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9-08 20:33
서울골방교회 15강 질문과 답변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1  
https://youtu.be/sk26Cqb5GBA

관리자 21-09-09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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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골방교회 15강 질문과 답변

말씀을 적용한다는 자체가 유대교적 사고 방식이에요. 말씀을 적용한다는 이런 사고 방식 자체가.
근데 설교라는 자체가 적용을 하지 아니하면 할 게 없어요. 본문 해석.
뭔가 이 적용을 한다는 거는 율법화된다는 거거든요.
그러면 설교하기가 되게 쉬워요. 적용을 하면 되니까.
그게 이제 유대교적 사고 방식인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냥 살죠.
적용을 한다는 것은 내가 주인공이 된다는 거고

예수님의 시험 받으시면서 하신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살고 싶어 하거든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고 싶어해요.
하나님과 같이 되고픈 마음. 그 마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적용 당하고 해석 당해야 되는데
선악을 아는 지식을 이미 우리가 소유해 버렸기 때문에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가 적용하고 해석을 하려고 하거든요.
이러한 충돌은 늘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고요.
육이 항상 살아 움직일 때 그 속에서 영이 이렇게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항상.

방금 말씀하셨다시피 설교라는 것이 언어로 하잖아요. 말로 하기 때문에
관람자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지적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설교를 들을 때
‘나는 관람자가 되지 않아야 되지’라는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요. 인간이라는 자체가.

그런데 문제는 말씀 속에 우리가 들어갈 능력이 없어요.
주님이 들어가게 하셔서 살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결과물일 뿐이에요.
결과물로서 드러나는 방식은 관람자로 살든, 살지 않든
십자가를 자랑하게 돼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이에요.

성령이 없는 자들은 이런 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예수님 흉내를 내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 설교 얼마나 좋아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삽니다.
여러분! 성도는 말씀으로 사는 자들이지, 떡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간단해요.
그러면 좀 머리 좋은 성도는 “당신 밥 먹지 말고 사세요” 이래 나와요. 당장.
그 말이 맞아요. 말이 맞는데 그 맞는 말이 복음이 될 수도 있고요.
완전히 악마의 말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이 말씀 자체가.

말씀대로 산다 할 때는 주님의 피로 산다 이런 식으로 이제 결론이 나와야 되는데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말씀을 이렇게 듣고 적용하고, 반성하면서, 하루하루를 사는 걸
말씀대로 사는 걸로 그렇게 또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죠.
대부분이 그렇다고 볼 수 있고요.

질문: 잠깐 그런 생각을 해 봤어요.
세대주의 신학자들은 성화하고 많이 연결이 되잖아요?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성화주의를 완전히 죽여버리잖아요?
그런데 이제 세대주의는 세대주의 대로 우리에게 공급하는 것이 있고, ???? 있는데
한의사나 양의사들을 보면 서로가 서로를 무시해요.
한의사는 양의사를 무시하고, 양의사는 한의사를 무시하는...
서로 무시할 문제가 아니고 서로 보완되고 서로 조율되어져야 할 문제거든요.
근데 이제 자꾸 이렇게 하다 보면 어느 한 쪽이 ‘내가 다 옳다’ 말할 수도 없고
‘저게 다 틀리다’ 라고도 말할 수 없는데. 물론 이 본질을 이렇게 흐리면 안 되지만
아까 얘기했던 목사님이 80% 90%는 맞지만 마지막 한 얘기는 틀려져 나간다
그러나 80% 90% 맞는 데에서 그 말씀하는 바는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다는 거고 유익을 얻는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이제 십자가의 메세지가 제대로 공급이 되어지면 완성되어질 것 같은데,
이게 아주 격리 돼버리는 건가?
그렇게 될 수가 없다는 건가? 라는 게 이제 하나의 질문이고

또 하나는 이제 제가 정 목사님의 말을 듣다 보면
진짜 성령 받은 사람만 구원 받는 거고, 구원받고 성령받은 사람은 아주 드물어요.
그래서 내가 3억 개의 정자 중에 하나가 생명이 되는데,
70억의 인구 중에 몇 명이나 있나? 예를 들면. 정말 극소수 극소수의 사람이 되는 거구나.

그러면 성령 받지 않는 사람에게 지금 정 목사님이 아무리 말해봐도 소용이 없을 것이고,
이목사님도 아무리 얘기해 봤자 소용 없을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계속 또 전하는 게 사명이고 십자가의 증인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거 이해는 하죠.
그런 생각도 좀 들어봤고.

(제가 오늘 백신을 맞고와서 그런가? 잠이 쏟아져 가지고 잘못 들었는데)
아까 마태복음 4장 1절에 성령이 마귀에게로 끌고 가는 것을
그 두 목사의 설교를 통해 설명 하셨잖아요.
하나는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으니까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라는
심리적인 굳은 각오를 갖게 하는 그런 메시지가 하나 있었고
또 하나는 그렇게 예수님이 다 완성을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좀 자유롭고 풍성하게 누리고 살면 된다 이런 식으로 제가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 이제 그다음에 장로님이 설명을 해 주셨는데
그냥 그러니까 결국 성령이 오셔야 된다. 그다음 답이 뭔지를 제가 잘 못 들었어요.
답이라기보다는 그 다음의 것들을 내가 충분하게 이해가 안 됐던 것 같아요.
비몽사몽간에 있어가지고 천국에 갔다오느라고 비몽사몽했는지 ㅎㅎㅎ

답변: 처음 얘기를 들어보면 한의사랑 양의사죠. 제가 사는 동네에는 이걸 병합해서 써요.
한꺼번에 같이 하거든요. 약국에 가면 한약이랑 서약을 같이 줘요. 복용약도. 이 동네는 그래요.
예는 뭐 그런 식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세대주의자도 신천지도 뭐 안산홍도 다 성경을 갖고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것은.
유대인들도 성경을 갖고 이야기를 하죠.
그들도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걸 알아요.

문제가 무엇이냐라고 할 때는
이 말씀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다라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죠.
그것은 성령을 주셔야만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 말씀을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하느냐라고 할 때는
자기 구원 중심으로 해석을 하죠. 자기 구원 중심으로. 유대인들을 보게 되면 먼저.
그들이 말씀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말씀을 해석을 하잖아요. 말씀대로 해석을 할 때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죠.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요.
이 말씀의 의미는 니고데모의 해석법은 육적 해석법이고,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선생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그 선생들이 해석하는
70인 산헤드린 공의회뿐만 아니라 서기관들도 마찬가지고
모든 사람들의 해석법은 육의 해석법이라는 겁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뿐이에요.

그러면 육은 무엇을 추구하느냐? 라고 할 때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의 대화에서 그 마음을 이미 드러내셨잖아요.
니고데모가 왜 거듭나고 싶어 합니까?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은 거예요.

왜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은가? 라고 할 때는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거듭납니까?’ 라는 질문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한 거거든요.

그러면 이 사람이 갖고 있는 하나님 나라는 누구를 위한 나라냐? 할 때는
‘자기를 위한 나라’예요. 아무리 얘기를 들어도.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께서 만드신 하나님 나라는
피를 자랑하는 나라죠. 어린 양의 죽으심을 자랑하는 그 나라란 말이에요.
우리를 위한 나라는 자체가 없고.
니고데모가 들어가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 피로 새롭게 만들어진 피조물이 들어가는 나라죠.

이와 같이 지금 아까 세대주의를 얘기했는데 세대주의가 그 해석을 해내는데
결국은 그들의 해석법이 뭘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이야기하는 건지?
안 그러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지 못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지? 를 먼저 살펴봐야 되겠죠.

세대주의 특징은 ‘우리가 뭘 해야 된다’는 얘기잖아요. 맞죠? 윤 목사님. 그죠?
‘뭘 해야 된다.’ 이것은 십자가의 피를 완전히 경멸하는 거예요.
다 이루심을 경멸하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은 우리가 할 게 없어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을 왜 그렇게 주셨냐? 라고 할 때는
그 분명히 베드로후서에서 ‘성경은 사사롭게 풀지 말라(벧후1:20)’ 했잖아요.
그러면 이제 또 상대주의의 원리에 의해서
‘당신도 사사로이 푸는 거 아니냐?’ ‘나도 사사로이 푸는 게 아니냐?‘ 이렇게 들어가면
말에 끝이 없겠죠. 그렇게 이야기를 해버리면. 그럼 말장난밖에 되지 않고요.

요한계시록 자체는 성령받은 사도요한이 쓴 거예요.
그러면 그 성령받은 사도요한의 그 말씀 자체가, 잘 보세요.
요한 계시록을 해석하는 것하고 요한복음을 해석하는 방식이 동일한 해석법이라야 되잖아요.

그러면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들을 육으로 해석이 안 되죠?
육으로. 이해시키고 납득시키는 방식으로 해석이 안 되잖아요. 요한복음 자체가.
예를 들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들을 예수님이 먹이셨잖아요.
그 먹이신 현실은 사실이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이 설명을 할 때
’내 피와 내 살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 라는 것까지도 알려줬어요.
그러면 우리는 요한복음 6장의 의미를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거는 다 알 수 있는 이야기예요. 오늘날 성령 안 받아도 다 아는 이야기잖아요. 맞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다‘
이 말씀을 다 알아요.
성령이 필요 없어요. 그다음 뭐까지 아는가 하면
믿어야 된다는 것까지 다 알아요.
그러면 요한복음이 해석이 제대로 된 겁니까?
그게 육적 해석이에요. 그게 육적 해석이라고요.
계속해서 자기로부터 출발하잖아요. 계속해서 자기로부터.
자기를 위한 구원을 포기하지 않는 거거든요.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예요.
세대주의들이 노리는 건요. 우리가 볼 때는 뭔가 하나님 나라 뭐 뭐 어쩌고 저쩌고... 이게
자기를 위한 천국이잖아요. 뭐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자기를 위한 천국.
나를 위한 천국.

천국은 나를 위한 천국 자체가 없어요.
그러니까 아예 뭐 50% 맞고... 이 자체가 없어요.
그리고 아까 제가 말씀드린 아까 그 목사 얘기,
성경 해석에 대해서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그런 얘기는 다 맞는 얘기예요.

그 ’맞다‘라는 말이 제가 ’제대로 맞다‘라고 하는 그런 얘기가 아니고.
그거는 다 그렇게 표면적으로 말을 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 내용이 무엇을 담고 있느냐? 라고 할 때는 십자가에서 이루심을 담고 있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 목사가 그걸 해석을 하면서
’왕의 대관식이다.‘ 여기까지는 맞죠. 그러면 그 왕이 어떤 왕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왕이죠. 그러면 십자가를 증거해야 되겠는데,

’왕의 대관식이다‘ 라고 하니까 이건 맞는 이야기처럼 들릴 뿐이죠.
제가 말 표현에 있어서 맞다는 표현이지, 그 해석이 맞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궁극적으로 들어가면 이게
’맞는 게 하나도 없다‘ 얘기입니다.

제가 그저께 설교할 때 그런 얘기했습니까?
이 성경 해석을 할 때 순도 99.99999999 그렇게 가도
반도체 할 때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1 요 하나만 틀려도 다 엉터리가 된다‘ 라고
제가 말씀드렸죠. 왜냐하면
인간은 그 하나를 갖고 나머지 전체를 삼켜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 80%가 맞다.
아까 그 목사들의 해석법 자체가 맞는 말을 하는 거예요. 설득시키는 겁니다.
그 맞는 말을 하는데, 맞는 말 끝에 뭘 이야기하느냐? 들어가 보니까
‘우리가 아들처럼 살 수 있다’는 거예요.

마치 이것과 똑같죠.
‘네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맞는 말이죠.
맞는 말을 했잖아요. 마귀가.

제가 설교를 할 때 ‘맞는 말’이라는 이런 표현을 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듣는 자들이, 그 설교를 듣는 자들이 옳고 그름을 따지기 때문에 ‘옳다’라고 해석을 하는데
마지막에 가보면 그 옳음 자체가
십자가에 의해서 완전히 거짓임이 드러나게 돼 있는 거예요.

설교를 할 때, 제가 하는 설교, 그들이 하는 설교 공통 분모가 있어요. 공통 분모들이 있거든요.
제가 이야기하는 게 이 공통 분모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게 육에 속했느냐? 영에 속했느냐? 에 따라서 이 공통 분모 자체는
하나는 완전히 악마적 해석이 되고요.
다른 하나는 진짜 영의 해석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를 증거하는 해석이 되죠. 이런 차이가 있는 겁니다.

두 번째 질문 그 성령 받지 않는 사람은 어차피 소용이 없는데 왜 전하느냐?
이렇게 질문하신 거 맞습니까? 어차피 안 되는데...

질문: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들어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거고,
당연히 자기식으로 밖에 해석을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지금 예를 들면 (제 말에 오해는 하지 마시고) 정목사님이 마치
그 반응을 하는 걸 보고 저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 성령을 안 받았다 이렇게 분별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성령을 받아도 예를 들면 베드로에게 베드로가 성령이 역사하셔가지고,
‘내가 누구냐?’ 그럴 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랬을 때,
‘바요나 시몬아 니가 아는 건 니가 안 게 아니다.’ 그러는데,
그도 잘 모르고 하는 말이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또 실수하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그 실수한 파트의 부분을 보고, 또는 해석을 잘못한 부분을 보고
‘저거 성령 받지 않았네. 받았네’라고 말한다면 또 우리가 잘못된 자리에 서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서...

답변: 우리는 복음만 전하면 돼요.
십자가 피만 전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분의 그 결과물이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의 판단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가 저 사람이 성령 받았니 말았니 이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그리고 설교를 할 때 그런 표현을 하는 이유는
받았다 안 받았다를 확정하기 위한 표현이 아니에요.
우리가 천국 보내고 지옥 보낼 수 없잖아요.

물론 주님께서 증인을 통하여서
주님께서 천국 보내고, 지옥 보내신 그 일들에 대해서 드러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이 복음을 전할 뿐이죠.
사도 바울이 똑같이 얘기하잖아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그럼 분명히 그곳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잖아요. 그죠?
그러면 그들이 사도 바울의 말을 들었을까요? 안 들었을까요?
다른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우리의 논리에 의하면 성령을 받지 못했다라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선언 속에는 무엇이 또 담겨 있는가 하면 그들을 향한 책망이 들어가요.
놀랍게도 다른 복음을 전한 자들이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책망을 받아서 죄인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이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죠.

복음을 전하고 있어요. 말씀 자체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천국과 지옥을 다 갈라놔버렸기 때문에.
그 확정된 내용이 복음 전파자를 통해서 계속해서 갈라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반대 현상이 더 일어나죠.
교회 안에서 가짜 교회가 나온다는 사실이에요. 교회 안에서.
방금은 윤 목사님은 정 반대를 이야기했잖아요? 그죠?
교회 아닌 예를 들어 복음을 안 듣는 사람은 못 알아들으니까.

놀라운 것은 사도행전을 보면 다 알아들어요.
혹시 사도행전 7장 설교 들어보셨습니까? 시간 나면 좀 들어보시고 거기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잖아요.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다 세례를 받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아요.
그러면 믿고 세례를 받았으면 다 성령을 받았다라고 얼마든지 인정해야 되잖아요.
빌립은 인정했어요. 인정 안 하는 게 아니에요. 빌립은.
빌립은 자기가 아 너 성령 받았네, 못 받았네, 마술사 시몬 너는 성령 못 받은 거야
이렇게 판단하지 않아요.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올라와서 안수를 해보니까 성령 받는 자와 못 받은 자가 갈라져 버리죠.
교회 안에 교회가 만들어진 거예요.
이것은 이후의 교회도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이 복음을 계속 전해야 되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을.

방금 이제 그렇게 사람들이 복음을 그렇게 전하면 불쾌하죠.
이제 불쾌하다라는 것 때문에, 이제
‘성령 받았다 안 받았다’ 이런 얘기 자체가 싫은 겁니다. 표현을 하자면.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런데 복음 자체가 계속해서 쪼개는 작업이거든요.
그럼 우리가 쪼개져야 된단 말이에요.
놀라운 것은 우리 자신이 어떻게 돼요? 로마서 7장에 보면.
사도바울 자신이 그 속에 뭐가 있어요? 육이 그대로 담겨 있잖아요.
육과 영이 계속해서 분화가 된다고 할까요?
그러한 현상이 우리의 몸 속에서 그대로 일어나는 겁니다.
단순히 외부인을 향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 자체도 계속해서 육적 요소가 나오기 때문에 성령 못 받았다는 것이 계속 나와요. 거꾸로.
복음 앞에 이제 그러한 현상들이 드러난다 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럼 세 번째 질문은 아까 그런 사람들에게 예를 들어 우리가 아들처럼 살자라고 했을 때
결론만 십자가 넣으면 맞지 않느냐? 하지만, 그런 질문 맞아요? 결론만

질문: 예를 들면 목사들이 설교를 하는데 한 80% 90%가 성도들이 은혜를 많이 받는단 말이에요.
근데 결론을 항상 보면 십자가가 빠져버린다
다윗이 그 주님의 십자가의 증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했을 때
만약에 그 목사님이 그렇게 맞는 80%를 가지고 그 뒤에 십자가의 증인으로 산다면
그것도 틀렸다고 볼 것이냐?
아니면 그렇게 말할 사람 같으면 아예 전반부 80%가 그렇게 해석돼서는 안 된다 그렇게 보는 거죠.

답변: 십자가가 안 나오면 앞부분의 해석 자체가 다 엉터리가 되는 거거든요. 먼저.
그리고 방금 목사님께서 80% 중에 은혜를 성도들이 받는다 했는데
그 은혜받은 은혜가 뭐냐? 가 중요하잖아요. 감동을 받았다.
‘야 정말 말씀대로, 말씀대로 제대로 푸는구나’ 이걸 은혜 받았다라고 못 보죠.

‘은혜를 받게 되었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십자가를 경유한 선물을 주셨다는 건데.
그러면 말씀 앞에 자기가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 은혜가 되고,
주님의 사랑의 깊이를 알아가는 것이 은혜가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받은 은혜는 뭐라고 표현할까요?
개인적으로 자기의 어떤 욕망과 관련되어서
자기를 지지해 주는 그런 말씀으로서의 은혜일 가능성이 대부분이죠.
그 설교들 자체가 자기를 부인하는 설교가 아니에요.

아까 예를 든 이름 대면 유명합니다. 유튜브에 나오니까.
자기를 부인하는 내용이 그 설교 속에 담겨 있지 않아요.
처음부터 교인들을 위한 설교예요.
‘아들을 닮자’라고 해버리면 ‘아들처럼 살자’라고 해버리면
십자가가 필요 없잖아요. 벌써.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야 된다라는 것도 마찬가지죠.
‘그리스도의 형상까지 자라가라’는 이 표현도
자라가라는 표현은 ‘우리는 아들이 아니라’는 얘기예요.
그 피를 자랑하라는 이 차원에서 자라가라는 의미지,
그 인간들이 생각하는 성화론이 아니에요.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만일에 그게 성화론이라면 사도 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을 하면 안 되죠.

질문: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면서 이제 그 성도들 가운데는 이혼 당해서 말할 수 없는데 까지
무너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질병으로, 사업 망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거란 말이에요.
그 사람들이 모든 것들이 다 망했지만,
‘모든 것들을 주시고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가 계시니까
그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면,
구태여 십자가를 적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다 틀렸다, 은혜가 아니다 그렇게 말할 순...

답변: 말할 수 있죠.
왜냐하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자체가 우상화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체를 보면 여호와의 이름이 ‘언약을 위한 여호와의 이름’ 이거든요.
그 여호와의 이름이 ‘언약을 위한 여호와의 이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여호와의 이름이 ‘자기를 위한 이름’으로 바꿔치기 해버렸죠.

어제 제가 설교할 때 이런 설교를 했어요.
개혁주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안 그러면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된다.’
이런 얘기를 할 때 이게 가장 악마적이라고 제가 표현을 한 이유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은 십자가 뿐이에요.

만일에 이혼하고 가정적으로 어려워서 예를 들어 그리스도로부터 위로를 받았다면
그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잖아요.
그러면 자신을 그의 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그 사랑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신 그 자체가 이미 아까 로마서 8장에 나오듯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꽁꽁 묶인 그러한 상황에 대해서 감사한다면
그 사람은 비록 거짓 선지자를 통했지만,
그 속에서 복음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라고 볼 수 있죠.
만일에 그러하다면 그 사람은 그 설교를 못 듣습니다.
왜냐하면 그 목사 설교 자체가 사람을 위한 설교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께서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는 있어요.
있는데 방금 아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같이 볼 수 있지 않느냐?
볼 수도 있어요. 있는데, 방금 그 예화에 있어서는 보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김목사 지난주 할 때 언급했죠.
로마서 강해 이야기하면서 김목사 로마서 강해를 들어보면 한번 읽어보세요.
읽어보면 십자가를 다 ‘예수 그리스도’로 바꿔버렸어요.
예수 그리스도도 많이 안 나오고. 하나님으로 다 바껴요. 호칭이.
그게 왜 바뀌는지 그 이유를 볼 수 있어야 돼요.
바꿔버리면 걸림돌이 사라지기 시작해요.
달리 말하면 ‘로마서 듣는 여러분들은 걸림돌이 더 이상 필요 없다’ 얘기예요.

그런데 듣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얘기 했으니까 십자가 당연히 이야기하지 않느냐?
이야기하는데 그런 게 아니에요.
내용을 들어가 보면 십자가가 이야기가 되어지면, 전파되어지면,
‘내가 믿는다. 복음을 안다. 나는 십자가 앞에 죄인이다’ 라는 요소 자체가 다 날아가 버려요.

그런데 십자가를 제가 볼 때 의도적으로 뺀 거예요.
의도적으로 빼버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니까 이제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다 자기 긍정하는 자료로 다 들어가 버린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게 들어가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많이 들어간 게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들어가기 시작하니까 결국은 어디로 가버리는가 하면 유대교로 가버리는 거예요.

혹시 시간 나시면 로마서 한번 이렇게 읽어보세요.
읽어보시면 그분이 미국에 있을 때 처음 이 복음을 접했을 때 그 설교와 완전히 바뀌어버렸죠.
그때 설교는 십자가 중심이에요.
십자가 중심에서 넘어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넘어가서 결국은 개혁주의로 넘어가 버렸죠.
그 용어가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라고 하지만 용어가 중요할 때는 엄청나게 중요해요.
그 노림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목사님 십자가 십자가 자꾸 이야기하면 그러면 십자가를 전하는 게 아닙니까?
그것도 아니에요. 그것도 아니라고요.
아마 목사님이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그 얘기일 겁니다.
‘십자가만 이야기하면 십자가 전하는 거 아닙니까?’ 이야기하지만
십자가 백날 이야기해도 그런 교회 많아요. 여러분이 유튜브나 인터넷에 들어가서
‘십자가’ 치면요 십자가만 전하는 교회가 되게 많아요.
그런데 그 십자가를 들어가 보면
십자가의 실체가 ‘아들의 죽으심만 자랑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십자가를 이용해 먹는 인간들이 대부분이에요. 대부분.

십자가 신학~ 해가지고 막 주장하는데 나중에 들어가 보면 자기를 위한 십자가예요.
그 십자가 신학 주장하는 이 중에 한 사람이 포도원 교회? 여목사라고 들어봤어요?
그 사람도 십자가 신학이거든요. 근데 한번 들어가 보세요.
지가 이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사람을 막 꿰뚫어보고 미친 짓은 다 해요. 무당 짓은.
근데 겉으로는 십자가 신학이예요.

우리의 염려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걸 다 아느냐?’ 이 염려가 있는데
설교자는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잖아요.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쓸 때 바울의, 자신의 말로 듣지 않고 성령의 말로 듣는다 했잖아요.
이미 기름 부으심이 자기 백성 속에 거합니다.
우리는 증인일 뿐이에요.
증인은 증거할 뿐이에요.
증거하면 성령의 교통하심 속에서 주께서 만나게 해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는 거예요.

‘그 어려운 걸 어떻게 이해합니까?’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아 이렇게 간단한 복음인데...’
그 그동안 너무 어려웠대요. 그거는 들어오고 난 뒤에 하는 이야기잖아요.
들어오기 전에는, 알기 전에는, 너무 어려운 거예요. 복음 자체가.
근데 들어와보니까 우리가 늘 하는 얘기예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이거예요.
어려운 게 하나도 없거든요. 어려운 게.

문제는 자기가 육에 속해 있기 때문에 모든 말씀들을 자기가 알아야 되고.
이해해야 되고. 믿어야 되고. 납득해야 되고...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말씀이 어려운 거죠.
근데 성령이 와버리면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데. 뭘 뭘. 뭐 어려운 게 뭐가 있어요.

저는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하거든요. 우리 설교자들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복음을 전하는데 아까 윤 목사님 말씀대로
‘저 사람이 성령 받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데...
성령 받아야 알아듣는데...
저 사람이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내가 어떻게 아나?
못 받았으면 백날 이야기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납득 못하는데 그 헛짓을 왜 하느냐?’

헛짓 하라고 우리를 보냈어요.
헛짓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요. 상대가 핍박을 해요.
성령받은 자들은 ‘아멘’하게 되겠지만.

주님은 복음 속에 우리를 집어넣어요.
십자가만 전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를 전하는 그 십자가 속에 우리를 집어넣어요.
아까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백성들을 주님이 이 땅에서 만들어내시는 모습이에요. 쉽게 말하면.
제자들도 십자가 이용해서 천국 들어가는 게 아니라 세상에 남겨둔다 하죠.
남겨두는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께 속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하기 위해서 이들을 남겨두거든요.
십자가는 이용해 먹지 못해요.

그 엘리야가 남은 자가 없다고 했거든요. 자기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엘리야가 할 일은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근데 엘리야는 시킨 대로 안 하고 나름대로 생각을 한 거예요.
자기가 한 일이 마치 ‘주를 위해서 충성했다’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원인이 주께서 주신 사명이 그를 끌고 갔는데 나중에 뭐라 합니까?
‘나 나 나 죽고 싶어요. 나 죽여 달라’ 이야기하죠. 나 혼자 남았다고.
근데 주님이 뭐라 합니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을 남겨뒀다’ 하잖아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잖아요.
전할 때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이미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이방인과 유대인과 임금들 앞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를 택했다’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그 사명이 사도바울을 끌고 가는 거예요.
그 결과는요. 사도바울이 책임질 게 아니에요.
그렇게 전파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사도 바울과 함께하신 주님.
그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음을 사도 바울이 다니는 곳에서 계속해서 드러나요.

골고다 사건이 성도들이 전하는 그 자리마다 계속해서 반복되어 일어난다는 게
요한계시록에 나오죠.
주님이 고난 받으신 곳이라. 곧 애굽이라.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전파되는 곳이에요.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누가 구원받았는지? 누가 지옥 가는지? 여기에 관심이 있지만
주님은 거기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을 때
그 이루심이 드러나는 현장으로 그 자리를 만드는 거예요. 그게 사도행전이잖아요.
골고다 자리에요. 사도 바울이 가는 곳.
스데반 집사님이 가는 골고다 자리는 한 명도 구원 못했어요.
그게 심판성이에요.

그런데 빌립이 갔을 때도 몰라요. 자기는. 그곳이 또 골고다고.
나중에는 누가 조롱당합니까?
이 마술사 시몬에 의해서 복음이 조롱당하잖아요.
어쨌든 그러한 어떤 십자가 사건이 과거에 한 차례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완료된 그 일이 자기 백성을 통해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한 명도 안 믿고요.
어떤 곳에서는 다 믿는 경우가 있고요, 어떤 곳에서는 뭐 반만 믿는 경우가 있고요.
다양한 현상들이 나타나죠.
그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의 모습이라 이렇게 보시면 돼요.

구원 중심으로 보니까, 자꾸 우리는 복음 전하는 부분에 있어서
‘그럴 필요가 있느냐?’ 이렇게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복음을 전했는데 안 믿더라.’ 당연히 안 믿죠. 주께서 안 믿게 하시니까.
그 ‘안 믿더라’는 것 자체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가 하면
‘제대로 된 복음을 전하면 믿어줘야 되는데...’
자기가 기분 나쁘면 발을 떨고 갈 마음은 있는데
내가 기분 나쁘고, 안 나쁜 거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조금 더 표현하면 아까 제가 말씀 중에 예를 들은 그런 목사들이 왜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보여주셨거든요.  거기까지 얘기를 해요.

그러면서 십자가로 끝나지 않고

왜 갑자기 ‘하나님의 아들다운 면모를 보였으니까 우리도 하나님 아들답게 살자’ 라고
적용을 하느냐? 라고 할 때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예요.
목사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예요.

그러면 또 어떤 분이 ‘복음을 몰라서 그렇지 않습니까?’ 그 말이 그 말이에요.
지식으로 알려줘도 그렇게 설교 못해요. 그 사람은.
자기 말로서 분명히 얘기했거든요.
그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이라고요.

그러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면
‘우리는 십자가에 의해서 죄인이 되면 됩니다.’ 이렇게 나오면 되는데
‘우리는 이 땅에서 아들처럼 살아야 됩니다.’
차라리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우리를 양자로 만들었습니다.’
그 양자로 만들었다면 맏아들을 마음껏 자랑해야 되잖아요.
근데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라고 하니까. 그 형상을 또 지 마음대로 골라내는데.

언어에 완전히 매여버렸죠. 그 육이라는 겁니다. 육.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양자라면 아들의 죽으심을 마음껏 증거하는 죄인으로 살면 되는 거거든요.
그렇게 설교를 끝내지 못해요.

앞부분에는 분명히 그런 뉘앙스를 풍기면서 해석을 해 놓고,
결론은 ‘우리도 아들처럼 살자’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이에요.
‘이 코로나 시대에, 이 모이지 못하는 시대에, 정말 이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
그 얘기를 다 깔아놓는 거예요.
‘이기면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 목사나,

또 두 번째 이야기했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십자가 이야기 다 해요.
십자가에서 마귀와 싸워서 이겼으니까.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 했습니다.’ 이겼다는 얘기까지도 맞잖아요. 말이 맞잖아요.
이겼으니까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까지도 맞아요.
그런데 무슨 문제 해결 했어요? 지 입장에서 해결한 거예요.
그렇게 설교를 흘리는 이유는 영을 못 받아서 그렇게 흘리고요.
또 여러 가지 각도에서 해석이 되죠.

결국은 ‘왜 계속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로 못 밀어붙이느냐?’ 라고 할 때는
돈 벌이 해야 되잖아요. 목사가.  인기 얻어야 되고...
‘목사님 목사들 수준을 그만큼 얕잡아 보지 마세요.’ 하는데
목사들 수준이나 뭐 모든 인간들 수준이 ‘생존의 욕구’가 일번 아닙니까?
‘생존, 생리적 욕구’가 일번 아닙니까?

오늘도 여기에 나왔지만 ‘돌로 떡덩이를 만들어라.’
그래서 제가 질문했잖아요.
아니 밥 안 먹고 살 수 있냐고? 돈 없이 살 수 있냐고?
그럼 설교자도 ‘죄인입니다.’ 이래 나오면 되는데. ‘말씀으로 살아야 된다’ 
사람들이 오해를 해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삽니다.’
‘십자가의 피로 삽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십자가의 피로 산다’는 말은 ‘나는 돈 없으면 못 삽니다’ 이 얘기거든요. 죄인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오해하는가 하면
‘나 돈 없어도 살 수 있어요’ 이렇게 이해를 해요.
‘나 밥 안 먹어도 살 수 있어요.’ 이렇게 이해를 해요.
물론 주님께서 때 되면 밥 안 먹게 해서 죽이십니다. 말씀으로만 살게.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었거든요.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는 굶주리고 헐벗고 매 맞고 그 상황 속으로 주님이 몰아넣습니다.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제가 말씀 했을 때
‘밥 없으면 안 됩니다.’ 꼭 여기에 매이는 게 아니라 얘기예요. 죄인이라는 겁니다. 죄인.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지금 죄인은 되기 싫고, 말씀은 어떻게 해서 믿어야 되겠고. 이 모순되는 상황
그러니까 앞부분에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해놓고 뒤에 가서는 어떻게 바꿔버려요?
‘십자가에서 다 못 이뤘어요. 우리가 지켜내야 돼요.’
‘우리도 아들처럼 살아야 돼요.’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런 이단은 갈라디아에서 나오는 이단과 똑같아요.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
결국은 그 사도바울의 고백에 의하면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는 설교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거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그럼 우리는 행위로는 구원 못 얻는다’ 이야기해놓고
뒤에 가서 다 행위를 이야기해요.
그런 설교가 다 개혁주의잖아요.
이게 앞에는 맞는 이야기 해놓고, 그래서 제가 ‘맞다’는 얘기를 한 거예요.
근데 뒤에 가서는 뭐라 하는가 하면 다 행위를 이야기하거든요.

가장 훌륭한 행위가 믿음이잖아요. ‘내가 믿어야 된다’는 이 행위.
‘믿음으로, 행위로 안 된다’ 해놓고
믿음이라는 행위를 집어넣어가지고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 그런 말씀드렸잖아요.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그 믿음을 필요치 않아요. 인간의 믿음은 다 가짜기 때문에.
주님이 주신 선물, 선물이 있느냐? 를 보시는 거예요.
그럼 선물을 받은 자들은 ‘나는 믿음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되지. 그죠?
‘나는 믿음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되는데
‘나는 믿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논리가.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결과물로 저희들이 살아감을 알게 하시고
날마다 주님의 피 능력만을 자랑하며 살 수 있도록 저희들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corded by 허 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