸 원치 않아요.

질병에 걸렸으면 질병에 안 걸리기를, 아니면 질병을 낫게 해주기를 바라죠. 인간들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에는 사실은 1도 관심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건 비현실적이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현실적인 질병을 갖고
그 현실이 비현실이고
진짜 현실은 십자가로 이루시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 믿음의 세계죠.
그것이 참된 현실이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11장을 보면 이전에 우리가 살펴봤지만 한 번 더 보겠습니다.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을 때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어요.
우리는 ‘선지자 정도가 되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생각을 하지만
“우리에게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리오”라는 이 말씀 속에 누구도 포함되느냐? 하면
세례요한도 포함된다는 사실이에요.

이걸 거꾸로 돌려보면,
이 말씀을 예언하는 이사야 선지자도 자기가 전해놓고 자기도 못 믿을
이 복음, 기쁜 소식을 거꾸로 통지를 받는 거예요. 얼마나 놀라운 말씀이에요?
세례요한이 마지막 선지자거든요. 선지자들 중에 가장 크다 했잖아
그러면 세례 요한의 수준이 이 정도 같으면
그 앞에 있는 회오리 바람 불수레 가운데 올라간 엘리야도 볼 것 없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을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죠.
엘리야가 훨씬 대단하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세례요한이 엘리야로 왔어요.
모든 선지자들을 끌어모은 게 세례 요한이에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아무리 봐도 오실 그분이 아닌 거예요.
그럼 오실 그분이 뭐 하느냐? 라고 하면
이 손에 도끼 들고 온다라는 거죠. 불심판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근데 불심판이라는 것이 없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강림하실 때 불심판을 하는데 실제로 눈에 보이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그 심판을 완성해버려요.
그러면 이게 시시하잖아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다 들었거든요.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렇게 하면 오실 그 이가 당신이라고 믿을 만하잖아요.
이 정도면 메시야로 이렇게 인정하기에 충분하지 않나요? 부족한가요?
사람들 보이는 데서 병자 고치고 그러면 구름떼같이 몰려들잖아요.

이사야 예언에 의하면 질병을 담당을 한 거거든요. 질병을 담당했다는 것은
우리의 해석은 짊어졌다고,
인간들의 해석은 고치면 되는 거예요. 지금 고쳤잖아요.

예수님이 짊어졌습니까, 고쳤습니까?
고치셨잖아요. 그런데 이 내용이 짊어졌다라는 거예요.
이 세례요한의 안목에는 병 고치는 걸로 보인 거예요.
중요한 것은 이 심판을 빨리 감행을 하셔야 되는데, 오셨다면.
심판을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되는데 그런 일은 안 하고 계속해서 병을 고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제자들에게 이 세례 요한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라 합니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게 이제 세례요한의 귀로 돌아가게 되면
예수님께서 친히 질병을 담당하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는 분.
그분임을 소개하고 있는 거예요.

‘목사님 이걸 무슨 수로 그렇게 해석합니까?’
방금 질문을 잘한 거죠. 무슨 수로 세례요한이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라고 하면
성령으로만 가능해요.
성령을 받지 않으면 말씀 자체가 자기가 이해를 하고 납득이 되는 쪽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죠.

예수님의 말씀은 세례요한이 그전에 들은 것과 똑같은 들음이에요.
똑같은, 똑같이 들었는데. “벙어리가 말하고 앉은뱅이가 걷고~” 이런 얘기를 똑같이 들었거든요.
똑같이 들었는데 한쪽에는 육으로 들렸고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왔을 때는 그 육적인 들림이 영으로 바뀌어버립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바뀌어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짊어지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물론 자기 백성들의 죄지만.
그 자체가 뭐가 되는가? 하면 심판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알곡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하면
지금 이들처럼 예수님께서 친히 질고를 담당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를 친히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심판받은 자들이 죄 용서함을 받아서 알곡으로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열매 맺지 않는 자들은 찍어버리라.”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리라.”
이 말씀이 누구에게 먼저 해당이 돼요? 누구에게 먼저 해당이 됩니까?
자기 백성이에요.

제자들을 보면 간단한 거예요.
제자들은 성령을 받게 되니까 주님과 함께 죽었잖아요.
불심판을 먼저 받은 거예요. 그 심판 속에서 용서받아 구원이 된 거예요.
그들을 알곡이라 하죠.
그러면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운다 했는데 그 쭉정이가 누구였어요? 자기 자신이었죠.

말씀을 제가 이상하게 해석하는 게 아니라 그 말씀에 누가 아멘할 수 있습니까?
지금 세례요한의 안목은 쭉정이 따로 있고 알곡이 따로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으니까
‘나 같은 알곡은 보호해야 되고...’ 맞죠? 주의 길을 예비했으니까.
그러면 자기 말을 듣지 않는 독사 새끼들 같은 경우에는 심판을 해야 되잖아요.
그 밖에 헤롯왕이나 아니면 그 본디오 빌라도나 그런 자들은 불살라버려야 되잖아요.
그게 세례요한이 갖고 있는 안목이었던 겁니다.
그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53장의 말씀을 이해를 못한 거예요.

일반적인 사람보다는 수준 높잖아요.
병을 고치는 그것만 봐도 이분이 메시야라고 믿는데
세례요한은 그들보다 더 높은 레벨에서 질문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 그거는 당연한데 그걸로 끝낼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누구에게 적용시켜버리는가? 하면 세례 요한에게 적용을 시켜버려요.
적용을 시켜버리면 세례요한 자신이 도끼로 찍혀 불심판 받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 속에, 이 로마서 6장에 의하면 연합한 자.
세례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거든요.

근데 이방인들은 복음을 모르는 자들은 그걸 전혀 모르는 겁니다.
세례 요한을 그 속으로 집어넣어버리죠.
자기가 전한, 그게 복음이거든요. 사실은.
본인은 복음이 아니라 ‘너희들은 지옥 갈 거고 나는 천국 갈 거야.’ 이렇게 생각을 상상을
그 망상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망상한 자들이 제자들도 똑같아요.

근데 예수님께서 답변하심으로 말미암아 네(세례요한)가 외친 그 속에 합류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외친 그 말씀이 그대로 응한 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기에 참예하지 않는 자는 자기 백성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본 이 병을 고치는 것, 질병을 고치는 것을
지금 여기에서 19장에서 “다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셨다”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이미 11장에서
세례요한이 질문을 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답변한 내용을 그리스도의 영이 없이 해석을 하면
‘질병 고친 이분이야말로 메시야다’ 라는 거예요. 말은 맞죠. 예수님이 메시야는 맞죠.

그러면 그 사람의 그 메시아 됨의 기준이 뭐냐? 하면
십자가가 기준이 아니라 병을 고치는 게 메시아 됨의 기준이 되는 거예요.
말씀이 이렇게 기록하는 이유는 모든 인간들은 질병에 걸렸다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다’하는데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게 아니라 죽었기 때문에,
죽었기 때문에 죽는 거예요.
그러니 모두가 다 질병 걸린 자.
왜냐하면 율법 위반자가 되잖아요.
율법 위반자는 모두가 다 질병에 걸린 거예요.

예수님이 이렇게 질병을 고쳐 주셨지만 예수님을 어떻게 처리합니까?
지금 이 사건이 왜 중요하냐? 라고 할 때는 앞부분에 이 용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잖아요.
용서에 대한 이야기.

지금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병 고쳐낸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죄를 용서하시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을 보는 자들은 이 예수님을 해석을 할 것 아닙니까?
해석을 할 때 조금 전에 출애굽기 15장을 봤잖아요. 그리고 신명기 7장도 살펴봤잖아요.
그러면 그 말씀에 근거하여서 이 말씀을 해석을 하는 겁니다. 이사야 61장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예수님께서 병을 고쳤을 때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성경대로, 그 율법대로거든요. 율법대로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 율법대로 해석하면 십자가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절대로 안 나와요.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러 왔다라고 하시거든요.
율법을 어떤 해석은 ‘성취하러 오셨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데 성취가 되었든, 온전케 되었든,
어떻게 되었든 그 온전케 된 내용이 지금 이 구절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십자가가 율법의 성취입니다.

어떻게 그게 율법의 성취입니까? 율법을 다 지키는 거지.
율법을 다 지키면 뭐예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잖아요.
그럼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은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잖아요.
그런데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그들이
십자가와 함께 심판을 먼저 받아야 돼요. 먼저 죽어야 돼요.
그리고 주님과 함께 다시 살림을 받아야 됩니다.

지금 이 본문은 이 마귀가 4장에서 예수님을 시험을 할 때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뭘 하라합니까? 아들다움을 보여라 하거든요.
그러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때 말씀대로, 시편의 말씀대로
조금도 상하지 않는 그 모습을 보일 때야 진짜 하나님의 아들다움이거든요.
그러면 병을 고치는 모습이야말로 진짜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이거든요. 능력을 소유했으니까

너희들의 사고 방식은 누구와 일치된 사고방식이냐?
바로 마귀와 일치된 사고방식이라는 겁니다.
마귀와 일치되었기에 구약에 나오는 이 질병과 관련된 율법,
그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질병을 고쳐줄 때
그들은 누구의 사고 방식으로? 악마의 사고 방식으로 이 질병 고침을 해석을 하는 겁니다.
그 악마의 사고 방식이 방금 말씀드린 마태복음 4장에서 하는 마귀가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질병을 고쳐라’는 겁니다.

이것이 확장되면 이런 거예요.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병에 안 걸려야 된다.’ 이렇게 해야 되거든요. 사실은.
믿기 전에는 병 걸렸을 때 그냥 해서 낫게 해주시면 되는데 이 사기꾼들이거든요.

왜냐하면 교회에 오는 모든 사람들이
그 아비가 마귀이기 때문에 무엇을 기대하고 교회에 옵니까? 죄 용서받기 위해서 온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 용서받기 위해 온다 하는데,
죄 용서는 가치가 없어요.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라고 하면 가치가 없잖아요.

아들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 했을 때는 우리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죄 용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믿음의 세계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죄 용서받으러 왔다.’ 그다음 나오는 게 뭐예요?
‘죄 용서받았으니까 병을 고쳐주세요.’ 라는 거예요.
성경에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줬잖아요.

왜 못 고치느냐?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얼마나 이게 멋진 답변입니까?
‘주님은 고쳐줍니다. 대신에 여러분 제가 기도하면 주님이 들어줄지는 모르지만,
여러분도 믿음으로 기도를 해야 됩니다.’
이미 자기 빠져나갈 구멍은 다 만들어놨잖아요. 맞죠?
‘병 못 고치면 믿음 없어서지.’ 내 탓 아니라는 거예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한다’ 했으니까.
사기꾼도 이런 사기꾼들 없는 거예요.

그럼 왜 그것이 통하느냐? 라고 하면
모든 인간들이 악마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뭘 요구합니까?
이미 이 세상은 말씀에 의하면 모두가 다 질병 가운데로 들어왔죠.
그러면 질병 가운데로 들어갔으면 죽어 마땅한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해요.

감사하지 못하니까 이들은 뭘 붙들고 있어요?
말씀을 붙들면서 ‘말씀대로 병 고쳐주세요. 당신이 메시야라면 눈 뜨게 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요한복음 9장입니까?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눈 뜨게 하셨을 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보는 자들로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는 자들로 보게 한다”는 거예요.
이게 충격적인 말씀이죠. 말씀이 이렇게 비비 꼬아 놨습니다.

소경이 보게 되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했으면 그 소경은 보는 자가 돼야 되잖아요.
근데 보기는 뭘 봐요? 아무것도 못 보는데.
“네가 인자를 믿느냐? 믿습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이후에.

그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보는 자들이 모두가 다 소경인 거예요.
눈 뜬 소경은 비로소 안 겁니다. 눈 감긴 게 소경이 아니었고 눈 뜬 게 소경이었어요.
눈 감긴 것도 소경이고요. 다 소경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통하여 사람들은 무엇을 계속해서 삭제하느냐? 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삭제해버려요.
십자가의 용서하신 것에 대해서 삭제해버립니다.
그걸 삭제해버리면 범사에 감사가 안 나와요. 감사는 언제 나오는가? 하면
병 고쳐줄 때, 뭔가 사업을 잘 되게 해줄 때, 내 집안이 평안할 때, 그럴 때 감사가 나와요.
그런데 성도는 범사에 감사해요.
굴국밥을 먹은 것도 감사하고, 죽을 먹어도 감사하고, 밥을 안 먹어도 감사한 거예요.

주님께서 무리들 앞에서 저희 병을 고치심으로 말미암아
그 무리가 쫓아오는 목적을 그대로 드러내는 거예요.
이유 없이 예수님을 따르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자들부터 보세요. 야심을 갖고 따르잖아요. 야심을 갖고.

교회에 왜 옵니까?
주님이 살아계시다면 가짜 교회는 기적 같은 것 안 일어나야 되죠.
기적이 일어나야 돼요. 하늘에서 불도 내려야 되고 죽은 자도 살려야 돼요.
그래야 지옥 갈 자들이 다 지옥 갈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아니하면 쥐나 개나 다 믿음이 있다 할 것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큰 무리가 쫓을 때
저희 병을 고치심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사건 속으로 주님은 내몰리게 됩니다.
병을 고쳐줌으로 말미암아 악마성이 더 강화돼요.
강화되니까, 십자가 진다고 하니까 제자들이 사단 짓, 본성을 드러내게 되는 겁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의 악마성을 드러내시면서
주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우리 눈에 보이는 이런 사건을 통하여서 계속해서 증거하고 계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들이 소망하는 것을 주께서 들어주심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통하여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증거하심을 말씀을 통하여 들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증거하도록 일으키시는 사건임을 알게 하여 주셔서
범사에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