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6-06 05:37
20240605 마태복음 강해 마 22;41-46 두 분의 심판주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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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4-06-06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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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5 마태복음 강해 마 22:41-46 두 분의 심판주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염려하며 구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를 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22장 41절에서 46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22:41~46)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아멘.

드디어 예수님께서 질문을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 전문가입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 자손이냐? 이렇게 질문을 했을 때
다윗의 자손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어요.

‘그리스도’라는 말은 구약의 히브리어로는 메시야라는 거든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다윗의 자손으로 고칠 다윗 왕입니다.
시온산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분이죠. 잘 알고 있습니다.
“메시야는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입니다”

이렇게 답변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지금 우리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그리스도가 누구 자손이냐? 여기에 대한 질문을 하시는 것 같지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룰 분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이라고 말씀하고 있죠.

우리들 생각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세례요한이 외치고,
예수님도 천국을 외쳤다면 마태 복음을 다 읽게 되면
‘천국은 이런 곳이야’ 이렇게 명확하게 정리가 되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없나요? 아무 생각 없습니까?

말씀이 어려운 이유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할 때
세례 요한이 기다리는 천국은 심판의 천국이에요.
누구를 심판하느냐? 라고 할 때는
이방 나라를 심판합니다. 뿐만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는 나라예요.
그러나 회개하고 율법의 정신인 이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그 정신으로 산다면
메시야가 그를 심판하지 않고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대해서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외쳤지만
세례요한이 갖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식이나
나머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갖고 있는 인식이나
일반 민중들이 갖고 있는 인식이 모양은 다른데 전체적으로는 동일한 거예요.

그 천국은 누가 들어갈 수 있느냐? 라고 하면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는 회개한 자들이 들어가는 것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입장에서는 이미 천국 백성이 되었죠.
세례요한도 그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소개했기 때문에
자신은 천국 백성임을 확신을 했죠.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왜 목사님은 이야기할 때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천국을 이야기를 하십니까?’라고
이렇게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여러분은 반박이 안 됩니까?
모든 인간이 천국을 꿈꾸기 때문에 그래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은 천국을 소망해요. 이방인들도 똑같습니다.
어느 민족 치고 천국이 없는 그러한 신앙이 없는 민족은 없어요.
천국의 모양만 다를 뿐이에요.

‘어떤 사람은 죽으면 무슨 천국이 있냐? 이 세상이 천국이지.’ 보세요. 방금 천국이라 했잖아요.
그 사람들은 교회에서 말하는 걸 주워 듣든지 불교에서 말하는 걸 주워 들어가지고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다’
죽어서 가든 살아서 가든 난 지지난 시간에 봤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의 자리에, 심판주의 자리에 누가 올라가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올라간다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심판주로서 심판주 앞에 살았든지 죽었든지
모두가 다 심판받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죽어도 죽는 게 아닙니다.
‘나 살았어. 뭐 이렇게 사는 게 천국이지.’ 그게 그가 생각하는 천국이에요.
그러니 이런 것과 똑같은 거예요.
로마서에 나오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어떻게 합니까?
나무로, 돌로, 사람으로, 별로, 달로, 해로 신이라 부르잖아요. 마지막에는 누가 신입니까?
‘내가 신이다’ 나오잖아요. 사람이.

이런 신의 모양이 다양한 이유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그 욕망,
그 욕망의 마지막 욕망이 무엇이냐? 하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이지만
신약에는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등장을 했기 때문에
이 욕망의 자리가 바뀌어서 나도 예수처럼 되고 싶은 그 욕망이 작동을 해요.
그게 우상숭배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작은 예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 모습이 우상숭배예요.
‘내가 말씀대로 살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다 안다’
하면서 ‘내가 바로 진짜 하나님의 사자요’ ㅎㅎ 사도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라 했는데...
그런 말을 사람들이 하고도 남아요.

왜냐하면 그들은 지식이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수준을 뛰어넘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이렇게 물으신다면 우리가 적어도 니고데모의 수준을 뛰어넘잖아요. 맞죠?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그들의 실패가 나와 있으니까. 제자들의 수준을 뛰어넘잖아요.

그러면 사도 바울의 신앙을 다 간파를 해버리면
우리는 그 위에 있을 수 있다라는 거예요.  이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은.
성경은, ‘계시’라는 것은 ‘이 모든 말씀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걸 증거하는데
그들의 눈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지식, 올바른 지식
그래서 마지막에 사도바울을 통해서 증거된
그 복음의 지식을 자기가 다 장악을 해서 주의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겁니다.
그게 욕망이거든요.

철학자들이 ‘타인을 욕망한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왜 타인을 욕망하는가? 하면
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옆에 신들이 존재하거든요. 하나님처럼 된 신들이.
그들을 욕망하는데 마지막 욕망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욕망한 자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유대인의 남은 자들입니다.
그 남은 자들 이후에 복음이 전파되면 누구를 욕망하느냐? 하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욕망을 해요.
그 자리에 오르고 싶다라고 나댄 자가 마귀잖아요. 제자들이고. 예수님을 이용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
동행을 하시겠다라는 말씀의 의미는, 그 취지는
너희들은, 나의 백성은 죽을 때까지 양자라는 이야기예요.
그걸 다르게 표현하면 죄인이라는 겁니다.

주님이 피를 흘려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님 옆에 달린 두 강도가 나오잖아요. 제가 글로도 썼지만. 그 모습이 하나님 나라의 전형이에요.
십자가의 달리셨을 때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못 얻는다’라는 게 성경의 진리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에서는 회개하는 강도가 나오지 않는 겁니다.
누가 복음에서만 나와요.
한쪽은 구원을 받고 한쪽은 지옥 가는 이 상황이 천국의 비밀이에요.

‘천국이다’라고 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 하면
‘너는 천국 가고 너는 지옥 가고’ 그 주님이 그렇게 하심을 내가 믿어버려요.
그런데 ‘천국의 비밀’이 되면 우리가 주일날 로마서를 보게 되잖아요.
이 자리바꿈이 일어난다라는 겁니다.

왜 비밀이라고, 복음의 비밀이라고, 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거든요.
나중에도 살펴보겠지만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가 복음이 돼요.

‘에이 목사님 주와 그리스도가 복음이 아닙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잖아요.
근데 그 주와 그리스도는 십자가 없는 주는 없어요.
흔히 신학교에서 삼위일체를 이야기하면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주가 맞지 않느냐?’
성경에는 그런 걸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에이 요한복음 1장에 나오잖아요?’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은, 태초에 계신 말씀은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아무리 말해도 못 알아들어요.
요한복음 5장으로 넘어가면 “아들을 영화롭게 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니까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니까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본 자라”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자기도 모세처럼 아버지를 한번 보고 싶다는 거예요. 보면 다 죽어요.

아들을 본 자가 아버지를 봤어요.
예수님을 봤으니까 다 죽어야 되잖아요. 예수님이 등장했다는 것은 다 죽은 자라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세상을 어둠이라 하는 겁니다.
살아있는 자가 아무도 없어요.

그런 가운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 빌라도가 나름대로 저주 안 받으려고
예수님을 빼내려고 애를 썼잖아요. 자기 아내 때문에.
‘꿈자리가 너무 시끄러워 제발 저 사람 살려줘’ 그렇게 하니까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명패를 썼죠. “유대인의 왕”이라고.
그러니까 옆에 있는 대제사장이나 이런 사람들이 제발 ‘자칭’이라도 쓰든지.

근데 본디오 빌라도가 뭐라 합니까?
“내가 쓸 것을 썼다” 하거든요.
그 전후 문맥을 보면 나름대로 저주받지 않기 위해서 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그게 조롱이거든요.

근데 진짜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분이 유대인의 왕이요 심판주이심을
양쪽 강도를 통해서 어디에서 보여줍니까?
죽어서 부활하셔서 보여줍니까? 십자가에서 죽는 상황에서 보여줍니까?
이거 굉장히 중요해요.

왜냐하면 성령을 받은 이 사도들이나 집사님들이 복음을 전할 때 이 땅에서 전하잖아요.
이 땅에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전하잖아요. 그러면 주님이 동행을 하잖아요.
근데 그 주님의 동행하는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고난받는 어린 양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를 전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주가 되시고 왕이 되심을 그 자리에서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사망은 내 속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들 가운데서 일어난다라고.
예수의 생명이 드러난다라는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어떻게 복음을 이해하느냐? 하면
‘부활한 예수님이 주님이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말이 맞아요? 틀려요? 맞아요.

부활한 예수님이 주님 우편에 올리웠으니까 주님 맞잖아요.
그런데 그 주의 모습이 이 땅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느냐? 라고 할 때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라고 선언되어지는
그 나무에 달려 죽으시는 그분이 주가, 심판주로서
천국 갈 자와 지옥 갈 자를 친히 확정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앞서 말씀드렸듯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에서는 다 지옥 가야 되는데
어떻게 구원을 얻었습니까? 라고 할 때 방금 제가 표현을 했을 때 그 표현을 바꿔야 돼요.
모두가 다 심판받는데, 구원받을 자 없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그 죽음 속에 함께 죽임을 당한 자.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죠. 그 대신 죽으심,
예수님의 화목 제물 되심의 혜택을 입은 자가 구원을 얻는 거예요.
그게 한 편에 달린 강도의 신앙 고백입니다.

‘에이 목사님 어떻게 강도가 그런 고백을 했습니까?’
그냥 나쁜 놈은 우리는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거고 이 사람은 옳다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깊이 있는 신앙을 고백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장정 5천 명을 먹이실 때
그 먹은 인간들은 뭘 생각했어요?
‘이야 진짜 메시야구나. 우리에게 정말 이제 수고하지 않고 먹을 것을 주시는 메시야,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셨구나. 이분이 우리의 왕이라면 일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꿈을 꿨습니다.

근데 예수님은 그 떡을 먹이신 것을 무엇으로 봅니까? 표적으로 보죠.
표적이 둘로 갈라집니다.
“세메이온”이라는 이 단어가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는 입장에 있는 자들도 표적이고요.
예수님 자신도 표적이 돼요.

그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 5천 명을 먹이신 것은
메시야된 표적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메시야된 표적은 표적인데
예수님의 살과 피를 흘려서 영생을 주는 표적이라고 말씀하는 거예요.
헬라어 백날 연구해도, ‘세메이온’ 연구해도 이 내용이 안 나와요.

그 내용처럼 이 강도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중에 사도행전에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라는 거예요.
이 말씀도 진짜 어려워요.

왜냐하면 여기에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라고
할 때 이 하나님은,
너희들이 누굽니까? 유대인들이거든요. 사도행전 2장에서는.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이 달라요.

우리는 그냥 그 본문을 읽을 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이렇게 이해하거든요.
저만 그렇게 이해합니까? 제가 알기로는 대부분 그렇게 이해를 해요.

이 하나님이 요한복음, 사복음서를 거치면서 지금 마태복음 여기에도 똑같습니다.
‘주’라는 분이 두 분이 나오는데
이 ‘주’가 주에 의해서 주님이 증거가 되면
유대인들이 주로 믿었던 그 ‘주’가 우상으로 바뀌어버립니다.
지금 예수님의 질문이 그 질문을 내포하고 있어요.
못 알아들어요. 무슨 말인지.

우리는 ‘성령 받은 자들이 제대로 설명을 했으니까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잖아요.
예수님이 제대로 설명 안 해서 못 알아들었습니까? 예?
예수님이 제대로 설명 안 해서 못 알아들었습니까?
오늘 제가 어떤 글을 올리니까 페이스북에 제가 방금 이런 표현을 했거든요.
‘예수님이 말씀을 해도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이 사람이 머리가 되게 좋은 모양이에요.

그걸 비꼬아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알아달라 했는데 인간들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니 성경을 볼 때 정답을 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저들을 죄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라는 것은 로마서에 나오거든요.
“깊도다 그 하나님께서 하신 그 일에 대해서 누가 알겠느냐 그 비밀을”
이렇게 표현하거든요. 사도바울이.
아무도 알지 못해요. 주님이 하시는 일은.

지금 로마서 9장을 보니까 어때요?
인간들은 알았다고 하는데 지금 말씀을 들어가 보니까 어때요? 몰라요.
지금 너희들은 모른다라는 이야기를 로마서를 통해서 계속하고 있거든요.

예수님도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셨어요. “천국의 비밀”이라 했잖아요. 천국의 비밀.
성도는 천국의 비밀을 알았죠.
그 ‘알았다’라는 의미가 어떤 의미냐? 하면 ‘천국은 비밀이라’는 걸 알았다라는 거예요.

사람들은 천국의 비밀을 알았으니까 이제 비밀은 있다? 없다?
없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없다고 생각하니까 성령을 무시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 무엇을 가르칠까요?
올바른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는 거예요.

천국은 끝까지 비밀이에요. 왜? 그 소유권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천국은 예수님이잖아요. 천국은 십자가잖아요.
십자가는 비밀이에요. 그것은 우리가 소유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에 내가 알지 않느냐?’ 이 말도 안 되는...
자기 언어가 무슨 말인지도 몰라요.

예수님이 동행한 것을 내 마음에 들어온다라고 할 때
이 동행을 딱 분리시키면
실제로 사람 둘이가, 에녹이 있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을 했잖아요.
제자들이 동행을 했잖아요. 예수님과.

그 예수님이 동행을 하게 되면 제자들은 어떤 모습을 보였습니까?
악마적인 모습을 보인 거예요.
그 모습이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고 성도들의 모습이에요.
그 성도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요. 십자가밖에 자랑 안 해요.
독특해요. 이 구조는.

‘목사님 바울이 복음도 전하고 주를 위해 많은 고난을 받지 않았습니까?’
받았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죄인 중의 괴수라 했어요. 제 말이 틀렸어요?
십자가에서 모든 게 이루어지면 모든 인간의 행위들은 죄가 돼요.

다시 설명할게요. 모든 인간의 행위들이에요.
여기에는 살인도 들어가고 간음도 들어가고 술 취함도 들어가고요. 그것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복음 전하는 것도 들어가요. 성경을 아는 지식도 들어가고요.
들어가지 않는 요소가 없어요.

‘성령을 힘입어서 한 것조차도 그러면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나는 마귀 짓이 됩니까?’

사도바울이 그 고백을 했잖아요.
제가 오늘도 페이스북에 요즘 글을 엄청 올리는데 거기에 그런 얘기를 했어요.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자가 누구예요? 사도 바울이에요.
사도 바울이 왜 의인의 편에 들어갈 수 있느냐? 라고 하면
그 일을 그들은 뭐라 합니까? 마태복음 7장에서는? ‘우리가 했다’라고 하는데
사도바울은 뭐라 합니까?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죠.

그걸 마태복음 우리 나중에 보겠지만 25장에 가면
양의 편에 선 자들, 의인들이 ‘내가 언제 했습니까?’
나는 뭐밖에 없다라는 거예요? ‘제가 한 것은 지은 죄밖에 없고 그냥 은혜로 살았을 뿐입니다.’

은혜로 산다라는 것은 그 은혜의 출처가 십자가잖아요.
그러면 십자가의 피능력으로 살았다는 것은 그가 한 모든 행위들은 죄라는 이야기예요.

예수님께서 지금 질문을 하셨는데
유대인들이 지금 메시야 왕국을 기다리거든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그리스도가 오게 되면 제자들이 꿈꾸었던 그 세계가 펼쳐질 거라 생각하는 거예요.

여기에서 특이 사항을 우리가 봐야 되는 게 뭐냐? 하면
제자들이 기다렸던 천국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기다리던 천국이 같아요? 달라요? 달라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요. 교인들이 10명이 모이면 ‘천국이 어떨 것이냐?’라고 물어보세요.
성경을 아는, 신약 복음을 안다는 사람한테 ‘천국이 어떨 것이냐?’ 한번 물어보라고요.
다 달라요.

‘아니 나는 아는데 천국은 정말 말씀대로 살아가는 세상이야.’
그러한 일은 바리새인들이 다 했어요.
하나가 안 돼요.
말씀대로 살아가지만 바리새인들이 각자가 꿈꾸는,
제자들이 나오잖아요. 천국 가는 것으로 끝납니까? 안 끝나요.
왜냐하면 그러한 천국은 자기가 소망하는 천국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종말 때에 천국에 대한 이 생각들이 다 다르다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십자가 사건이 일어날 때 왜 천국의 개념이 다 다르냐? 라고 하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요즘 신명기를 보잖아요. 그럼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약속의 땅이잖아요. 그러면 모두가 다 동일한 기업을 받을 건데
전쟁 잘한 사람이 많이 얻고 적게 얻는 땅이 아니에요.
이미 들어가기 전에 땅을 다 나눠버리잖아요. (왜 모르는 듯이 그러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복을 준다고 하면 동일한 복을 내리실 건데
들어가기도 전에 “가난한 자가 항상 있을 것이라” 이런 말씀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만일에 약속의 땅을 앞두고,
오늘날도 똑같아요. 천국을 앞두고 있다 치면
천국은 어떤 곳이라 상상합니까? 어떤 곳이라 상상해요?

상상을 하는 순간 그 천국은 지옥입니다.
그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꿈꾸는 언약의 성취였어요.
그래서 최종적으로 다윗 언약의 완성을 기다리는 이들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된다면 시온산에, 이제 거기에 성전이 세워질 것이고.
지금 그 예언이거든요. 시편 110편 예언이.
거기에 성전이 세워지고. 뭐 에스겔 성전이 세워지겠죠.
거기에 왕이 되셔서 온 세계를 다스린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공통적이에요.

그거는 공통적이에요. 근데 각자가
그러면 ‘나는 어디에 위치해 있습니까?’ 라는 문제가 발생해요.
우리는 믿음을 이야기할 때 그냥 믿습니다라고 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데
근데 우리 자신을 보게 되면 우리의 욕망들이 다 작동을 해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도 지금 천국을 기다리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그 ‘천국’이라는 전체적인 아웃라인은 동일한데 (그것도 또 다 다르지만) 동일한데
거기에 세부 항목으로 들어가면
예를 들어 예수님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 살 길일 힘들었어요.
그러면 어떤 천국을 원하겠어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 그러면요. 그들은 어떻게 해석해요?
만나를 생각할 거 아닙니까?

근데 예수님은 진짜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말씀하신 거예요.
그러면 그런 천국 가고 싶을까요? 안 가고 싶을까요?
안 가고 싶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말씀은 진짜 어렵다. 이걸 누가 깨닫느냐?”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떠나가 버리잖아요.

이와 달리 사두개인들은 메시야 왕국에 대한 기대가 있는데
기다릴까요? 안 기다릴까요? 그 당시에.
성전이 어마어마하잖아요. 규모가. 그러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데
새롭게 만들어질 메시야 왕국을 기다릴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안 기다리죠.

이와 달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기다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천국에서 높은 자리 차지할까요? 낮은 자리를 차지할까요?
당연히 높은 자리 차지하는 거예요. 왜?
그들이 아는 천국의 모델은 딱 하나예요. 다윗 왕국이에요.

더 중요한 것은 제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글을 지금 4편을 올렸잖아요.
유튜브 거기 커뮤니티에도 올려놓고 홈페이지에도 올려놨는데.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 자체가, 모델 자체가 그것밖에 없어요.

우리도 성경을 보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델’을 뭘로 삼을 거냐? 이 얘기예요.
뭘로 삼을 겁니까?
지금 성경에는 분명히 “천국이 왔다”고 하고, 천국을 소개하고 있고,
이미 예수님을 믿는 자는 천국 백성이라 하고, 천국에 대한 비유가 쫙 깔렸는데
왜? 천국에 대한 이 이미지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다 다르냐? 라는 거예요.
다 다른 이유는 간단합니다.
모두가 다 유대교기 때문에 그래요. 교인들마다 천국을 이야기해보라 그러세요.

성경에서는 천국이 어떤 천국을 이야기합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신 천국이거든요.
그러면 이 골고다의 현장,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 현장이 천국의 모습이에요.
‘아니 그게 무슨 천국입니까?’
그러니까 ‘그게 무슨 천국입니까?’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가 생각하는 천국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곳이 천국이 되면,
자 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죠? 그러면 강도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이 중에 구원받는 강도들이 한쪽은 지옥 가는 자들이고 한쪽은 천국 가는 자들이라 했을 때
천국 가는 자들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자기의 꿈이 따로 있으면 하나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그러면 천국 가는 모든 자들이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면 하나가 돼요.
그게 천국이에요.

물론 그 천국에는 반드시 한쪽 편에 뭐가 있어야 되죠?
지옥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왜?
천국이라는 곳은 천국의 비유가 계속해서 쪼개는 비유이기 때문에
십자가 지신 분의 심판주 되심을 뽐내는 게 천국이에요.

그런데 구약에서는 이 약속의 땅이
‘약속의 땅’이라는 그 곳은 철저하게 자기 백성만이 거하는 곳이잖아요.
하나님이 주가 되시는 곳이고

그 주가 되는 방식은 하나님이 율법대로 심판할 자를 심판하고
율법대로 사는 자를 축복함으로 하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는 곳이 약속의 땅이었고 광야였어요.
그것이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천국이 만들어지게 되면
그 천국은 어린 양의 피를 자랑하는 것은 성도들이고요.
그 피 능력이 작동하는 곳은 성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이 천국은 독특하게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천국이는 거예요.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알아야 돼요.
그것은 이들이 지금 다윗의 자손으로 올 주를
메시야를 기다리는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거라고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모습이 어떠해야 돼요?

어떤 사람은 ‘성경을 하나님 나라로 봐야 된다’ 그러는데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어떠해야 되느냐? 라는 거예요.
1번. 죄인들이 가득 모여 있고, 용서받은 죄인들이 가득 모여 있고,
다른 한편에는 용서받지 못한 죄인들이 모여 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다.
이걸 하나님 나라로 인정할 인간이 있겠어요?

십자가의 그 현장을 확산시키면 하나님 나라거든요.
지옥 갈 자들이 영원히 지옥 가는 거잖아요.
죽어서 영원한 게 아니라 이미 영원히 지옥 간 거예요.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요.
지금 이 바리새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그 천국을 소망하는 거예요.
천국이 내가 부정되고 나라는 존재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면 천국 가고 싶습니까?
안 가고 싶거든요.

방금 천국은 뭔가 이러이러하고 저런 모양을 띠고 뭔가 차등이 있고 차별이 있고
내가 바라는 걸 주는 그런 천국이라면 우리가 가고 싶지만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예수님이 천국이잖아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생명까지도 미워하라”는 거예요.
그 생명까지 미워하라는 말은 인간에게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불가능해요.
불가능하기 때문에 마태복음 7장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가 생명을 바치면서까지도 주를 위하여 선지자 노릇 했기 때문에
심판주 앞에 당당하게 한소리를 하는 자가 지옥 갈 자라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사도바울처럼 주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다 했는데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은혜가 임했다는 것은 너는 지옥 가도 마땅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으로 조금 들어가 봅시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예수님께서 정말 어려운 말씀을 해버립니다.

“성령에 감동하여”라는 말씀을 하는 순간 어떤 사태가 벌어지느냐? 하면
시편을 해석하는 모든 내용들, 구약 전체를
십자가의 영으로 봐야 된다라는 이야기예요.

‘아니 구약에서 언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지금 우리는 시간을 이렇게 뒤돌아가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앞서서 얘기했잖아요.
항상 하나님 앞에서는 뭐라고요? 산 자.
인간들은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인간들이 말씀을 갖고 정리를 하고 요약하려고 하는데
정리 요약이 안 돼요.

그러면 너희들이 말 잘했다. 그런데 다윗의 후손이라면, 자손이라면
어떻게 그리스도를 ‘주’라 할 수 있느냐? 말이 안 되잖아요.
자기 후손을 어떻게 ‘주’라 할 수 있느냐?
근데 우리 여기에서 깜짝 놀랄 일은 바리새인들이 시편 110편을 안 봤을까요?
시편 110편 한번 봅시다. 시간이 되면 마칠게요. 다음 주가 있으면 또 하면 되니까.

시11:1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에서는 ‘여호와’를 ‘주’로 바꿨죠. 이 바꾼 것은 의미가 있어요.
의미가 있어요. 단순히 바꾸는 문제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이 여호와가 우상으로 날아가 버리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그 주의 아버지가 진짜 주가 돼요.

그래서 구약을 볼 때 여호와를 보게 되면
‘여호와를 믿어야 됩니다. 여호와께서 약속을 하셨으니까 꼭 이룰 겁니다.’ 그렇게 믿는 자가
이슬람이고 유대교예요.
십자가 지신 주님이 증거되지 않으면 다 우상숭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할 때도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고 하거든요.
그 하나님 나라가 마태복음 사복음서에서 교체 작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눈치를 채야 되잖아요.

근데 사람들이 거기에 관심이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 나라의 ‘주’가 바뀐다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걸 다 읽었거든요.
읽었는데 왜 의문을 못 갖습니까?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면 어떻게 그 자손을 향해서 주라 할 수 있느냐? 라는 이야기예요.

우리들은 이걸 보니까 그걸 알죠.
근데 인간이라는 것은요. 까막눈이기 때문에 자기들의 프레임에 갇히기 시작하면요.
거기에 미쳐버립니다. 마치 사두개인들이 자기들이 믿고 싶은 모세 5경에
자기들이 취할 것만 취하잖아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버거운 게 뭐냐? 하면
내가 아는 것, 이해하는 말씀만 들을 때는 버겁지 않아요.
그런데 지금 말씀을 꼼꼼히 따져 들어가 보니까 버거워요. 보기 싫어요. 꼴도 보기 싫어요.
그래서 지금 오늘날 교인들의 신학이나 신앙을 보게 되면요.
자기 신앙의 틀에 갇혀서 아무리 성경을 이야기해도 이해를 못해요.
방금 제가 얘기했던 ‘하나님 나라’가 바뀐다는 것.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에 의해서, ‘여호와’를 주로 믿는 자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을 당한 그분이 하나님 나라의 주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약속을 따라 기다리던 그 하나님 나라는 엉터리였고,
십자가의 피만을 자랑하는 그 세계가 하나님 나라임을.
그분이 주거든요. 주로서 통치를 한다는 겁니다.

주로서 통치를 하게 되면 이 통치 개념이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통치와 달라요.
예수님이 십자가로 승리했잖아요.
승리의 주가, 성령이 함께 자기 백성들과 동행을 하니까 어떤 사태가 일어납니까?
주님이라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다면 뭘 하면 됩니까? 뭐 어떻게 해야 돼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는데 병 고치고 죽은 자 살리고 그래 그 정도는 돼.
근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 동행하며 왕들을 회개시켜야 되잖아요.

근데 회개시키기는커녕 얻어터지다가 죽어요.
그게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가진 주님의 능력이 임한 성도들의 현실이에요.
그걸 사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고스란히 보여준 겁니다.

이 바리새인들이 시편을 읽으면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이 말씀을 모를까요? 당연히 알죠.
왜냐하면 이들은 이걸 읽으면서 뭐만 생각하는가? 하면
다니엘이 예언한 그 나라, 뜨인 돌에 의해서 박살나는 나라,
그 박살 내는 그 나라가 자기들도 박살낸다라고 꿈에도 생각 못해요.

그래서 제가 쓴 글에 이야기했잖아요.
에스더를 너무 좋아한다고요. 에스더에서
모르드개가 위치하는 그 2인자의 자리와 왕을 싹 바꿔버리면 하나님 나라가 돼요.

원수. “네 원수로” 이 너가 누구냐? 하면
주님의 원수거든요. 그러면 메시야의 원수예요.

그 메시야의 원수를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까지”라고 하니까
또 이걸 고린도전서 15장에 가가지고
‘그때까지 끝나면 하나님께 돌릴 거다.’ 괴상망칙한 이야기를 하는데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왜 말귀를 못 알아듣냐? 하면
만일에 고린도전서 15장 24절에 나오는 “아버지께 바친다” 할 때
그 아버지가 십자가 지신 주님의 아버지가 아니게 돼요.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신 그 모든 일이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고린도전서 15장 이야기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는데 아직 우리들에게 보이는 현실은 어떻습니까?
미완료처럼 보이죠. 그것이 끝낼 때까지라는 이야기예요.

진짜 주의 모습은 언제 나타납니까?
이미 십자가로 나타났는데
그 십자가로 나타난 그 모습이 사실은 진짜예요. 이 땅에서는.
그게 진짜인데
그 모습이 최종적으로 주님이 재림하실 때 드러난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있잖아요. 최종적으로 나타날 때.
거기에 관심 있는 사람은 우상숭배자라고 해요.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는 모습으로서 성도는 주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겁니다.
여기에 보면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이걸 바리새인들이 해석할 때는 원수가 누구 원수냐? 하면
다윗. 다윗의... 이것도 필요 없습니다. 이 해석이 안 돼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 메시야로 오게 되면 그 메시야의 그 원수들을 다 발판으로 삼을 것이고.
그가 왕이 되면
제자들이 꿈꿨잖아요. 주의 나라에 임하실 때
저를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그렇게 해석을 한 겁니다.

그렇게 해석을 하니까 예수님이
‘아니 어떻게 후손을 주라 하겠느냐?’ 라는
거기에 대한 말씀에 대해서 그들이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로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기겁을 하죠. 말씀에 대한 전문가였는데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답을 못해요.
그러면 우리는 또 교만하게 뭐라고 하는가? 하면
‘봐봐. 바리새인 수준 이것밖에 안 되지.’

이것밖에 안 되지라는 말을 할 때는요.
이들의 한계가 예수님 앞에서 드러났다는 것을 기억해야 돼요.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오셨잖아요. 그럼 예수님은 영이시잖아요.
진짜 영이신 분이 질문을 하셨을 때 그들의 어리석음과 한계가 드러난 거예요.
어리석음과 한계가 드러난다고 절대로 예수님께로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본문을 볼 때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의 수준을 얕잡아 봐요.
제가 이걸 왜 자꾸 강조 하느냐? 하면 니고데모를 얕잡아 보잖아요.
여러분들이 베드로를 얕잡아 보지 않습니까? 사복음에서 나오는 베드로를.
‘그것도 못 알아들어? 그래놓고 뭐? 주님 십자가 지면 안 된다고?’
‘이 마귀라고 사탄아 그런 소리 들어야 되겠어? 나는 그러지 않겠어.’
나는 그러지 않겠다라고 하는 그 모습이 사탄이거든요.
성경을 봐도 깨닫지를 못해요.

성경 말씀은 십자가를 증거하는 거지 인간 구원을 증거하는 게 아니고
그리고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것은 너희들에게 어떠한 가능성도 부정한다는 얘기입니다.
제자들이 옆에 있었을 거 아닙니까?

“한 말도 못하고 가더라”
성경을 사사로이 푼 자들이죠. 사실은.
신약에도 똑같이 나옵니다. 성경을 사사로이 풀다가 멸망한 자들이 있다라는 거예요.

그 사사로이 푼다는 의미가 어떤 의미냐? 하면
‘사사롭다, 아니다’의 그 기준은 십자가예요.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 안에 있는 자가 말씀을 풀게 되면 죄인 중에 괴수로 드러나요.

그런데 사사로이 푸는 자의 특징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성향을 띠게 됩니다.
성경을 그렇게 풀면 갈라디아서도 나오죠. 골로새서도 나오고. 어떻게 푸는 겁니까?
자기 배를 위해서. 이것밖에 없습니다.
‘나를 섬겨라’ 이것밖에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요.
‘성경에는 기적도 있고 방언도 있고 뭐 별별 것이 다 있으니까 우리 이걸 믿어야 됩니다.
나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소리를 해대는 모든 자들은 무얼 목적으로 하느냐? 하면요.
나를 섬겨라는 거예요.

십자가의 영이 임했으면 방언도 헛거라는 거예요.
제가 방언에 대한 글도 올렸거든요. 신구약 전체가 방언이잖아요.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율법은 율법이고
선지자는 선지자의 외침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지금 못 알아들었습니까?
율법과 선지자가 십자가를 전했잖아요.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서 십자가를 봅니까? 왜 못 봅니까?
방언이기 때문에 그래요.

왜 방언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 나라는, 아들의 나라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모든 게 방언이에요.
기껏 룰루랄라 하면서 중국말 리아워 한다고 그게 방언입니까?
그건 방언 맞아요. 사도행전에.

그러면 왜 그런 방언을 언급했느냐? 라고 하면
방언을 이야기하고 통역을 이야기하고
천사의 말도 나와야 되는데...
천사의 말은요. 성경에 보면 없어요. 없다는 게 있긴 있는데
아브라함이 다 알아들었어요. 요셉도 알아듣고 마리아도 다 알아들었다니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잖아요.
하늘나라 말을 뭘로 했습니까? 당시에 아람어나 코이네 헬라어로 했어요. 처음 아셨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있으니까 하나님 나라 언어가 따로 있을 것이라’ 요 사기꾼들.
복음이 방언이에요.

왜 그러면 그러한 실제적인 다른 나라 말을 하게 하셨느냐?
그게 복음을 소개하는 방식이에요.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복음에 관심이 없고 어디에 관심이 있습니까?
은사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그 은사는 반드시 십자가를 증거하게 돼 있죠.

방언을 받은 자는 십자가를 증거하기 때문에 고린도전서에서 방언 받은 자를 쳐버리는 거예요.
아무튼 뭐 너무 모든 게 뒤죽박죽이라서...

그래서 지금 이 말씀도,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도 지금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그런 거죠.
‘그 정도도 못 알아보느냐?’
못 알아보죠. 성령을 받지 않으면 십자가가 밝히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 본문을 알고, 시편 110편을 알고 그러면서 뭐라고 얘기하는가? 하면
‘그렇지 예수님이 주지. 십자가 지신 분이 주지. 주님을 나는 믿습니다.’
그래놓고 그다음 하는 말이 뭔가? 하면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래 가요.
여러분 그런 사람 많이 보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삼위일체를 배웠어요. 그걸 막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누구냐? 하면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왕은요. 구약에는 심판주, 왕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게 되면 주가 두 분이 돼요.
주가 두 분이 되면서 어떤 사태가 일어나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믿었던 주가 부정됩니다.

예수님의 아버지만이 유일한 주가 돼요.
그러면 그 주는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뿐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의 지식으로 아무리 연구해도 십자가가 밝히 보이지 않고
잘못 해석한 것이 보이고, 다시 잘못을 바꾸어서 올바르게 해석하려고 하는 그러한 죄성을
저희들이 갖고 있습니다.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사 말씀을 보는 가운데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를 보게 하시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음을 확인하는 자리로 저희들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