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6-26 21:47
20240626 마태복음 강해 마 23:8-13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7  
https://youtu.be/RdTFL_Zc3jE?si=Vs1fvmOopxWsyMJp

관리자 24-06-27 16:04
답변 삭제  
20240626 마태복음 강해 마 23:8-13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기도드리겠습니다.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라 말씀하셨고, 어떤 이들은 믿음에서 파선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사 하루하루를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를 알아가는 인생이 되게 도와주시고,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감사함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저희들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23장 8절에서 13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23:8~13)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아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라는 것은 종말이라는 겁니다. 세상 끝났다라는 겁니다.
우리들이 보기에는 ‘그게 무슨 종말이냐?’
아직 살 날도 많이 남았고 몸도 아프고 가정의 문제도 있고 직장 문제도 있고 자녀 문제도 있는
이 상황인데 ‘종말이야 뭐 가봐야 알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오셔봐야 알 거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해요.

왜 그러냐? 하면 ‘말씀’을 통하여서 종말을 말씀하셨거든요.
그런데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들은 이 종말을 마지막 때를 ‘내가 느끼는 걸’로 생각을 해요.
내가 느끼는 걸로.

마태복음 23장에 나오는 이 종말 때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이 모습은
박제를 해놓았다고 보시면 돼요.
사람들은 이 본문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갖느냐? 하면
‘그래 예수님에 의해서 외식하는 자라고 지적을 받은 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문제가 많아.’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을 좋아하고 문안받는 것을 좋아하더라.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사람들은 이 말씀 자체를 십자가 사건을 빼버리고 봐버려요.
십자가 사건을 빼버리고 보면 이 말씀은 구약의 율법을 주는 방식으로 볼 수밖에 없죠.
‘그래 이제 우리가 성령을 받았으면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아야 돼.’
랍비라는 뜻은 극존칭이죠. ‘내가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분, 나의 위대한 분’
이게 랍비라는 뜻이거든요.
선생 중에 선생입니다. 성경 전문가인데 전문가 중에 전문가, 고수 중의 고수라는 거죠.

그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그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마음이 이렇게 높아졌기 때문에 자기들이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아야지.’

지금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잖아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왜 따릅니까?
성경을 볼 때 전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 됩니다.
파편적으로 보게 되면 그야말로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장님이 코끼리 만지면서 자기 평가하는, 자기 판단하는 그 수준에 머물러요.

지금 마태복음 23장의 이 내용은
창세기부터 전체 율법과 선지자를 거쳐와서 말라기를 지나와서
다니엘이 예언한 70이레의 완성을 다 담고 있는 본문으로 봐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골라 먹는 떡’이 돼요.
내가 내 형편에 맞게 이걸 골라 먹는 거예요. 골라 묻는 방식이 뭐냐? 하면
‘천국에 가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되지 않아야 된다.
그래서 우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않아야 된다.’

1차적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거든요.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돼 있습니다. 근데 목숨 안 버립니다.
‘이 땅에서의 천국’은 어떤 천국이냐? 하면요.
쉽게 말하면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권세 부리는 천국입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이 그걸 꿈꾸고 있거든요.
제자들이 그런 마음을 갖고 따라 나서는 거예요.

그러면 랍삐라 칭함을 받지 말라. 선생이라, 지도자라 이렇게 칭함을 받지 말라 이렇게 얘기를 할 때
제자들은 어떻게 듣겠습니까? 일차적으로 제자들이 어떻게 듣겠어요?
아마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대해서 불만이 있는 세력들이 있잖아요.
이런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박수를 쳤을 겁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SNS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입니까?
이런 데 가면 이 기독교 목사에 대해서 욕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그 욕하는 걸 다 들어보면요. 복음이 아니에요.

그런 부류들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봐라. 지금 오늘날 목사들이 이렇게 악한 놈이야.’
신천지 같은 경우에는 ‘목사들이 다 이리야 이리. 양의 탈을 쓴 이리야.’
그 말에 누가 또 화답합니까?
교인들이 성경도 하나도 모르면서 조금 말씀을 공부해가지고
‘저봐. 저 엉터리야’ 그런 자들이 화답을 하겠죠.
예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에요.

서기관과 이 바리새인들 이들을 하나의 첫째 아담의 샘플입니다. 샘플로 뽑아서
그들이 종말 때에 어떤 모습을 보였는가를 십자가 앞에서 드러내는 거예요.
그 모습이 뭐냐? 하면요.
랍비라 칭함을 받는 걸 좋아하는 겁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어떤 의미냐? 하면요.
어떤 인간도 랍비라 칭함을 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 인간이 없다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다 지옥 가야 된다 이 얘기예요.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할 때 제자들은 아직 성령을 못 받았잖아요.
성령을 못 받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어떻게 듣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우리는 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달리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서 말씀의 고수가 되더라도 절대로 랍비라 칭함을 받지 않겠습니다’ 라고 마음을 먹겠죠.
머리가 돌이 아닌 이상은 그렇게 알아들을 것 아닙니까?

제가 볼 때는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머릿속에 머리가 돌인지... 아니 보세요.
제자들은요. 머리가 팽팽 돌아가요. 지금 이 말씀을 할 때 하실 때
제자들이 옆에 있다라고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그들이 이 말씀을 들을 때 그런 생각 안 하겠습니까?
그러면 한번 보세요. 누구보다 더 고수가 될까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랍비라 칭함을 받는 걸 좋아했다면
제자들은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아.’ 라고 말하기 때문에
더 랍비의 랍비로, 랍비의 할배로 여기게 돼 있어요. 구조가.

사람들이, 목사들이 신학자들이 문제가 뭐냐 ?하면
바리새인들을 볼 때 너무 얕잡아 본다라는 거예요.
왜 얕잡아보느냐? 하면 성경 전체를 보지 않거든요. 종말 때에 나타난 그 악의 최고점이거든요.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악의 모습은 본디오 빌라도의 모습도 보이지만, 헤롯 왕의 모습도 보이지만,
사두개인의 모습과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모습이 다 드러나요.

제가 누누이 강조하잖아요.
지금 사복음서에서는 우상숭배가 나오지 않는다라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우상을 안 섬깁니다. 사두개인도 우상을 섬긴다는 내용이 없어요.
예수님이 그 부분에 대해서 지적한 적이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종말 때의 우상의 실체는 ‘나’라는 거예요. 너라는 거예요. 너.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 말씀이 종말이 되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충성!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뭘 꿈꿉니까? 자신의 영생과 행복을 꿈꾸는 그러한 종말의 죄가 튀어나오는 시점이라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인간의 악한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들을 때 기도 안 하겠습니까?
‘주님 저는 저 바리새인,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같지 않습니다’ 이게 지금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그 해당 사항, 지옥 갈 자예요. 의롭게 여김을 받지 못할 자라는 겁니다.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어떻게 교회 안에
나중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 안에 이것이 실제로 적용이 되느냐 이 문제예요.
누가 보더라도 우리가 보면 디모데 위에 바울이 있잖아요.
베드로 아래에 마가가 있고요.

나중에 보면 여기에 보면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거든요.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 “아버지가 하나이다” 이럴 때
이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걸 꼭 기억하셔야 되고.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비라 하지 말라” 했는데
베드로가 마가를 자기 아들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자기 아들이라고 부르면 자신은 마가의 아버지가 돼요.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내 아들이라 이야기를 해요. ‘어 이상하네.’

그래서 어떤 정신 나간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안 들었기 때문에 사도바울을 아웃시킵니다.
그런 집단들도 있어요. 논리적으로 그렇게 돼 있잖아요. 맞잖아요.
예수님은 분명히 아비라 하지 말라 했잖아요. 너희 아버지는 한 분뿐이라 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라면 자기를 아버지라 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죠.’ 그렇게 해석하는 그 해석법이 성령 없는 해석법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해석법이에요.

그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그 죄악을 지적할 때
이것은 십자가를 기준으로 지적하는 말씀임을 꿈에도 생각을 못해요.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십자가의 완료성을 갖고 하시는 말씀이거든요.
여기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말씀들이 어떻습니까? 안 맞잖아요.
사도바울을 랍비라는 호칭으로 쓰지 않지만 사도바울을 존중 안 하는 성도들이 있나요?
이게 흥미로운 게 이런 거예요.
사도행전을 지나가서 바울의 서신서 디모데 전후서를 보면,
말년에 보면 랍비라 칭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파라는 걸 만들잖아요.
그걸 다르게 표현하면 아볼로파, 게바파 이것이 뭐냐? 하면
바울을, 게바를, 아볼로를 랍비로 대접하겠다라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내가 십자가 안 졌다”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십자가 안 졌다”라고 말을 함으로 말미암아 상대가 인간들이 바울을 어떻게 봐요?
더 랍비로 본다니까요.

그러면 그러한 어떤 상황이 없을 수 있느냐? 라고 하면
없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를 못해요. 사람들은.
지금 이것은 십자가 사건의 반복을 위한 말씀이거든요.
십자가에서 주님이 다 이루시면 다 이루신 그분이 어떤 영을 주십니까?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영”을 주신다라고 돼 있어요. 독특한 표현입니다.

로마서 8장에 나오거든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이야기를 해요.
우리는 ‘예수의 영’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잖아요. 그 말을 안 해요.
대체로 그렇게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라고 해요?
그리스도가 산다고 하죠. 예수가 산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이것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잖아요.

잘 들으셔야 되는 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라는 거예요.
주가 되고 그리스도가 되려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되죠.
그러면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와버리면 이 순서가 어떻게 바뀌느냐? 하면
십자가 지신 분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잖아요.
그러면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와버리면 이 순서가 역전이 되죠.
주와 그리스도가 된 지점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지점이잖아요.
주가 되셨다라는 것은 하나님 우편에 가신 거잖아요.

그러면 그 그리스도의 영이 성도에게 오게 되면 성도는 이 땅에 살잖아요.
땅에 사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을 어디로 몰아갑니까?
십자가로 몰아간다는 거예요. 또 이것도 또 오해를 하는데
‘십자가로 몰아간다’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래 나도 예수님을 위해 죽으면 주님의 참 제자일 거야.’

속사도 교부 중에 이그나티우스입니까? 그런 사람이 있거든요.
그 사람이 순교당했어요. ‘순교야말로 진짜 예수님의 제자답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웃기죠?
속사도 같으면 사도들이 있는데 사도들 그 시대를 이렇게 같이 연결돼 있는 사람들이에요.
복음을 몰라요.

왜냐하면 지금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을 전할 때 이들은 계시를 받았잖아요.
계시로서 주어지면 한 단계도 뛰어넘기 전에
성경에도 나오지만 한 단계도 뛰어넘기 전에 나답과 아비후도 마찬가지잖아요.
성령 충만한 걸 목격을 했잖아요.
예루살렘 교회에 복음을 전하고 흥왕해 가고 목격을 하더라도
성령이 임한 자와 임하지 않는 자가 갈라져요.

임하지 않는 자는 나타나는 양상과 그리고 현상을 보면서 흉내를 내요.
흉내를 내면서 자신을 스스로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나 성령 받았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지나 걔나 똑같거든요.
모든 성도들이 방언을 다 한 게 아니었어요.
성령 충만을 받아도 어떤 사람은 방언도 있고, 어떤 사람은 예언도 하고,
어떤 사람은 어떤 은사가 있어요?
고린도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은사가 나오는데 기록이 안 돼 있는데 어떤 은사가 있어요?
그 모든 은사들이 난리를 칠 때 그걸 듣는 은사가 있어요.

‘목사님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한번 보세요. 방언을 하는 사람이 있죠. 그러면 통역을 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 방언의 내용이 복음인데 통역을 하면 책망을 받는다라고 하거든요.
그럼 책망받은 사람이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물론 책망 받는 사람이 거꾸로 예언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죠. 그죠?
그런데 그러한 모든 은사가 다 기록이 안 돼 있잖아요. 사람들이. 그러면 그 듣는 사람도 은사잖아요.

방금 이제 제가 그 얘기를 했는데
‘복음이 전파되고 시간이 조금만 지나버리면 왜 원래 자리로 돌아가느냐?’
이렇게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없고요.
복음은 복음대로 전파되는데 이것이 세력화되고 커지니까 커지면 뭘 해야 되죠?
관리를 해야 돼요. 관리.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잖아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이 마지막 지점에 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고 배반하거든요.
왜 그러냐? 하면 사도바울은 조직 관리를 안 했어요.
분명히 가르치고 또 가르치라고 말을 했습니다. 근데 그 가르침의 의미가 달라요.

예수님이 3년 동안 가르쳤잖아요. 맞죠? 3년 동안 가르쳤을 때
그 가르침의 모든 내용은 어떤 내용이에요?
‘너희들은 마귀 새끼고, 이 말을 못 알아듣고, 내가 한 이 모든 말씀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라는
걸 가르쳤거든요.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치고 또 가르치라는 내용도 그 내용을 가르치라는 건데

사람들은 이 ‘가르치라’는 것이 어떤 의미로 생각해요?
여기 보면 선생이 되지 말라하거든요.
나중에 보면 선생 되고 싶어서 미친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왜?
이 선생이 되면 사람들이 선생을 우러러 봐요.

성경을 잘 알면 우러러 볼 것 같잖아요. 맞죠?
근데 예수님이 선생님이죠? 선생님이 뭘 가르쳤습니까?
상대들은 나한테 이익이 되는 것을 계속 가르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그 선생님이 섬겼죠.
발 씻겨줄 때는 ‘아이 좋아라 온 몸도 씻겨주세요.’ 이렇게 하는데
그 발 씻겨줌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드러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 성령에 의해서 계속해서 발 씻음으로 드러나거든요.
이 발 씻음의 의미는 ‘너 계속 죽어’ 이 얘기거든요.

그리고 “너희들도 서로 섬겨라 발을 씻겨주라”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발을 씻겨주는데 발 씻겨주면요. 아버지 학교 가서 발 씻겨주면
발 씻겨주는 사람을 존중하잖아요.
근데 베드로는 발 씻겨주니까 상대가 돌을 던지고요.

바울 같은 경우에는 발을 씻겨주니까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니가 사도야?’
자비량 향해서 복음을 전해주니까 ‘니 사례도 못 받는 주제에... 게바를 봐. 사례받고 당당하게 사도다움을 보이지 않느냐. 너는 그거 못 받는 거 보니까 주님이 안 먹여 살리는구나.’
사도바울은 공격할 거리가 많잖아요.
“일하는 소에게 멍에를 메지 말라”고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한테는 해당 사항이 안 되니까
‘너는 니 그 말씀대로 해당 사항 없어.’ 이렇게 공격을 받아요.

“발을 씻겨준다” 이런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런 걸 좋아하는 게 누구냐? 하면 지방교회 같은 사람들이죠.
‘목사 다 날려버려라. 다 필요 없다. 우리는 다 형제다.’
선생님은 누구밖에 없다? ‘예수님뿐이다’ 라고 해놓고 그 말을 한 인간이 선생질 해요.

사람이 모이면요. 그게 있습니다. 반드시 달라요. 차이가 나요.
성령을 주시면 차이 안 나도록 주시면 되는데 희한하게도 다 차이가 나게 줘요.
은사도 다 다르게 줘요.
똑같은 은사를 받았는데도 차이가 나요.

그런데 이것이 이 세상도 똑같아요.
사람들이 모이면 차이가 나잖아요. 은사를 주시면 좀 세상과 달리 우리가 똑같이 이 말씀대로
우리는 형제니까 누구도 이 선생이요. 랍비라고 칭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근데 주님이 그렇게 일을 안 해요.

이 말씀이 어떻게 적용되느냐? 하면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선생은 하나이고 너희는 다 형제니라” 이 말씀에 대해서
성령을 받게 되면 누구나 다 아멘을 하겠죠. 그죠?
아멘을 했는데 그중에 어떤 사람이 나옵니까? 말씀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 나와요.
주님이 은혜를 주신 거예요.

잘 가르치면 상대들이 뭐 합니까? 랍비라 칭하겠죠?
교인들이 진짜 성경을 너무 몰라요. 아니 성경을 잘 가르쳐주면 선생님이라 부를 것 아닙니까?
그렇게 안 부릅니까?
‘형제님’ 이라고 불러도 말은 형제인데 그 형제라는 언어 속에 무엇이 담겨 있냐? 하면
‘선생’이라는 단어가 담겨 있어요. 이 악마성을 그렇게 숨기고 싶은 모양이에요.
그게 다 들어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도 선생 노릇을 하거든요. 베드로도 선생 노릇을 합니다. 가르치잖아요.
제 이야기가 아니고 가르치잖아요. 그러면 가르치니까 성경의 원칙은 뭐냐? 하면
선생이 되지 말라. 랍비라 부름을 받지 말라. 왜냐하면 선생님은 한 분뿐이니까
너는 선생이 아니오라고 했으니까 가르칠 때 뭐라고 하는가? 하면
‘여러분 나를 선생이라 부르지 마시오. 선생님은 예수님뿐입니다.’ 이렇게 말을 할 수도 있어요.
이 본문을 갖고는.

그런데 그렇게 해봤자 인간이라는 자체가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살기 때문에
아까도 처음 시작할 때 얘기했잖아요. ‘진짜 우리의 선생이야.’
여기에는 무엇이 사라지느냐? 하면 십자가가 사라져요. 이렇게 되면. 논리가.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 말씀을 통하여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을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랍비라 칭하지 말라. 선생은 하나요. 우리는 형제라” 했을 때
고린도 교회가 십자가의 피 복음을 들었어요. 오리지널 복음을 들었어요.
오리지널 복음을 들었고 성령을 받았는데
성령을 받았다면 나는 바울파라는 말이 나와야 돼요? 안 나와야 돼요? 성령을 받았다면?

인간들이 갖고 있는 논리가 뭐냐? 하면
‘성령을 받았다면 바울파가 안 나와야 된다’라고 생각해요.
그 말도 맞아요. 안 나와야 된다는 것도 맞지만요. 안 나온다고 맞는 게 아니에요.
성령을 받았다면 십자가가 나와야 돼요.
이 어려운 이야기를 알아듣는 게 기적이죠.

성령을 받았다면 ‘나 바울 파, 이런 거 하면 안 돼. 나는 알아.’
나는 아니까 뭐라고 할 거예요? 나는 누구 파라 할까요? 예?
‘나는 십자가 새 언약 교회파가 아니다’라고 하면 그다음 누구 파예요?
고린도 교회에 나와요. ‘나는 그리스도파’라는 얘기예요.
그 말이나 그 말이나 똑같은 거예요. 논리가.
좀 똑똑하다는 사람이 그 생각을, 그런 말을 하거든요.
‘나는 사람을 안 쫓을래. (그럼 누구를 쫓을래?) 나는 그리스도파야.’
‘나는 사람을 쫓는 너보다 월등히 뛰어난 인간이야’이 얘기예요.

그런데 이 교회가 말씀을 깊이 있게 안 가르쳐주니까
좀 성경 안다는 인간들이 나와가지고 하는 말이 ‘봐 목사 필요 없어.’
우리 성경에 목사 나오거든요. 감독도 다 나와요.

왜 그러면 선생이 되지 말라 해놓고 장로를 세우고 감독을 세웁니까? 교사를 왜 세웁니까?
은사가 나오거든요. 교사의 은사가 다 나와요. 선생의 은사가 다 나오거든요.
그걸 왜 세웁니까?

성도들은 십자가의 증인이에요.
십자가의 증인 되는 것과 말씀대로 사는 것은요. 완전히 대충돌이에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왜 충돌이 일어났습니까?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자기들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의인이죠.
사도바울을 보세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잖아요.

그러니 율법 전문가니까 당연히 가르칠 거 아닙니까?
구약에 보면 “부지런히 가르치라” 했잖아요. 맞죠?
대제사장들이 가르치고 아버지가 올라가서 배워서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이게 이제 대제사장 날아가버리고 왕도 날아가 버렸잖아요. 그러니까 누가 가르칩니까?
누가 가르쳐요?
말씀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부지런히 배워서, 그게 바리새인들이거든요.
그 바리새인의 윗대가리들이 서기관들이잖아요.
그 율법 전문가들이 율법을 연구해서 가르쳐야 될 거 아니에요. 자녀에게 가르치려면.

누가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야 될 거 닙니까? 그러면 그게 뭐가 잘못됐느냐? 얘기예요.
‘뭐가 잘못된 게 아닌 게’ 잘못됐다 라는 거예요.
‘아이 뭐 궤변 같은 이야기를 하느냐?’
그게 아니라 율법 자체가 율법대로 행하게 되면 악마성이 나오게 돼 있어요.

제가 어젯밤에 설교를 했잖아요.
사무엘상 8장에 보면 왕을 요구할 때 그들이 왕을 요구하는 것이
신명기 17장 14절, 15절 말씀을 근거로 하여서 왕을 요구했는데
문제는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보기에는.
“주위의 나라처럼 왕을 요구하려면 자기 백성 중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로 왕을 하라” 했잖아요.
문제가 하나도 없는데 법대로 한 것이 가장 악마성을 노출로 하는 겁니다.
그게 율법을 준 목적이에요.
로마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사무엘 8장에도 나와요. 신명기와 연결하면.

‘왕을 구했으니까 잘못됐다.’ 잘못된 게 아니에요.
‘말씀대로’라는 이 논리 자체가 가장 악마적이에요.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너희는 저들과 달리 랍비라 칭하지 말라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이렇게 이 말씀이 떨어지게 되면
실제로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어떻게 교회 안에서 실제화시키느냐? 라고 하면
바울파라고 하는 자들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해버립니까?
“내가 십자가 지지 않았다” 라는 거예요.
“아볼로가 십자가 지지 않았다” 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이 말씀이 실제화돼요. 이해하셨죠?

이 말씀이 실제화되려면 부지런히 복음을 전합니다. 가르칩니다.
가르치면 사람들이 이 사람에 대해서 존중을 하고
선생님이라 부를 것 아닙니까? 지도자라 부를 것 아닙니까?
그러면 ‘여러분, 여러분...’ 그다음 뭘 얘기해야 되죠?
지도자라 부르면 ‘나 십자가 안 졌어요.’ 라고 하면서
이 십자가 지신 주님 앞에서 지도자라 부르는 자도 죄인이 되고, 선생이라 부르는 자도 죄인이 되고,
선생이라고 불림을 받는 자, 지도자라 불림을 받는 자도 죄인이 되는 거예요.

지방교회 이런 인간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십자가를 날려버리겠다는 거예요. 아예.
십자가를 날려버리고 ‘말씀대로 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성령이 임하면, 성령이 인도하시게 되면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는 현장을 만들어낸다는 걸 몰라요.

이 말씀을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영이죠.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않고 해석을 하게 되면
‘이제 나는 목사지만 여러분 저를 목사로 부르지 마세요.’
왜냐하면 목사라는 그 단어 안에 라비라는 의미도 들어가 있고 선생이라는 의미도 들어가 있고
지도자라는 의미도 들어가 있잖아요.
어떤 목사가 ‘나는 이런 의미가 아무것도 없어.’ 백날 이야기해도
목사라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모든 사람들은 그 의미를 담고 있어요.
물론 어떤 사람은 먹사라고 부르죠. 돈을 처먹는 먹사. 그런 사람 외에
대부분은 그런 용어를 갖고 있어요.

그러면 반대로 목사가 목사이기 때문에 ‘나는 목사 안 하겠어. 나는 평신도로서 가르치겠어.’
그 인간이 더 악하다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는 평신도 신학을 안 해놓고.
신학교 가보세요. 목사 안수 못 받아요. 만일에 그런 식으로 한다면.
그래서 복음을 전하면 괜찮습니다마는.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그 인간이 목사 질을 해요.

성경을 좀 제대로 봐야 될 거 아닙니까?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요. 아주 수준 낮은 말씀으로 보는 겁니다.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은 종말에 오셨죠. 심판주로 왔어요.
그러면 누가 심판을 받느냐? 할 때는
이 십자가 지신 주님 앞에 죄인으로 드러나는 자들이 심판을 받는데

그 죄인들의 모습은 지금 예수님이 뒤에 “너희는 랍비라 칭하지 말라” 이렇게 했을 때
바리새인들이 이 말을 듣잖아요. 맞죠? 들으면 그다음 어떤 태도를 취할까요?
‘앞으로 랍비라 칭하지 마라’ 이야기하죠.
아니 성령을 못 받아도 그걸 알아들을 수 있잖아요. 제가 혼자 흥분을 하는데,
성령을 못 받아도 ‘그래 내가 성령 안 받고 그래 예수님 믿겠어. 예수님이 주님을 내가 인정하겠어.’
성령을 안 받아도 믿거든요.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신천지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을 주라 안 하는 인간들이 어디 있어요? jms부터 시작해가지고.
성령을 못 받아도 들어오죠.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들어와서 뭐라 하겠어요?
바리새인들은 랍비라 칭함을 좋아했으니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죠?
‘그래 랍비라 칭하지 마세요. 선생님은 한 분뿐입니다. 우리는 다 형제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하죠? 그다음?
계속 반복합니다마는 ‘최고! 우리 목사님 최고!’
이게 얼마나 악마적인지 몰라요.

사람들이 복음을 원치 않습니다. 옳은 이야기를 원해요.
복음을 전하면 교회가 왜 안 되느냐? 하면요.
복음은 방금 말씀드린 이런 방식으로 선포가 돼요.

만일에 복음을 전하지 않고 성경 해석을 해서
‘자 바리새인들은 랍비라 칭하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우리들은 그렇게 칭하지 마세요.
저를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선생님은 예수님 한 분뿐이고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한 분뿐입니다.’

그리고 지도자는 ‘저를 지도자로 부르지 마세요.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라고 하면요.
듣는 사람이 좋아해요. 지금 이 차이를 알아야 돼요.
왜 좋아하느냐? 하면 이것은 우리의 힘을 모을 수가 있어요. 힘을 모을 수 있고요.
듣는 사람들은요. 선악과를 먹었잖아요. 선악 시스템이 작용하기 때문에
설교를 백날 들어도 선악 구조로 해석을 해요. 선악 구조로.

어떻게 선악 구조로 해석하느냐? 하면
자기가 선 편에 서고 싶은 거예요.
십자가 복음을 들어놓고 선 편에 서서 ‘나 잘났다’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너무 악마적이에요. 그걸 교인들이 원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십자가의 피를 믿었으니까 여러분이 이제 성도입니다. 여러분 이제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고 이미 창세기 전에 구원받았으니까 이제부터는 부지런히 그 사랑의 깊이를 알아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어때요? 얼마나 기분 좋습니까?

근데 제가 오늘 기도할 때 믿음에서 파선한 알렉산더와 후매내오 입니까?
그걸 기도했잖아요. 아니 믿음에서 어떻게 파선이 됩니까?
창세전 이 주권을 믿는, 칼빈 같은 경우에는 ‘주권 예정론’인데
그러면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지가 하나님이에요. 지가. ‘원래 창세기 전에 그는 선택 못 받았어.’ 자기가 판결자예요.

그런 자들과 똑같은 자들이 ‘당신이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라고 주장하는 구원파들.
그런 게 깔렸어요.
내가 입으로 시인해서 구원 얻을 것 같으면 로마서를 엉터리로 보는 거예요.
10장에 나오는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라고 했는데
시인 해서 구원에 못 이른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그래서 나온 게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고” 이게 계속해서 반복하는 겁니다.

만일에 입으로 시인해서 구원할 것 같으면
이거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라 행위로 말미암은 거잖아요. 그죠?
화목 제물 필요 없어요. 화목 제물 떡하니 던져놓고
‘니 행위가 개입이 안 되면 화목 제물은 아무 소용없어.’

그러면 결정적 구원은 누구한테 달렸다는 거예요?
사람에게, 믿는 나에게 달렸다라는 거예요.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라고 하는데
그 말씀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거예요.

그러면 반대쪽에 서는 사람은 ‘그래 태어나기 전에 사랑하고 미워했으니까 난 그거 믿어.’
‘턱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또 이런 사람 있잖아요.
‘입으로 시인 안 해도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으니까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는 성경은 뭘로 쳐버립니까?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이걸로 이야기해 버려요.

신학자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목사들도 교인들도 문제가 뭐냐? 하면
성경에서 자기의 구원을 위한 신학을 실타래처럼 성경 말씀을 다 끌고 오는 게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끌고 오는 거예요.
부분적으로만 끌고 오니까 이 상충되는 이 말씀에 대해서 아멘하면 될 문제인데
그걸 계속해서 자기의 구원이 확신함을 자기의 신학이 확신함을 위해서 바꾸는 거예요. 말씀을.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잖아요. 맞죠?
나중에 또 나와요. “그들이 안 들었느냐?”
“들어도 안 믿었다” 이야기하죠. 지금 그걸 로마에 있는 성도들한테 하잖아요.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했을 때 이 말씀이 실제화 됩니다.
‘우리는 형제로 우리는 다 선생을 하지 맙시다.’ 이걸로 되는 문제가 아니에요.
반드시 이 복음이 전파되고 복음이 전파되면 모임이 결성이 되고
모임이 결성되면 예루살렘 교회 같은 경우는 예수님의 동생이죠. 야고보가 수장이 되잖아요.
없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야고보가 바울이 이 이방인들이 갖고 온 헌금을 갖고 올라왔을 때
그것에 대해서는 별소 별로 관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이 수만 명이거든요.
수만 명이 만 원씩만 한다 생각해 보세요. 그 돈이 얼마입니까?
이방인들이 헌금을 해봤자 얼마겠어요? 그게.

그리고 유대인들이 예수님 믿으면 기본 십일조는 기본으로 하거든요.
그런데 이 “랍비라 칭하지 말고 지도자라 칭하지 말라”는 말씀이 되려면
‘오 바울 잘 왔어요. 복음 한번 전해주세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예루살렘 교회가 어떻게 될까요?
박살나죠. 그게 두려운 겁니다. 야고보가.

그러니 예루살렘에서 어디로 이동해버립니까? 복음 전파 중심지가?
안디옥으로 가는 거예요. 안디옥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는.

인간은 뭔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지속하려고 하고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이 제대로 된 교회를 못 만들었거든요. 중간중간에 안디옥 교회도 가고 이렇게 하는데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교회는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사도바울 자신이 전하는 그 복음을 들어보면
우리는 그 복음을 들을 때 바울 서신을 볼 때나 이런 내용을 볼 때
‘정말 교회다운 교회를 위해서 바울이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 가야 된다’라는 주의예요.
목사들 모이면 100이면 100이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근데 사도바울은 ‘교회다운 교회’를 이야기하는데 그 교회다운 교회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라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니까 고린도 교회를 없애버립니다.
아시아 일곱 교회를 없애버려요. 못 알아듣죠.

지금 이 말씀을 ‘랍비라 칭하지 말라’ 해가지고,
‘지도자라 칭하지 말라, 선생이라 칭하지 말라’ 이렇게 해서 뭘 만들어요?
‘교회다운 교회’를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들은 머릿속에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교회다운 교회란 어떠한 것이다’라는 것이 담겨 있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 모임을 시작할 때 그런 설교를 여러 번 했거든요. 뭐 옛날부터 그런 얘기했지만.

오시는 분들이 아무리 ‘복음을 위해서 온다’라고 하지만
자기 꿈이 있어요. 거위의 꿈이 있다니까요.
그 꿈이 어떤 꿈이냐? 하면요.
자기가 지금까지 설교를 들어오면서 만들었던 ‘교회 상, 목사상’ 이걸 갖고 들어와요.
자기 남편도 자기한테 못 맞추는데 목사가 어떻게 맞춥니까?

맞추는 방법은 딱 한 가지예요. 목사가 다정한 상담자가 되면 돼요. 그게 훌륭한 목사거든요.
‘예 기도하겠습니다. 예 기도하겠습니다.’
싫은 말 안 해도 돼요. 싫은 말 안 하면 돼요.
복음을 안 전하면 돼요. 그걸 원하고 교회를 오거든요.

그리고 이런 본문, 이런 본문에 대해서는 이게 촉이 바짝 서가지고
어떻게 하냐? 하면 ‘선생은 하나밖에 없는데 목사 지가 선생질 하더라’ 이렇게 나와요.
근데 ‘지금 말하는 본인이 선생질 하고 있는데요.’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자기가 지금 선생질 하고 있다라는 걸 못 알아들어요. 방금 말한 그 태도 자체가.

그런 사람들이 원하는 게 뭐냐? 라는 거예요.
이런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적어도 바리새인과 다른 교회가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뭘로 듣습니까? 율법으로 듣는 거예요.
복음으로 안 듣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성경은 내게 대해서 전한다” 라고 하셨잖아요.
진짜 목사들하고 신학자들이 문제가 뭐냐? 하면
모든 성경은 이라고 했을 때 이 ‘모든’ 이라는 것이
예수님 때는 신약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구약만 해당된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말씀이 누구로부터 나왔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나왔잖아요.
그럼 신약 전체가 모든 성경이잖아요.
여기 이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잖아요.
가장 명확한 것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주님이고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그걸 증거하는 게 성경입니다.

그런데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은요.
구약을 세피하게 보죠. 얕잡아봅니다. 얕잡아보고
신약의 후반부에 나오는 이 바울의 권면들은 얼마나 중하게 여기는지 몰라요.
그걸 중하게 여기면서 이런 말씀을 보면서 ‘성화돼야 된다’ 하는데
무슨 성화가 되요? 인간이? 어떻게 성화가 돼요?

성령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바꾸죠.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알기를 원한다” 라고 간구를 하거든요.
그러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알면 뭐가 깊다는 거예요?
죄가 깊다는 것 아닙니까? 그게 성화거든요. 성경에 나오는.
그러면 십자가를 증거하는 인생이라는 건데

개혁주의 교회는 성도가, 이게 왜 성화론이 나오느냐? 하면요.
이 튤립(TULIP)이라는 이 개혁주의 ‘칼빈주의 5대 강령’이 있어요.
5대 강령해버리면 주님이 다 해버립니다.
전적 타락, 전적인 은혜, 주님의 견인, 주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요. 주권.

그러면 인간들이 그걸 보고 뭐라 하겠어요?
‘마음대로 하자’ 마음대로 방종할 거 아니에요.
그 방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뭘 끌고 옵니까? 성화론을 끌고 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은요. 우상숭배입니다.
제가 글로 아무리 써도요. 사람들이 이해를 못해요.
하나님의 주권이 우상이에요.

하나님의 주권은 어떤 주권이냐? 하면요. 죽음이 없는 주권이에요.
근데 예수님의 주권은요. 죽음이 있는 주권이에요.
그게 아들을 주로 세우기 위한 조치고요.
십자가 지신 분이 심판주가 되어지면 구약에 나오는 죽지 않는 하나님의 주되심이 다 우상이 돼요.

신구약을 십자가 안에서 연결해서 봐야 되는데 연결을 못해요.
왜 못하느냐? 하면 이들은 신학 자체가 이 로마 카톨릭에서 신학을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으로 다 짜깁기 하고
자기 권력 유지를 위해서 다 뽑아내어서 골라 잡아서 질서를 잡은 거예요.

제가 그 글을 하나 썼잖아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전능한 하나님을 믿고, 만군의 여호와를 믿는 것이 우상숭배다’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이 댓글을 달았는데 이렇게 달았어요.
‘이방인들이 믿는 것은 우상이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다.’
그다음 하는 말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찬양할지라.’
그다음 이야기하는 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게 뒤죽박죽이에요.
그래서 제가 댓글을 다니까 삭제를 해버렸더라고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믿은 자가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살해해요.
그렇게 되면 ‘그들이 잘못 알았지 않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그러면 봅시다. 잘못 알았다 는 하나님이다 칩시다.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당신이 제대로 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말해보라고 그랬어요. 어떤 분일까요?

이게 굉장히 어려웠거든요. 왜 어려우냐? 하면
우리 이미지 속에는 하나님이 따로 자리잡고 있어요. 선악과를 먹어서 그래요.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그 인간들에게 계시를 통하여서

계시의 방식은 무엇이냐? 하면요.
인간들이 범죄한 자리에 범죄한 그 속으로 들어가서
심지어는 범죄한 방식으로 주님이 그 속으로 들어가서 자기를 알려줍니다.
사사기를 보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잖아요.
소견대로 옳은 대로 행하니까 하나님이 소견에 옳은 대로 그들을 구원해요.

삼손을 보면 율법대로 정말 나실인으로서의 구원자가 아니잖아요.
왜 그렇게 구원하는지 아시겠죠? 이제.
인간들은 답을 갖고 있거든요. 나실인이라 하면 포도주나 독주를 입에 대지 않고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않아야 된다라는 답을 갖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인간을 구원합니까?
육신으로 오셔서, 물론 죄 없는 분인데.
죄 없는 분이라는 걸 주변 사람은 인정 안 합니다. 지나걔나 똑같아요.
바늘로 찌르면 피가 나고요. 밥 안 드시면 배가 고프고요. 십자가에 못 박으면 피가 나오고요.
창으로 찌르면 물이 다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냥 죽어요.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별거 아니에요.
그 방식으로 주님은 언약을, 새 언약을 세우시고 자기를 계시하신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이라하면 성경을 통해서 정답을 만들어놔요.
제가 지금 이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으로 알려주셨잖아요.
여호와 하나님으로 알려주시다가
최종적으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에 의해서 진짜 하나님을 알려줍니다.
“나를 믿는 자가 아버지를 믿는 거고,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본 거고, 나에게,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선언을 해버려요.
이 말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이 다 엉터리거든요.

그런데 이 신학자나 목사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이 말씀의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제가 어떤 목사님들한테 강의를 한 경우에 그 사람들의 사고가 뭐냐? 하면요.
‘아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믿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틀렸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냐?’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여러분도 그런 생각하죠? 맞죠?
바리새인이 믿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는 틀렸잖아요.

그러면 안 틀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있잖아요. 맞죠? 그걸 얘기해보라니까요.
얘기하면 그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요.
왜? 그걸 아무리 뽑아내도 뭐밖에 안 나옵니까?
유대인의 하나님밖에 안 나와요. 십자가가 안 나온다고요.

그래서 구약이나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해석을 하려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야 돼요.
그리스도에게 영을 받아버리면 그리스도가 메시야잖아요. 메시야가 누구에게 살해당합니까?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들에 의해서 살해당합니다.

그러면 또 ‘그들이 몰라서 죽였지 않느냐?’
그러면 알면 안 죽일까요?
어떻게 압니까? 몰라요.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일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요.
하나님이 처음에는 창조주로 계시하셨잖아요.
창조주로 하시니까 그들이 선악과를 먹고 나간 뒤에 흩어진 이후에
모든 사람들이 이미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 때문에 마귀의 지시를 받잖아요.

마귀가 창조의 하나님을 압니까? 모릅니까?
알죠. 창조주 하나님을. 그게 선악과 먹은 거예요.

그럼 전능한 하나님을 알까요? 모를까요?
알아요. 그래서 전능한 하나님으로 아브람에게 알려줍니다.
자식 없는데 지금 생리가 끊겼는데 자식을 태어나게 할 수 있다.
전능한 하나님이잖아요.

근데 그런 하나님을 누구도 믿어요? 저 구인사 가도 믿어요. 다.
나중에 여호와 하나님으로 또 알려줘요. 여호와 하나님의 여호와 이름도
이미 창세기 4장부터 나옵니다. 5장부터 다 나와요.

그 ‘약속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어요.
문제는 그 약속의 하나님을 누가 믿어요? 유대인들이 믿거든요.
그 약속의 하나님을 믿는 그들이 진짜 약속을 성취하시는데
그 약속의 성취의 모습이 기존의 약속과 다릅니까? 같습니까?
너~무, 달라도 너무 달라요. 십자가로 새 언약을 세워버립니다.
그러니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리스도를 계시하시고 그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살해함으로 말미암아
왜 그런 방식을 취하느냐? 하면요.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뭐밖에 없느냐? 하면요.
메시야를 알려주든 뭘 알려주든 자기를 위한 신밖에 안 찾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모든 걸 다 완성을 하시고
성령을 주십니다. 동행을 합니다. 동행을 하게 되면 이전과 이후가 어떻게 달라지느냐? 하면요.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룬 그 내용물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의 현장 속으로 인도함을 받으면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세계에 사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의 증인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주신 이유가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주님이 되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말씀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말씀임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심판주 되심을 증거하는 말씀임을 오늘도 저희들에게 들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말씀을 저희들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상황 속으로 우리를 내몰아서 이 말씀이 말씀대로 되어지는 현장에서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며
십자가만 밝히 보이는 현장으로 인도해 주심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