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5-25 20:56
수요모임 20220525 마 9:14-17 금식과 신랑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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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2-05-26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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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5 수요모임 금식과 신랑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말씀 앞으로 인도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사
십자가로 가까이 나아가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9장 14절에서 17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마9:14~17)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예수님께서 마태 세리의 집에 들어가셔서
죄인과 세리와 함께 먹으실 때 바리새인들이 조롱을 했죠.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의원은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지
건강한 자에게는 쓸데없다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호세아 6장 6절을 언급하시면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구약 전체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인으로 만드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긍휼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런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질문을 합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을 해요.

지금 뭐 다른 본문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질문한다 이렇게 나오는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도 여전히 바리새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그러한 어떤 위치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을 수 있죠.
세례 요한이 이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이 이렇게 표현을 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금식이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고
뿐만 아니라 이 바벨론 포로와 그리고 포로에서 돌아와서
이후에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하여서 금식하는, 금식이라는 것은 기도거든요.
금식하여 기도하는 그것은 폐해지지 않았다라는 겁니다.

조금 더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금식하는 것이 단순히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바라고 금식하는 거죠.
아까 기도라고 말씀드렸는데, 금식 기도한다라는 것은 무엇을 간절히 바란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나 아니면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하면서 무언가를 지금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라는 거거든요.
금식이라는 것은 음식을 끊는 것이잖아요. 나의 생존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 생존을 포기해 가면서 그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바가 있다라는 거예요.

세례 요한의 제자들 입장에서도 지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죠.
물론 예수님으로부터 소개를 받았지만,
소개받은 그분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기들과 이 연장선에서 동일한 금식을 해야 되지 않느냐라는 겁니다.
그 당시에 이 당시죠.
예수님 당시에 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을 금식을 했다라고 해요. 오늘날로 말하면
월요일 목요일이니까 토요일이 안식일이니까 안식일 다음 다음 날이 월요일이니까
어쨌든 그런 식으로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다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걸 생각해 보면 금식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달리 말하면 남은 자들이죠.
메시야 왕국을 기다리는 그들을 천국을 기다리는 그들에게 금식은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금식을 하면서 그들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 왕국을 소망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 금식에 대한 거기에 대한 댓가
기도에 대한 응답을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는 겁니다.

뭐 이런 이야기를 어디에서 보고 하느냐? 이렇게 물으신다면
마태복음 6장을 한번 봅시다. 마태복음 6장 한 지가 오래 됐잖아요.
벌써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금식할 때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마태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금식할 때 어떻게 하라 그렇게 말씀을 하고 계시죠.
분명히 마태복음 6장에서는 금식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중요하거든요. 왜 중요하냐?라고 할 때는 오늘 본문과 마태복음 6장이 서로 상충이 돼요.
기존 교회에서는 금식 기도의 지속성을 주장을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금식하는 내용들이 나오거든요.
금식하여 기도하고 보내고 그러한 내용들이 나오기 때문에 금식기도 해야 된다라는 주장을 하는데

그 주장이 과연 옳으냐라는 겁니다.
만일에 그러하다면 성전에 세 번 올라가서 기도하는 것도 계속 지속돼야 된다.
이렇게 주장해야 돼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거든요. 기도 시간마다
물론 성전을 파괴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 기도 시간에 올라가지 않았고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잖아요. 따로 예배 드리지 않았거든요.
그러한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식에 대해서 말씀을 하실 때 산상설교에서 말씀을 하실 때
아예 금식을 금지하셨으면 문제가 없는데
‘이 금식할 때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거든요.
당시에 이 기도하는 자들이 바리새인들이겠죠.
금식 기도할 때 금식 기도 한다라는 표를 내기 위해서 슬픈 기색을 내었는 모양입니다.
제가 좀 아주 부정적으로 설명을 했고요. 예수님도 마찬가지고요.

금식을 하면 자동적으로 슬퍼지잖아요.
배가 고프면 사람의 인상이 좋아질 리가 없거든요.
이런 말씀이 있어도 40일 금식 기도 했다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을 보면 예수님 말씀 안 듣죠.
그 사람들 다 마귀 새끼라고 보시면 돼요.

왜 마귀냐?라고 하면 이 예수님의 말씀 자체를 전혀 이해를 못해요.
일단 6장부터 보게 되면
’금식할 때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세를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이들은 금식하는 목적이 목적은 분명해요. 목적은 뒤에 나오지만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해석이 굉장히 과하죠.
왜 과하냐?라고 하면 여러분 금식 기도 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진심인 게 많거든요. 자기들 진심. 주님을 향한 열심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금식하는 자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 이렇게 규정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방금 말씀드린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 저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예수님 당신이 수 많은 사람들이 금식 기도를 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고
그렇게 단정을 합니까? 그중에는 진심으로 금식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이 맞아요? 틀려요? 대답을 안 하시네. 그 말이 맞잖아요. 인간들 세계 속에서

십일조를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죠.
십일조를 하는 사람들 중에 복 받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요.
그냥 감사해서 하는 사람이 있어요.
일반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니까요.
근데 예수님은 그걸 뭐라 합니까? 외식이라 하거든요.

인간의 진심은 통하지 않습니다. 이미 인간은 소경이고 귀머거리이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그 마귀의 자식으로서 죄 밖에 나올 게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진심을 자기가 몰라요. 자기의 진심이 외식이라는 걸 모르죠.
 
예수님의 말씀이 마치 너희들은 외식하는 자들 같이 하지 말고
뒤에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천국 백성의 원리니까
천국 백성이라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하라?

(마6:17)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그리고)

(마6: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을 할 때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
아니 여러분 금식 기도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이 있나요?
물론 그런 사람들이 있긴 있죠.
‘내가 이만큼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한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죠.
하나님께 기도하죠. 하나님께 보이려고 기도를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요 모든 것이 확정적이에요.
이 말씀 안에 어떤 인간도 못 빠져나가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되시죠?
예수님은 심판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라는 겁니다.
이 말씀만 있으면 구약이 없고 이 말씀만 있으면
엄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됩니다. 그게 제대로 된 금식입니다.
그러면 뒤에 보면 갚으신다 하잖아요. 아버지께서 갚아주신다고

금식 기도하는 목적이 있잖아요. 금식하는 목적 ’갚아주신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면 하나님이 갚아주신다. 이런 논리잖아요.
그러면 십자가가 왜 필요합니까? 십자가가 왜 필요해요. 중보자가 왜 필요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금식할 수 있다면 십자가 필요 없어요.
산상 설교를 사람들이 해석하는 방식이 십자가 제거하는 방식으로 해석을 해요.
그런 식의 해석이라면 십자가가 필요 없는 거지요.

제가 산상설교를 말씀을 드릴 때 산상 설교는 십자가를 증거한다 했죠.
그러면 이 모든 말씀 앞에 인간들은 어떤 자들로 드러나겠습니까?
죄인으로 드러나죠. 죄인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하지 않은 인간은 없다라는 겁니다.
금식을 했다면 무조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의 금식이

그러면 예수님 말씀대로 기름 바르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것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누구일까요? 자 보세요.
이 말씀대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갚으심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기름을 바르고 슬픈 내색을 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갚으심을 받죠. 그럼 뭘 갚으심을 받으려고 해요?

여러분이 여러분들도 금식 기도 해 보셨죠.
주변에 금식 기도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들이 뭘 기도합니까?
’십자가 사건 속에 휘말려서 날마다 주님과 함께 죽고
죄인으로 드러나는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합니까?
그걸 갖고 금식기도 해요? 아니죠.
사업이 쫄딱 망했다. 금식합니다. 주님 정말 기름을 바르고 금식해요.
교회 가면 표가 다 나죠. 새벽 기도 가면

목적이 뻔해요.
기름을 바르고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최종적으로 자기한테 잘 보여야 되거든요.
자기를 위한 기도를 하는 겁니다.
지금 심판주가 자신들 눈앞에 오셨다라는 것을 인식을 못하게 되면
이 산상설교를 듣는 자들은 ’아 제대로 된 금식은 이런 거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이 내용을 알았을 거 아닙니까?
산상 설교에 대해서 들었을 거 아닙니까? 관심이 있으니까
금식을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금식을 해야 되지 않느냐? 이런 논리라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금식을 하지 말라는 겁니까? 해야 된다는 겁니까?
하려면 제대로 하라는 이런 취지로 들리잖아요. 맞죠? 제대로 하라고. 그 말씀이 맞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자기 주제를 파악한다면 우리가 제대로 금식을 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까? 못하죠.
주제 파악이 안 되는 거예요. 지금 인간들 자체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다시 9장으로 와서
바리새인들과 우리들은 금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마9:14)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여기에 대해서 수상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 이야기가 나중에 11장으로 가면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죠.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지금
마치 예수님은 금식을 피하는 분 같잖아요.

구약에도 분명히 대속죄일 날 자기를 괴롭게 하라. 금식하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하다면 그 금식이 이제 뒤쪽으로 넘어가면 금식하는 날들이 추가가 되죠.
추가가 되면서 금식을 하게 되는데
예수님이 만일에 메시야라면
이 금식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서 그들도 금식을 해야 되지 않느냐?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을 안 해요.

(마9:14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지금 자기들 앞에 누가 계시죠? 도끼 들고 계시죠. 심판주가 계시죠
그 심판자 앞에 금식이 통할까요? 안 통할까요?
그러면 그 금식을 왜 합니까? 금식을 하는 목적이 뭐예요?
목적은 나중에 제자들을 통해서 다 드러나거든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쫓는 거나 금식을 하는 것이나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엄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금식을 하는 것이나
그 모든 것들이 누구를 위함이냐?라는 겁니다. 자기를 위함이죠. 나를 위함이에요.

인간은요 나를 잊지 못하고요. 나를 부정 못해요.
사실 오늘 본문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인식 구조를 다 뒤집어 놓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예수님이 오셔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라고 하니까
’그렇죠‘라고 이야기를 하지만요
이 내용이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전복시켜버리죠.

예수님이 여기에 대한 답변을 이렇게 합니다. 만일에 마태복음 6장에 의하면
’나의 제자들이 왜 금식을 하지 않는지 아느냐
너희들은 지금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느냐.
그들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너희들 눈에 띄지 않게 금식하는 중이다.’
이렇게 답변을 해야 앞뒤가 맞는데 예수님의 답변은 그렇게 답변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답변을 합니까?

(마9:1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유명한 말씀이죠. 혼인 잔치가 열렸습니다.
제자들은 알지도 못해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 합류 당한 거예요.
여기는 가룟 유다는 빠져야 됩니다. 빠져야 되지만요
이건 나중에 이제 교회로 넘어가면
가룟 유다가 항상 교회 안에 담겨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빼지 않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혼인 잔치가 벌어졌을 때 신랑과 함께 있을 때
혼인집 손님들이 아이고 아이고 애곡합니까? 기뻐합니까? 기뻐하죠.
지금 이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제자들도 어리둥절.
우리들이야 성도들이 주님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로서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임을 알고 있고 여기에 혼인 잔치에 참여한 자들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별로 어렵지 않다라고 볼 수 있지만,

그 당시에 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를 못합니다.
이 말인즉슨 방금 제가 말씀드린 교회가 신부라 말을 해도 이해 못한다는 이야기예요.
그거는 알아들었는 거지, 성령의 역사 속에 들어온 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어찌 되었든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신랑이 왔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혼인 잔치에 지금 여기에 보면 신랑과 함께 기뻐할 자들이잖아요.
지금 여기에 보면 혼인집에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동안에 이렇게 이야기하죠.
신부라고 표지는 않고 들러리라고 표현하고
세례 요한이 자기는 신랑만 돋보이면 들러리로 있는 것이 기쁘다 이야기했거든요.

신랑을 증거하기 위한 제자들인 거예요.
제자들은 뭣도 모르고 신랑 되신 주인 되신 심판주 되신
주님을 증거하는 그 역할을 지금 피동적으로 지금 능동적으로 담당하고 있는 겁니다.
어리둥절하게 의문의 일승 일패가 아니고 의문의 일승을 한 거예요. 누가? 제자들이
자기들은 지금 금식할 마음이 없거든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심오한 뜻을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알아서 금식을 안 한 게 아니에요.
이해되시죠. 무슨 말인지
‘아 예수님인데 신랑이니까 우리는 또 그분의 그분이 참 주님이니까 들러리로서 기쁘니까
지금 즐거워할 때지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야’ 그래서 이들이 금식 안 한 게 아니에요.
이런 모습 자체가 얼떨결에 구원받은 거거든요. 얼떨결에 주님 증거하고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달라요.
우리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님을 증거하고 이런 생각을 하는데요.
얼떨결에 말하고 얼떨결에 상황 속에 들어갔는데 얼떨결에 복음을 전한 거예요.
제자들은 얼떨결에 주님의 증인이 된 겁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은 얼떨결에 복음 전하는 걸 원치 않죠. 노리고 계산하고 따지고
노리고 계산하고 따진다는 것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하면요.
신랑이 와서 기뻐하는 그 자리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미움받고 쫓겨나는 것이 두려운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 꽤 있죠. 똑똑한 사람들
세상으로 말하면 지혜로운 사람들이죠.

예수님께서 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 그래도 자기 편이잖아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했으니까
그럼 이들에게 좀 알아듣는 말을 해야 되는데 전혀 못 알아듣는 말을 해버리죠
제자들도 지금 못 알아들어요. 왜 못 알아듣습니까? 성령을 못 받았거든요. 아직
나중에 이들이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님의 말씀을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지금은 이들은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역시 가룟 유다를 제외한 자들은 성령의 능력 속에 있는 자들이에요.

이것까지 이야기하면 너무 어려우니까 일단 이거부터 봅시다.
그래서 지금 이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이렇게 하신 겁니다.
세례 요한 제자들은 이 답변을 전혀 이해를 못해요.
새로운 시대에, 달리 말하면 심판주가 와버려서 천국의 세계라는 것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구약적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인식을 못하는 거예요.
 
구약의 세계는 우리는 구약을 읽을 때 지금 성경을 통해서 읽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달라요. 그들이 갖고 있는 구약적 인식 구조는 나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성령으로부터 출발하면 십자가로부터 출발하게 되는데
이게 나로부터 출발하는 이 신앙생활인 거예요.

율법도 십자가 지신 주님께로부터 나왔다라고 해버리면 십자가를 증거하는 율법이 되는데
하나님이라는 분이 주셨으니까 나에게 주셨으니까
내가 율법을 지켜야 된다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고 더욱더 죄를 죄에게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죄를 발굴해내는 율법이다. 이런 말씀들이 그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겁니다.

신랑과 함께 있으면 금식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신랑이 함께 있으면 금식이 필요합니까?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래도 금식을 또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거는 하고 싶은 사람은 마음대로 해요.
그런데 그 금식의 의미가 지금 바리새인이나
세례 요한이 하는 금식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들어가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에 합류하기 위한 금식이죠.
나를 위한,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한 금식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자, 그리고 문제되는 내용이 그 다음이죠.

(마9:15)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말씀도 되게 어렵죠. 그래서 보통 이렇게 해석합니다.
예수님이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하지 말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는 금식해야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금식한 인간들이 있었습니까? 제자들이 금식했어요?
목사들이나 교인들이나 주석가들이나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하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지옥 가는 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어떻게 표현할까요?
그게 비아냥대는 말씀이에요.
어떻게 예수님이 비아냥될 수 있는가? 복음이 그렇잖아요.
십자가의 능력이 구원받을 자는 구원하고 지옥 갈 자는 지옥 보낸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씀을 하거든요.
그러면 듣는 사람들이 날 갖고 노냐?
‘아, 주님 자기가 다 구원하고 지옥 보낼 자는 지옥 간다. 해놓고 믿으라고 하는 건 또 무슨 말이냐’

우리들은 성경을 읽을 때 예수님을 너무 좋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예수님을 좋게 보면, 예수님은 지옥 보내면 안 돼요.
인간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 자체를 자기 입장에서 예수님을 좋은 신이라 하고
좋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상정을 해놓고 자기 입장에서 예수님의 말씀들을 다 해석하는 겁니다.

지금 이들이 금식을 왜 합니까? 자기들 눈앞에 누가 계시죠? 진짜 금식한 분이 계시잖아요.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려 돌아가신 분이 거기 계시잖아요. 주가 계시잖아요.
그러면 금식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필요 없죠.
그런데 그들이 금식한다는 것은 ‘우리는 십자가가 필요 없다’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면 ‘신랑이 빼앗길 때 그때 슬퍼하고 금식하라’ 이 말씀의 의미는 어떤 의미입니까?
‘그래 지옥 가서 실큰 금식하라’ 이 얘기입니다.
‘그게 너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이 얘기예요.
제가 아주 위험한 해석을 하거든요. 이런 해석은 어디에도 안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말이냐? 그러면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제자들이 금식했습니까? 예수님 십자가에 지실 때
금식은 누가 해요? 오늘날 저거들이 하잖아요.
고난 주간에 저거들이 금식하고 생쇼를 하잖아요. 말 귀를 못 알아들어요.

상대들은 자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금식의 의미를 알지는 못해요.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약의 선지자들이 지적을 했거든요.
먼저 이사야 58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사58:1)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사58:2)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사58:3)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이걸 문자대로 읽으면 이해가 안 되죠.
그들이 금식을 하면서 왜 우리를 알아주지 않느냐? 우리의 기도를 들어달라는 거예요.
그 기도를 들어 달라는 마지막 목적이 뭐냐?라고 할 때는 바로 오락입니다. 오락

오늘날 교인들이 금식 기도를 하잖아요.
금식 기도를 하면 마지막에 그 금식기도가 이루어지면 나에게 이 땅에서 축복과
그리고 명예와 그리고 행복과 즐거움을 가져다 주잖아요.
그걸 노리고 금식을 하는 겁니다. 4절 보세요.

(사58: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금식하면서 이렇게 하는 사람 없어요. 여러분
금식 기도하는 사람 중에 어느 누가 다툽니까? 맞죠.
그렇지 않습니까? 금식 기도하는 사람은 말도 조심하고 모든 행동 거지를 조심해요.
지금 이들의 그 속마음을 주님께서 다 아시는 거예요.

(사58:4하)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가 상달된다는 것은 말씀 속으로 자기가 합류하는 걸 원하는데
합류라는 것은 긍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긍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대로 힘을 소유하고자 하고 즐기고자 하기 위해서 금식을 하는 거예요.

이걸 보면요.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메시야 왕국을 금식하면서 기다리잖아요.
그 메시야 왕국이 저 푸른 초원위의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얘기에요.
그 생각을 이들이 갖고 있는 겁니다. 이들이 이사야 58장을 다 알거든요. 그리고 뒤에 보면

(사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안 살았을까요? 살죠.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를 전혀 이해 못하죠.
예수님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신다. 하죠.
이 말씀의 내용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내용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 못하는 겁니다.

그럼 인간이 금식한다고 해서 죄 용서가 됩니까? 안 되죠. 불가능하죠.
성경 해석을 그들은 할 수가 없는 거예요.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만이 구약을 해석할 수 있고
그 예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말씀만이 진리가 되는 겁니다.
그 말씀은 성령을 받은 자에 의해서 결국은 이해가 되는 거예요.

성령 받지 못하면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문자대로 읽으면 이렇게 금식을 해야 되고 어떤 마음으로 해야 되고
심지어 마태복음 6장에서도 예수님이 어떤 태도로 해야 되고
그러면 하나님이 갚아준다고 했지 않느냐? 라고 할 때
여기에는 예수님 자신이 하실 일을 말씀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인간들은 나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뭔가를 갚아주실 것이다.
온 세상의 중심을 자기 자신으로 잡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뒤에 나오는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니 그때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말씀을 또 내 중심으로 해석을 하는 거에요.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하면 신랑이 빼앗기는 날이 오히려 더 기쁜 날이죠. 맞죠?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가 얼마나 기뻤습니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눅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성경이 독특해요. 골로새서에서는 아들의 나라라고 표현하거든요.
(골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런데 이 당신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것은 거의 성경에서 두 군데 밖에 안 나와요.
몇 군데 안 나와요.
세베대의 두 아들의 엄마가 당신의 나라 이렇게 표현하고
예수님이 옆에 달린 그 강도 그가 당신의 나라라고 표현을 하거든요. 놀랍죠?
아들의 나라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는 것이 성도에게는 즐거움이고 기쁨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십자가가 없으면 생명이 없어요. 맞죠?
안 들립니까? 들리죠. 십자가가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지시는 것이 오히려 즐거움이 해야 되고 기쁨이야 되죠.
그러니 얼마나 교회가 엉터리로 해석하는 거에요. 그 다음

(마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두 번째 비유입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베옷에 붙여버리면 이게 탄성이 달라가지고 낡은 베옷이 찢어져 버립니다.
지금 금식이라는 걸 갖고 와서 하나의 금식이지만 금식이라는 걸 갖고 와서
인간들이 들었던 산상설교에 대한 그 이해 방식 그것은 다 구약적 방식이거든요.
그런 방식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죠? 느들느들하다
그 구약적 방식으로는 절대로 예수님께 가까이 올 수 없다라는 얘기입니다. 지금
너들너들하는 걸 갖고 와가지고
지금 이 생베 조각을, 예수님을 거기에 갖다 붙이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심판주가 오셨는데 당신도 우리가 하는 이 금식에 참여하시오.

예수님이 참 놀라운 말씀 하시죠. 참여해 버리면 어떻게 되죠?
너희들 다 어떻게 되죠? 멸망당한다. 지금 그 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마치 예수님 쪽으로 너희들 오라 이런 뜻으로 우리가 들리는 거 같지만 그런 얘기가 아니에요.
결국 예수님이 들어오시니까 그들은 자기들 방식으로 끌어다니니까
어떻게 해버립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리지요. 그 다음에 세 번째가

(마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주님의 목적은 보전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에요.
그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관계 속을 보게 되면 제자들이 예수님 속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로서 그들은 무엇을 해도 금식의 완성 속에 들어있는 겁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거예요.

성도는 이미 십자가 안에 들어왔습니다.
들어왔기 때문에 이 구약적 의식을 갖고 말씀에 접근한다든가
달리 표현하면 나로부터 출발하는 그런 성경 해석법이라든가
신앙 자체는 누구와 동일한 사고 방식이냐?라고 할 때는
예수님의 제자들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겁니다.

예수님의 그 영을 받게 되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들의 삶 자체는 처음부터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했듯이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했듯이
십자가 지신 주님을 증거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이 십자가 지신 주님 안에 거하는 인생으로 살게 하셔서
십자가의 피 공로를 증거하는 죄인되는 인생을 날마다 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신랑과 만나게 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을 만난 기쁨으로
저희들을 살아가게 하심을 감사하는 자가 되게 도와주시고
항상 기뻐하는 자로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