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4-27 20:51
20220427 수요모임 마 8:23-27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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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2-04-28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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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7 수요모임 주여 구원 하소서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의 이름으로 모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살아있는 말씀 앞에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시고
주님의 죽으심을 깊이 알아가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8장 23절에서 27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8:23~27)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산상설교를 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부르신 제자들은 마태복음에서는 그 인물이 네 명이 등장하죠.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그 내용이 4장 18절에서 22절에 나옵니다.
(마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마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4: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마4: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마4: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지금 마태복음 여기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탄 인물들이 ‘열두 제자다’ 이렇게 확정할 수 있을 수도 있고요.

그런데 이 성경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런 식으로 기록이 안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위해서 기록되어 있거든요.
우리들이 이 말씀을 보면서 분석하고
‘정확하게 이 배에 탄 자들이 누구일 거다.’ 이렇게 접근할 수가 없어요.
제자들조차도 비록 열두 제자지만 온 인류를 대표하는 자들이거든요.

지금 배에 오르셨죠. 우리 성경은 이렇게 단락단락을 나누어 놨습니다. 지금
여러분 성경도 그렇게 되어 있나요? 동그라미 쳐서 나눠 있으니까
어떤 경우에는 성경을 읽을 때 이게 걸림돌이 돼요.
왜 걸림돌이 되느냐?라고 할 때는 우리들은 이 단락을 나누어 놓으면
‘아 이것과 저것은 다르구나’ 이렇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배에 오르시기 전에 이 배에 올랐다고 할 때
그 전에 18절에 예수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 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셨죠.
(마8: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 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이 표현도 참 이렇게 재밌는 표현입니다.
권유하는 것도 아니고 갈까요?도 아니고 명령이죠.
저 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셨습니다.

그들이 누구냐?라고 할 때는 여기에 보면 누군지가 정확하게 나오지 않아요. 대상자가
예를 들어 열두 제자에게 ‘건너가자’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면
열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 나설 수도 있는 건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명령을 하셨을 때는 이 산상설교에서 이어지는 연속이죠.
예수님을 계속해서 따르는 무리들,
그 무리들이 지금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명을 하신 겁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할 자가 있느냐?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건너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한 서기관은 대표자죠. 일종의, 그 무리들의 대표자.
예수님께서 명하신 그 무리들의 대표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쫓겠습니다’라고 이렇게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나섭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어디든지 따라 나서겠다’라는 이 서기관,
이 서기관은 구약 율법이 탄탄하게 그를 받치고 있는 사람이고 약속이 받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느냐?라고 할 때는 메시야로 보는 겁니다.
메시야로 본다면 예수님이 가시는 그 곳이 어떠한 곳이냐?라는 것은 확정적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다윗 왕으로 세워지시는 분이거든요.

우리들은 마태복음 1장부터 그 족보를 보면서 제가 처음 시작할 때 여러분들이 아무도 안 계셨네요.
지금 보니까, 우리 심권사님이 계셨는가? 모르겠네.
시작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고 지금 이후에 합류한 분들만 거기 계시는데
족보를 말씀드릴 때 아브라함과의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 했을 때
아브라함도 날아가고 다윗도 날아갑니다.
모든 것들이 날아가죠. 그것이 부정되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 마태복음을 읽을 때는
자기를 여기에서 이 마지막 자리죠.
자기를 출발선에 두고 그 족보를 타고 올라가는 거예요.
성경을 읽을 때 다 그렇게 올라가거든요.
‘나는 아니오’로 시작해서 족보를 봐야 되는데 ‘나는 이오‘부터 시작해서 족보를 보거든요.
이 서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씀, 자기보다는 수준이 훨씬 높죠. 서기관과 같지 않다. 했으니까
우리가 볼 때는 성경을 자꾸 읽었으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이 뭐 별 거 없네’ 이렇게 들어가는데
서기관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기보다 훨씬 권세 있는 자와 같다.
레벨이 한 단계 위라는 거죠.
한 단계 위라는 것은 랍비보다 더 높은 수준이다. 이렇게 볼 수 있고요.
물론 선생님이라고 호칭을 했지만 아직까지 불확실하거든요.
나중에는 확정적이 됩니다.

더 확실한 증거를 따라다니면서 찾아내고 뽑아낸다면 진정으로 메시야를 믿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뭐 주석이나 설교를 보면 선생이라고 부른 부분에 대해서 되게 부정적으로 보거든요.
부정적으로 봐도 되고요 긍정적으로 봐도 됩니다.
주님에 의해서 삼킴을 당하게 되면 선생님으로 부르든 반대로 주님으로 부르든 똑같아요. 이게
주님으로 불렀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이미 앞서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해도
‘도무지 너를 창세 전부터 모른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예수님은
어쨌든 이 서기관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그냥 선생님은 아니겠죠.
랍비, 뭐 그 당시에 뭐 힐렐이나 가말리엘 이쪽 계열이라든가
그 사람보다 그 사람 정도 그거보다 더 높은 차원 메시야.

명령을 내리시니까 따라가겠다는 거예요.
이미 그는 그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는 그 자리가 어떠한 자리니 확실하거든요.
여기에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에 둘 곳이 없다 하시니라‘
(마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이게 말이 안 되거든요.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옵니다. 다니엘서 7장에 보면
구름을 타고 오시는 분이 통치하거든요. 전 세계를 통치합니다.
전 세계를 통치하는 분이 머리 둘 곳 없다. 어떻습니까?
서기관이 생각하는 예수님을 따라가게 되면 그 마지막 종착지점이 머리 둘 곳 없는 곳이냐? 아니죠. 머리 둘 곳 있죠.
있는 정도가 아니라 헤롯왕이 거하는 그 왕궁보다 더 휘황찬란하고 안락한 왕궁이 있는 거예요.
거기에 자신들은 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예수님 말씀은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시고 그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그를 따라오지 못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쳐내버리죠. 성경에는 ’쳐냈다‘라고 안 나오지만 쳐내버립니다.
쳐냄을 당한 자가 있고 따르는 자가 있거든요. 오늘 본문은 따르는 잔데
두 번째 이제 인물은 제자 중이라 이렇게 표현하죠.

(마8:21) 제자 중 또 하나가~

또 하나라고 표현했으니까 서기관도 제자 속에 들어갈 수도 있거든요.
요한복음을 보면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다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이

(마8:21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소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쫓아라‘.
지금 이 제자가 생각하는 예수님이 만드시는 그 세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했을 때
그 혈통 체계가 고스란히 유지되는 세계예요.

성경에 보면 가족 관계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것은 언약의 자손들이 생산되어지고 하나님의 약속이 머무는 곳입니다.
그러하다면 이 사람이 부진을 장사하고
우리가 볼 때는 뭐 수준 낮게 장사하고 따른다. 이렇게 이야기 하느냐라고 하지만
이 장사하는 것도 언약의 바탕을 둔 장사가 되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람이 죽으면 어디에 묻습니까?
요즘 이스라엘 땅에 가면 어디에 묘지가 많아요. 감람산에 가득하거든요.
혹시 아세요?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와요.
거기에 스가랴에 메시야가 임한다고 하니까 올 때 다 부활한다는 겁니다.
아마 한국 사람도 정신 나간 사람들은
거기에 돈을 주고 묘지를 묘자리를 차지한 사람도 있을 거예요. 아마
안 그러면 유언을 해가지고 주님이 거기 오시니까 이 가루를 만들어가고 몰래 가서 뿌려달라

여러분이 잘 아시는 아브라함의 그 죽음과 그의 무덤 막벨라 굴이죠.
그다음 요셉의 유언도 있고 야곱의 유언도 있잖아요.
그 모든 것들이 약속을 따라서 장례를 지낸 거거든요.
그러니 우리 이방인들이 이 말씀을 읽을 때
그냥 아버지를 먼저 장사 지내고 이렇게 주님을 따른다. 단순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나름대로 이 사람은 그 언약 체계 안에서 부모를 공경할 것은 공경하고
그 공경이라는 것은 언약 약속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메시야로 오시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부모 공경이나 이 모든 체계들이 무너지지 않고
고스란히 더 견고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근데 예수님이 나중에 나오지만 가정을 무너뜨려버리거든요.
그들이 생각하는 그 혈통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그 유다 민족들 다윗의 후손들이죠.
그들 전체를 무너뜨려지는 정도가 아니라 없애버립니다.

제가 어제 레위기 설교할 때 어제 그저께 말씀을 전할 때 그런 표현을 했죠.
그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시스템이 만들어졌다고 했습니다.
그게 성막이고 그 성막 안에는 제사장이 있고
그 제사장과 함께 희생물이 있고 동시에 희생물이 있다는 것은 죄인도 있죠.
뭐 표현하면 네 가지 요소 정도가 된다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작동을 할 때 하나님이 동행을 합니다.

그러면 그러면 동행하는 조건은 뭐냐? 할 때는 그 전체를 불살라 버릴 때 동행이 가능하거든요.
그런데 만일에 이 요소들 중에 문제가 발생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하실까요? 안 할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만일에 이런 어떤 성막이라든가 제사장이라든가 그 희생물이라든가
이러한 요소들이 문제가 생기면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기 위해서
성전을 새로 지으려고 할 거고, 보수하려고 할 거고요. 그게 나오거든요. 열왕기하 쪽에 가면

예수님 당시에는 제사장이 완전히 이렇게 무너졌으니까
돈 주고라도 권력층이 해서라도 억지로 끼어 맞췄거든요.
그래야 약속된 메시야가 오시면 그 메시야 왕국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그들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동행을 원합니다.
왜 동행을 원하느냐?라고 할 때는 하나님이 동행을 하셔야 약속이 이루어지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방식은 문제가 생기면 문제 생긴 것을 제거시켜 버립니다.
성전이 문제 생기면 성전을 불살라버리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제가 생기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켜버립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오셔서 세우시는 나라는 이스라엘 자체를 완전히 불살라버립니다.
심판해버리는 거예요. 우리의 눈에는 불살라지지 않죠.

그 불살라짐이 베드로후서에 나오지 않아요.
’불태우기 위해서 간수한 바 되었다.‘
그 불심판 속에 지옥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지금 간수된 거예요.
약간 뭐랄까요. 시간적으로 표현하면 늦어졌을 뿐이지 그건 늦어짐이 늦어졌다고 안 오는 겁니까?

그 인간들의 착각이 그런 거잖아요. 다 죽잖아요. 가깝죠. 죽을 날이
누가 제일 가깝습니까? 나이로는 따질 수 없지만 제가 먼저 갈 수도 있고요.
우리 김기대 집사님이 제일 젊으신 것 같은데 먼저 갈 수도 있는 거고
그 옆에 있는 은우가 먼저 갈 수도 있고요.
아 이렇게 이야기하면 되게 기분 나쁠 수 있는데 뭐 성도는 기분 나쁜 게 어딨습니까?
지금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 세상을 불심판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 심판 속에서 구원 얻는 게 중요한 거지, 좀 더 산다고 그것이 축복은 아니죠.
성도를 살리는 이유는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이 사람의 착각이 메시야 왕국이, 당신이 세우고자 하는 그 나라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이 고스란히 유지되면서 자기들의 입장이죠.
그 유지되려면 혈통 자체 가족관계가 다 유지되어야 되거든요.
열두 지파 자체가 다 혈통관계잖아요.
그들은 그런 어떤 관계가 계속 유지될 거라 예상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우시는 나라는 그 모든 것들을
’죽은 자에게 죽은 자를 장사하고‘ 이 선언 자체가 이미 그들 모두는 죽은 자예요.
그러면 너는 죽은 자냐? 산자냐?를 물으시는 겁니다.
네가 살았다면 나를 쫓아야 되고 네가 죽었다면 장사하러 가라는 겁니다.
이런 말씀들이 우리에게 고스란히 다가오거든요.

우리가 모든 것을 여기 보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하면 예수님이 탁 쳐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알아서 먼저 기죠. ’어디든지 안 가겠습니다.‘
’머리 둘 것 없으니까 저는 제 거 다 챙기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해도 쳐내버립니다.
인간들의 잔머리는요 이미 주님이 다 알고 계세요.

말씀 앞에 ’저주받다 마땅하고 지옥과도 마땅하다‘ 그러면서 십자가 앞에서 감사함이 나와야 되는데
계속해서 뭔가 답을 찾아내고 옳음을 찾아내려고 하는 거예요.
네가 죽은 자냐? 산자냐? 이 얘기입니다.

그러면 자 여러분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아까 서기관이 있고 한 제자가 있잖아요.
여러분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말겠습니까?
자 안 따랐으니까 명령을 안 따랐으니까 배를 타고 건너가자는 게 단순히 건너가자는 게 아니에요.
명령이라는 자체가 예수님의 활동성 안에 이미 다 포함돼 있기 때문에
그 건너감은 모든 것을 버림과 관련시킵니다. 예수님은

일차적으로 탈락해버리죠. 이들은
어느 누가 부모가 지금 오늘 밤 숨이 넘어가는데
그 죽은 자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죽은 자거든요.
성도도 죽은 자 아닙니까? 죽은 성도와 저 죽은 자가 달라요.
이런 말씀을 전하면 참 뭐라 할까요? 강철판에 대고 말씀을 전하는 것 같거든요.
우리의 체계 자체가 이런 말씀들이 안 먹혀가는 체계거든요.

’목사님, 부모님 안 믿더라도 장례식 지내고 말씀 듣죠.‘
말씀의 위력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못하는 겁니다.
말씀이라는 자체가 그런 태도 자체를 보면
이미 그가 누구를 사랑하고 어느 세계 속에 속해 있는지가 드러나잖아요.
’목사님 제가 이 세상에 속했으니까 죄인임을 압니다.‘
성령께서 죄인임을 깨닫게 해줘야 되는데 자기가 다 처리해요. 자기가
그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선악을 아는 지식이 들어왔기 때문에 자기가 심판주가 된 거예요.

우리도요 말씀을 계속 듣게 되면요. 이런 논리 속에 다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도 똑같아요. 좀 말씀을 더 배우면 다 이런 논리예요. 다
대화를 할 수가 없어요. 대화를

대화가 왜 안 되는가? 하면 이 뫼비우스의 띠처럼요 끊임없이 이렇게 가거든요.
십자가 앞에서 이렇게 잘라져야 되거든요. 십자가 사건 앞에서
잘라져 버리면 죄인이 되는데 잘라지지 못하는 겁니다.

가정을 완전히 깨버립니다.
아버지, ’내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 공경할 부모가 어디 있어요? 없는데 지금
이 사람은 부모를 공경하는 차원에서 율법을 지키는 차원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차원에서 장례 지내고 가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부모가 어디 있느냐?는 거예요. 죽은 자인데

그런데 이걸 어떻게 알아듣겠어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금 우리들도 지금 알아듣는 자체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상한 나라 엘리스거든요.
지금 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지금
옆에 있는 살아있는 자녀에게 ’너 죽은 자야‘ 한번 얘기해 보세요.
’엄마 미쳤어. 십자가 새언약 교회에 가더만 이상한 소리하네‘ 이런 상황입니다.

자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세워놓으신 이 장애물들이 있죠.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 이 장애물 상당히 높아요. 맞죠.
목사가 된다는 것은 앞날이 없는 거거든요. 원래
그런데 이게 어느 순간부터 뭐 처음부터 그랬죠. 복음이 아니었으니까
‘아 머리 둘 곳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목사를 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얘긴가? 하면 머리 둘 곳이라는 의미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설교를 하면 듣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듣는 사람이 있으면
뭔가 나를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고 대우받는 그러한 것이 있지 않을까? 망상을 하는 거예요. 망상
근데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다‘라고 하시면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했어요.
이게 첫 번째 장애물이었고

두 번째 장애물이 ’죽은 자들로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라‘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가족관계를 다 끊기 위해서 믿습니까?
친구관계를 다 단절하기 위해서 믿습니까?
아마 오늘날 일반 교회에 가서 이런 설교를 하면 자리에 벌떡 일어나서 나갈 거예요.
그런 소리는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교회도 똑같거든요.
그거는 가정이고 뭐고 다 내 팽게치고 교회 가서 살아 버려요. 아예
혹시 아세요. 아는 분들 중에 그런 사람 있죠. 그런 사람만 한다고 생각해요.
참 이게 아이러니죠.

더 재밌는 것은 진짜 복음이 그런 의미를 담고 있거든요.
그러면 그런 의미를 담고 복음을 전하면요. ’너 이단 아니냐‘ 이렇게 얘기해요. 거꾸로
주님께서 복음을 못 듣게 하는 방식이 너무나 놀라워요.

신천지가 교회를 휘저으니까 아예 다른 이 교회 쪽 사람들 말씀도 못 듣게 하고 막아버리잖아요.
그럼 누가 그렇게 해요? 마귀가 그렇게 하죠. 물론 배후의 주님이 계시고
주님이 자기 백성 아닌 자는 거짓 것을 믿게 해야 되니까
복음을 못 듣게 해야 되니까 막아버리는 겁니다. 아예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고 나를 쫓아라‘ 성경에서는 나를 쫓으라고 먼저죠.
아 목사님 그럴 사람이 어딨습니까? 우리 이런 질문을 하죠.
그럴 사람 여기 있어요. 오늘 본문에. 배 타고 갔잖아요.

그래서 제가 아까 단락을 나누는 것이
오히려 우리가 성경을 읽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라는 표현을 한 거예요.
이 배 타고 간 사람들은 이 장애물을 다 넘겼어요.
’머리 둘 곳 없어도 따라가겠습니다.‘ 신념이 대단하죠.
그다음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사하라‘는 ’말씀도 따르겠습니다.‘

베드로가 이야기하잖아요. ’주여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습니다‘ 라고 하잖아요.
그게 헛말입니까? 진심이에요.
진심인데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쫓은 그 사람의 목적이 어디 있느냐?라는 겁니다.
주님과 함께 따라가면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했는데
’그거는 견디겠습니다‘라고 갔거든요. 가족들을 다 버리고 따라갔는데

갑자기 이 바다에서 갈릴리 바다가 폭풍이 몰아치죠. 큰 놀이 일었습니다.
’머리 둘 곳 없다‘는 것은 죽는다는 겁니까? 죽지 않는다는 겁니까? 이 해석을 한번 해봅시다.
머리 둘 것 없다는 말은 그래도 살 수 있지 않느냐?
죽음이라는 것을 염두에 안 두죠.
그다음 계산은 그래 그걸 견디면 그다음 뭐가 오죠? ’보상이 올 것이다.‘
지금 그것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명령을 들은 겁니다.

그러니 이 짧은 본문 속에 인간들로부터 나올 수 있는 모든 행위들이 다 나와요.
’난 안 가겠다. 그리고 난 가겠다.‘ 이 모든 요소들이 다 나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요소들을 주님이 다 잘라버리죠.

다음 주에 보겠지만 다 귀신들렸어요.
귀신들 들린 자의 특징은 뭐예요? 온 우주가 나 중심이죠. 23절 봅시다.

(마8: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나오죠. 명령을 듣고
’머리 둘 곳 없다‘는 말씀도 듣고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말씀도 듣고 쫓았어요.
이 정도 하면 제자답지 않습니까? 이 정도 하면 천국 백성에 부합하지 않나요?

지금 예수님께서 이런 어떤 사람들을 통하여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그 내용은
이 세상에는 천국 백성이 될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라는 얘기예요.
그래서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쫓은 그 제자들이죠.
말이 제자지 자기 탐욕이 가득한 겁니다.

큰 놀이이니까 물결이 배에 덮히게 되었으니까 이들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바다가 두려운 줄 아시죠. 물론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시고
이런 내용을 보면 우리가 이해가 잘 안 되죠.

일전에 저도 그 어디입니까? 배를 타고 통영인가 거기서 제주도를 갔는데
큰 파도 타기 전에 멀미약 먹고 가는데요. 멀미약에 취해서 자고 일어나니까 도착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두렵고 두려운 것보다 멀미가 더 무서웠어요.
뭐 배가 뒤집히지 이건 별거 아닌데

예수님이 멀미약 드셔서 주무신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상상해도요 이것을 파악이 안 돼요.
주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 주무시는 것이 아무리 요란해도 어떻게 주무셨을 거야.
이걸 우리가 뽑아내지를 못해요. 배가 그렇게 큰 배는 아니잖아요. 고기 배니까
그렇게 요란 치면 어떻게 거기서 주무세요.

그게 가능한 이유가 ’파도야 잔잔하라‘ 이 잔잔하다는 말씀을 정반대로 해석하면 어떻습니까?
아무리 파도가 치고 바람이 세게 불어도
주님 쪽에서는 바람이 안 붐. 파도 안 침. 이거예요.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못하거든요.
’그것을 이겼다. 견뎠다 뭔가 뚫고 나갔다.’ 이런 의식밖에 못해요.
자기들이 생각하는 차원에서 생각만 하기 때문에 그러죠.
주님 쪽에서는 바람이 불어도 부는 게 아니고 파도가 쳐도 파도가 치는 게 아니죠.
제자들 입장에서는 파도가 파도고 큰 놀이 큰 놀이죠.

이들이 베드로나 뭐 안드레 야고보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배 사람들이잖아요.
바다 쪽에서 이렇게 고기를 잡고 사는 그런 사람들인데 이 바다를 얼마나 잘 알겠어요.
갈릴리 주변이니까 그러면 이 상황은 어떻게 되는 상황입니까?
이 죽는 것이 당연한 그런 상황이죠. 이런 상황에서

(마8:25)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바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유명한 본문이잖아요.
그러면 한번 봅시다. 한 서기관을 날려버렸죠. 그다음 제자를 날려버렸죠.
그들이 왜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까? 지금 따랐다. 안 따랐다. 없지만
따랐다라는 것은 이 부류고요. 따르지 못했다는 분은 저 부류예요.
이 두 가지 요소가 공존하기 때문에

왜 못 따랐습니까? 살기 위해서 안 따르죠. 살기 위해서
그러면 이들은 지금 그런 것 정도는 마땅히 버리고
여러분 가족을 버린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여러분이 아셔야 되는 게 뭐인가? 하면요.
가족을 버리라고 할 때는 사랑하는 가족을 버려요.
미워하는 가족은 버리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 다 버립니다.
돈 없고 맨날 와서 돈 빌려달라 그런 형제 만나고 싶습니까?
여러분 그런 형제들 많잖아요. 주변에. 여러분 세대 같으면 또 많이 보셨을 건데

보고 싶겠어요? 만일에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라’ 이렇게 했을 때
‘안 그래도 예수님 저 아버지 꼴도 보기 싫었는데 빨리 죽기를 소원했는데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런 인간들도 여기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말씀 안에

그 정도로 어쨌든 지금 이 말씀의 장벽이라고 할까요.
장애물을 뛰어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는데
문제는 진짜 죽음에 직면했을 때 예수님을 왜 따랐는지? 그 본색이 나와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마8:25) ~주여 구원하소서

이게 본색이에요. 이게 되게 좋은 말인 것 같죠. 이 구원이 무슨 구원입니까?
물론 예수님은 이 과정을 통하여서 인간의 악마성을 고스란히 드러내시면서
참 구원의 의미가 뭔가를 보여주고 계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들어가기 전에 이들이 죽어가는 입장에서 ‘구원하소서’
그 구원해봤자 뭡니까? 또 죽어요.

예수님은 죽으러 오셨거든요.
그 죽음 안에 모든 심판을 다 담으시고 그 심판 안에 구원을 창조하시거든요.
그런데 구약에 근거한 메시야는 이사야 53장을 읽어봤지만
그 말씀이 속건 제물되시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고 있다라고 어느 누가 생각을 하고 예상을 하겠습니까? 예측 불가예요.

폭풍이 확 몰아치니까 ‘주여 구원하소서’
이 장면과 사도 바울이 로마로 잡혀갈 때 광풍이 유라굴라입니까? 광풍이 몰아칠 때
사도 바울이라고 ‘죽으면 죽으리라’ 이래 간 거 아니에요.
주께서 먼저 개입하거든요.

‘죽으면 죽으리라’ 지금 이 여기까지 나와버리면 인간은 어디까지 접근하는가? 하면요.
강풍이 몰아치고 거센 파도가 일어나면 제자들은 ‘주여 구원하소서’라고 했지만
‘저는 주님께 죽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인간은요 말씀을 따라잡아서 자기가 구원 얻고자 하는 그런 어떤 악마성을 끝없이 펼쳐내요.
무한대입니다. 무한대

어디까지 따라올까요? 이 십자가 복음까지 따라옵니다.
‘내 복음을 알죠. 복음을 전했죠.’
그러니까 그다음 뭐예요? 죽어라 이야기인데, 살 수 있죠.
‘살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마8:25) ~주여 구원하소서 죽겠나이다

그래 바로 그게 너희들이다.
‘너희들이 봐라. 왜 지금 이걸 요구하느냐? 나에게’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셨잖아요. 맞죠? 문둥병자를 고쳤었잖아요.
그리고 모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도 고치셨고 많은 귀신 들린 자를 쫓아냈잖아요.
능력이 있잖아요.
그 능력이 있는 분이라면 이 위급한 상황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라고 확신한 겁니다.
이것보다 더 큰 믿음은 어디 있을까요?

이들이 지금 한번 찔러보는 겁니까? 예수님께
예수님께 찔러보는 겁니까? 여러분 이 정도 상황이면 찔러 볼 수가 없어요.
확실한 믿음을 보이는 겁니다. ‘죽겠나이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믿을 분은 당신밖에 없다는 거예요.
이게 믿음입니까? 이렇게 했으면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세요?

(마8:26)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지금 믿음을 보였잖아요.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믿음을 보였잖아요.
근데 예수님이 뭐라 합니까?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무서워하느냐’
그럼 뭘 무서워합니까? 죽기를 무서워하죠.
왜 죽기를 무서워합니까? 악마의 종이 되었기 때문이예요.

악마의 종은 자기는 죽으면 안 돼요.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왜 살아야 되느냐? 말씀의 대적자죠.
‘정녕 죽으리라’ 하면 죽으면 되는데 죽기를 싫어하고요. 죽기를 무서워하죠.
지금 이들은 누구와 동행하고 있어요?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죠.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예수님과 동행하는 그 세계는 십자가 안입니다.
십자가 안의 세계는 살아도 괜찮고 죽어도 괜찮아요.
아니 목사님 어떻게 거기까지 들어갈 수 있습니까?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거기까지 못 가죠.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안의 세계가 어떠한 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서서 나왔잖아요.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했다.
인간의 연약함이 뭐예요? 뭘 담당했어요.
인간이 마귀의 종으로서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쫄쫄쫄쫄 돌아다녔잖아요.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셨거든요.

예수님이 병 고치고 귀신 쫓아내는 그러한 일들이 아니면
산상설교로 말씀하는 그러한 일들이 그러한 내용들이
십자가를 증거하고 있다라고 누가 믿겠습니까?
창세기가 십자가를 증거한다고 누가 생각하겠어요?
‘십자가와 창세기’ 책 제목을 그렇게 이름을 냈는데, 그렇게 생각을 못하죠.

이 제자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을 때 백지가 아니라
그들은 철저하게 구약 성경에 근거하여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고
마치 이 상황은 어떤 상황이냐?라고 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가면서 물이 없을 때 목말라 죽겠다라고 원망하는
거기에는 원망이지만 여기에는 기도죠. 그거나 그거나 똑같습니다. 지금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 죽음의 위기에서 우리를 구원하라’는 얘기예요. 지금

지금은요 지금 파도가 치고 이러니까 죽게 되니까 지금 그런 걸 따질 경황이 없잖아요.
당장 죽을 것 같으니까
그런데 좀 이렇게 시간이 있다. 쳐보세요.
병에 걸렸다든가 뭔가 이렇게 약간의 여유가 있으면
‘당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 인생을 어떻게 이렇게 살게 할 수 있느냐?’
‘진짜 생명이라면 내 인생을 이렇게 펼쳐내면 안 되지 않느냐?’
그 말이 나온다는 것은 아직까지 덜 다급하다는 거거든요.
근데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태도를 갖고 있는 겁니다.

‘받은 은혜가 내게 족하다‘
그러면 또 사람들은 ’목사님 받은 은혜가 내게 족하다‘ 했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되죠? 우리 그런 마음 안 돼요. 바울과 똑같아요.
바울은 3번 기도했지만 우리는 3번 합니까? 30번 300분 3천 번 하죠.
세 번은 상징적입니다. 그것도 흉내 내려고 또 세 번 하려고 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가 늘 원망이죠.
지금 이들의 태도는 꼭 누구를 닮았느냐? 할 때는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마귀입니다.
지금 마귀가 어떤 태도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접근하고 예수님을 따르는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떠나갔잖아요.
떠나가서 어디 갔을까요? 예수님이 가는 곳에 딱 붙어 있어요. 가시는 곳마다
성경이 그래서 재미있는 겁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떠나갔더라 하니까
’아 더 이상 예수님과 마귀하고 관련 없네‘ 이렇게 우리는 생각하는데
그 떠나가는 그 마귀가 예수님이 가시는 곳곳마다 그 사람들 인물들이 있죠.
그 인물들 속에서 열심히 활동을 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에서는 조금 전에 본 한 서기관이라든가 아니면 한 제자라든가
지금 배를 타고 예수님의 명령을 쫓는 이들이죠.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님 말씀은 이러한 자들은 이미 앞서서 뭐라 했습니까? 죽은 자들이잖아요.
죽은 자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느냐?라고 할 때는 죽는 걸 두려워해요.
그러니까 놀랍게도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죽은 자들‘이라고 표현하거든요.
똑같은 표현이에요.

왜 이게 똑같으냐?라고 할 때는 마귀는 흉내쟁이거든요.
똑같이 죽은 자들인데 물론 예수님의 표현이지만
성도들은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죽음 속으로 살려간다라고 표현할 수 있고요.
지금 이 제자들은 산상설교로 무장했죠. 쉽게 말하면 말씀으로 무장하고
그다음 사람이 말씀만 있으면 안 되죠.

그다음 뭘로 해야 돼요? 체험을 해야 되죠.
같이 체험을 했잖아요. 눈으로 목격을 했잖아요.
그것도 안 되죠. 진짜 몸으로 체험하죠. 이제는 본인이
체험한다고 됩니까? 그렇게 해서 될 것 같으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이유가 없고요.
성령을 보내주실 이유가 없어요.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다 바꾸는 게 아니에요.
성령이 오셔서 우리와 동행하는 겁니다.

내가 있고 내 안에 주님이 따로 계시잖아요.
우리는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나가 다 바뀌어서 괜찮은 나로 변한다라고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근데 성경은 정반대입니다. 왜냐면 인간들은 그걸 꿈꾸거든요.
’하나님이 신이 임하면 내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그것을 누가 가장 잘 보여줍니까? 사울 왕이 잘 보여주거든요.

(마8:26)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표현이 적은 자들이지만, 믿음이 없는 자들이죠.
그럼 도대체 무슨 믿음이냐?라고 질문에 들어가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잖아요.
주님과 함께 있으면 죽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어야죠.
믿고 있어도 안 되고요. 죽어도 괜찮다고도 안 돼요. 지금 이 본문에서는
악마의 안목, 악마가 생각하는 그 안목을
지금 예수님께서 그대로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이 사건 속에서

’저 편으로 건너가자’라는 이 말씀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서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이 경험을 했으면 이제 제자들이 어떤 태도를 취할까요?
‘믿으면 어떤 위험과 환란과 그 핍박 속에서도 주님이 구원할 거야’ 이 생각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정도 체험해버리면
그래서 조금만 참으세요. 힘드시지만 일하시고 오시는데 힘드시지만

(마8:26하)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정말 재미있는 표현이죠.
마치 바람과 바다가 인격체처럼 말을 들어요. 그런데 사실은 창세기에 다 나오죠
시키는 대로 만들어졌고 시키는 대로 움직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누구를 위해서 누구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습니까?
십자가 지신 주님으로 인하여 만들어졌고 그 십자가 지신 주님을 위하여 만들어졌죠.
그러면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꾸짖게 하시는 이분은 누굽니까? 십자가 지신 주님이죠.
근데 제자들이 이 배에 탄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졌거든요. 그러자

(마8: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번역이 참 이렇게 확 와닿습니까? 안 와닿습니까?
‘기이히 여겼다.’ 이상하게 여겼다.
이것은 이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데요.
지금 여기에서는 ‘바로 이거야’ 이거예요. 바로. ‘기이히 여겼다’는 말은

마치 바람과 바다가 어떻게 순종하느냐? 이런 느낌이지만 도대체 누구기에
이미 이들은 무엇까지 넘어왔습니까? ‘인자가 머리 둘 곳 없다’고 넘어왔죠.
그다음 ‘죽은 자들에게 죽은 자를 장사하라’는 그 말씀까지도 넘어왔잖아요.
그리고 자기들이 죽음의 위기 속에서 구원을 받았잖아요. 간절히 기도해서

그런 상황에서 이 잔잔해진 이 모습을 보고 이 예수님에 대해서 평가를 하는 겁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어떠하기에 바람과 받아도 순종하는 고‘
이 말은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다라는 겁니다.
모세가 홍해를 지팡이로 갈랐잖아요.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라는 그러한 의미를 이 속에 지금 고스란히 담아내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마귀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이 기적이죠?
’기적을 행하면서 메시야 다움을 보여라‘는 그 하나님의 아들다움과
지금 이 바다에서 예수님께 기도해서 구원을 받아서
예수님을 보는 이 안목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똑같죠.

지금 이걸 갖고 사람들은 그 예수님께 위급할 때 기도해서 구원 얻어서 정말 놀랍게,
야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
그걸 긍정적으로 저같이 똑같이 해석을 해가지고 예수님을 제대로 믿었다.
제대로 믿은 게 마귀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되는 게 무엇인가? 하면요.
바다와 바다를 다 잔잔하게 하는 이 능력은 구원을 못해요. 어렵죠?
우리가 볼 때는 바다와 파도를 잔잔하게 하시는 능력 정도 되면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으니까

그런데 마귀가 뭐라 했습니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로 떡덩이 만들고‘ 이거 기적이죠.
이런 능력들이잖아요. 신적 능력이잖아요.
그것이 구원을 가져올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쫓는 이 제자들이 원하는 구원은 가져오죠.

오늘날 교회가 원하는 구원이 뭡니까?
십자가의 피로 죄 용서받았으면 우리의 인생은 앞날이 탄탄대로여야 된다는 거죠.
자식이 잘 되고 좋은 대학 가고 부자 되고 사업 잘 되고 행복하고
이렇게 되려면 큰 교회를 가야 돼요. 돈도 좀 있어야 되고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능력을
자기들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하신 일을 보니까
’따를 만하다 우리가 기다렸던 바로 그분이네‘
이런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이들 스스로가 악마의 종임을 드러냅니다.
그 본색을 드러내는 거예요.

어느 누가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십자가를 봅니까?
다시 아까 얘기하다가 말았지만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는 능력은 구원을 못 가져와요.
근데 인간들이 원하는 것이 이 능력이에요. 이 능력
이 능력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 하면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해서 인도하실 때 모든 것이 능력이었잖아요. 능력
그들은 피가 희생제물의 피가 사망해서 생명으로 옮기고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을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그 피 덮힘이 진정한 축복임을 생각도 못했어요.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축복은 피로 덮어져서 죄가 사해지는 게 축복이 아니에요.
그들이 아는 축복은 죄가 사해졌으면 건강하고 잘 먹고 잘 살아야 돼요.

이것은 우리들의 기준도 그렇지 않습니까?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게 복음 맞아요.
이것은 정신 나간 사람이죠.
네가 복을 받았다면 환경도 좋아야 되고 돈도 잘 벌어야 되고 자식도 잘 돼야 되고
뭔가 평탄해야 되고 그게 복이잖아요.
우리들 마음속에도 그런 것들이 자리 잡고 있어요. 우상이 그대로 자리 잡고 있다고요

복음을 아니까 이제 우리 가정이 어떻게 돼야 되고
거꾸로 생각하셔야 돼요. 복음을 아니까 가족이 박살 나네.
그런데 아직 박살 안 나고 서로 이렇게 함께 있네.
그걸 은혜라 하고 거기에서 감사가 나오거든요.
좀 더 들어가면 원래 불심판 받아야 되는데
아직까지 가족 간에 원수도 되지 않고 친척 간에도 원수가 되지 않고 살아있다는 자체가
주님의 은혜인데

기적과 능력은 구원을 못 가져옵니다. 표적만이 구원을 가져오죠.
문제는 유대인들이 보는 표적은 모세처럼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가 바로 이 예수야. 하시는 일을 보니까.‘ 확신을 갖잖아요.
강 건너 불구경 할 때는 ’메시야일 거야 선생님 한번 따라가 보겠습니다.‘ 했는데
지금 죽음 속에서 구원을 얻었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들 속에 한번 저 혼자 들어가겠습니까? 여러분 같이 들어가 보면 얼마나 흥분되겠어요.
드디어 찾았다는 겁니다.

복음을 전해보면 드디어 복음을 찾았다는 사람을 한 둘이 안 만났는데
얘기해보면 딱 이 수준이에요. 이 수준
자기가 원한 메시야를 찾은 거죠. 자기가 원한 복음
십자가 앞에서 죄인임을 계속해서 이야기하면 듣기 싫어합니다.
’나 그거 안다‘라는 거예요. 안다라는 거예요.

성령이 있으면 늘 책망받는 것이 감사하죠.
주님이 함께 동행한다는 증거거든요.
제가 레위기 설교할 때 그런 말씀드렸잖아요.
이 시스템이 작동하면, 이스라엘 자체는 전체는 항상 번제물이 태워지는 그 조직이라고 할까요?
조직하면 좀 이상하지만 하나님의 군대에요.
그럼 날마다 피가 흘려지고 그 피로 인하여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
그 죽음 속에서 구원받은 그들에 의해서 살해당합니다.
자신들을 살해한 그들을 자신의 피로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셔서
예수님 자신이 심판주가 되심을 드러내시죠.
이 얘기가 왜 중요하냐?라고 할 때는 구원 중심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인간들은 구원 중심으로 접근을 했잖아요.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 중심으로 지금 모든 사건들을 재편하는 거예요.

마귀가 시험하는 내용이 우리를 구원하라는 거잖아요. 네가 메시야라면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 자체가 십자가 중심이라는 겁니다.
십자가를 위해서 있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지옥 갈 자는 지옥 가고 천국 갈 자는 천국 간다는 거예요.

천국 갈 자들이 어떻게 천국 갈 수 있느냐?라고 할 때는 그들은 자격 조건이 없죠.
없다는 모습이 지금 방금 말씀드린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 안 가겠습니다.‘ 요 사람도 구원을 받아요.
’머리 둘 곳 없다. 따라가겠습니다.‘ 이 사람도 구원을 받아요.

’죽은 자들에게 죽은 자를 장사하라‘ ’예수님 그런 말 안 듣겠습니다.‘
요런 자도 구원을 받아요.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사하라‘ ’예 알겠습니다.‘ 이런 자도 구원을 받아요.
파도 속에서 살려달라고 해가지고 살림을 받은 자도 구원받고
’아 죽으면 죽으리라‘ 해도 구원받고요.

제가 구원 이야기 중심으로 했지만 반대로도 똑같습니다.
’머리 둘 곳 없어서 안 가겠습니다.’ 지옥 갑니다.
‘머리 둘 곳 없습니다. 없다고 하셨지만 따라가겠습니다.’ 지옥 갑니다.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사하겠습니다.’ 지옥 가요
‘아이 예수님 안 따라가겠습니다.’ 지옥 가요

죽음 속에서 기도를 하죠. 기도했는데 들어주거든요. 그것도 다 주님이 들어주는 겁니다.
그것이 악마의 응답인지 그건 이제 최후적으로 드러나야 되는
들어줘도 지옥가고 안 들어줘도 지옥 갑니다.
여기에 가룟 유다 아직 10장으로 가야 열두 제자를 부르셨다 하는데
가룟 유다가 여기에 들어 있다면 구원받고 지옥가죠.
십자가의 피 능력을 드러내는 복음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봅니까? 아까 제가 그런 말씀드렸죠.
유대인들이 어느 중심으로? 아까 서기관이나 한 제자나 이 제자들 다 보세요.
누구 중심으로 봅니까? 지금 예수님 중심이 아니고 자기 중심이죠.

예수님이 중심이라고 할 때 인물 중심이 아니고 십자가 중심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나는 죽어도 되고요. 안 죽어도 되고요.

그러면 이 십자가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면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 해서 따랐던 자들 안 따랐던 자들 모두가 다 뭐예요?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거예요.

이걸 무슨 수로 인간이 정리해요.
그 말을 다 한다고 정리가 돼요. 그렇게 해도 안 돼요.
이 일은 주님의 일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능력 속에 저희들을 살게 하시고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의 피 능력으로 일하심을 목격하는 주의 백성으로 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십자가만 증거하는 주의 백성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