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7-20 23:13
20220720 수요모임 마 10:7-8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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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2-07-2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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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0 수요모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을 생명의 말씀으로 인도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를 알아가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10장 7절에서 8절 말씀입니다.

(마10:7~8)
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파송하시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말씀을 하셨죠.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 집의 사람들은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들을 귀가 없어요.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면 전하는 제자들은 아느냐?라고 할 때는 제자를 또 몰라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마10:7)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천국이라고 하면 우리가 상상하는 천국을 꿈을 꿉니다.
지금 성경을 우리가 읽고 이렇게 또 말씀을 듣고 그렇게 해도
‘천국을 생각 한번 해보세요’라고 하면 어때요?
우리 줌으로 같이 들으시는 분들, 천국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아마 백이면 백이 극락일 거예요. 극락정토

우리가 모르게 극락정토를 상상을 합니다.
극락정토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거든요.
나중에 이슬람이 생각하는 천국도 또 따로 있어요.
여호와 증인이 생각하는 천국도 있고요.
각 종교마다 천국에 대한 개념이 다 다른 것 같은데, 따져 들어가 보면 비슷비슷하고요.
그 원천은 에덴동산입니다.

왜 그러냐라고 하면 로마서에도 ‘하나님을 알되‘라는 표현이 나오거든요.
(롬1:21) 하나님을 알되~
’안다‘라는 표현은 우리가 생각할 때 안다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흔히 전도를 위해서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안다‘
그래서 자연 계시를 통하여도 하나님을 알아서 천국에 갈 수 있다.
그런 주장을 펼치는 신학이 있습니다.

우리가 듣기에는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성경에 ’하나님을 알되‘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에 ’그들도 하나님을 알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갖거든요.

그런데 그 ’하나님을 알되’라는 그 의미는 어떤 의미인가? 하면요. 모른다는 이야기예요.
그들이 나타내는 모든 것들은 우상으로 드러나죠.
이제 그 우상으로 드러나는 것이 이스라엘로 가면
그 하나님을 어떻게 압니까? 여호와 하나님으로 알죠.
놀라운 것은 그 여호와 하나님이 우상이 된다라는 겁니다.

이방인에게서 유대교로 유대인으로 가는 겁니다.
오늘날로 하면 한 걸음 더 들어가죠.
예수도 우상이 돼버리죠. 십자가도 우상이 되고

‘천국이 가까왔다‘라고 했을 때 우리가 유대인이라면 천국관을 갖고 있어야 됩니다.
근데 이방인이죠. 이방인인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읽고 있을 때
구약에서 약속하는 천국은 어떤 천국이냐? 그 천국의 의미를 이스라엘 집 사람들은 알고 있어요.
’천국이 가까왔다‘ 했을 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천국은 메시야가 도래했다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약속한 다윗의 씨에서 날 분. 다윗 왕으로 오시거든요.
다윗왕의 기능을 다 담고 오신다 이렇게 약속이 돼 있기 때문에
그 메시야가 오시게 되면 천국이 이루어진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천국은 어떤 천국이냐? 이사야를 한번 보겠습니다. 이사야 42장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이 본문을 인용하시면서 자기를 증거하셨는데
1절부터 보면

(사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사42: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사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사42: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이방인인 우리들이 이 본문을 읽으면 ’그냥 그렇구나‘ 이래 들어가는 거예요.
바벨론 포로에 사로잡혔다가 돌아와서 칠십 이레의 완성을 기다리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그들에게는 이 말씀이 너무나 달콤한 말씀이에요.
그래서 기름 부은 자가 오시면 어떠한 세상이 펼쳐질 거냐?라고 할 때
그 뒷부분에 보면 18절입니다. 앞부분도 그렇게 나오지만 18절부터 보면

(사42:18~22)
18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19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20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21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려 하셨으나
22 이 백성이 도적 맞으며 탈취를 당하며 다 굴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 탈취를 당하되 도로 주라 할 자가 없도다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서 그들의 눈을 가리우게 하고 귀를 닫히게 했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그들의 눈은 소경이고 그들의 귀는 귀머거리로 그렇게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오게 되면 이 메시야가 어떤한 길로 인도할 것이냐?라는 겁니다.
눈을 뜨게 하고, 저는 자를 걷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한다는 거예요.

그러한 내용들이 이사야에서 이렇게 예언되어지고 있고 이사야 11장을 보게 되면
제가 설교할 때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한번 봅시다. 이사야 11장 1절에 보면

(사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렇게 나오면서 6절

(사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사11: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사11:8)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11: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11장 9절까지 그렇게 읽었는데요.
’그 때에’ 그때가 언제입니까?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났을 때’, 메시야가 왔을 때 이러한 세상이 펼쳐진다는 겁니다.
그와 함께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이사야 42장의 말씀에 근거하여서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서 공의를 베풀고 저는 자도 걷게 하고 그 뒤에 보면 그러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했을 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천국이 메시야가 옴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나라가 이루어질 거라는 겁니다.
그 나라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는 메시야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메시야가 오면 자신들이 거기에 중심 자리를 차지한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제자들이 한 자리 차지하려고 하잖아요. 그지요?
야고보와 요한의 엄마가 와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우편에 좌편에...’
이런 논리 자체가 단순히 ‘당신은 왕 하시고, 우리는 좌편 우편 서겠다.’ 이런 논리가 아니라
메시야가 오게 되면 메시야는 자기 기능을 다 하고
우리는 그 메시야로 인하여서 이 왕국에서 권세자 행세하겠다라는 겁니다.

조금 더 과하게 표현하면 느부갓네살 왕 같은 그런 어떤 권력을 펼치고 싶은 거예요.
그게 그들이 꿈꾸는 메시야 왕국이고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 왕국이에요.
물론 그 속에는 다른 말씀도 담겨 있는데 육에 속했기 때문에
육에 속한 자들이 말씀을 읽을 때 십자가 중심으로 읽어낼 능력이 없잖아요.
그러면 무엇 중심으로 읽어냅니까? 육 중심으로 읽어내죠. 육의 중심은 ‘나‘잖아요.
내 몸 중심으로 읽어내는 겁니다.

내 몸을 중심으로 읽어내게 되면
내 몸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이들은 구약을 바탕으로 해서 메시야 왕국을 기다리면서
메시야가 오시게 되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서 우리 가운데 왕으로 세워진다면
자신들이 꿈꾸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거라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들이 제자들이 가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칠 때
그들이 기다리는 천국은 어떤 천국일까요?
그게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담겨 있습니다.

(마10: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이 얘기예요.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자신에게 속한 부정적인 요소들이 다 제거되는 겁니다.
이러한 일들은 사실은 예수님도 앞서서 다 하신 내용이죠. 9장 35절에 보면

(마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천국 복음을 전하면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
그 능력을 이 열두 제자들에게 똑같이 주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전하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외칠 때 하는 그 모든 일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과 동일한 일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일이 어떤 일이냐?라고 할 때는 십자가로 다 이루신 일,
달리 말하면 십자가가 이 땅에서 세워졌다라는 것은 이 세상은 심판이라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왜 구원받을 자격이 없느냐?라고 할 때는 그들은 모두가 다 그 아비를 마귀로 두고 있는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그러한 하나님 아들을 기다리고 원하고 있었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릴 때
사람들이 드디어 하나님 나라가 왔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로 떡덩이를 만들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 시편 91편 말씀처럼 예언된 대로
네 발이 하나도 다치지 않도록 천사들이 바칠 걸 그런 것들을 보여달라는 겁니다.
(시91:11)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시91:12)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그리고 세상 권세와 영광을 가져야 하나님 아들답다라는 거예요.

지금 메시야 왕국을 기다리는 천국을 기다리는 이들이 꿈꾸는 세상이
마귀가 지금 ‘하나님 아들이면 이렇게 하라’라고 했을 때
이런 것들을 소유하지 않으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얘기거든요.

그걸 유대인들에게 갖고 오면 어떻게 되느냐?라고 할 때는 유대인들이 하나님 아들이죠.
그 하나님의 아들들이 꿈꾸는 하나님의 아들다움은 바로 이것이다라고
마귀가 지금 예수님을 시험할 때 다 알려준 거예요.
주님께서 다 노출하라니까 다 노출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그 시험을 어떻게 합니까? 다 거절해버리죠. 안 하잖아요.
안 하신 이후에 이 복음을 전하실 때 본격적으로 마귀가 원한 것들을 펼쳐버립니다.
병자 고치고 약한 자 고치고 죽은 자 살리고 귀신 쫓아내고 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 사람들이 ‘진짜 이 예수님은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답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천국이 가까왔다라고 외치면서 이러한 능력을 행하게 되면
사람들이 어떤 천국을 생각해요? 방금 얘기했던 병자가 없고 성경에도 나오거든요.
눈물 없고 슬픔 없고 근심없고.
근데 그 얘기는요 극락 세상에도 다 똑같아요.
눈물 없고 슬픔 없고 근심 없고 마귀의 시험이 없고

또 어떤 게 있어요? 황금길.
황금길하면 극락정토잖아요. 황금으로 쫙 펼쳐져 있고
거기에 연못이 있는데 연못 밑에는 모래가 전부황금,  황금 바닥이고
그런데 어떻게 살아요? 여러분. 이 시멘트 바닥에 사는 것도 힘든데 지금.
천지가 금이면 금이 뭐가 귀합니까?
근데 다 그렇게 이 세상과 이 세상에 귀한 것들을 갖고 천국을 갖다 붙이는 거예요.

그럼 성경은 안 그러냐? 성경도 그래요.
거기에는 영생이 있고 기쁨이고 슬픔이 없고
심지어는 불교는 재밌는 게 이런 천국교리가 있거든요. 이 극락정토에는 남자뿐이에요.
극락정토 가는 과정에서 여자가 다 남자로 바뀌는 겁니다. 성경과 막 비슷하죠.
비슷하고 똑같아져야 돼요.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안다는 게 담겨 있기 때문에요.

그런데 초점을 못 맞춰요.
이 카메라 있으면 초점을 맞추면 이 사람이 있는 곳으로 맞춰야 되는데
맞추는 곳이 사람 없는 곳으로 엉뚱한 데로 맞춰요.
사시라고 하면 초점을 못 맞춰요.
그게 이 악마에게 둘러싸인 악마의 종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에요.

천국의 모양이 이방신을 믿는 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들은 성경에 나오는 천국과 이방 나라의 천국을 성경 갖고 비교해요.
그 백날 비교해 돼요. 비유이기 때문에 똑같아요.
결국 누구 살기 좋은 나라예요? 내가 살기 좋은 천국이에요.
그러니까 네가 가는 천국은 그건 가짜니까
내가 가는 이 성경에 의한 천국으로 오라고 요청을 하는 거거든요.

근데 그러한 천국 사상을 가장 앞장서서 상상하고 상상한 게 아니라 말씀에 근거했죠.
말씀에 근거하고 믿고 기다린 자들이 유대인들이에요.
그들에게 제자들이 가서 죽은 자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쳤을 때
사람들이 따를까요? 안 따를까요? 따른다는 내용은 성경에 안 나오죠.
예수님을 다 따랐잖아요. 그 내용을 다 생략을 해놓습니다.
물론 이후에도 사도행전에 잠시 반짝 보입니다.

우리가 다음에 살펴볼 이번 주일 날 볼지 모르겠지만
에베소에서도 사람들이 난리 법석을 떨고
이전에 그 사도행전 앞부분에 보더라도 사람들이 몰려들죠.
몰려들어야 되죠. 몰려들면서 그들이 악마의 자녀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야 됩니다.

그러면 목사님 제자들에게 이러한 어떤 권능을 주시고 보내실 때
진짜 복음을 갖고 전하도록 보내면 안 됩니까? 라고 우리는 또 생각을 할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보인다고 믿어요?
사도바울이 나중에 이제 이 계시가 거의 완성된 시점에서
사도바울이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결론을 내려버리죠.

십자가 이야기하니까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다 떠나갔잖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다음에 다 떠나갔잖아요.
마찬가지예요. 십자가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떠나가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나에게 유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제자들이 많은 권능을 행하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 전했을 때 여기에는 무엇이 깔려 있습니까?
십자가 지신 주님이 다 이루심이 깔려 있죠.

우리는 제대로 복음을 전하면 믿지 않느냐?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건 우리 생각이에요.
제대로 복음을 전해서 믿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예수님이 제대로 복음 못 전해서 사람들이 안 믿었어요? 제자들이 안 믿었어요?
제대로 복음 전한다고 믿을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인간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에게 왜 이런 모습으로 권능을 주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이렇게 복음을 전하게 하느냐?라고 할 때는 그들의 본색을 다 드러내야 되는 거예요.
나중에는 이것이 병자 고치는 것과 귀신 쫓아내는 것, 이것도 미는 사람이 있지만
다른 요소들이 여기에 또 가미가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아주 재밌는 말씀을 하시죠.

(마10:8)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렇게 지금 말씀을 하시는데 뒤에 보면

(마10:10)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이렇게 또 말씀을 하시거든요.
이것이 분간이 될까요? 안 될까요? 나중에 분간이 안 돼요.
그런데 이 부분을 먼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이것과 한번 연관을 시켜보면
나중에 거짓 선지자들이 이 일에 대해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느냐?라고 할 때는
‘장사꾼으로 드러난다‘라는 겁니다.

제자들이 지금 이 말씀을 하니까 제자들은 역할만 하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파생되고 확산이 되면
귀신을 쫓아내고 나중에 마술사 시므온 같은 경우에는 돈 주고 사려고 하잖아요.
사려고 한 목적이 뭘까요? 자기가 돈 주고 샀으니까 그다음 이게 돈이 더 된다는 논리거든요.
그러한 자들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이 속에는 두 가지가 동시에 깔려 있죠.
이 복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그 현상들이 있잖아요.
나중에 보면 사도행전 같은 경우는 병자도 낳고 죽은 자도 살리고 이런 일들이 있잖아요.
이걸 갖고 돈으로 환산하는, 돈 벌이 하는 수단으로 바꾸는 자들이 있다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조금 더 들어가면 어디까지 들어가요? 복음을 이용해서, 능력 이걸 제외하더라도
확 뛰어넘어서 십자가 복음을 전해 가지고 돈벌이하는 자들도 있다라는 이야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갖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된다‘라고 말씀을 하시니까
목사들이나 복음을 전할 때 ’자 우리가 이 말씀대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줍시다‘
’그렇게 해야 됩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다 돈 장사하는 사람들이에요.
왜 그래요? 십자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주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저는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 주님을 사랑합니다.’
십자가가 어디 나와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에는 누가 또 들어가 있죠? 가룟 유다죠.
가룟 유다도 이 속에 지금 담겨 있거든요.
가룟 유다도 이 말씀 속에 해당됩니까? 안 해당됩니까? 해당되는데 갈라지죠. 갈라지는데
열한 제자와 가룟 유다가 동시에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어떤 자로 모여집니까? 가룟 유다로 모여지죠.
예수님을 팔아먹고 부인하고 저주하는 맹세하는 그런 모습으로 이들이 보여집니다.

사실은 이들이 예수님의 권능을 받아서 천국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앞장 섰는데
이게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거래였죠. 거래. 우리가 나중에 18장에 나오거든요. 18장 19장에
‘우리가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으니까‘
(마19:27)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쫓았다는 내용만 나올까요? 그다음 뭐가 나와요?
주께서 시키는 대로 권능을 받고 죽은 자 살리고 병들을 다 고쳤습니다.
우리는 이걸 갖고 사도행전으로 바로 넘어가지 말고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한 일들도 생각을 해야 돼요.
그렇게 하니까 그다음 ’뭘 주시겠습니까?‘ 하죠. 말씀 속에 갇혀버리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렇게 말씀을 들어도
이 말씀을 들을 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인간 자체는 불가능합니다.
그걸 이 열두 제자를 뽑아서 먼저 보여주는 거예요.
돈벌이 하기 쉽잖아요. 권능을 행하고 병자 고치고 죽은 자 살리면 돈벌이 되죠.
그렇게 부자 된 사람이 많잖아요. 성령 받게 해줘가지고 부자 된 사람이 있잖아요.
저기 가면, 국회의사당 있는 그 동네 가면. 그거 성령 받게 해서 돈 번 거 아니에요?

인간의 심리가 그러거든요. 방언하고 싶다고 안 되잖아요.
그러면 거래를 해요. 돈을 내고, 돈만 냅니까? 정성을 다하죠. 그 다음 비법을 알려주세요.
비법 이야기하니까 재밌는 말이 떠오르는데

복음 전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복음 다 이야기 다 해버리거든요. 결론을 다 이야기해요.
복음에는 복음 자체가 비밀이기 때문에 뭔가 속일 게 없어요.
그런데 이 이단들의 특징은 꼭 비밀이 있어요. ’우리 교회 오면 알려줍니다.‘
우리 교회 와서 알 길이 없어요. 성령께서 깨닫게 하기 때문에

’그래도 목사님 복음 전하는 교회로 가야 깨닫지 않습니까?’ 이게 함정이죠.
성령을 멸시하는 겁니다.
그러면 또 반대쪽에서는 ‘그러면 복음을 안 들어도 되지 않습니까?’ 이것도 성경을 멸시하는 거죠.
주님의 일하심을 완전히 사람의 일로 다 바꾸는 거예요.

비밀이 있는 것처럼 그런 교회에 가면 정답을 안 알려줘요.
계속 뭔가를 이렇게 미진하게 남겨둡니다.
그다음 피라미드 구조처럼 계속 올라가요.
마지막에는 누구를 뵈옵니까?
이만희를 뵈옵고 문선명을 뵈옵고 독생녀를 뵈옵고 정명석을 뵈옵고 교주를 다 뵙거든요.
근데 이 과정들이 다 기존 교회에 다 담겨 있어요.

일반 교회가 다 조그만 크면 다 그렇게 되거든요.
목사님하고 악수 한번 하고 우리 담임 목사님한테 안수받는 게 소원이에요.
뭔가 있는가 싶어가지고. 뭔가 없거든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근데 인간들은 그런 걸 생각하거든요.

지금 제자들에게 이러한 권능을 주니까 제자들이 마치 자기가 뭔가 된 걸로 생각하죠.
된 걸로 생각하니까 뭔가를 받으려고 할 거 아니에요.
지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받을 마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뭐예요? ‘너희들은 거저 받아도 절대로 거저 안 준다‘ 이야기예요.

그럼 이 말씀은 제자들과 상관없습니까?
제자들 본인과는 상관없는데 그 죄인을 통하여서 이 말씀을 이루어 내어버리죠.
거래하지 못하죠.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전 미문에 앉은 자에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준다.‘ 할 때 내 소유가 아니고 주님이 나를 소유해 버렸고 그죠?
그러면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니까
그 내 안에 있는 주님을 네게 주겠다는 게, 그게 자기 일입니까? 주님의 일입니까? 주님의 일이죠.
그러니 그걸 갖고 ’내가 너를 병 고쳐줬으니까 거기에 대한 보상을 달라’
이런 요구 사항을 요구를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말씀이 이렇게 너무 이렇게 층층이 돼 있어서 쉽지 않은데
구약을 한번 보게 되면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를 보세요.
여호수아 7장에 보면 우리들이 잘 아는 사건이 나오죠.
그 앞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여리고성을 말씀에 순종하여서 언약궤를 앞장세우고
제사장들의 나팔 소리와 함성 소리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진멸했습니다.
그러자 이 여호수아를 비롯한 모든 인간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고만장한 거예요.
그래서 자신들 나름대로 아이성 전투에서는 자신들의 방식을 취하게 됩니다.
과거의 경험이 과거의 그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경험이 아이성에도 똑같이 적용될 거라 생각해요.

이거 여러분 구약이라고 만만히 보면 안 돼요. 바탕이 안 돼요.
그런데 이들은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던 그 주님의 능력이 자기들과 함께 한다라고 생각을 하고
아이성 전투를 어떤 식으로 벌이느냐? 인간의 전쟁으로 바꿔치기 해버립니다.
‘저 강력한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우리’라는 거예요. ‘나’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전략을 여기에서 내보냅니다.

(수7:2)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편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일러 가로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수7:3)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천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 하므로
(수7:4) 백성중 삼천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여호수아도 이 정탐꾼들의 생각과 일치하죠.
우리 같으면 ‘여호수아만은 다를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희한하죠.
정탐꾼의 반응대로 2~3천명만 올라가서 쳐도 충분합니다.
여호수아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치러 올라갔는데 누가 이깁니까?
아이성 사람들이 이기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하게 되죠. 여기에 보면

(수7:5) (아이 사람이) 그들의 삼십 륙인쯤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와서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생각을 먼저 합니다. 아간을 먼저 떠올리죠. ‘아간 때문에 졌다.’
아간 때문에 진 게 아니라 그 아간 한 사람의 그 모습이 누구를 대표하느냐?라고 할 때는
여리고성 전투를 목격한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고 있는 겁니다.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이죠. 나의 전쟁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어떤 전쟁도 쉬운 전쟁이 없죠.
여호와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한 사람도 못 이겨요. 골리앗 한 사람도 못 이기게 돼 있어요.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면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게 되죠.
그것이 여호와 전쟁의 특징입니다. 사람이 많고 적음의 차이가 아니에요.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100만 대군이라도, 상대가 천 명밖에 없더라도,
사람의 전쟁으로 덤벼들면 이깁니까? 집니까? 무조건 지게 돼 있어요.
근데 우리는 그런 생각 안 하잖아요. 우리 우리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저만 그런가요?
‘아 저거는 주님이 안 도와줘도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밥 정도는 제가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달에 한 1억 버는 거는 제가 못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이게 우리들의 논리 아닙니까?
‘암은 주님이 고쳐주셔야 되는데, 오늘 수요예배는 오는데 발걸음은 제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좀 기다리세요.
‘줌으로 제가 들어오겠는데, 그거는 제가 할 수 있어요.
주님 제가 주일날 교회 가는 건 좀 멀어서 그거는 주님이 좀 도와주세요.’
이런 논리가 인간이 갖고 있는 논리예요.
이 여리고성 다음에 그 아이성 전투의 이 모습이 남의 모습이 아니고,
이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있다라는 것은 ‘우리가 똑같이 그들과 다르지 않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성도는 어떤 위치에 있어요?
성도는 십자가로 승리한 전쟁 속에 합류한 자들이죠.
그러면 승리한 것을 목격하는 자들이잖아요.
그러면 이 전쟁이 어떤 전쟁이어야 됩니까?
나의 전쟁이 아니죠. 그럼 피만 자랑하는 전쟁이 돼야 되잖아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이 논리는
‘너희들이 지금 주님의 일에 참여한 모습이 어떠한 형편과 상황에 놓여 있는가?’에 대한 말씀이에요.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주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한 그 성령을 그들에게 부어주셨잖아요.
그러니 그들은 주님의 일에 참예한 자예요.
여기에는 나의 이익과 나의 유익을 구할 그러한 어떤 요소들이 전혀 담겨있지 않다라는 얘기입니다.

다시 여기로 돌아가 보면 결국 아이성 전투에서 실패를 했는데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를 하는데 13절에 보면

(수7:13)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중에 받친 물건이 있나니
            네가 그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제하기 전에는 너의 대적을 당치 못하리라 (11절에 보면)
(수7:1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수7: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하나님 말씀이 되게 어려운데,
여리고 백성들 자체 그리고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진멸하라는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거거든요.
‘바쳐라’는 것은 ‘진멸하라’는 명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중에 바쳐야 할 물건을 본인이 취해버렸어요.
본인이 취했으니까 본인도 어떻게 바뀌느냐?라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인데 어디로 편입됩니까?
여리고 백성으로 편입되어서 하나님께 바쳐져서 진멸할 대상으로 편입됐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걸 누구와 비교할 수 있는가? 하면 앞서 기생 라합과 비교할 수 있는 거예요.
비록 기생 라합은 여리고성 사람이지만, 정탐꾼을 숨겨줌으로 말미암아 어디로 편입됩니까?
이스라엘 백성으로 들어와버리죠.

이와 달리 아간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고, 광야를 겪어왔거든요. 출애굽 세대는 아니지만.
광야를 겪어왔고 요단강을 건너왔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서
바쳐야 할 물건을 훔침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합류되어서 진멸당할 대상이 되었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진멸당할 대상이 어디 속에 들어와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들어와 있죠. 그러면 누가 진멸당해야 됩니까?
이스라엘 백성도 진멸에서 피할 길이 없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앞서서 36명이 먼저 진멸당합니다.

우리는 36명은 억울하다 생각하지만, 앞서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죠.
이들의 전쟁 방식을 보세요.
여호수아도 여호와 이름의 전쟁 방식을 완전히 사람의 전쟁 방식으로 바꿔버렸죠.
이 사고 자체가 아간의 사고 방식이라는 겁니다.
아간을 대표해서 뽑아내어서 지금 이스라엘의 현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히 여기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만나를 매일 내렸잖아요. 이후에 약속의 땅의 전쟁도 똑같습니다.
우리 같으면 여리고성 다음에 아이성은 좀 이렇게 순조롭게 들어갈 것 같은데,
여리고성 딱 끝나자마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는 상황이 발생한 거예요.

여기에서 이 아간의 문제,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이나 여호수아의 문제가 무엇이냐?라고 할 때는
이 전쟁은 누구의 전쟁입니까? 여호와 이름의 전쟁이죠.
여호와 이름의 전쟁이라는 것은 자신들의 전쟁이 아니고,
언약궤가 앞장섰다는 것은 희생물이 있는 자와 없는 자와의 전쟁입니다.

이들은 죄 용서받은 자죠.
죄 용서받았다는 것은 자기들은 죽은 자라는 거예요.
그런데 저쪽은 뭐가 없어요? 언약궤가 없죠.
그러면 저들은 죄 용서가 없는 자니까 저들은 산 자죠.
죽은 자와 산 자의 싸움은 누가 이깁니까? 죽은 자가 이기죠.
요즘 영화에는 죽은 자하고 산 자가 싸우면 산자가 이겨요. ㅎㅎ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함에 있어서 자기 전쟁, 나의 전쟁을 하는 게 아니에요.
여호와 이름의 전쟁을 하기 때문에 그들은 죽은 자로서 함께 참여한 전쟁을 하는 겁니다.
여기에서는 나의 공로가 들어갈 여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런데 아간은 공로가 들어갈 여지가 있었고,
아간뿐만 아니라 지금 여호수아와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 정탐꾼들이
이 아이성 전투를 보는 그 안목이 누구의? 힘의 전쟁으로 바꿔치했잖아요.
그러한 모습들이 지금 여기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겁니다.

결국 이 아간이 불살라집니다. 진멸됩니다.
그 집안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진멸당하는,
그러한 어떤 이스라엘의 대표자의 본보기로서 그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거예요.
여기에서 이 전쟁, 이 전쟁과
그다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이 말씀과 관련성이 있다라는 얘기예요.

지금 아간이 해야 될 일은 여호와의 이름만을 드러내는 일을 해야 되는데,
자기 이름을 거기에 드러내려고 한 거예요.
여호와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를 불살라버립니다.
불사름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이름을 제대로 증거하게 돼요. 그게 구약의 인물입니다.

그런데 신약은 전혀 달라요.
뭐가 다르냐? 할 때는 신학은 끝이거든요.
신약은 십자가로 완료된 세상이기 때문에
만일에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이 말씀에 합류하지 못한 자가 있다면 돌아올 길이 없어요.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이 말씀에 해당 사항이 없죠.
해당 사항이 없으니까 이 말씀을 어떤 식으로 적용하겠습니까? 율법으로 적용하죠.
율법으로 적용하니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는 겁니다.
‘나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이 복음을 전한다’는 거예요.
그럼 복음의 내용이 나와야 되는데, 복음의 내용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나와야 되는데
복음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해요.

주일날 두 번이나 들었으니까.
아볼로가 성경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알았습니까?
예수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예수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아요. 희한하죠.
예수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듣기 좋아해요.
그거는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더 좋아하죠. 예수님은 이런 분이고, 이런 분이고...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비 마귀에게서 난 마귀 새끼입니다.‘
’우리는 지옥 가도 마땅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없으면 지옥 갑니다.‘
이걸 외치는 순간 그들의 안색이 바뀌게 되는 거예요. 받은 게 있어야 거저 주죠.

제자들은 지금 이 중간 과정에 있다라고 표현해야 될까요?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줄.
육에 속한 자의 모습도 보여주고,
성령을 받았을 때의 모습도 동시에 보여주는 겁니다. 가룟 유다도 거기에 들어가고요.

은혜로 선물을 받은 자만이 거저 줄 수 있어요. 그럼 뭘 줍니까?
그건 간단하죠. 사도행전에 보면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외에는 알지 않기로, 그것만 전하고 자랑을 하는 거예요.
그걸 주는 겁니다.

근데 이 복음은 돈으로 거래가 될까요?
이 자본주의 시대에는 다 돈이잖아요. 돈으로 거래가 되겠습니까?
재밌는 것은 갈라디아서에 가면 이 복음을 바꿔치기 하죠.
바꿔치기 위해서 사람에게 듣기 좋은 소리로 만듭니다.
사람에게 듣기 좋은 소리가 뭐냐? 들어가 보면
무엇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게 하자는 거예요.
예수님만 믿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안식일도 지키고
요즘 그 하나님의 교회처럼 유월절도 지키고, 주일 지키지 말고, 십일조로 하고...
그러한 어떤 월삭과 절기를 지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제대로 예수님을 믿는 길이다.
이렇게 소개를 하는 겁니다.

근데 그것과 이익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는 거예요.
우리는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전하는 자에게 이익과 관련이 없다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십자가를 전하지 않는 순간 모든 것들은 명령이 되고, 법이 돼요.
이게 재밌어요.

율법을 받아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율법을 가르치죠
우리는 율법대로 가르쳤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 당시에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다 랍비의 종이 돼 있어요.
이게 육에 속한 자들의 특징이에요.
그래서 목사가 ’이것을 지켜야 됩니다.‘ ’이걸 믿어야 됩니다.‘ 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자기 종을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이용하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을 아무리 외쳐도
이미 그 속에는 자기가 시키는 법이 교인들에게 전달이 되는 거예요.
전달되면 교인들은 그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죠.
재미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니까 순종을 하죠.
순종을 하면서 마지막에는 누구의 종이 되죠? 목사의 종이 되는 겁니다.
교회가 다 이런 모습을 띠고 있어요.

십자가를 전하지 않으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이 말씀에 걸려들어서
모두가 다 어떤 자리로 들어가야 됩니까? 전부 다 거래예요. 거래.
그러면 목사만 거래하느냐? 아니 교인들도 거래하죠.
내가 줬으니까 내놔라는 거예요. 거저 받은 게 없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에게.

구약 성경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아람 군대장관 나아만이 나오죠. 엘리사가 이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줍니다.
물론 엘리사가 고쳐준 건 아닌데, 주께서 그렇게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당시에 이 북이스라엘, 남유다도 포함될 수 있는데,
수많은 문둥병자가 있었는데, 이방인 아람사람 나아만만 고침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나아만만 고침을 받았다라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거든요.

지금 이 형국이 어떤 형국이냐?라고 할 때는
어떤 문둥병자도 고침을 못 받는데 이방인 나아만 고침을 받았다는,
이쪽에 와서 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강제로 끌고 온 거예요. 강제로. 이스라엘에 끌고 와서.
분명히 이스라엘 땅이라는 것은 약속의 땅인데,
그 속에 있는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아야 되는데, 아무도 고침을 못 받았거든요.

그러면 이방인이 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이 땅 자체가 어떤 상태냐?라고 하면
거의 문둥병자 상태라는 거예요. 물론 전신이 하얀 문둥병자는 아니고.
주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그러한 상태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심판의 상태라는 거예요.

이 상황을 목격한 자들은 뭘 어떻게 해야 돼요?
’이제 우리는 죽어 마땅한 것밖에 없구나. 주님의 긍휼이 없으면 살 길이 없구나.‘
이런 태도를 취해야 되는데, 이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어떻게 행동을 취합니까?

이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 같은 경우에는 사례를 하려고 합니다.
병을 고쳐줬으니까 감사하죠.
이것이 인간의 도리죠. 그래요? 안 그래요? ’인간의 도리‘ 우리 좋아하잖아요. 인간의 도리.
인간의 도리 안 하면 사람들이 다 삐져요.
복음을 알아도 인간 도리 안 하면 삐져요.
인간이 얼마나 악마적인지 아시겠죠.

또 복음 이야기했다가 인간 도리 안 하면 삐져가지고 복음도 날려버립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해야 돼요.
오죽하면 칭찬합시다가 나오겠어요? 칭찬하면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세상 자체가 이 십자가 복음의 세계를 인간의 세계로 다 바꿔치기 하는겁니다.

사례한다라고 하니까 그건 당연하잖아요. 우리 같으면 당연히 받겠죠.
여러분 같으면 안 받겠어요? 받죠.
근데 엘리사는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엘리사는 거절하죠.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있던 게하시가 엘리사와 함께 한 사람이었잖아요. 그럼 눈으로 다 봤잖아요.
그 말씀을 안 들었겠어요? 여러분 이게 좀 궁금하지 않습니까?
옆에서 계속 같이 따라다니는데 복음을 이해 못해요.

여기만 있는 게 아니고, 가룟 유다도 있잖아요. 3년 동안 같이 따라다녔거든요.
’나는 안 그럴거야‘
나는 무슨 보장을 해요?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하거든요.
’난 복음 열심히 들었으니까 나는 가룟 유다처럼 안 그럴 거라‘ 이게 수상한 거예요.
’제가 가룟 유다입니다.‘ 이러면 감사한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게하시를 옆에 둬 가지고 그 역할을 하게 하는데,
게하시가 ’내가 반드시 사례를 받고야 말겠어.‘
꼭 옛날에 그 선전에 ’치토스. 먹고야 말겠어.‘ 그거하고 똑같은 거거든요.

왜 받아야 되겠다고 생각을 합니까?
내가 지금 엘리사 밑에서 시종으로 뼈빠지게 일하는데 돌아오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이런 것도 재밌어요. 보면.
은혜로 거저 받았으니 그냥 거저 주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 모든 것이 거래의 세계죠.
이 세계를 들여다보면 전부 돈에 미친 세계잖아요. 선지서를 보게 되면 돈에 미쳤거든요.
그 대표자로서 이 게하시가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뭐라 합니까? ’지금이 그것을 받을 때냐?‘ 이 얘기예요.
지금 아람 군대장관 나아만이 이곳에 와서 고침을 받았다라는 것은
이스라엘 형편 자체가 심판이라는 이야기거든요.
그렇지 않아도 그 당시에 거짓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모두가 다 돈으로 먹고 사는 자들이었잖아요.
율법을 가르쳐서 돈벌이 수단으로 하고, 예언해서 돈벌이하고... 다 그 세계거든요.
그것을 지금 게하시가 앞장서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러한 게하시같은 자들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을 주시게 되면
문제는 누가 성령 받았는지 모르죠.
모두가 다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한다‘라고 이야기하죠. 여러분도 마찬가지잖아요.
복음 안다는 사람이 ’나는 주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 봤어요? 그거 더 이상하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이 노리는 바는
’나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해가지고
자기가 ’나는 진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는 선지자입니다.‘
아 말 백날해도 인간은 못 벗어나요. 말장난에 불과한 겁니다.
물론 언어라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은 할 수 있는 거예요.

아나니아와 삽비라나 아니면 마술사 시몬이 사도행전에서는 드러났잖아요.
그런데 가룟 유다를 보면 언제 드러나요? 마지막 때 드러나죠. 제자들도.
예수님의 천국 비유에 있어서
알곡과 가라지가 마지막에는 오히려 ’뽑지 마라‘ 갈 때까지 가라 얘기거든요.
그 요소와 저 요소가 동시에 다 담겨 있는 겁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은 누구에게만 해당되느냐?라고 할 때는
열한 제자. 끝까지 사랑한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에요.
놀랍게도 이 말씀은 누구를 피해 갑니까? 가룟 유다를 제외시켜 버립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여기에서 확 드러내느냐?라고 할 때는
십자가의 피 능력을 여기에서 드러내는 거예요.

그럼 십자가의 피 능력이 드러나려면 두 가지 요소가 나와야 되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복음 전파자와 사도 바울처럼. 그죠?
이와 달리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을 이야기하면서도
그렇게 하니까 ’나에게 내놓아라‘하는 자들, 그들이 드러나겠죠.
이건 제가 너무 들어간 거고,

그와 달리 이 복음이라는 걸 이용해서, 복음을 변개하는 거죠.
변개하는 자들도 있고, 복음을 이용하는 자들도 있고, 돈 벌려고 돈벌이로 쓰는 겁니다.
사실 돈벌이가 되면 다 복음을 변개한 거예요.
자세히 들어보면 내용은 맞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자기도 모르죠. 발람 선지자처럼.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막 외치는데 마음은 어디에 가 있어요?
콩밭에 가 있거든요. 뇌물에 가 있어요. 뇌물에.

결국은 마지막에는 뇌물 받고,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 가운데로 몰아넣는데 성공을 하거든요.
자기도 몰라요.
그러한 두 부류로 갈라지면서 십자가의 완료성을 이 땅에 드러내는
자기 백성, 자기 증인들을 주께서 친히 세우시는 겁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사랑을 입었기에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입혀주신 분이 친히 십자가 복음을 전케 하시고 그 가운데 가짜들을 골라내셔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이 땅 가운데 밝히 드러내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개인이 꿈꾸고 소망하는 그러한 천국들이 무너지게 하시고
십자가로 세우신, 십자가 안에 만들어진 그 천국 속에서 감사하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