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9-08 20:32
서울골방교회 15강 마 4:1 성령의 인도하심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4  
https://youtu.be/g0mvOaye4vA

관리자 21-09-09 15:19
답변 삭제  
서울골방교회 15강 마 4_1 성령의 인도하심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사 주님의 생명의 말씀 앞으로 인도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사 그리스도의 사랑의 비밀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오늘 마태복음 4장 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내려 임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예수님께서 목격하시는 거죠. 여기에 보면
그러면서 난 소리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물세례를 받지 않는, 물세례가 없는 성령 세례
사실은 이게 성도들에게는 정반대의 과정을 겪게 되는데
‘물세례, 성령 세례’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의 아들, 신의 아들이면 아들이지
거기에 무슨 조건이 들어가느냐? 이렇게 생각을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의 하나님의 아들 개념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이렇게 내리셨잖아요.
이제 하나님의 아들로 기뻐하심을 받은 자로 인정이 되셨다.
흔히 이런 본문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관식이다. 신학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함께 지금 등장하는 장면이다. 물론 그 내용도 중요해요.
그런데 이것이 삼위일체로 흘러버리면 그 우상이 돼 버립니다. 곧장
아버지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이 볼 수 있어야 되는데

성령을 받으셨으면, 이제 예수님께서 어떻게 살아가시는 가라고 하게 되면
4장 1절에 보면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죠.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성령이고요.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시고
예수님께서 지금 성령을 받으시고 난 뒤에
성령의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시는 겁니다. 참 특이한 장면이죠.

성령을 받았다면 그다음 성령께서는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셔야 되느냐라고 할 때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그 사고 방식은 성령을 받으면 그다음 어디로 인도함을 받겠어요?
그 마귀 소굴로 인도함을 받는다,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죠.
물론 우리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성령을 받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들어가셨다.
이렇게 우리들이 생각을 당연히 하고 있고요.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국에 조금 유명한 목사 설교를 한 두 편 정도 들어봤는데
재미있게 설교를 해요. 들어보면 맞는 말을 한 80% 정도를 해요. 본문에 대한 해석을
여러 가지 뭐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도 얘기를 하고요.
앞서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받으시는 그 성령 세례에 대한 이야기도 쭉 하는데
예수님께서 ‘성령에게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라고 할 때
이 목사들의 해석법은 이런 겁니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고로 우리들도 성령을 받았다면 하나님 아들다운 삶을 살아야 된다. 이게 결론이에요.
중간에 대한 해석은 제가 뭐 별 의미가 없어서 하지 않겠습니다마는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들어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잖아요.
실제로 받는데. 이렇게 받으셔서 시험을 이겨내시죠?
이겨내셨으니까 또, 한 어떤 목사는 이렇게 설교를 해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는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왕 되신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우리의 인생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오늘 하루도 왕 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여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로 믿고
감사하며 사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설교를 하는 겁니다.

두 부류였죠.
첫 번째 목사는 이 본문을 갖고 이 코로나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다운 삶을 살아야 된다라는 겁니다.
공부를 좀 했기 때문에 뭐 이 기적적인 신앙, 눈에 보이는 신앙 이런 것들을 추구하지 마시고
정말 아들다운 삶을 살아야 된다.
그렇게 이제 이 본문을 해석을 하고 적용을 하는 설교를 이렇게 들었습니다.
교인 수가 많아요. 나름대로 뭐 한국 교회에서 보니까 조금 말씀대로 한다는 그런 목사인데

‘아들답게 산다’라는 것이 어떤 의미냐라는 거죠?
‘아들답게 산다’라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지금 마귀에게 이끌려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잖아요.
이걸 결론적으로 얘기를 해버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죽으실 때 유대인의 왕으로 등극하신 거거든요.
그러면 마귀, 마귀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어떠한가?라고 하면
여기에 나오는 이 세 가지 시험이 있잖아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로 떡덩이 만들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말씀대로 시편 91편 11편 12편에 기록된 대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너의 발을 이렇게 받들어서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는가 보자.
그리고 세상 권세와 영광을 다 주겠다. 나에게 절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모든 권세를 가졌거든요.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규정하고 있거든요.
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을 할 때 철저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출애굽,
그 사건을 바탕으로 하여서 지금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과연 네가, 예수 네가 성경대로 온 하나님의 아들이 맞느냐라는
그러한 검증을 지금 하는 중에 예수님께서 이 시험을 다 이겨내시잖아요.

이겨내셨다는 것이 어떤 식으로 인식이 되느냐라고 할 때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라고 이렇게 결론이 나야 되는데
이기셨다라는 이 내용을 마귀에게 승리했다라는 이쪽으로 가버려요.
마귀에게 승리했다라고 가버리면 우리들은 어떤 생각을 갖게 되는가 하면
마귀에게 승리했기 때문에
우리들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귀와 싸워서 이겨야 된다라는 논리를 펴게 되거든요.

그러면 마귀와 싸워서 이기는 게 뭐예요? 어떻게 하는 게 이기는 법입니까?
이기는 법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셨잖아요.
그러면 성도가 이기는 법은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 외에 없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답게 산다라고 했을 때
죄인으로 드러나는, 죄인으로 살려지는 그 인생이야말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그 예수님의 합당한 그 하신 그 일에 부합하다. 이렇게 들어가야 되는데
그렇게 들어가지 않는다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님께서 이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이제 왕다운 면모를 보일 것이라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나름대로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세 가지 시험을 이겨내시니까
이 이기심 자체를 십자가와 연결시키지 못하고
유혹을 이겼다라는 정도로만 생각하는 거예요. 사실은

그러니 이 말씀을 보면서 사람들은 자기가 바라는 성령 충만 받은 삶의 모습을 꿈꾸게 되고
그리고 이 왕 되신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일의 혜택을 얻고자 하는
그런 욕망으로 이 말씀을 접근하는 겁니다.
사실은 이렇게 접근한 거 외에는
앞서 제가 말씀드린 십자가로 결론 내는 그러한 설교를 듣기가 어려운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죠.
광야로 가셨다라는 이 내용 자체 속에 이미

(마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이 과정 자체가 이미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한 그 과정 전체입니다.
사십 일이라고 이야기하면 간단하잖아요.
사십 년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중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내리셨습니까?
만나를 내리셨잖아요. 그들이 주리지 않았거든요.
주리지 않았고 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는데
이 사십 년 광야 생활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리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는 주리셨어요.
정반대의 상황입니다.

주리셔서 이제 그런 상태에서 이제 시험하는 자가 왔죠.
마귀가 시험을 하러 와가지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 마귀는 누구를 대표하고 있는가 하면요? 인간을 대표합니다. 첫째 아담을 대표하죠.
사십 일 동안 주리셨으면 가장 필요한 게 뭐냐라고 할 때는? 떡입니다. 음식이죠.
중요한 것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얼마든지 이 주린 부분에 대해서 이 돌로 떡덩이를 만들 수 있다라는 겁니다.
근데 이것이 단순히 우리가 볼 때는 신적 능력을 발휘해라 이 얘기가 아니고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셨잖아요.

이 본문을 볼 때 우리는 요한복음 6장과 겹쳐서 봐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덩이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돌덩이를 떡덩이 되게 해서 얼마든지 말씀할 수 있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라는
신명기 8장의 말씀을 그대로 언급할 수 있잖아요.
이 마귀가 육이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하는 겁니다. 표현을 하면

구약에 보면 만나를 내렸잖아요.
만나를 먹이시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이렇게 가르쳤거든요.
그러면 그 말씀과 똑같이 되어지려면 돌로 떡덩이를 만들어서 먹고, 그다음 하는 말이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라고 가르쳐야 되거든요.

마귀가 지금 무엇을 노리느냐 이 얘기예요.
사실 이 본문을 제대로 봐도 납득이 안 되는 부분입니다. 이해를 못해요.
무슨 얘기인가 하면 여러분에게 질문해볼게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 말씀이 신명기 8장에서 말씀하셨거든요.
그러면 이 말씀을 유대인들이 잘 압니까? 모릅니까? 잘 알고 있죠.
그러면 사람이 무엇으로 사느냐 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라고 할 때
그러면 말씀이 뭐냐라고 하면 다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으로 구성되어 있죠. 명령으로
그러면 율법대로 사는 것이 바로 이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결국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됩니다.

설교를 적용을 할 때, 예수님의 말씀이니까
’여러분 우리는 떡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사는 겁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시고 주께서 주시는 이 생명의 떡이죠. 이 말씀을 먹고 살아야 됩니다‘
뭐 이렇게 적용하면 제대로 된 해석입니까?
말씀은 예수님을 증거하죠?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해요. 십자가를 증거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느냐라고 할 때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
그 말씀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다 이루시죠.
그런데 이 마귀는 인간은 그 마귀의 자리에 인간을 두면 돼요.
그 인간은 무엇으로 사느냐 할 때는? 십자가로 산다라고 생각하지 못해요.
지금도 여러분이 복음을 듣잖아요.
저는 교회에 가서 여러분이 십자가 피로 살아갑니까? 안 그러면 떡으로 삽니까? 물어보세요
아! 목사님 아무리 십자가도 좋지만요. 그거는 천국 가는 데는 도움이 되는데요.
예 돈이 있어야 살죠.
아! 그러니까 믿음 없다고 하면 되는데 믿음이 있다고 하잖아요. 모두가 다

주님이 우리에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믿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까? 믿음 없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까? 참 어렵죠.
이게 성경 말씀은 영의 말씀이기 때문에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예 알겠습니다. 제가 믿겠습니다‘ 하는데.
그럼 믿는 사람한테 제가 물어보는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에 피로 삽니까? 돈이 있어야 삽니까?
아이고 이 세상에 사는데 돈 없이 어떻게 삽니까? 그럼 믿음 없네요. 안 믿잖아요. 안 믿어

그러면 아까 그 목사가 얘기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아야 됩니다‘라고 하면
아들답게 산다는 게 이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라 얘기거든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삽니다‘
그러면 우리는 말씀으로 즐거워해야 되죠. 십자가는 둘째 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말씀으로 먹고 산다 했으니까
이 코로나 시대에 그 대형 교회에 자영업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사업 안 되더라도, 말씀으로 배부르게 먹고 사십시오. 시험을 이겨내십시오.
마귀에게 유혹당하지 마십시오‘ 사실 이 얘기를 그 목사가 하고 싶어 하는 거거든요.
그 얘기해버리면 자영업자 교회 아무도 안 나오죠.
그런 목사들은 구체적인 얘기를 절대로 안 합니다.

애매한 결론을 내죠. 포괄적인 결론을 내는데
목사도 마찬가지예요. 교인도 마찬가지고 이 말씀에 대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라고 했을 때
아멘하잖아요. 우리도 아멘 하죠.
왜 아멘합니까? 우리는 저 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라요.
그 말도 안 맞아요.
왜 안 맞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게 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 만나를 내려주셨다‘라고
하거든요. 벌써 그들은 이 말씀 속에 들어가 있어요.
들어가 있다라고 하면 또 또 조금 어려워지죠.
말씀으로 살았다면 만나 안 먹어야 되잖아요.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이 내용을 자기가 적용하려고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아니면 또 한 가지는 이용하려고 하고요.
이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주님이 이용하시는 대로 이용당하면 되는데

아까 전에 다른 한 목사의 설교는 제가 그렇다 했잖아요.
예수님께서 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다 감당하시고
우리가 어떠한 인간임을 아시는 그 속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의 왕이기 때문에 성도 여러분들의 괴로움과 연약함과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다 아시고
그 문제들을 다 해결해 주실 줄로 믿고 오늘 하루도 왕 되신 주님을 의지하며 삽시다.
이렇게 설교를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사람들이 아멘을 하거든요. 그게
왜 아멘을 하겠습니까?
성경을 읽어보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연약함을 아니까
이렇게 오셔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셨단 말이에요.

그러면 마귀는 예수님 홀로 상대하고
우리는 그 구원하신 하나님 예수님 덕택에 이 땅에서 인생 문제를 다 해결받아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라는 것을 그 목사가 가르치고 교인들이 그걸 원하고 있고요.
그걸 듣는 즐거움으로 그 교회에 가는 겁니다.

이 말씀은 사실은 해석이 안 돼요. 해석이 안 돼요.
예수님께서 지금 마귀와 전쟁을 하고 계시잖아요. 마귀가 시험을 했다. 하지만
마귀와 전쟁을 하시는데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 산다‘했을 때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러 오셨잖아요.
이 말씀의 의미를 알려면 예수님의 그 죽으심을 그대로 우리 육신의 속에 담아질 때
이 말씀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걸 이렇게 표현할 수 있죠.
우리 성도들은 사람이 떡으로밖에 못 살아요. 사람은 떡으로밖에 못 살아요. 사람은
그걸 바라고 있고요.

성령이 오시면 비로소 나는 이러한 죄인임을 아는 겁니다.
죄인임을 알기 때문에 결국은 십자가의 용서함이 덮쳐졌기 때문에
이 십자가의 피 능력으로 살아감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거죠.
피 능력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나는 어떤 인간인가 하면?
’늘 떡으로밖에 살 수 없는 인간이네요‘라는 그러한 고백이 나와야 되는 거거든요.
죄인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죄인을 주께서 용서해 주신 거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뭘 자랑해 해야 되겠습니까? 십자가의 피를 자랑해야 되겠죠.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살아가야 되지 왜 돈을 의지합니까? 들어보면 다 맞는 것 같거든요.
근데 끝에 들어가 보면 무엇만 남아 있는가 하면?
인간의 행위만 남아요. 말씀으로 살아가는 나만 남는다고요.
그 말씀으로 살아가는 나가 그러면 최종적으로 어떠한 형편에 도달하게 되느냐 할 때는
천국도 가고 이 땅에서 축복도 누린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는 겁니다.

다시 앞부분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셨잖아요.
성령을 받으면 우리는 그다음 생각하는 것이 마귀의 시험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구나.
본격적으로 영적 싸움 속으로 우리가 이제 뛰어들게 되는구나. 이렇게 인식을 해야 되는데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는 이제 그 싸움 속에 들어가는 것은 맞는데
거기에서 어떤 삶을 살아낼 거냐라고 할 때는 늘 이기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기는 삶을
이런 겁니다. 지금 출애굽기 13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3장을 보면 17절 이하를 한번 보겠습니다.

(출13:17~22)
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19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20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시잖아요.
이 약속의 땅에 넣기 위해서 인도해 내신 것은 분명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가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내셨다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면
그다음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끌어가셔야 되느냐라고 할 때는
곧장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그쪽에서 약속의 땅으로 해변길이죠.
그 길로 곧장 인도에서 약속의 땅으로 집어넣으셔야 되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그렇지 않다라는 사실이에요.

분명히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치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셨다라고 하잖아요.
모세도 있고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시는 이 과정 속에 있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황으로 인도하시는 가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한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그러하거든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약속을 주신 내용과 함께
그 약속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인식하느냐라고 할 때는?
자기 중심으로 인식을 하고 자기 중심으로 해석을 하는 거예요.

약속 속에서 말씀을 아무리 주셔도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잖아요.
우리가 볼 때는 아브라함 언약, 이삭, 야곱까지
그리고 요셉을 통한 그 내용까지 충분한 내용을 설명을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내용을 알아도
그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드는 그 여호와의 이름께서 하시는 그 일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없어요.
알아도 그 의미를 알 수가 없고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면 하나님이 인도라면 곧장 이 약속의 땅에 넣어줘야죠. 언약대로
언약대로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 언약대로 이루시는 내용이 지금 이 내용이거든요.
곧장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지 않고 길을 틀어가지고 다시 되돌려 가지고
바로의 군대가 쫓아오도록 만드시는 그리고 이 홍해가 가로막혀 있는 그 막다른 골목으로
주께서 인도하시는 이 전체가 언약대로 이루시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천국에 빨리 가고 싶은 거거든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빨리 약속의 땅에 가서
강대한 나라가 이루어져서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 거거든요.
인간의 모든 소망은 행복하게 사는 거거든요. 불행하게 사는 것을 원치 않아요.
그러니까 제주도로 도망을 가려고 하는 거예요.
제주도가 파라다이스인 줄 아는데
가보면 아까 장로님 말씀하셨듯이 귤 농장에서 아침 6시부터 밤 해지도록
밤이 깜깜할 때로 일해야 되는 그런 인생일지 모릅니다.

우리 모든 인간들이 그런 어떤 행복을 꿈꾸고 있거든요.
왜?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모세를 보내셨다면
우리를 곧장 우리의 괴로운 일과 어려운 일 원망하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그러한 길로만 인도하시는가 이 얘기거든요.

나를 위한 하나님이 같으면 우리가 기대하는 바대로 인도하셔야 되죠.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인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이러한 인도하심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고
불평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셔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이렇게 나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이 대목도
앞서서 해석하는 그러한 해석법이 있기에 지금 이 구약을 볼 때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이유는?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죽기 위함이죠.
근데 그 어떤 인간도 죽기 위해 이 땅을 사는 인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이거든요.
자기 백성의 대속물이 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겁니다.

만일에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쳐봅시다.
지금 이 당시 하나님의 아들이 누굽니까? 유대인들이죠. 남은 자들이거든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남은 자들,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다운 면모는 어떠해야 된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아들답다는 것은 어떠해야 되죠?
그들이 이미 마귀이기 때문에 자기 아버지가 마귀잖아요. 그러니까 자기들이 마귀거든요.
마귀니까, 그들의 하나님의 아들다움은 어떠해야 된다라고 이미 확정되어 있는 거예요.
요 말씀 있죠.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이 내용을 그들이 알고 있어요? 모르고 있어요? 알고 있죠.

그러면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얼 주셔야 된다는 거예요?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 같이 메시야가 오셔서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면 물도 주시고 이 하늘에서 계속해서 만나를 내려주실 때
그것이야말로 말씀으로 사는 모습이라, 그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갑자기 지금 해석을 제가 이상하게 가니까 좀 어려워졌는데
지금 예수님께서 답변하시는 이 내용은요. 유대인들도 알고 있는 내용이에요.
그러면 이 내용을 구약으로 그대로 갖고 가게 되면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게 하심이라‘
이 속에 들어가려면 만나를 줘야 됩니다. 만나를
만나를 계속해서 주면서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그대로 이 알게 하시는 거죠. 만나를 주시면서

그런데 이 만나가 주님의 살과 피라는 것을 무슨 수로 알 수 있어요? 그들이
알 길이 없죠.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알 길이 없는 겁니다.
단순히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 말씀을 그냥 문자대로 맞아, 예수님이 이렇게 마귀에게 이기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면
우리도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됩니다.
이렇게 가르칠 수 밖에 없잖아요.

그러면 주님은 무슨 일 하십니까? 십자가 진 일은 그냥 본을 보인 일밖에 안 돼요.
예수님이 본을 보여줬으니까 너희들도 나처럼 살아라. 이것밖에 안 돼요.
이 말씀이 성도 속에 들어오려면 성령을 주셔야 되죠.
성령을 주시면서 날마다 주께서 만나를 내려주셔야 됩니다.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그 만나가 이제 뭐였습니까? 주님의 살과 피잖아요.
그 살과 피를 계속 주시면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친다라고 이렇게 우리는 봐야 되는 거예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우리는 뭘로 살아요? 밥으로 살잖아요. 돈으로 살잖아요.
예, 그런 죄인을 주님의 피가 덮쳐 있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 꿈을 꾸는 겁니다. 어떤 꿈을 꾸는가 하면?
그래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돼.
그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그래, 돈을 사랑하지 않고 정말 말씀만 사랑하고 말씀만 전해야 돼‘
그래서 뭘 보여주고 주고 싶은 거예요?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는 목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나를 따르라‘ 이것밖에 안 돼요. 그 다음 나오는 얘기는
십자가를 증거를 해야 되는데 십자가를 자랑해야 되는데
이 마귀는 십자가를 없애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제거시켜 버리려고 하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피 공로를 알아가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어디에 살게 되는가? 하면 이 마귀 소굴에서 살게 돼요.
그럼 우리의 악마성이 계속해서 드러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뭘 해도 이게 죄라는 것으로 드러나는 그 세계 속에서 살게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누구를 위한 구원이냐? 주의 이름을 위한 구원이잖아요.

주의 이름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이름이잖아요.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주님이 되셨잖아요. 그게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이 드러나려면 우리는 계속해서 죄인으로 드러나야 되는 겁니다.
지금 이 하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서
이 광야길로 이렇게 끌고 가시잖아요.
그들이 원망하는 자리로 끌고 가신 이유는?
그들을 구원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구원이기 때문에
그 과정 과정 속에서 여호와의 이름의 의미를 담아내시는 겁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공로를 계속해서 뿜어지도록 지금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들은 그러한 사실도 모르고
’아! 여호와의 이름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름이다‘
그래서 이 모세가 이야기했잖아요. 그들이 이름을 물을 거라고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자기들이 호칭하는 신이 되어야 된다는 거거든요.
자기가 바라는 신, 우상의 이름을 다 인간들이 다 만들어서 붙이잖아요.
그러면 그 우상의 특징은 내가 원하는 소원을 다 들어줘야 된다는 그런 어떤 이름이기 때문에
지금 이들도 그러한 식으로 인식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 인도하지 않잖아요.
여호와의 이름이 어떠한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것은 이제 애굽에서 이 홍해에서 애굽의 군대를
하나님의 오른손의 권능으로 싸우셔서 물리치시는 그러한 여호와의 이름.
여기에 대한 또 오해를 이들이 또 갖게 되죠.

구약에만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께서 친히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를 물리치셨다.
이게 진짜 오른손의 능력이다. 이렇게 우리는 볼 수가 있지만
이미 성령을 받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 오른손의 권능은 십자가에서 드러나잖아요. 십자가로 승리한 겁니다.
십자가로 승리한 모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진짜 오른손의 권능의 모습이 드러난 겁니다.

그러니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이 예수님을 성령께서 이끌어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하시는 이런 내용들이
인간들에게는 나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든지 그러면 좀 이해가 되고요.
안 그러면 또 이해가 안 돼요.
왜 그런 식으로 몰고 가시는가? 예수님은 처음부터 죽기 위해 오셨거든요.
성경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열왕기하 6장 24절입니다. 구약 성경 571쪽인데요.

(왕하6:24~30)
24 이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25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26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통과할 때에 한 여인이 외쳐 가로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27 왕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28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29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30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저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

이런 내용이 나오죠.
그러자 이제 이 왕이 열 받아가지고 엘리사의 머리를 날려버리겠다.
그러한 어떤 진노를 표하는데

이 상태 이 사태가 왜 벌어졌느냐? 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출해내셔서 북이스라엘로 인도하셨다면
이러한 어떤 잔인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아야 되지 않느냐라는 것이 우리들 생각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잖아요. 자기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해서 이 땅에 온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그들이 잘못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어떤 처참한 상황에 지경에 이르렀다.
이 말의 의미는 뭔가 하면
그러면 잘못하지 않으면 이런 처참한 상황이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 하거든요.

이 본문을 갖고 여러분들이 설교를 한다 쳐봅시다.
이 말씀을 가르친다고 해봅시다. 이 본문을 갖고 뭐라고 설교하겠습니까?
이 여호람 왕이라고 이 생각되어지는데 이 당시에 왕이 지금 이 아람 군대가 이들을 둘러쌌잖아요.
그러니까 사마리아 성이 먹을 게 없는 겁니다.

그 앞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아시죠.
아람 왕이 자기들이 군사 작전을 펼치는데
그 군사 정보가 계속해서 저기 북이스라엘에게 왕에게 자꾸 새나가는 겁니다.
새나가니까 그 이유를 찾아내잖아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거 같이.
그래서 엘리사를 죽이려고 하는데
찾아갔다가 엘리사를 잡으러 갔다가 오히려 사로잡히면서
그들은 죽어 마땅한데 오히려 놓임을 받는, 왕은 죽이려고 하는데
’죽이지 말라, 물과 음식을 주고 돌려보내라‘ 이렇게 얘기를 하잖아요
그 당시에 이 불말과 불수레, 불병거가
이 엘리사를 이렇게 보호하고 있는 그러한 장면들이 이 앞부분에 있었거든요.

이런 상황 속에서 지금 이 사태가 벌어졌는데
우리들 같으면 우리들 생각이 이런 거예요.
아니 그때 다 죽였으면
북이스라엘이 이런 형편에 이런 어려운 형편에 도달하지 않았을 거 아니냐
이 조건을 하나 달 수 있고
또 하나는 이들이 말씀대로 살았다면 이러한 처참한 상황에 도달하지 않았을 게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어느 쪽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서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피해가려고 하거든요. 내 중심으로.
레위기 26장 27절을 한번 봅시다. 레위기 26장 너희가 이 같이 될지라도.
지금 26장에 보면 ’언약대로 이행하라. 그리하면 내가 복을 주겠다‘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그러나 너희들이 언약을 배반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언약을 배반해서 하나님 그들에게 여러 가지 징계를 내립니다. 진노를 내립니다.
진노를 내려도 이들은 안 듣는다라고 이미 말씀을 다 해놓으셨어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뭔가 하면요, 레위기에게 나오는 이런 말씀, 신명기 32장인가
그 이후에 나오는 말씀들이 미리 포로로 잡혀가는 것까지
그래서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까지 다 말씀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좀 나름대로 똑똑한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 그것은 이미 포로 후기에 포로 돌아온 이후에 쓴 성경이니까
그런 이야기를 기록해 뒀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런 게 아니에요.
세상 자체가 이스라엘 자체가 이 온 세상 자체가 말씀대로 되어지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제가 어제도 그런 설교를 드렸는데
세상은요 ’모든 만물이 십자가 지신 분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어요.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모든 만물입니다.
여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죠. 27절에 보면

(레26:27)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고

염병을 보내고 그리고 대적의 손에 붙였는데 그리고 양식을 끊어요.
26절에 보면 양식을 끊어버리면 먹을 것이 없어요. 언약을 배반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아요.
돌아오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죄를 인하여 칠배나 더 징책하리니 29절

(레26:29)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여기에 보면 아들의 고기를 먹고 딸의 고기를 먹는다 했죠.
언약을 배반하면 그러면 우리들은 아까도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그래, 딸의 고기를 아들의 고기를 안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언약을 배반하지 말아야 된다라는 것이 우리들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건 관람자가 하는 소리죠. 관람자가

그 영화관에 가면 배역 맡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돼요?
그 각본대로 그냥 죽을 사람은 죽고 살인할 사람은 살인하고
살인 당할 사람은 당하고 그렇게 해야 되잖아요.
근데 관람자가 뭐라고 합니까? 아 죽으면 안 돼, 살려야 돼.
요즘은 관람자가 다 그걸 다 써버리죠.
미리 만든 드라마는 그럴 수 없지만, 미리 안 만든 드라마는 초치기 한다고 그러잖아요.
관람자들이 주인공 살려라 죽여라. 지금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이 말씀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요 이 말씀을 위해서 만들어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들이 이 말씀 속으로 들어가야 돼요.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멸망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고요.
남유다도 다윗의 등불을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그들도 멸망해야 됩니다.
그래서 성소가 이제 예루살렘에서 떠나서 포로로 잡혀가던 그들 속에서 잠시 무르게 되거든요.
나중에 다시 돌아 오지만
다시 돌아오면 어디로 돌아옵니까? 성소가?
예수님 몸으로 들어오거든요. 나중에. 몸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시는데

지금 이 말씀에 보면 우리들 관람자의 입장에는
지금 이 아람 군대가 쳐 들어와서 사마리아 성을 에워쌌을 때
오늘 내 자식 고기 잡아 먹고 내일은 니 아들 잡아 먹자 했을 때
이 말씀들이 기억 안 날까요? 기억나겠죠.
나면 회개할까요? 안 그러면 지금 이 회개하지 않고
’내 어제 내 아들 잡아 먹었으니까 오늘 네 아들 잡아 먹자’
지금 이 일을 더 우선시 할까요? 구경꾼들은요 말씀이 우선이다 하죠.
이들은 지금 그럴 수가 없어요.
말씀을 알아도 우리가 언약을 배반했다. 회개해야 되는데 왜 회개하지 않느냐?
이들은 이렇게 되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언약을 위해서
그 언약대로 이들은 심판당하는 그 역할을 보여주는 자로서의 북이스라엘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교훈을 받는다고 이렇게 덤벼드는 자들이 대부분이잖아요.
교회가 그리고 교인들도.
큐티라는 게 그런 거잖아요? 아침마다 성경을 묵상한다 했을 때 다 교훈이잖아요.
교훈을 받는다는 것은 아! 나 이렇게 하지 말아야 되지. 저렇게 하지 말아야 되지.
그런 생각을 사람들이 하겠다고 덤벼드는데,
그것은 여유로울 때 그렇게 하지 않는 거예요. 여유로울 때

그러나 상황 속에 내몰리게 되면 그렇지 않은 겁니다. 인간 자체가

오늘 제가 어떤 사람의 글을 읽었는데 젊은 친구인데
그 친구는 이제 기복주의에 대해서는 잘못됐다라는 걸 이렇게 배운 거예요.
그런데 살아보니까요, 사는 게 만만치 않아요.
그러니까 자동적으로 ‘하나님 도와주세요. 잘되게 해주세요’
뭐 그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더라는 겁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 우리들이 이걸 본다면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기복주의가 잘못되었는데 막상 자기가 닥치니까 살려달라고 하더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이 친구가 하는 말이 이런 겁니다.
‘신앙은 실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내가 위기에 닥쳤을 때 기도하면 들어주더라’ 이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지옥 가도 마땅하구나. 이게 나와야 되는데.
십자가가 나와야 되는데

그 전까지는 자기가 버틸만 했거든요.
버틸만 하니까 나름대로 믿음이 있는 그러한 행세를 보인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막상 이 돈 버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보니까 만만치 않거든요.
뭐 부모가 떼돈이 있다면
내가 월급을 받지 않아도 직장에서 쫓겨나도 뭐 별로 어려움이 없잖아요. 그죠.
그런데 부모가 밀어줄 돈이 없어요.
뭐 직장도 그만 다니고 아무것도 못할 때 그럴 때 어떡하겠어요? 남 얘기가 아니거든요. 남 얘기가
신앙이 있다고 흉내를 내는 거예요.

우리가 제가 아까 설교를 할 때
그런 목사들의 설교에 대해서 비판을 했지만요, 그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러면 인정해야 됩니까? 인정은 못하죠.
복음을 전해야 되니까, 우리들은.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되니까.

십자가가 나와야 되는 자리에 우리는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자기 합리화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이 레위기 26장의 말씀대로 지금 이런 상황이 펼쳐졌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대로 여호와의 이름만을 증거하기 위한 이스라엘이구나.
그러면 우리들은 ‘오늘 내 아들 잡아먹고 내일 네 아들 잡아 먹어 마땅하구나. 아멘’
이래 나와야 되거든요.
아! 끔찍스러운 이야기죠. 그죠?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과대 평가를 해요.
우리가 마귀 새끼인데 마귀 새끼는 자기밖에 모르거든요. 자식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우리는 자기 아들 잡아 먹지 말고 지 목숨 내놔 가지고
자기가 가마솥에 들어가 가지고 살코기가 돼 가지고 자식 아들 먹이면 안 돼요?

주께서 말씀을 주셨으면 그 말씀 속에 들어가서 우리는 그렇게 살려지면 돼요.
문제는 인간은 이 자존심이 너무 강한 겁니다.
아! 나는 이 정도로 악하지 않아 나는 언약을 배반하지 않겠어.
아니 언약대로 되어 지기 위해서 만들었는데 자기가 배반 안 하면 언약대로 안 되는데요.
그렇게 산 자들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자기들은 말씀대로 살아내잖아요.
말씀대로 살아내니까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죠.
그러니까 그들은 누구를 죽여버립니까? 예수님을 죽여버리죠.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들어가셨을 때
첫 번째 마귀가 시험하는 내용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로 떡덩이로 만들어라’
사십 일간 주렸잖아요. 이건 사십 년 광야 생활을 그대로 재현하는 겁니다.
재현하면서 그 당시에 다시 반복합니다마는
그 당시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구약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어떤 인식 구조를 갖고 있는가를 분명히 이해를 해야 돼요.
그런데 그걸 지금 오늘날 목사들은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해석법이 그들의 해석법과 다르지 않다라는 사실이에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 그 만나로 사는 건데 만나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어떤 인간들이냐 할 때는
날마다 죄인으로 드러나는 그러한 인간들이죠.

그러면 성도가 성령을 받았을 때 성령받은 인생은 어떠한 인생을 살 거냐라고 할 때는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니까
이 성도가 아주 어떤 상황으로 내몰립니까? 로마서 8장을 한번 봅시다. 31절.

(롬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대적 못한다라고 나와야 되잖아요. 얘기 자체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니까.
그러면 대적할 자가 없으니까, 이 전진하면서 늘 승리하죠. 승리 승리 승리.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겠네’ 우리 어릴 때 많이 불렀던 복음 성가잖아요.
요즘도 뭐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예수 이름으로 승리한다는 게 도대체 어떤 의미로 승리한다고 생각합니까?
이미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대적자가 없어요.
대적자가 없다는 삶의 모습이 어떠한가라고 할 때는 뒷부분에 쭉 나옵니다.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

이거 꼭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줄 뿐만 아니라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아‘들을 주신 것은 생명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그 풍성이 없게 하는 말이 어떤 의미냐라고 할 때는 인간들은 그걸 어떻게 이해합니까?
여기에 보면 ‘아들을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은사로 주신다면 이 은사는 어디로부터 나오는 선물입니까?
십자가의 피로부터 나오는 선물이죠.
그러면 이 은사들은 모두가 다 피를 증거하기 위한 은사가 되겠죠.

그런데 사람들은 이 이 본문을 보면서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런 말씀을 하니까 나의 대적자가 없다. 이래 들어가는 거예요.
말이야, 맞죠? 대적자가 없죠.
그런데 그 ‘없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입니까?

(롬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송사한단 말이죠. 정죄함이 없다라는 거거든요. 성도는

(롬8:33하)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8:34상)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네 바로 정죄에 관한 이야기예요. 죄 없다라는 거예요.
십자가의 피로 용서함을 받았다는 거예요.
로마서 8장에 그 뒤에 보면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장 1절입니까? 거기에 나오죠. 그 내용을 지금 그대로 담은 거예요. 여기 보면

(롬8:34)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말은 이 주의 자리에 앉으셨다는 거예요.
그 주의 자리에 앉으신 분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를 위해 간구하다 할 때는 기도만 하는 게 아니라
그 기도의 효력이 성도에게 그대로 미치게 돼 있죠.
미치게 돼 있으면 성도는 어떻게 살아요?
우편에 계신 분이 기도하시면 성도는 승리하죠. 그 승리하는 모습을 봅시다.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이걸 피하는 게 아니에요.
환란 속에 곤고 속에 극심한 고통 속에 핍박 속에 기근 속에 적신 속에
위험 속에 칼 속에 있는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다는 증거예요.
앞부분에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아무도 대적하지 못하니까 환란 속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코로나19 속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성령이 인도하심이라면 이런 것들을 피하게 해주셔야 될 거 아니에요.
우리들이 생각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면.
말씀을 완전히 거꾸로 읽죠?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면 환란을 피하게 해주고
극심한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주고 그게 지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인간들의 바램이잖아요.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 속에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라는 확실한 증거라는 것을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는 그러한 모습이라는 것을 그들은 상상도 못하죠.

그들이 기껏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대적자가 없다는 거죠.
갇히지도 않고 마치 이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천사가 끄집어내고
이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을 때 이 찬양과 기도를 하니까 옥문이 열리고
옥문이 열려도 안 나와요. 궁극적으로는 죽어요.

차라리 그곳에서 그냥 죽었으면 고난을 덜 받았을 건데
더 살아가지고 괜히 꺼내줘 가지고 더 개고생하다가 결국 또 죽어요.
나를 위한 성령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한 성령은 있죠.
그 우리는 주님의 피로 새롭게 만드신 새로운 피조물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죠.

성령께서 인도하시면 예수님께서 이제 마귀의 시험에서 이겼으니까
우리는 이겨야 된다라고 생각하잖아요. 그죠. 성령을 받았으니까
성도는 이길 필요 없어요. 그냥 살면 돼요.
뭘 어떻게 이겨요. 우리가. 주님이 다 이겼는데.
주님이 이기신 것들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 뿐입니다.

또 이 말씀을 보고 유혹을 받죠.
그래 칼이 와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아야 되지 내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나를 부인할 거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내가 부인하면 안 돼.
그래서 옛날에 그 일본의 그 영화 제가 기억이 안 나는데
유명한 그 감독이 만든 영화가 있는데 혹시 아세요?
우리나라도 그 조선시대에 처음 복음 왔을 때도 사람들이 많이 죽었잖아요.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는.
일본도 마찬가지였거든요. 그 예수상인가 뭐 그림인가?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안 밟고 지나가면 죽인다. 이래가지고
그거 밟고 지나간다고 지옥 갈 것 같으면요 나 안 밟고 지나가겠어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기껏 그것밖에 모르는 거예요.
주님의 일을 자기 일로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이걸 보면 환란이 와도 나는 예수를 믿는 것을 포기하지 않아야지
그렇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아요. ’나 견뎠다‘를 자랑하지
주께서 견디게 해주시면 십자가를 자랑하게 돼 있고요.
내가 환란을 견뎠으면 나를 자랑하게 돼 있습니다.

성도는요.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36절 하반절을 보면

(롬8:36)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이게 누구의 모습입니까? 예수님의 모습이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시잖아요. 자기를 증거하실 때.
예수님의 모습은 이 토끼 몰이 당하는 모습을 갖게 되죠.
3년 동안, 우리가 볼 때는 구경꾼이니까 토끼몰이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해서 전력 질주하시잖아요. 그게 마가복음이잖아요
마가복음 십자가로 급행 열차를 타고 달리는 겁니다.
급행 열차 정도가 아니죠. ktx보다 더 빠른. 나중에 뭐 서울에서 부산까지 20분 만에 간다는데.
진공 뭡니까? 이름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런 그런 내용을 담고 있거든요.

달리 말하면 예수님은 자기를 증거하시는 가운데
주변 환경 여건 전체를 예수님 자신을 죽이는 상황 속으로 이렇게 다 빨아당깁니다.
성도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꼴이라는 거예요.
근데 이러한 꼴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아무도 대적을 못하는 꼴이에요.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는 정도입니까? 도살 당하죠. 스데반 집사님이 도살당하잖아요.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는데 이제 주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인간들이 노리는 게 다 그런 거잖아요.

이미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미 은혜가 족하거든요.
은혜가 족하다라는 말은 이미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는 말이고
십자가의 능력 안에 있다라는 말이거든요.
그러니 어떤 상황과 어떤 형편이 있더라도 이미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상태예요.
아무도 대적 못하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환경이 따로 있잖아요.
그렇게 될 때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라고 생각하고
내가 바라는 환경이 될 때 아무도 대적 못하는 그러한 상황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단 말이에요.

우리를 위해 있는 게 아니에요. 성령은 우리를 위해 있는 게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을 하시는데
동행을 하면 우리는 어떤 모습을 살게 되느냐?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게 돼요.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는 이겁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시잖아요. 성령을 받으셔서 성령에 이끌려 가시잖아요.
이끌려 가실 때 성령은 예수님은 역시 자신도 죽음의 길로 가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를 마치 어느 자리에 두는가 하면
예수님처럼 자기도 성령이 오시면 ’성령 + 나‘ 해가지고
내가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주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인간이 된다라고 생각을 해요.

아까 처음 시작할 때 예를 들어 그런 설교들이 그런 거예요.
하나님 아들처럼 살아야 된다는 것은
성령을 받으면 성령을 받았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 수 있습니다라는 얘기가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예수님도 아니거든요.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예수님이 순종을 합니다.
목숨을 직접 내어주시잖아요. 대속물을 위하여.
이게 성령과 그 아들 예수님과 합작품이잖아요.
우리는 합작품이 안 돼요. 우리는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원치 않는데 주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성령께서 지금 이러한 주님의 증인으로 끌고 가시는 거예요.

그 말은 곧 ’나는 아니고 주님은 이고‘ 이러한 상태로 성도가 살아간다라는 겁니다.
그래야 이 몸이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증인이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겁니다.
성령이 오시면 내가 성령을 받았으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말 이 아들다운 삶을 살아야 되고 믿음을 지켜야 되고
그리고 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주셨으니까
그 이루어 주심을 내가 믿고 살아야 된다.
자기를 부인할 능력은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위한 인생인데
십자가를 위한 인생이 아니라 나를 위한 십자가로 인간들을 다 바꿔치기 한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꾸 이런 상황 속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자꾸 원하는 거예요.
이 상황 속에서 이 형편 속에서
사람들이 기도하는 게 그거잖아요.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
벗어나 보세요. 또 그 상황을 또 벗어나게 해달라는 거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이미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우리를 넣어주셨기 때문에
이 자체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치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형편이라는 거예요.

성경 하나만 더 보고 마치겠습니다. 역대하 35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역대하 35장을 보면 그 요시야 왕이 등장하거든요.
그 요시야 왕은 남유다 나라에 있어서 좀 괜찮은 왕이에요. 요시야라고 하면
히스기야 왕과 요시야 왕이 양대 산맥을 이룬다라고 볼 수 있는데
35장 1절부터 보면 그전에도 뭐 그런 내용이 나오지만, 끝부분 봅시다 34장 33절

(대하34:33)
이와 같이 요시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모든 땅에서 가증한 것들을 다 제거하여 버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으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요시야가 유월절을 제대로 지키거든요. 오랜만에
어쨌든 그 말씀대로 곧 돌아가는 앞부분에 보면
이 율법책을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않아서 하나님의 진노가 이렇게 임하였다라는 것을 알고
이제 율법대로 기록된 대로 이들이 순종하겠다는 그러한 모습을 요시야 왕이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은 이런 일이죠.
그 뒤에 보면 요시야 왕이 어떻게 죽는가 하면요. 20절입니다. 18절 볼게요.

(대하35:18)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왕들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주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
(대하35:19) 요시야가 왕위에 있은 지 열여덟째 해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이 정도 하면 요시야가 괜찮은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요시야가 죽을 때도 좀 괜찮게 죽어야 되는데 희한하게 죽어요.

(대하35:20)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성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
                애굽 왕 느고가 유브라데 강 가의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왔으므로
                요시야가 나가서 방비하였더니
(대하35:21)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 유다 땅이 중간에 위치하니까 애굽에서 좀 길을 좀 내달라는 겁니다. 표현을 하자면
지나가서 저 갈그미스를 치겠다. 그렇게 하니까 이 요시야가 가로막고 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애굽 왕 느고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네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가 오늘날 그들을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로 더불어 사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그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대하35:21하)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
(대하35:22)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뭐 이상하지 않아요? 갑자기 요시야 왕이 이 율법대로 돌아갔거든요. 유월절도 지키고
그래 했다면 하나님께서 이 애굽 왕 느고를 통해서 너희에게 말할 거다.
지금 이 애굽왕 느고가 저기 갈그미스를 치로 올라가는 이 과정은 나의 뜻이다.
그가 하는 말은 내가 그의 입에 준 말이다. 이걸 좀 알려줘야 안 돼요?
우리가 볼 때는 이 애굽 왕 누구보다 누가 더 중요해요? 요시야 왕이 더 중요하잖아요.
이런 본문을 보면 당황할 수밖에 없어요.
아니 언제 하나님께서 이 애굽 왕, 느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까? 정보가 하나도 없어요.
뭔가 알려주고, 요시야가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그 느고의 말을 듣지 않아서 죽었다 이렇게 했다면
뭔가 이 요시야가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서 죽었다 이렇게 볼 수 있는데
지금 이 상황을 보면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니에요.

왜 이렇게 죽어야 되는가?
이게 이 유다의 현실, 언약대로 멸망당해야 되는 그러한 어떤 현실이기 때문에 그래요.
유다가 멸망당해야, 남유다가 멸망당해야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칠십 년이 일어나고 칠십 이레가 일어나서 이 언약의 완성자가 이 땅에 오시게 되어 있거든요.

이런 본문을 볼 때도 마찬가지잖아요.
이런 걸 보면 하나님께서 좀 정보를 주시죠. 요시야가 듣게.
이 정도로 개혁을 했다면 사무엘 이후로, 그전에 뭐 히스기야도 유월절을 지킨 적이 있지만
어쨌든 여기에서 보면 역사에서 보면
이후로 이 이스라엘 가운데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다. 대대적으로 지켰다는 거거든요.

그러면 이 정도 된다면 하나님께서 요시야 편을 들어서
요시야 왕이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죽지 않게 해야 되는데 왜 죽게 했습니까?
그러면 사람들이 이 본문을 보면서
죽어야만 언약대로 되어지네요. 이렇게 믿어야 되는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인간은 성경을 읽으면서 선악을 늘 따지기 때문에
이 요시야 왕의 이러한 어떤 행동을 선이라 생각하고
그런데 또 안 맞거든요. 이 애굽 왕 느고가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왔다라는 이 자체가
이해가 안 되니까 이제 결국은 누구 책임을 돌리는가 하면
하나님이 무슨 이런 하나님이 다 있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23절에 보면

(대하35:22하)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대하35:23)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의 신복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을 입었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
(대하35:24) 그 신복이 저를 병거에서 내리게 하고 저의 버금 병거에 태워 예루살렘에 이른 후에
                저가 죽으니 그의 열조의 묘실에 장사하니라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
(대하35:25) 예레미야는 저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

이런 식으로도 기록돼 있는 거예요.
정말 황당한 얘기 아닙니까? 그죠.
율법대로 개혁을 했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함께하셔서 정보를 주셔가지고
이 애굽 왕, 느고가 와서 갈그미스를 칠 거니까 길을 내줘라 이렇게 해야 되는데
막아요. 그 어이없이 죽음을 당하지요.
언약대로 되어지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에요.

그러니 이런 내용들을 들여다보면 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멸망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러한 어떤 것들이 안 통해요.
유대인들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이런 말씀이 있어도요.
자기들이 어떻게 하더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못 따라간다는 걸 알아야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자기들 쪽에서 구원을 이루어 낼 수 있다라고 계속해서 생각하는 거예요. 달리 말하면
말씀 자체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했으니까
이들은 말씀을 붙들고 있죠.
자기들이 말씀을 지켜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의 나라 아들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미 그들은 말씀대로 살고 있어요. 말씀대로 살고 있어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고 있는 자들‘이에요.
그들 속에 예수님이 들어가시잖아요.
들어가시니까, 그들이 뭘 요구합니까?
그들이 원하는 바는 만나를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그들이 원하는 바는 딱 하나죠.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고 말씀대로 되어지기를 원하죠.
그들이 예수님을 죽여버립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의 완성이거든요.

그런데 어느 누가 그렇게 해석을 할 수 있겠어요?
그것은 이 말씀이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성령을 주시지 아니하면 이 말씀 속에 합류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성령받지 못한 자들은 아무리 말씀을 흉내내도 결국은 흉내내다가 끝나버려요.
흉내내다가 끝나는데 마지막은 항상 이런 식으로 흘러갑니다.
’자! 성령을 주셨으니까 이제 주님 저에게 닥치는 환란을 피하게 하시고
이 형편을 다른 좋은 환경으로 바꾸어 주시고
빨리 이 자리에서 도망쳐서 제주도에서 살게 해주시고‘ 표현을 하자면,
그걸 요구하는 거예요. 마지막에는

그러나 성도는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기 때문에
사는 자리 자체가 이미 그 어느 누구도 대적하지 못하는 그러한 삶의 현장이라는 겁니다.
그 모습은 바로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죄인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모습이에요.
(recorded by 구 성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