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8-04 05:18
20220803 수요예배 마 10:16-20 양과 이리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7  
https://youtu.be/o9-3iUX1P1M

관리자 22-08-04 21:39
답변 삭제  
20220803 수요예배 양과 이리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말씀 앞에 서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저희들에게 주신 그 사랑을 마음껏 뿜어내는 주의 백성이 어떠함을
오늘 또 말씀을 통하여 들려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 23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마10:16~23)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7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18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는 그러한 자들임을 말씀하셨죠.
그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는 자 속에 누가 들어가게 되느냐?라고 하면
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들어갑니다.
물론 긍휼을 입는 자는 가룟 유다가 제외가 되거든요.
특이한 것은 10장 1절은 열두 제자에게 지금 이 말씀을 하신다라는 겁니다.

우리들 같으면 ‘가룟 유다 빠져. 너는 아니야’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
뒤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시는 이 명령이
‘예수님께서 성령을 줄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이렇게 이해가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여기에 포함시켜 두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간과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똑같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흉내를 내더라도
그 속에는 가룟 유다가 있을 수 있는 거예요.
그건 이미 마태복음 7장에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
그리고 마태복음 20장에도 나오지만
25장 같은 경우에도 천국 비유를 보면 외형적으로는 도무지 판별할 수가 없어요.

7장과 25장을 연결해 버리면
한 자가 오히려 7장에서는 지옥을 가는 거고, 25장에서는 안 한 자가 천국을 가는데
반대로 또 이 달란트 비유에서는 남기지 않으면 천국 백성이 아니잖아요.
남긴 자만이 천국 백성으로 또 인정을 받고...
이 말씀 자체가 이성을 갖고 있는 선악 구조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들려질 때
절대로 인간이 갖고 있는 사고 방식에 의해서 중심을 잡을 수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마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여기에서 ’너희는‘ 이미 가룟 유다도 포함하고 있다고 보셔야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구원론에 미친 사람들이죠.
우리들이 다 구원론에 미친 사람들이잖아요.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이렇게 주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 중에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그 얘기를 했잖아요. 흉내를 낸단 말이에요.

그러면 제가 또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저 정 목사가 사람들을 겁주냐?‘ 겁주는 거 같잖아요.
근데 구원이 그러면 어떻게 된단 말이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수상한 사람이죠.
우리도 혹시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십자가와 만나야 되거든요.
나의 신앙의 완전성을 드러내면 안 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신앙의 완전 무결성을 추구해 왔거든요.
그 끝자락에 누가 있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죠.
구원 얻는 데 부족함이 없는 그러한 어떤 신학을 소유했죠.
구원파들도 구원 얻는 데 부족함이 없는 신학을 소유했습니다.

그냥 주께서 살리시는 대로 살면 돼요.
구약이 우리에게 있다라는 것은 구약의 인물들이 성도의 모델입니다.
우리는 결론을 다 알고 보지만
우리의 인생을 거기에 집어넣으면 다 아는데 다 아는 겁니까?

우리의 마음이 안다고
’아, 내일 주의 뜻대로 이루어질 걸 압니다‘라고 할 때 그 사건이 동일하게 일어나느냐? 얘기예요.
그렇지 않거든요.

성도는 이미 십자가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 있다라는 것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라는 얘기예요.
십자가의 완료성을 자랑하는 자입니다.
나의 구원에 부족함이 없음을 내세우는 자가 아니에요.
’나의 구원에 부족함이 없다‘라고 하는 순간 주인공이 자기가 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거든요.
그들은 메시야가 오면 하나님 나라에 1순위로 들어갈 자들이라 확신하고 있었죠.

(마10:16)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양과 이리죠.
그러면 ’너희들은 양이고 너희들이 가는 곳은 이리가 등장을 한다‘라는 거거든요.
그리고 이 모습을 언제 먼저 보여주시는가?라고 할 때는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서 이 땅에 오셨죠.
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이 주위의 모든 환경들은 이리가 들끓는 세상이었습니다.
이리 중에는 착한 이리도 있고 나쁜 이리도 있고
왕도 있고 신하도 있고 백부장도 있고 병든자도 있고... 별별 이리들이 다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양이 등장했을 때 이리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죠.
양이 등장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리라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죄가 있다‘라고 선언을 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이리의 모습을 드러낸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리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죠.

예수님께서 자기를 증거하셨죠.
자기 자신이 바로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받은 주님이라고, 심판주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그 소개를 할 때 가만히 있던 자들,
누가 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고
성전에서 나름대로 율법대로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 예수님을 잡아먹으려고 발악을 하죠.
결국 예수님을 잡아먹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기간을 사셨고
그 마지막에 십자가 지신 그 사건,
그 사건을 제자들에게 고스란히 반복하게 하시겠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이들이 주인공이 되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마치 이 말씀을 보면 10장 16절에 보니까 ’우리를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낸다 했으니까‘
’내가 가는 곳마다 나는 양이고 이리가 나타날 거야’
이런 어떤 예상을 하여서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에요.

말씀이 항상 먼저 있고 그 말씀대로 되어지도록 되어 있죠.
그 말씀 속에 성령받은 자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이 말씀 속으로 합류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양도 여기에 보면 ‘내가 너희를’이라고 표현할 때 이 너희는 누구냐?라고 할 때는
가룟 유다를 싹 빼버리죠. 너희는.
너희는 누구냐?라고 할 때는 성령을 받은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셔서 성령을 주셔서 너희를 만드시고
그들을 양의 모습으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양이 되었다. 물론 그렇게 표현을 할 수 있는데
성령을 받게 되면 양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어요.
양이 양의 모습을 드러내려면 반드시 상대 쪽에는 이리가 등장을 해야 돼요.
이리가 등장하지 않으면 양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가요.

그래서 지금 사도행전에 보게 되면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성령을 따라 말하게 하심을 하게 하죠.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행2:36)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성령께서 친히 전하시죠.
뒤에 보면 우리가 참 이렇게 뭐랄까요?
이 삐딱한 마음 삐딱한 마음을 이 올라오도록 하는 말씀이 있어요.

(마10:19)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할 것을 주시리라 했으면 말할 것만 주겠어요?
어떻게 할 것까지도 다 할 거 아니에요? 성령께서.
이런 말씀들이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 일을 하실 때는
죄인을 갖고 일을 하시는 것이지 의인을 갖고 일을 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을 갖고 일하는 게 아니라 얘기입니다.
죄인을 갖고 일을 해야 일하는 당사자 속에서도 십자가가 전파되는 거예요.

성령께서 양을 만드시고 그 양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내용을 전하게 되죠.
십자가 복음을 전하게 되면 그 주위에는 이리가 들끓게 되는 거예요.
지금 여기에서 분명한 사실은 ‘너희들의 양을 만들어 가지고 내가 목자니까 너희들을 잘 키워서
무럭무럭 자라게 해서 내가 너희들이 참 좋아하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할 거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고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라고 말씀을 하는 거예요.
부르심 자체가 너희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는 이유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삼게 하기 위함이거든요.
예수님의 증인이라는 것은 자기 삶에 있어서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는 거고
이 죄인을 통하여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면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거예요. 이 고약한 목자죠.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한다’ 이렇게 말씀하셔놓고 자신이 다윗왕으로 오신 그 참 목자로서
그 유리하는 자들을 자기의 피로 구원을 하셨으면 그다음 쉴만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셔야 되는데
이 양을 어디로 보내시느냐?라고 할 때는 이리 가운데로 보냅니다.

이리 가운데로 보내시는 이유는 이 복제하는 거죠.
십자가 사건을 자신의 피로 만든 그 양에게 똑같이 복제하는 겁니다.
그럴 때 ‘내 양 답다’라는 거죠.
그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찾아내시는 방식을 취하시고요.

그리고 천국은 반드시 이러한 자만 들어가게 되겠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만이 천국 백성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고 했을 때는 두 가지 죽음이 중첩이 돼 있죠.
주님과 함께 죽은 자죠.
이미 말씀을 듣는 우리들은 주님과 함께 죽은 자고요.
주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서는 죽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여러분들이 어떻게 죽든 이미 죽고 있고 어떻게 죽든,
주 안에서 죽은 자로서 죽는 자이기 때문에 그런 자들을 복된 자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제자들의 꿈은 왕창 무너지죠. 지금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 새 이스라엘을 세울 그 메시야 왕국의 지도자들이죠.
12지파의 지파장들입니다. 신천지도 지파장 뽑잖아요. 지파장
지파장이 하는 일이 돈 세는 거.
대장이 되고 싶잖아요. 그걸 지금 꿈꾸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
아니 목자를 찾아나섰는데 우리를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
그러면 당연히 그 목자를 버리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버리는 자를 가짜 양이라 하죠.
십자가를 버리는 거잖아요.

십자가 복음이라는 자체가 이리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는 복음이거든요.
‘나 십자가 복음 알았어. 나 구원받았어’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니에요.
우리를 삶 속으로 몰아넣잖아요. 상황 속으로 사람을 만나는 속으로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몰라요.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 그렇게 해야 되느냐? 다 그렇게 하긴 해요. 근데 때는 몰라요.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레위기를 보게 되면요.
레위기의 범죄의 요소들이 다양하게 나오죠.
다양하게 나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백만이라 치면
백만 명 중에 그 죄를 범하는 자가 몇 프로 돼요? 몇 프로가 안 되거든요.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나는 상관없어요.’ 이렇게 해석합니까?

‘나는 상관없어요’가 아니라
한 사람이 범죄하면 모든 사람이 범죄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주께서 처리를 하거든요.
그래서 율법을 볼 때 ‘이건 나와 상관이 없네요.’
말씀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잖아요.
우리는 다 나와 상관이 있는 것만 읽죠. 안 그래요?
큐티 같은 거 할 때 사람들이 자기와 관련된 이야기만 읽잖아요. 그게 문제예요.

말씀 속으로 들어가면 말씀에 있는 모든 내용들이 나의 이야기에요. 십자가와 관련된.
근데 우리는 내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말씀을 보니까 ‘내 형편에서는 이 말씀이 나한테 맞아
내 형편에서 이 말씀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 같애’
주일날 설교를 들을 때도 그런 식으로 많이 들어왔죠.

그래서 자기 형편에 딱 맞으면 ‘야, 오늘 주께서 나에게 이런 위로를 주셨다’
만일에 반대로 거기에 좀 부딪히면 ‘목사가 나 공격하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말씀을 들을 때
말씀 자체 속에서 이 주님의 죽으심을 봐야 되는데
나라는 그 중심을 두고 말씀을 보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겁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라고 하면 ’아멘‘하면 되거든요.
’아멘‘한다고 이 말씀대로 되어집니까? 주께서 이 말씀 속으로 성도를 몰아넣어요.
제가 방금 이런 말씀을 드렸죠.
’아, 양을 이리 가운데로 늘 몰아넣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 욕망이 또 자꾸 작동을 하거든요.
그런 게 아니라 가끔 몰아넣어 주시죠. 경험해보셨잖아요.
앞으로도 이 말씀이 이루어짐 속으로 몰아넣게 돼 있어요.

사도행전을 보면 늘 접대 자리에 나옵니까? 아니잖아요.
복음을 전할 때 이리가 등장을 하고 이리가 딱~ 숨어 있죠. 어디에? 회당 안에.
그 안에 이리인지 양인지 분간이 안 되잖아요. 양인지 염소인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복음을 전하니까 양의 모습이 나오고 이리의 모습이 나오죠
어떤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고 이 두 가지 요소가 랜덤이죠.
어떤 때는 동시적으로도 나오고 어떤 때는 한쪽만 나오고 어떤 때는 한쪽도 나오지도 않고.
주님께서 자신의 증인으로 이걸 종이라고 하죠.
종으로 마음껏 다루시겠다라는 겁니다.

제가 며칠 전에 그 레위기 설교를 할 때 우상숭배와 관련된 설교를 했는데
혹시 뭐 보신 분들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마태복음에도 등장합니다마는 납작 엎드려요.
납작 엎드려서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려고 합니다.
철저하게 예수님을 자기를 위한 우상으로 믿고 따르고 있거든요.
그들이 바로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이에요.

그들에게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 제자들은 아멘해요.
왜 아멘하는가 하면요. ’그 다음 뭐 주시겠습니까?‘
’제가 이리 가운데로 들어갔으니까, 주를 위해 목숨을 버렸으니까 그다음 뭐 주시겠습니까?‘
이런 노림수는요 선악과를 먹은 인간 모두에게 다 있는 거예요.
우리들도 이 복음을 십자가 복음을 듣는 가운데 문득 ’뭐 주시겠습니까?‘ ’이거는 주시겠죠.‘
’복음을 전했으면 교회를 한 번이라도 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뭐 그런 마음들이라든가.

아까 전에 ’아, 목사님 길게 오래 하셔야 된다‘ 제가 그런 얘기를 여러 번 들었거든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악마의 속삭임이라 생각합니다.
잠깐 피었다가 지는 들풀과 같고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데
우리는 자꾸 내일을 계획하잖아요.
그럼 내일을 계획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 내일을 계획해야 되죠.
하면서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그 생각을 가져야 되는 거예요.

그 계획을 하는 순간 무엇이 날아가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날아가게 돼 있습니다.
제자들이 노림수가 아주 깊어요.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들을 보면 그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 열왕기상 13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이 단과 벧엘에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고
’이곳이 여호와의 전이라‘ 그렇게 외치면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남쪽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했죠.
그 이유는 마음을 남쪽 유다로 뺏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재미있는 것은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에 동조했다는 겁니다.
내가 딱 원하는 나의 여호와 하나님. 그런 상황에서

(왕상13:1)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참 이게 재미있는 게 하나님의 사람이라 했어요.
차라리 엘리야, 엘리사 이름을 좀 기록해 놓으면 얼마나 좋아요.
’여러분 어떤 선지자가 되고 싶습니까? 어떤 성도가 되고 싶습니까?’라고 물으면
‘엘리야 엘리사 모세 같은 사람’
그래서 이름을 지을 때 모세 엘리야 엘리사 이래 짓잖아요. 그죠?

이름 없는 사람, 이렇게 안 짓잖아요.
왜냐하면 이름 없는 사람의 이 선지자를 보게 되면 이 인생이 닮고 싶지 않아요.
이 선지자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도착했습니다.
유다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죠.

성전이라는 것은 그 속에 (요즘 레위기도 계속하고 있지만) 회막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번제단이 있죠. 그 번제단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불이에요.
시내산에 있던 불이란 말입니다. 심판의 불이에요.
심판의 불 위에 희생 제물이 제대로 드리지 못하면 그 심판의 불이 심판한다는 겁니다.

나답과 아비후를 불살랐다는 것은 이후에 그것이 성막에 나중에 솔로몬 성전이 세워지지만
그 속에도 여전히 번제단이 있다는 것은
언제든지 이 번제단의 불이 이스라엘을 불심판한다는 겁니다. 언약 정신에 합당하지 않으면.
우상숭배로 불심판당하거든요.
예루살렘에서 유다에서 벧엘로 올라온 거예요.
유다에는 성전이 있고 벧엘에는 황금송아지라 했죠.

(왕상13:1~5)
1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2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3 그 날에 저가 예조를 들어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예조라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4 여로보암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 하더라 저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5 하나님의 사람의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예조대로 단이 갈라지며 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

미리 확 단이 갈라져서 재가 쏟아졌으면 손을 들고 ‘저놈 잡아라’
이렇게 여로보암 왕이 안 했을 건데. 미리 예조도 이야기를 했고요 그리고 한참 후입니다.
요시아 왕은 남유다 왕이잖아요. 한참 후에 지금 여기에 보면

(왕상13:52) 여호와의 말씀이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들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오
                  (네 뼛가루 위에 제사할 것이고 그리고)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아무튼 모독을 주더라도 이만저만 모독하는 게 아니죠.
저주받은 자의 모델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예언을 하니까 여로보암 왕이 기고만장했거든요. 잘 나가거든요.

남유다에 비해서 땅덩어리가 훨씬 크잖아요.
땅덩어리가 크다는 것은 군사력도 괜찮다라는 거거든요.
또 남유다에 비해서 성전도 두 곳이나 있네. 단과 벧엘에. 남쪽 끝에 북쪽 끝에 6절에

(왕상13:6)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컨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

왜 긍휼을 베풀어줍니까? 긍휼을 베풀어주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심판하기 위해서 그래요. 심판은 이미 확정됐거든요.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도 확정적이에요. 그것은 변개될 수가 없습니다.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왔으니까 이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 그런 일이 없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그 말씀 속으로 반복해서 들어가게 되죠.

(왕상13:7)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이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라는 겁니다.
왕은 이 선지자와 가깝게 지내서 뭔가 앞으로 될 일에 대해서 무마시키고자 하는
그런 어떤 마음의 의도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예 이 선지자에게
‘어떤 것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고 초대도 받지 말고 곧장 갔던 길을 다른 길로 돌아서 오라’
이렇게 명을 내렸어요. 봅시다.

(왕상13:8~10)
8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9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10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좇아 돌아가지 아니하니라

이렇게 말한 이유가 뭐냐?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되어진다라는 것을
이 이름 없는 선지자가 친히 자기의 행동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북쪽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고 있었어요.
이 선지자가 참 선지자냐? 거짓 선지자냐? 우리는 그게 궁금하죠.
근데 참 선지자로 드러나요. 독특한 것은 이 선지자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예요.
거짓말을 왜 하느냐? 주께서 거짓말을 하게 했어요. 조금 읽어봅시다.

(왕상13:11~14)
11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저에게 고하고 또 그가 왕에게 고한 말씀도 저희가 그 아비에게 고한지라
12 그 아비가 저희에게 이르되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하니
    그 아들들이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의 간 길을 보았음이라
13 저가 그 아들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저희가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 저가 타고
14 하나님의 사람의 뒤를 좇아 가서 상수리나무 아래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뇨 대답하되 그러하다

이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어요? 아들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들의 이야기를 들었죠.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 선지자가 ‘요시아 시대 때 이러한 이 일이 이 땅에 일어날 것이다.
여로보암 뼈 위에 그러한 어떤 재들이 뿌려질 것이다. 제사할 것이다.’
이러한 어떤 말씀을 듣고 이 늙은 선지자가 나귀를 타고 만나러 갑니다.
만나러 가는 이유가 참 특이해요. 14절

(왕상13:14~17)
14 하나님의 사람의 뒤를 좇아 가서 상수리나무 아래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뇨 대답하되 그러하다
15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16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 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17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라

똑같이 반복을 하죠.
그러면 늙은 선지자가 포기할 만도 한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왕상13:18)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천사가 지시하지 않았죠.
이름 없는 선지자를 한 늙은 선지자가 속였습니다.
늙은 선지자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있어요.
‘장로들을 존경하라’라는 의미가 많이 얻어터진 거예요.
이 늙은 선지자가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라는 거예요. 봅시다.

(왕상13:19~32)
19 이에 그 사람이 저와 함께 돌아가서 그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20 저희가 상 앞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21 저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참 놀랍죠. 이제 비로소 늙은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겁니다.)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한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22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 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23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24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25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에 버린 시체와 그 시체 곁에 선 사자를 보고
    그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와서 말한지라
26 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붙이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 하고
27 이에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저희가 안장을 지우매
28 저가 가서 본즉 그 시체가 길에 버린바 되었고 나귀와 사자는 그 시체 곁에 섰는데
    사자가 시체를 먹지도 아니하였고 나귀를 찢지도 아니하였더라
29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떠들어 나귀에 실어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30 곧 그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그를 위하여 슬피 울며 가로되 오호라 나의 형제여 하니라
31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저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32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제가 빨리 읽었는데 이 늙은 선지자가 처음에는 거짓말을 했죠.
거짓말을 해서 이 이름 없는 선지자를 데리고 와서 먹입니다.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죠. 그런 와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서
‘네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자에게 물려 죽을 것이다’라는
그러한 말씀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이 늙은 선지자가 하는 거예요.
그대로 죽었어요.
그 소식을 또 지나가는 사람이 이 죽은 선지자를 보고 그걸 들려준 겁니다.

우리 같으면 좀 하나님이 지시해가지고 처음부터 거짓말 하지 말고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찾아가서
‘하나님의 천사가 너에게 말씀하셨으니까 너를 대접하라 했다.’ 이렇게 했으면
뭔가 좀 우리가 이해하기가 좀 더 쉬울 건데
처음에는 거짓말을 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고 그 이후에는 말씀대로 임했으면
이 늙은 선지자가 스스로 알아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전해 듣죠.
그 모든 과정들을 보게 되면 말씀대로 되어짐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거짓말하는 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여기에서 우리들이 이 생각해야 되는 것은 이겁니다.
제가 오늘 본문과 이 본문을 좀 연결시켜보면 이름 없는 선지자잖아요.
그 선지자가 하는 일이 뭐냐?라는 거예요.
자, 그러면 우리가 이 이름 없는 선지자를 보면서 손들고
‘그래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명하신 대로 지켜야지.
절대 거짓말을 하는 늙은 선지자를 만났을 때 그 말에 속으면 안 돼’
아마 그 큐티하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적용할 거예요.

왜 그렇게 적용하겠습니까? 죽으면 안 되니까
지금 이름 없는 선지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갔죠.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에게 예언하신 그 저주의 말씀이
말씀대로 되어짐을 자기가 온몸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부여받은 거예요.
늙은 선지자는 늙은 선지자의 역할을 부여받은 거고요.
잘하고 못한 게 없잖아요.
오히려 자기의 뼈를 그 뼈 곁에 묻어달라고 하면서 ‘말씀대로 되어집니다’라는
그 선지자의 역할에, 선지자의 본분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이름 없는 선지자처럼 살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내가 너희를 보낼 때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 이렇게 얘기했을 때
자기를 어떤 자로 생각하겠어요? 이름 없는 선지자로 생각을 해야 되거든요. 사실은

십자가의 피만 남아야 되는데, 무엇이 남아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자기의 이름이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요한 삼서에 나오는 디오드레베가 굉장히 중요해요.
성경에 짧게 기록되어 있지만 으뜸이 되고자 하잖아요.
자기 이름을 남겨야 되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을 때
마지막에 남기고자 하는 것이 자기 이름이잖아요.
주의 이름이 남겨진다면 나는 없잖아요. ‘내가’라는 단어가 나올 수가 없죠.
이러한 역할로 선지자는 부름을 받은 거예요.

이 사람만 그런 게 아니고 늙은 선지자도 마찬가지고 에스겔도 마찬가지고
예레미야 선지자도 마찬가지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온몸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이 예언을 하면서도
온몸으로 이렇게 그들과 함께 체험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고
에스겔은 자기가 샘플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할 일들을 몸소 홀로 다 겪죠.
이제 그다음 나오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10:16하)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얼마 전에 질문을 하셨는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라고 할 때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문장에 매여버리니까
양이 살아나려면 뱀같이 지혜로워야 되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된다.
’잘 빠져나오지만 순결해야 된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뒤에 말씀이냐면 ’말하는 이가 너희가 아니고 아버지께서 보내주시는 성령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성령이라고 했으면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은
누구한테 하시는 말씀이에요? 너희, 그 너희는 성령 받은 자들이죠.
그러면 굳이 이런 말씀을 하실 필요가 있느냐? 있죠.
양들이 뱀같이 지혜롭게 말을 할 때 비로소 이리가 이리의 모습을 띠게 돼 있어요.

회당에 들어가서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분명하게 얘기하지 않으면
이리가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지를 않아요.
여러분이 그걸 아셔야 되는 게,
악마가 언제 자기의 모습을 제대로 드러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니까
그것도 언제 물세례를 받고 성령이 임하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오 내가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시니까
마귀가 예수님 옆에 등장하잖아요.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으면 마귀는 자기의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을 우리가 계속해서 주일날 보고 있지만,
사도들이 성령을 따라서 뱀같이 지혜롭게 그들의 죄악을, 분노를, 계속해서 야기해요.
물론 그 분노도 주께서 그렇게 하신 일이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설교의 내용들 자체가 듣는 자들로 하여금 참을 수 없도록 해요.
그게 뱀같이 지혜로운 말입니다.
그게 양으로부터 나오는 말이죠.

그러면 뱀같이 지혜로운 말이 안 나오면 양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 지혜로운 말이 나오니까 이리들이 가만히 안 두죠.
가만히 안 두니까 양이 어떻게 될까요?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했잖아요.
핍박을 가하니까, 예수님이 마태복음 13장에 씨뿌리는 비유에 보면, 마태복음 13장 19절에 보면

(마13: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마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이런 자들은 그냥 ‘지나가는 개가 짖었다.’ 이렇게 생각하죠.

(마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마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곧 넘어지는 자요

환난과 핍박이 오면 넘어져버립니다. 환난과 핍박이 오면.
순결이 사라지는 거죠. 비둘기같이 순결한 것이.
십자가가 날아가는 겁니다.
그다음에 이제 이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재리의 유혹,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마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우리 같으면 환난과 핍박이 더 셀 것 같은데,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 훨씬 강하죠. 살아보니까 그렇잖아요.
환란과 핍박은 그것만 견뎌내면 되거든요.
그런데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은 죽을 때까지 이게 사라지지 않아요.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한다라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이들이 핍박을 가할 거 아닙니까? 이리들이.
핍박을 가하니까 어떻게 해요?
핍박을 가하니까 우린 총칼만 생각을 하는데, 복음을 전하니까 사례를 안 줘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하,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안 전하고,
사람에게 좋은 이야기를 하면서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러면 돼요?
그게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죄인 중에 괴수라 하고, 복음 이야기하지 말고, 사람이 듣기 좋은 소리를 하면 되잖아요.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것도 주께서 이루시는 말씀이에요.
주께서 이루시는 말씀인데, 이것이 우리들 가운데 드러날 때는 복음을 전할 때 핍박이 오죠.
죽이려고 하죠. 죽이려고 할 때 사도 바울이 베드로나 이 요한이 사도들이 뭐라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사람의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해야 되죠.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지금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다 하면 되는데, 이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안 되고
죄인이 되면 죽어도 좋다거든요.
십자가 앞에 죄인이 돼야 되는데, 죄인이 되는 게 아니라
이러한 어떤 핍박이 오니까, ‘그래 이건 피해보자’ 죄인이 되는 그 지식 정보를 소유한 거죠.
아는 지식을 갖고, 그거는 그것대로 구원용으로 챙겨놓고,
자기 생계를 위해서 이 복음을 사람을 좋아하는 복음으로 바꿔버리는 겁니다.

그거 기존 교회 목사들이 다 그렇잖아요. 십자가 이야기하면 다 알고 다 믿어요.
나는 죄인입니다. 다 그렇게 얘기하죠.
권사님, 목사들이 안 그래요?
‘나 그거 알아. 나 십자가 복음 알아. 나 죄인 중에 괴수 맞아.
십자가 아니면 구원 없는 거 다 알아.’

분명히 복음을 줘가지고 이리 가운데로 넣었는데,
이리가 확 달라드니까 ‘나도 이리 될래요’ 하고 같이 이리가 돼버렸어요. 본심이 드러난 거예요.
우리가 ‘한 번 택한 사람은 양이 이리가 안 되잖아요?’
주님의 말씀을 자기가 자꾸 소유를 해요. 말씀은 말씀대로 되는 거예요.

그 이야기 해서 그 사람 구원받았다는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까? 그러면?
복음이 나와야 되지. 십자가를 전해야 되지.
왜 구원을 받았다. 구원 못 받았다가 나와야 돼요? 거기에.

(마10:17) 사람들을 삼가라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왜 공회에 넘겨주고, 이 공회에 여러 번 넘겨지거든요. 사도행전에 보면 3장 5장 20몇 장까지
4장에도 나오고 5장에도 나오고, 스데반 집사님 같은 경우에도 공회 넘겨졌고,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도 23장에 보면 공회에 넘겨졌고.
그전에 누가 먼저 공회에 넘겨집니까? 예수님이 공회에 넘겨지죠.

채찍질만 합니까? 사형 언도도 내리죠.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습니다. 물론 그 현장이 아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잖아요. 공회에 넘겨져서.
채찍질 하리라 하니까 ‘채찍질로 끝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곤란하고요.

왜 이러한 상황이 되느냐?라고 할 때는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 십자가 복음이
이 세상 자체를 마귀로 규정하고, 모든 인간들을 그 마귀 새끼죠.
마귀 새끼들의 활동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복음을 전하면 ‘너 왜 나에게 욕을 해?’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과거에 선지자들이 그랬거든요.
선지자들이 예언을 하면 ‘왜 우리에게 욕을 해?’ 그들에게는 욕으로 들려요.
예수님의 말씀이 욕으로 들립니까? 여러분이 축복의 말씀으로 들립니까?
인간들에게는 저주의 말씀으로 들리죠.
왜냐하면 자기가 죄인이지 않는 이상은 예수님의 말씀은 기쁜 소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기쁜 소식은 심판 속에서 주어지는 기쁜 소식이거든요.
십자가 안에서 주어지는 기쁜 소식이라는 말은
‘나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 죄인이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는 것은 지옥 간 죄인이거든요.

그러니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니까, 뭘 내세우겠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복음이 복음으로 들리지만,
죄인이 아닌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들은 다 저주로밖에 안 들려요.
그래서 우리들이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이리들이 많이 나타나죠.
분명히 우리의 마음은 정말 이게 참 생명의 복음인데,
그걸 전하면 오히려 저쪽에서 화를 내요. 분노를 내요.
그 이유는 자기 편이 안되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편이 되면 화를 내거나 분을 낼 이유가 없거든요.

그런데 십자가 복음은 누구 편이 아니잖아요.
아까 늙은 선지자 봤죠. 늙은 선지자가 누구 편이에요?
우리가 처음에 얼른 보니까 이름 없는 선지자를 꼬셔가지고 뭔가 해코지하는 느낌이 확 들잖아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라
늙은 선지자는 자기 편도 아니고, 이름 없는 선지자 편도 아니고, 말씀 편이었다라는 사실인 거예요.

성도는 말씀 편이에요.
그래서 이리가 이렇게 공격을 하면 요즘은 뭐 회당이라는 곳이 잘 없죠.
교회에서 중직자 정도 되면, 회당에 불려갈지 모르지만,
우리 서장로님 정도 되면 회당에 불려가서 채찍질은 안 하더라도 ’당신이 이단이야‘ 이렇게
정죄받든지, 목사들은 그렇게 불려가죠.

그럴 때 핍박을 가할 때 ’나 핍박받아요.‘ 이게 아니라
내 편이 되면 안 돼요. 내 편이 되면 안 된다고요. 십자가 편이 돼야 돼요.
그러면 십자가 앞에서 나는 뭐가 돼요?
나는 양으로서 성령을 따라서 복음을 전했으니까 ’나는 옳아요‘가 나옵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가 나옵니까? 죄인 중에 괴수가 되죠.
그것은 주께서 일으키는 사건이에요.
물론 배웠어도 그게 가능하겠지만.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10:18)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정말 신기하죠. 이게 사도행전에 나오거든요. 앞으로 우리가 이전에도 나왔지만,
끌려가는데, 주님의 증인 되게 하기 위해서 끌려가게 하신다라는 거예요. 정말 신기하죠.
우리가 볼 때는 감옥으로 갇혀버리면 복음을 전할 기회가 사라진다.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감옥으로 갇혔는데, 감옥에서 복음이 전파돼요.
죄수로, 로마로 이송되는데, 이송되는 가운데 복음 전파하는 장이 열립니다. 장이.

예루살렘에서는 사도바울을 죽이려고 끌어모았는데,
그 끌어모은 죽이려고 하는 그 장이 복음을 전하는 장이 될 줄 누가 생각했겠어요?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말씀대로 되어지는 겁니다.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원치 않는 그러한 곳으로 끌려가게 하시는 거예요.
그다음 나오는 말씀이

(마10:19)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마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과 사도들의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일치하잖아요.
’성령이시니라‘라고 말씀을 하시니까 사람들은 어떤 오해를 하는가? 하면요.
’잡혀가니까 성령께서 말하게 하시니까 줄줄줄 나오더라‘ 이렇게 생각을 할 가능성이 다분히 높아요.
그런데 성령께서 말하게 하신다고 하면요.
더 확실하게 이리다움을 드러내게 돼 있어요.

성령께서 말하게 하시면 십자가 복음을 전할 거 아닙니까?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이리의 그 본모습이 드러나서 더욱더 공격적이 되겠죠.
이걸 역으로 돌려보면 성령께서 말하셨는지
아니면 성령의 말이 아니라 자기의 말인지를 분간하는 방법은
복음이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를 보면 돼요.
성령께서 말하게 하셨으면 무조건 복음이 나와요.
물론 ’복음이 나온다고 성령께서 말하셨다.‘ 이거는 안 맞아요. 그럴 수도 있는데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시면 복음이 나와요.
성령께서 말하게 하지 않으면 복음이 나오지 않고 뭐가 나올까요?
내 편이 돼달라. 하겠죠. 내 편이.
’나를 이해해 달라. 나를 인정해 달라.‘ 그렇게 나오게 된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
’하 성령께서 말하게 하실 때까지 기다려야지.‘ 이런 사람이 있거든요.
얼마 전에 어떤 우리 권사님이 김모모 목사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분이 그런 얘기거든요.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음성‘ 들어보면 다 맞는 말 같아요.
그냥 복음을 전하면 되거든요. 십자가 이야기하면 돼요.
그걸 전하는 것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거예요.

놀랍게도 죄인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는 가운데 십자가의 능력이 꽃을 피죠. 꽃을 피웁니다.
지옥 갈 자와 천국 갈 자를 갈라내버리죠.
그 속에서 양들은 ’어찌할꼬?’라는 모습으로 등장을 하겠지만,
이리는 이 복음에 대해서 길길이 날뛰게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권능과 능력을 주셨으니까, 모두가 다 무릎을 꿇겠지?’ 천만의 말씀이에요.
그 권능과 능력은 십자가의 권능과 능력입니다.
진짜 권능과 능력은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십자가 고난 속으로 합류 당하는,
이것이야말로 진짜 주님의 능력 안에 있는 주님의 종의 모습인 겁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친히 양으로 만드셔서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이
우리들을 이 세상 속으로 보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님의 이루심만을 자랑하라고
십자가의 피만을 자랑하라고 저희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시고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을 저희들 속에 고스란히 덮어씌우게 하셔서
주님의 영을 받은 자답게 주님의 증인으로 저희들을 이 땅에서 살아가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친히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감사하며
주님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인도하게 하심을 따라 마음껏 다니면서
십자가의 피복음의 완료성만을 담대히 증거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