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7-03 21:23
20240703 마태복음 강해 마 23:10 그리스도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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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4-07-04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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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마태복음 강해 마 23:10 그리스도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이방인과 같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하며 구하는 자가 아니라
먼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의를 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23장 11절에서 12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23:11~1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아멘.

예수님께서 앞서 10절에서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당시에는 그리스도를 기다렸거든요.
‘기름 부음을 입은 자’ 이렇게 표현해도 되고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표현해도 되는데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렸는데 그 그리스도가 그들의 지도자죠.

마태복음 16장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13절에 보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인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유는요.
다니엘을 인자라고 부르고 에스겔을 인자라고 불렀던 내용이 이렇게 겹쳐져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뿐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람이 없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는 사람이 없어요.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판단을 합니다.
이게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이죠.
예수님이 병도 고치시고 산상 설교도 하셨잖아요.
바리새인과 같은 그런 설교가 아니라 권세 있는 자의 설교더라. 그렇게 놀라워했고
여러 가지 능력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평가를 내립니다.

우리들도 똑같잖아요. 설교 한 2년 들어보면 평가하잖아요.
어떤 분은 오늘 유튜브 댓글에 제 설교를 이사야 11강인가 16강 듣고
‘좌파 목사?’ 그 사람들은 아는 게 좌파 아니면 우파밖에 없어요.
십자가를 몰라요. 십자가는 좌파든 우파든 가만 안 둡니다. 다 지옥 갈 자들이죠.

예수님에 대해서 질문을 할 때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더러는 세례요한이라”
헤롯왕도 그런 생각을 했잖아요. 죽은 헤롯이 살아났다 뭐 이런 식의 이 세례요한이 살아났다.
“더러는 엘리야라고 하고”
말라기 예언에 대한 성취로서 혹시 엘리야가 아닐까 마지막 때 엘리야를 보내준다 했으니까.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 하더이다”
이 정도 평가라면 예수님에 대해서 대단히 높이 평가해 주는 거잖아요.
어찌 되었든, 세례요한이라 하든 엘리야라 하든 예레미야라 하든 선지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하든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다’라는 거죠.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게.

지금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 말씀들을 보고 행하시는 그 행위들을 보면서 예수님을 평가할 때
예수님이 자신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죠. 유일신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있다라고 확신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 한 지 오래됐잖아요. 이런 이야기했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면서 이제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죠. 우리 성경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헬라어 성경에는 주라는 단어가 없어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요.
이 성경을 번역을 할 때 번역하는 당사자가 자기 믿음을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러면 성경이 엉터리지 않느냐?
성경은 엉터리가 아닌데 성령이 역사를 하게 되면 어차피 우리는 제대로 아는 게 없어요.

문제가 뭐냐? 하면
이게 ‘주’라고 이렇게 표현함으로 말미암아 베드로의 이 신앙이 더 엉터리로 만들었다라는 거예요.
근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사들은 이걸 보면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짱이야. 최고야.’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고

지금 여기는 “당신은”이라고 이야기해요. 당신은. 예수님에 대한 극존칭이죠.
뭐 좀 낮은 말로 표현하면 ‘너는’ 이런 거고,
제가 만약에 번역한다면 ‘너는 그리스도야’ 이렇게 번역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베드로의 마음속에는요.
겉으로는 ‘주님~ 목사님~’ 그러잖아요.
속으로는 ‘이 돈밖에 모르는 목사XX’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거든요.
제가 너무 리얼하게 얘기한 게 아니라 실제로 그런 거예요.
과장한 게 아니라 베드로나 이 12 제자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있어요.
‘니가 그리스도여야 돼.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너를 쫓았으니까.’
니가 그리스도가 안 된다면 자기들은 뭐가 돼요? 닭 쫓던 개?

여러분 그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복음을 찾아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찾았다고 했는데
여기가 끝이 아니면, 여기가 진리가 아니면 어떡하겠어요? 그럴 때 어떤 마음이 들까요?
우기는 겁니다. ‘여기가 진리여야 돼. 여기가 정말 생명의 길이어야 돼.’
‘이거 아니면 그러면 나는 뭐 하는 짓이야?’
성령 없는 사람들의 특징들이에요.
믿을 게 없으니까 자기가 믿는다는 그 믿음을 믿는 거죠.

그러니 강제로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바라는 이 구원을 얻는 그 진리로 끌고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걸 신념이라고 하거든요. 믿음이 아니고.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니 믿음 없다’거든요. 얼마나 편합니까? 신앙생활이.
내 믿음이 확실하면 이게 조변석개잖아요. 아침 저녁으로 믿음이 바뀌잖아요.
특히 우리 몸이 안 좋은 분들은. 어떻습니까? 사람의 몸이 안 좋으면요. 이게 조변석개가 아니고
시간마다 바뀌어요. 이게 완전히 조울증 환자 같아요. 조울증 환자라도 괜찮아요.

주님이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물론 믿음을 요구를 해요. 그런데 그 믿음은 가짜로 들통나는 믿음을 요구해요.
반드시 믿음을 말씀하실 때는, 성경에서 진리를 말씀하실 때는
거짓 진리를 말씀하시고 진리를 말씀하세요.
성경은 원칙이 그렇게 돼 있어요. 진행 과정이.

물론 시작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시고 범죄를 인간들이 했을 때 약속을 주시잖아요.
약속을 주실 때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누가 해석을 합니까?
아담과 여자가 해석을 해요.
해석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아벨을 죽도록 그 자리에 집어넣어서
본래 하나님이 말씀하신 취지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이 ‘아니오’가 들어가지 않으면 진리가 안 나와요.
왜냐하면 ‘아니오’가 없으면 선악과 먹은 인간들은 ‘충성 제가 믿겠습니다!’ 이래 들어가 버려요.
그래서 구약이 엄청나게 중요한 겁니다.

구약 전체가 십자가를 증거하기 때문에
구약 전체를 모르게 되면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면 십자가의 진리를 내가 믿어버려요.
그런 믿음을 성경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을 때 이 고백은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렇게 나오거든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했을 때 지금 이 베드로의 고백은
‘다윗 언약의 성취자’로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니까 우리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 이 생각을 갖잖아요.
베드로는 그런 생각 꿈에도 갖지 않습니다.
진짜 하나님을 몰라요.
나중에 도마입니까?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잖아요.
그래야 말씀이 앞뒤가 맞잖아요.

도마나 베드로나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 하나님의 아들 개념이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죠. 개새끼는 개잖아요.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죠.
물론 시편에 말씀을 받은 너희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고,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잖아요.
그 아들 개념은 있는데 ‘진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라고는 베드로는 생각을 못 해요.

‘진짜 하나님’이 왔다면 그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잠시 보이죠. 고기를 잡았을 때 오른쪽에 던져라 하니까 고기가 엄청나게 잡히니까
“주여 저는 죄인으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그런 모습을 잠시 보입니다마는

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이 사무엘하 7장 14절 이하에 나오는
‘다윗 언약의 성취자’로서 이 다윗의 후손을 하나님의 아들로 칭하거든요.
그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신 누구라고요? 그리스도.

그런데 여기에 뭐라 합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왜 그 고백을 할까요?
여러분 교회 다니는 사람들 보세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신다고요?
나를 도와주시잖아요. 살아계셔야만 나한테 도움이 되잖아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은 도움이 돼요? 안 돼요?
야~ 이거 진짜 어려운 문제거든요. 예수님이 분명히 부활을 하셨잖아요.
주가 되셔서 성령을 주셨을 때 우리와 동행을 하는데
동행하는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동행하는 모습이?

질문할게요. 우리가 살려면 우리와 동행하는 분이 어떻게 돼 있어야 돼요?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살리잖아요.
지금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지금 이 논리를 못 따라와요.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사망이 어디에 역사해야 됩니까?
사망이 내 몸에서 역사를 할 때 생명이 누구에게 역사예요?
형제들에게 역사를 하게 돼 있어요. 구조가.

이 원리가 주님이 우리와 동행을 할 때는
성도가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이 계속해서 성도의 몸 가운데, 주변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래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십자가는 옛날 이야기고 그거는 지난 이야기고...’ 하는데,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십자가의 증인이 되지 않고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가 되지 않고
뭘 자랑해요?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자기 믿음을 자랑하죠.

아들이 이 땅에서 아버지의 일을 행하셨잖아요.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준 게 아버지의 일이잖아요.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내가 일한다 할 때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했어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잖아요.

예수님의 일은 창조부터 시작해서 창세 전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는 일이에요.

그 일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면, 성도에게 성령을 주셨다면,
성도는 늘 죽은 자인데 늘 죽은 자로 돌아가요. 이게. 희한해요. 구조가.
죽은 자로 돌아가면 날마다 살리시는 능력이 작동하는 몸으로서 사는 거예요.
그걸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근데 기존 신학에서는 어떻게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요.
십자가로 살렸으니까 ‘이제 나 살았어’ 해요.
‘나 살았어’가 되면 십자가가 필요 없어요.
그래서 제가 글 하나 올렸잖아요. 제목도 되게 어려운데 뭐예요?
퀘른시아. 자기를 자아를 회복할 성소. 그걸 찾아 나선다는 거예요.
스페인 소 싸움 하는데 그 소가 자기 안식처를 찾는대요. 그 싸우는 곳에.
안식처를 찾으면 거기에서는 어떤 자기의 대적자가 와도 이겨낸대요. 그래서 하는 말이...
그 책에 다 나와요. 다 이겨내요. 그런 자리를 우리가 찾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부처됐다는 이야기거든요.

성도에게는 그런 게 필요 없습니다.
성도의 삶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승리한 삶이기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로 승리한 그 일을 보여주려면 성도는 100전 100패 하는 곳으로 가야 돼요.

그런데 이 교인들은 자기가 승리하려고 해요.
그 승리하려고 하는 대표 주자가 베드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듣고 행하시는 기적과 능력을 보고 파도도 바다도 잔잔케 했잖아요. 폭풍도 잠잠케 하고.
‘야~ 저가 뉘시기에 과연 저런 일을 하느냐?’
보니까 다윗 정도의? 다윗이 골리앗만 물리쳤잖아요. 특별한 신적 능력은 별로 보이지 않았거든요.

근데 예수님을 보니까 모세가 하는 능력 같은 걸, 바다를 가르고 이런 걸 막 보여줘요.
엘리야가 하는 것도 다 보여줘요.
이 모든 것들을 다 끌어모은 분이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이분이 그리스도가 된다면, 다윗 언약에서 언약하신, 약속하신 그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가 된다면 그분이 이루시는 그 나라는 어떤 나라겠느냐? 이 얘기예요.
어떤 나라겠습니까? 천국이거든요. 그게. 그게 하나님 나라예요.
지금 베드로는 그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거예요.

그 ‘그리스도’가 어떤 그리스도?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다윗 언약의 성취자로서 다윗 왕으로 오실 기름부음 받은 자,
시편 2편에 나오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려 만국 열왕들이 꿇지 않으면 철장에 의해서 박살 내는
그러한 강력한, 이게 로마 카톨릭이거든요. 이게. 느부갓네살 왕이고.
오늘날 교인들 한 10만 명 되는 그 목사들이잖아요.

이만희만 그런 게 아닙니다.
교인 수가 200~300명만 돼보세요.
목사가 위임 목사가 돼버리면 은퇴할 때까지 지금 70까지 갔거든요. 이제 어떤 교단은요
그것도 없앤답니다. 왜냐하면 연수가 어떻게 돼요? 120세로 갔거든요.
근데 그 법을 만드는 집단들이 목사들의 수가 더 많잖아요.
아예 없애자는 거예요.

없애면 교회는 누구 소유예요? 목사 소유예요. 교인들이 신임 투표를 하겠지만
안 나간다 그러면 총회 법 자체가 못 쫓아내게 돼 있어요.
그래서 뭘 요구합니까? 돈을 요구해요.
그래서 쑥대밭 된 교회가 한두 개가 아닙니다.

지금 이 베드로가 ‘그리스도’라고 얘기했을 때
이 ‘그리스도’는 어떤 그리스도냐?라고 할 때는
방금 말씀드린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 플러스
그다음 ‘모세 자신’ 플러스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 내렸잖아요. 그다음 플러스
그다음에 ‘선지자들, 엘리야 지금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 하나’ 이걸 다 다 엮어가지고
그 능력을 다 담은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이 그리스도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누가 믿고 있느냐? 하면
베드로가 믿고 있다라는 겁니다.

지금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이다, 지도자는 하나뿐이다” 했을 때
지금 이 말씀을 예수님이 무엇을 바탕으로 하시느냐? 라고 할 때는
지도자가 그리스도면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라는 거예요?
지도자니까 위에서 다스리는 분이라는 말이에요? 아니면 섬긴다는 분이에요?

이게 이게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이 완전 페이크입니다.
지도자는 그리스도뿐이라고 했을 때 베드로가 갖고 있는 그리스도 개념은
다윗 언약의 성취자니까 강력한 힘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분이잖아요.

근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 말이에요? 아니에요? 아니죠.
베드로는 이 말씀을 못 알아들어요.

우리는 잘나가지고...
이 이후를 살고 있잖아요. 그러면 이 말씀이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알아야 되는데
문제는 오늘날 교인들도 이걸 몰라요. 목사들도 몰라요.
이 의미가 그런 의미인지를. 꿈에도 생각 못해요.

그리스도가 지도자라 하니까 그리스도가 어떻게 통치합니까?
부활하셔서 주가 되셨으니까 주님이 어떻게 통치한다 생각하죠?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면 (내일 강의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면 하나님 나라의 주가 누굽니까? 왕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이 ‘하나님 나라’는 말 자체가 성경이 정말 오묘해요. 사실은 이 하나님 나라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거든요.

그 ‘예수님의 나라’를 제자들이 ‘당신의 나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그 강도가, 한 강도가 ‘당신의 나라’라고 지칭을 해요.
그리고 골로새서에서 ‘아들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성경 구절이 거의 없어요.

제가 그래서 생각을 해봤어요.
 ‘왜 하나님 나라를 성경 전체에서 썼고 사도행전 28장에도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다라고 설명을 하느냐? 그 이유가 뭘까?’ 제가 생각을 해보니까 그 이유를 제 나름대로 찾은 답은 그거예요.
‘예수님의 나라’라고 하는 순간 인간들은 예수님의 나라를 믿어버려요.

‘하나님 나라’라고 표현을 해야만 무엇을 다 담을 수 있느냐? 하면요.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다 담을 수가 있어요.

지금 ‘그리스도’라는 이 의미가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가 갖고 있는 그리스도의 의미냐? 그 지도자의 의미냐?
‘아니라’는 말씀을 예수님이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말씀을 하실 때 좀 알아듣게 하시면 얼마나 좋아요?’
여러분 알아듣게 해도 못 알아들어요. 인간은.
왜 그게 못 알아듣냐? 하면요.
말씀은 하나님 소유이기 때문에 성령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논리적으로 이해를 했다쳐봐도 이해하면 어떤 태도가 나오는가? 하면
‘그 그리스도가 그런 의미지.’가 되지만
성령이 역사하면 이 말씀 앞에 죄인이 돼요. 코드가 달라요.
접속이 다르다는 겁니다.

말씀은 항상 설교자가 지식으로 가르치고 올바름으로 가르치죠.
가르치는데 이 말씀이 성령의 말씀이 되잖아요?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게 되면 십자가를 증거하는 말씀으로 바뀌어져 버립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이걸 못 따라오죠.

지금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렇게 얘기했을 때
베드로는 신이 났어요. 그다음 나오는 게 (마16: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 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기독교 2천년 역사가 기독교를 완전히 개판 만드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어떻게 개판 만들 수 있느냐?’
이건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을 주셨잖아요.
구약을 주니까 남은자 유대인들이 어떻게 해버립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뭘로 만들었어요?
우상으로 만들었잖아요. 제 논리가 문제가 있나요?

예수님의 말씀이 기독교를 완전히 우상 종교로 만들었다는 이 말이
사람들은요. 이 말을 못 받아들여요.
아니 하나님의 말씀이, 언약이, 언약을 믿는 그들이 진짜 하나님을 살해했잖아요.
그거는 인정하면서 이건 왜 인정 못해요?

왜 못할까요?
저그들은 안다는 거예요. 자기들은 누구와 다르다?
저 유대인들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 못해요.

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해 버렸냐? 하면
예수님이 베드로가 말하는 고백의 수를 읽고 있어요.
그 고백은 철저하게 다윗 언약이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겁니다. 그리스도를 약속했거든요.
천국을 약속했습니다. 그 다윗 언약의 성취로서의 고백을 니가 믿고 있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 언약을 하나님이 하셨으니까 다윗 언약을 하나님이 반드시 성취를 하셔야 되죠.

성취를 하시는 방식이 뭐냐? 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칭찬한 거예요.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니라”
이 말씀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하면
요한복음에 보면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는 자가 등장한다 하거든요.
성령으로 난 자거든요.

지금 여기에서 “혈육이 아니요” 혈육이 아니오라는 말의 의미 속에는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하면서
로마서도 나오잖아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 라고 할 때
이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다’라는 것이 다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거든요.

‘육신적으로, 혈통적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이 다윗 언약을 통해서 오시는 메시아니까
이 그리스도는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돼요? 아니어야 돼요? 아니어야 되고.

‘다윗의 후손으로 올 자’가 하나님의 아들로 명명이 되었기 때문에
혈통으로,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그분이 그리스도로서
천국의,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어야 된다라는 게 1차적인 해석입니다.
이 해석에 의해서 누가 죽임을 당하느냐? 하면
진짜 하나님의 아들, 진짜 그리스도.

왜 이 방식을 취하느냐?라고 하면
인간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말씀을 주면 그 말씀을 자기 쪽에서 해석하고 장악을 해요.
장악을 했기 때문에 베드로가 아직 성령을 못 받았잖아요.
못 받은 입장에서 얼마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있는 그러한 내용이 나올 수 있는 거예요.
그런 내용 자체가 뭐예요? 육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칭찬을 하느냐? 하면
예수님은 ‘육신이 혈육이 아니요’라는 내용을 그 고백 속에 담아버려요.
베드로의 고백 속에 담아버리면,
방금 베드로는 육신으로 고백한 거잖아요. 육신으로 고백했다는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육신으로 고백했다’는 것은 철저하게 언약을 믿고 언약을 따라서 고백한 거예요.
그 고백한 자가 누구를 죽입니까?
예수님을 죽이죠. 예수님을 살해합니다.
그 살해당한 분이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정반대입니다.

이쪽에서 다윗 언약을 믿는 자들은, 말씀을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왕이 될 때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왕을 어느 누구도 언약의 성취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잖아요. 주님이 심판주가 되신다면 심판주는 어떤 모습을 보여야 돼요?
강력한 힘을 소유한 지휘력을 가져야 돼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보세요.
주님인데 주님이 어떤 일을 당합니까? 주님이 자기 백성들과 동행을 하는데
복음이 전파되는 걸 보세요. 예루살렘에 핍박이 임하니까 쫓겨다니면서 복음이 전파돼요.

다윗 언약을 성취한 그리스도라면 다윗은 군사력을 동원하여서 주변국을 다 점령할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주변국을 다 점령하여서 그들을 꿇려야 되잖아요.
그런데 복음은 어떻게 전파돼요?
우리가 볼 때는 점령군처럼 전파되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
복음이 전파될 때 핍박이 오죠.
원리가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생명을 가져왔기 때문에.
핍박이 오는 그 상황 속에서 생명이 계속해서 전파되고 드러나는 방식이에요.

그런데 이게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 국가로 만들어버린 이후부터는 뒤바뀌어버리죠.
안 믿으면 어떻게 합니까? ‘너 공교회에 못 나와’
맞잖아요. 기독교 회사가 기독교인만 뽑는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나 모태 신앙입니다.’ 이래요. 교회 한 번도 안 갔는데.
그렇게 할 거 아닙니까?

지금 이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거죠.
“혈육이 아니요”라고 할 때는 베드로가 알아들어야 되는데 못 알아듣죠.
그러면 성령 받은 자들은, 성령 받은 베드로는 지금 이 말씀을 알아들어요.
오순절 날 성령 받은 이후에 베드로가 이 말씀을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내용이
이제야 아는 거예요. 성령 받은 이후에.

그럼 예수님의 칭찬은 누구를 향한 칭찬이에요?
베드로를 칭찬하는 겁니까? 아니면 예수님 자신을 칭찬하는 겁니까?
아~ 이게 진짜 이게 만만하지 않아요.
근데 사람들은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대로 보자고 하면서 베드로를 칭찬한다고 생각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실 십자가의 완성체로서의 고백을 그 속에 담아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어떻게 바뀌어버립니까? 사도행전에 가면?

내가 그걸 믿었는데 예수님을 모른다 하고 부인하고 팔아버리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그 죽임당한 예수가 뭐예요?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물론 사도행전에서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라고 하거든요.
이거 잘 봐야 돼요.
이 땅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이분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땅에서는 주와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거예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모습이에요.
요한계시록에 복음 때문에, 어린 양의 그 피복음 때문에 죽임 당한 자들이 어떤 모습이냐? 하면
왕 노릇하는 모습이에요.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잖아요. 아무튼 이 말씀도 정말 만만치 않은 말씀인데,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왕 같은 제사장, 왕의 제사장’이라고 할 때
예수님이 왕으로 오셔서 대제사장으로 어떻게 됐습니까?
이 땅에서 제거당했잖아요.

그러면 이 땅에서는 왕 같은 제사장은 어떤 인생을 산다는 거예요?
죽으라는 거예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잖아요.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다 죽어요.

그런데 성도는 성령 받지 못한 자들과 다른 죽음을 갖잖아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기 때문에 복된 죽음을 갖는 겁니다.
복음이 나오기 때문에 이 땅에서 어떤 대우를 당하느냐? 하면 미움받죠.

왜냐하면 이 세상은 어떤 그리스도를 원합니까?
‘지도자인 그리스도, 힘이 있는 그리스도’를 원하죠. 그죠?
그런데 성도들은 어떤 그리스도를 전합니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전해요.

‘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우리한테 뭐 해줄 수 있어?’
질문해봅시다. 뭐 해줄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뭘 해줄 수 있어요?
사람들은 뭘 원합니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주가 되셨으니까 뭘 해줍니까?
“돌로 떡덩이 만들어라” 이거 누가 이야기했어요? 마귀가 했잖아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보호할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더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보호받았잖아요.
보호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어요.

오늘날 교회는 모두가 다 어떤 지도자를 원합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지도자는 그리스도뿐이라”고 했을 때 이 본문을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예수님만이 지도자니까 우리가 그 지도자를 따라가서, 우리가 지도자 되지 말고...’
이미 해석 자체부터 엉터리죠. 엉터리니까 모두가 다 지도자 되는 겁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
이 ‘그리스도’라는 이 고백이 앞부분에 나왔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결국은 베드로의 이 고백 자체가 어떤 태도와 일치하느냐? 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심판자가 되는 거예요.

처음에는 심판자 되려고 까불다가
주님이 가만 안 둡니다. 다 흩어버립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데, 제자들은 남아 있거든요.

남아 있으면 뭐 하겠어요?
인간은 남아 있고 교인 수가 많아지면 정치해요. 정치.
물론 성령께서 가만 안 두죠. 이 환경을 가만 안 둡니다. 성령께서.
우리는 ‘내가 변하면 안 되느냐?’ 이런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내가 변할 그게 안 돼요. 내가 변화되면 부처가 돼요.

그래서 주님은 이 성도들을 모으게 하시고
사람들 속으로, 복음이 없는 곳으로 사람을 밀어넣어요.
밀어넣어서 자기 백성을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고스란히 따라가게 하고 걷게 하는 겁니다.

(마23:10절)
“너희의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그렇게 말씀을 하시고 하신 말씀이 (마23:11절)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이렇게 나오거든요.

이 뒤에 보면 다시 마태복음 16장 18절로 가서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에 반석이 나오거든요. 반석 위에.
‘이 반석이 뭐냐? 베드로의 고백이냐? 베드로냐?’ 이것 갖고 이제 싸우기 시작하거든요.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베드로의 고백이라 그러고 카톨릭에서는 베드로라 그러고.
그 말이나 그 말이나 똑같아요.
베드로가 없으면 베드로의 고백이 없을 거 아니에요.
중요한 건 이 반석이라는 의미가 엉터리라는 거예요.

이 고백이 제대로 된 고백이 되어버리면 이게 신앙고백이 되거든요.
‘제대로 된 신앙 고백한 사람은 천국 간다’라는 논리예요.
그러면 제대로 된 신앙 고백한 자를 베드로라 했을 때, 베드로를 반석이 했을 때,
로마 카톨릭이 베드로가 1대 교황, 2대 3대로 넘어갔을 때
그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반석이니까 어떤 반석이에요? 튼튼한 반석이잖아요.

그런데 방금 제가 해석을 했죠.
어떤 반석이었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반석인데.
그런 인간을 어떤 고백으로 바꿨어요?
제대로 된 고백으로 바꿨는데 누가 그렇게 바꿨습니까?
엉터리 고백한 자가 예수님을 살해했어요. 살해했는데
살해당한 분이 엉터리 고백자를 화목 제물이 되셔서 죄를 용서하셔서
제대로 된 신앙인으로 바꿔버렸어요.
그러면 ‘제대로 된 고백한다’ 안 나와요.

아까 믿음도 똑같잖아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엉터리잖아요. 그 엉터리 믿음.
똑같습니다. 고백도 엉터리 고백이죠. 그게 반석이라는 거예요. 얼마나 든든한 반석입니까?
이거는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십자가니까.

근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고백이 반석이 되면
음부의 권세가 웃습니다. 비웃습니다. 마귀가.
‘그래 너 그 지식 그거 갖고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그게 선악과를 따먹게 한 악마의 노림수거든요.
그걸 갖고 장난을 치잖아요.
하나님의 교회가 되었든 신천지가 되었든 개혁교회가 되었든 장로교회가 되었든
모두가 다 뭘 갖고 이야기해요? 신앙고백.
신앙고백으로 구원 못 얻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구원을 하죠.

그들이 왜 그런 해석을 하느냐? 하면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고 했을 때
이 그리스도의 지도자 개념을 누구처럼 해석을 하느냐? 하면
베드로처럼 해석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마23:11~12절)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런 인간 없습니다. 이 말씀을 누가 성취해요?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이 말씀을 성취를 합니다.

왜 제가 이 말씀을 예수님이 십자가로 성취한다라고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인간들은 논리 구조가 이렇게 돼 있어요.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이 당위성을 갖고 이야기하면
‘충성! 제가 섬기겠습니다’
섬기면 뭐가 되죠? 내가? 논리가? 큰 자잖아요.

그다음 하시는 말씀이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했으니까
‘낮추면 되네요?’
예수님이 인간을 모르겠습니까? 예? 아 정말 너무 답답해요.

진짜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바꾼 거예요. 인간들이.
성경을 계시라고 해놓고, 하나님의 말씀이라 해놓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 말을 해놓고
이 말씀을 인간의 말로 다 바꾼 거예요.
인간이 이거 노림수를 갖고 다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고 말씀을 하셨고,
이 ‘그리스도’라는 말씀을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질문을 해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갖고 와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왜 제가 이 말씀대로 되어지느냐? 하면
성도는 이 상황 속으로 내몰리게 돼 있어요. 이 상황 속으로.

성도는 이미 주님과 함께 죽었죠.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이것도 글을 다 읽으셨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이미 성도는 양자가 됐어요.
높임을 받았어요. 높임을 받았기 때문에 그 높인 자는 어떻게 삽니까?
섬기는 자로 살죠.

예수님이 높은 자로서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자기를 낮추어서 죽기까지 복종하셨거든요.
원래 죽음은 범죄한 인간만 죽어야 돼요. 하나님은 죽을 필요가 없어요.

마태복음 27장으로 넘어가면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요.
하나님의 자기 부정이에요.
하나님이 자기를, 아들을 죽이는 경우는 없어요. 죽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잖아요. 그 그리스도가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셨다고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하잖아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그 그리스도예요.

하나님의 본체시잖아요. 이 표현이 놀랍죠. 하나님이라는 거예요.“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이지만 이 하나님이 자기를 비웠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 전체를 깔아야 빌립보서 2장이 해석이 돼요.

하나님의 자기 부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분은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예요. 섬기는 자입니다.
이게 야곱 언약과 지금 연결해서 얘기해야 되는데 시간이 없으니까 그건 다음 시간이 오면 하고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서의 그리스도’냐? 라는 거예요.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군림하는 그리스도’예요.
예수님이 말씀에 다윗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이것을 생각을 못 해요.
그런데 성령을 주게 되니까 이 말씀의 세계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어떤 사태로 내몰리느냐? 하면
자기를 지도자로 하는 거예요. 자기를 지도자라고 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에 보면 바울파, 아볼로파가 생겼잖아요.
여러분이 그런 말씀을 관람적으로 보면 ‘나쁘네’라고 하지만
여러분이, 당사자가 여러분 파벌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기분 좋아요? 안 좋아요? 예?
집사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한 5천 명 있다. 기분 좋아요? 안 좋아요?
근데 그런 사람에 대해서,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내가 십자가 안 졌는데 너희들 지금 무슨 짓 하느냐?’
이 말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어요? 너희들은 지금 다 아니오라는 이야기잖아요.
그런 말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바울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십자가 졌느냐?”라고 해버려요.
‘십자가 지지도 않았는데 왜 내 파를 만드느냐?’ 이거예요.
그 파를 만든 자들이 탐심들이 작동하거든요.
그 사람을 지도자로 내세움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누구처럼 된다는 거예요?
지도자 위치에 간다는 거예요. 논리가. 지금 제자들이 지금 그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그리스도니까 (그다음 뭘 요구했습니까?) 우리를 한 자리 차지하게 해주세요.’
당신의 나라에서 우편 좌편... 이 논리거든요.

그런데 진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고
죽기까지 복종해버립니다.
그게 그리스도에요.

그 그리스도의, (성경이 이래서 오묘한 거예요.)
그리스도의 영이 임해요. 성도는. 표현이 그렇게 돼 있어요. 로마서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을 반복하도록 성도를 이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성도 속에서 계속해서 실제화되고 현장화되어서
말씀이 살아 있어서 역사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 말씀은 어떻게 작동하겠어요?
모든 인간들은 죄인밖에 안 돼요. 자기를 높이려고 하죠.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 어떻게 끌고 갑니까?
계속해서 십자가를 이야기하니까, 십자가 앞에서는 자기가 책망을 받고 죄인이 되고
죄인이 되니까 어떤 사태로 내몰립니까? 죄인이 되니까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말씀을 갖고 노림수로, 제자들처럼 노림수를 갖고
이 말씀대로 살겠다는 자들은 악마의 화신입니다.

제일 가증스러운 자들이 누구냐? 하면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낮은 자입니다. 섬겨야 되지요.’ 이런 자들이에요.
이 말씀의 실제는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뿐이에요.

목사들의 삶은 제가 그런 얘기를 가끔 했거든요.
목사들이 가장 중요한 건요. 실제 삶이 어떤 삶이냐? 하면요.
십자가 피를 전해야 돼요.

근데 사람들은 목사를 어떤 목사를 훌륭하게 보나요?
행위로, 본으로 보이는 걸 목사의 삶의 그 정수는요. 설교예요. 그 설교에 모든 것들이 다 담기게
돼 있습니다. 자기 부인이 담기고요. 아니요가 담기고 다 담기게 돼 있어요.

성령을 받게 되니까 지도자가 그리스도죠.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와버리니까 얼마나 편합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인도하는 대로 가니까 자기를 지도자로 인식을 할까요? 안 할까요?
안 한다 그러면 좀 곤란하고요.
하는데 얻어터지죠. 책망을 받아요.

왜냐하면 계속해서 지도자로 이렇게 인정을 받거든요. 복음을 전할 때 보면.
바나바도 그러고 바울도 그러고요. 디모데도 그러고.
지도자가 없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 지도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십자가를 증거하고
십자가를 증거하기 때문에 섬기는 자로 끝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기대했던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가 기대했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못 박혀 죽으신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말씀을 통하여 저희들에게 들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저희들에게 임하였기에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이 땅에서 섬기는 자로 십자가의 복음만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