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7-18 07:05
20220717 주일 오후 불의한 청지기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8  
https://youtu.be/ca6tDgtk-4A

관리자 22-07-19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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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7 주일 오후 불의한 청지기

누가복음 16장 1절부터 한번 보겠습니다.

(눅16:1~13)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정말 어렵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새 번역을 읽든, 공동 번역을 읽든,
안 그러면 킹 제임스 흠정역을 읽든, 읽어보면 논리적 흐름이 안 맞아요.

그러면 기존 교회 목사들은 이걸 갖고 어떻게 설교를 하느냐?
끝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을 갖고 와서 돈 내라.
사실 그렇게 적용하기보다는
앞에 예화를 보면 ‘주인을 속여라’가 맞죠. 답이. 근데 이게 또 뒤에 가면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큰 것에 충성한다’ 이렇게 또 말씀을 하신단 말이에요.

이 말씀 자체가 누가 듣고 있느냐?라고 할 때는 바리새인들이 듣고 있어요.
바리새인들은 말씀 중심이라 했죠.
철저하게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서 율법을 바탕으로 하여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함정이 있어요. 14절에 보면

(눅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이 구절이 딱 나와요.
딱 나오는 순간 바리새인을 어떻게 규정하느냐? 할 때는
돈을 사랑하는 자라고 규정을 내려버립니다.

지금, 이 말씀은 계시를 받은, 성령을 받은 누가가 기록했고
누가가 기록했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라는 거예요.
주님의 안목에 이 바리새인들이 이러하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돈을 사랑한다. 너희들이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지?’
‘한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고 했잖아요.
‘없다’라고 할 때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죠.

사도바울이 그 얘기를 했잖아요. 빌립보서 3장에서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모델이라 하잖아요.
이런 말씀들을 놓치고 이 말씀을 읽게 되면
바리새인들이 돈을 사랑했으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하니까 이들이 비웃었다. 이렇게 가는 거예요.

돈을 사랑함의 원천이 어디까지 들어가느냐?라고 하면
그 돈을 사랑함이 가장 밑바닥에 근저에 깔려 있으면
그 위에는 말씀 중심이 지금 들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율법대로 살아간다는 거예요.

16장 이 비유 말씀을 듣더라도 사람들이 왜 여기에 귀를 기울입니까?
귀를 기울이는 목적이 뭐예요?
불의한 청지기가 하여튼 출발부터 여기 보면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렸어요.
그래서 주인이 ‘너 자른다’라고 하니까 이 청지기가 잘린 이유를 더 많이 만들었어요.

주인의 그 소유를 더 허비했죠. 100만 원 빚졌는데 80만 원으로 써주고
나중에 그 20만 원에 대한 혜택을 나에게 돌려달라는 거잖아요.
그러면 이 상황을 주인이 봤으면 주인이 어떻게 해야 돼요?
자르는 데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감옥에 넣어야 되겠죠.
지금 논리가 그렇게 진행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그런데 주인이 이걸 보고 지혜롭다 해요.
그 지혜와 뒤에 보면 앞에는 소유를 허비하는 것과 대척관계가 있죠.
그 지혜란 뭐냐?
소유를 허비하는 것은 뭐냐?
앞서도 분명히 허비했잖아요. 허비를 했는데
이 허비한 내용이 어떤 내용으로서 허비를 했는가? 거기에 대한 내용은 나오지 않아요.
어떻게 허비했을까요? 뒷주머니에 넣었겠죠. 그거 외에는 지금 할 그게 없어요.
안 그러면 대충 했든지. 어쨌든 허비를 했는데

그 자기가 잘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식을 고안해 낸 것이
뭐 100만 원 빚진 자에게 50만 원이라고 써주고, 자기의 뒷일을 도모한 거예요.
이걸 주인이 보고 진짜 지혜롭게 일을 했다라고 칭찬을 하거든요.
여기에 보면 8절입니다.

(눅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옳지 않은 청지기가 ‘옳은 일을 했다’라고 하지 않아요.
‘지혜로운 일을 했다‘라는 겁니다.

율법은 옳은 일을 해야 됩니까? 지혜로운 일을 해야 돼요?
제가 지금 질문을 잘못했네요.
율법은 지혜를 증거하잖아요. 율법은 본래 지혜를 증거하는데
여러분의 답변대로 율법은 옳은 일을 하도록 지금 말씀을 하고 있잖아요.
율법에 대한 해석을 지금 여기에서 보여준다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율법을 어떻게 해석해요? 옳고 그름으로 해석하죠.
그런데 영에 속한 자들은 옳고 그름을 벗어나서 죽느냐? 사느냐?로 해석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누가 불의한 청지기처럼 이렇게 살 수 있느냐라?‘라는 질문을 해야 돼요.
왜냐하면, 끝에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했잖아요.

그러면 우리들은 이런 본문을 보면서 ‘여러분 하나님을 섬길 건지, 재물을 섬길 건지 결정하세요.’
이거 오늘 오전 설교하고 똑같아요. ‘성령 받았습니까?’
‘결정하세요.’하는 순간 모두가 다 한 걸음 물러나요.
왜 물러납니까? 자기가 자기를 잘 알거든요.
말로는 ‘하나님을 섬기겠다.‘ 백날 얘기해도 이 몸은 재물을 섬기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결국은 어떤 모습이냐?라고 할 때는 바리새인의 모습으로 가요.
양자 선택을 하잖아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섬긴 그 모습이 결국은 돈을 사랑하고 자기 생명을 사랑한 자거든요.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고 하니까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했으니까 예수님을 비웃었다.‘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겠어.
오직 누구만을 사랑하겠어? 예수님을 사랑하겠어.‘
그들이 누구냐? 바리새인이라는 얘기입니다.

이미 이 말씀을 읽으면서 목적하는 바가 자기의 탐심이 드러난 거예요.
어느 위치에 가고 싶은 거예요? 지금. 죄인의 위치에 안 갈려고 해요.
지금 앞부분에 죄인이 돌아오는 사건이 있었거든요.
(누가복음)15장 이야기가 잃어버린 양부터 시작해서 나중에 탕자 이야기로 끝이 나잖아요.
이 말씀은 아무리 바리새인들이 해석해도 해석이 안 돼요.
나중에 손 들고 ’저 탕잔데요. 탕자 되겠습니다.‘
탕자는 주님이 만들거든요.

탕자 교회된다고 해서 탕자가 안 돼요.
제가 비웃는 얘기가 아니라 저도 탕자교회에서 설교를 했으니까 저도 해당되는데
탕자라고 한다고 해서 탕자가 안 돼요.
이 일은 십자가의 능력에 지금 담겨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말씀만 보면 지혜로 바꿔치기 하는데 그 지혜는 ’사람의 지혜‘예요.

고린도전서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라 했죠.
그러면 이 불의한 청지기가 갖고 있는 것은 십자가의 지혜를 드러낸 겁니다.
십자가의 지혜라는 것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죠.
그러면 이 사람은 뭘 해도 뭐가 돼요? 죄가 되는 겁니다.

이 세상 판 자체를 뭘로 봅니까? 율법이 개입되는 순간, 저주 아래 가득 있는 판이에요.
어느 누구도 의인은 없고 하나도 없습니다.
그 속에서 지혜가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성경에 보면 있는 것 같잖아요.
계산 다 해가지고 ’내가 지금 남의 밑에 경리로 있는데
이 돈 처리를 요렇게 해서 정말 나는 주인한테 옳게 여김을 받는다’ 하면 감옥소 가잖아요.
그 논리를 지금 예수님이 끌고 오셨는데
이걸 율법이 주어진 이 세상으로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육에 속한 자들이 아무리 본문을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여기에 보면

(눅16:9)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러면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재물은 다 불의하다.
그러면 이 재물을 갖고 친구를 사귀는 방법이 있다라는 거거든요.
그 마지막 친구가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면 돈 거래하자는 거예요.
돈을 줘가지고 예수님과 사귀자.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줘서 사귀려고 하잖아요.

돈을 절대로 빌려주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는
‘장로님, 제가 지금 급히 쓸 돈이 있는데 내일 드릴게요.’ ‘그냥 죽으세요.’ 이렇게 답하세요.
그걸 또 빌려줘가지고 형제가 어쩌고 저쩌고... 형제 아닙니다.
옆으로 이야기가 빠졌지만 지금

(눅16:9)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마치 예수님이 어떤 길을 제시하는 것 같잖아요.
영적인 분이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 하실 때는 육적인 언어로 설명하기 때문에
육에 속한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모두가 다 자기가 찾아갈 수 있고
그 길을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 같이 말씀이 들리는 겁니다.
그럴 것 같으면 십자가 왜 집니까?
이렇게 말씀하셨으면 ‘너희들이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해야 될 거 아니에요.

이렇게 말씀하신 이후에 십자가를 지셨잖아요.
그러면 이 모든 말씀은 십자가를 증거하는 말씀이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불의한 청지기이지만 지혜롭게 삽시다.
지혜롭게 사는 방법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귑시다.’
이거 뭘 내세우려는 겁니까? 십자가 앞에? 자기 행위를 내세우려는 거거든요.
이건 단순히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그 율법을 지키자는 그들의 이단들과 다른 차원의 이단들이에요.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성경 말씀은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지옥 갈 자는 지옥 가라고 말씀을 주신 거예요.
이런 말을 아무리해도 안 믿어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그것은 분명히 생명의 말씀이 맞죠.

그런데 율법은 생명의 말씀만 됩니까? 심판의 말씀만 됩니까? 둘 다가 되잖아요.
그 완성이 십자가거든요. 십자가에서 생명이 나오고 십자가에서 저주가 나온단 말이에요.

그러면 육에 속한 자들은 율법 자체가 어떤 용도로 사용됩니까?
저주 아래 갇혀서 지옥 가라고 주신 말씀이에요.
그들은 아무리 말씀을 해석해도 십자가로 접근을 못해요.
접근을 해도 결국은 육적인 접근이기 때문에 어디로 가요? 돈을 사랑함으로 가요.

제가 어떤 분에게 그런 얘기를 했거든요.
‘십자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은 다 돈을 사랑한다‘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그 목사님은 돈을 사랑하지 않아요. 자기 집에 쥐가 나오고,
자기 집에 있는 것들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었대요.
못 들어봤습니까? (어머니가 그 얘기는 안 하셨네.)
광화문에 나오는 사람, 그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껌뻑 죽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우리 집에도 쥐가 나왔습니다.’
쥐 새끼 한 다섯 마리 잡았거든요. 여기 말고 저쪽에 있을 때
일층에 살면 쥐가 많아요. 이 동네는 모르겠지만.

그러면 사람들이 ‘아, 정말 목사님 답다.’ 정말 십자가도 이야기하거든요.
‘십자가 증거하는 목사님답다.’ 그래서? 내가 물었거든요.
그래서? 뭘 이야기하고자 하느냐? 이거에요.
‘사람의 구원을 이야기하지 않느냐?‘
그리고 그 사람이 그렇게 살아서 십자가만 나왔느냐?
말하는 당사자도 그 사람을 주목하지 않느냐?

사람을 주목하지 않게 하는 방법은 십자가를 전하는 방법밖에 없거든요.
십자가는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미끼를 던지는 거예요. 여기에 보면

(눅16:8하)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세대를 둘로 나누죠. 이것도 되게 어려워요.
세대 안에 두 세대를 나누고 두 세대를 나누기 전에 그 세대는 다 한 세대 속에 들어가 있고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빛의 아들들이 누구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유대인들이거든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유대인들이 빛의 아들들이라면 나머지 이방인들은 다 빛의 아들들이에요.
그럼 이 세대의 아들들은 누구냐? 없어요. 예수님뿐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셔서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그들을 이 세대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이 세대의 아들들과 빛의 아들들의 차이가 뭐예요?
한쪽은 피를 자랑하는 죄인이고 다른 한쪽은 뭘 자랑하겠어요?
이 바리새인들이 뭘 자랑해요? 말씀대로 사는 걸 자랑해요.

돈을 사랑한다고 하니까 노골적으로 돈을 사랑하는 ‘돈 내라’ 이렇게 안 나와요.
그거는 수가 낮은 목사들 ‘바쳐야 복 받습니다.’ 이거는 굉장히 수가 낮은 거고
고도의 목사들은 그런 얘기를 안 해요. 말씀대로 가르쳐요.
말씀대로 가르치면 말씀 안에 헌금하라는 내용부터 시작해서 다 나오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이 알아서 ‘저 사람은 정말 돈을 사랑하지 않는구나’

돈을 더 많이 버는 방법은 집도 팔아버려야 돼요. 월세 보증금 천에 60만 원도 팔아버리고
저기 지하 그리고 동네 지하에 보면 햇빛 안 들어오는데(놀라는데)
그런데 가서 살면 ‘저 목사님 진짜 복음대로 전하는 구나‘ 그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여기 있는 우리보다 그런 마음이 먼저 들거든요.
그게 복음 전하는 목사 아닙니까?
’목사가 지하 방에 살면 어떻고 해가 환한 데 살면 어떻고... ‘나 그런데 안 살아요.‘
그게 복음이 아니에요. 그런 것 같으면 테레사 수녀가 진짜 예수님의 제자죠.

그것도 마음만 한 번 잘 먹으면 그렇게 살 수 있어요. 사람이
악마가 어디까지 따라갑니까? 하나님의 형상까지 따라가잖아요.
근데 그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오답으로 처리하잖아요.
물론 그것도 쫓아 따라가 십자가를 져버리니까 자기가. 인간 자체가

’빛의 아들들이 지혜롭다‘고 했는데 그 지혜의 원천은 말씀이었거든요.
이들이 솔로몬의 지혜서를 모르는 게 아닙니다. 다 알고 있어요.
’헛되고 헛되다’는 것까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죠?
다 알아요. 흙으로 돌아간다까지 다 알아요.

근데 돈을 사랑한대요, 성경에 많이 나오잖아요.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육으로 읽어버리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는 놈들이야’ 이렇게 들어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의 얘기를 들어보면
사도 바울이 돈을 사랑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했거든요.
그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성경에 바리새인들의 오리지널 신앙이 나오는 장면이 사도 바울의 고백 속에 있어요.
그거 없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물론 성령 받으면 알겠지만
 
그 내용 속에 들어가면 그들은 돈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사랑했다면
예수 믿는 자를 그렇게 자기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쫓아다니면서 핍박할 이유는 없는 겁니다.
돈을 사랑했다면 배를 타고 목숨을 걸고 전도하러 가지 않은 거예요.

오늘날 선교사들이 돈을 사랑해서 선교사 갔습니까?
우리는 결론부터 ‘돈을 사랑해서 갔다.’ 이런 것부터 나오는데
그들에게 인터뷰 해보세요.
인터뷰하면 ‘나 돈을 사랑한 게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거예요.

목사들도 다 그렇게 얘기하잖아요. ‘나는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정말 이 나라를 복음으로 지켜야 되기 때문에
이 복음을 전한다고. 이게 다 가짜예요. 다 거짓 선지자고 다 마귀새끼거든요.

진짜 성도는 하나님 사랑 안 하는 사람이에요.
말씀 자체를 이미 자기 구원론, 그걸로 바탕에 깔고 그 구원론을 달리 표현하면 돈이거든요.
그걸 바탕에 깔기 때문에 이 말씀에 있어서 불의한 청지기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사실은 질문도 안 하죠. 목사들이
이 설교해버리면 교회가 개판돼버리거든요.

직원 부리는 사람들 이 설교를 해보세요. 직원 부리는
오늘 월요일 종회 하면서 ‘여러분, 여러분 언제 이 회사가 망할지 모르니까
여러분의 살길을 찾기 위해서 장부 조작을 열심히 하세요.’
이 회사는 안 된답니다. 외감이 있어가지고. 외부 감사가 있어가지고 그거 안 되는데
가령 그렇게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세상이 꼴이 어떻게 되겠어요?

근데 예수님 보시기에는 이 세상에 어떤 꼴입니까? 그거나 그거나 오십보 백보예요.
어둠의 세계예요. 그런데 그 속에서 이 어둠의 세계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거든요.
그러면 이 세계에서 주님이 십자가의 영을 주시면 지혜로운 자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 만들어지는 모습이 지금 이 모습이에요.

그럼 바리새인과 바리새인이 두 사람이 있어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리새인 사울, 예수님을 만난 바울 두 사람이 있어요.
누가 빛의 자녀입니까? 누가 빛의 자녀에요?
십자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대적자라는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이 예수님 만나기 전 바리새인의 사울은 주님을 못 만났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어떤 일이에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의로운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보니까 ‘이 모든 일들이 내 유익을 위한 것이다.’
그 유익을 위한 것이 지금 오늘 본문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이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유익을 위한 거고
그 유익의 끝자락은 뭐가 있어요? 돈이 있는 거예요.

왜 돈입니까?라고 물으면 신명기를 읽어보면 돈이에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이 얘기가 돈이잖아요.
돈이 차고 넘친다는 얘기거든요.

이미 이 당시는 장사꾼들이 설치는 시대였고요. 지금은 더 심한 거고
그 돈이 된다는 겁니다.
그 돈의 원천이 어디에 있어요? 말씀에 있는 거예요.
이런 논리가 오늘날 교회에 그대로 적용되잖아요.
이 말씀은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그러한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 보면

(눅16:9)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이 친구가 영원한 처소로 영접할 분은 예수님뿐이거든요.
그 인간이 무슨 수로 영접해요? ‘아 예수님이 그러면 좀 알아듣게 말씀하시지’
알아듣게  말씀하고 계신데 왜 못 알아듣습니까? 사람들이.
문제가 자기가 지금 고장난 기계거든요.
입력을 1로 했는데 그걸 어떻게 읽는가? 하면 11로 읽어요.

우리가 문제인데
우리는 말씀을 두고 ‘주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셨느냐?’ 이렇게 묻는 거예요.
바리새인들한테 물어보세요. 똑같을 거예요.
예수님이 ‘구약이 내게 대해서 전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손들고 뭐라 하겠어요?
‘아니 그럴 거 같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전한다라고 말씀을 직접 하시지.
왜 당신을 통해서 하시느냐?’ 이렇게 따질 거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뭐라 그랬어요? ‘그렇게 했는데 네가 지금 못 알아보잖아.’

영의 세계를 모르죠. ‘성령이 아예 없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성령이 없으면 뭐가 나와요? 육만 남죠.
육의 세계는 무엇으로 진리가 세워집니까? 지식이에요. 그게 선악과 구조거든요.

이 말씀을 십자가의 지혜로 보지 않고 지식으로 접근을 하죠.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그럼 목사님 지식으로 접근 안 하는 방법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없어요.

오늘 오전에 설교 들었는데 사람들이 또 오해할 게
‘그러면 그렇게 성경을 안 배우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떻게 하긴 그렇게 배워야 되죠.
아니라고 지금 십자가를 자랑하고 ‘나는 아니오’를 알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가르치고 듣게 하고
그 과정 속으로 몰아넣는데
자꾸 자기는 뭐예요?
 신의 영역에 도전하기 위해서 ‘난 그렇게 안 하겠습니다. 이렇게 안 하겠습니다.’

기도하면 죄라고 하면 기도 안 하고
그럼 기도 안 하면 죄입니다라고 하면 기도할 겁니까? 안 하죠.
왜? 왜 안 할까요? 돈이 돼야죠. 돈이 돼야.
사람은 자기에게 이익이 안 되면,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눅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이건 인간적 논리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했어요.
소득의 십일조를 한 정도가 아니라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
오다가 저기 오늘 여러분이 호두과자 먹었죠. 드셨죠?
공짜로 드셨잖아요. 십일조 해야 됩니다. 그 정도로 해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되었어요.

그런데 그 심보가 어디에 가 있는가? 하면 심보가 돈,
돈이라고 하니까 너무 멀리 갔잖아요.
하나님 사랑에 있어요. 하나님 사랑. 그다음 왜 사랑하느냐? 목적은 돈이에요.

왜 돈으로 이렇게 흘러가느냐? 할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하면
마지막 구약에도 마찬가지고 요한 계시록도 마찬가지고
구약의 바벨론을 갖고 와서 마지막 그 짐승의 나라,
적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돈이거든요. 돈의 위력.
아무리 큰 제국도 돈 없으면 망하거든요.
흥청망청 쓰면 망하잖아요. 다 그렇게 망했거든요.

그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다. 무슨 수로?
‘작은 것’이 뭔지 알긴 알아요? 모르잖아요.
그러니 상대가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되었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성도가 사는 모든 일들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예요.
뭘 해도 십자가를 자랑하니까.
이것도 사건인데 자꾸 이것도 지식으로 와버리면, ‘십자가를 자랑하면 되잖아요?’
참 대화하기 진짜 어려워요.
그래서 바리새인을 이렇게 거치지 않으면
자기가 하는 말이 바리새인의 말인지 생각도 못하는 겁니다.
(뒤에 창문 문을 열어주세요. 공기가. 조그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눅16:10하)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이런 거 갖고 이제 이 세상 논리를 갖고
조그만 한데 충성하면 교회를 크게 해준다. 뭐 이런 논리.
사업을 조그마할 때 충성하면... 그게 맞죠? 악마의 논리잖아요. 그건

근데 성경의 논리는 우리가 한 게 없는데 쏟아 부어지는 거에요. 쏟아 부어 지는 것.
논리가 안 통해요. 하나님 나라는. 인과관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원인은 십자가 지신 그분에게 있고 우리는 뭘 해도 그냥 혜택 입은 자로 사는 거예요.
그 원리를 바리새인들은 전혀 모르죠. 왜? 주님이 가둬놨잖아요.

(눅16: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탐심이 확 올라오죠. ‘불의한 것에 충성해서 참된 것을 맡자.’
‘그러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어떻게 해야 돼요? 목사들이 적용을 못하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돼요? 작은 것에 충성하는데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방식이 뭐예요?
‘주인을 속이라’ 이야기잖아요. 여기까지 적용을 해줘야 되는데 안 하죠.
이런 설교 못 들어봤죠.

근데 제대로 설교하려면 그렇게 해야 돼요. 여러분.
여러분 다 속여야 돼요.
그럼 말씀에 의하면 이게 진리니까 우리는 뭘 해도 속이는 자예요.
뭘 해도 속이는 자인데 죄인으로서 십자가만 자랑하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이게 진리가 되는 순간, 인간의 그 말에서 뛰어넘어버리잖아요.

(눅16: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눅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이런 말들이 바리새인들이 들으면 비웃음의 대상이에요.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

제가 SFC(Student For Christ) 간사를 했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SFC 선교단체가 고신측에서 나온 거거든요.
학생 아마 합동 쪽에서는 학생면려회(SCE) 이런 식으로 SCE라든가 CCC 그런 종류.
거기에 보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개혁주의들의 중심이거든요.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바리새인들을 보고 손가락질해요.
‘저들이 돈을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을 들으면서 비웃고 있었다.’
그 비웃고 있는 네가 바리새인이에요.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됩니다.
얼마나 많이 들었어요. 그때 질문하시면 됩니다. ‘그래 살아서 뭐 하려고?’
지금 그러한 어떤, 그 악마에게 속한 자의 본질을 다 드러내는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고 하셨으면 그러면 아멘 하면 되죠.
얼마나 기쁩니까? 우리는 살길을 찾잖아요.
‘아멘’할 마음이 드는 게 아니고 살길을 찾거든요.
사는 방법이 ‘하나님을 택하면 살 거고 재물을 택하면 죽을 거다.’
이런 논리를 지금 갖고 들어오잖아요.

그런데 그 논리를 누가 이미 다 했습니까? 우리의 선조 바리새인들이 다 했어요.
‘아멘’하면 이 말씀의 현장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몸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날마다 재물을 사랑하는 자로서 죄인으로 드러나면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이 변화되는 몸이라고 해야 될까요?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는 그런 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게 말씀의 살아있음이고 자기 백성에게 실제 살아서 역사하는 말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살아계셔서 말씀 속으로 우리를 집어 넣으셔서 십자가 사건이 영단번 제사이며
그 영단번 제사를 증거하기 위해서
저희들의 몸을 말씀이 이루어지는 몸으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몸으로 사용하셔서 십자가의 증인으로 삼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말씀 앞에 죄인으로 드러나는 인생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