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5-11 21:54
20220511 수요모임 마 9:1-7 예수님의 권세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66  
https://youtu.be/EilMjyk0Os4

관리자 22-05-13 00:05
답변 삭제  
20220511 수요모임 예수님의 권세(죄 사함의 권세)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말씀 앞으로 인도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말씀 속에 살아가는 기쁨을 주시고
주님의 용서의 크신 은혜 속에 살아가는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어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9장 1절에서 8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마9:1~8)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에서 다시 본 동네 예수님이 주로 활동하시는 고향 동네죠.
가버나움이라고 이렇게 볼 수 있는데 그 동네로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그때 침상에 놓은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어요.

이 본문은 상당히 유명하고요. 설교를 교회를 다닌 분들은 또 많이 들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렇게 목사들이 알려준다든가
이 본문과 산상설교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도 이렇게 살펴봐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겁니다.

침상에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어요.
침상에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다는 것은 다른 본문은 보지 말고요.
여기 본문에서만 보면 오늘날로 표현하면
그 이렇게 양쪽에 네 사람이 이렇게 잡고 갈 수도 있는 거고 두 사람이 이동할 수도 있는 건데

(마9:2) (그)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운 채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이 무엇입니까?’라고
우리가 질문을 한번 해볼 필요가 있어요.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이유는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믿음을 갖고 왔죠.
제가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보신 그 믿음은 과연 그 믿음인가?
표면적으로는 그 믿음이고요. 내면적으로 들어가도 그 믿음이에요.

앞서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하시고 이후에 예수님에 대한 평가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가르침과 다르고 권세 있는 자와의 가르침 같더라‘
이렇게 그들이 판단을 내렸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실 때 예수님께 몰려왔고
산상설교를 들으러 왔을 때도 마찬가지고요.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그 모습 속에는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부각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야 앞서 8장 후반부에
가다라 지방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그 의미 자체가 주님의 능력으로 쫓아냈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십자가로 원수와 원수를 이기셨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창조주의 능력으로 마귀를 물리친 게 아니고 마귀를 이기신 게 아니라 십자가로 이기셨죠.
그러한 의미들이 보는 자들에게는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거라사인 지방 사람 가다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죠.

그들의 눈에는 귀신 쫓아내는 능력자, 당시에 바리새인의 아들들도 귀신을 쫓아냈거든요.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그들이 쫓아내는 것과 예수님이 쫓아내는 것이 같은가? 다른가?
이 부분도 나중에 또 살펴보겠지만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바리새인의 아들들은 자녀들은 십자가 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고요. 이 정도만 해도 차이점이 분명해지는데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인식, 믿음은 과연 어떠한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아니면 기복 신앙을 갖고 들어올 수도 있죠.
예수 믿으면 이 땅에서 축복을 얻고 죽어서는 영성을 얻을 것이다.
아니면 몸이 몹시 아프거나 이렇게 뭐 병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이 나를 치료할 것이다.‘
출발 자체가 모두가 다 그러한 어떤 믿음, 그런 믿음에서 출발을 해요.

사람들이 말씀을 좀 듣다 보면요.
처음 들어올 때부터 ’사람들이 정말 십자가를 알고 들어올 거라‘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최종적으로 드러난 자리는 우상숭배예요.
그러니 복음을 전했을 때 모든 인간이 접근하는 그 방식은 우상숭배의 방식으로 접근을 하고요.
우상숭배가 드러나지 아니하면 복음으로 넘어올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마9:2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이게 참 어려운 말씀이죠.
방금 이 중풍병자를 메고 온 이 사람들의 믿음이 뭔가도 문제가 되지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 중풍병자를 죄용서 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이 사람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할 것이라는 그 믿음을 갖고 있었다라는 이야기예요.
정말 황당한 이야기죠. 뭔가 좀 이상하잖아요.

우리들이 만일에 이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이라면 무슨 목적으로 메고 왔을까요?
죄 용서받기 위해서 메고 왔을까요? 아니면 병 낫기 위해서 메고 왔을까요?
답이 뻔해요. 답이
육의 세계에 있어서는 죄 용서받기 위해서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죄 용서는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 십자가에서 이루어지거든요.
그러한 믿음을 이 중풍병자를 매고 온 자들이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이 사복음서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엄청나게 어려운 거예요.
예수님의 영을 받아야 해석이 되거든요.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육에 속해서 이 순서대로 이렇게 접근을 하다 보니까
이들의 믿음은 기껏해야 ’중풍병자를 낫게 하고자 하는 믿음이고
아니면 예수님께서 죄 용서하는 그 능력을 가진 분임을 믿었다.‘ 이렇게 들어가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대하는 방식이 십자가에서 대하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서 이들을 대하고 있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손 들고 질문하죠. 아직 십자가 지지도 않았고
그리고 이들이 성령을 받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에 대한 그러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느냐?
주님께서는요 소급해서 믿음을 집어넣어버립니다.
이런 것들을 인간들이 도저히 못 따라잡아요.

사도 바울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았다라고 해버리잖아요.
언제 찾아왔습니까?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를 잡으러 갈 때 주님이 찾아오셨죠.
우리가 알기로는 그때 선택을 했죠. 그때 찾아오셨고

그런데 사도 바울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다.‘ 이 얘기를 하니까
자꾸 인간들은 구원론으로 빠져요. 지금 구원론 이야기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위한 창세 전에 택함이었고 십자가를 위한 예수님에 대한 핍박이었고
십자가를 위한 부르심이라는 거예요.
그 창세 전부터 사도 바울이 있기까지의 모든 전 과정이
십자가의 능력을 증거하기 위한 삶이었다라는 겁니다.

인간들은 거의 교인들은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고 하면
이 택함을 구원으로 다 끝내버려요.
말만 하면 택했다. 택함 받았다는 거예요.
택함 받은 자는 구원받고 택함 안 받은 자는 지옥 간다.
거기에서 무슨 십자가가 나옵니까?
우리가 설교를 할 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만 죄가 나와야 되죠. 죄가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죄악을 고스란히 지적해내시면서
이들이 중풍병자를 메고 온 것이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메고 옴임을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들어가셔서 우리가 보기에는 엉터리 믿음에서 출발했는데
주님 쪽에서는 그 엉터리 믿음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 죽으심이 누구의 죄를 용서합니까? ’그들‘ 여기에서 제가 핵심은 ’그들‘입니다. ‘너‘가 아니고
왜 그러냐?라고 할 때는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다면 누구의 죄를 용서해야 돼요?
메고 온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잘못 이야기하는 겁니까?

자, 한번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 해보세요.
믿으면 주님이 나의 믿음을 보시고 누구의 죄를 용서해야 돼요? 나의 죄를 용서해야 되죠.
그런데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누구의 죄를 용서해버리죠.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해버리죠.
그러니 ’나는 구원 받았다. 나는 천국 간다.‘ 이런 논리는 다 악마적 논리예요.

아마 이 본문에 도착하면 자기 인간 개인 구원론을 펼치는 자들은 막막할 겁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셨어요.
그러면 중풍병자는 믿음이 있어요? 없어요?

사도행전에 보게 되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죠.
복음을 전하는데 그들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 믿음이 전파될 때 누구를 구원하죠?
복음 전파하는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를 구원하죠.
그 과정과 똑같습니다.
’너의 구원을 위한 구원은 없고 너희의 구원을 위한 믿음은 없다‘라는 겁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중풍병자가 원하는 소망은 병에서 낫고자 함이죠.
산상설교를 듣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목적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느냐?라고 할 때는
자기 자신을 위한 예수님을 찾음이고 따름이었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게 되면 자신들의 믿음이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는 그 역할로 사용되었다라는 거예요.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의 믿음은 엉터리임이 드러나고
그 엉터리임이 드러나는 가운데 주님의 죽으심이 그들 가운데 들어오셨고

그러면 그들의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들의 믿음 자체는 없죠.
그들의 믿음 자체는 부정당하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구원하셨다는 말은
로마서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라는 그 말씀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구원하셨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라는 것은 그들의 믿음은 아니고 주님이 주신 성령이죠.
성령이 주신 그 믿음으로 이들을 구원한다는 말은 그 믿음은 그들의 소유가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선물이죠.

그 선물을 왜 주느냐?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의 증인이에요. 백부장하고 똑같은 거예요.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그 역할로 이들은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이 네 사람은 죄 용서 받지 않았습니까? 이런 호기심이 발동하죠.
십자가를 전파했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물론 따져 들어가면 믿음이 있다라는 것 자체는 죄 용서받았잖아요. 벌써
맞죠? 죄 용서 받았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 중풍병자는 죄 용서 받았습니까? 못 받았으니까? 아직 못 받았죠.
그들로 인하여서 이 중풍병자가 죄사함을 받은 겁니다.
이 얘기하고 또 합시다. 이게 하도 복잡하기 때문에

중풍병자 입장에서는 죄 사함을 받았다라는 말이 기분 좋을까요? 나쁠까요?
이거 진짜 어려운 말이거든요.
그 여러분들이 예를 들어 가난하다 칩시다. 가난한데 돈이 없다. 칩시다.
그런데 예수님께 기도하기를 ’주님 전 돈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기도했는데
’십자가의 피로 너희들을 용서했다.‘ 기분 좋은 말입니까? 나쁜 말입니까?
제가 예를 못 드는 겁니까?

요구하는 게 뭘 요구하는 겁니까?
여러분이 우리 이제 십자가 새 언약 교회로 모이잖아요.
그러면 그 교회를 위해 기도할 거 아니에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거잖아요. 기도하시죠?
주님이 알아서 하는데 내가 왜 기도하냐? 이러면 뭐 제가 할 말이 없고
왜 내 기도 뜻대로 안 되느냐? 꼭 기도 뜻대로 정반대로 되거든요.

오늘도 뭐 단체 카톡방에 뭐 요란했잖아요.
그 요란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목사님이 나서서 왜 평정하지 않느냐?
뭐 그런 생각도 하실 거고 별별 생각을 다 하실 건데
원래 죄인들이 모이면 요란하죠.
말로만 죄인들이었는데 실제 죄인들의 모습을 보이는 거고
글을 쓴 사람들만 죄를 보이는 게 아니라 구경꾼들도 다 죄를 보입니다.
글을 안 쓴다고 죄가 안 나오는 건 아니거든요.

뭐 이렇게 ’주님 우리가 복음 때문에 모였으니까 날마다 다투게 하시고
날마다 미운 감정이 생기게 하시고 날마다 저 인간이 복음 모르는 인간으로
제가 생각하게 하옵소서‘ 이래 기도하셨습니까?
아마 좀 그렇게 기도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모든 게 감사가 되거든요.

우리는 주의 뜻이라고 생각하여서 주의 뜻은 십자가거든요.
십자가는 언제 나오는가? 하면 죄가 나올 때 나와요.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드리는 게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거든요.

지금 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나 중풍병자나
예수님이 행하신 이 일 앞에 경악하는 겁니다. 자기들이 예상한 바가 아니에요.
우리들은 대단한 믿음이 있어가지고
’이 네 사람들이 막 예수님의 믿음을 갖고 처음부터 왔다‘ 그런 거 없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똑같아요. 우리들도 지금 복음을 안다라고
아니까 아예 안 들어오는 사람도 있고 바빠서 못 드는 사람도 있고
들을 게 뭐가 있냐는데 똑같아요.
십자가가 눈앞에 밝혀 보인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쳐들어왔다라는 거거든요.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하니까 우리는 그 믿음을 본받고 싶어 하잖아요.
어릴 때 부흥회 때 부흥 강사들이 이 본문을 되게 이야기 많이 한 것 같아요. 제 기억으로는
우리 동네 부흥 강사만 그런지 모르지만
이런 믿음을 갖고 부흥회 때 데리고 오라고 그러잖아요. 전도해서 데리고 오라고

마치 그렇게 하면 나의 믿음이 타인을 구원하는 것 같잖아요.
이 본문이 꼭 그런 것 같잖아요.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죠.
뒷부분은 시간이 되면 하겠지만, 이 부분을 좀 더 언급하면요.
여기에는 우리라는 개념이 들어가요. 우리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과 중풍 병자 그리고 예수님

이 얘기 넘어가기 전에 중풍병자 얘기 좀 더 합시다.
그래서 중풍병자가 기분이 되게 나쁜 거예요.
자기는 죄사함 받으려고 온 거 아니잖아요.

교회에 주님의 피를 만나러 옵니까?
안 그러면 뭔가 내가 꿈꾸는 뭔가 공동체.
뭔가 내가 소망하는 걸 뭔가 이렇게 어떤 교회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서 오느냐?
이렇게 질문을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교회를 가는 목적이 피를 만나기 위해서 가는 게 아니거든요.
피를 만나기 위해서 간다는 것은
’내가 주님을 죽인 살해자라. 내가 주님을 조롱하는 죄인이라‘ 이거는 인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는 거는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거예요. 배우기만 하면 다 됩니다.

상한 심령은 내가 상한 심령이라 해서 상한 심령이 된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슬프다 할 때 내가 슬프다는 게 슬픕니까? 슬퍼질 때 슬픈 거죠.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라는 것이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들의 의미가 우리가 제가 늘 말씀드리는 거는 장악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중풍병자나 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황당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구원은요 진짜 황당한 구원이죠.
어느 정도 황당하냐? 내가 원치 않는 죄용서.
갑자기 칭찬 받아 버려요. 이게 구원받은 성도의 상황입니다.
이거는 처음 받을 때 그 얘기고
처음 받을 때가 아니라 이 상황이요 계속해서 반복해서 일어나는 게 성도의 삶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주님의 죽으심이 증거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서 오늘 한 가지 더 생각하고자 하는 게 조금 전에 말씀드린 ’우리‘라는 개념입니다.
예수님이 계시고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있고 중풍병자가 있잖아요.

아까 처음에도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었다.
우리는 내만 구원 받으면 되잖아요.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시겠지만 모든 인간들은 내만 구원 받으면 되거든요.

주님이 심판주 되신다라고 하면
’지옥 보낼 자는 지옥 보낸다. 천국 보낼 자는 천국 보낸다‘라는 이런 말씀을 들어도
그 사람들은 ’나만 구원 받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천국 보낼 자 천국 보내고 지옥 보낼 자 지옥 보내는 그 자리에 누가 들어가는가? 하면
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이 거기에 들어갑니다.
들어가면 뭐가 돼요? 자신들이 희생물이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셨는데 이런 말씀이 나오죠. 12절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본문에 대한 그 해석이 아주 뭐 분분합니다.
’우리가 죄를 용서할 경우에 용서해달라’ 이것은 논리적으로 뭔가 아무것도 안 맞죠.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해버리면 해석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안 맞기 때문에 앞뒤가 안 맞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할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우리가 죄를 용서할 권세가 있습니까?
십자가에 지지도 않았는데 무슨 죄를 용서합니까? 우리가

주님의 용서가 어떻게 전이 된다. 이렇게 이제 표현을 하면 또 오해를 하기 때문에
주님이 용서를 하실 때 자기 백성, 먼저 구원받은 자들이죠.
성령을 받은 자들을 통해서 택한 자들을 구원을 합니다.
왜 그렇냐?라고 질문하시면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래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 말씀에 현장이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그냥 믿는 자가 없죠. 그죠?
항상 주님이 파견하고 보내고 만나게 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죠.
‘구원받을 자는 다 구원받더라’ 사람들 이런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거든요.
좀 뭐 예정론 믿고 하는 사람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이에요. 자기가. 자기가 심판주고
그런 사람들을 보면요. 자기 일에 너무 바빠요. 그러면서 아는 말은 많고요.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라는 말이 나오죠. 이 말씀에 완성을 이 마태복음 9장에서 먼저 한번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이 이제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면
우리가 주일마다 이렇게 말씀을 읽고 보는 그 내용 속에 다 담겨 있죠.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그 어느 누구도 중풍 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 그 죄를 용서할 수 없고 구원할 수도 없어요.
그들의 믿음이 저 사람을 구원 못해요.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 사했다.’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은 그걸 연결고리로 집어넣잖아요. 연결고리가 없어요.
고리가 없는데 연결고리를 만든 거예요.
그 사이에 누가 들어갑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무엇을 날려버리느냐?라고 할 때는
지금 예수님에 대해서 시비 거는 자들이 나오거든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들은 자기 구원에 미쳐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지금 이 내용 자체의 의미를 도무지 파악 못해요.

무슨 얘기인가 하면요. 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하면
세리나 창기는 지옥 갈 자 이기 때문에 지옥 가야 돼요.
‘당연히 저들은 말씀을 안 들으니까 지옥 가야 돼’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들과 달리 자신들은
‘말씀대로 살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천국 갈 수 있어’ 이런 논리를 갖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습니까? 어
떤 나라로 만들었어요? 제사장 나라죠.
제사장 나라라는 것은 제사장이 중심이 되는 나라라고도 말을 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 전체가 제사장 나라라는 얘기입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제사장이죠.
이 말이 어려우시면 예수님이 참 이스라엘이잖아요.
그분이 대제사장이잖아요.
말씀을 주니 그들은 말씀을 어떤 용도로, 분명히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집단을 구원했거든요.
집단, 나라를 구원하셨고 그 나라를 언약 백성으로 만드셨는데
이 시간이 흐르면서 이 집단이 개별화됩니다.

개별화되어서 ‘나만 구원 받으면 돼’라는
‘나만 행복하면 돼 나만 천국 가면 돼’ 그런 논리로 바뀌어 버렸어요.
그게 유대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랑 똑같죠.
‘나만 구원 받으면 돼 나만 천국 가면 돼’

요나서를 보게 되면 요나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니느웨로 가라 하니까 정반대 길을 향해서 다시스로 도망치잖아요.
왜 도망칩니까?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입니다.
제사장 나라는, 자신을 희생하여서 궁극적으로는 이방 나라까지 구원해야 돼요.
이런 얘기가 되게 어려운 거예요.
요나가 선지자잖아요. 선지자가 그걸 못 알아듣죠.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이 선지자도 마찬가지죠.
선지자가 갖고 있는 안목이 이런 겁니다.
‘저 니느웨와 같은 저런 놈들은 하나님이 심판해서 멸망 당해도 마땅해’ 이렇게 들어가는 거예요.
자신들이 제사장 나라는 걸 잊어버리겠죠.
만일에 요나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요나가 니느웨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북 이스라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요?
‘너희들 말씀 안들으면 망해‘

여러분 선지자라고 해서요.
다 이사야 같은 선지자,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의 그 모양을 띄는 게 아닙니다. 다 달라요.
팔장끼고 ’너희들은 멸망당해야 돼‘
근데 하나님께서는 그 요나 선지자가 굉장히 특이한 선지자거든요.
다른 선지자는 그 죄악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 속으로, 남유다 속으로 집어 들어가잖아요.
넣어가서 그 속에서 희생당하는 인자가 되거든요.

그런 요나 같은 경우 보면 강제 투입이에요. 강제
강제로 죽여버리고 물고기 뱃속에 집어 넣어 버리고 강제로 자살하게 만드는
자살까지는 안 갔지만, 그렇게 계속해서 몰아가서 그 요나를 희생물로 만드는 겁니다.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요나서를 모르는 게 아니에요.
다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이 이스라엘을 만드신 그 목적, 그 목적이 뭐냐?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만든 것은 분명한데요.
문제는 그들이 그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 개인 구원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남은 자 유대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유대인들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하면
개인 개인이 모여서 구성된 유대인들이에요. 남은 자들이예요.
어떻게 개인 개인이냐? 할 때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사무엘상을 보면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들어 놓으니까 저거들이 모여서 왕을 세우잖아요.
사울 왕을 세워서 옹립을 하여서 국가를 만드는 국가의 모습을 좀 뛰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데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나라는 왕을 먼저 만들어 놓고 왕이 백성을 만드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거든요.
이게 전혀 다른 방식이에요.
그러면 모든 백성들은 왕에 귀속 되거든요. 집단입니다. 집단.
하나님의 구원은 집단 구원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이 어려운 겁니다.
개인 구원만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저들의 믿음을 보시고‘
’아 그러면 아주 칭찬하기 위해서 저들을 데리고 왔구나‘ 이렇게 들어가지만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창조하시는 그 새로운 이스라엘,
그 우리의 모습이 이런 모양을 띠게 되는 겁니다. 상당히 특이하죠.

사도행전으로 좀 넘어가면 사도들이 성령을 받은 이후에 복음을 전할 때
그야말로 원치 않는 길로 핍박받고 미움받고 심지어는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로부터 복음은 환영받는데 나머지는 전혀 도움도 못 받고
나중에는 이제 엉뚱한 소리도 듣고 미움도 받고 그러한 길로 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라는 주님의 피로 만드신 그 우리를 계속해서 찾아내는
표현을 내면 찾아내는 역할이고
또 달리 표현하면 주님이 창조하시는 그 주님의 교회의 그 일원들을 계속해서 이렇게 찾아내는
그런 역할을 감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기에서 우리란, 우리.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이 가르친 기도에서 우리,
그 우리가 어떠한 우리인가?를
이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과 그리고 죄 용서받은 중풍병자와 그 사이에는 예수님.
이걸 요한복음식으로 하면 하나죠. 하나.
그런 모습을 이 본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 본문을 보고 ’나의 믿음이 저 사람의 죄를 예수님이 사해줄 거라’
그런 생각은 하면 안 돼요. 문자대로 받아가지고
‘아 너희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이 이 사람이 죄를 사했으니까’

이게 꼭 뭐 같애요? 천주교에서 연옥 교리가 있잖아요. 그죠?
연옥교리, 죄지은 인간이 천국은 못 가고 그렇다고 지옥도 못 가고
연옥에 중간 정거장에 머물러 놓게 해놓고
이 땅에서 지은 죄만큼 백 년 2백 년 오백 년 천년 저거 마음대로 연도를 다 정해요.
얼마나 사람들이 무식한가 하면 거기에 또 다 속죠. 자기 마음대로 혼자 생각해요.
죄를 지었으니까 억만 년이 있어야 되는데 당신의 후손이 여기 딱 나오잖아요.

메고 갔는데 믿음을 보시고 용서해 줬으니까 당신이 믿음을 보이면 저 연혹한 사람이
이것 갖고 또 연옥교리를 더 창조하겠다. 천주교에서
당신의 믿음을 보고 죄를 용서한다고 성경에 나와 있지 않느냐? 그 논리거든요.
말이 돼요? 안 돼요? 말이 돼요.

그런데 이게 일반 개신교에서도 똑같이 들어와 있죠.
‘여러분이 믿음을 갖고 기도하시면 저 사람이 믿을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많이 기도해보셨죠. 그죠? 남편을 위해서 따님을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시잖아요.
또 믿음이 너무 좋아가지고 ‘주님이 구원할 자는 구원하실 거야. 나 기도 안 해’
그런 교만이 어딨습니까? 그 말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주님이 일이고
우리는 부지런히 죄만 지으면 됩니다.

여러분이 그래 기도 안 한다고 해서 여러분 마음을 주님이 모르실까요? 예
그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외식이라는 겁니다. 자기의 마음을 속이면서
물론 진짜 주님이 그 마음을 주셔 가지고
‘주님이 구원할 자는 구원하시고 지옥 갈 자는 지옥 가시게 하시는구나’
그러면 그 마음을 받았으면 또 어떤 마음이 듭니까? 여기에 보면,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죠.

사도 바울이 늘 기도하는 사람이잖아요.
‘주님의 기도밖에 안 들으니까 나 기도할 거 없다.’
아무튼 뭐 아는 건 너무 많아 가지고 죄인이 되면 되는데 죄인이 안 되려고 너무 애쓰고
의인이 되려고 하죠. 그런 기도를 이전에 다닐 때는 들어준다고 기도를 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안 들어줄 것이라 하여서 기도 안 할 거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혈육이 미우면 기도 안 하지만 사랑하면 기도하게 돼 있어요.
그리고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죠. 안 합니까? 여러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할 거 아니에요. 다급하면. 다급 안 해본 모양인데

그 기도가 어디로 합류당합니까? 이 똑같은 거예요.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 자기들의 욕망 자기들의 기대 그 예수님을 향해서 다가왔잖아요.
우리 복음을 안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날마다 십자가 사건으로 휘말리거든요.

그러한 어떤 바램들이 툭 튀어나오고 ‘아 나는 그렇지 않아’
뭐 그렇지 않을 때도 있는데 그렇지 않은 마음을 주실 수도 있죠.
주님은 우리에게 정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 되기를 원하고요.
죄인이 되지 아니하면 십자가를 증거할 수 없습니다.
피를 자랑하지 않아요.

가령 방금 말씀드린 ‘나는 주님이 구원할 자를 구원하고 지옥갈 자는 지옥 가는 걸 알기 때문에
나 기도하지 않겠어’ 그 말은 뭐예요?
나는 그만큼 의인이다는 거예요. 말씀을 잘 아는.
근데 본인은 그걸 의식을 못해요. 말씀을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게 뭔가? 하면 선악과 따먹은 자들의 가장 악한 모습이죠.
그냥 막 살면 되는데 관리를 너무 열심히 해요.

오늘 뭐 여러 가지 얘기가 나왔지만 절제하고 싶으면 절제하면 돼요.
절제하기 싫으면 안 하면 돼요. 그 주께서 시키시는 일이기 때문에
근데 정답을 알게 되면 절제하는 것도 죄고 안 하는 것도 죄고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죄만 지으면 되지 뭐 어쩌라 그랬어요.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예수님께서 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쪽 부류이고요.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과 중풍병자는 다른 부류죠. 예수님께서 구원하는 긍휼의 그릇이죠.
긍휼의 그릇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죠.
언급이 없는데 목사님은 왜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합니까?라고 하면
이 내용이 사도행전 속에 서신서 속에 다 담겨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이 서기관들, 이들과 다르냐?라고 하면 똑같습니다.
서기관들이 속으로 생각을 해요. 이게 중요한 게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뭔가? 하면요.
그럼 중풍병자를 메고 온 그 사람이나
중풍병자가 속으로 생각한 걸 예수님이 다 아셨다는 말입니다.
이런 걸 좀 여러분이 좀 깊이 있게 봐야 돼요.

아까 제가 기도 안 하면 하면 소용 없는 이유가 뭔가? 하면 주님은 우리를 다 알아요.
우리의 꼼수를 다 알아요. 계산까지 다 알아요.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이나 중풍병자나 그리고 서기관이 속으로 생각했거든요.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마9:3)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도 유대인이고 중풍병자도 유대인이죠.
이들은 다 유대인이라면 죄 사함은 누구만 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8장입니까?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난 뒤에 하나님께 기도하잖아요.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하늘에서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죄 사하는 권세는 출애굽기 32장 32절에도
모세가 기도할 때 죄를 여호와께서 사해달라 이렇게 기도하잖아요.
(출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이들 입장에서는 죄사함의 권세는 누구밖에 없는가? 하면 여호와 하나님 뿐입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그 사람들이나 아니면 중풍병자나 듣고 깜짝 놀라겠죠.
그러니 그들은 잘 몰라요.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을 주시면 그 속으로 합류 당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으로 이들은 확 끌려 들어가는 거예요.
확 끌려 들어갔다니까 ‘다 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제발 좀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는 자꾸 인식이 성령 받으면 다 알고
성령 받으면 정반대입니다. 다 모른다고 해야 돼요. 다 몰라요.
왜냐면 주님이 인도하시기 때문에

성령이 인도한다는 것은 너희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의 의식 구조는 성령을 받으면 다 안다고 생각해요.
말씀을 좀 이렇게 가르치면 다 안다고 생각해요.

속으로 이야기를 했어요. 왜 속으로 이야기했느냐?
뭐 사람들이 계속 지금 따르고 있고 소문도 들었을 거 아니에요.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생각을 아시고’ 꿈에도 생각 못 했죠. 생각을 아시고
그러니까요. 여러분이 어떤 행동을 하든요. 그게 의미가 없다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이 견주는 것도 주님이 다 아신다는 얘기예요.
그리고 견주어서 행동하는 것도 다 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십자가와 만나는 사건이 일어나면 감사한 거예요.
이 생각을 아시고

(마9: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중풍 병자는요 지금 아주 곤란한 처지에 있어요.
데리고 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잖아요. 주변에 사람들이 가득 있을 거 아니에요. 지금
죄 사함받은 증거가 뭐예요?

제가 말씀 전할 때마다 그런 표현을 했죠.
여러분 십자가의 피로 죄 용서 받은 게 좋습니까? 돈 백만 원 얻는 게 좋습니까?
죄 용서받는 것은 눈에 안 보여요. 맞죠? 그래서 자꾸 증거를 원하는 거예요.
어떤 증거를 하는 가?하면 내 마음이 편안하거나 안 그러면 뭔가 확신이 생기거나
자꾸 뭔가 뒤쪽으로 자꾸 들어가요.
확신 없어도 돼요. 안 편해도 됩니다. 죄 용서 받았기 때 끝났어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네가 어떤 생각하고 어떤 모습을 보여도 괜찮다는 이야기예요.

정말 황당하죠. 이 중풍병자는, 아직까지 누워 있잖아요.
죄 용서 받았는데 외부에서 보기에 변화가 하나도 안 일어났죠.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참람하다는 말은 신성 모독을 한다는 거거든요.

방금 말씀드린 것 같이 죄 용서는 여호와 하나님만 하신다라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우리들이야 예수님이 하신다.
여러분 죄를 예수님이 용서하십니까? 하나님이 하십니까?
이것도 이제 교회 오래된 사람이 헷갈리거든요.
아버지 하나님도 죄 용서하시고 예수님도 죄 용서하시고 정신이 하나도 없죠.
여러분은 안 그르시겠지만

죄 사함의 권세는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십자가 지신 분만이 죄를 용서해요.
유대인들의 분노는 죄 용서는 하나님 밖에 할 수 없는데 죄 용서했다는 거예요.
이게 마음의 생각 그 찰나죠.
그 순간적인 생각 왜냐하면 지금 상황 자체가 긴박하게 흘러가는 그자거든요.
우리들이 관람하기 때문에 천천히 흘러간다. 이렇게 보이지만
그 긴박한 상황에서 그 찰나적인 생각을 하는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의 질문은

(마10:4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마10: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어느 것이 쉽겠어요?
제가 일전에도 마태복음을 여러 번 말씀을 전했지만
죄 사함은 말만 하면 돼요. 눈에 보이는 게 없기 때문에
물론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예수님 말씀이 그렇게 들리지 않죠.
하나님만의 죄를 용서하는 거니까 이것은 인간은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리고 ‘일어나 걸어가라’ 이 일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죠. 그게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나중에는 뭐 귀신들도 다 하거든요. 마귀도 다 흉내를 내니까
얼마든지 그런 것들이 다 보여지는 그런 세계로 들어가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일어나 걸어가라는요. 창조주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이슬람교나 뭐 유대교나 다 믿잖아요.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어요.
죄용서입니다. 죄용서는 십자가 지신 분만이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 십자가 지신 분이 창조주가 되어야 돼요. 그게 성경 이야기입니다.

물론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과 죄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이 둘 다가 불가능한 말이잖아요.
그들의 입장에서는 둘 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거든요. 맞죠.
둘 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그들을 우상숭배자로 규정을 하시면서
진짜 하나님이 누군가를 지금 이 말씀 속에서 소개하는 겁니다.
아마 오늘 이방인들 우리들이 읽으면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 어느 것이 듯 쉽습니까? ‘죄사함 받았느니라‘가 더 쉽다고 제가 말씀드렸죠.

왜 그게 그러냐?라고 하면 여러분 이단 집단들 보세요.
구원받았다고 해버리잖아요. 아예
하나님의 교회 인터넷 다 나오거든요. 들어가면 교적부에 이름 올리면 구원받았어요.
14만 4천 원 들어가면 구원받았어요. 얼마나 쉬워요. 하나도 안 어렵다니까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생각과 전혀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이방인들은
그 유대인들의 털끝만큼도 못 따라가요.
그들이 못하는 게 뭐예요? 일어나 걸어가는 걸 못해요.
유대인들은요 반대입니다. 일어나 걸어가라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죄 용서하는 것은 아무도 못해요.

어느 것이 쉽겠느냐? 이렇게 질문을 할 때 그들이 대답은 필요 없습니다.
대답을 못하죠. 다 불가능하니까 그들 입장에서는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마9: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이 말씀이 굉장히 중요한 게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많은 병을 고치셨잖아요.
병을 고치신 그 이유가 뭐냐? 그걸 통해서 뭘 보여주시는가를 여기에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했다’라는 말의 의미가 ‘죄 용서를 하셨다’라는 거고
그 죄 용서는 어떻게 되어지는가? 할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가 용서되죠.

그래서 여기에서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그 인자는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는 자가 바로 인자입니다.
에스겔을 인자라고 부르거든요.
자기 백성에 담당할 그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먼저 다 담당해요.
그 담당한 그 인자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이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다는 거예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주님이 되고요. 아직까지 인자의 모습을 보이죠.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인자의 이름을 갖고 계시지만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주의 이름이 되고요.
주의 이름이 보내주시는 분은 성령이고
그래서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용서함을 못 받는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인자가 죄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도 알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권세라는 단어가 나왔죠. 조그만 참으시기 바랍니다.
권세, 여기에 있는 권세와 마태복음 7장 29절에 나오는 권세,

(마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에 있는 자와 같고~

이 권세, 이 권세 같은 단어거든요. 뒤에 가면 또 권세가 나옵니다. 8절에 보면

(마9:8하)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권세 권세 권세가 나오죠. 이 세 가지 권세 같은 단어인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권세의 의미와
예수님을 평가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평가하는 그들이 말하는 권세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라는 겁니다.

인자가 죄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십니까?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면 이 사람이 일어나 걸어가는 것이 핵심입니까?
안 그러면 예수님이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까?
죄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말씀하기 위한 도구죠.

이 사람의 구원이 우선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인자가 죄 사하는 권세가 있는데 그 죄사하는 권세를 갖고 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이렇게 나와야 돼요. 이 말씀에서

그런데 ‘인자가 죄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일어나 걸어가라‘예요.
그러면 그의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자가 죄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한 중풍병자였고
친구들에 의해서 데리고 옴을 당하고 그리고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간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자는 이 죄 사함의 권세가 어디에서 나옵니까? 십자가에서 나오죠.
그 십자가 지신 분이 주님이잖아요. 심판주거든요.
그분의 일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금 이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이라고 할까요?
그를 데리고 온 그 사람들이 자기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이들을 통해서 지금 서기관들, 당시의 서기관들이라는 말은 율법 연구가들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 같이 이렇게 말씀을 가르키는 자들 이렇게 연구하는 자들 쓰는 자들
이렇게 볼 수 있는데.
이런 자들이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자들입니다.

그들 앞에 예수님이 ’내가 바로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진 인자다‘
그것을 소개하기 위해서 ’일어나 걸어가라‘고 해버린 겁니다.
그럼 우리 같으면 이 장면을 보고 예수님을 믿을까요? 안 믿을까요? 우리들은 덥석 믿어요.
요즘 그렇잖아요. 뭐 예수 이름으로 병 고쳐 당하면 수많은 사람이 몰려가잖아요.
유대인들은 눈하나 깜짝 안 합니다.
물론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지만 나중에 다 이렇게 거부하는데

왜 눈하나 깜짝 안 하는가? 하면요.
여호와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컬어버리면 심판받거든요.
이미 구약에 다 나와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라는 인간들은 기적과 능력을 행하면서 예언을 행하면서
그것이 이루어지게까지 하면서도 다른 신을 쫓아라고 해요.

민수기 18장입니까? 거기에 나오죠.
’다른 신들을 쫓아라고 하는 그런 자들을 따르지 말라. 그들을 따를 경우에 너희들이 심판을 당한다‘
’하나님이 시험하는 것이다.‘ 이런 말씀들로 무장이 돼 있어요.
구약 율법에 의하면 죄 사하는 권세는 여호와 하나님뿐인데
나사렛 예수님이, 예수라는 그 사람이 와가지고 ’내가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라고 하는 순간
무엇이 부정돼 버립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부정되죠.
이것은, 우리들은 이방인들은 별거 아닌데 유대인들 쪽에서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그 사람이, 사람의 아들이 어떻게 주가 되느냐? 얘기예요.
어떻게 하나님이 되느냐? 말이 안 되잖아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십자가 지신 분이 심판주가 된다.‘
이건 더 말이 안 돼요. 십자가에 달린 분이 왕이거든요.

그러면 서기관들은 왜 믿음이 없었느냐? 주께서 긍휼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요. 서기관들이나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이나 중풍병자의 욕망은 동일합니다.
나의 행복과 나의 구원인데요.

서기관들은 어느 쪽으로 계속 내몰리는가? 하면요.
자기 구원 중심으로 계속 내몰리기 때문에 주님께 접근할 수가 없는 겁니다.
왜 자기 구원 중심이냐?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만 제대로 믿으면 축복을 받게 돼 있거든요.
말씀대로 살아가면 저주는 멀어진다고 나와 있어요.
그러면서 그들은 스스로 성경 속에서
자기들의 구원과 자기들의 영생과 자기들의 행복을 꿈꾸면서 말씀을 연구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면서 구원 자체가 개인 구원으로 가버린 거예요.

왕이 세워지고 그 왕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나라는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십자가 지신 그분이 왕이 되셔서
그 피로 자기 백성을 새롭게 창조한다는 것을 그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의 구원이라는 이런 구원을 상상을 못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구원이라 이렇게 이야기하면 ’나는 지체입니다.‘
이런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한 둘이가 아니잖아요.
죄가 나오고 피를 자랑하게 위한 죄가 나오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겠죠.

그러자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 버렸어요.
정말 이게 말썽이 이상하죠.
우리 같으면 붙들어놓고 ’나를 증거해라‘ 이렇게 해야 되는데 가라니까 가버렸어요.
역할을 다 했다는 겁니다. 역할을 다했고 문제는 그다음 사람들입니다. 거기 있는

(마10: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여러분 이 부분에 대해서 약간 문제점을 찾았습니까?
’이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여기서 권세가 무슨 권세일까요?
1번 예수님 말씀대로 죄사함 권세입니까?
안 그러면 일어나 걸어가라는 그 말씀에 의해서 걸어가게 하는 권세입니까?
죄사함의 권세가 아니에요.
만일에 죄사함의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아니라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겠죠.
‘주여 저는 죄인으로서이다. 저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이런 태도를 취할 겁니다.

우리가 보면 이들이 마치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니까
뭔가 믿음의 세계로 들어왔을 것 같잖아요. 아니에요.
이 ‘분리했다’라고 볼 수 있죠.
그들의 눈에는 어쨌든 하나님께서
이 예수라는 사람에게 ‘일어나 걸어가라’는 능력을 줘가지고 걸어가게 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예요. 자기들 나름대로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이 죄 사하는 권세가 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누구란 말입니까?
주님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주님이라는 말은 누구를 부정한다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을 부정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는 겁니다. 맞죠?
영광은 오직 한 분께만 돌아가야 되거든요.

그래서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보면서 그 행하신 그 죄 사함의 권세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그들이 본 것은 육으로 보이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그 말씀대로 걸어가는 그 모습 외에는 보지 못하였다라는 겁니다.
그것을 보고 이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어요.

이 모습이 바로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마귀가 갖고 있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런 모습을 보여라’는 거죠.
결국 이런 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예수님을 조롱하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서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하라’

오늘날 이 세상은 십자가 자체가 이 효용성을 따지거든요.
죄사함 자체는 효용성이 없어요. 죄 사함 자체는
죄사함을 받은 자의 특징은 효용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 이 본문에 나오는 이 중풍병자를 메고 간 그 사람들처럼
자신의 죄만 드러나고 십자가를 증거하는 가운데
주께서 죄 용서함을 입은 자들을 그 구원하는 그 일에 참여함을 당한다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만드신 우리가 바로 그들인 거예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육에 속했기에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육에 속했지만 주께서 십자가의 피 능력으로 죄를 사하시고 성령을 부어주셨기에
인자됨을 인하여 죄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마음껏 증거하는 자로
드러나게 하시는 그 현장을 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인생을 십자가 지신 분이 죄 용서도 하시고
지옥도 보내시는 그러한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