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6-13 19:44
서울골방교회 강의 2 녹취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6  
녹취  구성모 장로

관리자 21-06-13 19:44
답변  
서울골방교회 2강 아브라함                                          06/09/2021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을 말씀 앞으로 인도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지혜와 계시에 영을 주시사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알아가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5  지금 저희들이 마태복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드린 말씀을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했을 때,
벌써 예수 그리스도 앞에는 이 아브라함과 다윗이라는 그 인물이 역사적으로는 먼저 앞서 있었죠.
그 앞서 있었던 그 인물들을 그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10  아브라함과 다윗은 긍정적인 인물로 빚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죠.
달리 말하면 여자의 후손에 대한 족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여자의 후손에 대한 족보이기 때문에
5  이 족보 자체는 여자의 후손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혈통적으로 난 인물들은 여자의 후손이 될 수가 없다라는 것이 이미 선행이 돼요.

그러나 인간들은 항상 무엇이 우선이냐라고 할 때는 시간적 순서가 먼저거든요.
시간적 순서가 먼저고
이제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시간적 순서가 다 깨져버립니다.
20  깨어짐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 이 아브라함과 다윗 자체가 부정당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부정당한다고 했을 때 완전하게 부정당하느냐 하느냐로 갈 때는? 그렇지는 않아요.
아브라함은 분명히 부정당하고 다윗도 부정당하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자리를 잡고 있죠.

약속이 자리를 잡고 있다 했을 때는
5  혈통이 부정당한다는 것을 항상 우리가 염두에 둬야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느냐 할 때는
약속이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식이 되어버립니다.

그 유대인들 같은 경우에 그 성경을 해석할 때라든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약속이 그 자기들 그 조상 속으로 들어왔죠.
30  들어왔기 때문에 자신들은 약속을 품고 있는 민족이라는 그런 의식을 갖게 되고
약속을 품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은 당연히 구원받는 민족이라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런 사고 방식은 이방인인 우리들도 동일하게 갖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가장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면 뭐 여러분들 모두가 다 진리에 대해서 갈구를 했고 찾고자 했잖아요.
철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이 진리를 안다. 안 그러면 믿는다. 이렇게 참된 진리를 깨달았다라고 하게 되면
그 자리에 주어는 항상 내가 놓여지고 내가 놓여 졌을 때 진리가 내 속으로 들어왔잖아요.
그러니 나는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생각하거든요.

5  그러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게 되면
항상 성령을 받은 자의 특징이 어떤 식으로 드러나느냐라고 할 때는
책망받는 모습으로 드러나죠.
책망을 받는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고
왜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느냐라고 할 때는
10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이 십자가를 증거하는 영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런 말들도 되게 어렵죠.

십자가를 증거한다고 하면 십자가, 십자가만 뭐 이야기하느냐.
그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신 분이 심판을 행하시죠.
5  그 심판 속에서 구원도 베푸시고 심판 속에서 지옥도 보내신다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은 성도에게만 이 구원의 능력이 임하게 되어 있죠.
그래서 구원의 능력에 임한 성도는
나 구원받았다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증인이 되는 자리는 마태복음에서도 계속해서 등장하겠지만 죄인의 자리에요.
20  죄인이 되지 않는 인간은, 인간이라고 표현을 할 수 없는데
어쨌든 죄인이 아닌 자는 주님의 증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어제 그저께인가 제 유튜브에 어떤 분이 댓글을 올렸어요.
여러분 아마 어제 설교 들으신 분들은, 들었을 줄로 그렇게 생각이 되는데
그 사람이 이근호목사님 설교를 많이 들었던 모양이에요.
5  제 설교는 제가 볼 때는 거의 안 들었어요.
그런 사람이 제 설교를 들을 이유는 없어요.
왜냐하면 뭐 제 설교 들어봤자 뭐 이근호목사의 아류(亞流)에 불과하니까
들을 게 없다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 사람을 많이 봤고요.

그러니까 그 글에 대해서 제 설교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30  다른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으니까 그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어요.
이 십자가 마을 사람들이나 뭐
제 설교를 들어보면 ’죄인이다 죄인이 된다‘ 이런 표현을 쓰니까
약간 비아냥 거리면서 많이 비아냥 거렸죠.
서로 죄인 되는 경쟁을 펼치는 데가 뭐 십자가 마을이다.
5  그 마을에 저도 포함시키는 거죠. 죄인 되는 경쟁을 펼치는 곳이,
그런 곳은 절간과 똑같다라는 거죠.
자기 부인, 그러니까 자기를 계속해서 나는 뭐 뭐랍니까?
자기를 계속해서 절제해 나가는 ’나는 아니요. 나는 아니오.‘
그 사람이 아는 것은 무엇밖에 모르는가 하면 내가 아는 죄인밖에 몰라요.
오늘날의 교회가 이 죄인이라 했을 때는 백이면 백이 거의 다 내가 아는 죄인이에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만드시는 죄인이 되었을 경우에는 결코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하죠.
5  ‘성령이 없다’라는 증거가 그러한 발언 속에서 드러나는 겁니다.
주님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했죠.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는 말 자체를 어떤 식으로 이해를 하느냐 할 때는
그 말씀 자체가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 자기 백성을 부르실 때
그 말씀 자체가 계속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려져야 되는데

10  그 말씀을 자꾸 어떻게 듣느냐라고 할 때는
처음 부를 때는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그다음에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었으니까
그 의인의 삶이라는 것이 어떠해야 되는가로 이해를 하는 거예요.
그 의인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말이 그런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이라는 것은 토라부터 언급을 해요. 토라는 뭐 뒤에 언급을 하는데
5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대한 말씀이다.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나와야 되는 것은 사랑이라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이 말이
십자가만 외치지 말고 죄인이라는 말을 외치지 말고 사랑이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복음을 좀 이렇게 관심을 갖고 복음 속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여기에서 다 걸려 넘어집니다.
20  왜냐하면, 이근호목사님 설교를 여러분도 혹시 들어보실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목사들이나 성경에 관심 있는 분들이 일단 접근하는 방식이
지적으로 접근하거든요. 지식으로
지식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져요. 옳고 그름
옳고 그름을 따져서 성경을 공부를 합니다.

5  옳고 그름을 따져서 성경을 공부해 나가면
아까 제가 얼핏 여러분의 말씀 나누는 걸 잠시 들었는데
박용기목사도 마찬가지거든요.
들어보면 맞는 말을 해요. 맞는 말을
맞는 말을 하는데 그 사람의 신학의 최종 결정은 그겁니다. 예정론이거든요.
30  그게 예정론인데 모든 것이 약속과 성취로 되어 진다는 거예요.
그 약속과 성취로 되어지는데
그 약속과 성취로 되어지는 것을 누가 알고 있고 누가 믿느냐라고 할 때는 내가 믿는다는 거예요.
약속과 성취라는 것을 이 자기보다 한 수 아래에 두고
자기는 그 약속과 성취를 믿는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거든요.
5  그런데 그러한 신학을 들어보면 맞잖아요.
우리가 학교에서 논리를 배울 때 논리적으로 접근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대로 진행되어지고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는 그런 하나님임이 성경에 분명히 나오거든요.              09:26
십자가 자체도 약속의 성취라는 거예요. 약속의 성취, 분명히 맞죠. 약속의 성취라는 건데
이 약속의 성취를 이 사람은 어떻게 보는가 하면
5  우리가 약속을 하죠. 약속을 하면 약속을 이루었다는 식으로 이해를 해요.
성경에서 말하는 약속의 성취라는 말은
성취가 먼저 있고 약속이 주어졌다 이 얘기입니다.
아! 정말 어려운 이야기거든요.
이걸 달리 표현하면 새 언약이 먼저 있다라는 거예요.

10  그 사람 같은 경우에는 창세기부터 출발해 들어가거든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창조 전부터 들어간다라고 우기는데
창조 전부터 들어가도 창세기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신약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창세까지 가잖아요.
창세기까지 가서 그전에 올라가면 창세 전에 가잖아요.
5  그 시간의 흐름이 이렇게 간단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나 세례요한의 시간 흐름은 그 앞에 십자가가 먼저 있어요.

그러면 왜 그 사람이 그렇게 밖에 해석이 안 되느냐라고 할 때는 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아니 어떻게 그렇게 단언적으로 말씀하냐 그러면
영이 없는 자의 특징은 십자가 피를 안 내세웁니다.

20  영이 없는 자는 똑같이 어떤 자들과 똑같이 나오는 거 하면요? 유대교 유대인들처럼 되요.
우리에게는 약속이 있고
약속 있다는 말은 그 약속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안 믿는단 말입니까? 믿는다는 말이죠
우리에게는 약속 있고 약속을 믿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성취하시는 분이니까 그걸 믿는다는 겁니다.

5  그럼 구약 성경에 들어가 보면 이미 창조 때부터 그 전부터 상고 때부터라고 표현을 하니까
그 전전까지 유대인들은 다 끌어당길 수 있어요.
그 창세 전에 예정하사라는 말은 유대교에도 다 있어요.

그것은 이방인에게도 신이라고 하면 세상이 만들어지는 신이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상식적으로
방금 제가 에베소서를 언급하면서 뭘 빼버렸습니까?
30  창세 전에 예정하사라고 말씀을 드리면서 뭘 빼버렸어요? 그리스도 안을 빼버렸죠.
이 그리스도 안이, 성령이 없으니까 무슨 말인지를 이해를 못해요.
그리스도 안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기 구원밖에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창세 전부터 이미 그리스도 안에 창조됐다라는 거예요.

십자가가 먼저 있고 십자가가 먼저 있었다는 말은
그다음부터 나와야 되는 것은 어두움이어야 되고 죄인이 등장해야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과의 약속이
그 아들이 십자가 지셔서 만유의 주로 심판주로 세워지는 것이
아버지와 아들과의 약속이고 그것이 바로 새 언약의 성취기 때문에 그래요.
5  갑자기 또 시간이 뒤로 와버렸죠.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시간이 우리가 생각하는 식으로
첫 번째 사건이 일어났으니까 두 번째 사건으로 가고
두 번째가 일어나니까 세 번째 이렇게 가는 게 아니에요
이 모든 것들을 다 섞어버려도 돼요.
10  다 섞어버려도 항상 십자가가 가장 먼저고요.
가장 먼저라니까 그럼 가장 나중에 아닙니까? 가장 나중이에요.
주님이 알파요 오메가라 했잖아.

우리가 지금 학교에서 어릴 때부터 배워온 게 부모들로부터 배워온
그 의식 사고 방식 자체가 악마적이라는 겁니다. 교육 자체가
5  그러면 그런 교육들은 누구를 위해서 교육을 하는 거예요?
사람을 위해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교육이잖아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뭐 똑똑한 사람일수록 무식한 사람도 다 똑같습니다.
무식한 사람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만 똑똑한 사람은 고상하게 드러내는데
그들이 하는 모든 일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거든요.
20  자기 구원을 위해서 접근을 하게 되고
그 구원의 방식은 항상 자기로부터 출발을 해요. 자기로부터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구약에 들어가 보면
유대인들이 우리가 볼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을 했잖아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먼저 불렀잖아요.
5  먼저 불렀는데 이 역사가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시간이죠.
역사가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고 방식이 어떻게 바뀌느냐 할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선택했지만,
우리가 거기에 화답하지 않으면 믿음으로 화답하지 않으면 ㅉㅉㅉ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취소한다고 생각해요. 멸망당했거든요. 실제로 그들이

30  하나님께서 율법을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이렇게 두셨잖아요.
두 가지 갈래의 길을 두실 때
자기들이 어떻게 해야 되느냐에 따라서 생명의 길이 되는지 사망의 길이 되는지
그 선택의 기로에서 자기들은 선택을 해야 된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 목적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거예요.
5  선택하신 목적은 모르고, 선택하신 하나님의 목적대로 충실히 행하고 있는 겁니다.

이 재밌는 게 이런 거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그 야곱을 통하여서 이스라엘 자손,
그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드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잖아요.
율법을 주시니까 그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들여다보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그 선악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5  하나님과 같이 되는 모습이 고대로 도출이 된 거예요.
이 무슨 얘긴가 하면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율법에 대한 전문가들이잖아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칭찬했거든요.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라고도 칭찬하고
그다음 그들의 의가 대단하다라고 하잖아요. 
10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거든요.
근데 이 말씀의 의미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야말로
인간이 끄집어 내어놓을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 의를 실현한 자라는 얘기입니다.

제가 지금 지어내는 얘기가 아니고
5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 얘기를 들어봐도 우리가 볼 때는 깜짝 놀랄 이야기고.
빌립보 3장에 나오는 사도바울 이야기도 마찬가지잖아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 살면서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을 때
20  그 하나님의 아는 지식, 그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선악을 나누죠.
선악을 나누어서 예수님은 악이라 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립니다.
이게 성경 전체의 흐름이에요.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겁니다.
물론 그것이 주 내용이에요. 이 내용이 핵심이고요.

5  그 스데반집사님의 사도행전 7장 설교 이번 주부터 제가 설교를 합니다만
그 7장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전체 맥락을 어떻게 꿰뚫고 있어요?
십자가와 만나는 자리를 조성하죠.
스데반이 중매를 서고 있잖아요.
너희들은 이렇게 그 하나님에 대해서 대적했다라는 내용
30  그리고 성전을 세웠지만
이 성전은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런 곳에 계시지 않다.
이 말은 자신들은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성전이 참 성전이라고 우기잖아요.
우기는데 스데반집사님은 그 우김 자체가 엉터리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모습 자체가 죄인이라고 규정하면서
5  십자가와 만남을 주선하고 중매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인이 안되면 십자가를 만날 수가 없거든요.

그 아브라함 때부터 우리가 이스라엘 자체가 얼마나 죄인이었는가를
그 죄의 깊이를 지금 파헤치고 있단 말이에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성경이 그게 다 입니까’라고 물으면? 그게 다예요.
다른 것도 있지 않느냐? 다른 게 없어요.

성경에는 딱 두 가지 밖에 없어요.
십자가밖에 없는데,
5  십자가에 의해서 용서받는 자와 용서받지 못 받는 자 이 두 가지 내용밖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데는 너무 냉랭하다, 십자가 말은 너무 냉랭하다.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이웃 사랑해야 된다는 이야기인데 제가 어제도 그런 얘기지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이 용어 자체가
10  󰊝육적으로 듣게 되면 서로 사랑이 우리가 생각하는 서로 사랑이 돼요. 그런데 이 서로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듣게 되면
  육적으로 이야기하는 서로 사랑을 깨버리고 부정하는 서로 사랑이 돼요.

성경이 참 재밌는 게 뭔가 하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 못 박혀 잡혀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5  ‘내가 너희를 사랑한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했잖아요.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자! 그러면 그 다음에 성경에 어떤 영향이 나와야 되느냐라고 할 때는
제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게 나와야 되죠.
혹시 성경 읽으면서 제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걸 보신 적 있습니까?                    19:32

이런 게 이상하지 않아요.
20  왜냐하면 그 서로 사랑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제가 이 말은 서로 사랑하라는 이 말이 지금 오늘날 흔히 교회에 사는 그 서로 사랑이거든요.
이거 절간에서 하는 얘기고 그냥 세상에 사는 얘기는 남녀호랑개교에서
아픈 사람 있으면 찾아가고 빨래해주고 집 청소해주고 맛있는 밥해주고 반찬 갖다 해주고
돈 없었냐 알았어, 알아서 이것은 주께서 시킨 일입니다. 돈을 주라고 했습니다.
5  갖다 주고 위로해주고 슬픔당하면 가서 또 위로 해주고
이런 걸 쓰는 사랑이라 생각해요.

혹시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믿음이 좋아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신지 모르겠지만
제가 설교를 이렇게 복음을 전해보면 사람들이 다 그런 걸 생각해요.
30  지가 악마거든요. 지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벌써 악마적 생각이라는 겁니다.
근데 그런 생각을 예수 안 믿는 사람한테 갖다 물어보세요.

지금 대한민국 사회가 왜 기독교를 욕합니까? 그들이 생각하는 교회가 따로 있잖아요.
너희가 진짜 교회 예수님의 제자라면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서로 사랑하라 용납하고 인내하고 받아들이고 희생하고 감사하고
5  너희들은 꼬라지 보니까 맨날 화내고 감사는 게 하나도 없더라. 부터 시작해가지고
어려운 일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 안산홍 그런 데 갑니까? 교회 다니다가
교회는 사랑이 없거든요. 일반교회는
그런 데 가면 전재산 다 바쳐도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5  그래서 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그럴 때는 생각을 안 하는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저 같으면 그 말씀대로 제자들이 살았는지 좀 찾아보겠어요.
사도행진 이후에 제자들이 서로 사랑했는지 한번 찾아보겠어요.
혹시 제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여러분이 한번 손들고
10  제가 여러분 지금 음성을 꺼놓았기 때문에 손을 들면 제가 음성을 켜서 한번 들어볼게요.

제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게 나옵니까?
이 굉장히 재밌는 게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잖아요.
함께하면서 제자들이 서로 사랑했나요? 서로 경쟁했죠. 서로 경쟁.
전부 다 속을 감추고 있어요. 꼭 지금 제 말씀을 드린 여러분들 같은데
5  저도 마찬가지고 다 숨기거든요. 가면(假面) 쓰고 있단 말이에요.
그 언제 본성이 드러나느냐? 사건이 발생해야 되거든요.
이 야고보 요한이 성경은 두 가지 사건으로 나오니까
하나는 엄마가 와서 얘기했다 그러고, 하나는 둘 다 본인이 얘기했다 나오는데
그 두 사람이 자기의 본색을 딱 드러내는 순간 나머지 제자들도 본색이 확 드러나는 거예요.
20  아마 야고보 요한 둘이는 서로 쑥덕 쑥덕 했을 거예요.
야 우리가 지금 따라다니면 나중에 예수님이 왕이 될 때
하나는 너는 좌편 나는 우편 그게 이렇게 앉을 것이다라는
그런 기대감을 잔뜩 갖고 예수님을 따라 다녔을 겁니다.

그럼 나머지 제자들은 뭐냐? 왕따죠 뭐. 두 사람의 왕따.
5  각자 고생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수제자니까
베드로가 올라가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은 하지만
그건 가봐야 아는 거고 서로가 경쟁 관계였어요.

서로 사랑하라 할 때는 여기에는 누가 개입해야 되느냐라고 할 때는
십자가이신 주님이 개입돼야 돼요.
30  예수님이 그 자리에 있게 되면 가롯유다 빼버리면 모두가 다 뭐가 되죠?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 버립니다.

잘 이해가 안 가시죠.
제자들이 자기들끼리는 누가 높으냐 따지죠. 그런데 거기 가운데 예수님이 계시잖아요.
계시니까 이 자체가 서로 사랑이 돼버려요.
5  십자가 피가 나오지 않는 곳은 사랑이 없는 곳이죠.

그래서 성경에 보면 제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장면이
제가 알기로는 그 어디에 나오느냐 할 때는
갈라디아서 2장에 사도바울과 베드로의 관계에서 가장 잘 나온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외식을 했거든요.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
외식을 할 때 사도바울이 책망을 하죠.
5  생명이 나와야 사랑이 되는데 생명이 안 나오는 것은 사랑이 안 돼요.
지금 왜 제가 이런 식으로 말씀드리냐 할 때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나의 사랑으로 바꿔치기 하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갖고 있는 그러한 어떤 뭐랄까?
교회에 대한, 예수님, 사랑, 구원 십자가 그 개념들을 자기 머릿속에 이미 정리가 다 돼있어요.
10  선악과를 먹은 자들은
심지어 설교를 들어도 이 인간 몸 자체는 자동 기계입니다.
뭔가를 생산하는 공장과 같아서 들어가면요.
모든 것들을 잘게 잘게 부수어서 어떤 식으로 바꿔치기해버리냐고 할 때는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바꿔치기해버려요.
5  최종적으로는 가인과 같은 사고 방식으로 모두가 그런 식으로
이제 사고 방식을 진행시킨다는 얘기입니다.
그러한 사고 방식으로 성경을 대한다라는 거예요.

그 마태복음을 사람들이 뭐 족보기 때문에 재미없어서 읽지도 않겠지만, 수도 없이 읽고 있지만
그 접근법 자체를 들여다보면 예수님을 살해한 유대인과 전혀 다르지 않다라는 겁니다.

20  오늘은 이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을 조금 나누겠습니다.
그 아브라함은 우리들이 잘 아시다시피 여호수아 24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24장 2절에 보면
(수24:2~3)
2 여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5  3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에는 이 아브라함은 다른 신들을 숨겼어요. 우상을 섬겼습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어떤 곳에서 구원했느냐라고 할 때는
30  태국 같은 경우에는 불교 국가잖아요.
뭐 국민 예를 들어 100프로가 아주 불교인이라 쳤을 때 그 속에서 아브라함을 택한 겁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택한 백성이 되었느냐라는 질문이 성립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조건을 들여다봐도 지옥가도 마땅하다 얘기밖에 안나오고요

조건 자체가 없어요.
5  아브라함이나 그의 아버지나 그의 할아버지나 모두가 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었거든요.
그들은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택하였다는 겁니다.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자는 아브라함 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아버지 이런 사람들이 하란으로 이동을 하잖아요.
약속의 땅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죠.
어떻게 이동했느냐 이런 게 궁금하시면 창세기를 읽어보면 어떻게 이동하는지 다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 하셨을 때 그냥 갈 인간은 아무 없어요.
5  우리들은 그런 생각을 하잖아요. 가라 하면 알아가겠습니다, 이런 거 없습니다.
주께서 환경을 조성하거든요.
환경을 조성하면요, 떠나는 상황을 마련해 줍니다. 자기는 가기 싫어도 가야 돼요.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빠져나올 때 모세와 아론을 보내잖아요
모세와 아론을 보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보내서 너희를 약속의 땅으로
10  인도하게 하시려고 나를 보냈다라고 했으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알아서 가겠습니다‘라고 나와야 되는데 그들조차 알아서 갈 마음 없어요.

우리가 지금 그만 살고 죽어라. 이러면 죽겠어요?
네 아직 시집도 못 보내고 장가도 못 보내고 회수할 돈도 많고
이제 조금 몇 달만 있으면 이자가 가득 나오는
5  그 뭐 적금이 이제 끝나는데 마음 갈 마음 없다니까요.
그 성경을 관람자로 보니까 야! 이 사람들이 진짜 문제가 있구나. 이렇게 보지만
말씀 속에 들어가게 되면 남의 얘기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이스라엘 자손들도 마찬가지고요.
이들은 본인들이 원하지 않습니다. 이런 게 참 독특하죠.
20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이 원하는 거와 주님이 주시는 것이 서로 안 맞아요.
예를 들면 이 병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오잖아요.
병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오는 것은 그 이유가 간단해요.
병을 낫고자 위해서 찾아오잖아요.
5  구원받기 위해서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물론 율법에 의하면 병이 낫는 것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고 깨끗하게 되는 것이고
깨끗하게 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러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곧 유대인들의 사고 방식에 불과하죠.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피로 죄 용서함을 받는다는 생각은 못하죠.
30  꿈에도 생각 못하는 겁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 메시아를 어떤 분으로 대하느냐라고 할 때는
엘리야, 엘리사 같은 분으로 대하는 거예요. 엘리야 엘리사 같은 분.
그들은 그 선지자들이 능력을 행하잖아요.
죽은 자도 살리고 그저 문등병도 낮게 하고 하늘에서 불도 내리고
5  그런 기적들을 행하는 메시아로 예수님을 대하는 겁니다.

물론 제가 그 이틀 전에 설교를 그렇게 했는데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이 엘리야와 모세를 언급하면서 예를 들거든요.
신약의 성도들이 그러한 삶을 산다라고 이렇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이겁니다.
그들의 그런 기적들을 보임으로 말미암아 죽었다 얘깁니다.
아니 엘리야는 불수레 이렇게 휩싸여서 올라갔는데 왜 죽었습니까? 라고 물으면
5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죽었어요.
이런 것들이 되게 어려워요.
왜 어려운가 하면 분명히 안 죽고 올라갔다고 했는데
왜 당신은 예수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들을 죽었다고 하느냐?
그들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그런 자기 때문에 죽어야 돼요.
10  엘리야도 순교자 반열에 들어가 있어요.
예수님을 그렇게 대한겁니다.❣❡

자! 그러면 그 병자들이 예수님에게 그 병을 낫고 자는 마음으로 찾아왔잖아요.
그 찾아온 마음이 누구의 마음입니까?
미리 마태복음 내용을 조금 들어가서 말씀드립니다마는
5  그 병을 고치고, ’예수님 나의 병을 고칠 수 있을 줄 믿습니다‘라고 했고 하고 왔잖아요.
아닌가요? 맞잖아요.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할 때는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은 사망에서 생명을 옮겨달라 이 얘기 아니잖아요.
병 낫게 해달라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걸 우리들이 마태복음 4장에 보면
20  마귀가 와서 ‘니가 하나님 아들이면 기적을 행해라’하잖아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니가 발 하나도 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걸 요청하잖아요.
마귀 짓하고 있는 거예요.
그거를 그들이 요구하였다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이 원함과 예수님이 주는 것이 완전히 충돌이 일어나죠.
5  그들의 요구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시잖아요.
그들이 원한 것은 십자가에 달린 주가 아니고
십자가 달리지 않고 자신들을 건강히 해주는 메시아,
그 엘리야를 보면서 엘리사를 보면서 모세를 보면서 그 속에 무엇을 보지 못하는가 하면?
성전에서 희생당하는 희생물을 보지 못해요.

5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를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한다라는 겁니다.
아! 구약성경에
그렇게 여호와 이름이 그렇게 많이 등장해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죠.
그들의 관심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 병 고치는 문제에 대해서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30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했으니
내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저는 자로 걷게 하고 눈 먼자로 눈 뜨게 하는 이런 말씀을 어떻게 듣느냐라고 할 때는
문자로 듣는 거예요.

이사야 61장 말씀을 문자로 들어버리면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가 하면 악마적 사고가 돼요.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말씀 밖에서 시험한 게 아니고요.
말씀 안에서 시험을 했다라는 것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돼요.
5  말씀 안에서 철저하게, 그것도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차원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겁니다.
그러한 태도를 이들이 보이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이 우상숭배 가운데 있었죠.
우상숭배 가운데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불렀다라는 겁니다.
자! 우리는 여기에서 궁금한 게 있죠.
10  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렀으니까,
①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다. ②몰랐다. 몇 번이에요? 몰랐어요.
제가 이 얘기를 왜 하는 거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어떤 식으로 자꾸 접근하냐 할 때는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다 알 수 있다라고 덤벼들어요. 예수님을 다 알 수 있다고
5  우리가 예수님을 다 알 수 있습니까? 알 수 없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입장에서는 어떤 하나님인 가 하면
그 당시에 아브라함 족속들이 사는 그 동네있죠. 그 샘 족속들
그 동네 사람들은 모두가 다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들이었어요.

20  나중에 그 이삭의 그 아내 리브가입니까?
리브가를 구하러 갈 때 삼촌 라반이나 그들이 믿던 하나님이 여호와예요.
여호와의 이름이죠.
달리 말하면 여호와 이름도 있고 또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전능한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전능한 하나님, 욥기에 잘 나오죠. 맨 그런 비슷한 동네니까.
5  욥기에 보게 되면 그들은 또 여전히 누구를 믿느냐 할 때는 전능한 하나님을 믿어요.
그리고 창세기 4장 26절 입니까? 거기에 보면

(창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잖아요.
30  여호와의 이름은 이미 그 동네에 파다하게 늘려져 있었어요.
이 여호와의 이름과 출애굽기에 나오는 여호와의 이름이 충돌이 일어나요.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달라요.

그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여호와의 이름이 부르실 때, 그냥 가는 겁니다.
그냥 간다라고 했을 때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아! 불렀으니까 간다. 이게 아닙니다.
주께서 가게 만드시죠. 본토 진짜 아버님 집을 떠나서 가게 만드세요.
자기가 원해서 가는 거는 성경에 없어요.
가다가 중간 빼이하죠. 아니 중간 빼이 사투리 있어서 죄송합니다.
5  오늘 우리 하양 사람은 뭐 잘 아시겠습니다만.
우리 중학교 때 보면 초등학교도 그렇고 소풍을 가면 뭐 요즘은 차가 다 있으니까
한 3km 거리도 얼마 안 되잖아요.
항상 한 2~3km 거리 지나 가면 여자 선생님은 중간 빼이 합니다.
중간에 가다가 묘지 쓴 좋은 자리에 있으면 거기서 도시락 까먹고 놀다가
10  이제 집에 가는 그런 근데

이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하란에 정착 비슷하게 해버리려 하다가
하나님께서 다시 약속의 땅으로 이끌고 가잖아요.
물론 곧 경유지를 통해서 분리시키죠. 아버지와 분리시키면서.
이제 조카 롯만 데리고 지금 약속의 땅으로 가는 그러한 어떤 과정인데

5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 약속을 주셨을 때
아브라함이 과연 이 하나님의 약속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느냐.
그것부터 한번 우리가 살펴봅시다. 창세기 12장 1절에 보면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0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이 말씀을 갈대아 우르에서 하셨는지 하란에서 하셨는지  되게 궁금한 사람들이 많아요.
두 군데 다 했다 생각하시면 돼요.

자! 그런데 여기에서 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했을 때
5  갈대아 우르에서는 같이 왔어요. 아버지랑 같이 왔어요
그런데 이 말씀은 말씀하신 분에 의해서 성취가 돼야 되기 때문에
주께서 하란에서 이 본토 진척 집은 삭제, 이 제거시켜버리고
아브라함만 뽑아서 아브라함과 아내, 그 사라만 뽑아가지고.
또 롯은 또 쓸만하잖아요, 필요하기 때문에 그 필요한 것 때문에 롯은 데리고 오는 겁니다.
30  어쨌든 하나님께서 롯만 붙여가지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내가 이게 지시할 당으로 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자!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한 약속의 말씀을 다 알았느냐? 몰랐느냐?
우리는 이런 게 되게 궁금하잖아요. 정말 궁금합니까?
히브리서에 보면 나그네로서 본향을 향해서 갔다고 했거든요.
5  거기에 보면 마치 아브라함이 주도적으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주도적으로 본향을 향해 나그네로서 떠났다. 이렇게 나오잖아요.

이 신약의 해석과 히브리서의 해석이 창세기와 너무 달라요.
창세기에서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 내용이 꽤 많습니다.

그 히브리서에 보면 그 믿음의 사람들을 예를 들 때 사사기에 보면 어떤 인물을 예를 듭니까?
5  입다 삼손 기드온, 이 세 사람을 대표적으로 이렇게 이름을 들고 있거든요.
재밌는 게 이 기드온 입다 삼손, 꼬라지를 한번 보세요.
주님을 시험하고 기드온 같은 경우에는
입다 같은 경우에는 여호와의 신이 임했는데 만일에 똑같이 시험이거든요. 승리하여 돌아온다면
첫 번째 나를 환영하는 내 집의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10  삼손, 여자에 미쳤어요.
아마 오늘날 같이 삼손 같은 목사가 있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여러분 담임 목사로 두겠어요?
제가 농담으로 묻는 게 아니라 만일 그런 목사가 있다면
여러분이 그러한 목사가 설교하는 설교를 듣겠어요?
벌써 못 듣겠다는 마음이잖아요. 안 그런가요?
5  왜 그런가 하면, 말씀보다 내가 우선 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 삼손을 읽으면서도 말씀 속에 내가 빠져들어가면 이 세상 자체가 악마가 다스리잖아요.
우리에게는 윤리가 더 중요하죠. 선이 더 중요하고.
아니 목사님 그러면 그렇게 살아도 됩니까? 이런 반발이 막 튀어나와야 돼요.
그 사람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 가 하면?
20  윤리적인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이데아에요. 이데아
근데 아들의 나라는 죄인들만 모이는 곳이에요.

바리새인들이 왜 화냈는지 아시죠?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서 함께 먹고 마시니까
5  이 하나님 나라 만일 메시아라면 우리같이 말씀대로 사는 자가 들어가야 되는데
저런 자들과 함께 들어간다, 더러워서 안 들어가요. 그 사람들은. 그래서 지옥 간 겁니다.

제가 삼손 얘기를 극단적으로 한 게 아니에요.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우리는 자꾸 머리속에 우리가 생각하는 의인 그 율법적 의죠.
선악 구조에 의해서 선한 것들을 계속 추구하는 겁니다.
30  이 정도 하면 이제 예수 믿기 싫을 겁니다.
왜 삼손 같은 사람이 목사가 된다면 나 교회 안 다니겠다는 사람이야.
지금 교인들이 예를 들어 열 명 같으면 아홉 명은 그렇게 얘기할 거예요.
1명은 어떻게 가능하냐 할 때는 주께서 만드신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가능해요.

지금, 이 아브라함이 본토 진짜 아비집을 떠나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을 때
지시할 땅은 어딘지 알아요.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갈 바를 알지 못했다고 했거든요.
어쨌든 그 땅이 가나안 땅인 걸로 아는데
거기에 보면 2절을 보면

5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을 좀 간단하게 해봅시다. 단순하게
10  십자가를 빼버리고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이 말씀이 어떻게 보일까요?
그 당시에 이 가장들 족장들이 꿈꾸는 나라가 바로 이런 나라예요. 그 당시에
그럼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셨잖아요.
지금 이 동네는 그 동네는 자기들이 봐도 좀 힘을 행사할 동네는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그 뒤에 갈대아 우르 자체가 그 당시에 이미 벌써 강력한 힘을 소유한
5  그런 그 지배 계층이 나타났기 때문에, 아 여기는 아닌갑다 생각하고
저 땅에서 내가 이걸 강성한 나라를 만들어 주실 거다라는
그러한 기대감을 아브라함이 가졌던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뒤에 가보면 그 사건 그러한 이 생각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어요.

여기에서 그 땅이라는 약속이 주어졌고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20  큰 민족을 이룬다는 것이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꿈이죠.
지금도 모든 나라가 강성 대국이 되는 게 꿈이잖아요.
그 북한이 왜 자꾸 그 강성 대국을 꿈꾸고 있습니까? 아니니까 꿈꾸잖아요.
근데 그들의 소망이,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잖아요.            46:02
그렇지 않나요? 좋은 나라에 살고 싶잖아요.
5  좋은 나라에 살고 싶으니까, 여러분은 민주당을 지지합니까? 국민의 힘을 지지합니까?
아니 나는 정의당 지지해, 뭐 이럴 수도 있는데
그러한 어떤 생각 자체가 꿈꾸는 나라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도 그러한 생각을 동일하게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약속을 받았을 때 그 약속의 나라라는 것이
30  자기 아들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지는 나라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는 거예요.

그리고 큰 민족 자체도 이 큰 민족은 다 죽은 자들의 사람 모임입니다. 죽은 자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다 죽었잖아요. 다 죽은 자들이 모인 큰 민족
그래서 그 피를, 그 죽음을 찬양하는 자들의 모임 이런 걸 생각도 못하는 거죠.
복의 근원이 될 줄 알았는데 이 복은 어떤 복입니까?
5  복을 준다고 하면 우리가 아는 복이나, 아브라함이 아는 복이나 똑같애요.

아까 제가 예를 든 그 사람이 뭘 모르는 거 하면?
성도는 이미 받을 복 다 받았어요. 더 이상 뭐가 필요합니까?
그냥 막 살면 돼요.  그 자체가 복받은 증거예요 .
그 자체가 이미 주님이 증인 되리라 했으니까.
5  십자가의 증인으로 만드시는 주님의 일하시는 현장이에요.
문제는 그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따로 생각하는 주님이 일하심이 있어요.

마치 지금 아브람이 약속을 받았을 때 자기 나름대로 개념 정리를 다 한 겁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이럴 것이다. 이럴 것이다’ 이런 기대를 갖고 가는 거예요.
10  그런데 주님은 그러한 기대를 갖고 가는 아브람을 그대로 인도해 갑니다.
그대로 인도해 가하면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들죠.
아브람 죽이기 작전입니다. 아브람 죽이기 작전. 다르게 표현하면 아브람 제거 작전이죠.
달리 표현하면 아브람을 날마다 죽여요. 날마다

그 창세기 12장부터 이동 경로를 통해서 보면 날마다 죽입니다.
5  날마다 죽여서 나중에는 진짜 죽여버리죠.
그 속에서 어떤 이름을 새롭게 만들어내죠? 아브라함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내는 겁니다.
그 창조해 낸 그 아브라함을 아브람이 장악할 수가 없어요.
오히려 아브라함에 의해서 아브람은 장악당하죠.
 
20  지금 큰 민족을 이루고 니게 복을 주어 니 이름을 창대케하리라니까
아브람은 자기 이름이 창대케 될 줄로 생각한 거예요.
니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누구의 이름이 창대케 됩니까?
니 이름이 누굽니까? 아브람이죠.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죠

우리가 알듯이 아브라함이 이름이 창대케 되었습니까?
5  아브람이 창대케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창대케 되었죠.
아브라함은 누구의 이름입니까? 여호와의 이름이죠.
여호와의 이름이에요. 여호와께서 자기 일을 드러내시는 이름이잖아요.
아브람은 자기의 이름이 창대케될 줄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밖에 안돼요. 다른 정보가 없어요.

30  아!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죠.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정보를 다 주시고 이러한 내용이다.
복이라는 것은 이런 거고 큰 민족이라는 것은 이런 거고 니 이름을 창대케 하는 것도 이런 거다.
다 알려주고 아브람을 인도하시면 안 되느냐? 그래도 안 돼요.

왜? 안되느냐 하면, 육이기 때문에 육은 항상 어떻게 작용한다 했습니까?
5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들어오면 다 바꿔치기 됩니다.
십자가 조차도 바꿔치기 됐잖아요.
오늘날 십자가가 우상돼 버려잖아요.
예수의 이름이 나를 죽이는 이름이 아니라 나를 살린 이름으로 우상화 돼버렸잖아요.

알려주고 자시고 없어요.
5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셔서 여호와의 이름,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예수의 이름을 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셔서 펼쳐내는 겁니다.
펼치내시는데 그 순간 순간 순간
지금 이 장면만 보더라도 약속을 받는 아브람이 있고 약속을 주신 하나님이 계시죠.
그러면 약속을 주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 약속 앞에
10  아브람은 무참히 깨어지는 거예요. 그럼 깨어지는 장면 없지 않았습니까?
자기는 모르죠. 자기는 몰라요. 근데 지나서 아는 거예요. 지나서
아! 주님이 우리는 자꾸 내가 신이 되고자 하니까 다 알고 덤비려고 하잖아. 알고

여러분이 성경을 완벽하게 알고 살아보세요.
그 앎이 살아가는 그 현장 속에서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지 한번 보세요.
5  수 많은 변수들이 작동하죠.
왜 주님이 수 많은 변수들을 작동시키느냐할 때는, 주님이 주님 홀로 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 뒤에 나중에 이 야곱때 가면, 야곱은 정말 우리의 모습을 너무 잘 보여주죠.
어떻게 잘 보여줬느냐라고 할 때는 야곱 같은 경우에는 아브라함과 좀 달라요.
아브라함도 약속을 받았고
20  야곱도 약속은 배속에 있을 때부터 받았잖아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 했을 때
나이가 칠십되어 가지고 이제 쫓겨나잖아요. 어릴 때 쫓겨난 게 아니라.
어릴 때 갈라지는 게 아니에요.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습니다. 그런 어떤 나이 때 이렇게 갈라지는데

그 아브라함과 그 야곱 같은 경우에는 약속을 들었을 때
5  이 약속에 대해서 그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을 야곱이 다 알고 있잖아요.
그리고 이스마엘과 이삭이 갈라지는 내용도 야곱이 다 알고 있단 말이에요.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의 이 약속을
에서와 야곱 관계 속에서 두 사이 속에서 약속을 주셨을 때 이걸 어떻게 해석하느냐 할 때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했으니까 야곱 입장에서는 내가 큰 자가 돼야 돼요.

30  말이 어렵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 했으니까
내가 큰 자가 돼야 된다는 말은 형이 큰 자잖아요.
형이 나를 섬길리면 내가 큰 자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내가 장자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그 생각을 야곱이 펼쳐내는 겁니다.
5  펼쳐내는데 하나님께서 그 야곱의 생각을 지지합니까? 반대합니까? 지지하죠.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서 너와 함께 하겠다라고 하시잖아요. 이 땅에 돌아올 때까지.
그 말씀을 들었으니까 야곱은 더욱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갖고
나름대로 큰 자가 되기 위해서 삼촌 라반의 집에서 개고생을 하잖아요.
놀랍게도 그곳에서도 고생을 함에도 불구하고 거부가 되어서
5  아버지 쪽으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돌아오는데 놀라운 반전이 발생하죠.
에서가 힘 더세요. 형, 에서가 군사력이 더 뛰어나고요. 선물을 주려고 해서 안 받으려고 해요.
왜 안 받으려고 합니까? 에서가, 자기한테 많기 때문에 그래요. 없으면 당연히 받겠죠.

그리고 군사력만 보더라도 400명을 끌고 왔잖아요. 사병을
10  그러니까 야곱은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십사 년 동안 고생 고생하고 또 뭐 더 고생해서 거부가 되어 돌아왔는데
형, 에서는 그냥 그 자리에서 물론 세일산으로 갔는데 어쨌든 그 상황에서 더 거부가 됐어요.
뭐 어떻게 된 겁니까? 이게 어떻게 그 사이에 얍복강 사건이 발생하잖아요.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입장에서 이해한 겁니다.

5  그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예요. 아브라함도 약속을 주시니까
그 당시에 그들이 그 당시에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사고 방식으로 약속을 이해하고
이 말씀이 얼마나 신이 납니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정말 신나는 말씀이죠.

이 말씀은 성도인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에요. 처음 듣습니까?
성도인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에요.
우리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우리를 저주한 자에게는 저주가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성도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에 그래요.
5  안 그런 거 같죠? 성도가 그만큼 이 세상을 심판하는 존재잖아요. 성도 자체가
성도의 활동 자체가 천국과 지옥으로 쪼개는 자리거든요.
천국과 지옥의 경계선에서 움직이는 자리입니다.

(창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30  75세 때 하란를 떠나서 이제 가난 땅으로 가는 겁니다. 그 다음 조금 더 봅시다.

(창12: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하나님께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되고, 네게 복을 주겠다고 하면
우리들 같이 믿음 좋은 사람들은 하란에서 모은 재산들 다 버려놓고 안 가겠어요?
제가 상상력이 너무 뛰어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재산 다 놔 두고
정말 약속대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지 테스트하기 위해서 그렇게 나서지 않겠어요.
5  그런 인간들 가끔 있잖아요. 테스트해보려고 덤버드는 사람들

자! 그런데 이 아브라함이요. 이 하란 그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가져온 그 재물들
그 하란에서 모은 재물들을 소유들을 다 끌고 약속의 땅에 와요.
하나님께서 그 끌고 온 것들을 몽땅 날려버립니다.
그래야만 약속하신 분이 약속을 이룬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는 증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10  (창12: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왜 이런 말씀을 하는 거냐면? 가난 땅 사람들이 이미 주인 행사가 있는 거죠? 오래 살고 있고
7절을 보면

(창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5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뭔가 기미가 보여야 뭐 주신다는 말씀도 믿을 수 있는데.
와보니까 자기는 뭘 할까요, 너무나 작아 보이죠.
이건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약속의 땅에 정탐꾼을 보내고 돌아왔을 때
가데스 바네아에서 그 약속의 땅의 상황 자체가 아낙 자손의 후손들이 가득하더라.
20  이런 소리를 듣고 원망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표현은 하자면

(창12: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왜 단을 쌓았겠어요? 이 단을 샀는 이유가 이제 뒤에 가면 조금씩 좀 바뀌지는데
        성경에 나타나지 않지만 약속대로 이루어 주옵소서겠죠.)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5  (창12:9) 점점 난방으로 옮겨갔더라

정말 재밌죠?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자꾸 옮겨가요. 자꾸
근데 이 배경 자체는 왜 옮겨 가는지 뒤에 나오죠. 10절에 보면

(창2: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30  달리 말하면 처음에 마무리 상수리 그쪽으로 도착했는데
이렇게 자꾸 이동이 돼요. 밀려나요.
밀려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환경 자체가 살 곳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주시고자 하셨다면
그 환경 자체가 아브라함이 그 약속의 땅에 머물기에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셔야 되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그곳에 머물지 못하도록 자꾸 밀리도록 환경을 만드시는 거예요.

왜? 그런고 하면 계속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마는
5  약속은 약속하시는 분이 이루지, 약속을 듣는 자가 이루는 게 아니에요.
제가 자꾸 이걸 반복해 말씀드린 이유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 말씀은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주님이 이루고 우리는 그 이루심에 참여하는 자들이에요.

‘서로 사랑하라’는 이 말씀 자체도
10  주님의 이루신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십자가가 밝히 보이게 되고 감사가 나오는데
그 말씀을 자기가 이루어 낼려고 하니까 십자가가 밝혀 보이지도 않고
그러니 감사가 나오지도 않고 원망밖에 나오지 않는 겁니다.

용서하심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는
내가 원하는 사람을 보기 전에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5  무가치한 놈이다.
마치 예수님께 찾아온 자들이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다고 한번 생각해봅시다.
상상을 해보면,
예수님께서 ‘너희 죄를 사하노라‘ 이렇게만 해버리고 끝 했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병자들에게,
본인은 죄 용서받은 그 사람은 주님께서 성령을 주시겠죠?
20  성령을 주시면, 감사함으로 받게 돼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거고요.

그런데 그 주변 사람들은 한번 생각해 봅시다. 본인은 죄 용서를 받아서 기뻐요.
근데 주변 사람들은 뭐라고 하겠어요? 죄 용서가 밥 먹여 줘요.
십자가의 그 피가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살 때 어떤 유용성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유용성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제거해 버렸거든요.
5  십자가 피는 이 세상에서 유용성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들은 십자가의 피가 우리에게 뭔가 도움이 되기를 바레요.

주님은 십자가의 피로 용서하신 은혜를 주신 이유는? 날마다 죽으라고 주셨거든요
너는 죽어 마땅해. 왜 마땅하냐? 너는 나의 피 공로를 자랑하기 위해서 만든 새로운 피조물이야.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용서하신 은혜를 주셨는데
30  성령을 못 받은 자들은 용서하신 것은 용서하신 거고요.
다른 걸 뭐 주시겠습니까?
내가 기대하는 바, 내가 말씀을 읽고 느끼고
내가 바라는 그 소망 그런 것들은 언제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덤벼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약속이 담긴 기근을 내려버리죠.
5  기근을 내리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근이 심하니까 이 아브라함이 애굽에 우거하려하여 그리로 내려가죠.
달리 말하면 기근때문에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냐면?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잖아요.
물론 재산은 갖고 왔지만 그곳을 떠날 정도로 하나님이 약속에 대한 신뢰가 깊었단 말이에요.
5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약속의 땅에 왔는데
갖고 온 재산이 남아있다면 아브라함이 그 약속의 땅에 있을려고 했을까요?
그 길을 떠나려고 했을까요? 당연히 머물고자 했겠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기근을 베푸시사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해버리는 겁니다.
니가 내 말을 듣고 본토 친척 아버지를 떠나 이 약속이 땅에 왔느냐?
10  그게 너의 힘인 줄 아느냐? 아니라는 얘기예요.
아브라함이 갖고 있는 그 사고방식을 깨죠.
그래서 기근을 내려서 아브라함 마음속에 ’애굽에 가지 않으면 안되겠네‘라는
마음을 품게 하는 겁니다.
그건 아브라함이 막을 수가 없죠. 이 몸에서 우러나오는 본능적인 것이기 때문에

5  자! 그러면서 더 또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아내가 너무 아름다우니까 그 당시에는 아마 성경에 보면
예쁜 아내가 있으면 남편을 죽이고 그 아내를 뺏는 풍습이 있는 모양이에요.
조심하세요. 예쁜 아내 두신 분. 남편을 죽여버리고 예쁜 아내를 뺏는 그런 풍습이 있으니까
애굽에 가기 전에 약조를 합니다. 내가 그대로 인하여 내 생명을 보존하고 싶다.
20  왜 이런 얘길 했을까요? 약속 때문이잖아요.
그 와중에도 약속을 붙들고 있어요.
자기는 죽으면 안 돼요. 아내는 뭐 남의 아내가 되든지 말든지 그건 모르겠고
지금 그러한 어떤 모습을 아브라함이 보이고 있다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실제로 또 이 예측대로 바로 이 신하들이, 대신들이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죠.
5  그 연인을 바로의 궁에 처하여 드리죠.
예상대로 딱딱 맞아 떨어져요. 그러면 아마 그런 얘기 했을 거예요.
눈짓하면서 ’내 말 맞지. 내 말 맞지. 내 말대로 안 했으면 난 벌써 죽어서‘
지금 이런 얘길 하는 거예요.
주께서는 그러한 태도 조차도 주님이 활용하시고 이용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하죠.

30  (창12:16)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아내를 판 대가입니다. 대가로 이만큼 얻었어요.

(창12: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큰 재앙을 내리셨는데 어떠한 재앙인지 여기에 보면 잘 나오지 않지만
어쨌든 큰 재앙을 내렸으니까 이 바로가 눈치를 챘어요.
그 당시에 이 아브라함이 그 당시에는 각자 신들이 다 있었거든요.
우리는 이걸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온 우주의 하나님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5  그냥 바로 왕의 입장에서는 아브라함이 섬기는 하나님 곧 지역 신이죠. 표현을 하자면
그 지역 신을 섬기는 자에게 뭔가 내가 해를 끼쳤는데 재앙이 임하였고,
뭔가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이 사람은 그 사람의 아내니까 건드리지 마라.
저 사람은 내 약속을 품고 있는 자다 이렇게 말씀을 했을 가능성이 높겠죠.
그렇게 하셨을 때 지금

10  (창12: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바로 왕이 적반하장이죠. 아내라고 고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브라함을 죽이고 그 아내를 뺏었겠죠. 어쨌든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창12: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5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창12: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모든 소유가 어떻게 만들어졌어요? 아내를 누이라 속여서 받은 대가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과정 속에서 한번 보세요. 아브라함 뭘 잘했어요?

물론 성경에는 이런 게 나오죠. 이 사라의 순종, 사라가 한마디도 안하죠.
20  예, 예 순종했잖아요.
이 사라의 순종을 지금 성경에는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에 한번 보고요.

지금 아브라함이 뭘 잘했어요? 주님 앞에서는 다 잘했어요.
지금 아브람을 아브라함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러면 과정이니까 아브라함 될 때가 있겠네요. 이런 생각하지 마세요.
5  지금 이 사건 하나 하나가 우리는 자꾸 우리 자신을 하나님처럼 행사하려고 해요.

성경은 읽을 때, 어떻게 보는냐고 할 때
제가 말씀을 전할 때 제일 어려운 게 그런 부분이에요.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 이 아브라함은 전 과정이 다 놓여 있잖아요.
전 과정이 놓여있으니까 자꾸 이 목적 중심으로 보려고 해요.
30  ’끝에 어떻게 되었느냐? 끝에 어떻게 되었느냐?‘ 이렇게 보잖아요.
근데 어떻게 되었어? 죽었지.
근데 사람들은 ’죽었다‘로 안 보죠.
성화론으로 보잖아요. 뭔가 이제 괜찮아졌다, 이렇게 보잖아요.
이 자체가 지금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는 사건 속에 있는 겁니다.
자! 오늘 그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언급할 때 지금 이 12장만 보더라도
아브라함이 긍정적입니까? 부정적입니까? 부정적이죠.
약속을 위한 아브라함이잖아요.
5  그러면 약속을 위해서 아브라함은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느냐라고 할 때는
약속하신 분이 약속을 이루시지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이루는 데는 눈곱만큼의 도움을 준 적이 없고 오히려 훼방꾼이죠. 지금.

사래도 약속을 같이 받았잖아요. 아브라함은 자기 혼자 받았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이제 나중에 이스마엘 사건에서 등장하잖아요.
10  사라에게서 난 자라야 약속의 자녀가 되거든요.
그러한 내막을 지금 이렇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의 세계라 했을 때는
아브라함의 인생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 증거하는 인생이었어요.

조금 더 봅시다.  요한복음 8장에 보게 되면 8장 56절에 보면

5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런 내용이 창세기에 안 나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아브라함을 볼 때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지금 그 내용이 지금 여기에 우리가 방금 12장이 읽은 그 내용 속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12장 13장 14장 15장, 16장까지 쭉 계속해서 이 내용이 다 담겨 있는 겁니다.

20  우리들 같은 경우에는 이런 말씀들을 이해하려고 들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죠.
성경에 있어야, 예수님의 말씀이 참말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유대인들도 똑같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니가 나이 오십도 안 됐는데 아브라함을 봤느냐. 이렇게 나오잖아요.
5  그들이 알고 있는 개념은 첫째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에
그들이 갖고 있는 역사적 시간적 흐름 속에서의 이해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이 예수 안에서 세상을 보게 돼버리죠.

그래서 예수님이 아브라함을 지금 어떻게 보내야 할 때는
아브라함은 나에 대해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했다.

30  그 장면들이 지금 창세기 12장부터 낱낱이 기록돼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창세기 12장을 읽을 때 13장을 읽을 때 뭘 봐야 되냐 할 때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볼 수 있어야 되죠.

이 죽으심은 어떻게 드러났느냐라고 할 때는
사라의 희생에서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아직까지는 사래이지만,
이 사래의 희생에서 그 죽으심의 의미가 살짝 보여지고 있어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그걸 알았느냐? 그냥 살아요.
5  그냥 살고, 뒤에 가서 그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인간은 알 필요가 없어요. 피조물이기 때문에
누가 되었든지 인간은 그냥 살면 돼요.
심지어 선지자들조차도 하나님 뜻을 알았잖아요.
알았는데 그 앎이 어떤 식으로 사건이 진행된다는 것은 몰라요.
10  주님의 말씀은 주님만 아시고 주님이 이루어 내시고
그 이루어 내심 속에 선지자들이 거기에 참여가 되는 겁니다.

지금 12장도 마찬가지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 약속을 이루어가는 과정 속에 아브라함은 휘말린 겁니다.
휘말린 세계를 들여다보면 아브라함은 방법이 없습니다.
5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내몰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결국은 아브라함이 희생물을 만들어내죠.
’내 뼈 중에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라는 그 아내를 팔아먹는 그런 어떤 희생물을 만들었네요.
그런 어떤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결국, 희생물이 아브라함을 살리는 겁니다.                                      DESIGN 허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