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9-09 13:26
목요모임 45강 요 8:11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6  
https://youtu.be/L4E0opDz6h0

관리자 21-09-10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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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모임 45강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을 밀씀 앞으로 인도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그 세계 속으로 저희들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요한복음 8장 읽도록 하겠습니다. 7장 53절에 보면
(요7: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 (요8:11)~하시니라] 해가지고 큰 괄호를 이렇게 쳐놨죠.
큰 괄호를 쳐놨다는 것은 어떤 사본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라는 겁니다.
어떤 데는 있고, 그런 내용들이 성경에 종종 나와요.

마가복음입니까?
마가복음 같은 경우에도 그러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아무튼 이 성경에 없는 부분들이 어떤 사본에는 없다 해가지고
킹제임스 버전 같은 경우에는 그걸 다 집어넣어놨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을 다 없앴다 해가지고요.

집어 넣고 안 넣고 이런 문제도 있지만, 의도가 항상 수상한 거죠?
집어넣어서 본문의 의미를
자기들이 원하는 의도대로 바꾸려고 하는 그러한 경향이 상당히 강합니다. 사실은
오늘 본문에서도 그러한 내용이 등장하는데 지금

(요8: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다
(요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지금 계속해서 초막절, 큰 날을 지나서
성전에서 계속해서 지금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그러한 사건입니다.
지금 성전에서 일어난 사건이에요.
성전이라고 하면, 성소가 있고 지성소가 있고 이것만 생각할 수 있는데
그 뜰이 있잖아요. 이방인의 뜰도 있고 어떤 여러 가지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앉으셔서 ’저희들을 가르치셨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르치셨다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예수님이 가르치니까 알아들었다. 알아듣죠? 자기들 쪽에서 다 알아듣는 거예요.
그러니까 계속 듣는 거잖아요.

문제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예수님은 영이시고 듣는 자들은 육입니다.
육은 영의 말씀을 들을 때 육으로밖에 못 알아듣죠.
이걸 구약을 갖고 얘기를 하면 구약 성경 자체를 영 되신 예수님에 의해서 해석이 돼야 되거든요.
영이라고 이야기하면 반드시 십자가를 지셔야 됩니다.
십자가 빼고 얘기해 버리면 아들의 자격이 없어지기 때문에 십자가 지신 그분이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의 영을 받지 못한 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못 알아듣게 돼 있습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가 왜 불가능한가라고 할 때는
예수님은 십자가 지신 주님으로서 말씀을 하시고
니고데모는 죽음이 빠진, 주님과 함께 죽고 살아나야 그 말씀이 이제 비로소 들리게 되는데
그 죽음이 없는 거예요.
주님과 함께 죽고 살아나야 그 말씀이 들리거든요.

그 사도 요한 같은 경우에는 주님께서 성령을 주셨잖아요.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그러한 영의 사람이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그 사도 요한이라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이 사도 요한은 두 가지 안목을 동시에 갖고 있는 거예요.
육의 안목과 영의 안목

성도의 눈은 두 가지 안목을 동시에 갖고 있는 거예요.
육의 안목을 갖고 이 성경을 해석하는 경우는 알아듣죠. 무슨 말인지.
그게 그런 의미죠.
지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바리새인과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이들이 지금 율법을 갖고 해석할 때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예수님의 말씀 의미를 육적 의미에서 얼마든지 이해가 가능한 거예요.
이것은 성령을 받지 않아도 돼요.
성령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갖잖아요.
말씀을 들을 때나 이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이 필요하다고 못 느끼잖아요.
항상 우리가 이 주인공이 되어 있으니까.
성경에 보면 분명히 성령이 인도하심을 따라 성도가 살게 돼 있는데
그러면 또 사람들은 어떤 상상을 하는가 하면 성령의 인도하신 걸 따라 해석해야지
그러면 성령을 또 어떻게 또 생각하는가 하면 마치 이 무당처럼 막 신내림을 해가지고
사실은 맞아요. 신내림을 당해야 되죠. 성도는, 성령을 주시는데

그런데 그 어떤 모습이 뭔가 특별한 어떤 이런 사람들 있잖아요.
보면 저 사람이 마귀에게 속해 있는지 성경에게 속해 있는지 보인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 눈빛을 한번 보세요. 무섭죠? 무당들 눈빛하고 똑같아요.

이전에 부흥사들 중에 요즘도 그런 사람들이 있죠.
막 입신시키고 하는 그런 데 가보셨어요. 그런 데 좀 가보세요. 천국가려면 가봐야 되는데
우리 어릴 때 중고등학교 때 저희들 동네 서울에서는 이미 흥행했고요.
그 촌까지 내려왔다는 것은 이미 한판 돌았다는 거거든요.
거기에 이제 청천이라는 곳이 있거든요. 대구 근교에, 반야월 근교에.
잘 모르죠? 아무튼 그런 데가 있어요.

그런데 이제 거기에 이제 청천 다락원이 있는데 청천인가 하여튼
지금은 하도 오래 기억도 안 나는데 거기에 이제 집회를 했는데
그 사람이 제 친구 누나가 이제 거기에 갔다 온 거예요.
약간 정신이 약간 약해요. 표현을 하면. 이제 가서 입신을 한 거예요. 자기들 말로는
입신을 해가지고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열두 진주문도 보고 과실도 따 먹었어요.
지금 여러분들은 웃을 일일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체험을 했다니까요.

그러니까 주변에 사람들이 다 구경하는 거예요. 집회 온 사람들이
그리고 몇몇 사람만 중앙에 꺼내가지고 입신 속으로 들어가서 행동을 막 하는 거예요.
먹고 웃고 막 하면 이제 딱 깨어나는 겁니다. 이제 그걸 사람들이 다 봤잖아요.
야! 진짜 천국 보고 왔다. 거기에 사람들이 넘어가 버리죠.
그 누나 같은 경우에는 정상 생활을 못해요. 그거 보고 와버리니까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상상을 해요.

그러면 인간이 성령의 인도하심, 안 그러면 천국을 꿈꾸는 거
이런 걸 상상을 할 때 마귀가 다 들어줍니다. 원하는 바대로.
지옥가야 할 자들은 지옥 가야 되기 때문에

지금도 유튜브만 열면요. 지옥 갔다 온 사람, 간증하는 사람 수도 없이 나옵니다.
성경 말씀을 안 믿어도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들의 간증을 믿어요. 참 희한하죠.
아니 요한계시록에 천국을 다 보여줬잖아요.
그건 안 믿는데, 자기가 체험한 거는 가서 가보고 진짜 있더라 이거 진짜 있더라.
사람들이 다 속죠.
왜냐하면 육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한 것, 본 것, 그런 것들을 더 신뢰하고요.
또 더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이 이미 증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직접 간증을 하면 그걸 더 믿죠.

성경은 죽은 자 살렸잖아요. 병자 고쳤잖아요. 거기에 대해서는 ‘아! 이건 이야기야’
그것도 사실은 기적도 아니죠. 죽은 자 살리는 것도
이전에 의사들이 없을 때는 다 죽었잖아요.
죽은 자들을 다 살리잖아요. 지금 같은 경우에는, 죽은 사람들은.
나중에 이제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 그 뭐라 할까요?
뇌사 상태에 있는 사람도 살릴 거예요. 아마 그런 시대가 올 겁니다.

어떤 일본 소설에 보면 ‘인형이 사는 집‘ 그 책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요.
그 아버지가 이 첨단 과학 분야에 공장을 하고 있는데
그 딸내미가 교통사고가 났는지 아무튼 제가 정확한 기억이 안 나는데요.
애가 이제 뇌사 상태가 된 거예요.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이제 이 아버지인가 엄마인가
하여튼 아버지가 처음에 과학 기술을 동원해서 자기가 못 움직이니까
여기에 전파 파를 쏴가지고 움직이는 거예요. 움직이고 운동도 하는 거예요. 인위적으로
그래서 그 기계를 작동하지 않을 때는 애는 그냥 가만히 있는데
움직이니까 이제 신체 이 근육도 살아나고 막 하니까 와 살았다 이리 된 거예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제 인정을 하는데 죽는 것을

좀 더 발전하면 이제 그 이전에 있던 기억들을 다 살려가지고 칩에 넣어가지고 그렇게 하겠죠.
요즘 공상 영화를 보면요. 미래 사회를 잘 이야기해 놨어요.
우리가 볼 때는 다 꿈 같은데 잠수함도 꿈이었는데,
잠수함도 옛날 소설에서 나왔는데 다 나오고요. 인공지능도 다 소설이었는데 다 나오고요.
비행기도 다 옛날 같은 경우는 꿈이었잖아요. 그런 걸 표현하면
달 나라로 가는 것도 꿈이었지만
인간이라는 자체가 지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돼 있는데.

그러한 어떤 눈에 이 말씀 자체는 이 두 종류가 인간인데
믿을려고 덤벼드는 사람이 있고, 또 그걸 보면서 이것은 그냥 맞지, 하면서
현실 세계 속에서 간증을 한다든가 체험을 한다든가 그러면 또 믿는 자들이고

육에 속한 자들은 말씀이 믿기지가 않아요.
믿긴다고 했을 때는 어떤 의미인가 하면 십자가가 밝게 보인다는 의미예요.
그들이 믿는다고 했을 때는 이 말씀 속에서 십자가가 보이는 게 아니라 무엇이 보여요?
내가 바라는 예수, 내가 바라는 하나님, 성령의 역사 이런 것들이 그들 눈에 보이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다고 하니까 우리도 가르치면 되겠다라고 하는데 가르쳐야죠? 당연히
’가르쳐 지키게 하라‘ 했으니까, 가르쳐 지키게 하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이 그 말을 듣잖아요.
들으면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까? 성령을 빼버리니까 그런 식으로밖에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안 해야 됩니까? 뭐 안 해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데 인간 세계에서

그러면 우리가 자! 오늘 기도도 하지 말고 다 성령의 교통 속에 있으니까 모이지도 맙시다.
사도바울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함께 영적으로 판단하고 교통을 했으니까
그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아예 모이지도 말고 알아들었죠? 주님이 알게 해줬죠‘ 이걸로 끝낼 수도 있잖아요.
그 말도 필요 없어요. 그런 집단들이 있어요. 실제로, 그러한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데

예수님께서 가르치는데도 불구하고 못 알아들어요. 상대들이
못 알아들으니까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왔어요.
그러면 이 장면 자체를 어떻게 봐야 되느냐 할 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위해서 이들은 동원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있거든요.
성전에서 가르치신다는 것은
성전이 본래 의미가 어떠하고 성전이 누군가를 지금 증거하는 내용이에요.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앞서서 2장에서 ’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다‘
자기의 몸을, 자기 몸된 몸을 갖고 성전을 가리켰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잖아요.
예수님 몸 자체가 성전이 되시잖아요. 지금 그것을 이들에게 증거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 되신다‘라는 거예요.
성전이 되신다는 것은 성전만 되는 게 아니라
히브리서에 의하면 영원한 대제사장도 되시고, 그러한 어떤 내용을 지금 담고 있는데

그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왔어요.
’간음 중에 잡혔다‘라고 할 때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헬라어 성경으로는 간음을 행한 연고를 끌고 왔다는데,
뒷부분에 보면 현장에서 잡혔어요. 현장에서
현장에서 잡혔는데 이걸 어떻게 잡았는지 모르겠어요. 모르겠는데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 여자를 끌고 온 거잖아요.
아마 여러 소문이 있었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간음하고 있는 그 현장에 있는 그 여자를
지금 여기에 잡아다가 예수님 앞에 세우면서 5절에 이렇게 말하죠.

(요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율법에는 모세가, 모세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죠.
왜 모세를 이야기합니까?
예수님께서 모세가 요한복음 5장에서
’모세는 내게 대해서 전한다‘고 했거든요.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말을 해도 못 알아듣죠. 상대는. 육이기 때문에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모세를 믿고 있죠. 모세의 말이 절대적이라 생각하는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모세 오경 자체가 모세가 받아서 쓴 글이잖아요.
그 모세의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다는 거거든요.
그럼 모세의 말은 어떻게 돼 있느냐라고 할 때는 이제 하나씩 하나씩 지적해 나갈 때
이 간음한 현장에 잡힌 여자에 대해서 모세는 ’돌로 쳐 죽여라‘,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례라는 거예요. 율례.
한번 봅시다. 레위기 20장 10절입니다. 10절에 보면

(레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남자와 여자를 반드시 죽이라는 거예요. 이게 모세 율법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이라는 것은 신명기 22장에 나옵니다. 신명기 22장 봅시다. 22절부터 보면

(신22:22)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반드시 둘 다 죽이라는 거거든요.)
(신22:23)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통간하면
(신22:24)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읍 중에 있어서도 소리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지금 여기에서 단순히 23절, 
처녀인 여자가 이 부분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앞부분도 다 언급하는 거예요.
지금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해석이 우리들보다 수준이 높아요.
우리들은 단순히 이 말씀, ’돌로 쳐 죽이라‘는 말씀이 23절만 걸린 말씀인 줄 생각하는데
앞부분에 간음한 그 남자와 여자를 죽이는 그 내용도 같이 걸려 있는 거예요.
어떻게 죽여야 됩니까?라고 할 때는
돌로 쳐 죽이라는 거예요. 반드시 남자와 여자를 둘 다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함이라‘(요8:6)

예수님의 판결이 자기들이 아는 수준에서 난다면 둘 중에 하나죠.
하나는 모세 율법대로 죽여라.
죽이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에 대적하는 거죠.
그러면 모세를 대적한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꼴이 되고
그것은 자기들의 종교법에 위반되는 거고, 돌로 쳐 죽이라고 하면 살인죄에도 해당되죠.
’자기들에게는 죽일 어떤 권세가 없다‘ 예수님을 죽일 때 그런 표현을 했거든요.

권세가 없어도 돌로 쳐 죽입니다.
스데반 죽일 때 한 번 보세요.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데.
어쨌든 이들은 나름대로 법적으로 처리하려고 하죠.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이 국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스데반 집사님처럼 죽지 않으신 이유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유가?
짐승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셔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단순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 의해서 죽는 게 아니라 국가 권력에 의해서 죽어요.
그것은 다니엘에서 예언된 내용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짐승의 실체는 국가로 드러나 있죠.
근데 딱 맞잖아요. 국가가 없으면 우리 살 수 있어요? 못 살아요?
못 산다고 이미 세뇌받았어요. 어릴 때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다 인줄 알죠?
마귀는 계속해서 ’네가 사는 나라가 최고야 니 나라가 너를 살려‘
이게 무언적으로 계속해서 밀어붙이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안 읽고 뉴스를 계속 보면 짐승의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거든요.
들리면 ’날 살리는 것은 국가야, 국가야‘ 그런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성경을 안 봐요. 왜냐하면 성경은 돈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 말씀을 배우지 않는 이유는? 돈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이 유대인들은 왜 성경 말씀에 대해서 그렇게 집착을 하느냐 할 때는 경험이 있거든요.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망한 경험이 있어요.
근데 우리는 그런 경험 없잖아요.
말씀대로 안 살아서 망한 경험이 있습니까?
물론 그런 사람들이 있죠. 내가 예수님을 믿었는데 십일조 제대로 안 해가지고 망했다.
해가지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것과 전혀 차원이 다른 건데

자! 봅시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고소할 조건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 간음한 현장에 잡힌 여자를 데리고 왔어요.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는 당장 질문을 해야 돼요? 사실은
무슨 질문을 해야 됩니까? (남자는요?) 그러니까요. 희한하죠.
간음한 현장에서 잡혔다면 그곳에 누가 있었어요? 남자도 있었을 거 아닙니까?
왜 안 잡아왔을까요? 지금 거기에 대한 내용이 안 나와요. 성경에

그 당시에 여자들이 시대적 상황으로 굉장히 무시당하는 시대였거든요.
그런 이야기도 성경에 별로 안 나와요. 그때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그러한 어떤 환경, 문화 그런 것들이 누구를 삼켰느냐? 할 때는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삼켰다고 볼 수 있어요.
모세의 말을 듣는다고 하면서도 율법대로 시행한다고 하면서도
환경에 딱 갇혀버리면 그 환경을 못 벗어나요.

독특한 상황 아닙니까? 방금 우리가 신명기와 출애굽기를 읽었잖아요.
레위기를 읽었잖아요. 그럼 이들이 이 말씀을 머릿속에 두고 있단 말이에요.
두고 있다면 반드시 남자도 잡아와서 같이 끌고 와야 되는데 여자 하나만 끌고 왔어요.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요 환경에 갇혀버리면
그 환경에 의해서 이 말씀 지키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는냐?
성경 전체를 이야기 다 해도 돼요. 뭘 다 집어넣어도 되는데.
이제 그들이 여기에 보면 이렇게 나오죠.

(요8:6)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뭘 썼다는 내용이 또 안 나와요.
8장 같은 경우에는 묵음 처리된 게 너무 많아요. 다른 본문도 마찬가지지만
그 남자는 어떻게 했냐? 이 이야기도 안 나오고.
그걸 왜 안 데리고 왔는지도 안 나오고, 상상력만 키울 수밖에 없어요.
그 남자를 데리고 오지 않은 이유는? 그 남자가 힘 있는 자거든요.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자만 끌고 왔죠.
자기들이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은 못 건드리고
자기들이 처리할 수 있는 힘 없는 그런 자는 끌고 오고

이 말씀도 얼마든지 가능해요? 왜냐하면요 율법에 보면 출애굽기 23장 거기에 보면
’재판을 할 때 가난하다고 편벽되이 하지 말라‘고 얘기해요.
함부로 가난한 자 편도 들지 말고, 반대로 가난한 자라고 해서 무시하지도 말고
이런 율법들이 층층히 깔려 있거든요.

만일에 이들이 이 여자와 그 간음한 그 남자에 대해서 뭐 그러한 태도가 있었다면
예수님이 땅에 쓰신 것이 그러한 내용이 들어갈 수가 있어요.
가난한 자라고 힘 없는 자라고, 힘 있는 자라고 또 성경의 율법 또 그렇게 돼 있거든요.
’힘 있는 자라고 그 편을 들지 말라‘고 돼 있어요.
그 말씀만 딱 써도 이미 이들은 율법으로 무장한 자들이잖아요
그게 그 전까지는 거기에 대해서 생각도 안 해요.

우리들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들도 말씀을 이렇게 들었을 때는 ’아! 맞아요 맞아요‘ 하는데
어떤 사건이 닥칠 때는 그 말씀이 싹 잊어요.
이 다윗도 마찬가지잖아요.
나단 선지자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지 죄를 모른다니까요.
아는데 자기 수준에서 밖에 이해를 못해요.

이들도 나름대로 이런 것만 봐도 인간은요 말씀 못 지켜요.
말씀을 못 지킬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이용해서 그 악마성을 이렇게 드러낼 뿐입니다.
지금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느냐?
방금 제가 그런 얘기를 했잖아요. 왜 여자만 끌고 왔어요? 둘 다 죽이라 했는데.
그러면 신명기 22장 24절 그걸. 그때는 장 절이 없었거든요. 장절은 거의 천 몇백 년도입니까?
1500년도 그 정도에 장, 절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뭐 몇 장 몇 절 이렇게 쓰지 않았고
성경의 내용을 썼을 가능성이 높죠. 성경의 내용을 예수님께서 그것을 쓰셨었을 수도 있고요.

(요8:6하)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8: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빨리 대답하라는 거죠. 그거 다 안다는 겁니다. 땅에 쓴 것.
지금 이 이런 내용들이 성경이 재미있죠.
땅의 율법을 쓰면, 자 우리들 같으면
’나 그거 알아‘ 이래 나올까요? 안 그러면
’남자 여자 둘 다 끌고 와서 죽여야 된다.‘
’맞아 우리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구나.‘ 이래 나와야 될까요?

땅에 신명기 22장 24절을 썼으면 빨리 답변해라고 요구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이 말씀이 나오기 전에
먼저 알아서 가야 안 돼요? 자기들이 지금 판결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고.
지금 이들이 계속해서 재촉을 하잖아요.
예수님이 자기들이 이렇게 설치해놓은 올무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땅에 쓰셔도.
처음에 쓰신 내용과 두 번째 쓰신 내용. 여기 보면

(요8:7하)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요8: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이 같은 내용을 쓰셨을 수도 있어요.
안 그러면 레위기의 말씀과 신명기 말씀을 같이 쓸 수도 있고요.
다른 본문도 수도 없이 많습니다.
지금 여기에 성전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성전과 관련되어서 썼을 수도 있고요.
여기는 간음한 현장에서 잡힌 문제이기 때문에
이 간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쓰셨을 가능성이 가장 높겠죠.

그러면 이 방금 우리들이 살펴본 그 레위기 20장 10절 말씀이나 신명기 22장 24절
이 말씀을 썼을 때, 왜 이들은 이걸 읽으면서도 깨닫지 못할까요? 갇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런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걸 보면요.
우리들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복음을 알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말씀을 보면 깨달을 수 있다라고 덤비잖아요.
주님이 깨닫게 안 해주면 못 깨달아요.

우린 너무 자신만만하죠.
내가 배울 만큼 배웠으니까. 복음을 들을 만큼 들었으니까.
이제 말씀을 알 거라 생각하지만
그렇게 알 것 같으면요. 성경 필요 없습니다. 더 이상 배울 필요도 없고요.
남의 설교를 들을 필요도 없고, 가르쳐 주면 받을 필요도 없어요. 혼자 다 깨달으면 돼요.

근데 성경은 항상 홀로 깨닫는 게 없어요. 항상 상호작용이예요. 상호작용.
자기 혼자 다 안다는 것은 없어요. 성경에.
그럴 것 같으면 성경을 기록할 때 사도바울 혼자 다 기록하게 하죠.
베드로가 기록한 거 빼고, 요한은 기록한 거 빼버리고, 마태 마가 다 빼버리고,
그러면 얼마나 성경에 대해서 신뢰감이 높을까요?
계시를 혼자 다 받아서 혼자 다 기록하면 되잖아요.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과 그들의 행동을 들여다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방금 우리들이 살펴본 그 내용을 썼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죠.
그런데 왜 내용이 없느냐? 라고 하면요.
이 사건 전체가 성경 전체를 증거하기 때문에 그래요. 전체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단순히 간음한 문제에 대한 것에 대한 언급이 아니에요.

죄가 무엇이냐? 까지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을 대할 때
단순히 간음이냐? 안 그러면 살인이냐? 도둑질이냐? 재판에 대한 문제냐?
그걸 세부적으로 나눠버리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건 지키고, 저건 안 지키고 이렇게 들어가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땅에 쓰신 내용도 없고, 두 번이나 쓰셨는데 아무것도 없으니까.
사람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축소할 가능성이 높단 말이에요.

그런데 거꾸로 봐야 되죠.
축소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쓰신 내용을 없애버리죠.
그 내용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 사도 요한이 성령을 받았잖아요. 그러면 쓰신 내용을 알까요? 모를까요?
알까요? 모를까요? 당연히 알죠. 왜 이러십니까? 쓰신 내용을 모를까요? 당연히 알죠.
누가복음을 보면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수태 고지를 하잖아요.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주께서 다 알려주신 겁니다.
성령께서 다 알려주셨기 때문에 기록한 거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이 본문을 갖고
’아 사도 요한이 예수님이 땅에 쓰신 것을 몰랐기 때문에 기록 안 했다‘
또 이런 소리 할 가능성이 되게 높거든요. 그럴 것 같으면 계시를 못 쓰죠.
성경이 갑자기 어려워집니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올라왔잖아요.
올라올 때 그걸 이들이 전해 들었을 거 아닙니까? 그리고 이 사적인 영역도 많잖아요.
그러한 내용들을 어떻게 다 기록하겠습니까? 주께서 알려주시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지금 이 내용은 기록하지 않는 겁니다.
기록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온갖 상상력을 다 동원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쓰시고 일어서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을 하셨을 때는 안 갔어요. 아직. 그런데 보면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어요‘ 물론 뒤에 보면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나갔다‘ 이렇게 돼 있는데
이 ’양심의 가책‘이라는 단어가 헬라어 성경에는 없어요. 사실은.
그런데 이걸 집어 넣어놨어요. 다른 사본에는 있는 게 또 있으니까,

이런 걸 왜 집어넣어놨느냐? 라고 하면 이들은 지금 율법 중심이잖아요.
율법의 책망을 받은 거죠. 표현을 하면.
’내가 율법을 위반한 죄인이구나.‘
그러면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라고 했을 때
’내가 과연 이 판결을 할 수 있는 그 판결자의 자격자가 되느냐?‘ 라고 할 때는
앞서서 판결자의 자격 요건을 못 갖췄죠.
’남자‘ 안 데리고 왔잖아요. 벌써. ’둘 다 돌로 쳐라‘ 했는데.

그리고 이 재판은요 하나님의 재판이죠.
하나님의 재판인데 이들은 이 재판을 누구들의 재판으로 바꿨어요?
자기들의 재판으로 바꾼 거예요.

(요8:9하)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서는 여자만 남았더라
 
이들은 예수님께서 쓰신 내용을 보고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했을 때
자기들을 어떤 자로 인식했는가? 하면
’율법을 위반한 죄인‘으로 인식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럼 여기서 질문하겠습니다.
율법을 위반한 죄인이라는 인식은 성령받지 않아도 가능합니까? 못합니까? 가능하죠.
’내가 율법 안 지켰구나. 내가 살해했구나. 간음했구나. 도둑질했구나.‘
그래서 죄인이라는 거죠.
그러면 이들이 앞서서 그 레위기와 신명기 말씀에 의하면
이들은 남자를 데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율법 위반자죠. 같이 동조를 했으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이런 겁니다.
성경에 보면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나가기‘ 시작한 거예요. 어른부터.
이 말씀은 그러면 도대체 왜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가?
왜 이들이 어른부터 뒷걸음 치면서 예수님을 떠나갑니까?
이것은 ’오래 산 자가 더 율법을 많이 위반했다‘라는 그런 어떤 결론에 도달했거든요.
그러면 이런 결론은 도대체 어떻게 도달했느냐? 이 얘기입니다.

지금 성령께서 그들을 깨닫게 해준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율법을 써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했을 때 그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잖아요.
그러면 율법에 대한 전공자들입니다. 머릿속에 달달 외우고 있어요.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 이들은 구약 전체가 머릿속에 확 화면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볼 수 있어요.
그 정도로 말씀을 달달 외우는 사람들이잖아요.

왜 이들은 어른부터 하여서 떠나가겠습니까? 말씀을 너무 잘 알아서 그래요.
한번 봅시다. 시편 51편을 한 봅시다. 여러 번 살펴봤지만.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죠. 밧세바를 범했다는 것은 간음을 했죠.
이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다윗왕을 기다리고 있거든요.
다윗 왕을 그들이 꿈꾸는 왕이거든요.
그들이 소망한 왕이고. 그 다윗왕이 이 밧세바를 범했다는 것은 간음을 했죠.
간음하면 어떻게 돼야 돼요? 둘 다 죽여야 되는데
문제는 누가 심판자가 될 수 있어요?
하나님만이 심판자인데, 하나님이 심판하시거든요. 하시는데,

중요한 것은 그 율법을 범했을 때는 누구를 재판장으로 세웁니까?
최종적인 재판장이 왕이거든요. 이스라엘의 왕.

그럼 왕이 범했을 때는 누가 심판해요? 하나님이 심판하시죠. 핑계는 되게 좋은데.
지금 다윗이 자신이 왕이잖아요.
그러면 ’왕은 심판할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를 먼저 보여주는 겁니다.
자기가 율법을 위반했으면 자기가 돌에 쳐 죽임을 당하라고 판결을 내려서
돌에 쳐 죽임을 당해야 해요.

그런데 다윗은 율법을 너무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간음자를 없앨 수 있는 방법, 덮을 수 있는 방법은
남편을 빨리 데리고 와서 동침케 해서 이 자식이 내 자식이 아니라고 판결을 내는 거예요.

그런데 지도 알고 밧세바도 다 알거든요.
또 누가 알아요? 하나님도 다 알죠. 근데 왜 그 생각이 들면 못 할까요?
아까도 말했지만 생각 못해요. 갇혀 있기 때문에. 그게 다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간음죄를 ’간음죄가 아니라‘고 만드는 방식은
그 남편을 통해서 이 자식이 생겼다라는 그러한 도식만 도출하면 해결될 줄로 생각했는데.

이 우리아가 헷 사람 우리아거든요. 이방인입니다. 암몬과의 전쟁 랍바성입니까?
최후 전쟁을 이렇게 남겨두고 있는데, 거기에는 언약궤가 함께 있습니다.
그 언약궤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전쟁이라는 것은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거예요.
’여호와 전쟁‘의 특징이 뭔가 하면요. ’용서하심의 전쟁‘이에요.
언약궤라는 자체가 그 위에 시은좌잖아요.
속제소고, 피가 뿌려지고, 그 안에는 모세가 깬 돌판이 있거든요.
여호와의 이름은 심판하는 하나님인데, 죄가 있는 자는 무조건 심판합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왜 심판을 받지 않느냐? 했을 때는
죄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심판을 안 받는 거예요.
지금 암몬성을 치는 것은 여호와의 전쟁을 하는 거죠.
언약궤가 앞장서겠다는 것은 이 전쟁은 ’여호와 이름의 전쟁‘이에요.
죄 용서하심을 받은 자. 달리 말하면
할례 언약을 받은 자,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난 이스라엘이죠. 그들과
할례 언약이 없는 즉 육에 속한 자와의 전쟁입니다.

헷 사람 우리아는 이 전쟁에 지금 앞장서 가 있거든요.
그래서 돌아왔을 때 이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지금 언약궤가 전쟁 중에 있는데 자기가 그럴 수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많은 군사들이 요압 장군을 비롯한 모든 군사들이 그 전쟁에 나가 있는데
자기들은 그냥 집에 돌아갈 수 없고, 왕궁 그 곁에서 자는 거예요.
떨어져 있지만 전쟁을 함께 하는 겁니다.
그런 우리아에게 이 다윗의 계략이 통할 리가 없잖아요.

결국은 다윗이 새로운 방법을 간구한 게 전쟁을 이용해서 자기가 죽이지 않고
저 암몬 사람에 의해서 우리아를 죽도록 만드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그게 밀서를 보내잖아요. 요압 장군에게
’돌격!‘ 해가지고 미리 다른 사람들은 다 빠져버리고,
혼자 놔두고 혼자 싸움을 하게 해서 혼자 싸움한 우리아가 암몬에서 죽임을 당하는데.
그 죽음을 사주한 자가 누구입니까? 다윗왕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돼버리면 간음죄에서 뭘로 넘어가 버렸습니까? 살인죄로 넘어갔죠.
이것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간음죄 따로 있고, 살인죄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그 갈라디아서에 보면 ’온갖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저주받는다‘라는 말씀이
그냥 나온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지가 의식하는 것 이상을 의식 못한다고요.
그러니까 자기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을 전체를 못 담아요.
자기는 하나만 지키면 ’나 지켰다‘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을 안 읽으면 그렇죠.
읽어보면 저쪽을 안 지켰는데요. 이쪽도 안 지키고...

이들도 마찬가지잖아요. 한 부분은 지켰어요.
간음한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돌로 쳐 죽여라‘ 이거는 지켰는데.
하나 빼먹었죠. 자기들 시대적 상황에 갇혀 있으니까.

지금 다윗이 살인죄까지 범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아무런 느낌이 없죠.
이제 모든 것이 정리됐는데, 나단 선지자가 찾아왔습니다.
한 비유를 들잖아요. 굉장한 부자와 극한 가난한 자.
극한 가난한 자에게는 어린 양 하나가 있어요. 딸내미 같이 여기는 어린양.
그런데 객이 왔어요. 손님이 왔어요. 나그네가 왔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그네를 대접하라 했거든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극한 가난한 자의 양을 뺏어서 대접을 했습니다. 독특하죠.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극한 가난한 자의 양을 뺏어서 대접을 했어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율법을 어기는 거죠.
다윗이 이 얘기를 딱 듣자 말자 엄청난 분을 냅니다. 화를 냅니다.
’그런 놈은 당장 죽여라‘는 겁니다.
그리고 네 배를 갚게 해야 된다라는 거죠. 재산이 있으니까.
살인죄에 들어가고, ’그게 뭐 그래 죽일 죄입니까?‘ 라고 하면 딸같이 여겼잖아요.
그러니까 다윗은 딸같이 여긴 그 어린 양을 뺏어서 죽여서 대접했기 때문에
이것을 살인죄로 간주해버리는 겁니다.
율법을 굉장히 엄격하게 적용하죠.
그러면서 네 배나 갚아라. 이것은 도둑질한 죄. 단순히 뺏은 죄만 지금 언급하는 게 아니라
그 뺏은 죄가 살인죄까지도 같이 지금 취급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자 이 나단 선지자가 뭐라 합니까? 그 당사자가 바로 당신이라고 이야기하죠.
그럴 때 비로소 다윗이 이제 자기의 죄를 알게 되는데

어떤 죄를 알게 되는가? 를 한번 보라는 얘기예요.
우리가 방금 예를 들었을 때 ’뭐가 죄입니까?‘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해서 율법을 어긴 게 죄입니까?‘ 달리 이야기하면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간음한 게 죄입니까?‘
’그 다윗이 우리아를 죽인 게 죄입니까?‘ 이런 이 질문이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이런 식의 죄라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어요. 제사 지내면 돼요.

아니 죄를 지어서 자기가 무심결에 왕궁에서 거닐다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서 취해서 간음을 했으면 율법대로 제사 지내면 됐는데.
문제는 율법에는 그건 제사 지내라 하지 않고 죽이라 했으니까
그런 문제가 또 걸려들죠.

그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하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긍휼과 자비. 이 얘기를 자꾸 하는 이유가 있어요.
이스라엘 자체가 긍휼을 입은 자거든요.
이스라엘을 만드실 때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그들을 구원했습니다.
그들 자체가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덮힌 이스라엘이에요. 긍휼이 덮힌 자예요.
긍휼이 덮혔다라는 것은 그들은 뭘 해도 죄인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을 주셨다는 것은
’너희들은 뭘 해도 죄인임을 마음껏 뽐내라‘는 얘기예요. 이런 얘기를 좀 해야 되는데.

출애굽기 25장 22절. 한번 봅시다. 성막에 대한 내용인데
그 지성소에 언약궤가 있죠. 지성소에 언약궤가 있는데. 여기에 보면

(출25: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어라는 것은 상자 위에 속죄소가 따로 있다라는 겁니다. 판.
그 속죄소예요. 그게. 그 위가 시은좌라고 해요.
은혜가 내리는 곳. 피가 뿌려지는 곳이에요. 그다음 나오는 게 21절.

(출25: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어라

이 증거판이 뭔가 하면요. 이름이 재미있죠. 증거판.
두 돌판이에요. 두 돌판.

하나님께서 두 돌판이라 하지 않고 왜 증거판이라 하느냐? 이게 중요합니다.
모세가 어디에 올라갔을 때? 재미있어요. 벌써 이게. 이게 지금 25장 사건이잖아요.
25장. 하늘에서 지금 지시하는 내용인데.
하나님께서는 뭐까지 내려다봅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두 돌판을 하늘에서 친히 주시거든요. 친히 쓴 글을 친히 주셨어요.
근데 그 돌판을 갖고 내려오잖아요. 아직 안 내려왔어요. 지금 사건 자체가.

처음부터 증거판이 어디에 들어가야 된다는 겁니까?
언약궤 안에 들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언약궤 안에 들어가는 증거판은 두 돌판인데
이 두 돌판은 땅에서 만들어서 올라간 돌판이에요.

원래 하늘에서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돌판. 거기에 십계명을 써주셨잖아요.
계명을 써주신 그 돌판은 모세가 내려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뭘 했습니까?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서 우상숭배를 했잖아요.
그 내막을, 그 상황을 알고 모세가 돌판을 깨어버리죠.
깨지 아니하면 그들은 다 멸망당하게 돼 있어요.
그 깨어짐 속에 누가 합류하는가 하면? 모세가 합류해요. ’저들을 용서해 주세요‘

(출32:31~32)
31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면 원컨대 주에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누구 이야기입니까? 이 얘기가? 예수님 이야기거든요.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 거거든요.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지옥 가셨다라는 거예요.
지금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서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울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죠. 지웁니다.

모세는 지금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자기의 이름을
그들의 죄를 사해주지 아니하면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 이름을 이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요청하는 거예요.
이건 로마서 9장에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9장에 보면

(롬9:1~3)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가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2 [1절과 같음]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 말이 그냥 하는 말일까요? 같은 이야기거든요. 지금
왜 이들이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
자기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 지워서 구원했거든요.
지옥 가셨잖아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거예요.
그 버림받았다니까 그건 뭐 버림 받은 거하고, 지옥 간 거 뭐가 같습니까?
같은 이야기예요.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지금 돌판이 깨어졌다라고 했을 때
이 돌판 깨어짐 속에 누구를 합류시키는가 하면 이 모세 자신을 합류시키거든요.
지금 돌판이 지금 방금 제가 다시 출애굽기 25장으로 가면 언약궤 22절

(출25:21하) 증거판을 (언약)궤 속에 넣으라

증거판, 법판이라고 하거든요.
근데 왜 증거판이라고 하느냐? 라고 할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해서 깨어진 돌판 대신에
땅에서 만들어 올라간 돌판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이게 뭘 증거합니까? 깨어졌다라는 걸 증거하죠.
달리 표현하면 그들이 자기를 위해서 우상을 만들어서
’우상을 섬겼다‘라는 그리고 ’멸망 받아 마땅하다‘는 그러한 것들을 증거하는 증거물이에요.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도 살 수 있었느냐? 라고 하면
모세가 거기에 깨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지금 이걸 언급하는 이유는 이 내용입니다. 뒤에 보면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율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율법, 율례가 어디로부터 나옵니까?
이전에는 시내산으로부터 나왔죠. 시내산으로부터 나왔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할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말씀하신다는 거예요?
그 속죄소 위 시은좌 위에 천사들이 이렇게 그룹들이 모양을 이렇게 그리고 있는데
그 사이에서 말씀하시겠다는 거예요.

이 말씀의 의미는 어떤 의미예요?
그 말씀 자체가 들어가면 인간은 다 뭐가 돼요? 증거판 역할을 해야 됩니다.
다 무조건 죄인이에요. 무조건 죄인.
피가 아니면 구원 못 받는다는 얘기예요.
아예 셋팅을 해놨어요. 셋팅을.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못 벗어나요.
이걸 보여주기 위한 이스라엘이에요.

그래서 이 증거궤와 이 언약궤, 증거판과 시은좌. 이 셋트가 빠져버리면
그들은 심판을 받는 거예요.
그 심판받는 기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언약궤대로 심판하는 거예요. 언약대로 심판하는 겁니다.       
(recorded by 구 성모, 허 필임)
관리자 21-09-11 00:01
답변 삭제  
‘아니 목사님! 언약궤가 계속 있었는데 왜 심판받습니까?’ 이런 질문을 우리 하고 싶잖아요.
방금 언약궤가 있다면 그들은 심판 안 받아야 되잖아요.
근데 왜 심판받습니까? 라고 하면 그게 언약궤 정신이에요.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성소를 옮겨버리잖아요. 옮긴다는 건 상상을 못했죠.

이들은 그들이 생각한 바와는 전혀 다르잖아요.
‘성전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게 그들의 신앙 논리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어떻게 해 버립니까?
성전을 옮겨버리죠. 성소를 옮겨버립니다
방금 ‘언약궤가 있으니까 우리는 멸망하지 않아.’
‘용서가 있으니까 언약궤가 있으니까 우리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 논리는
언약궤가 누구를 위한 언약궤라고요? 자기들을 위한 언약궤가 된 거예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다 그런 거예요.
‘십자가의 피만 믿으면 구원은 취소되지 않을 거야.’ 뭘 취소 안 되요? 취소해 버립니다.
제가 아주 위험한 발언을 하죠.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여러분하고 할 때 이야기 했어요.
김성수목사 이야기를 했잖아요. 로마서 구장 설교, 지난 시간에 했죠?
무슨 이야기 합니까?
‘아! 이거는 진짜 이런 이야기 한 게 아니야. 성도는 절대로 생명책에서 이름이 안 지워져.’
이게 무슨 소리예요?
그러면 이 모세도 구라친 거고요. 다 구라친 거예요. 그리고 생색을 낸 거예요. 생색.

어떤 모습인가 하면 자기가 진짜 신앙인이니까
‘내가 저 사람이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제 생명이 끊어질지라도
제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지라도 원하는 바입니다.’
이건 뭐예요? 가짜 놀이잖아요. 가짜 놀이
주님이 하시는 일, 성령의 일을 완전히 개무시하는 거예요.
자기 구원에 미쳐 있어서 그래요.

이 증거판이죠. 증거판. 돌판이 증거판이에요.
이렇게 성경에서 얘기해도 자꾸 인간들은 십계명을 붙들려고 하죠.
십계명이 있다는 것은 십계명이 이 증거판에 쓰여졌다는 것은 무슨 증거라는 거예요?
첫째 돌판이 깨어졌다라는 증거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삽니까?
시은좌에 내려지는 피로 인하여 내리려지는 은혜, 긍휼 긍휼로 사는 거거든요. 긍휼로.
언약궤가 그들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뭘 해도 죄라는 거예요.
뭘 해도 죄 라는 게
지금 요즘 제가 저녁마다 하는 그 출애굽기에 23장 24장에 나오는 내용이예요.
레위기로 넘어가면 뭘 해도 죄라는 거예요.
모든 요소 요소에 죄 아닌 게 없어요.
그걸 이제 해석을 이렇게 하죠. ‘거룩케 하기 위해서’ 이렇게 표현을 하잖아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거룩의 의미를 완전히 반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 피로 용서하심이 덮힌 게 거룩이라는 겁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그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거룩해야 되겠네. 안 먹어야 되겠네.’
‘안 먹어야 된다’라는 그 상황 자체가 우리가 결정을 못 내려요.

제가 어제도 안 그래도 말씀드리면서 열왕기하 6장을 이야기하면서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 섬을 에워쌌어요. 에워싸니까 그들이 쫄쫄 굶습니다.
아람 군대의 전략이 뭔가 하면 저들을 쫄쫄 굶게 해버리면 투항할 거라는 예상이었어요.
그러자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레위기에 예언된 사건이 일어납니다.
‘오늘은 네 아들 잡아먹고 내일은 내 아들 잡아먹자’(레26장) 그런 일이 일어난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아들 잡아 먹을 수 있어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우리들이 갖고 있는 생각이에요.
그러면 여기 열왕기하 6장에 나오는 그들은 그러면 우리보다 악해서 잡아 먹었을까요?

베드로가 이번 주에 할 설교 내용이지만
자기는 어려서부터 한 번도 거룩치 않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 안 먹었다라는 거예요.
철딱서니가 없죠. 안 굶어봐서 그래요. 상황을 그렇게 안 닥쳐서 그래요.
자기는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을 갖췄다 라고 생각하는데
환경 자체가 셋팅이 되면요.

다윗이 간음하고 싶었을까요? 간음하고 싶어서 미쳐가지고 왕궁에서 거닐다가 이 렌즈로...
요즘 그런 사람이 있잖아요. 삼성 갤럭시 폰은 여기서 찍으니까
저쪽 아파트 안에 있는 거 내용까지 선명하게 다 나오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왜냐하면 율법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에요.
그전까지만 해도 사울 왕과 전쟁을 한 사람이잖아요.
근데 주님께서 환경 속으로 몰아넣은 거예요.
그 몰아넣었다는 것을 깨달은 게 이 시편 51편 내용이에요. 지금 다윗이

(시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인간은 죄인으로서 이 용서하심,
그 용서하심만을 계속해서 덮어쓰면서 살아가는 게 이스라엘입니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거예요.
‘내 죄가를 도말하소서’ 라고 이야기하니까 또 오해를 하죠.
깨끗이 없애소서. 이렇게 가는데 없애버리면 언약궤가 필요 없어요.
이런 어떤 말씀들 자체를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인간은 자꾸 어디를 지향하는가? 하면
죄를 깨끗이 없애서, 나를 완벽하게 거룩하게 해서 뭐가 되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성전을 이스라엘 가운데 주신 이유는
‘너희는 계속 죄를 지어라. 나는 용서하겠다.’
그 용서의 영원성, 완벽성을 보여주기 위한 이스라엘 백성이거든요.
그런데 그들은 주객이 바뀌어버리죠.
언약궤가 누구를 위해 서 버립니까? 성전이, 자기를 위해서 있기 시작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도 요한복음 8장에 나온 이 사건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이 성전에서 지금 이런 일을 하고 있거든요. 여기 보면

(시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놀라운 이야기를 하죠. 제가 이전에는 요한복음 8장을 하면서 이 이야기를 했어요.
예수님께서 이 구절을 쓰셨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이 말을 누가 했어요? 다윗이 했죠.
자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또 머리 좋게
‘다윗이 그 당시에 밧세바를 범했고, 간음했고 우리아를 죽였기 때문에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이렇게 했지 않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뒤에 보면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뒤에 뭐라고 합니까?

(시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죄악 중에 출생했다’는 겁니다. 이건 마치 어떤 이야기인가 하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이 내용을 어떻게 바꿔버리는가 하면
야곱은 사랑했는데 그 사랑한 야곱은 태어나기 전에는 사랑했잖아요?
태어나기 전에 사랑했는데, ‘죄악 중에서 태어났다’ 이거예요.
죄인이라는 겁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죄인’이라는 거예요.
이런 얘기는 또 안 믿죠. 사람들이.

야곱은 태어나기 위해 사랑했다. 이거는 되게 받아들이기 쉬운데,
태어나기 전에 죄인이라는 거예요.
죄인으로 태어나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왜? 피를 위한 출생이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를 위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다윗이 그런 고백을 하는 거예요.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
아니 배 속에 있어서 다윗이 배 속에 있을 때 음란한 죄를 범하고 살인죄를 범했다.
또 과학적으로 그걸 따져 들어가려고 하잖아요. 태어나기도 전에 이야기입니다. 지금

죄악 중에 출생했다는 말은 인간 자체가 첫째 아담 안에 있잖아요.
인간 자체가 죄인이라는 거예요.
이미 주님 보시기에는 죽은 자죠.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정녕 죽으리라. ‘죽은 자’라는 겁니다.
죽은 자가 내놓는 것은 죽음의 빛 뿐이잖아요. 죽음의 흔적들.

솔로몬이 수많은 영광을 얻고, 수많은 그 결실을 맺었잖아요.
그 정도 하면 헛되다고 하겠어요?
‘아이 목사님 살아보니까 헛댑디다’ 그 얘기가 아니에요.
지혜자잖아요. 지혜자이기 때문에 그 모든 흔적들은 죽음의 흔적일 뿐이에요.
죽음의 흔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죽음의 흔적’이라고 ‘헛되다’라고 얘기를 하니까 그게 지혜가 되는 거예요.
왜? 그것은 죽임 당한 어린양의 피를 증거하는 죽음의 흔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피를 자랑케 하기 위해서,
피 공로만을 높이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만들었거든요.

다윗은 착각한 거예요.
분명히 다윗을 기름 부을 때 사무엘 선지자가 처음 기름 부을 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그랬잖아요.
그러면 마음을 보신다고 했을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죠?
‘다윗은 마음이 사울보다 깨끗해,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이런 논리를 펼 수밖에 없죠.

그런데 지금 시편 51편 딱 되니까.
하나님이 마음을 보시죠. 무슨 마음으로 봅니까?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이에요.
근데 그걸 자기가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그러니 마음을 보신다 했을 때
아 정말 다윗이 뒤에 보니까 어떻게 해요? 그 골리앗과 싸울 때 어떤 싸움을 했습니까?
‘너는 칼과 창으로 나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간다.’
저 할례받지 않는 저놈들하고 우리는 할례받은 족속이라는 거죠.
그 마음이 깨끗합니까? 아니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자체가 뭐가 담겼어요?
‘죄가 용서되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 거예요.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내가 죽었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본문들을 어떻게 봅니까?
‘야 다윗이 그만큼 깨끗하고, 그만큼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있었다.’
열심이 있긴 뭐 있었어요? 그런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죄 없으신 분이죠.
죄 없는 분이 죄 있는 육신을 입고 오신 거예요.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시51:5)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 하였나이다

죄중에 잉태했고 죄악 중에 출생했고. 무슨 얘기예요? 이 얘기가.
‘자기가 한 어떤 일도 죄 아닌 게 없었다’ 얘기예요.
죄악 중에 출생했으니까 죄인이 출생된 거잖아요.
죄인이 하는 일이 뭐예요?
앞서도 말씀드린 것 같이 죄의 흔적들만 계속해서 남기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서 이긴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렇게 질문할 거 아니에요.
주님이 하셨죠. 자기가 한 게 아니고.
자기는 착각했죠. ‘그러한 일들이 다 내가 믿음이 좋아서 내가 저 사울왕과 달라서...’

기름 부음의 차이는 사울왕과 다윗왕의 기름 부음의 차이는 딱 하나예요.
하나는 긍휼의 그릇,
하나는 진노의 그릇.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이 사울과 다윗으로 나눠져 있지만
나중에는 사울, 다윗 안에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이 갈라져 버립니다.
‘자기 속에 사울이 들어 있다’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는 거예요.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착각할 수밖에 없죠. 모든 인간들이.

(시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중심의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신다. 뭐 인간에게 나올 게 뭐가 있어요? 진실함은.
주님이 은혜를 주셔야죠. 은혜를 주면 그 진실함은
‘나는 죄 중에서 태어났고 주님의 긍휼이 아니면,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
그게 이스라엘의 본 모습이죠.
그게 이스라엘을 왕으로 세운 이유예요. 다윗을.
이유 중에 하나가 그겁니다. 이 왕이 먼저 하나님의 긍휼을 덮어쓰고 사는 거예요.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럼 그것만 보여주는가? 그거 아니에요. 그것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대속물 되심도 보여주기 때문에
왕이 대속물로 나서야 돼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대속물로 나서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쓰신 내용이 무엇이냐? 라고 할 때는 이 본문도 가능해요.
그리고 그 앞부분에 보면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는데 그 죄가 뭐냐? 4절에 보면

(시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이런 표현이 나오죠. 주께만 범죄했다는 겁니다.
‘주께만 범죄했다’는 게 도대체 뭐냐? 이거예요.
뭘 삭제해 버렸어요? 다윗이.
‘용서하심’을 제거시켜 버린 거예요.
‘언약궤의 정신’을 삭제시켜버리는 겁니다. 다윗이.
그게 죄라는 겁니다.

언약궤 정신은 무엇입니까?
증거판이 들어가 있고,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피가 뿌려져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잖아요.
그러면 다윗은 자기를 죄인으로 늘 간주하면 살아야 되는데
이때까지는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나단이 찾아왔을 때
‘내가 간음죄를 했군요. 살인죄를 했군요.’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니고
그렇게 했다면 상대한테 먼저 가야 되죠.

그런데 지금 ‘주께만 범죄했다’라고 표현을 하는 이유가 뭐냐?
주께만 범죄하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언약궤, 그 여호와의 이름을 완전히 제거시켜 버리는 거죠. 삭제해 버리는 거.
여호와의 이름은 언약궤와 함께 있잖아요.
언약궤와 함께 있다면, 그 용서하심이 덮혔다라는 거죠.
그들은 이미 대신 심판 받은 자가 그들과 함께 있다라는 거거든요.

그러면 자신들은 죄인으로 살아야 되는데 죄인으로 살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조금 더 달리 표현하면
‘나 간음죄 범했어요. 살인죄 범했어요.’ 이게 죄라는 거예요.
지금 무슨 죄를 범해요? 죄를 범할 능력이 있어야 죄를 범하죠.
이 말 무슨 말인지 이해돼요?
‘내가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내가 간음죄를 범했습니다.’ 할 때는 그 속에는 무엇이 깔려 있습니까?
‘나는 살인죄를 범하지 않을 능력이 있다’ 라는 게 깔려 있죠.

근데 죄 중에 태어났잖아요.
그러면 죄밖에 못 짓는데, 무슨 살인죄를 했고 간음죄를 했습니까?
그러면 ‘주께만 범죄했다’는 거는 어떤 의미예요?
‘언약궤 정신을 완전히 훼손시켰다’라는 얘기입니다.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시편 51편을 잘 알고 있고요.
그리고 사무엘하 11장 내용도 잘 알고 있습니다. 12장 내용도 잘 알고 있고요.
그들이 모르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글을 쓰셨다 칩시다.

(시51: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라고 이야기를 했을 때
이들은 과연 다윗의 죄를 뭘로 봤을까? 라고 할 때는 살인죄, 간음. 그 정도는 다 눈치채요.
그런데 여기 방금 읽어보니까 출생할 때부터 죄 중에서 태어났다고 하잖아요.
다윗의 말을 그들이 그 거스릴 수 있을까요? 못 거스리죠.
다윗의 말을 못 거스립니다.

그러면 죄악 중에 출생했다고 하면 이제 논리를 따져봅시다.
죄악 중에 출생했다고 하면 살면 살수록 죄가 더 많아져요? 적어져요? 많아지죠.
제가 보기에는 어른부터 나간 이유가 이 말씀 그리고 아까 레위기 이 모든 말씀,
어느 정도 썼는지는 안 나와 있으니까 이런 말씀을 이들이 잘 알아요.
그럼 죄악 중에 출생했으면 ‘우리는 다윗은 부정 못해.’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는 건 분명해’
그러면 거기에 대한 것은 잘 모르겠지만, 모르죠. 저들은.
모르는데, 이 말씀에 근거해 보니까
‘살아갈수록 죄인이더라.’ 그중에 한 요소가
‘둘 다 죽여야 되는데 안 죽였다’ 이렇게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표현을 하자면.

그런데 이걸 알면 뭐 해요? 거기까지는 다 알죠.
그러면 이들이 그다음 뭘 해야 되죠? 제사 지내야 되잖아요. 성전인데.
성전에서 지금 제물을 가지러 갔을지도 몰라요. 지금 이 죄 용서받으려고...
그 정도까지 했겠어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니까 이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은 게 아니고요.
이 율법 그리고 말씀에 근거하여서 ‘죄가 있다’라고 확정이 되었고요. 스스로.
그리고 죄가 나이 많은 사람들이 먼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죄가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금 시편 51편을 말씀드린 거고, 레위기와 신명기를 말씀드린 겁니다.

이들이 말씀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는 간단하죠. 그들은 그러면 그 당시에 성전이 있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이 말씀 앞에 방금 해석을 했다 칩시다.
그러면 우리 중에 죄 없는 자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러면 누구에게 가면 돼요?
예수님께 가면 되죠.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니까.
그러면 천국 갑니까?

지금 이 논리가 왜 중요한가 하면요.
이 사건 자체에서 보게 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하면요
자기의 죄가 예수님 앞에 드러났잖아요.
율법을 자기들이 어떤 제한된 상황에서 못 봤으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이 나이 많은 자가 죄가 더 많다는 것을 더 보여주니까
그것을 알고 떠나갔는데, 떠나갔는데 그다음에 어떻게 했을까요?
그들이 당연히 제사 지내게 돼 있어요.
제사를 지낸다고요. 그러면 죄가 용서되잖아요.

그러면 이런 논리라면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시편 51편 보니까.
날 때부터 죄인이고 다 죄인이니까.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예수님을 믿어야 돼요. 맞죠. 그 말이 맞아요? 틀려요? 맞죠.
맞는 말대로 믿으면 천국갑니까?
누구 마음대로 믿어요?
교회가 오늘날 교회가 갖고 있는 신앙이 이런 태도예요.
논리적으로 다 따져 들어갔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십자가를 붙들어야 되죠.
거기까지는 말을 할 수 있어요. 얼마든지.

그런데 그런 신앙은요. 구원받고자 하는 자는 얼마든지 가질 수가 있어요.
자기를 계속 돌아보니까 죄인이라는 거예요.
죄인인데, 죄인이니까 이 해결이 안 되잖아요. 율법대로 못 사니까.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거예요. 훌륭한 신앙인이잖아요. 누가 봐도. 그죠?

그건 이런 거죠.
생쥐가 이 길을 찾다가 길을 못 찾았어요.
여기도 아니요. 저기도 아니요. 저기도 아니요. 저기도 아니요. 보니까 출구가 있어.
찾았다는 거예요. 출구. 가보니까 역시 또 막 다른 골목이에요. 갇혀 있으니까.
그걸 빼내버려야 되는데 완전히. 공간을.
자기 쪽에서 찾은 거잖아요. 가보고, 가보고, 가보고, 가보고...
그러면 그런 방식으로는 주님께 도달 못합니까? 못해요.
못하는 걸 갖고 주님이 도달하게 하시거든요. 찾아오심이잖아요.
사람의 능으로 안 돼요. 힘으로 안 돼요.

지금 이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이렇게 하면 ‘죄인입니다.’ 거기까지 갔다 칩시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건 뭐 밖에 없어요? 제사 드리는 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방금 시편 51편 내용에 의하면 하나님은 뭘 기뻐 안 한답니까?
‘번제와 제사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 그걸 원한다. 이것까지 다 알고 있어요.
그러면 그들은 가서 상한 심령이 되잖아요.
아! 이것도 아니에요.
우리는 또 상한 심령이 되려고 하는데...

이 다윗이 착각한 게 이거예요.
이 자체로서는 완벽한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상한 심령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다윗을 하나님은 어디로 끌고 갑니까? 희생제물로 끌고 가요.
왜냐하면 희생제물을 증거하는 증인이기 때문에.

다윗은 구약이잖아요.
그러면 신약에 있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잖아요.
죄 사함을 받았잖아요. 그러면 상한 심령이 된 거잖아요.
그 상한 심령이 됐으니까 ‘나 구원 받았다’가 아니라
그 상한 심령을 주님은 자기의 증인으로 삼아서 어디로 끌고 갑니까?
골고다로 끌고 가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게 하기 위해서 구원을 하신 거거든요.

근데 자기 구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됐다’ 이야기 하죠. 됐다. ‘나 상한 심령이다.’ ‘나 죄인 중에 괴수다‘ 이걸로 끝나죠.
철저하게 ’자기 구원론‘ 중심이에요.
시편 51편 16절에 보면

(시51: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정말 재미있죠. 성전에서 지금 뭘 이야기해요? 시편 51편
’주는 제사를 번제를 기뻐 안 한다‘
성전을 앞에 대놓고 뭐라 하십니까? ’제사를 기뻐하지 않는다.‘
그럼 뭘 기뻐하시는가? 상한 심령이다.
그럼 상한 심령은 누가 만들어요?
’애통합니다. 제가 정말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러면 죄 용서 돼요?

이들이 그러면 상한 심령이 되었을까요? 안 되었을까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됐죠. ’맞아‘ 그러니까 돌아가는 거예요.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돌로 칠 자격이 없구나.‘
말귀를,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자기들은 알아들었죠.
주님이 원하는 건 상한 심령이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애통합시다.‘ 두드려야죠. 자기 자신을 두드리면서.
’아이고 저는 죄인입니다‘ 가능하잖아요. 특히 감성이 충만한 사람들. 금방 눈물 흘리잖아요.
저기에 계시지만, 여러분도 그래요. 조금만 감정이입해 버리면 울어버리고.

자기가 ’죄인입니다. 나는 지옥가도 마땅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막 핍박을 하는 겁니다.
그런다고 천국 갈 수 있나요? 그런 전문가들은 여기 다 있어요. 성경에.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상한 심령.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죄인 만들기거든요.
원래 죄인인데, 원래 죄인은 자기가 죄인됨을 몰라요.
주님이 죄인을 만들어야 되죠. 지금 다윗처럼.
의도적으로 죄인을 만들어야 죄인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죠.
’나는 죄악 중에 태어났습니다‘ 하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백날 해도 안 된다니까요. 지금 그걸 몰랐잖아요. 다윗이.
나단 선지자가 찾아오니까, 죄인 만드셨잖아요.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과 달라요. 복음 자체가.
그래서 ’성령께서 죄를 짓게 하셔야 십자가의 피를 증거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못 알아듣잖아요 사람들이.

’아 날 때부터 죄인인데, 뭐 죄 밖에 안 나오죠‘
배웠잖아요. 배운 거는 다 된다니까요.
문제는 죄를 주께서 짓게 하실 때 지어야 된다는 사실을 몰라요.
자기가 스스로 모든 걸 다 처리하거든요.
’난 날 때부터 죄인이니까 주님 피로 구원 얻습니다. 나 피가 없으면 안 됩니다.‘
다 이렇게 흘러가 버리죠.

주님께서 지금 친히 우리와 동행하시는 걸 아예 배제해 버립니다.
아까 성경 볼 때도 성령을 배제한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죠.
자기가 좀 복음을 알고 은혜를 받았으면 다 안다고 생각하거든요.
말씀이 우리 손에 장악 안 당합니다.

배우면 끝날 것 같죠? 한번 배워보세요. 답이 있는가?
’목사님 요한복음 8장 펼 때, 아니 확실한 본문을 좀 써 주죠. 땅에 뭘 썼는지‘
뭘 썼는지 확실하게 써 주죠?
예수님이 뭘 썼을까요? 사람들은 그런 걸 원하거든요.
지금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고 있는데.
그걸 확실하게 알면, 이제
’야 본문에 대한 해석을 내가 명확하게 알아서, 이해해서...‘ 이래 들어가려고 하거든요.
그게 구원 안 돼요.

(시51:16하)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니
(시51:17)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이 말씀은 얼마나 좋습니까?
주님이 멸시치 않는 마음은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
’무릎 꿇고 새벽마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부르짖으면 주께서 우리를 절대로 멸시치 않는다‘
그런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잖아요.
이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세리와 바리새인이 기도를 할 때 바리새인이 통회 안 하잖아요.
왜 통회 안 합니까? 말씀대로 다 지켰기 때문에 통회할 게 없어요.
그런데 만일에 지금 여기에서 나오는 바리새인들을 보게 되면
’아 그게 아니구나‘ 눈치챘죠.
’그게 아니구나‘ 하면 어떻게 해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치 않는 주님을 믿고, 통회할 겁니다.
통회했다고 안 나오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요. 이들이.
그러면 주님이 십자가 지실 필요 없잖아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어떤가 하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게 다예요.
이 여자가 통회하는 마음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할 게 없다니까요. 
여자가 뭘 했어요? 뭘 했어요? 간음했죠. 원치 않은
간음은 지가 원했고. 나중에 알고 보면 자기가 원한 것도 아니에요.
주께서 시킨 겁니다.
시켜서 간음을 했는데, 원치 않았는데 잡혀 왔어요.
그것도 누구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잡혀와 가지고 그걸 잘 연극을 하는 겁니다.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그 위기에 처하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치 않는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죄를 용서해 버렸어요.

나의 피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서,
너는 간음했어야 했고
이렇게 잡혀 왔어야 했고 돌에 맞아 죽을 뻔했어야 했다.
너로 인하여서 성경 해석 자체가 다 바뀌어버리죠. 예수님 중심으로.

만일에 시편 51편대로 한다면
이 여자가 통회야 되고, 애통하고 아 주님이... 이런 분을 찾으시잖아요. 통회하고 애통한 분.
근데 통회하고 애통한 분 아니에요. 이 여자는. 또 뭐 거기에 집어 넣으면
’아 내가 죽게 되었는데 주님 저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이렇게 했을 수도 있는데,
그런 내용이 없잖아요.
예수님께서 정죄하지 않는 그 상황 자체가, 그 모습 자체가, 통회하고 상한 심령이에요.

사람들이 ’항상 기뻐하라‘ 하니까 ’허허~‘ 이렇게 다니는 걸 생각하는데
말씀은 주님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내시죠.
이미 항상 기쁨 속에 있다는 얘기입니다. 성도는.
그 모습이 잠깐 반짝반짝 빛나죠.
근데 우리는 자꾸 말씀을 내가 소유해야 되고, 내가 그걸 갖고 놀아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범사에 감사하는 속에 산다는 얘기입니다. 살기 때문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반짝반짝 감사한 마음들이 가끔 생기죠.
동시에 그 ’감사하라‘는 말씀이 오히려 책망으로도 하고 다가오게 되고.
요한복음 8장 9절로 가서 보게 되면

(요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양심의 가책이라고 집어넣은 이유가 뭔가 하면 그들이 돌아간 이유를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이들은 양심의 가책 없습니다. 율법의 가책을 받죠.
율법에 의해서 ’죄인이냐 아니냐‘를 이들은 판단을 받습니다. 스스로. 율법에 의해서.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습니다.

(요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러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기에서 우리가 또 한 가지 생각해야 되는 게 이런 겁니다.
여자와 간음한 현장에서 잡힌 여자와
이 간음한 현장에 잡힌 여자를 끌고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누가 더 죄가 중합니까?
그들이 보기에는 저도 율법을 범했고, 우리도 율법을 범했다. 이 수준이잖아요.

그런데 그 앞에 누가 계시죠? 예수님이 계시죠.
예수님이 계심으로 말미암아 누구는 죄인이 되고, 누구는 의인이 돼버렸어요.
누가 죄인이 되었어요? 용서하심을 거부한 이 율법을 보고
’아 내가 죄인이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애통하고 상한 심령을 원하는구나.‘
그래서 돌아가서 가슴 두드리면서 ’제가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그들이 죄인이에요.
지옥 갈 자라는 겁니다.

놀라운 것은 이 여자가 의인이 된 거예요.
의인이 되었다는 말은 이 여자가 ’진짜 죄인‘이 된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용서하심 속에 이 여인이 들어가게 된 겁니다.

(요8:11)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없나이다

이게 상당히 중요한 말씀이죠. 이 말씀의 의미는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겁니다.
누구의 판단도 필요 없다는 얘기예요. 달리 말하면
우리가 하는, 여러분들이 하는 어떤 행위에 의해서도 판단받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판단자는 십자가 지신 주님뿐이에요.
그러니까 남들이 사람의 평가에 대해서 휘둘리지 말라는 거예요.
사람의 평가에 휘둘린다는 것은 말씀이 우위에 있지 않다라는 얘기거든요.
예수님이 ’정죄하는 자가 있니? 없니?‘ ’없습니다‘
그래. 세상에는 없다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판단을 못해요.

다윗에 대해서 어느 누가 판단합니까?
왕이기 때문에 판단을 못하는 거예요? 아니죠.
주께서 그를 용서했기 때문에 판단을 못하게 돼 있어요.
성도의 삶이 그런 거예요.
성도는 이미 주님의 피로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도, 어떤 행동을 해도, 아무도 판단할 자가 없어요.

나중에 로마서에서 이런 얘기하죠.
’네가 옳다하는 바로 너를 정죄하지 마라‘
마지막에는 누가 판단자가 돼요? 자기가 판단하거든요.
외부 판단자가 없어지면 나중에 자기가
’내가 이렇게 살아서 되나? 이런 행동을 해도 되나? 왜 이렇게 했지?‘
뭐 왜 그렇게 했어요? 주께서 시켜서 했지.

또 이 말을 듣고 자기가 하는 일을
다 주께서 시켜서 했다라고 또 우기는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돼요.
지옥 갈 자는 어쩌겠어요? 못 알아듣는데.

다윗이 한 행동을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다윗이 계획을 짠 거예요.
요즘 뭐 그런 이야기가 있잖아요.
어떤 사건이 터지면 ’저건 음모다. 처음부터 계략이었다‘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계략이었다.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다윗이 그걸 계획했다는 거예요.
그 인간들이 말씀을 보는 태도가 그런 태도예요.

주님의 말씀을 자기가 이루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이루기 위해서 자기가 죄를 짓자는 거예요. 그 로마서에 나오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니까,
’그래 죄를 더 짓자 그러면 은혜가 더 넘치겠네.‘ 이런 논리.
완전 조롱하는 거예요. 조롱하는 거. 주도권이 자기한테 있는 겁니다.
’말씀을 믿는다‘는 이 태도가 얼마나 악마적이에요?
아무도 없어요. 우리를 정죄할 자가. 목사도 없고요. 목사도 아니고. 아무도 아니에요.

예수님이 지금 ’나도 너를 정죄치 않는다‘ 이 말씀은
’나도 너를 정죄치 않는다.‘ 이 말씀은요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 수준에 나와서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최종 심판자예요.
’나도‘ 성경에는 그게 없어요.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 얘기인데. 이게 번역을 하다 보니까
’나도‘라고 번역을 하면 ’저들도 너를 정죄하지 않았지? 나도 안 한다‘ 이렇게 이해했죠? 그죠.
그 얘기가 아니고.
심판자로서 ’내가 네 죄를 사한다‘ 얘기예요.

지금 ’목사님 그런 내용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못 알아듣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은 영이죠.
영의 세계 속에 이 여인이 들어오게 된 겁니다.
영의 세계 속에 들어왔으니까, 예수님 말씀을 둘만 알아 먹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을 이 여인만 알아 먹는 거예요.
외부의 관람자는 알아봅니까? 못 알아봅니까? 못 알아보죠.
기껏해야 뭘 아는가 하면
’예수님이 정죄하지 않았구나‘ 이것밖에 몰라보잖아요.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 내용을 어떻게 볼까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 죽으심 속에 이 여인이 함께 죽은 내용과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속에 이 여인이 함께 참여됐다라는 것까지도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여인이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았느냐?
십자가를 증거한 인생을 산 거예요.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간음을 했고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간음한 현장에서 자기 혼자만 잡혀왔고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상황이 되었고
십자가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여인이 뭐가 됐어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미끼가 된 거예요.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의해서.
놀라운 믿음 아닙니까? 그러니 과거를 슬퍼하지 마세요.

그거는 예수 믿기 전 아닙니까?
믿기 전도 이제 예수님 안에 들어와버리면 다 예수 안에서 산 인생이 돼버립니다.
’그러면 그 모든 인생이 가치 있단 말이에요?‘ 자꾸 사람들이.
지금 가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요.
십자가를 증거하는 가치를 이야기하는데, 자꾸 사람들이 오해 해요.

’아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뭘 나쁘지 않아요? 전부 죄인데.
’십자가의 원수 짓 한 게 나쁘지 않았다?‘ 그게 말이 돼요?
자꾸 이 과거에 대해서 뭔가 긍정적으로 보고 싶은 거예요. 사람들이.
내가 복음을 알기 전에는 이러했는데
’들어와 보니까, 과거 모두가 다 주를 위한 거네. 나쁘지 않았네.‘
그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죄인의 본격적인 모습을 제대로 보여줬구나.‘
’주님이 나를 그렇게 사용했구나.‘ 그게 사도바울의 관점이잖아요.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의 시각이예요.

그리스도 안에 들어버리면
십자가에서, 우리의 인생을 과거를 보고 미래를 다 봐버려요.
미래도 과거가 되고 과거도 과거가 되고.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다 이뤘으니까.
말씀 속에 들어와버리면, 말씀 안에 모든 것이 펼쳐지는 세상이잖아요.
그러면 그러한 모든 일들이 얼마나 신나고 감사한 일이에요?
그 피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러면 그 속에 있어서 우리는 그러면 뭐 별 느낌이 없습니까?
뭘 느낌이 없어요? 죄인인데. 육 가운데 사니까, 느낌 그대로 있어야 되죠.

(요8:1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이 여인에게 준 거예요.
자! 이렇게 보면 죄 용서는 성전에서 되어지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성전에서 예수님이 죄를 용서하시죠.
예수님이 죄 용서하시는 성전 되시고, 영원한 대제사장 되시는 분임을
여기에서 지금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사도행전 3장에서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갈 때.
성전 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구걸하는 그 앉은뱅이를 고치는 사건과 거의 흡사하거라고 보시면 돼요.
성전에서 죄가 용서되어야 되는데, 누가 죄를 용서합니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죄를 용서하죠. 그 내용과 지금 동일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앞부분에 그 초막절 끝날 큰날.
다음에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그 말씀이
지금 여기에서 바로 보여주고 있어요.
생수의 강이 흘러난다고 하니까 뭔가 이 여자가 뭔가 있어야 되는데, 아무것도 없죠?
이 모습 자체가 생수의 강이 흘러나는 모습이에요.
이렇게 되면 과거에 자기가 살았던 모든 모습이
생수의 강이 흘러나는 모습을 증거하는 모습이 되는 겁니다.

(요8:11)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할 때는 이 여인은 무슨 죄를 범할 수 없는가 하면
십자가의 용서함을 거절하는 죄를 범하지 못해요.
그러면 십자가의 용서함을 거부하는 죄를 범치 못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뭘 한다는 거예요? 죄만 짓는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보고 오해를 하죠.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니까
’용서받았으니까 이제 우리는 거룩하게 살아야 된다.‘
구약이 아무리 있어도 못 알아들어요.
애굽 땅 종되었던 곳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시작하는 그 율법과 율례를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방금 아까 출애굽기 25장 22절에 나오는
이 증거판이 있는 그 위 시은좌에서 천사들 그룹 사이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될 일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이 여인이 가장 거룩한 여인이에요.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잖아요.
이 여인이 그러면 그다음에 행실을 바르게 해서 간음하지 않았다. 더 이상.
우리는 그런 식으로 상상을 하잖아요.
그게 우리들이 갖고 있는, 기껏해야 갖고 있는,
’예수 믿고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는 그 생각이에요 그게.

아까 전에 뭐라 했습니까?
다윗이 의도했어요? 계획했어요?
아무리 인간이 결심을 해도 주께서 펼쳐지는 환경 속에서는 꼼짝 못하게 당하게 돼 있어요.

사실 어젯밤에 제가 설교를 해야 되는데, 이제 강의 있는 날은 좀 쉬려고 이렇게 했는데,
원래 어젯 밤에 할 얘기는 출애굽기 24장에 나오는 그런 얘기인데.
24장 마지막 부분입니까.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를 앞서 보낸다‘ 했거든요. 앞서 보내면 우리들 생각에
’하나님의 사자가 앞서 갔으면 그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냥 뒷짐지고 가면 안 됩니까?‘
이렇게 나오잖아요. 논리가.
앞서 갔는데, 약속의 땅에 가서 하나님이 그들을 진멸하지 않아요.
이게 모순되는 내용들인데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자 위에 여호와의 이름이 있거든요.
’여호와의 이름‘은 여호와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자예요.
그 여호와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약속의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이나 히위 족속 이런 족속들을 다 멸하지 않는 겁니다.

이름을 위한 하나님의 사자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여호와의 사자를 뭘로 이해해요?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자‘
여호와의 이름이 그 하나님의 사자 위에 있으니까
’신난다 가자. 우리를 위함이다‘ 이런 식으로 밖에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걸 거꾸로 이야기 하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십자가의 피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너는 살려질 것이다.
이건 예수님께서 명령을 하셨기 때문에
명령하신 그분이 이 말씀을 이루어냅니다. 인간이 이루어 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말씀 전체를 보면
인간이 손댈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십자가 지신 그분을 위해서
세상은 만들어졌고
만물은 만들어졌고,
그분을 증거하기 위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마음껏 이용당하면 되는 거예요. 십자가의 증인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을 십자가의 증인으로 만들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주님의 죽으심을 자랑하는 우리 인생이 되게 도와주시고
주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어떤 인간도 우리들을 판단할 수 없음을
늘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용서하심 속에서 감사하는 주의 백성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corded by 구 성모, 허 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