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2-22 08:42
20240221 마태복음 강해 마 20:24 두 형제에 분노하는 열 제자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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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4-02-22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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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1 마태복음 강해 마 20:24 두 형제에 분노하는 열 제자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저희들을 부르셔서 광야로 몰아내셔서
주님이 이 땅에서 걸어가시는 길을 걷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나를 부인할 것들을 주께서 조성하시고
십자가만 자랑할 수밖에 없는 긍휼을 입은 자로 드러내심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20장 24절에서 28절까지 말씀을 읽겠습니다.

(마20:24~28)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아멘.

오늘 우리들이 보고자 하는 본문은 24절인데요.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습니다.
두 형제의 엄마가 와서 예수님을 향하여서 당신의 나라, 메시야 왕국이죠.
다윗 왕국입니다. 그들이 소망하는 그 나라가 임했을 때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을 한 겁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도 이 마음을 갖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대해서
좀 선명하게 ‘니가 구하는 걸 니가 지금 모른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 참 좋잖아요.
그럼 열 제자가 화가 날 필요가 없잖아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보면,
주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보면 우리들 쪽에서는 납득이 안 되는 방식으로 일을 하는 거예요.
아니 진리만 전하시면 되고
옳은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시면 되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주의 우편에,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이 요청을 한 이들이나 그 엄마나
나머지 열 제자들도 오해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말씀을 하시느냐?’ 이겁니다.
그게 문제예요. 그러니까 이 제자들이 화가 난 겁니다. 열 명의 제자들.

여기에는 가룟유다도 있고요. 베드로도 있어요.
이들이 왜 화가 났겠습니까?
화가 나는 이유가 뭐예요? 같이 출발했잖아요. 거의 비슷한 시점에 출발을 했거든요.
비슷한 시점에 예수님을 따라 나섰고 그게 뭐 며칠 상간일 수도 있고 몇 달 상간일 수도 있는데
모두가 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는 제자들이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자리는 한정적이잖아요. 어디든지 그렇잖아요. 이 세상은 자리는 한정적입니다.

왕의 좌우편은 한정적이죠. 2인자 3인자 1인자는 주님밖에 없으니까, 2인자가 여럿일 수가 없어요.
이것도 참 재밌죠. 우리 같으면 ‘2인자가 여러 명이 되면 안 됩니까?’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2인자가 여러 명이 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머릿속으로 계산적으로는 가능한데 실제로는 불가능하잖아요.

그게 왜 불가능하냐? 저는 뭐 애가 하나밖에 없으니까
둘 있으신 분들 둘 다 똑같이 사랑합니까? 불가능하거든요. 이게 왔다 갔다해요. 왔다 갔다.
동일한 게 안 돼요. 인간 자체가.
하나를 중히 여기면, 하나를 경히 여기게 돼 있어요.
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 말씀입니다. 자식들은 똑같죠. 자기가 신이야. 신.
주님만이 동일하게 똑같이 사랑할 수 있어요.
인간들은 불가능합니다.

제자들은 지금, 열 명의 제자들은
하나는 우편에, 좌편에 아버지께서 앉게 할 것이라는 이 말씀에 대해서
이제 화가 끝까지 치밀어 오른 겁니다.

우리가 이 제자들의 입장이 안 되어서 여기에 공감을 안 할 수도 있는데
제자들이 입장이 되었다면 어떻겠습니까?
특히 나름 수제자라는 그 베드로, 우리는 가룟 유다가 저 끝자리에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돈을 맡았다라는 것은 그 정도로 신뢰가 된다라는 거거든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무나에게 돈을 맡깁니까? 안 맡깁니까?
요셉에게 재정을 함부로 맡깁니까? 아니죠. 신뢰가 되기 때문에 맡기는 거죠.

우리 교회도 재정을 누가 담당합니까?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는 거잖아요.
‘저 사람은 죽어도 못 믿겠다’라면 안 맡겨요. 그건.
이건 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두 제자에 비해서 나머지 열 제자가 부족함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자기들의 그 속마음이 확 튀어나옵니다.
‘나도 지금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나섰다’라는 거예요.
본심이 드러난 겁니다.

처음부터 이 메시야 왕국에 대한 꿈을 품었을 때
메시야가 만든 그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꿈꾸는 메시야가 오셔서 자기가 원하는 왕국을 만들어 주시기를 원하고
그리고 그 왕국에 들어갈 때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거예요.
이거 오늘날 교인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인들도 자기가 봉사를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연보를 많이 하고 전도를 많이 하면
옆에 있는 사람, 강도처럼 평생 강도짓만 하다가 죽을 때 ‘십자가뿐입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말은 못해도 속에서 천불 날 거예요.
우리도 그런 사람 한번 만나야 되는데...

아니 평생 자기 탐욕만 채우다가 죽는 거예요.
그런데 죽을 때 돼가지고 복음을 듣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떤 해석을 하는가? 하면 ‘저 인간은 지옥 갈 거야.’
왜?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 믿는다고 했을 거야’
누가 이런 판단을 할까요?
나름 복음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소자들은 그런 얘기를 안 합니다.
소자들은 자신의 구원이 그러한 구원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못하죠.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봉사하고 전 재산을 갖다 바쳤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지금 주님께서 이걸 유발시킨 거죠.
비교 대상을 툭 튀어나오게 한 겁니다.
툭 튀어나오게 하니까 이들의 본심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걸 알아야 돼요.
개인적으로 아무리 신앙이 좋다 하더라도요.
교회 나오면 신앙 하나도 없음이 드러나게 돼 있어요.
제가 예전에도 그런 얘기를 많이 했는데
그 방에 앉아서 유튜브 본 사람들은 신앙이 하늘 끝까지 올라가 있거든요.
근데 교회 한번 와보세요.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로 와보세요. 악마들이 들끓거든요.
그 속에서 비교되는 대상이 등장을 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도 마찬가지죠. 고린도 교회도.
고린도 교회가 그렇다라는 것은 다른 교회도 다 똑같아요.
‘니가 바울파냐 나는 게바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그리스도 파다.’
이게 왜 나옵니까? 이게 비교거든요. 비교.

여기에는 지금 예수님의 말씀이 근거가 되지만
이 성령 시대에 들어가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교회가 만들어지면
예수님의 말씀은 누가 장악하고 있어요? 이것도 되게 흥미롭잖아요.
남아 있는 거는 말씀뿐이거든요.

그러면 누가 누가 제대로 해석하느냐? 제대로 해석하면 사도바울처럼 이야기하잖아요.
‘내가 십자가 지지 않았다.’ 해요.
누가 십자가를 졌느냐? 내가 지지 않은 거예요.
아볼로도 진 적이 없고, 베드로도 진 적이 없고 모두가 다 뭐예요? 십자가의 원수였죠.
문제는 이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그러한 어떤 지식들을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차곡차곡 쌓아지면
그것이 나에게 플러스 요인이 되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사무엘상 18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18장 6절에 보면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블레셋 사람이 누구냐? 하면 골리앗입니다.
“(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여인들이 사울 왕을 환영하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니까
왕을 환영하는 그 자리에 노래를 부르는데 온갖 악기를 치면서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이거 불쾌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좋아가지고
‘이미 사울은 버렸고 다윗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왕이니까 당연하지’

이건 다윗도 마찬가지예요.
이 사울 왕이 처음에는 겸손했잖아요.
겸손했는데 이 왕이 되고 난 뒤에 그 왕의 행세를 하잖아요.
왕의 행세를 하기 시작하니까 그 왕권을 유지하고 싶은 겁니다.

앞서 어떤 사건이 있었는가? 하면
이 골리앗을 앞장세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꼼짝을 못하고 있어요.
두려워 벌벌 떨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울 왕도 싸움이라면 만만치 않잖아요. 키도 굉장히 크고요.
이제 사울 왕보다 훨씬 큰 게 골리앗인데, 사울 왕이 나가면 되는데 자기가 나가도 못 이겨요.
이렇게 벽에 딱 부딪힌 겁니다. 이게 싸움을 하면 무조건 지는 거예요.

그 상황에서 이제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 아버지가 막내 아들 다윗에게 형들을 위하여 볶은 곡식, 전쟁터에 가 있으니까
‘식량, 군량미를 좀 조달하라’ 그렇게 이제 얘기를 했죠.
그래서 그곳에 갔는데 우연히 이 다윗이 군사들이 하는 말을 듣습니다. 17장 21절.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람이 항오를 벌이고 양군이 서로 대하였더라 다윗이 그 짐을 짐 지키는 자의 손에 맡기고 군대로 달려가서 형들에게 문안하고 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마침 블레셋 사람의 싸움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 하는 자가 그 항오에서 나와서 전과 같은 말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더러는 가로되 너희가 이 올라 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비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자유하게 하시리라”
소문을 내는데 재물도 주고 왕의 사위도 삼고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자기가 속한 자기 집안의 세금도 면제해 준다라는 겁니다.
돈도 많이, 재물도 많이 얻고 권력의 자리로 직행할 수 있는데
아무도 골리앗과 싸울 엄두를 못 냅니다. 워낙 강하니까

말만 하고 있어요.
말을 하는 이유는 누군가 이 말을 듣고 싸워서 좀 이겨달라는 그런 모습일 수도 있는데,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이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는 저 블레셋 사람을 치면 거기에 따른 보상이 크다라는 것과,
동시에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다윗도 나름 탐심을 숨기지는 않습니다.
그와 함께 다윗은 지금 이 ‘저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냐?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
물론 그렇게도 볼 수 있고요.
반대로 꼴란 그거 때문에 그러느냐? 근데 또 묻거든요. 뒤에 보면

이렇게 해서 이제 27절
“백성이 전과 같이 말하여 가로되 그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여차 여차히 하시리라 하니라”
그래서 다윗이 이 블레셋 사람과 싸움을 하는데 게임이 안 됩니다.
물론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다윗이 용사라고 수금을 타는
이제 사울 왕이 악신이 들렸을 때 수금 타는 자를 부르거든요.
그 다윗을 소개할 때 나름 용사라 이렇게 소개를 합니다.

그런데 이 사울 왕의 무기 드는 자로 이렇게 막 세웠거든요.
무기 드는 자는 싸움꾼이 아니에요. 들고 쫄쫄쫄쫄 따라다니다.
무기 주면 그걸로 사울 왕이 싸우는 건데 비교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런 어떤 이 다윗인데 33절에 보면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이걸 보면 사울 왕이 이 전쟁이 여호와의 전쟁이거든요.
여호와께서 붙이시는 전쟁입니다.
그런 전쟁인데 무슨 전쟁으로 보느냐? 하면 힘의 전쟁으로 봐요.
골리앗을 볼 때 힘과 힘의 대결로 봐요.

우리는 다윗이 물맷돌로 팍 쳐서 이겼다니까 힘으로 이겼다 생각하는데
힘으로 이긴 게 아니에요.
그래서 특별히 소년이라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문제는 이 사울 왕이 보기에는 상대가 안 되는데 다윗이 야무지게 말을 하거든요.
여기 뒤에 봅시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사울왕이 이 말을 액면가대로 들었을까요? 안 들었을까요? 안 듣습니다.
들었으니까 나가라고 했지 않느냐? 밑져봤자 본전인데. 어차피 죽잖아요. 전쟁에서.

다윗이 하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상대는 뭘로 봅니까? 소년 다윗으로 보고, 한쪽은 골리앗으로 본단 말이에요.
그 소년 다윗이 이러한 일을 과연 했겠느냐? 우리는 다윗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잖아요.
근데 사울 왕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찌 되었든지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말은 잘하죠. ‘가라’
다윗이 이길 줄 생각을 못한 거예요.
사울 왕은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이 전쟁을 할례 없는 자와의 전쟁,
여호와의 군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자와의 전쟁으로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아직도 사사시대와 비슷하거든요.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시대입니다.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을 이렇게 정복을 할 때, 그걸 차지를 할 때
그 전쟁의 방식은 힘의 방식이 아니었거든요. 힘의 논리가 아니었어요.
이미 앞서서 이 언약궤 사건이 있었잖아요.
블레셋과 싸울 때 언약궤만 갖고 오면 우리가 승리한다라는
그 엘리 제사장 시절에 그러한 사고 방식이 있었잖아요.

언약궤를 뭘로 생각하는 거냐? 하면 이 힘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언약궤는 힘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희생이 담긴 거거든요.
그러한 사고, 그걸 목격을 해도 왕이 되니까
이게 어떻게 그런 걸 알면서도 자기의 전쟁도 마찬가지였죠.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느냐?

우리는요. 오늘 이렇게 감사하다라는 게 1분 후에 다 잊어버려요.
그런데 우리의 자리가 왕의 자리에 있다 생각해 보세요.
그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기억하겠습니까? 다윗도 똑같아요. 다윗도.
자기가 왕이 되니까 왕 행세하잖아요. 율법조차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하거든요.

놀라운 것은 이 다윗의 이 말과 사울 왕이 ‘여호와께서 함께하실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다라는 거예요.

왜 이런 방식을 취하느냐? 라고 하면
여호와의 전쟁은, 할례 없는 자와의 전쟁은, 여호와의 군대를 모욕하는 자와의 전쟁은
힘의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힘의 전쟁이 아니라는 것은 나중에 사무엘하 24장에 가면 명확하게 드러나요.
하나님께서 염병으로 그들을 죽이잖아요. 이스라엘을.

그러면 그 염병으로 죽인다는 것은 전쟁으로도 죽일 수 있다라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 싸움에서 어떻게 이깁니까? 다윗 왕이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잖아요.
희생물이 되는 겁니다. 왕이 희생물이 되는 거예요.
그 방식밖에 없어요.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식은.
여호수아가 언약궤를 앞장세웠다라는 것은 그런 의미거든요.

광야를 어떻게 지나왔어요? 희생물이 없으면 다 진멸입니다. 진멸.
언약을 위하여서 희생물을 그 속에 발생시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서 약속의 땅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거거든요.

사울은 ‘너를 버렸다’ 이런 말들 자체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거고 현실은 뭐예요? 자기는 왕 행세를 해야 된다는 거고
군복을 입혀봐도 맞지 않으니까 그냥 갑니다. 40절에 보면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블레셋 사람이 점점 행하여 다윗에게로 나아오는데 방패 든 자가 앞섰더라”
방패 든 자가 따로 있어요. 막아주는 겁니다. 그러면 골리앗은 공격만 하면 되죠.
방어는 방패 든 자가 이렇게 해줄 수도 있고, 그걸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는데 이 흥미로운 대목이 이 부분입니다.
이 골리앗이 다윗을 보는 안목이나 사울 왕이 다윗을 보는 안목이나 똑같아요.

속에서 이 말이 이만큼 올라온 거예요.
왜냐하면 소년이잖아요. 갑옷도 못 입어요. 이 군복이 맞는 게 없어요. 너무 작아서.
속에서는 “니가 나를(여기 보면 재미있죠.) 개로 여기고” 이 사울 왕도 똑같아요.
근데 지금 상황이 어떻습니까? 힘의 싸움이잖아요.
어쨌든 누군가 간다 하면 보내서 죽으면 죽는 거고 운 좋으면 승리하는 거고
이 골리앗과 사울 왕이 똑같거든요. 지금 태도가, 마음의 태도가.

왜 그렇습니까? 힘의 싸움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근데 다윗은 지금 이 싸움을 힘의 싸움이 아니죠.
할례받은 자와 할례받지 못한 자의 싸움, 이것도 되게 어렵죠.
그럼 할례받으면 무조건 이기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무조건이라는 게 없어요.
그래서 언약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우냐?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할례받은 자와 할례받지 않는 자의 싸움을 진행할 때 여기에서는 승리케 하지만
그 방식을 그대로 도용해서 ‘나는 할례받은 자로서 이 싸움에 나가겠습니다.’ 이러면요. 져버립니다.

그게 언약궤 사건이죠.
언약궤를 앞장세웠을 때는 여리고성이 무너졌거든요.
그런데 그걸 그대로 갖고 와서 나가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갖고 이용하는 자를 패하게 만들어버리죠.
그래서 언약이 어렵다라는 거예요.

언약이 어려운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잖아요.
우리의 언약이라면 우리가 언약을 장악할 수 있어요.
장악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요.
원리를 뽑아내려고 하죠. 성경의 원리,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리.
원리는 성령께서 일을 하시기 때문에 바람처럼 일하기 때문에 우리가 못 뽑아냅니다.

구약이 이렇게 장구하게 하나님이 일하심이 긴 이유가 뭐냐? 하면
그러한 인간들의 사고방식을 다 풀어놨어요.
인간들이,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죠.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가 그러한 할 짓을 다 합니다.

성전 제사도 마찬가지잖아요.
제사만 드리면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한다 그랬잖아요.
근데 제사드리면 용서되어서 그들을 구원합니까? 구원 안 하죠.

골리앗은 지금 이 전쟁을, 이러한 전쟁, 이 힘의 전쟁...
그러니 자기의 눈에는 뭘로 보입니까?
나를 개로 여기는, 개무시하는 그러한 다윗처럼 보이잖아요.
사실은 다윗은 개무시하는 거 맞아요.

이런 걸 보면 오늘날 우리가 이 안목이 있어야 돼요.
이 세상 권세를 개처럼 여겨야 돼요.
요즘은 개가 큰 의미를 갖고 있는데, 그런 것 말고.
대통령이 되었든 미국이 되었든 어느 나라가 되었든 그 개처럼 여겨야 되는데

돈 많은 것도 마찬가지죠.
돈 많은 걸 개처럼 여길 수 있어야 되는데 그거 그렇게 못 여기죠.
두려운 겁니다. 그런 것들이.

다윗의 모습을 보게 되면 누가 봐도 미쳤어요.
이 미친 이 모습은 이 제자들의 눈에는 안 들어와요. 안 들어오거든요.
자기들은 말도 안 되는 싸움을 하는 이 싸움이야말로 진짜 영적 싸움인데
나중에 다윗 왕이 왕이 되어가지고
이 장관들을, 전쟁을 잘하는 장관들을 주위에 배치하는 그러한 어떤 나라를 꿈꾸는 거예요.
그러면서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 할례받은 민족이라는 것은 ‘나는 아니오’거든요. 할례라는 것은.
영적 할례, 할례라는 것을 ‘성령 세례’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데
로마서에도 나오잖아요.
성령의 할례를 받게 되면 ‘나는 아니고 대신 죽으신 분입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거든요.
‘할례받았으니까 나는 특별해’가 아니라
이미 죽은 자와 전쟁을 하는 거예요. 이미 죽은 자로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살잖아요. 자기의 이름이 없는 겁니다. 이런 전쟁을 지금 하는데
이 골리앗 쪽에서는 우습게 여기죠. (삼상17:44)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이건 누가 봐도, 객관적 그 상황에서 누가 봐도 그런 겁니다.

이걸 잘 읽어야 되는 게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울 왕이 지금 이 안목이 있는 거예요. 사울 왕이.
그래서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했을 때 사울왕은 이 노래를 어떻게 들어야 돼요?
‘이 여인들아 이 바보 멍청이들아 이 싸움은 할례받은 자와 할례받지 못하는 자의 싸움이야.’
그러면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한 겁니까? 여호와께서 승리한 겁니까?
여호와의 이름이 승리한 거잖아요.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하니까 완전히 분노가 게이지가 올라가는 거죠.

다시 돌아와서 보면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이게 중요하죠. 여호와의 이름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방금 앞에 보면 ‘칼과 창과 단창’, 이렇게 나오잖아요.

칼과 창과 단창, 물맷돌 같은 부류입니까? 다른 부류입니까?
국어를 잘 아시니까 같은 겁니까? 다른 겁니까?
칼, 단창, 물맷돌. 물맷돌은 무기에 들어가요? 안 들어가요? 안 들어갑니까?
물맷돌, 아까 물맷돌로 뭘 잡습니까? 사자를 잡잖아요. 무기예요. 동일한 무기예요.
이 다윗이 물맷돌을 안 갖고 가고 창을 갖고 가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지금 이 싸움을 그러한 전쟁이 아님을 말씀하기 위해서 물맷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똑같은 무기예요. 똑같은 무기인데.
문제는 이전까지 사울 왕이 앞장서서 블레셋과의 전쟁을 할 때
이 전쟁을 여호와의 이름과 블레셋과의 전쟁할 때 사울왕 이스라엘 군사들이 무기를 안 들었어요?
무기가 있긴 있어요. 있는데 이 무기가 여호와의 이름이 더 무기여야 되는데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은 빠져버리고 힘과 힘, 무기와 무기의 전쟁으로 보는 거예요.

구약은 이 전쟁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실제로.
신약과는 전혀 달라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완료해버리면 승리가 어떤 승리가 되는가? 하면
죽는 게 승리예요.
그래서 성도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승리자로 사는 거예요.
실패 자체가 없는 겁니다.

근데 구약에는 그림자이기 때문에 이 그림자로서는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보여주죠.
이 땅에서도 승리를 하는데 ‘이 승리는 승리가 아니야’라는 승리로서 보여주는 겁니다.
‘승리가 승리가 아니오’라고 보여주는 이 사건이 되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 되거든요.

문제는 육에 속한 자들은 이런 본문들을 보면서
승리하는, 이 땅에서 이기는 그러한 이 전쟁으로 보는 거예요.
그럼 전쟁에서 승리하며 한 자리를 차지해야 되는데

“(여호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겠네.’ 우리 많이 불렀잖아요. 옛날에.
교회에서 많이 불렀잖아요. 어릴 때 저도 많이 불렀거든요.
그럼 ‘승리를 얻겠네’ 할 때 그 승리가 어떤 승리였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이 세상에서 거지 나사로처럼, 세리와 창기처럼 ‘죄인의 친구로다.’
그게 승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제가 보기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죠.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승리를 했는데
구약을 보면서 이 승리를, 십자가의 승리를 뭘로 바꿔버립니까?
제자들이 꿈꾸는 메시야 왕국, 그곳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천국이에요.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해서 강남의 집 세 채... 좀 부족하죠.
200채 있는 사람도 있고 몇천 채 있는 사람도 있는데, 그게 승리라고 생각하잖아요.

교회를 하면 개척교회가 잘 돼가지고 부흥을 해서... 제가 그런 얘기 들었거든요.
제 친구 목사들한테. 개척교회 시작을 하면 1년 안에 승부를 봐야 된대요.
볼 게 처음부터 없는데 뭘 봐요? 그 사람들은 그걸 생각을 하는 거예요.

예수 이름으로 승리한다는 것은 사라지는 겁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처럼, 길에 핀 그 들풀처럼,
‘그냥 들풀이었다.’ 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잖아요.
그 소리였다. 그 소리만 남기고 사라져야 돼요.

문제는 인간들은 그런 것을 승리로 안 봐요.
십자가에서 승리했잖아요.
그 십자가에서 승리한 현장이 어딥니까? 이 땅이잖아요. 이 땅.
부활한 주님은 이 땅에 계세요? 어디 계세요? 하나님 우편에 가셨잖아요.
이런 얘기 꼭 해야 돼요. 왜 못 알아듣냐? 이 얘기예요.

주의 나라는 이 세상이 아니잖아요. 이 땅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그분이 주의 자리에 계심을 이 땅에서 드러낼 때는
십자가로 드러내요.
그래서 성령을 받은 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문제는 구약을 읽어버리면 구약은 다르게 봐버리는 거예요.
다르게 봐가지고 신약을 거꾸로 구약 속으로 편입시켜요.
정말 이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잖아요.

제가 어제 신명기 6장을 설교를 했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 말씀이 왜 그렇게 좋으냐? 하면
복 받기 위한 비결이거든요.
자녀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열심히 외우게 하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죠.

근데 이게 두 부류로 갈라져요.
복 받기 위해 사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 이 인간도 똑같아요.
그 인간이나 이 인간이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데
문제는 자기가 의롭다고 자꾸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 사람들이 말씀을 외우고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열심히 성경을 읽잖아요.
1년에 몇 독 한다 그런 사람도 많잖아요.
그 읽어서 뭐 하고 싶으냐? 이거예요.
딱 하나예요. 복 받고 싶은 거예요.

“네 영혼이 잘된 것 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는”
이 영과 육과, 영과 몸의 건강과 물질의 축복까지... 이 삼박자 구원.
예수님은 망했어요.
예수님은 삼박지 구원 못 받았죠. 그런 식이라면.

그런데 예수님은 그 축복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천이 예수님에게서 나왔거든요.
그러면 그 본문을 해석하려면 십자가에서 해석을 해야 되는데 내 쪽에서 해석을 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십자가는 우리가 보기에도 마음이 안 듭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지금 이 청운의 꿈을 안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는
마지막에 자기가 한 자리 차지하는 건데
중간에 누가 ‘나는 우편에 좌편에...’
‘그래 아버지께서 정해놨으니까 나는 모르겠고...’
이 말을 해도 이게 나머지 열 제자들은 그게 안 들려요.
왜냐하면 그들의 꿈은 이 땅에서 성공하는 거예요.
한 자리 차지하는 겁니다.
이게 나중에 교회로 가면요. 똑같이 나타나요. 똑같이 나타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도 같이 이렇게 지내는데 지금 몇 명이 안 되고
비교 대상이 별로 없어가지고 열받는 일이 별로 없어요.
그래도 열받는 일이 있거든요. 비교되잖아요.
제가 조금 더 건강하잖아요. 그죠?
이 비가 오면 힘들어 가지고 오늘 예배도 못 오신 분도 계시고 ‘나도 저렇게 건강했으면 좋겠다.’
물론 그런 마음이 99%는 안 품다가 0.001% 딱 품는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간다’ 했을 때
우리는 ‘야 하나님이 함께하니까 승리하겠지.’ 이게 과거에 십자가 전쟁이었거든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하면 승리한다.
바보 멍청이에요. 왜 그 생각을 갖는가?
물론 그들이 권력을 위해서 돈벌이를 위해서 그런 짓을 하는데

나름대로 순수한 사람들은 왜 그 생각을 할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해도 성령을 못 받으니까 가르치는 자들도 마찬가지고요.
가르친 자들이 다 거짓 선지자잖아요.
자기 배를 위해서 성경을 가르치니까 다 어디로 가는 게 좋습니까? 구약이 좋아요.

목사들은요. 구약 설교가 훨씬 좋아요.
신약은 너무 어렵거든요. 왔다 갔다 하니까.
특히 서신서는 정신을 못 차립니다.
믿음 이야기했다가 행위 얘기했다가 또 행위를 공격했다가 믿음 얘기했다가

구약 설교하면요. 호시뺑뺑이거든요. 너무 편해요.
왜? 모든 것을 행위로 이야기하거든요.
이런 본문도 마찬가지죠.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나가면 승리한다.”
‘여러분 여호와 이름으로 나가면 승리합니다.’
맞아요.

근데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전쟁합니까?
예수님 이름으로 전쟁합니까? 이름이 바뀌었죠.
예수님 이름으로 전쟁하면 반드시 승리하죠.
왜? 이미 승리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이미 끝냈어요.

그러면 승리한 자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날마다 죽어야 돼요.
내가 복음을 전했으니까 저 사람이 돌아왔잖아요.
돌아오면 ‘야 주님이 회개와 복음을 전했는데 돌아왔습니다’라고 할 때 죽어야 돼요.

근데 사람들은 그걸 거꾸로 해석하잖아요.
‘내가 100명을 전도해서 돌아왔으니까, 주님이 나와 함께하셨어.’
요즘 화초 전도법 들어보셨어요? 별별 전도, 옛날 고구마 전도법 있었잖아요.
감자 전도법, 화초 전도법 또 여기 제가 사는 동네 모기 은사래요.
궁금한 건 내가 물어보고 싶어요. 모기 은사가 도대체 뭔지?
피가 나올 때까지 빨아먹는... 말은 되요. 피 이야기가 나오니까
모기처럼 해야 된다는 거예요. 달라붙어서.
제 해석이 맞는지 모르지만 제가 부동산 집에 그 모기 은사 써놨더라고요.
한번 들러보려고요 내일, 무슨 뜻인지.

그러한 것들을 다 들어보세요.
‘여호와의 이름으로 전쟁을 한다.’ 지금 제자들은 이 구약을 깔고 있거든요.
아직 성령을 못 받았어요.
못 받으니까 자기들이 충성한 만큼 보상을 받는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원리가.

왜 그러냐? 하면 구약 자기 선조들을 보게 되면 말씀대로 안 살았으니까 저주를 받았잖아요.
근데 그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나름대로 충성된 자는 어떤 위치를 차지했어요?
아마 이들의 모델은 여호수아일 가능성이 높아요.
모세 옆에 쫄쫄 따라다녔잖아요.
모세 옆에 쫄쫄 따라다니니까 여호수아가 후계자가 되었잖아요.

사실 여호수아가 후계자였다는 것은 ‘너 아니야’ 이야기인데 지금.. 그 얘기를 지금 하거든요.
왜냐하면 여호수아는 자기 이름으로 전쟁을 하는 경우가 한 번도 없어요.
모든 것이 모세가 말한 대로 할 뿐이에요. 그걸 볼 안목이 없죠. 46절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이렇게 이야기해도 못 알아들어요.
그들의 눈에는 뭐가 보입니까? ‘물맷돌로 이겼다’가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해석이 분분하겠죠.
‘야 정말 여호와의 이름이 승리케 했다. 저 다윗은 허수아비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이 없어요.

없다라는 말을 어떻게 단정하느냐? 하면 지금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 했을 때 사울 왕이 화가 났잖아요.
불쾌하여 심히 노해요.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사울의 본심을 드러내는 겁니다.

본심을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지금 이 전쟁을 다윗이 수도 없이 여러 번 이야기했잖아요.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는 전쟁이라고 얘기를 해도 그들 눈에는 다윗만 보이는 거예요. 다윗,
‘이제 사울의 시대는 갔구나. 다윗 왕의 시대는 오는구나.’
물론 하나님께서 그것도 사용합니다.
사용한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건 아니에요.

여기에서 오늘 본문과 연결시켜보면 이 사울 왕이 왜 불쾌하냐? 이거예요.
불쾌한 이유가 뭐냐? 하면 전쟁의 방식을 전혀 모르는 겁니다.
이 전쟁의 방식이 골리앗처럼 전쟁의 방식이었다면 그 공로를 누가 받아야 되죠? 공로를.
영광을 누가 받아야 됩니까? 골리앗이 받아야 되잖아요.
지금 사울 왕은 오해하는 게 이 부분이에요.

여자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왜냐하면 이 여자들도 뭘 원했습니까? 골리앗과 같은 힘을 가진 왕을 원했던 거예요.
‘사울 왕, 처음에는 우리를 구원했는데 지금 보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구나. 너 빠져’
그럼 사울 왕보다 더 센 사람이 누구냐? 다윗 왕이다.
용모가 용모가 뛰어나거든요.

사울은 이미 한 물 갔고, 원래 여자들은 용모가 뛰어난 사람을 좋아하잖아요.
제가 농담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게 연결이 돼 있어요. 같이.
관심이 어디 있습니까? 골리앗과 똑같아요.
블레셋 사람, 골리앗과 똑같은 사고 방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지금 분노하는 이유가 이 전쟁이 어떤 전쟁인지 몰라서 그래요. 버림을 받았으니까.
이 제자들에게 이러한 분노를 주님께서 야기시키시는 이유가 뭐냐?
왜 이런 환경으로 몰아가느냐?
그냥 명확하게 선명하게 하나님 나라는 어린 양의 피로, 내 피로 들어가는 나라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은혜를 받은 자의 모임이기 때문에
큰 자나 작은 자나 뭐예요? 은혜만 내놓는 자들이잖아요.

이 세상은 이중적이잖아요.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누가 높아 보여요?
나중에 보면 야고보가 높아 보이잖아요.
그런데 성령을 받은 입장에서 보게 되면 사도바울 자신을 보면 높은 자입니까? 낮은 자입니까?
낮은 자죠. ‘나는 아니요’라는 자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이걸 알려주시면 되는데 이걸 말씀을 안 해요.
이걸 왜 제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성경 전체가 애매한 게 너무 많다는 거예요.
해석이 분분하도록 말씀을 주셨잖아요.

왜 이렇게 하시는가?
말씀을 명확하게 주게 되면 인간들은 그 말씀을 갖고 (명확히 주어도 못 알아듣지만)
그걸 갖고 이 선악을 아는 지식을 소유했기 때문에 정답이라고 낚아채가지고
자기가 구원받은 자라고 행세하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주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너희들 중에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다’라는 겁니다.
없어요. 아무도 못 들어가요.
그러면 예수님을 따를 때만 지금 이런 문제가 발생하느냐? 아니죠.
이후에 성령을 받아서 이들이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누구 파다 누구 파다’
이거는 단순히 그들 교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서 그 사건이 일어났다라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그 속에 똑같이 들어가 있다라는 거예요.

바울은 그 설교를 통해서 자기를 치는 겁니다.
우리는 상대를 친다고 자꾸 생각을 하잖아요.
왜 그걸 못 보느냐? 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안 믿어서 그래요.

그걸 믿는다면 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자기를 공격한다는 거예요.
‘나 십자가 안 졌는데’
근데 인간은요. 바울이든 누가 되었든 자기가 한 일을 못 잊어요.
못 잊으니까 죄인 중에 괴수라 하면서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오호라 잘됐다.’
이건 저들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성도의, 복음을 전하는 당사자들의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나중에 디오드레베에 나오잖아요. 디오드레베.
요한 3서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자, 그 인물이 왜 이 성경 끝부분에 나올까요?
나중에 요한계시록 가면 이 짐승의 모습과 이렇게 겹쳐지거든요.
그러한 자들이 등장을 할 수밖에 없는 게 이 디오드레베 같은 경우에는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겁니다.
복음은 듣는데.
이 사람이 짜증 나는 거예요. 나그네들이 오잖아요.
복음 전도자들이 오니까 비교가 될 거 아닙니까?

아니 복음도 모르고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이 오면 환영을 하죠.
왜? 모르는 사람이 오면 ‘목사님 말씀이 대단합니다. 한 수 배우겠습니다.’ 이렇게 오는데
우리 모임 가운데 저보다 훨씬 뛰어난 목사님이 오신다.
그러면 좋아하겠냐? 얘기예요.
이게 리얼한 얘기잖아요. 불가능합니다.
근데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게 십자가 복음이에요.

제자들은 ‘안 돼요. 안 돼.’
나중에 ‘성령을 받아도 안 돼요.’ 이 말을 꼭 해야 돼요.
‘성령 받으면 된다’라는 말이 가장 위험합니다.
성령을 받았기에 안 되는데 주께서 되게 하는 거예요.
그 자리가 십자가예요.

계속해서 주님은 십자가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부르신 거예요.
지금 아무도 3년 동안 따라다녀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도 못하고요.
그들의 이 탐심만 무럭무럭 자라나는 겁니다.
이 자라나야 그 끝판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을 팔아먹고 죽여야 되죠.
그게 이들의 한계성이에요. 육의 한계성이에요.
성령을 받지 않으면 이 구조 속에서 못 벗어나요.

지금 우리들도 성령을 받았잖아요.
받았는데 어떻습니까? 마음가짐이.
비교 대상이 등장하면 어떻습니까?
아직 그런 상황을 안 부딪혀 봤습니까?
비교 대상이 등장하면 이 제자들 못지않습니다.

‘주님 성령 받았으면 우리는 그런 마음이 없어야 되지 않습니까?’
‘저 사람들은 예수님도 안 믿는데 너무 돈도 잘 벌고 사기도 안 당하고 너무 잘 되는데 왜 나는 이럽니까?’ 이런 마음이 없어야 된다라는 게 이 악마의 속임수예요.

말로는 ‘십자가, 십자가’ 이야기해놓고 막상 우리가 코너로 몰리면 어떻게 됩니까?
‘코너로 몰렸으니까. 주님 감사하는 마음은 주님이 주셔야 안 됩니까?’
아니에요. 안 줍니다.
왜 안 주시는지 아세요? 그게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의 노림수이기 때문에 그래요.
진짜 사랑하기 때문에 안 줘요. 그 자체에 감사해야 돼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환경을 통하여서 우리가 어떠한 자들임을 주님께서 드러내셔서
십자가로 승리하신 주님만을 생각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사 이 세상에, 광야에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기쁨이요, 즐거움이요
감사의 상황임을 날마다 알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십자가만 자랑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