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9-12 20:28
서로 사랑하는 교회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8  
https://youtu.be/GJ_O9JtHn7w

관리자 21-09-1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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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2 서로 사랑하는 교회

질문: 오늘 본문 말씀이 꼭 저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에요. 제 계획대로 전도도 안 되고,
둘째 동생도 내가 전도할려고 얘를 10년을 기도했다고 생각을 했는데
왔다가 3개월 만에 가버리고 제 계획대로 아무것도 되는 게 없습니다.
한경자 씨도 마찬가지고, 계획대로 안 돼요. 제 생각대로.
그래서 오늘 말씀이 딱 저한테 아주 딱 맞는 말씀이어서 은혜가 됐습니다.

질문: 들을수록 헷갈려요. 아! 들을수록 헷갈린다고요.
기존에 들었던 거 하고 지금 이제 듣는 거가 거꾸로니까 헷갈리고.
우리 사위에게 잘 물어보기는 해요.
그 이름 가지고 목숨 걸고 무시로 기도해라 그러거든요.
목숨 걸고 진짜 기도해야 되겠다. 그렇게 해줬던 이야기가 반대로 하니까 헷갈리죠.

답변: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이 땅에.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의 기도가 성도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고요.
말씀이라는 자체는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하시고,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증거하는 것인데,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조차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그런 어떤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교회에서는 구권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목사가 얘기를 하면
교인들을 후려잡기가 좋죠.
무시로 기도하라 하면 아무리 해도 무시로 기도 못하거든요.
항상 기도를 못해요. 아니 일하는데 어떻게 기도를 합니까?
기계 옆에서 일하다가 기도하다가는 손 날아가는데.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어야 되지, 어떻게 항상 기도해요.

질문: ‘목사님은 한다’고 하더라고요.

답변: 사기치는 거죠.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목사들은 할 일 없으니까 그렇게 보일 뿐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조금이라도 부족한 것은 받지 않아요.
그래서 아들의 죽으심만 받는 거예요.
목사들이 이제 그런 걸 통해서
‘나는 합니다’ 만약 그렇게 얘기를 했다면 사기꾼입니다. 사기꾼.
대부분 목사들이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해요.
성도들은 또 거기에 대해서 동의를 하고
그래서 그러한 어떤 것들을 통하여서 사람들을 이렇게 뭐랄까요?
기를 죽이고, 또 목표를 또 이렇게 보여주면서 그것을 위해 살도록 유도를 하는 겁니다.

아까 제가 설교할 때 예를 든 그 교회도 마찬가지죠.
선한 목자 교회 이야기인데 뭐 영성기도를 쓰고...
맞아요? 정 집사님 써보셨어요. 2년 썼어요? 목사 말을 안 듣고 그래요.

질문: 안 썼어요. 목사님랑 싸웠어요. 아닌 거 같다고 그랬더니, 저한테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다고
제자 훈련하고요 영성 훈련하고 엄청 많이 시키거든요.
제자 훈련 프로그램에서 몇 시간씩 앉아서 공부시키고
기도하는 다락방에서 계속 기도하고, 밤새 기도하고

답변: 목사들이 그 교회는 목사들이 안수하는 걸 되게 좋아한다면서요?

질문: 금요 철야할 때 안수하고, 수요 예배 때 안수하고,
        안수 해가지고 축축 다 쓰러져서 넘어지고...

답변: 심 집사님도 거기를 가셨던 거예요? 아니 심 집사님
질문: 간게 아니고 책을 봤어요. 책
        다른 데 나간 교회에서 그 목사님 책을 가져와서 공과 공부를 했어요.

답변: 교인들이 안수받기를 원하죠. 안수 받기를 원하고
사람이라는 게 재밌어요.
상대가 목사고 목사가 이렇게 머리에 얹으면요. 찌릿찌릿해요. 사람이.
찌릿찌릿하고 그런 식의 어떤 사람을 갖고 노는 건데

그게 이제 사도행전에 나오는 흉내내는 거거든요.
이 베드로가 사마리아에 교회에 가서 안수를 할 때 성령을 받잖아요.
이걸 주님의 일로 보게 되면, 거기에 남는 것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만 남게 되는데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은 주님의 죽음에 참여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 안수가 완전히 바뀌어 버렸잖아요.
‘능력을 받는다, 뭐 은혜를 입는다‘ 이런 식으로 다 바뀌어 버린 거예요.
바뀌면서 그걸 이제 갖고 사람들을 자기 종 만드는 겁니다. 궁극적으로.
나중에는 이제 교회 안에서
’나는 그 유기성 목사한테 안수받았다‘ 이런 소리 하는 인간들도 나오고요. 나중에.
틀림없습니다. 니는 그 부목사 중에 부목사도 서열이 있거든요.
서열이 있을때 ’너 1번한테 받았니? 2번한테 받았니?‘ 나중에 단계를 타고 올라가야 돼요. 그게
인간의 마음 자체가 이미 그런 식으로 작동을 하거든요.

오늘 말씀 중에 제가 이거는 유튜브에 올릴 겁니다. 지금 계속 녹화하고 있으니까.
오늘 말씀 중에 레위기 11장을 제가 언급을 했잖아요.
거기에 보면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 이러한 내용이 나왔는데
그 신명기 14장에도 똑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 말씀을 대할 때 말씀을 대하는 방식이에요.

베드로가 이 구약 율법을 대하는 방식과 그다음 나오는 게 그거예요. 성령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바뀌지가 않아요. 인간이라는 자체가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육체 가운데 살게 하는 거예요.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육체 가운데 살아야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이 될 수 있어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여기까지는 좋잖아요.
그러면 더 이상 나는 육체 가운데 살지 않아야 되는데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
이 이야기가 나온단 말이에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버리면 더 이상 육이 사라져야 된다는 게 인간의 논리거든요.
모든 교회가 그걸 주장하고 있어요.

아니면 점점점점 내가 육적인 요소가 점점점점 줄어들면서
영의 사람이 되어가는 그러한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된다라는 게 인간들이 갖고 있는 사고 방식이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 자체가 말씀을 대할 때 이미 자기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 중심으로, 인간이 십자가 중심으로 못 봐요.

더 놀라운 사실은 성령받은 베드로조차도 그러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하는 일에 그 주도권을 한 번도 인간에게 넘긴 적이 없다라는 얘기예요.
이거는 구약부터 계속해서 그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다.

말씀하신 분이 말씀을 이루시거든요.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 환경 속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몰아가시면서
이 말씀을 위한 세상이고 말씀을 위한 이스라엘 백성이고
이 언약을 위한 이 세상임을 고스란히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걸 어떻게 아느냐라고 할 때는 관찰자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비로소 알게 되는데
문제는 성령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다음 다시 또 인간이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라고 할 때는
여전히 육적인 모습을 보인다라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이제는 성령 받기 전에는 육체 가운데 살지 않고
이제 주님과 함께 주님을 위해 살아야지라는 이런 생각이었다면
성령이 오게 되면 본격적으로 육체 가운데 사는 겁니다.
육체 가운데 사는 모습이 어떠한가라고 하면 그 모습이 바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모습이에요.
갑자기 이렇게 뛰어넘어야 못 따라오지, 못 따라올 사람들은

육체 가운데 산다고 하면 아는 거는 밖에 없는가 하면
계속해서 죄 짓고, 나쁜 짓 하고, 사기치고, 돈만 벌고, 자기 이름이 이것밖에 생각을 못하잖아요.
이 말씀이라는 자체가
계속해서 자기가 관찰자의 입장에 있으니까 말씀 속으로 못 들어가는 겁니다.

부정한 음식과 정한 음식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곧장 어떻게 끌어당겨 버렸느냐라고 할 때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경계를 헐기 위한 말씀으로 이렇게 우리는 보고 싶어 하는데
그것보다도 더 우선시 되는 것은 십자가의 피를 증거하기 위한 율법이죠.
그러면 이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이 율법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하면
자기 중심으로 보죠. 자기 중심으로. 자기 중심으로.
이 율법은 나를 위해서 있고 나의 거룩을 위해서 있고
이걸 지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백성다운 면모가 이렇게 갖추어지고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설교 중에도 얘기했습니다마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변하지 않는 말씀을 왜 인간에게 중요하냐라고 할 때는
그 변하지 않는 말씀을 자기가 붙들고 있으면 자기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구원을 놓치지 않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십자가를 이해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부분은 제가 설교 시간에 별로 언급을 안 했지만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도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다 구원하셨으니까 이 구원은 변함이 없다‘ 말은 맞죠.
주님의 언약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그러한 논리가 이 구약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거든요.
어제도 제가 설교를 했지만 들어보신 분들은 뭐 들어보셨겠지만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대로 이루어주셔야 되죠.
가나안 땅에 있는 그들을 약속의 땅에 있는 그들을 다 진멸하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죄악이 관영했다면,
근데 다 진멸 안 해요. 말씀이 빗나갔거든요.

우리들은 그걸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말씀하신 분이 죄악이 관영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대만에 약속의 땅에 집어넣었다면
그들을 진멸해야 되죠? 근데 진멸 안 해요.
그러면 손들고 질문할 거 아닙니까? ’왜 약속대로 전멸하지 않습니까?‘
진멸해 버렸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지 않았을 거고
그들이 하던 그런 생활 풍습을 따라서 행하지 않았을 거 아닙니까? 이렇게 따질 거예요. 인간들은.

그러니까 말씀 자체가
언약을 위한 말씀임을,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말씀임을 그들은 간파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들 속에는 무엇만 들어 있는가 하면
’언약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대로 이룬다‘ 만 머릿속에 담겨 있는 거예요.
우리 뭐 김 장로님이 다니셨던 ’말씀 운동‘ 동네가 그런 논리거든요.

그게 왜 중요하냐? 이럴 때는
자기의 구원이 흔들리면 안 되기 때문에
저쪽이 흔들리지 않는 신학을 구성해 줘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런데 그 본문에 들어가 보면 약속대로 심판 안 해요.

신약 성경에도 마찬가지예요. 신약 성경에도 그들도
예를 들어, 말씀 운동 그쪽에도 김성수 목사와 다르지 않는 이유가
로마서 9장을 해석하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져도 좋다‘라는 이런 마음이
눈꼽 만큼도 없어요.
장로님 맞죠? ’나 지옥 가도 괜찮다‘ 이런 생각 안 해요.
그들은 또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누가 또 지옥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라고 이야기했다라고 하는데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무슨 말인지.
흉내를 내면요. 복음의 의미를 전혀 파악을 못해요.

’자기가 복음 때문에 지옥 가도 된다‘라는 이런 생각을 못해요.
말씀의 그 능력 속에 자기가 지금 함몰 당해야 되는데
끝까지 자기는 말씀을 갖고 자기 구원을 사수하겠다라는 거거든요.

대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갔잖아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누가 봐도 성령 받은 사람이거든요.
그들의 눈에는 그 사도행전 8장 같은 내용들이 안 보이는 모양이에요.
사마리아 교인들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고 자기들은 뭐라고 생각하는가?하면
’복음 듣고 세례받고 성령 받았다‘라고 자기들이 다 단정(斷定)해 버려요.
그런 소리 못하게
지금 사도행전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거거든요.
주님이 홀로 일하신다고.

베드로도 마찬가지죠. 자기가 정답을 가져버리잖아요.
그거는 구약에 대한 오해이기 때문에 아직 성령을 제대로 이해 못했다.
인간이 어떻게 제대로 이해해요?
성령은 성령만이 성령을 이해하죠.
성령의 일은 성령만이 알아듣잖아요.
인간은 못 알아들어요.

근데 인간들은 성령이 내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내가 알아먹을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성령 일을 할 수 있다‘라고 자꾸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구원을 포기 못해요. 그냥 시키는 대로 살면 되는데...
구약을 읽어보세요. 인간들이 주의 뜻을 하려고 덤벼들잖아요.
덤벼들면 다 박살나 버립니다. 그게 우리의 본모습이에요.

야곱에 대한 내용이 창세기에 가득하게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부정하다, 부정하지 않다. 이 내용은
’먹으면 내가 부정하게 되고 안 먹으면 내가 거룩하게 된다‘
그러면 이 말씀을 왜 주셨는가? 나를 위해 주셨다는 거예요.
너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위해 주신 말씀이다. 이렇게 들어가는 겁니다.

그 십자가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베드로에게서 일어나죠.
베드로는 거룩을 유지하려고 하죠. 음식을 안 먹음으로 말미암아.
사실 이 모습이 이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사울의 모습이었죠.
정말 이런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베드로 정도면 베드로에게는 사울과 같은 모습, 예수님을 핍박하는 모습이 다 사라져야 되는데
성령을 받았다면 그 정도는 다 뛰어넘어야 되는데, 조금도 못 뛰어넘었어요.
인간은요 육이 있는 한, 죽을 때까지 육체 가운데 살기 때문에 못 뛰어넘어요.

그러면 어떻게 가능하냐? 주님이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못해요. 나는 아니고 주님이 홀로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내가 하는 일이 없다‘라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또 말로 ’내가 안 했습니다. 부족합니다, 주님‘
이런 이야기 한다고 해서 주님한테 안 먹혀요.
사람에게는 먹히겠죠. 사람에게는 먹혀도 주님에게는 안 통합니다.

이런 일은 막상 주님께서 만나게 해버리면 우리는 망해야 되죠.
’내가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나의 현실을 제대로 알아가게 하시는구나‘
이것을 알게 되는 거죠.

우리는 복음을 들어도요. ‘나’라는 이 자아를 포기 못해요.
그래서 날마다 주께서 말씀을 상고하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복 있는 자는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자’라고 했을 때 이게 구약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성령 안에 들어온 자는 구약 말씀이 다 우리 속에 들어온 거예요.

그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보면서 주야로 묵상하면서 말씀대로 살아서
자기가 하나님께 거룩한 백성이 되어서 영생을 얻는다. 이렇게 들어가지만
성도들은 정반대의 상황이죠.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 말씀 앞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찔러 쪼갬을 당하죠. 말씀은 살아 있으니까
살아있는 말씀과 살아 있는 내가 만나면 누가 죽어야 돼요? 내가 죽어야 되잖아요.
문제는 지가 살아있다라는 것을 말씀을 대하지 않으니까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죄인입니다‘ 이렇게 얘기하죠.

근데 말씀과 한번, 살아 있는 말씀 한번 만나보세요. 어떤 인간이 되는지
쪼개는 그 자리에 주님의 죽으심이, 피로 용서하신 그 은혜가 솟아나오게 돼 있는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 7장에 나오는 너의 배에서
배라는 표현은 심장이라고 표현할 수 있고, 마음속 깊은 것 그거 뭐 의미가 없어요.
어쨌든 이 몸 속에서, 육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그러한 어떤 놀라운 주님의 일을 우리 가운데서 드러나게 하시는 겁니다.

질문: 그러니까 이제 그것이 고민인 것 같아요.
그렇게밖에 될 수 없는, 그건 우리 소관은 아닌데.

답변: 그게 십자가 능력입니다.

질문: 그것을 가만히 이렇게 보면서 그러면 끊임없이 우리는 교회 가운데에서
진짜 어떤 주님 자신의 어떤 실제 또는 천국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 땅에 가서만 경험하는 건가? 그 나라 가서만? 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답변: 제가 질문을 할께요. 천국을 경험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말씀을 해 주셔야 돼요.

질문: 천국에는 서로 사랑함이 있잖아요. 주님이 사랑이시잖아요.
그리고 사랑하는 나라가 서로 섬겨주는 나라가 천국이라고 볼 수 있다면
지금 교회에서 그 실제적인 어떤 부분 내어줘야 되는데
섬김보다는 늘 자기 주장이 있고 싸움이 자기 잘남이 있고
좀 더 알면 그 아는 걸로 괄시하고 모르면 무시하고
이게 얼마나 이렇게 이걸 누가 그걸 보고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러면 이 땅에서 결코 지금 목사님 말씀처럼 하면
이 땅에서는 결코 천국을 일도 경험할 수 없고 개인적으로는 경험할 수 있겠죠.
그러나 단체적으로는 경험할 수가 없는데, 사실은 주님이 그분의 몸을 이렇게 단체잖아요.
목사님도 그런 말씀하셨는데 단체로 구원 얻었다고,
그 단체 안에서 물론 쪼개짐과 나누어짐도 있어야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사랑함이 있어야 되고
어떤 한 가족의 어떤 것들이 있어야 되고 그걸 볼 수가 없잖아요.
생각도 너무 이기적이고 너무 개인적이예요.

답: 그러니까 너무 이기적이고 개인적이라 이렇게 표현을 할 때
방금 목사님이 말씀하신 그 ‘교회상’ 자체가 깨져야 됩니다. 먼저
벌써 목사님이 말씀을 하실 때
’주님이 사랑이기 때문에 천국의 모습을 교회에서 볼 수 있어야 되고,
그게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모습 속에 볼 수 있어야 된다‘는 게 먼저 깨어져야 돼요.
지금 이미 그게 우리가 말씀을 보고 ‘정답’이라는 것을 구성해 냈기 때문에 그래요.

방금 말씀하신 ‘사랑’을 먼저 언급해야 되죠.
요한일서에 보면 사랑은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내어준 사랑’이죠.
그 사랑을 성도가 받았습니다.
그러면 성도가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의 피예요. 그게 사랑입니다.
그러면 피를 내어놓으면 상대가 어떤 식으로 규정되느냐 할 때는 죄인으로 규정이 돼요.
죄인으로 드러날 때 감사가 나와요.
피와 피의 만남이라는 것은 죄인과 죄인의 만남이거든요.

그러면 모일 때 방금 목사님이 지적했던 서로 다투고 논쟁도 하고
이런 것들 자체 속에서 무엇이 드러났냐 할 때는
주님이 그 가운데 함께하고 계시다면 그들은 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겠죠.
근데 그 모습을 우리는 어떤 걸 꿈꾸는가 하면 모두가 다 그렇게 되기를 꿈꾸죠.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런 교회가 거의 없어요. 거의 없다고요.

사도행전에 잠시 부정적인 면모를 하나도 안 보였잖아요. 교회가.
3천 명 5천 명 모였는데, 그런데 그 내막을 들여다 보면
갈라디아 교회, 에베소 교회, 골로새 교회, 고린도 교회.
그 속에서 그들의 본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는 우리도 똑같아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으로 죄인과 만나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이 보이죠. 감사로 만나거든요.
그런데 그것도 잠시뿐입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또 죄인으로 드러날 때 ‘사랑’이 나오게 돼 있죠.

성경에 나오는 ‘서로 사랑하라’는 이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서로 사랑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이 깨어져야 해요.
우리가 꿈꾸는 사랑이 먼저 이미 상상하고 있거든요.
먼저 그게 우리는 꿈꾸고 있단 말이예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나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직격탄을 날리잖아요.
그게 사랑입니까? 미움입니까? 그 자체가 사랑이거든요.
그것도 사랑이고, 그 복음을 듣고 박살 나는 것도 사랑이고,
그러한 사랑을 이야기해야 되는데

지금 예를 들어 우리가 한 20명이 이렇게 모이면
’교회다운 교회, 저 교회 가면 정말 사랑이 넘치더라‘ 나는 이 말이 제일 수상하거든요.
그 사랑이 넘치는데 도대체 그 사랑은 선한목자교회에 가시면 사랑이 넘쳐요.
가면을 많이 두껍게 쓴 자들의 모임에 가면 사랑이 넘칩니다.

그런데 복음 앞에 들어오면요. 모든 것이 찔러 쪼개기 때문에 적나라하게 드러나요.
그 속에서 죄인이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서로 용납하는 일이 일어나요.
근데 이제 목사님이 지적하고 싶은 분야는
’죄인이 되었는데 죄인이라고 우기면서 왜 용납하지 않느냐?‘
’피로 산다면 왜 서로 이렇게 받아들일 수 없느냐?‘
그런 꿈을 우리가 죄송합니다만 깨야 돼요.

질문: 신천지 같은 이곳이 사실은 진짜 사랑이 많거든요.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 사랑이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답변: 신천지도 많고요. 안산홍도 많고요.

질문: 그게 아니에요. 진짜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정말 그런 가운데 주님이 간음하는 여자를 용납하듯이
그렇게 그런 교회가 글쎄 진짜 성령을 받고 십자가의 사랑 앞에 어떤 깨지고 그런 사람들이라면
그런 부분들이 나타나야 되지 않을까?
물론 일시적으로 부분적으로는 될 수 있겠으나 전체는 주님이 오셔야 될 수도 있겠죠?

답변: 전체는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이 땅에는 없어요.
모든 게 부분적이에요. 전체적도 잠시 반짝합니다.

질문: 수십 년간 이렇게 보면서
결국 그러면 주님 오실 때까지 그건 우리가 단체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인가?
초대교회가 보여주었나? 그런 생각도 해 봐요.

답변: 잠시 보여주죠. 초대교회가. 서로 유무상통하는데.
거기에서도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게 있어요.
성경은 표현을 할 때요. 부분적인 것을 전체로 표현해요.
목사님이시니까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으시겠죠.
성경은 주님이 표현할 때요. 이런 거예요. 바리새인은 한 파잖아요. 한 파벌이잖아요.
근데 이 파벌을 갖고 이스라엘 전체를 규정하고요. 인간 전체를 규정해요. 성경은.
그러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두가 다 서로 제 것을 제 것이라 하는 것이 없고‘라는 이 내용도
이런 식으로 이해를 해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거기에 담아버리거든요.
담아버리면 야 삼천 명이나 오천 명이 모두가 다 제 것을 제 것이라 하는 자가 없다
이렇게 들어가 버려요. 논리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속에 들어 있잖아요.

그래서 좀 주석을 좀 제대로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 단어들을 연구하면서 이건 부분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얘기를 합니다.
대표적인 바나바를 언급한 이유는 그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그렇게 했다라는 얘기예요.
다 그렇게 했다라는 게 아니고

그래서 자꾸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성경을 볼 때
주님께서 표현하는 방식, 이 방식을 제대로 봐야 되는 거고
그리고 더 문제는 ‘우리가 먼저 답을 갖고 있다’라는 게 문제예요.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라고 했을 때는 그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 이루죠.
직접 이루는 방식은요. 성령이 딱 와버리면 모두가 다 죄인이 되죠?
오순절날 성령이 와버리면,
죄인이 되는 순간 이미 ’사랑하라‘가 완성이 되어 버렸어요. 그들 속에
무엇을 주고 자시고 관계가 아니라
그러면 그 사랑함이 외부적으로 드러날 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여버리는 게 사랑입니다.

목사님이 질문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사랑해야 되지 않습니까?
복음을 아는 사람이 굳이 죽일 필요가 있습니까? 이렇게 우리는 따질 수가 있거든요.
진짜 교회라면 복음을 모르는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쳐서 들어오게 해야 되는데
이런 식으로 또 이제 질문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얼마든지.
그런데 사랑은 우리를 위한 사랑이 아니고 십자가의 피를 증거하기 위한 사랑이기 때문에
피가 없는 자들은 과감하게 쳐내버리죠. 용서함이 없는 자들은, 그게 사랑의 모습이고

또 내부적으로도 동일한 어떤 그러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인들이 다 두려워하잖아요.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는 장난이 아니구나. 그러한 모습을 또 보이고

목사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걸 꿈꾸고 있어요.
제가 여러분들이 언제입니까?
여러분들이 탕자 교회로 왔을 때 제발 꿈을 좀 버리시라고 제가 표현을 많이 했거든요.
아! 복음을 전하는 교회라면 적어도 이럴 것이라는 상상, 그게 가장 큰 문제예요
주님은 그런 뜻을 준 적이 없어요. 그런 교회를 준 적이 없다고요.
내가 생각하는 ’교회상‘을 만들어놓고 덤벼드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복음 전하는 교회에 가면 진짜 이해가 넘치고 사랑이 넘친다고 하는데요.
돈 관계 얽혀 보세요. 사랑이고 나발이고 아무관계 없습니다.

십자가 때문에 모이는 거예요. 용서하신 은혜 때문에 모이는 겁니다.
그게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에요.
용서함이 빠져버리면 결국은 모일 이유도 없어요.
여러분들이 지금 만날 때 서로 거리두기를 잘 하고 있잖아요. 아직까지는
깊이까지 안 들어가 봤잖아요.

한 우리가 5박 8일 수련회 한번 해볼까요. 같이
음식을 하면서 직접 요리를 하면서 이제 한번 수련을 하면요, 다 뽀록나요.
어떤 사람은요. 자고 일어나면 이불 잘 개는 사람이 있고요.
어떤 사람은 그냥 나가버리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맨날 청소해요. 그런 걸 못 봐서 그래요.
여러분들이 자기가 살아온 그 층들이 얼마나 두껍습니까?
그 지층들이 층계층계 수십억 년을 쌓아온 그 지층보다 더 두껍거든요. 우리가.
근데 거기를 안 건드리니까 우리가 괜찮은 모양이냥 나오지만

모든 인간들은요 이스라엘과 똑같아요.
홍해를 만나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드러나게 돼 있죠.
그래서 교회라는 것은 복음이 전파되니까 그곳이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는 거예요.
복음이 빠져버리면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아니죠.

아까 목사님 말씀하시피 신천지나 안산홍 하나님 교회나 얼마나 사랑합니까?
대순 진리회에도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갑니다.
특별히 심집사님 혼자 사시잖아요. 저런 분이 계시면 매일 찾아가서 청소도 해주고 도와주고요.
해요. 그래야 나중에 돌아가실 때 재산 다 빼내니까.
가져갈 재산이 없으면 뭐 그렇게 해도 하지 않겠지만
근데 그걸 사람들은 사랑이라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걸 보고 복음을 아는 교회는 저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자체가 벌써 교회가 아니에요.

진짜 교회를 제가 소개해 드리면 고린도 교회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고
복음 앞에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잖아요.
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그 속에서 이 쪼개져서 나갈 자들은 나가고
내부에서 쪼개져서 십자가 앞에서 죄인 되는 자들은 또 남아 있고
이러한 일들이 우리는 한꺼번에 일시적으로 일어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일어난 경우는 오순절날 처음이고요. 보니까 거의 마지막입니다.
거의 이 쿵작 쿵작으로 일어나요. 쿵작 쿵작으로

지금도 오늘 아침에 동일하게 복음을 들었지만 그 은혜 속에 이쪽에 쿵이고, 이쪽은 올라와요.
어떤 사람이 복음을 들으면서 분노가 올라올 수도 있고요.
여러분의 마음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안 보이잖아요.
근데 우리는 상상하죠. 이 복음 앞에 모두가 다 죄인 되기를. 그건 자기 생각이고
그런 꿈들을 우리가 버려야 되는 겁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게 ’복음을 아니까 이러해야 될까‘라는 이 생각, 그건 자기 생각이잖아요.
주님은 그걸 원하지 않아요.
주님은 세리와 창기를 원하는데 자꾸 그걸 원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복음을 원하니까 목사님은 사랑이 넘쳐야 되지?
그 사랑이 뭘 원하는 겁니까? 저쪽에서
돈 없는 사람은 돈 내놔라는 거고
청소 요원이 필요하면 청소원을 요구하는 거고
말 상대가 없으면 들어줄 상대를 원하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진짜 복음을 알면 그걸 찔러버려야 돼요.
돈을 안 줘야 되고, 청소 안 해 줘야 되고요, 상대 안 해줘야 됩니다. 그게 사랑이에요.
근데 우리는 뭘 사랑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들어주고 이해해 주고 받아주고 이걸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런 모습도 사랑의 한 면모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게 사랑이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로 사랑을 보여줬잖아요.
그러면 모든 인간이 마귀새끼라는 얘기입니다. 그게 사랑이에요.
그 사랑을 우리가 덮어 쓴 거예요

그러면 모였을 때 서로 마귀라고 보시면 돼요. 마귀 새끼라고
그러면 ’왜 저러지?‘ 이런 말을 안 해요.
’아! 저런 사람도 이렇게 구원하셨구나. 저런 인간도 구원하셨구나.‘
그렇게 되면 윤 목사님이 말씀하신 그 사랑의 모습이 보여요.
’복음을 아는데 왜 돈을 요구하지. 복음을 아는데 왜 저 성질을 내지.’ 사랑이 안 나와요.
원래 그런 인간이었고, 원래 마귀새끼였고, 그러면 감사가 되고
그러면 이제 은혜가 넘치는 모임으로 드러나기를 바라지만
그것도 반짝이다가 맙니다

질문: 이제 그런 은혜를 입고, 용서를 받은 사람이
‘사실 저 사람이 참 저런 짓을 하는데 저 하나님이 이렇게 또 구원하셨구나’
여전히 또 바꿔지지 않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그러면 이제 이 사람 마음속에는 판단이나 정죄가 없잖아요?

답변: 정죄가 있죠.

질문: 주님을 찬양하잖아요.

답변: 근데 방금 또 정죄를 해버리잖아요.
그렇게 됐는데 다시 사람과 만나면 상황이 바뀌어버리면 지가 판단자가 돼요.

질문: 아니 금방 조금 전에 목사님 말씀하신 것처럼 그 사람이
‘저 사람이 저렇게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이렇게 은혜 안에 들어오게 되었고 구원 받았구나.‘
또 지금 어떤 모습을 보면서 그런 대로 이렇게 자꾸 이제 나가다 보면
우리 마음에 더 이상 이제 판단하지만 또 판단이 아니잖아요.
답변: 나가다 보면이 없어요.
우리는 안개 같은 인생이기 때문에 나간다는 게 아니라
안개 같은 인생, 하루살이를 이야기하면 하루 살이를 쪼개면 한 시간 살이고요.
한 시간 사리를 쪼개면 1분 살입니다. 1초 살이를 사는 거예요.
주께서 살려주는 식으로

근데 우리의 마음은 이걸 지속시키고 싶거든요. 지속
지속하시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근데 인간이 악마가 된 이상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하면
그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 그 은혜를 지속시키고 싶은 거예요. 계속해서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죠.
성령의 은사를 주니까 인간들은 은사를 지속시키려고 하죠. 자기속에서
방언을 지속시키려고 하고,
방언을 자기 고유한 권한으로 만들고 싶어 하잖아요. 이게 재밌죠.

질문: 그러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그런 말씀은 어떻게 연결을 시켜야 돼요?

답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은 ’주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라‘는 거예요.

질문: 결국은 지속으로 되는 거잖아요.
지속을 원하는 건 아니지만 그 생각은 지속이라는 걸 결과를 만들어내잖아요.

답변: 아니예요. 주님께서 그 말씀을 우리 가운데 이루어내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 지속이라고 보여질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런 걸 착각을 하죠. 인간들은
아! 어제보다는 오늘 더 이렇게 깊이를 생각해 보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구나‘
말씀을 묵상해 보니까, 그렇게 우리는 인식을 하죠.
그런데 복음이 들어와 버리면 그 과정 자체가 다 잘라져 있어요.
주님의 일하심 속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 말씀 자체도 그러면 오늘 주님이 영혼 데리고 가면 안 맞잖아요. 또. 논리 자체가
그래서 말씀 자체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이렇게 말씀이 들어오면
인간들은 이 말씀을 대할 때 주님의 말씀으로 대하지 않거든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말씀으로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그렇게 안 받아들이면
’깊이 생각해야 되겠구나‘ 이래 들어간다는 거예요. 논리가.
기존 교회가 다 그렇게 가르쳐 왔거든요.
그럼 깊이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는가 따져보는 거예요.
따져보면 주님이 빌립보서 2장에 나오듯이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그 하나님의 자리를 취하지 않고 낮아져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더라‘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본받아서 깊이 생각해서 그렇게 살자.
그래서? 뭘 자랑하겠다는 겁니까? 십자가가 안 나와요. 거기에서는.

’깊이 생각하라’는 말 자체가 벌써 뒤틀려 있죠.
그래서 제가 설교할 때마다 성경 말씀은 영의 말씀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육의 언어지만 영의 말씀으로 되어버리면
우리가 기본적으로 이해하는 방식과 전혀 정반대의 방식으로 말씀이 다가옵니다.

아까 전에 오늘 우리가 설교했던 레위기 11장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죠.
육으로 보게 되면 거룩하니까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인데
영으로 들어와버리면 십자가에서 다 죄인이 돼 버려요. 오히려
죄인 만들기 위한 율법이에요.

돼지고기 안 먹으면서 네가 거룩하게 하기 위한 율법이 아니고
돼지고기 먹는 죄인, 안 먹는 죄인.
왜냐하면 그는 말씀을 붙들고 있잖아요.
말씀 앞에 깨어지라고 말씀을 주셨는데 베드로는 말씀을 붙들고 있단 말이에요.

‘예수의 형상을 그리스도의 형상까지 닮아라 자라가라’ 이런 표현도 마찬가지죠.
성령 빼버리고 해석하면
‘예수님처럼 닮아가고 자라가라’ 이렇게 해석할 거 아니에요. 그게 교회 해석이잖아요.
그러면 그것이 성령에 의해서 주시는 말씀이 되면
그 말씀은 주님이 이루시는 말씀이고 그러면 그것은 성령의 일이 되죠.
그러면 거꾸로 해석해야 되죠.
‘우리는 그렇게 자라갈 수 없다’라고 해야 돼요. 반대로

그러면 주님의 일이 되면
‘주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죽음 속으로 몰아 가시는구나.
십자가 사건을 몰아가시구나. 아멘.’ 이렇게 나와야 되죠.
‘십자가의 완료성을 말씀하시기 위한 말씀이구나.’ 이래 들어와야 되는데.
그렇게 안 보잖아요. 안 보고 어떻게 봅니까?
말씀대로 보자는 겁니다. 말씀대로.
말씀대로 봤다가 주님께 얻어터진 자가 베드로거든요.

우리가 기존에 성경으로 보는 방식을 다 버려야 돼요. 안 버리면요. 말씀을 볼 수가 없어요.
버리라는 말은 죽을 때까지 버려라 이 얘기예요.
그럼 또 말장난 들어가면 ‘주님이 버리게 해야 버리죠.‘ 이렇게 나오는데 그거야 각자의 이야기고.
복음에 대한 말씀에 대한 해석 자체가 ’나는 틀렸다‘라고 생각하고 들어가야 돼요. 기본적으로

사랑도 마찬가지고, 평안도 마찬가지고.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 하거든요. ’나 복음 때문에 되게 편안하다‘
진짜 평안한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하면요? 매 맞는 모습이고요.
매 맞을 때 ’아야 아야‘ 하면서 그게 평안이에요.
그 굶주리면서 평안이에요
고난 당하면서 평안이고요.

왜냐하면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라 했잖아요.
그러면 사랑도 세상이 주는 사랑이 아니에요.
악마가 만들어낸 사랑, 악마가 만들어낸 용납,
악마가 만들어낸 인내. 악마가 만들어낸 서로 받아들임.
이것들은 다 아니라는 얘기예요 지금.
그런 것들로 이렇게 말씀을 좀 보셔야 되는데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는 그 어릴 때부터 체화된 게 있잖아요.
이성적으로 봐야 되고, 눈을 뜨고 말씀대로 봐야 되고
좀 더 공부하면 히브리 헬라어를 통해서 봐야 되고
자기 눈이 썩었는데 이미 소경인데

차라리 이렇게 보시는 게 제일 좋죠.
소경인데 우리는 자꾸 오해를 하죠. 난 소경이 아니라고.
오늘 사도행전 10장 할 때 그 얘기예요.
베드로는 이미 눈 떴기 때문에 더 이상 소경이 아니라고 우기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오신 일은 ’보는 자들은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한다’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계속 적용하는 겁니다. 계속

근데 윤 목사님의 질문은 이런 거잖아요?
눈을 뜨게 했으니까 이제 눈 뜬 상태로 계속 가야 된다는 논리고
주님의 일하심은 계속해서 눈을 뜨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를 계속해서 눈 감기게 만든다는 거거든요.
그렇지 아니하면 인간은 십자가를

질문: 제가 하는 질문 중에 한 가지가 이거예요.
눈을 떴잖아요. 그 눈이 지속적으로 이게 안 뜨일 때가 있단 말이에요?

답변: 안 돼요

질문: 그러면 그때 보고, 또 이제 그것을 본인 스스로도 성령받지 못한 게 아니냐?
왜냐하면 정 목사님이 성령받지 못했다는 말을 잘하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그런 말씀 듣지 않을까?

답변: 말씀들어야죠. 그렇게
‘나는 성령받지 못한 자고, 죄인이고, 지옥가도 마땅하고 맞구나.
아! 십자가 피 외에는 자랑할 게 없구나’ 이렇게 나와야 되는 거예요

질문: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왔다 갔다 하는 건 아니잖아요?

답변: 왔다 갔다 하죠. 왔다 갔다 하는데 왔다 갔다 안 하죠.

질문: 그러니까 성령이 역사하셨다가 또 성령이 역사 안하시면 이제 장님이 되는 거잖아요.

답변: 그게 내주하시는 증거입니다.

질문: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전제 하에서 그것이 그렇게 되어진다고 그말인가요?

답변: 그렇죠. 내주 하니까 십자가만 나오는 거예요.

질문: 그러면 알아들었어요.

답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재미있는 게 그거죠.
‘하나님께서 함께 한다’했거든요.
분명히 내려가서 함께해서 그들과 동행한다고 했는데 막상 가보면 깜빡깜빡거리잖아요.
‘동행하면 이럴 수 있느냐?‘ 그게 동행이에요.
그거는 나를 위한 동행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을 위한 동행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렇게 되면 주도권이 완전히 날아가 버리죠. 주도권이 우리에게 없어요.

방금 성령의 내주함도 두 가지 안목이 있죠.
내 주 하신다니까 ’나 구원받았네‘ 이렇게 들어가지만
내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요동치는 겁니다.
신나는 거예요. 요동치기 때문에.

그래서 말씀을 들어보면 다 아니에요.
아까 목사님 말씀하시피 ’너 성령 안 받았냐? 아 내가 이 복음을 모르느냐?
내가 이거 아니냐?‘ 신나는 일이죠.
저도 복음을 듣게 되면 마찬가지입니다.
은혜 아니면 안 돼요. 진짜
주님의 용서하심이 아니면, 그 피가 아니면 우리는 구원 못 얻습니다.
주님의 백성으로 못 살아요.

우리가 자꾸 확보하고 싶어 하는 거죠.
확실하게 갖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이게 문제인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아까 가르쳐줄 때
성령을 영접하면, 주님을 영접하면, 확신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꾸 알려주는 거죠.
좀 문제가 다 해결됐나요? 목사님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러할 것이라‘는 그 사고 방식이 깨어져야 돼요.
그게 우리가 꿈꾸는 천국입니다. 그게 꿈꾸는 교회상이고요.
교회의 꼬라지는요. 진짜 이 세리와 죄인의 모습을 드러내야 돼요.
심지어는 교회다운 교회는 아시아 일곱 교회죠? 없애버립니다
목사님의 논리에 의하면 그런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로서 영원히 지속하게 흘러가야 되는데
아니잖아요.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고요.

지금도 고린도에 가보면 그리스 고린도에 가보면
원래 고린도 교회가 있던 지역은 지진 나가지고 없거든요.
그래서 그 지역에 있는 예배당 건물을 그 당시의 교회가 아니고
건물을 옆에 지진 안 나는 동네에 가서 지어놓고 1대 목사부터 다 그 벽에 써놨거든요.
1대 목사가 바울, 그다음 아볼로 해가지고 쭉 가보셨죠? 윤 목사님. 여행 많이 다니시니까
여행 가더라도 그런 데 좀 가보세요. 좋아요.
혹시 코로나 없어지면 여행 가고 싶으면 그런 데 가면 하여튼 볼 게 많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좀 알고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겁니다.
그걸 보면서 ’야! 진짜 교회는 없어지는 교회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죠.
그걸 보면서, 그 유적지 가서 진짜 교회는 없어지는 교회구나.
그 아시아 일곱 교회, 그 터키 가서 한번 돌아보면 사실은 원래는 일곱개 그게 아니잖아요. 건물 자체가. 집에서 모였으니까, 그 당시에는.
그 이후에 이제 이제 권력을 잡으니까 예배당 건물을 지었는데
그게 나중에 이제 이슬람권으로 넘어가니까 사원이 되고
하여튼 뭐 신전도 되어 버리고 별것으로 다 바꿔버리거든요.
그거 거기에 가서 사람들이 기도합니다.
주여! 이렇게 하거든요. 거기 가면
기도하면 기도하는 것까지는 괜찮아요. 뭐 할 수도 있는데.

’교회라는 것은 피만을 남기기 위해서 만들어진 교회이기 때문에
이렇게 없어져야 되는구나. 폐허가 돼야 되는구나.‘
’정말 주님의 교회는 주님이 이루신 교회는 교회답구나. 말씀대로 되어지는구나‘
이렇게 우리가 봐야 되는 거거든요

목사도 마찬가지죠.
설교를 할 때 설교를 통해서 자기가 박살나는 겁니다.
여러분이 듣기에는 목사가 지가 복음을 아니까 가르치는듯이, 그건 어쩔 수 없어요.
그렇게밖에 할 수 밖에 없잖아요. 인간이라는 자체가 표현 방식이.

그런데 그 복음 자체가 먼저 설교자를 박살내버리죠.
그 내부적인 박살, 외부적인 박살.
그리고 이것이 저쪽에서 박살 안 나면 갈라서게 되고요.
이게 이게 복음의 능력이거든요.

베드로부터 먼저 깨고 시작하잖아요. 말씀이 재미있잖아요. 그죠?
베드로부터 먼저 깨고 고넬료에게 가거든요. 고넬료가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베드로가 성령받았는데 여전히 누구의 자리에 딱 앉아 있는가 하면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사울의 자리‘에 딱 앉아 있는 거예요.
이런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아! 이게 초기여서 그렇다.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초기여서 그런 게 아니고 이게 계속돼요. 죽을 때까지 이렇게 돼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얘기한 겁니다.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이게 주님이 찾아오지 않는다면요. 몰라요.
찾아오지 않는다면 찾아오지 않으면 ’자기는 이게 옳다‘라고 생각하고
이것이 성령받은 자의 마땅한 삶이라고 우기겠죠.

그러니까 주님이 가만 안 두죠.
주님이 베드로와 동행을 하니까 멱살 잡고 끌고 가는 겁니다.
알려주고 ’알아서 가!‘가 아니라,
알려주기도 하시고요. 끌고 가죠. 어떻게 끌고 갑니까? 사람을 보냈잖아요.
이 보냄 받은 사람들은 성령이 보낸 분이에요.
성령께서 이 베드로를 끌고 가는 거예요. 가서까지 모든 작업을 다 해버리죠.
그럼 너 할 일이 뭐냐? 할 일 없어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그 말씀의 이루심만 보여주는 베드로가 되는 겁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고요.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아무튼 유익한 질문이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기도하고, 다른 분들도 다 유익한 것 같고요.
목사님이 질문을 하시면 감사하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날마다 저희들을 인도하시고
주님의 죽으심만을 담대히 증거하는 자랑하는 주의 백성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corded by 구 성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