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11-29 13:24
20231129 마태복음 강해 마 19:13-15 어린이를 싫어하는 교회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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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11-30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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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9 마태복음 강해 마 19:13-15 어린이를 싫어하는 교회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날마다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십자가 사랑 안에 거하게 하시고
십자가 사랑의 깊이를 알아가게 하는 광야 속으로 인도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십자가의 사랑을 배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19장 13절에서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19:13~15)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오늘 말씀을 극단적으로 보게 되면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되기 싫어할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의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끝이 없죠.

지금 오늘 본문은 “때에”,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사건이 연속적입니다.
앞서 나온 사건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신명기에 나오는 그 말씀대로,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이 질문을 했어요.

그 마지막 지점에 베드로가 굉장히 총명해요.
우리가 보더라도 베드로의 이 말이 나올 수 있나요? 만일에 이 뒷부분이 없다면.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 ‘아, 결혼을 하고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까?’
이렇게 결론이 나와야 되는데,

베드로와 함께한 제자들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데”
물론 공격적으로 이 예수님을 시험한 자들을 비꼬아서 말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럴 것 같으면 장가가지 않는 것이,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삽나이까?”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베드로가 가느냐?
그 이유는 천국에 가고 싶기 때문에 그래요.

천국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지켜야 돼요.
무엇을? 율법을.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못 알아듣는 겁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했다”라는 말씀이 떨어졌으면
율법을 누구한테 주셨습니까?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셨죠.
그러면 그 율법을 받은 모든 자들은 완악하다라는 것이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선언이죠.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이 제자들은 지금 기다리는 메시야 왕국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한 거예요.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한술 더 뜨시죠.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데 타고난 자면 가능하다” 이렇게 말씀을 하면
이 카톨릭처럼 ‘나 장가 안 갈래.’
장가 안 가는 대신 완전히 술을 퍼마시잖아요.
얼마나 같잖습니까? 골초 중에 골초가 아마 신부들 중에 제일 많을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타고난 자라야”라고 한다면
우리는 ‘불가능하다’라고 이해를 해야 되는데,
베드로나 나머지 제자들이 “너희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리기를 허락했다”라고 할 때
그러면 그러한 완악함이 안 드러나는 차원까지 올라가서 살면 되지 않느냐?
그 방식은 결혼하지 않는 방식이고.

여기에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그 제자들을 뛰어넘죠.
‘나는 타고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타고나게 하셔서 주님의 신부입니다.’
명칭도 신부잖아요. 물론 그 명칭이 틀린 건 아닙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예요.
그런데 그 용어를 독점하는 순간, ‘너거들은 신부 아니다’ 이야기가 돼요.
그러면 뭐가 돼요? ‘너거들은 내 말 들어라.’ 이 논리밖에 안 되거든요.

지금 앞에 나온 이 사건들의 연속선상에서 오늘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일어났을 때 제자들이 꾸짖었어요.
왜 꾸짖을까요? 이 천국의 복음을 무엇으로 듣고 있는 겁니까? 언어로 듣고 있는 거예요.
애들이 말귀를 못 알아듣잖아요. 그죠?

교회 오면 그 어린 자녀를 둔 우리 부모님 보기에는 ‘목사님 설교가 어려워서 어떻게 알아듣습니까?’
초등학교 입학을 하는데 선행학습 안 한 애가 학교 가서 수학을 배우는데 어떻게 알아들어요?
우리 어릴 때는 학교만 열심히 가면 다 알아듣게 돼 있어요.

그런데 복음도 과연 그러냐?
이 복음은 앉아 있는다고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한 걸음 더 나가면,
많이 배운 그 학식이 높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게 복음인가요? 아니죠.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천국 복음을 엄청나게 가르침을 받아왔잖아요.
지금 마태복음 우리가 19장까지 오면서 가르치신 내용이 깊고도 오묘하잖아요.
그런 얘기를 우리 아기들한테 한번 읽어보라고 해보세요. 알아듣는지.
언이한테 조기 교육시키면서 성경책 한번 읽어줘보세요.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하면 못 알아들으니까 안 읽어주는 거예요.
그런데 태교부터 시작해서 못 알아들어도 음악부터 시작해서 별별 걸 다 가르치거든요.
말씀에 대해서만 다 어떤 식으로 접근하느냐? 라고 하면
이 세상의 지혜의 방식으로 접근을 한다는 겁니다.

제자들이 화를 내는 이유가 뭐냐? 하면
‘너희들이, 이 애들이 뭘 알아?’
이 애들이 여기에 병행 본문을 마가복음에 보게 되면 “예수님이 안고” 이렇게 표현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어린아이라 할 때 ‘파이디온’이라는 용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러한 용어도 있고 ‘네피오스’라는 용어도 있어요.
그 ‘네피오스’라는 용어를 성경에서는 번갈아 쓰거든요.
그 ‘번갈아 쓴다’라는 말은 특정한 단어를 갖고 얘기를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에서 지금 핵심은 제자들이 보기에, 제자들이잖아요. 기준이.
그럼 제자들은 많이 보고 보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되잖아요.
알아들어야 되잖아요. 말씀을 계속해서 지금 가르치고 계시잖아요.
가르치고 계실 때 아이들이 뭘 알아듣겠느냐? 얘기입니다.

애들이 와서 그다음 알아듣지 못하니까 애들은 자기 마음대로 할 거 아닙니까?
목사님 설교한다고 우리 언이가 조용합니까? 마음대로 할 거 아닙니까. 애들이.
물론 북한처럼, 아니면 대형 교회 유년주일학교 교육처럼, 이단들이 하는 집단처럼
처음부터 세뇌 교육시켜서 꼼짝 못하게 하는 그런 방법도 있지만, 지금 이건 그거 아니거든요.
유대인들은 그런 교육을 하고 있잖아요.

이 제자들이 보기에 아이들은 이 천국과는 과연 관련이 있을까? 그건 부모에게 달렸다.
‘너희들은 여기에 가까이 오면 안 된다’라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충격적인 말씀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애들이 뭘 알아서 천국이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냐? 라고 누가 생각을 할까요?
어린아이가 이 생각을 할까요? 안 할까요? 안 하죠.
그러면 누가 그 생각을 할까요? ‘어른이 한다’라는 겁니다.
지금 놀라운 비밀이죠.

다시 말씀드릴게요.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다.”라고 하면
이 말씀을 읽는 100이면 100, 천이면 천 명 모두가 다
어린아이가 어떤 모양을 갖고 있길래 천국이 그들의 것이냐? 이 얘기예요.
지금 기독교 2천년 역사가 다 그렇게 해석해 왔어요. 제가 알기로는.

좀 머리 좋다라는 그 인간들도 똑같아요.
니체가 이런 걸 흉내냈거든요. ‘어린아이가 되어야 된다.’
낙타에서 어린아이로, 어린아이에서 그다음 뭘 꿈꿉니까? 사자로 꿈꾸잖아요.
사실 그건 기독교 안에 다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씀을 해석을 한다는 자체가 벌써 자기는 어디에 있다라는 겁니까? 어른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된다’라고 하는 인간들은 다 어른이죠.
‘어린아이같이 되어야 천국 간다’라고 하는 사람은 모두가 다 어른입니다.
그들은 천국 갈 수 있어요? 없어요? 못 갑니다.

제가 오늘 단언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자고 하는 사람들은, 목사들은, 교인들은 어느 누구도 천국 못 가요.
어린아이가 아니면 천국 못 가요. 앞서 이미 18장에서 말씀하셨잖아요.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이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제자들은 겁이 하나도 없죠. 부드러운 말을 써야해서...
제자들은 겁이 하나도 없어요.
왜? 천국 가는데 마음이 급하거든요.
그러니 이 본문을 읽는 모든 사람들, 우리도 다 그 축에 들어가잖아요. 그 부류에.

‘무엇이 어린아이일까?’ 분석을 하거든요.
어린아이 한번 분석해 봅시다. 우리 언이 한번 분석해 봅시다.
우리가 이번 주일날은 올지 모르겠지만 오면 한번 분석해 봅시다.
어떤 게 어린아이 같은지?
침을 흘리고 모든 거 닦아주고 뭐 똥 기저귀 갈아주고... 그걸 인간들은 해석을 하죠.
해석을 해서 ‘아 저렇게 되면 어린아이처럼 될 수 있네’라고 해봤자,
그렇게 해봤자 뭐예요? 어른이죠.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불가능성을 말씀하고 있는데
인간들은 계속해서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 를 탐구를 해요.
그래서 정답을 얻어내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마 신천지가 어린아이처럼 되게 하기 위해서 집회를 할 때 3시간 4시간 하거든요.
알고 계시죠? 잘 모릅니까? 그 속에 들어갔던 사람이 얘기하더라고요.
얼마 전에 대구에서 10만 명 했잖아요.
거기에 참여할 때 필수 조건이 뭔지 아세요? 기저귀를 차야 돼요.
화장실을 못 갑니다. 집회할 때도 그렇게 한대요. 그리고 맨바닥이죠.
‘어디 감히 주님 안전(案前)에 의자에 딱 앉아서 다리 꼬고 앉아?’ 거기에 가는 사람들은 감동을 해요.
정말 하나님 앞에, 존전(尊前)에 무릎 꿇고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걸 비웃잖아요. 과연 비웃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언제 무릎 꿇습니까? 우리가 언제 무릎 꿇어요? 다급할 때.
그들은 그 다급함을 예배드릴 때 다 하거든요.
그 기저귀를 차는 그 모습이 어린아이 같다. 아마 이런 주장도 할 거예요. 이 정신병자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그 정도도 못 하느냐? 이 얘기예요.
그게 뭔가? 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예배 시간에 화장실도 가면 안 되고
이런 걸 계속 강요하면서 지금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애들이 하는 이야기입니까?
어른의 이야기입니까? 어른 이야기잖아요. 어른.

이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어린아이,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중생, 다시 태어나야 된다. 이 말씀.
이런 모든 말씀들이 인간들은 구약을 바탕으로 해서 해석하지 않는다라는 거예요.
문자적 구약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어린아이의 의미를 성령을 받기 전에는 알지 못해요.
성령을 못 받으니까 “천국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고 하니까
어른의 입장에서 계속해서 어떻게 하면 어린아이가 될까? 를 연구하고 흉내를 내는 거예요.
그 방법, 그 내용 중에 하나가 어린아이를 관찰하는 겁니다.
‘순진하다’ 그런 얘기도 있고

거기에 대해서 또 반박을 하죠. 어린아이도 약아빠졌다.
다른 점이 뭐냐? 어린아이는 일방적으로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한다.
언이가 시키는 대로 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거든요.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유이가 복종합니까? 애 키워봤잖아요. 하긴 뭘 해요?
주는 대로 먹는다. 주는 대로 살아요?
아버지 엄마 주머니에 있는 동전 훔쳐가서 사탕 사 먹어요. 많이 해보셨죠? 그죠.
고개 끄떡끄떡거리시네요. 옛날 사람들. 안 해봤어요?

자기가 어른이기 때문에 ‘어린이는 이러해야 되고 이럴 것이라’고 자기가 규정을 해요.
그런데 애들한테 물어보세요. ‘어떻게 하면 어린이가 되냐?’ 라고.
애들이 그런 말을 합니까?
애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죠. 자기 마음대로 해요.
그래서 이 본문이 이 인간들이 얼마나 악마적인가를 드러내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시는지 못 알아먹는 거예요.
이 유대인이라면, 남은 자 유대인이잖아요.
남은 자 유대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더 못 알아먹어요. 왜? 남은 자기 때문에.
남은 자들은 메시야가 오면 그 메시야를 왕으로 세워서 천국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천국을 건설하는데 칼을 휘두르면서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베드로가 칼을 찬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남은 자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이 꾸짖어버려요.
제자들은 남은 자들 중에 더 남은 자.

에스겔 16장을 보겠습니다. 1절부터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예루살렘으로 그 가증한 일을 알게하여 이르기를” 이미 현재 상황이 가증하다.
근데 그 가증한 그 모습은 지금뿐만 아니라 그 출발부터 그랬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 출발이 뭐냐? 3절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 사람이라” 비유적이죠.
근본 예루살렘의 출생지가 어디냐? 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지금 현 상황도 그러한데, 현 상황도 똑같거든요. 상황도 똑같은데.
원래 예루살렘, 이걸 달리 표현하면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좀 더 돌리면 애굽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이걸 조금 더 돌리면 어디까지 갑니까?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실 때, 선택할 때 그때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 예루살렘의 근본이 어디냐? 그 근본은 충격적이게도
“가나안이요 그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오 네 어미는 헷 사람이라”는 거예요.
이걸 놓쳐버리면 무엇을 제거하겠습니까?
이 근본이 이러하다라는 걸 남은 자 유대인들이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과거에는 그랬지’ 그 인간이 생각하는 거는 꼭 그런 식이에요.
‘과거에는 근본이 가나안이요.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어미는 헷 사람이다.
멸망받아 마땅할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받아 마땅할 사람이다’
‘그랬는데 우리는 구원받았다.’
그렇게 되면 벌써 뭐가 되었어요? 아기에서 어른이 된 거예요.

지금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서 현 이스라엘 상황이
지금 바벨론에 의해서 심판받는 그 와중에서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뭘 구해야 돼요?
긍휼을 구해야 되거든요.
긍휼로 살아왔는데 그걸 안 구합니다.
그 긍휼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잘났다라는 얘기거든요.
근본 예루살렘의 근본이 그러하다는 거예요.

간증을 하려면 내 근본이 어디였습니까? 마귀의 종이었죠.
마귀의 종이었으면 간증을 하려면 뭘 이야기를 해야 돼요?
어떻게 주의 백성이 되었느냐? ‘어떻게?’를 이야기해야 되잖아요.
그러면 십자가를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십자가를 빼버리고 십자가를 넣긴 넣는데 넣어가지고
‘내가 지금 이런 사람이 되었다’
‘내가 이렇게 잘났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주님은 예루살렘 그 자리에 근본을 한 번도 빼낸 적이 없어요. 그 근본을.
계속해서 그 근본의 모습이 출애굽기를 보더라도, 민수기를 보더라도 레위기도 마찬가지고요.
거기에서 계속해서 그 근본이 드러나거든요.

그 근본을 드러내시는 이유가 뭐냐? 라고 할 때
너희는 이 근본에서 뭔가 겉으로 보기에는 고운 옷 입고 꼬까신 신고 머리에 뭐 댕기라고 합니까?
이런 걸 하고 화장을 잔뜩하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지금 펼쳐내는 겁니다.

조금 더 보겠습니다.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언이 태어났을 때 그랬잖아요. 처음에.
자기가 나와서 짠 해가지고 내가 옷 입고 씻고 다 한 거 아니잖아요.
우리 그 비유를 갖고 온 거예요.
그것이 지금 이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지금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냥 그러면 거기에 내버려두면 어떻게 되죠?
죽죠. 내버려 두면 죽습니다.

5절
“너를 돌아 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긍휼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꺼린바 되어 네가 들에 버리웠었느니라”
이스라엘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불쌍히 여긴 적이 없어요.
그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갓난 아이가? 죽죠. 충격적입니다. 이 말씀이.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았다라는 겁니다. 예루살렘을. 그래서 6절에 보면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 내가 너로 들의 풀 같이 많게 하였더니”
주님께서 살려서 들의 풀같이 많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오히려 벌거벗은 적신이더라”
이건 이제 출애굽을 두고 하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물로 너를 씻겨서 네 피를 없이 하며 네게 기름을 바르고 수 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띠우고 명주로 덧입히고 패물을 채우고 팔고리를 손목에 끼우고 사슬을 목에 드리우고 코고리를 코에 달고 귀고리를 귀에 달고 화려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나니 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명주와 수 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나아갔느니라”

갓 태어났을 때도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고, 그리고 누가 자라게 했습니까?
저절로 자란 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신 거예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아이가 태어나면
그냥 저절로 부모가 먹여서 입혀서 살려서 자란다고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건 부모가 자기가 먹이고 돈 줘서 자라게 했다라고 생각하는 그 착각,
완전히 뒤집어져야 돼요. 이 사고 방식이.

주님이 자라게 하신 거예요.
그걸 거꾸로 이스라엘에게 주님께서는 적용을 시켜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부모가 계속해서 자라게 했다라고 하니까 애들은 부모 은덕은 알지만,
누구 은덕을 몰라요? 십자가 사랑은 모르잖아요.
요즘은 부모 은덕도 필요 없잖아요. 자기 잘나서 된 줄로 생각하거든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교육할 때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그래요.
‘너만 잘되면 된다.’

이스라엘의 근본이 피투성이인데 그 피투성이를 주님께서 지나가면서 살려주죠.
‘살아라 살아라’ 이 말은 주님이 살게 하신 거예요. 살아서 키웁니다.
키울 때 이게 아름다운 이 처녀의 모습이 갖추어질 때
이게 들의 풀과 같이 많아졌다를 그렇게 비유를 하는 거잖아요.
그 모든 것들을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애굽의 수많은 그 이스라엘의 자손들, 히브리인들을 만드신 것이 그러하다라는 겁니다.

그들이 한 게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 와중에 하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출하여서 광야 길을 지나왔지만,
이스라엘 왕국을 세워주셔서 그들의 아름다움을 뽐내게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같으면 감사가 나올까요? 배은망덕이 나올까요?

이 성경이 왜 중요한가? 하면요.
성경은 정답이고 진리예요.
인간은 이렇게 되면 14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네 화려함을 인하여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솔로몬이 가졌던 그 영광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인하여 행음하되 무릇 지나가는 자면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네가 네 의복을 취하여 색스러운 산당을 너를 위하여 만들고 거기서 행음하였나니 이런 일은 전무 후무하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산물들을 갖고 우상숭배하기 위한 도구로 다 바꿔버려요.
그걸 지금 음행, 음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주신 걸 갖고 어떻게 쓰겠습니까?
어른이기 때문에 자꾸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말씀의 사람이 돼야 된다는 것은 말씀 속으로 우리가 참여하게 되면 죄인으로 드러나거든요.

그런데 성경을 볼 때 모두가 다 어른이 되어서 성경을 보는 거예요.
거기에서 우리가 빠져나갈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어른인 우리들을
십자가의 능력으로 어린아이로 바꾸었다라는 것을 계속해서 드러내십니다. 17절에

“네가 또 나의 준 금, 은 장식품으로 너를 위하여 남자 우상을 만들어 행음하며 또 네 수 놓은 옷으로 그 우상에게 입히고 나의 기름과 향으로 그 앞에 베풀며 또 내가 네게 주어 먹게한 내 식물 곧 고운 밀가루와 기름과 꿀을 네가 그 앞에 베풀어 향기를 삼았나니 과연 그렇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를 가져 그들에게 드려 제물을 삼아 불살랐느니라 네가 너의 음행을 작은 일로 여겨서 나의 자녀들을 죽여 우상에게 붙여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냐 네 어렸을 때에 벌거벗어 적신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기억지 아니하고 네가 모든 가증한 일과 음란을 행하였느니라”
피투성이었고 적신이었다라는 것을 기억지 않는다라는 거예요.
여기에서 기억한다라는 거는 ‘우리가 그랬었지’ 그 정도가 아니라
그 적신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그 풍요로운 금과 은,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긍휼이었다라는 겁니다.

긍휼로 주셨다. 은혜로 주셨다가 되면 무엇이 나와야 됩니까?
희생물이 나와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들은 그 희생물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인내하심이잖아요.
왕을 달라했을 때 그들을 진멸하고도 남았지만,
왕을 주셔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정말 본래 진짜 왕을 위한 그 모델로, 예표로 그를 세운 겁니다.
그것도 긍휼이거든요.

그런데 적신을 기억하지 않게 되니까 자기 잘난 줄 알고 있는 거예요.
자기 잘난 줄 알고 있으니까 지금 교만하여서 심지어 이 자기의 자녀들, 원래 20절에 보면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라”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에요.
자녀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주님을 위하여 낳은 자녀예요.
나를 위해 낳은 자녀가 없습니다. 지금도 동일해요.
이거는 바뀌는 게 아니에요. 말씀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이 백성들은, 남유다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낳은 자녀를 누구를 위해서 불살라버립니까?
자기를 위하여서 불살라버립니다.

적신이었던, 피투성이였던 그 때가 계속 지속된다라고 봐야 되는데, 인간은 그렇지 않거든요.
적신이었던 때를 잊어버리잖아요.
애들도 마찬가지잖아요.
애들 적신이었을 때 원하는 대로 부모가 잠도 못 자고 밤새워서 눈 껌벅껌벅거리면서 그죠?
참고 인내하고 (그 얼마나 그럴까요? 아직 아직도 멀었어요. 좀 더 있으면)
3박 4일, 4박 5일 동안 밤새워서 지켜도 나중에 뭐라 합니까? 다 잊어버리죠.

이스라엘이 그러하다라는 겁니다.
주님의 긍휼로 지금 그들을 이렇게 축복을 해주시고
그들에게 많은 것들을 주셨는데 그들은 그때를 잊어버렸더라.
그때를 기억한다는 것은 금은들이 많아지더라도
오늘도 그 피의 공로, 희생물의 공로로 지금 이것이 주어졌다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 주어짐은 나를 위함이 아니에요.
나의 영광을 위함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않은 거예요.
그렇게 해주시니까 나를 위한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거예요.

문제는 이스라엘이 이러했다라는 것은
어떤 인간들도 이 모습 속에서 못 벗어난다라는 거예요. 못 벗어나요.
예수님께서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다” 할 때 반드시 이 내용을 담고 있어야 돼요.
이 어린아이는, 이스라엘을 적신인 어린아이와 같이 보셨잖아요.
그들을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만들었죠.

제자들은 오해를 한 거예요.
자기들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해를 하고 받아들이고
그래서 그다음 나오는 게 뭔가? 하면
‘천국을 위해서 자기가 일조할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린아이가 천국을 위해서 일조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하죠.
간단하잖아요. 우리 교회가 모임을 이렇게 하고 있는데 어린아이만 20명 모인다.
어떻게 돼요? 헌금을 아무도 못 하잖아요. 어린아이가.
일조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너무 적절한 비유잖아요.

대학교 선교단체가 있는데 선교단체 나름으로 이렇게 모임을 하잖아요.
그 선교단체 중심으로 모임을 하면 헌금을 안 하잖아요.
대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습니까?
그래서 걔들을 졸업시키면 이제 졸업시킨 애들까지도 그 모임으로 끌고 오잖아요.
돈이 되니까.
교회라는 게 그런 거죠. 어린아이들이 오면 도움이 안 돼요.

제자들이 생각하는 메시야 왕국은 다윗 왕국이에요.
그 다윗 왕국에는 누가 필요합니까? 어린 아이가 필요합니까?
강력한, 싸움을 잘하는, 힘센 싸움을 하는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까?

좀 쉽게 합시다.
개척교회를 하려면 돈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까?
가난한 사람이 필요합니까? 간단한 논리예요.
그래서 제자들은 어린아이에 대해서
‘어린아이는 오지마. 너희들은 그냥 우리가 만들어 놓으면 그냥 들어와. 그냥 부모 따라와’
이 정도예요. 도움이 안 되잖아요.
거지 나사로가 교회에 왔다 도움이 됩니까? 도움이 안 되잖아요.

제자들은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들이 어린아이인지 몰라요.
물론 가룟유다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이 말씀을 다시 보게 되잖아요.
그러면 제자들은 자기들이 어른 짓 했다라는 것이 탄로 나요.

그 어른 짓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장가가지 않으면 안 됩니까?’
얼마나 고귀합니까? 여러분.
죄를 안 짓기 위해서, 율법의 위반자가 되지 않기 위함이고,
또 완악한 자니까 그 완악함조차도 제거하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태도입니까?

에스겔 16장을 읽었으면 우리는 또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여러분 이스라엘을 보세요. 적신이었는데 하나님이 긍휼로 부자가 되게 해주셨으니까
여러분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또 이렇게 나와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또 어른 짓 하고 있어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으면 다 이루심을 그냥 덮어쓴 채로 살면 돼요.
물론 ‘어떻게 삽니까?’라는 질문이 안 나올 수는 없어요. 육이기 때문에.
나오면 복음 앞에서,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면 되는데

계속해서 이 제자들처럼, 성령 받지 못한 제자들처럼
‘그럴 것 같으면 장가를 안 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한술 더 떠서 ‘나는 하나님께로 났으니까 아예 장가도 안 가겠습니다.’
주님께로 났습니까? 장가 못 간 게.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고귀하게 여기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일조할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말씀대로 살자’라고 하는 이 말이 얼마나 악마적이냐? 이 얘기예요.
말씀대로 살자라는 것이.

요한복음 21장 5절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여기에 “얘들아”가 나와요. 여기에 단어가 ‘파이디온’입니다. ‘파이디온’
제자들을 아기로 불러요. ‘아가야 아가야’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모두가 다 어린아이입니다.
그럼 어린아이임이 어떻게 드러나느냐? 하면
피를 자랑하는 식으로 드러내요. 무엇을 하는 식으로 드러내는 게 아니라.
또 ‘피를 자랑한다’하면 이것도 행위로 또 끌고 오니까
인간의 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방법이 없습니다.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그 피를 자랑해요.
피를 자랑하려면 무엇이든지 다 하게 되어 있어요. 무엇이든지.
또 반대로 무엇이든지 또 안 하게 되어 있어요.

성경은 두 가지를 다 이야기하거든요.
“모든 것이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해요.
이 두 말씀이 같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린아이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린아이로 살아요.
매일매일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그러한 세계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른이 되고 싶고 성숙하고 싶은 그 악마성을 말씀을 통하여 드러내심을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십자가로 만드신 어린아이이기에 주님의 피만을 자랑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