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7-27 22:04
20200727 수요모임 마 10:9-15 일꾼과 품삯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1  
https://youtu.be/KBI8zpiBqGo

관리자 22-07-28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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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7 수요모임 일꾼과 품삯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을 주의 이름으로 모이게 하시고 말씀 앞에 서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말씀이 살아 있어서 주의 백성들을 말씀 안에 거하게 하시고
말씀이 이루어짐 속에 저희들을 넣으셔서
십자가의 피 공로만을 자랑하는 주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10장 9절에서 10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마10:9~10)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9절 말씀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당시에 돈은 전대에 넣어 다녔고
우리 한국 같은 경우에도 과거에 보면 돈을 이 전대. 얼마 되지 않았죠. 그죠?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전대에 넣어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고
제 경우에는 어릴 때 그 허리띠를 이렇게 잘라가지고 거기에 돈을 넣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어요.
예라고 하니까 지금. 그렇게 다녔는데 여기에 보면

(마10: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가지지 말고’라는 단어가 나와요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이죠.
거기에 똑같이 병행 구절들이 나오는데 차이점이 있어요.
있는데 ‘전대에 동전을 넣고 다니지 말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9장을 한번 볼까요. 누가복음 9장 1절에서

(눅9:1~3)
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3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누가복음에서는 ‘어떠한 것도 가지지 말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요.
마가복음 6장을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6장 7절입니다.

(막6:7~8)
7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여기에는 ‘전대의 돈’이라고 표현을 하거든요.
마가복음에서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그와 다르게 ‘어떤 것도 가지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차이가 나죠? 차이가 나면 사람들은 고민을 해요.
고민할 거 없습니다. 그냥 차이 나는 대로 보고 읽고 그다음 성령을 따라 해석하면 돼요.
이걸 육으로 해석을 하려니까
차이 나는 것을 계속해서 차이 나지 않는 방식으로 끌어당기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사복음서를 비교하여서 어느 말씀이 진짜 오리지널인가?
그렇게 해서 자기가 ‘이게 진짜 오리지널이다.’ 이렇게 주장하게 되거든요.

2천년 기독교 역사가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해 왔어요. 사실은
그게 조직 신학이거든요.
조직 신학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끌어모아가지고 정답을 알려주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고 그다음 성경은 어떠한 거고
계시록부터 출발하는지 신론부터 출발하는지
안 그러면 기독론부터 출발을 하든지
성령론, 교회론 이런 것들을 쭉 정리를 해서 설명을 해주는 거예요.
사복음서를 보는 안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럴 것 같으면 우리들의 요구를 다 알잖아요.
그러면 성경을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고
요즘 우리가 레위기를 이렇게 월요일 화요일 금요일 밤에 보고 있는데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그래서 읽을 때 확 넘어가 버리잖아요.
아 출애굽기에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고

인간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면 자기 꼬라지를 몰라서 그래요.
자기가 날마다 바뀌거든요. 말씀은 살아있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변하잖아요.
변하는 가운데 말씀이 새롭게 계속 주어지면
그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작용을 하게 되면
십자가의 놀라운 그 사랑이 새롭게 부각이 되고 죄의 깊이가 드러나게 돼 있거든요.
우리들은 답을 알기 때문에 또 또 그 얘기.

제 설교를 지금 천 편 넘게 올라와 있는데 보니까 1300편 정도 올라와 있는데
그거 다 읽으면 다 들으면 다 들을 필요도 없어요.
한 10개만 들으면 ‘또 그 이야기네.’ 그 이야기죠?
성경이 십자가 이야기지 다른 얘기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성령이 역사하지 아니하면 십자가 사랑의 깊이를 알아갈 수가 없고
그러면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원망과 불평이 나오겠죠.

지팡이와 관련되어서 마가복음에서는 ‘지팡이를 가져라’ 하셨고
누가 복음이나 마태복음에서는 가지지 말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은
각 복음서마다 특징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마태복음을 보고 있는데요.
아까 전대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는데 ‘그 전대에 돈을 넣고 가지 말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여기에 나오는 전대, 마태복음에 나오는 전대가
그 전대와 동일한 전대일 거라고 먼저 전제를 깔아버립니다.
깔아버리니까
‘아, 복음을 전하러 갈 때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넣고 가지 말라 그렇게 하시는구나‘
맞아요. 그 말이 맞아요.

그런데 그 의미가 과연 어떠한 의미인가? 그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생각할 때 복음을 전하러 갈 때 왜 금이나 은이나 동을 넣고 가지 말라 하실까요?
아니 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아주 재미있는 해석을 봤어요.
재미있는 해석이 뭔가? 하면 조금 다르게 해석했어요.
이 부분을 이 ’가지지 말라‘는 이 단어가, 헬라어 단어가 ’얻다‘라는 의미도 있어요.

원어라는 자체가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말장난입니다. 말장난
철학자들이 말장난을 하거든요.
자기 용어를 만들어내요. 만들어내서 철학이 어려운 게 그거잖아요.
철학책 보면 똑같은 말인데 다 달라, 의미가. 원어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똑같아요.

어쨌든 그 의미가 이렇게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으니까
여기에 ’얻다‘라는 그러한 의미를 집어넣어가지고
’하지 말라‘는 헬라어 단어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거든요.
조금 과하게 해석하면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어요.

’복음 전하면서 금을 얻고 은을 얻고 돈을 얻는 짓을 하지 말라.‘
이렇게 이제 해석해 놓은 사람도 있어요.
물론 맞는 해석인데 그렇게 가면 너무 가버렸죠.
나름대로 자기 따나 지금까지 해석해 온 바와 다르게 해석해 보려고 그렇게 접근을 했는데
참신하다 그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면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러 갈 때 왜?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라 하셨을까요?
말라고 하셨을까요? 답변하고 싶으면 하셔도 됩니다. 생중계를 하니까 괜찮아요.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뒤에 나오잖아요.
뒤에 뭐라고 나옵니까?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 때문에 이 부분의 해석을 모두가 다 이쪽으로 무게추를 기울여서 해석을 해요.

주님이 먹이고 입히고 살리시는데
’네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넣어 가서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다.
이것아 제발 좀 믿어라. 믿음이 없는 것아‘
그 정도 가면 이미 믿음이 없는 자들이죠.
말씀은 말씀하신 분이 이루어내시는 것이지 우리가 이루는 게 아니에요.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이 이 말씀을 지켜냅니까? 아니잖아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잖아요.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다가가면 제자들의 죄만 드러나는 겁니다.
왜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가? 아주 간단하죠.
지금 앞부분에서 주님께서 무얼 말씀하셨습니까?

(마10:8)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을 하셨죠.)

이 앞뒤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이 있고
뒤에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말씀이 이렇게 앞뒤로 놓여 있으니까
이 중간에 있는 말씀을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돈으로 복음을 팔지 말라‘는 이야기예요.
물론 그 뒤에 나오는 ’일군이 자기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고요.

지금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이 내용의 의미가 뭐냐?라고 할 때는
복음 전파자가 한정을 짓지 않겠습니다.
목사가 되었든 교인이 성도가 되었든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이거든요. 이 말씀은
양날의 검이에요. 양날의 검.
한쪽을 말씀하시면 다른 쪽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라고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하죠.
뭘 받았습니까? 예, 성령을 받았죠. 십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의 영을 받았으니까 이것은 자기가 뭔가 대가를 지불했습니까? 하지 않았습니까?
지불하지 않았죠.
자기가 한 짓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팔아먹는 죄, 십자가에 못 박은 죄밖에 없어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그러면 자기가 받았으니까 자기가 줄 수 있나요? 아니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죠.
주께서 일을 하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거예요.

문제는 인간이 거기에 개입되죠. 죄인이 거기에 개입된다라는 겁니다.
반드시 죄인을 사용하죠.
주님이 일하시는 자리는 반드시 죄인을 사용합니다.
사람 빼고 일하지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그런 거거든요.
‘주님이 일하시니까 한번 보자.’ 보면 없어요.
왜 없는가? 하면요. 주님이 다이렉트로 일을 해버리면 무엇이 없을까요?
죄가 없어요. 죄가 없으면 의가 안 나와요.
사람들이, ‘믿음이 있다’라는 사람들이 다 그런 믿음을 갖고 있거든요. 지금 주님께서

(마10: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너희들이 지금 가고 너희들이 주고 받아야 되는 이 모든 요소들이
누구로부터 나오느냐?라고 할 때는 주께로부터 나와요. 거저 받았죠. 거저 주죠.
그다음 ‘일군이 저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할 때 그 받는 것도 뭐예요?
거저 받는 거예요.

문제는 이 금이나 은이나 동을 전대에 차고 가면 어떤 짓을 벌이게 되느냐?라는 겁니다.
이게 우리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그럴 리가 없다라고 생각하지만
이 복음의 세계에 마귀가 개입해 들어오죠.
들어오면 복음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이 복음을 뭘로 바꿔버립니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를 거저 주는 게 아니라
돈을 주고 뭘 줍니까? 복음을 주는 거예요.

(그런 게 있습니까?) 중국에 사셨으면서 그런 게 있습니까?가 어디 있어요?
제가 24년 전이니까 벌써 그 전에 갔을 때
그 당시에 미국 교포 목사들이 엄청 많이 들어왔고요. 그들이 돈을 한 보따리 들고 다녔어요.
한 보따리가 상상도 못할 액수예요. 그 당시에 중국의 어떤 경제적 상황이라고 보면
한국 돈으로 그 공인들이 월급을 한 5만 원 받을 때였죠. 5만 원 6만 원 받을 때였으니까
미국에서 중국에 복음을 전한답시고 교포들 목사들이 와가지고 돈을 뿌렸어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이게 아니라 전대에 돈을 가득 채우고

그때 제가 이런 간증을 하면 안 되는데 그 가방 하나 매고
저기 동북상선 쪽으로 한 2주 정도, 가정교회를 찾아다니면서
아무튼 그렇게 다니면서 이제 구체적인 얘기는 안 할게요.
그렇게 다녔는데, 다니면서 그때는 중국어를 거의 못 할 때였는데

어쨌든 거기 만나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뭔가 하면 ’돈 가져왔느냐?‘ 이 얘기예요.
거기에서 그 당시에 24년 전입니다.
뭐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는가? 하면 선교사가 돈을 줬는데
그걸 이제 가정교회하라고 교회를 사라고 돈을 줬어요.
그러면 그걸 먼저 받는 사람이 임자잖아요.
자기 이름으로 해버립니다. 그거 갖고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부자 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그 당시에 전도사들 배운 것도 없습니다. 정식 신학교 나와도 학벌이 엄청 낮은 사람들인데
돈맛을 얼마나 제대로 아는지.
그리고 어느 전도사 정도가 되면 가정 교회의 네트워크가 워낙 많아 가지고
수십 개 수백 개가 되거든요.
그러면 선교사들에게 내 밑에 있는 교회가 100개가 넘습니다.
’목사님이 오셔가지고 강의하시면 100군데에서 오게 되면 차비도 줘야 되고
그들이 일을 못하니까 노동비도 줘야 되고...‘ 아 진짜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그 돈을 쏟아붓고 전대에 금 은 동을 차고 주는 겁니다.
그러면서 애를 달구죠.
’너희들이 못 사는 이유가 예수 안 믿어서 그렇다.
미국이 왜 잘 사는지 알아? 예수 믿어서 그렇다‘

지금은 어떻게 됐어요? 물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제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이 경제가 굉장히 올라갔잖아요.
이게 거기만 그랬던 게 아니라
한국에 복음이 들어올 때도 조선에 복음이 들어올 때도 똑같았어요. 어느 지역이든

생각을 해보세요. 십자가 피가 구원한다. 이게 대화가 돼요?
대화가 뭔가 돼야 복음을 전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선교사들이 돈을 가지고 와서 학교도 하고 병원도 하고 했을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그게 2천년 기독교였어요. 십자가로는 안 통하거든요.

로마 제국 아래의 기독교는 권력과 칼이죠.
그래서 기독교를 삼위일체 교리로 바꿔가지고 아무튼 믿기 쉽게 만들었어요.
십자가는 그냥 모양만 올려놓고 ’삼위일체를 믿으면 구원 얻는다‘
그 구원 얻는 정도가 아니라 믿어야 어디로 올라가요? 정계에 진출을 할 거 아니에요.
안 그래요? 그 윤석열 밑에 조금이라도 봉사를 해야 청와대에 들어가서 일할 수 있는 거잖아요.

지금이야 그게 상당히 비난의 대상이지만 그 당시에는 당연한 거잖아요.
기독교로 들어가야 되죠.
온누리 교회로 가야 돼요. 온누리 교회입니까? 사랑의 교회 입니꺼?
사랑의 교회로 가야 돼요. 법조인 800명이 있는데
대한민국 대통령보다 더 위에 있다는 그런 교회로 가야 돼요. 먹고 살려면
장사를 하려고 하더라도 교인들이 최소한 10만 명 있는 데 가면 한 사람만 사줘도 돈이 되잖아요.

이 전대에 금과 은과 동을 차고 다닌 거예요.
복음을 뭘로 바꿔버립니까? 완전히 장사로 바꿔버린 거예요.
구약에도 똑같이 있었어요.
장사로 바꿨는데 그 사람들이 밑지는 장사 하겠습니까? 선교사들이 목사들이 밑지는 장사하겠어요?
돈을 1억 원 갖다 부으면 뒤에는 어느 만큼 더 와야 돼요? 최소한 10억은 와야 되겠죠.
10억은 안 오더라도 1억은 와야 되겠죠. 밑진 장사 안 합니다.

바보같이 그냥 순수하게 복음 전한다고 복음도 아니면서 그런 사람은 거지같이 살고
빨리 낯짝이 두꺼워져가지고 서로 윈윈하는 관계로 자기는 돈을 갖다 이렇게 수급하는 쪽,
이쪽은 사람들을 모아주는 쪽, 그러한 일들을 벌이는 거예요.

말씀이 이렇게 있어도 말씀을 안 믿는 거죠.
그들에게 중요한 건 뭐예요? 저들을 믿게 하는 게 중요하죠.
그러면 믿게 한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되잖아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준다‘라고 자기도 영생을 거저 받아놓고

이 제자들이 지금 성령을 받을 때 어떻게 받았어요?
모든 것을 버리고 저를 쫓아서 받았습니까? 목숨을 버려서 받았어요?
(그런데 지금 이때는 성령이 안 왔지 않아요.) 제자들에게?
성령이 안 왔죠. 아직 안 왔는데 지금 이 말씀은 사도행전을 뚫고 있고요.
지금까지를 이렇게 관통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못 알아듣죠. 지금 무슨 말인지
말씀이 먼저 있고 말씀 속에 제자들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활동은 말씀이 이루어지는 현장이 되죠.
놀라운 것은 제자들 중에는 가짜 제자들이 또 드러나겠죠.

그러면 이 말씀과 정반대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거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저 안 주는 인간들이 나온다는 이야기예요.
그러면 ’거저 받았다‘라고 하는 자가 가짜가 되겠죠.
논리가 이상하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을 하셨으면
거저 받은 자는 반드시 거저 주게 되는데
이후에는 그저 받아놓고 거저 안 주는 자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건 누구의 안목이에요? 인간들이 볼 때는 그렇게밖에 안 보이잖아요.

주님 쪽에서는 다 아시죠.
시선이 어디에 가 있느냐?에 따라서 이 말씀 자체가 달라지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미 다 아십니다.
돈벌이 하려고 복음을 이용할 자들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우리 지난번 사도행전 19장 볼 때 치마로 바울의 치마를 올리니까 병이 나잖아요.
앞뒤 설명이 하나도 없어요. 이런 게 재미있는 거예요.
그거 갖고 돈 장사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얼마든지 그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이런 것들을 가지지 말라. 복음은 돈으로 구하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받은 것끼리만 이 교류되는 성령의 교통함 속에서만 있는 복음 전파라는 겁니다.
정말 신기하죠.
’뭔가를 대가를 지불한다. 대가를 받는다‘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무엇이 들어간 거예요?
나의 수고와 나의 피와 땀과 노력이 다 들어간 거예요.
십자가를 날려버리는 겁니다.

목사님이 한 달 동안 설교로 수고했으니까 제가 사례를 드리겠습니다.
이건 뭐예요? 노동 가치로 보는 거죠.
이미 교회가 이렇게 된 지 오래됐어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이 말씀과는 완전히 상관없죠.
받은 게 없으면 안 줘야 되거든요.
설교가 복음이라는 게 그렇거든요. 거저 받았으니 거저 내놓는 거예요.

내가 연구를 했고 말씀 준비를 해서
내 수고와 땀의 대가가 ‘어 시간당 대학 교수보다는 높아‘ 누가 이렇게 나오면
복음 전파가 뭐가 되죠? 수고의 대가가 되죠.
’일반 대학을 졸업했고 대학원을 나갔고 박사학위까지 받아가지고 복음을 전하면
내 사례가 이것밖에 안 나와?‘
제가 목사를 지금 예를 들지만, 성도들도 똑같은 거예요. 논리가

거저 받은 것이 없으면 내놓으면 안 돼요. 그것은 지옥 갈 일입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사도행전 5장에 나오잖아요.
거저 받았으니 거저 내놔야 되는데
받은 것도 없는데 누구를 속이죠? 성령을 속이죠. 받은 것도 없는데
이 정도 가면 이제 사실 탄식이 나와야 돼요.

신기한 일은 이런 겁니다.
금이나 은이나 이 동을 지불하지 않았는데 십자가 복음을 믿는 자가 생긴다는 거예요.
이건 정말 거저받은 거잖아요.
그래야만 서로가 십자가 안에서 하나가 될 거 아니에요.
만일에 이것이 뭔가 자신의 수고와 노력과 뭔가 금전적인 것이 거기에 고리가 걸려 있으면
나중에 그 수고와 노력을 폄하하면 관계가 깨지죠.

재미있는 게 그런 거예요.
아까 선교사가 그런 얘기했지만 돈을 주다가 안 주면 뭐라 하는지 아세요?
’네가 안 주면 나 딴 놈한테 가지‘ 이러해요.
돈을 줄 때는 붙어 있죠. 돈을 안 주면 언제든지 떨어지게 돼 있습니다.
그게 이 세상에 직장에 있는 직원과 회사와의 관계가 똑같은 거잖아요.
월급 안 줘보세요. 누가 옵니까?
월급 안 주는데 일하러 옵니까? 복음을 장사로 바꿔버린 거예요.

목사도 복음을 장사로 왜 바꾸는가? 하면 개척 교회 하는 것 때문에 그래요.
아까 제가 물었거든요. 이 정도 시설이면 어느 정도 들어야 됩니까?
최소한 보증금 3천에 월 한 500 정도는 내야 될 것 같습니다.
여기 건물이 워낙 좋은 데니까, 건물 좋은 데 맞죠. 저는 잘 몰라서 좋고 나쁘고.
(우리도 재물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아니 그래서 개척교회를 할 때 목사가 투자를 했어요.
나도 천만 원 내고 이제 장로님도 천만 원 내고 천만 원 냈어요.
네 그다음에 여기 와서 왔는데 아무도 안 와요. 수요일이라서 아무도 안 온다 칩시다.
주일날 아무도 안 왔다 칩시다.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거저 받은 게 날아가겠죠.
거저 받았다는 게 가짜가 되는 겁니다. 그때부터는

그때부터는 설교가 어떻게 바뀌어야 되죠?
월 매월 내는 월세라고 합니까? 그거를 지금 충당을 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러면 한 사람한테 족치는 겁니다. 헌금 많이 하라 하면 삐져서 나가니까
가서 빨리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든지
가짜 복음을 계속해서 내뱉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한 일들은 교회사에 가득한 거고요.

지금 길거리에 나가면 이단들이 다 하는 짓거리였고
그 짓을 누가 했느냐? 기존 교회가 다 한 거예요.
권력을 모아야 되는 거거든요. 결국은
인간들이 무엇을 갖고 활동할지를 주님은 다 아시는 겁니다.
이게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정반대의 내용이 나오죠. 사도행전 3장을 봅시다.
잘 아는 내용이지만 말씀을 또 읽으면 또 새롭거든요. 3장 1절에 보면

(행3:1~5)
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이 태도 있잖아요.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는 태도.
무엇을 얻고자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사도행전 3장을 알기 때문에 금 은이 아니라 병 낫는 거예요.

교회, 오늘날 교회가 이래 왔거든요.
아예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예수 믿는 이유가 무엇을 얻고자 나오잖아요.
즉 그것까지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신 겁니다.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걸 줍니까? 원치 않는 걸 줍니까?

영생을 우리가 원했어요? 원하지 않았어요? 참 어려운 질문이죠.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영생을 원하잖아요.
우리가 원하는 영생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치 않는 영생을 주셨죠.
근데 인간들은 우리가 원한 영생을 주신다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지금 이 성전 미문에 앉은 이 사람이 ’무엇을 얻을까 하여‘라고 할 때
동냥을 했으니까 돈을 얻고자 했겠죠.
금이라도 주면 좋겠죠? 그래서 전대에 금 차지 말라는 거예요.
아마 베드로와 요한이 있었으면 그걸 줬을 거예요.
그 자체가 없죠. 없는 상태에서 이 사건을 마주치게 된 겁니다.

’금이나 은이나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준다‘ 하죠.
거저받은 내용을 네게 준다. 이게 가능합니까?
또 이런 걸 보면서 우리는 또 흉내내고 싶잖아요.
길거리 지나가다가 그 앉은뱅이 있으면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이게 통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성령의 일이죠. 주의 일입니다. 그럼 주의 일은 이 방식으로밖에 안 이루어져요.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주의 일이 드러나게 돼 있거든요.

문제는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준다‘ 했을 때 외부에서 보는 시선은 어떤 시선입니까?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었다.‘ 이것뿐이에요. ’성하게 되었다.‘ 이것뿐이에요.
그런데 앉은뱅이나 이 받은 것들을 내어놓는, 주는 그 베드로와 요한의 입장에서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주가 되게 하셔서
그 주가 바로 이 사람을 성하게 했다라는 겁니다.

이 ’성하게 했다‘라는 용어 자체도 육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걷는 게 성하잖아요.
근데 그게 성한 겁니까? 제발 좀 영적 눈을 뜨세요.
구약 이사야를 보게 되면 이사야 다 읽으셨어요. 아니 47장까지
조실까 싶어서 제가 질문한 거예요. 엄청나게 열심히
거기에 보면 이사야를 보낼 때 왜 보냅니까?
눈을 감기게 하고 귀를 닫히게 하기 위해서 보내거든요.

그러면 이사야 선지자를 읽는 모든 사람들은 어떤 자예요?
눈이 감긴 자고 귀가 닫힌 자가 돼야 돼요. ’소경이 되었습니까?’ 이사야 읽고 나니까
‘아직 덜 읽었어요?’ 예수님 당시에 남은 자 유대인들이 이사야를 읽거든요.
이사를 다 읽게 되면 자기들은 그 당시에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들은 자들은
눈이 감긴 소경이고 귀가 닫힌 귀머거리라 생각한 거예요.
자기들은 눈을 떴고 자기들은 귀가 열린
이 청력이 아주 좋은 시력이 아주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들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죠. 그들이 바로 소경이었죠.
그러면 바리새인이 정상입니까? 비정상입니까? 질문을 제가 잘못했지만,
주님 보시기에 비정상이죠. 자기들 입장에서는 정상이잖아요.

그러면 베드로와 요한이 ’주께서 성하게 했다‘라고 하면
그 ’성하게 했다‘라는 말씀이 누구의 말씀이 되죠? 말이, 주님의 말씀이 되죠.
그러면 주님 입장에서 성하게 하는 것은
’보는 자들은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게 하는 자는 보게 하는 게‘ 성하게 하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이 거저 받은 내용을 거져 줄 때 외부에서 보는 그 안목은 어떤 안목입니까?
’병 고쳤네. 흉내 내면 되겠네‘ 그러니 거기에 무슨 십자가가 나와요?
그러니 오늘날 교회가 다 뭘로 다 바꿔버립니까? 뭔가 얻을까 쳐다볼 때
’그래 당신이 지금 필요한 것은 지금 허리가 아프니까 허리를 낫는 안수기도를 해줄게.‘
허리를 낫게 해준다든가, 그러면 또 막 희한하게
(확정 지어버렸어요.) 그럼 지옥 가는 코스로 이제 걸어가는 겁니다.

마귀가 놀고 있지 않거든요.
마귀의 일은 주님의 종이기 때문에 주님이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지옥 갈 자들을 끌어모아야 돼요.
거짓 것을 믿게 하도록 미혹의 영을 계속해서 역사하게 하십니다.
누가? 주께서. 사람들이 그런 걸 잘 안 믿어요.
지옥을 소극적으로 보내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보냅니다.

지금 이 말씀은 말씀의 능력이에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 말씀이 던져지는 순간 둘로 딱 쪼개져버려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자가 나오는가 하면
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과 전혀 다른 패턴의
주님의 제자라고 우기는 자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다시 돌아와서

(마10: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이 말씀을 딱 듣는 순간 누가 좋아하죠?
복음을 전하는 목사라든가 전도사라든가 선교사들이 좋아할 구절이잖아요. 그죠?
그런데 여기서 한번 잘 들어보세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씀을 하는 순간
목사나 선교사들이 자기를 뭘로 여기죠? 일군으로 여기죠.
그러면 일군으로 여기면 자기가 한 일이 있단 말입니까? 없단 말입니까? 있단 말이죠.
그러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과 벌써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인간의 악마성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내가 복음을 전했으니까 내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와요.
대놓고 그런 사람이 한국교회에 엄청 많아요.
‘내가 목사니까 구약에 제사장에게 하는 십일조를 나에게 바쳐라‘ 그런 교단도 있어요.

중국에 있는 어떤 그런 교회도 십일조는 다 목사 주머니로 다 가도록 하고
나머지 연보는 이제 목사 사례로 가고, 가는지 안 가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가고 어떻게 그렇게 (성경대로 하죠. 그렇습니다.)
성경대로 한 자들이 예수님을 죽였거든요.
구약과 신약을 막 엮어버립니다.

지금 이런 말씀도 마찬가지죠.
’일군이 저 먹을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면서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고전9:9)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딤전5:18)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고린도전서 9장입니까? 거기와 디모데전서에도 나오거든요.
거기에도 나오니까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해석해요?
아니 목사가 설교하는 것이 일인데 거기에 망을 씌우면 먹을 거 안 주면 어떻게 복음 전하느냐?
이 논리를 가져와요. 읽어보면 그렇게밖에 안 느껴지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무엇이 빠져버립니까? 그렇게 읽어버리면, 법대로 읽는 거잖아요.
십자가가 빠져버리고 십자가가 빠져버리면 무엇이 빠집니까? 은혜가 빠져버리죠.
거저받은 것이 빠져버리고 거저 주는 것도 빠져버립니다.

말씀 자체가 미혹거리에요.
마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 말씀이 아담과 여자에게 미혹 거리가 된 것 같이
이미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에게는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미혹거리에요.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그 욕망이 가득 쌓여 있다라고 표현할까?
욕망이 창조돼요. 창조. 날마다 이렇게 생성이 됩니다.

당연하다는 것이 없는 거예요.
모든 것이 십자가 지신 주님이 하시는 일 속에 포함이 되면
십자가를 경유하여서 흘러나오는 모든 요소들이 되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들을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들을 수 있는 것도 거저 듣는 거거든요.
‘제가 열심을 내었습니다. 제가 수고했습니다.
제가 이 시간 수요일날 시간을 이렇게 아껴서 이렇게 왔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부정당해야 된다는 거예요.
뭔가 이 주님의 일에 인간의 수고가 개입된다는 것을
주님은 용납치 않겠다는 것을 이런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주시는 겁니다.

여기서 조금 더 말씀을 다른 측면에서 보게 되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아까도 살짝 그렇게 언급을 했지만 마치 이것은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 같지만
이 복음을 듣는 자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 듣는 자들이 어떠한 반응이 나오느냐?라고 할 때는 그들에게도 똑같은 반응이 나오는 거예요.
주께서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에게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그 내용이 똑같이 나옴으로 말미암아
그다음 말씀하시는 게 그 얘기예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는 말씀을 그 자리에 이루시는 겁니다.

독특하죠. 그래서 가짜는 다 뽑아냅니다. 가짜는 다 뽑아내고,
주의 말씀이 이루어진 현장에서 자신의 피로 친히 구원하신 자만 구원하셔서
성령의 교통함 속에서 이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다음 봅시다.

(마10:11)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찾아내어’라는 표현을 쓰죠. 찾아냈습니까? 사도행전을 보면?
방금 읽은 것도 우연히 만난 거잖아요. 그죠?
그런데 여기에 보면 ‘찾아내어’라는 표현을 썼잖아요.

왜 ‘찾아내어’라는 표현을 쓰는가? 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찾아내는 작업이에요.
돌아다니다가, 길거리에 다니다가
제가 오늘 조금 일찍 와서 좀 피곤해서 저기 옆출구에서 이렇게 나와서 벤치가 있잖아요.
그 옆에 보면 담배 많이 피우는 곳. 그늘이 있는데,
거기에 앉아 있으면 수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잖아요.
그러면 딱 보고 ‘아 저 사람은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야.’ ‘아니야’ 이게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러면 유튜브에, 앞으로 그런 기능이 있다고 칩시다.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만 다 접속할 수 있도록. 그거랑 똑같은 거거든요.
지금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 머물라’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복음은 복음의 증인들이고 전파자들이라는 거예요.
여기에는 반대적 요소가 뒤에 나오잖아요.
거절하고 핍박하는 자들이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겁니다.
달콤하게 일꾼이 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하니까 ‘야 복음만 전하면 다 대접받겠네요.’
대접받는 거는 거의 없고요. 성경에 보면 다 죽었어요. 다.
핍박 받고, 미움 받고, 돌에 맞아 죽고...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떠나기까지. 성경에 사도행전에 우리들이 살펴보고 있지만
떠나는 것도, 못 떠나는 것도, 이것도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아니죠.
자기 뜻대로 절대 안 됩니다.
물론 자기의 뜻조차도 주님의 뜻 안에 포함 돼요.
주께서 만나게 해주시면 그곳에 머물게 하고,

루디아 같은 경우에는 기도처에서 만나죠. 만나서 영접해서 머물게 하고, 또 떠나게 하시고.
그 모든 일들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람의 일로 보이는데,
주님이 살아계셔서 친히 자기 백성을 찾아내시는 일이라는 겁니다.

(마10: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마10: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오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그래서 남의 집에 갈 때 기도 많이 하시죠? 요즘 안 합니까? 하죠.
평화를 비세요. 평화를 비는 것은 어떤 내용입니까? 십자가 복음을 알게 해달라는 건데.

한번 보세요.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그 집안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돌 날라 올 가능성이 높죠.
‘거래 끊읍시다.’ ‘이제 더 이상 만나지 맙시다.’
되게 이게 괜찮은 말씀 같은데, 십자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 세상 자체를 부정하는 거잖아요. 그 당사자를 부정하는 겁니다.
당사자가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거거든요.
그러면 지옥 가도 마땅한 인생이라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상대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빈 평안이 그에게 안 돌아오면 나에게 돌아온다 했죠.
나에게 어떻게 돌아옵니까? 핍박으로 돌아오잖아요.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선교사들이 이 설교 들으면 아마 아무도 안 갈 거예요.
진짜 빈 평안이 그 집에 있다면, 십자가와 함께 죽고 십자가와 함께 사는 집안이 되겠죠.
그게 빌립보 감옥의 간수, 간수의 집안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잘 먹고 잘 살았더라.’ 그렇게 우리도 모르게 결론을 지어요.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동화책을 너무 많이 봐서 그렇죠.

완전 이질감을 느끼는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 됐잖아요.
그러면 대화를 할 때도 대화가 안 되겠죠.
대화가 되려면 십자가 빼고 대화를 해야 되거든요.
십자가 빼고 예수님 이야기하고 하나님 이야기하면 대화가 좀 돼요. 성령님 이야기하면.
그래서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십자가 빼고 이야기한 거예요.
왜냐하면 성령님, 하나님, 예수님은요, 내가 찾아갈 수 있어요.

근데 십자가는 나를 가로막아버리고 나를 부정해 버립니다.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그에게 나오는 것이 생명의 말씀이죠. 생명의 복음인데
그 십자가 복음이 타인에게 곱게 들리겠느냐라는 겁니다. 곱게 안 들리죠.

(마10: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우리는 이렇게 복음 전하고 싶죠.
복음 전하다가 안 들으면 나가서 확 떨어버리고 가고 싶고,
그런 경우가 사도행전에 두 번 정도 나오는데, 핍박을 받고 쫓겨난 상태예요.

이 먼지를 떨어버린다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어떤 방식, 그런 태도라고 할까요? 그런 태도가 아닙니다.
미움받고 핍박을 받았다라는 거예요.
죄에 대한 책임은 물론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죠.
복음의 전파는 자기들이 다 감당을 했기 때문이죠.
그들의 죄는 자기들에게 돌아가는 거고요.

이런 과정이 되려면 그 속에서 십자가 복음을 충분히 전하게 됩니다.
전할 때 어떤 사태가 일어났습니까?
핍박하고 미움받고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그러한 사태까지 내몰리는,
그러한 어떤 처지에 내몰리게 된 거죠.

(마10:1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이 얘기 하고 마칩시다.
그러면 여기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먼지를 떨어버리는데 영접하지 않잖아요.
여기에 의하면 사도행전에 의하면 믿지 않는 자들이 영접하지 않죠.
그런데 우리가 지난 주일날 오후 설교할 때, 누가 영접하지 않습니까? 요한삼서 9절입니다.

(요삼1:9) 내가 두어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요삼1:10)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

이 디오드레베, 교회의 수장입니다. 이 사람이 형제들을 영접지 않아요.
교회를 뭘로 바꿔버렸습니까? 자기가 대장 노릇하는, 왕 노릇하는 곳으로 바꿔버렸죠.
그래서 외부 인사가 와서 복음 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표현을 하면.
형제들도 받아들이지 않고. 이러한 인물이 교회 안에서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먼지를 떨어버리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마10:1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교회 안에 이러한 자들이 일어난다라는 겁니다.
물론 디오드레베가 회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

(요삼1: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느니라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디오드레베는 복음을 들었어요.
그런데 복음을 들었는데, 복음을 전했는데, 사람들이 모였고,
그 과정에서 자기가 어느 자리로 올라갑니까?
바벨론처럼 자기가 회당장 자리로 올라가면서 누구를 쳐내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소자를 쳐내버리죠. 지금.
‘소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소자를 쳐내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이 말씀이 복음 전하는 그 과정에서 거기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된 이후에,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사건이 여전히 반복되어 일어나면서
십자가 지신 분이 친히 자신의 일을 끝냈다라는 것을
이 교회 안에서까지 들어오셔서 보여주시는 거예요.
인간 구원론 중심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유일한 심판주요.
그 심판주 되시는 그분만이 유일한 구원주라는 것을, 구세주라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일을 누가 맡았습니까? 제자들이 맡은 겁니다.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주의 일이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주의 일이 드러나니까 ‘나는 아니오.’
그러면 무엇입니까? 십자가만 자랑하죠.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로 다 완료하신 그 일을 저희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감당케 하셔서
십자가로 완료하심만을 증인들을 통해서 드러내심을 저희들에게 들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가짜는 결코 이곳에 개입될 수 없음을 말씀을 통하여 저희들에게 알려주시고
우리의 인생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님만을 증거하는 인생으로
살려짐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날마다 우리들이 부정당하는 부인당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