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5-30 06:17
20240529 마태복음 강해 마 22:34-40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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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4-05-30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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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9 마태복음 강해 마 22:34-40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22장 34절에서 40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22:34~40)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아멘.

사두개인들에게 대답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박수를 쳤겠죠.
평소에는 이들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기 때문에 저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고
바리새인은 부활을 인정하기 때문에 부활을 인정하는 예수님에 대해서 박수를 친 겁니다.

다른 병행 구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옳게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제대로 답변하셨다.
이런 식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그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묻습니다. 시험을 하죠. 계속해서.
무슨 시험을 하느냐?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이거 정말 만만치 않은 질문이거든요.
“율법 가운데”
그러니 일반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의 개수를 헤아리는데
613개라 이렇게 헤아립니다. 이건 뭐 일반적으로 다 나와 있는 이야기예요.
그 정도로 세심한 거예요.

그중에 248개는 ‘하라’는 명령이고.
아무튼 대단하죠. 저도 안 세어봤거든요. 아마 이걸 듣고 확인한 사람이 몇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논문 쓰는 사람들은 다 세어봤겠죠.
그리고 365개는 ‘하지 말라’는 율법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람의 뼈가 248개인데 어쩌고 저쩌고...
뭐 그렇게 하는 것은 나쁘지 않아요. 그것이 복음으로 들어오게 되면 히브리서 말씀을 경유해서
뼈를 산산조각 낸다 이렇게 해석을 하면 복음이 나오는데

율법이 613개 조항이 있는데 그중에 질문이 그런 거예요.
‘그중에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요. 큰 계명.
질문의 의도가 보이죠?
지금 이 의도라는 것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의도 말고
이들이 질문을 할 때 그들이 율법에 대한 의식을 담고 질문을 해요.

그러면 ‘율법 중에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율법의 경중이 있다라는 거예요. 크고 크지 않은 것이 있다라는 거예요.
헬라어로 보면 ‘메가’라고 이렇게 돼 있거든요. 우리 흔히 메가 이렇게 나오잖아요.
‘이런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것은
이미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들 입장에서는 여기에 대한 정답을 이미 다 갖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을 한번 볼게요. 물론 마태복음 앞부분에도 19장에서도 등장을 하는데,
누가복음 10장 25절을 보면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여기에도 율법사가 나오죠.
여기에서 율법사는 자신을 뽐내기 위한 그러한 율법사고
아니면 어떤 부분에 있어서 자신이 미진한 부분이 있는지, 영생 얻는 데에 미쳐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메시야라고 하고 선지자라고 하니까 혹시 뭔가 다른 것이 있을까? 없죠. 율법이 다니까.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율법이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 라고 질문했을 때
지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답변과 똑같은 내용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질문자가 똑같이 시험을 하는데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라는 질문을 한 거예요.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질문은 하나였어요. 율법 중에 무슨 어떤 계명이 큽니까? 라고 물었는데
단수로 물은 거예요. 그러면 하나를 답변을 해야 되는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답변은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 하죠. 크고.
그러면서 둘째는 “그와 같으니” 이렇게 얘기해요.
이 “그와 같다”라는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는데
‘그와 같다’라는 이 말씀의 의미는 앞부분에 크다라는 의미예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말씀의 의미는 똑같이 크다라는 거예요.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둘 다 큰 거예요. 똑같은 이야기예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하실 때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던질 수 있잖아요.
그러면 율법대로 살아야 되죠.

그러면 그 율법에서 경중이 있느냐?라고 하면 경중이 없어요.
갈라디아서(3:10절)에서는
율법 중에 하나라도 항상 행하지 않는 것은 율법을 범한 것이라고 말씀하거든요.
예수님께서 지금 이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변을 하셨어요.

그러면 이 답에 대해서 듣는 자들이
지금 반응은 안 나오거든요. 반응 안 나오고,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시 질문을 하는데
본문이 좀 뭔가 끊어진 것 같잖아요. 느낌이. 이게 끝나버렸으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하면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동의하는 바리새인들 같은 경우에
율법과 선지자들도 외친 것이 무엇이냐? 라고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외쳤다라는 거예요.

‘강령’이라는 것은 걸어놓는 거거든요.
교회에 보면 뭔가 거는 거 있잖아요. 학교 가면 급훈처럼.
율법, 율법과 선지자. 그 율법 속에 지혜서가 나오니까
성경 전체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거죠.
여기에 대해서 무슨 반박할 게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부분은 이런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죠.
왜 사랑합니까?
율법에 요즘 우리가 계속 신명기를 보잖아요. 14장, 15장 여러 가지 율법들이 등장을 하잖아요.
십일조도 등장을 하고 또 다른 십일조도 등장을 하고...
이러한 율법에 대해서 ‘지키라’고 하는데 그 지키는 끝에 뭐가 있느냐? 하면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를 받는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어요. 그렇잖아요.

그러면 ‘복 받는다 저주받는다’가 없다면 율법을 지킬까요? 안 지킬까요?
야 이거 참... 지킬 필요가 뭐 있어요?
‘지키는 것’과 ‘복’이 상관이 없으면 지킬 이유가 없잖아요.

이들은 율법이 그들의 탐심을 끄집어내어서
죄를 더욱더 심히 죄되게 만든다라고는 상상을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율법과 선지자가 무엇을 증거하느냐를 알지 못하는 거예요.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라고 이야기하니까
‘옳지. 그러면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면 되지 않느냐?’라는 거예요. 누가? 내가.

지금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니까 이 목사들도, 교인들도, 신학자들도
이 본문을 읽으면서 ‘그렇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게 성경 전체의 내용이다’
이렇게 성경을 해석을 해요.
맞아요? 틀려요? 맞잖아요. 지금 예수님도 그렇게 해석을 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해석은 누구도 하죠? 율법사 바리새인도 해요.
근데 바리새인과 율법사는 성령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못 받았죠.
성령 못 받아도 그렇게 해석한다는 것은 그 해석이 옳지만 악마의 해석이 돼요.

왜? 그 해석이 악마의 해석이 될까요? 간단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하면 뭘 준다고 했어요? 복을 준다 했어요.
‘복 받기 위해서 그 말씀대로 살자’라는 거예요.
이 내용과 나중에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천국 갑니다’ 이것도 무엇과 연결이 되느냐? 하면
이 구약 율법과 연결선상에 있어요.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데 그 복은 어떤 복이에요? 내가 복을 받습니까? 내가 복을 받아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잖아요.
그런 논리들이 다 유대교적 논리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자기를 증거하고 계시거든요. 자기를 증거하는 방식이 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질문할 때도 마찬가지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잖아요.
그 사두개인들이 질문할 때 예수님 자신이 항상 살아계셔서 심판주로서 행세하셨다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나의 때에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했다” 했잖아요.
그 아브라함이 누구를 기다렸습니까? 살아서 예수님을 기다렸던 거예요.

대화가 안 되죠.
사람들이 제가 이렇게 설교하면 ‘그런 해석이 어떻게 나오느냐?’ 이야기하는데
지금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잖아요. 성경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이야기를 하니까
‘성경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전하는구나’ 이렇게밖에 안 보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증거하고 있는 율법과 선지자임’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 완성이 나라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
문제는 예수님이 밥 먹여줍니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아요.
이게 진짜 이게 문제 있는 거잖아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하면 복을 받아요.
그건 신명기에 약속이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돼요?
함께 죽고 함께 사라져요. 심지어는 나조차도 어떻게 됩니까? 부정이 돼요.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잖아요.
부활을 믿었는데 그 부활의 세계가 누가 들어가는 세계라고 생각해요?
‘내가 들어가는 세계’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부활의 세계는 다 주의 이름으로 교체 작업.
구약에 다 나왔잖아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교체 작업을 했잖아요.
이삭을 이삭으로 바꿨잖아요. ‘비웃음’을 ‘기쁨의 웃음’으로 바꿨잖아요.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꿨잖아요.
근데 그들은 그 바꿔치기 하는 그 하나님의 약속 성취의 방식을
자기 구원을 위한 바꿔치기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로 말하면 ‘내가 예수 믿고 변화를 받아서 (그다음 어떻게 되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천국 간다’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5장 17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생각해야 되는 부분은 어떤 부분이냐? 하면요.
여러분이 십계명을 보게 되면 출발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렇게 들어가죠. 맞나요? 왜 갑자기 자신이 없습니까?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렇게 들어가죠.

그러면 신약에서는 왜 “주 예수를 믿어라” 이렇게 들어가요.
여러분 이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저만 궁금하나요?
왜 구약 계명에 있어서는 부정적으로 말씀을 하시고
신약에서는 “예수를 믿어라 구원을 얻는다” 이렇게 말씀합니까?
그러면 신약에는 부정적인 내용이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인가요?

빌레 그레함 목사라는 유명한 부흥사입니까? 한국에도 몇 번 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기 전에 녹화한 내용이 나오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한다라는 이야기를 해요.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요.
그 말이 틀렸습니까? 맞습니까? 다 맞죠.

맞는데 문제가 뭐예요? 그 내용 속에는 무엇이 없느냐? 하면요.
나에 대한 부정이 없어요.
여러분 유튜브 들어가서 한번 보세요.
십자가가 ‘우리를 위한 십자가’라는 거예요.
거기에도 성경에 또 나오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의 문제가 뭐냐? 하면
구약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이 말씀이
신약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십자가라는 자체가 부정적 용어잖아요. 똑같이 이야기를 해요.

그 부정하는 내용이 어디까지 치고 들어가느냐? 하면
‘너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는 없다’라는 내용까지 치고 들어가야 되는데
모든 인간이 구원받고 싶어 하지 않아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내용을 빼버리잖아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라고 하잖아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 따르면 구원 얻죠’ 이게 자기 부인 된 겁니까? 예?
‘나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면 내가 구원을 얻죠’ 이게 자기 부인이 된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서 다 이루셔서 우리에게 적용을 해버리기 때문에
지금 만일에 그런 식으로 접근을 해서
‘나는 나를 부정하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저를 구원하소서. 구원하신 것을 믿습니다.’
이거 뭐예요? 자기 부인이 아무것도 안 된 거예요.

사람들은 ‘구약은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고 신약은 예수님을 증거한다’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구약을 만만히 보잖아요.
만만히 볼 문제가 아니라 구약 전체가 신약 안으로 다 스며들어버립니다.

지금 이 신약에 나오는 이 바리새인의 이 질문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 언어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요소들이잖아요.
그런데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이 말씀을
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속에 집어넣어보라는 거예요.
집어넣어보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이들이 알아요? 몰라요? 바리새인들이 알죠.
아니까 그들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면서 살아요. 왜 그렇게 삽니까?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그 한 율법사처럼 ‘영생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사는 거예요.
영생을 얻기 위해서. 누가? 내가.
이게 종말에 나타나는 인간의 악마성입니다.
최종적으로 우상이 누구라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에요.

구약에도 이미 나오잖아요.
“너를 위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아무것도 만들지 말라” 이렇게 하니까
신약의 종말의 때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사두개인도 여기에 똑같이 들어가요. 안 만듭니다.
나를 위해 안 만들고 오로지 율법대로 제사를 드리고 율법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물론 사두개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지만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왜 그렇게 삽니까?
나를 위해서.
그것이 율법을 준 이유예요.

로마서도 그게 나오거든요. 자기가 영광받기 위해서.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자기 이름으로 자기 영광을 받기 위해 오면 사람들이 환영을 해요.
그게 무슨 방식이냐? 하면 갈라디아서에 보면 율법을 지키는 방식이죠.

사람들이 십자가를 전하는 사람을 좋아할까요?
아니면 말씀대로 착하게 사는 사람을 좋아할까요?
사람들이 원하는 바는 복음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들 세계에 놀이터가 있잖아요. 그 놀이터에서 함께 놀 사람을 원하는 거예요.

왜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율법을 주시고 선지자들을 보내셨는지 그 이유를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를 증거하셔도 깨닫지를 못하는 겁니다.
자기를 증거하시니까
‘그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안 믿었어. 우리는 믿자고. 저들은 자기를 의롭게 여겼어. 그래 우리는 죄인임을 인정하자고. 인정하고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믿자고. 믿으면 천국 간다고.’ 이 사고 방식 자체가 마태복음 4장에 나오잖아요.
‘니가 내한테 절하면 내가 세상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 그거잖아요. 거꾸로 된 거잖아요.

‘내가 니한테 절할 테니까 구원해 달라’는 거예요.
잘 보세요. 누가 나의 종입니까?

마태복음 5장으로 가서 17절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전케 하려 함이라” 율법을 성취한다라는 거예요. 율법과 선지자.
‘율법과 선지자’ 이게 성경이잖아요.
요한복음에서는 선명하게 말씀하시죠. “성경은 내게 대해서 전한다”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하기 위해 왔다.
어떻게 온전하게 하느냐? 뒤에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아까 613개라 했잖아요. 그것만 율법이 아니고 다 율법이에요.
사실은 ‘하라’ ‘하지 말라’만 율법이 아니고 모든 말씀이 율법인데

“일점일획이라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반드시 다 이루리라”
이걸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는 “성경은 내게 대해서 전한다”라고 한 거예요.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증거하는 창세기 1장 1절. 그게 요한복음 1장 1절에 나오거든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룬다”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다 지킨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게 아니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 구절 한 구절 이렇게 말씀 속에서 십자가를 증거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지금 그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산상설교가 십자가를 증거하는 말씀이에요.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 했잖아요. 성도가 십자가를 증거하잖아요.
십자가를 증거하니까 그게 빛의 모습이에요.

그러면 빛의 모습을 했으니까 ‘아휴 잘했다’ 이렇게 칭찬하시겠어요?
주님은 칭찬을 하는데 사도바울을 보면 세상의 빛으로 살았는데 자기를 뭐라 합니까?
죄인 중에 괴수라 하죠.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게.
빛인데 어떻게 죄인 중에 괴수입니까?

십자가를 자랑했으면 죄인 중에 괴수가 안 되어야 되잖아요.
바로 이 말씀 자체도 십자가를 증거하는 말씀이에요.
‘세상의 빛이니까 나는 십자가 복음을 전했으니까 나는 빛이야’ 이렇게 되어버리면 무엇이 삭제돼요?
십자가가 삭제되고 예수님의 죽으심이 멸시당해요. 조롱당하는 겁니다.
구원파들의 문제가 그거잖아요.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들의 문제.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하나님 사람 이웃 사랑인데 산상설교에서는 예수님 자신을 소개해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실 일을 소개해요.
그 이루실 일이 그 말씀 속에서 다 드러나는 겁니다.

십자가의 영이 임하게 되면 마음이 가난하게 돼요.
그러면 또 방금 논리를 따져 들어가 봅시다.
심령이 가난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음을 전할 거 아니에요.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사도 바울이 예표잖아요. 모델이잖아요. 죄인 중에 괴수예요.
이 모순되는 이 내용을 인간들은 인정을 안 해요.
왜냐하면 자기가 신이 되고 싶거든요.
그래서 말씀을 계속 연구하면서 답을 찾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정답을. ‘옳은 해석이 뭐냐?’

그 오늘 본문 옳은 해석을 아무리 해봤자 답이 안 나와요.
왜냐하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걸 예수님이 말씀하셨거든요.
그러면 바리새인들이 ‘나도 그거 알고 있다. 나도 그거 인정해.’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본문이.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아요? 아니에요.
너희들이 갖고 있는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이것과
내가 지금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는 이것이 다르다라는 거예요.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내가 십자가로 다 이룬다는 거예요.
지금 그걸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7장을 봅시다. 7장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렇게 살면 안 됩니까? 대접하면 안 됩니까?
그러니까 대부분 사람들이 나름대로 신앙의 고수라 하는 사람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는 것이 율법과 선지자라 하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요?
다 내어줘요.

저보고 어떤 분이 간을... 옛날에 제가 철없을 때 간 준다 했거든요. 간인가? 뭘 준다고 했는데
그거 내어준다고 그게 율법과 선지자의 그 말씀을 따르는 겁니까?
그런 거는요. 예수 안 믿는 사람도 다 해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다 한다니까요.

이 기독교인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산상 설교가 성경에만 있다라고 생각해요. 이 레벨이.
저들에게도 다 있어요. 저들에게도 다 있다고요.
심청이는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놨잖아요.
우리 주변에 그렇게 사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착하고 선하게 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를 못해요. 못 알아들어요.

이 바리새인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뭐라고 하겠어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아 그렇게 하죠. 그것이 율법과 선지자라면.’ 그다음 나오는 게 뭐예요? ‘복 주시죠.’

사도 바울이 이렇게 살았잖아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했잖아요. 뭘 내놨습니까?
복음을 내놨죠. 복음.

제가 어제입니까? 로마서 15장을 언급하면서
‘저들이 영적인 것으로 섬김을 받았으면 육적인 것으로 갚는 것이 마땅하다’ 이야기하죠.
그게 의무라 하잖아요.
이 말씀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하면
영적인 것을 받은 것을 헌금을 냈어요. 그게 육적으로 내놓았는데 이것이 영적이라는 거예요.
근데 이걸 반대해가지고 ‘내가 헌금을 냈으니까 영적인 걸 했다’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아요.

헌금하는 사람 한둘이 아닙니다.
뭐 수천억을 벌어도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수백억을 벌어도.
율법과 선지자는 십자가를 증거하죠.
그러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한 사람은 뭘 자랑해야 돼요?

방금 헌금 이야기를 하면
헌금을 한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뭐가 나와야 돼요? 십자가가 나와야 되죠.
그러면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가 다 뭐가 됩니까? 죄인이 되잖아요.

제가 그 앞뒤를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이 “거저 받았으니 (어제는) 거저 주라” 10장 이야기를 하면
값없이 받았으면 값없이 줘야 되죠.
뒤에는 “일한 자가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면 또 반대로
‘마땅하니까 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할까 싶어서
“값없이 받았으니까 값없이 주라”는 거예요. 이렇게 해야만 죄인으로 드러나요.

성경은 우리에게 정답을 주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정답을 찾아내려고요. 계속해서.
그래서 정답을 설교하는 목사를 좋아해요.
복음과 정답을 분간을 못하는 거예요. 우리가.
왜냐하면 옳은 이야기를 하면 그게 복음인 줄 알아요. 그게 무슨 복음입니까?
옳은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그렇지. 맞지.’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면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을 하게 되면
사도바울처럼 죄인 중에 괴수로 드러난다 이 얘기입니다.

‘아 그러면 예수님이 직접적으로 말씀을 하시지.’
직접적으로 말한다고 알아들어요?
“내 피와 내 살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라고 해도 못 알아듣잖아요.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귀를 기울이고 들었어요. 그 정도 되면 알아들어야 될 거 아닙니까?
그 정도 되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어야 안 돼요?
못 알아듣죠. 왜? 주님께서 성령을 안 주셨기 때문에.

‘그러면 성령 받으면 아네요.’ 맞죠.
근데 성령 받으면 아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성령을 자기가 받고 싶어서 받나요? 주셔야 받지.

주시게 되면 아는 거는 아는 건데 알지 못한다는 건 아니고요.
성령이 오게 되면 죄인으로 드러나요.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또 어떤 목사는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으로 드러나야 됩니다’
그 정답을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정답을.
그러면 그 듣는 사람은 뭐라 하는가? 하면 ‘나 죄인으로 드러나야 돼.’
설교를 이해를 못해요. 말씀을 이해를 못해요.
말씀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잖아요.
그러면 말씀은 말씀대로 되어지는데 그 말씀을

지난주에도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꼭 이 녹취하신 분들의 수고를 생각해서라도 한번 녹취한 걸 좀 읽어보세요.
A4 용지 27페이지, 책 100페이지짜리입니다. 편집하신 분이 한 8시간 걸려서 편집을 좀 하셨는데
잘하셨더라고요. 힘드시면 1시간 20분짜리를 한 23분으로 하셨는데, 잘하셨는데...

그 지식을 안다고 해서 구원 얻는 거 아니에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말로 받으려고 해요.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면 있으면 될 문제를 그걸 말로 받으면 ‘있어야지’ 이래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바리새인과 서기관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주셨잖아요.
계시로 주셨으면 그 계시를 주신 분이 이룹니다.
근데 자기들이 그것을 뭘로 낚아챕니까?
말로 낚아채니까 그 말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그 말은 어떤 말이라고 했습니까? 창세기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낚아채면 자기 말로 다 바꿔버리면
모든 말이 누구를 위한 말로 돼요? 나를 위한 말로 다 바꿔버린 거예요.
우리가 다 말하는 게 다 누구 변명입니까?
자기 자랑이고 자기 변명이잖아요.
심지어 설교까지도 자기 자랑이고 자기 변명일 뿐이에요. 그렇게 바꾸는 거예요. 말로.

근데 말씀은 절대 인간에게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거고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한다는 거예요.
이 ‘함께한다’는 말을 이해를 못해요. ‘함께한다’는 말은 ‘너는 병신이라’는 얘기예요.
병신이라 하면 되게 기분 나빠하는데 병신이 좋아요? 죄인이 좋아요?
죄인이라고 합시다. 지옥 갈 죄인.

‘믿는다’라는 말은 ‘나를 믿지 않고 의지한다’는 거잖아요.
왜 의지합니까? 나는 바보 쪼다기 때문에 의지하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자기가 믿는다 하고 자기가 마징가 제트가 돼버려요. 그건 믿는 게 아니에요.
자기를 신뢰하는 거죠.

로마서 3장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3장 21절 너무나 잘 아는 본문이죠.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여기 나오죠.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받은 게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 화목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예요.

그러면 ‘율법과 선지자들의 강령’이 뭐였어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었죠.
제가 지금 마태복음 설명할 때
지금 이 얘기를 했을 때 사람들은 ‘아 그건 율법 이야기지 않느냐?’ 이렇게 하는데
로마서로 넘어오면 다른 곳에도 나오지만 율법과 선지자들이 말한 내용이 뭐예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잖아요. 전체를 엑기스로 모으면.
그걸 이렇게 모아서 그게 무얼 증거하느냐? 하면 ‘율법 외에 한 의’를 증거한다는 거예요.
꿈에도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인간의 눈에는.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요.
율법과 선지자들이 ‘율법 외에 한 의’를 증거하게 되면
성령을 받은 자들이 삶을 살잖아요. 사람들이.
사람들이 삶을 살게 되면 그 삶 속에는 말씀에서 말씀하시는 내용들이 살려지잖아요.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한다든가 뭐 참는다든가 용납한다든가 회개한다든가 뭘 하는,
모든 요소들이 나올 거 아닙니까?
그러면 그 모든 요소들은 은혜로 나오는 요소이기 때문에 뭘 증거해야 돼요?
십자가를 증거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거한 율법 외에 한 의’를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고 난 뒤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 자녀로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을 살아간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논리가 맞아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문제가 뭐냐? 하면 무조건 믿으려고 해요.
율법과 선지자가 율법 외에 한 의를 전했으면, 십자가를 증거했다면
그러면 십자가의 영을 받은 자들이 율법과 선지자들이 말한 그 말씀의 세계에 살잖아요.
사도바울도 그렇고 우리도 그 세계를 살잖아요.
돈을 벌든 예배로 모이든 아니면 이웃을 돕든 기도를 하든 다양한 모습을 살잖아요.
그러면 그 모습 모든 하나하나의 분야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와야 돼요?
십자가가 나와야 되잖아요.

근데 왜 사람들이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느냐?
우리 자신도 잘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가 나온다 하면요.
맞기는 맞는 것 같기도 한데 갑자기 뭔 생각 듭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이렇게 살아도 되느냐? 복음을 아는 사람이 이렇게 살아도 되느냐?’ 이거예요.
그런 생각이 들잖아요.
‘나 그거 안 듭니다’ 감사하죠. 안 들면. 근데 안 들 수가 없어요.
우리가 육체 가운데 살기 때문에. 그거 안 들면 성경 읽을 필요가 없죠.
물론 잠시 안 들 수도 있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그 상황으로 몰아가는 거예요. 악마가 계속해서 그걸 유혹시키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합니까?
옆에서 ‘그래 복음 아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복음을 안다면 돈을 사랑 안 해야지. 성경에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지 않느냐? 복음을 전하는 목사라면 헌금 안 받고도 설교를 해야지. 사례 안 받고 설교하는 것이 진짜 목사답지 않느냐?’ 이런 이야기를 해요.

제가 목사 예를 드렸지만 사람들이요. 목사 예를 들면 자기한테 적용을 못해요. 희한해요. 구조가.
우리 자신도 그렇잖아요. ‘복음을 안다면 내가 이 아픔은 견뎌야 되지 않느냐?’
집사님 그 생각도 들잖아요. 그죠?
견디긴 뭘 견뎌요? 그냥 아프면 아프면서 십자가만 자랑하면 되는데...
‘아~ 돈 없는데... 일이 안 되는데... 내가 이것도 자유 못하나?’
우리 자유 못해요.

‘예수 믿는다면 그거 하나 극복 못하냐?’
사람들이 쉽게 그렇게 얘기하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누가 하느냐? 하면요.
복음 안 듣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들은 사람이 들은 사람에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말 하면 안 됩니까?’ 해야죠.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하면서 책망을 받고, 죄인이 되고, 상호 상호 서로 서로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사람들이 이걸 규정화시키는 거예요.
‘복음을 안다면 이렇게 살아야 돼요.’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얘기했어요.
‘목사님의 십자가는 바깥에 있다. 십자가는 안에 들어와야 된다’고 해요.
제가 그 말의 의미는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안에 들어온다’는 의미가 뭐냐고? 그 안에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데? 안에 들어오면 어떻게 돼요?
안에 들어오면 어떻게 돼요?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그런 말을 할까요?
‘복음을 안다면, 복음을 안다면 네 몸에 변화가 일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그 변화가 뭐예요? 어떤 변화입니까?
영으로 시작했다가 육으로 빠지는 거예요.
지금 구약이 왜 있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문제가 뭐냐? 하면
‘진짜 진리가 뭔가?’를 찾는 거예요.
진짜 진리가 뭔가를 찾으니까 구약을 다 찢어버리고
신약이 구약의 완성이니까 그냥 정답을 찾아내는 겁니다.

찾아내봤자 어디로 돌아간다 했습니까?
유대교로 밖에 못 돌아가요. 유대교.
바리새인들 자기 부인합니다. 그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세요.
‘감사한다’ 그러잖아요. 그 정도 다 따라와요.

못 따라오는 지점이 뭐냐? 하면 자기 부인하는 지점이에요.
그것은 주님만 하게 하십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았고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잖아요.
마태복음 5장에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케 하러 왔다.” 그러니까
이 ‘완성’이라는 이 단어를 오해를 하는 거예요. 자꾸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성도라는 거예요. 이 말이 맞아요? 틀려요? 또 맞아요.
이거 맞는 말만 하니까 이게 헷갈리는 거예요.
맞는데 말씀대로 사니까 뭐가 되죠? 죄인 중에 괴수가 돼요.

이 사도 바울의 모습이, 사도행전이 왜 그렇게 중요하고 서신서가 왜 중요하냐? 하면요.
복음대로 살았으니까 그다음 나오는 게 ‘나 구원받았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가 나와요.
죄인 중에 괴수가 나오는 거예요.

이 복음을 모르는 자, 성령의 인도하심을 못 받는 자들은 죄인 중의 괴수를 뭘로 생각하는가? 하면
맨날 이 실질적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 그것만 생각을 해요.

근데 사도바울은 십자가 안에 들어가니까 죄 아닌 것이 없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강령이라고 했잖아요. 그 강령이 십자가를 전하면
그 본문 하나하나의 모든 것들이, 사소한 것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드러나는, 예수님을 살해하는
그 현장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살아왔다라는 이야기거든요. 구약은.
그게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의 삶의 현장이 그러하다는 거잖아요.

부정적인 것이 되었든 긍정적인 것이 되었든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현장, 삶의 모습 하나하나가
십자가 피만을 자랑케 하기 위한 현장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주님이 완성하신 것이고
우리의 소유권이 주님께 빼앗겼기 때문에 그러한 증인으로서 이 땅에 살아가는 거예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이
허언이 아니라 직접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증인이 되자’라는 것을 주님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게 사도행전이 이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을 가해가지고 복음을 전하게 하는 방식이에요.
‘알아서 기자’가 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거예요. 자기가 뭔데 오게 합니까?
요즘 세대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죠.
옛날에 CCC인가 그랬잖아요.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무슨 자기가 오게 해요?
자신이 어느 자리에 올라간 거예요? 주의 자리에 올라간 거예요.

한 절만 더 보고 마치겠습니다. 로마서 8장 4절인데요.
“육신을 쫓지 않고 그 영을 쫓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의 목적이거든요. 율법의 요구.
영을 쫓는 자, 영을 쫓으니까 성령을 쫓죠. 성령께서 우리를 친히 인도하시니까
성령은 누구의 증인이 되게 하죠?
십자가의 증인이 되게 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증인.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심판도 담겨 있고 심판 속에서의 구원도 담겨 있어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만 담겨 있는 게 아니에요.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면 심판을 하잖아요. 그 심판도 함께 담겨 있는 그 자리가
예수님이 죽으신 자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동일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는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십자가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증거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의 귀에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주님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사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십자가만을 증거케 하기 위한 현장임을 감사함으로 받게 하시고
어떠한 일을 만나든지 십자가만 자랑하는 주의 백성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