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5-08 18:09
20220508 주일 오후 모임 행 17:30 회개의 명령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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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_M8doqV5yg

관리자 22-05-08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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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8 행 17_30 주일오후 회개의 명령(회개하라 명하사)

본문 중에 사도행전 17장 30절입니다. 거기에 보면

(행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상당히 불쾌한 말이죠. ‘알지 못하는 시대에는 그냥 넘어갔는데’
이 부분은 제가 설교 시간에 충분히 말씀드렸고요.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다 명령을 내리는 겁니다.
복음 선포라는 것이 ‘회개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거예요.
여기에서는 직접적으로 이렇게 표현하죠.
사도행전 2장이니까 거기에서도 마찬가지죠.
‘어찌 할꼬’ 할 때 ‘회개하라’ 이렇게 나오고

여기에서는 ‘회개하라’가 먼저 나오고요.
세례요한이 증거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예수님께서도 말씀을 전하실 때도 ‘회개하라’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명령이라는 것은 너희들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는 이야기예요.

이런 말씀들이 인간이 주도권을 갖고 있고 선악을 아는 입장에서,
자기 자신이 심판주가 된 입장에서는 이러한 말씀들이 상당히 거북하고 듣기 싫어하는 말입니다.
‘내가 뭐 잘못했는데’ 이거거든요. 회개하라고 하면
‘내가 뭘 잘못했는데’라는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벌써 선악을 나누었다는 거거든요.
선악을 나누어 가지고 선과 악을 구분해서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러면 그런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해당 사항 없지요. 그죠?
‘아 나는 복음만 전했습니다. 그러니 회개하라는 이 명하심은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저 복음을 안 전하는 사람이나 듣지 않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사람들이 말씀을 듣게 되거든요.

항상 이 인간의 악마성은 복음을 모를 때는
‘내가 들어야 되는 입장이다’라는 입장에서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만
복음을 알게 되면 그다음에는 자기 자신을 피해 갈 궁리를 찾아내죠.
이것을 두 가지 다 연결해 보면 ‘자기 구원론에 관심이 있다’라는 얘기입니다.

‘이 회개를 명하셨다.’ 이 말씀은 항상 현재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 백성에게 해당되는 말씀이거든요.
그러니 사도 바울이 십자가를 증거하고 있는 거고요.
처음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이미 한 번씩 들었거든요.
들었는데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가서
‘네가 하는 말을 좀 더 소상히 들려달라’ 요청을 했고
요청한 그들에게 다시 하는 얘기가 ‘회개하라 명하셨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이 복음은 명령입니다. 선택이 아니고

명령은 그다음 단계죠. 제가 선택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명령이라는 의미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그 어떤 여지가 있다는 것으로 들릴 수 있는데

이 말씀이 창세기로 가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은,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지만
말씀대로 명령을 하게 되면
‘회개하라’ 명령하신 그분에 의해서 회개하는 자가 만들어집니다.
여기까지 육에 속한 사람들은 따라오지도 못하고 상상도 못하죠.

육에 속한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을 때
‘아 회개하면 구원을 얻겠네요.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겠네요.’
이런 식으로 이 말씀을 들을 가능성이 아주 농후합니다.
이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듣고 아테네 사람들 중에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생기거든요.

사도행전을 우리가 살펴보지만
믿는다고 해서 모두가 다 긍휼의 그릇으로 들어오는 자들이 아님을 염두에 둬야 됩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자꾸 ‘우리도 그렇죠.’
복음이라는 자체가 그러하게 만들어내요.
이 말은 들어왔는데 ‘우리들 중에도 가라지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소리 하라고 그 얘기가 아니라
복음의 능력 자체가 이 알곡과 가라지를 역시 갈라내죠.

조금 더 강하게 표현하면 만들어냅니다. 불러놓고 만들어내죠.
교회 안으로 들여놓고 알곡과 가라지를 만들어냅니다.
이렇게 또 이야기하면 누가 알곡인지 누가 가라지인지 또 그 눈을 부릅뜨고 골라내려고 하는데
복음을 전하면 돼요. 복음을

항상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되는 게
말씀을 배워서 옳음을 이야기하면 그게 복음이라 생각하는데
옳음은 복음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어요.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서 보지만 귀신이 복음을 더 잘 압니다.
예수님을 더 잘 알고요. 뒤에도 나오지만, 귀신이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아요.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십자가 사건이 현재라는 것을 계속해서 배척해버려요.
그 십자가 사건이 배척이 되면 무엇만 남는가? 하면요.
그 언어 체계만 남아요. 언어 체계
그 언어 체계가 뭐예요? 선악을 아는 지식이거든요.

교회에 오면 선악을 아는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 신앙이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사람이 가장 악마적일 수 있어요. 저 같은 사람
사람들은 착각을 하죠. 이걸 많이 알면 제대로 알면
제대로 알아서 그 구원을 얻을 것 같으면 앞서도 말씀드린 것 같이
오전 예배 시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잘 가르키면 돼요. 그게 신천지잖아요.
가르치고 그다음 행하면 되잖아요. 그 하나님의 교회고.
이단 집단들이 다 그렇게 하거든요. 이게 진리입니다.

제가 설교 시간에 수도 없이 그런 얘기했죠.
개혁주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이야기죠.
신앙 고백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진리 체계를 지식 정보화시킨 거예요.
그 지식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믿습니다’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논리거든요.

그걸 우리에게 그대로 가져오면
‘제대로 된 십자가 복음을 나열하면 읊어대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십자가 사건 자체가 날아가 버리죠.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친히 십자가의 피능력으로 일하시거든요.
그 일을 하실 때 항상 어떤 모습으로 일을 합니까?
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십자가 사건 속에 합류해요. 합류를 당합니다. 항상

상당히 난감한 이야기를 한 겁니다. 상대들은 회개할 게 없어요.
기껏해야 회개할 것은 뭐 선악, 자기들이 갖고 있는 선악 기준이죠.
윤리 도덕 그런 기준으로 ‘아, 이건 잘못했고 이거는 부모 효도 안 했고
이건 뭐 내가 어떤 사람에게 사기를 쳤고 거짓말을 했고 분노를 냈고 화를 냈고’ 이런 얘기인데

지금 사도 바울이 회개하라 명한 것은 무엇을 갖고 회개하라 명합니까?
십자가를 갖고 이야기하죠.
십자가를 갖고 회개하라 명하면 모든 사람이 뭐예요?
무조건 회개해야 되는 입장에 놓여 있어요.
다 지옥불에 들어가는 입장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무슨 수로 자기 스스로가 이걸 인정하겠어요.
선악을 아는 체계 속에서는 회개할 거리를 찾아내지요.
‘이것도 잘못했고 저것도 잘못했고’
아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이것저것 잘못했다라고 생각 안 해야 됩니까? 반드시 해야 돼요.
성경에 보면 그러한 죄들을 세세하게 나열을 해요.
나열을 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그 나열한 그 속에 십자가 사건이 다 담겨 있는 겁니다.
근데 인간들은 또 그 세부적으로 나열한 걸요.
뭉치려고 해요. 뭉쳐서 ‘난 죄인이야’ 그게 속편하거든요.
그러면 다 빠져나갈 구멍이 되잖아요.

성령이 오게 되면 죄 아닌 것이 없어요.
이 말을 사람들이 받아서 배워서 말을 막하잖아요. 죄 아닌 것이 없다.
죄 아닌 것이 없으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지옥 갈 이유가 돼요.
그 상황에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되고 상한 심령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실제입니다. 이론이 아니고

이것이 이론이 되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나는 그거 알아요.’
서태지가 다 되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서태지예요.
목사님 왜 우리를 자꾸 공격합니까?
우리가 아니라 첫째 아담안에 있는 모든 인간이 그러해요.

신천지가 남이 아니고요. 우리 속에 그대로 담겨 있는 겁니다.
우리들도 가능하면 신천지처럼 되고 싶은 거예요.
그게 못 되어서 안달난 자들이 우리들 자신이거든요.

그래서 이 사도 바울이 ‘회개하라 명하셨다.’
이제는 ‘모든 사람을 다 회개하라 명하셨다. 선언하셨다.’
이 말씀에 해당 사항이 있는 자들은 회개하겠죠.
이 회개는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회개가 아니라 십자가의 영이 부어진 회개가 됩니다.
십자가를 자랑하기 위한 죄인이 되죠. 완전히 뒤바뀌어버립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이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피가 흘러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하여서
온 우주 이 지구상 전체를 짐승의 세계로 만들어서
십자가 지신 그분만의 심판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긍휼히 여긴 자들은 죄인으로 만들었고
그 죄인으로 만드신 목적이 그 피를 자랑케 하기 위해서 만드셨음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런 이 말씀의 능력이에요.
사도 바울이 그냥 ‘회개하라고 명하셨으니’ 우리는 또 흉내 내고 싶잖아요.
회개하라고 명하셨다. 흉내 내셔도 되는데 
그거야 흉내인지 주님이 하게 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명령했는데 아무도 안 들어요. 그것도 명령이 통한 거예요.

근데 또 이걸 또 자기가 명령하고 싶어서 자꾸 명령을 하는 그런 인간들도 많은데 그거와는 다르죠.
‘명하셨으니’ 주님이 명하신 거예요.
그러면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어떤 자가 되는가? 하면 증인이 됩니다.
주님이 명하신 그 명령이 어떻게 그 현장 가운데
아레오바고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지 목격하는 목격자가 돼요.
자기는 주님이 말씀 전하는 대로 전하고 그래서 이 말씀의 능력이 임하는 현장을 목격하는 겁니다.
물론 자기도 회개하는 자리로 들어가겠죠. 당연히

‘말씀이 살아있다’라는 것을 놓치게 되면
이 회개하라고 명하셨다는 이 말씀을 어떻게 듣느냐?라고 할 때는
‘내가 안 믿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나로부터 출발해버리죠.
말씀이 살아 있으면 내가 믿든 안 믿든 무조건 죄인이에요.
하나님 아들을 살해한 죄인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뒤에 나오는 오늘 설교 제목을 그렇게 정했거든요.
‘정하신 사람으로 정하신 심판의 날’
그리고 이 말씀도 누구에게만 알아듣는 말씀이 되고 받아들이는 말씀이 되느냐?라고 할 때는
회개의 그 명을 받은 자가 그 명령에 의해서 회개당한 자죠.
회개를 내가 한 자가 아니라

회개 당한 자가 온 세상을 어떻게 만들었다? 왜 만드셨다?
왜 아담으로부터 출발시켰는가?
로마서 5장에 하면 ‘한 사람으로 범죄하여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사망의 왕노릇했고
한 사람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죄인들을 다 의인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의로움을 온 세상에 드러내시는 그 일을 위해서 세상을 만드셨다’라는 것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믿어지게 되는 겁니다.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롬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롬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