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9-11 23:34
20230911 민수기 강해 132강 민 29:12-34 초막절과 화제물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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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09-12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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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1 민수기 강해 132강 초막절과 화제물

하나님 말씀, 민수기 29장 12절에서 34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민29:12~34)
“칠월 십오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칠일 동안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 너희 번제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리되 수송아지 열 셋과 수양 둘과 일년 된 수양 열 넷을 다 흠 없는 것으로 드릴 것이며 그 소제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수송아지 열 셋에는 각기 에바 십분지 삼이요 수양 둘에는 각기 에바 십분지 이요 어린 양 열 넷에는 각기 에바 십분지 일을 드릴 것이며 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 둘째 날에는 수송아지 열 둘과 수양 둘과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열 넷을 드릴 것이며 그 소제와 전제는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의 수효를 따라서 규례대로 할 것이며 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 세째 날에는 수송아지 열 하나와 수양 둘과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열 넷을 드릴 것이며 그 소제와 전제는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의 수효를 따라서 규례대로 할 것이며 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 네째 날에는 수송아지 열과 수양 둘과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열 넷을 드릴 것이며 그 소제와 전제는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의 수효를 따라서 규례대로 할 것이며 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 다섯째 날에는 수송아지 아홉과 수양 둘과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열 넷을 드릴 것이며 그 소제와 전제는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의 수효를 따라서 규례대로 할 것이며 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 여섯째 날에는 수송아지 여덟과 수양 둘과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열 넷을 드릴 것이며 그 소제와 전제는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의 수효를 따라서 규례대로 할 것이며 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 일곱째 날에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둘과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열 넷을 드릴 것이며 그 소제와 전제는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의 수효를 따라서 규례대로 할 것이며 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

오늘 본문은 일곱 번째 달 열다섯째 날이죠.
그날로 시작하여서 칠일간 오늘 본문에도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칠일 동안 여호와 앞에 절기를 드리라” 이렇게 명하고 계시지요.

레위기 23장에 보게 되면 23장 34절에 보면 “이 날을 초막절이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막절이라는 것은 광야 생활을 기억하면서 초막에 거하는 거예요. 칠일 동안.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들을 지킨다라고 하는데,
칠월 십오일부터 칠일간 초막생활만 하는 게 아니라
첫째 날에는 성회로 모여야 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날은 또 안식일이 되고요.

그러면서 이 제물의, 화제물의 숫자를 말씀하고 계시죠
기본적으로 드려야 되는 것은 상번제입니다. 상번제는 아침, 저녁으로 드리는 제사죠.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 되는 것은 모든 제사는 상번제 위에 드려진다라는 겁니다.
이 제사를 빼고 오늘 칠월 십오일이죠.
‘일곱번째 날, 열다섯째 날에 드려야 되는 제물이 너무 많으니까 상번제 빼고 드립시다’
이런 제사는 받지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칠일 동안 드리는 제물의 양을 보게 되면 다른 제물은 똑같습니다.
차이점은 수송아지 숫자입니다.
수송아지의 숫자가 칠월 십오일에는 13마리, 그다음에 12마리, 11마리, 10마리, 9마리, 8마리,
칠일째 7마리로 마치죠. 다른 제물들은 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 제물의 수송아지 숫자를 다르게 하셨느냐?
여러 가지 해석이 있어요.
중요한 것은 왜 열셋으로 시작하느냐? 라고 하면 일곱째 날 칠로 마친다는 겁니다.

칠이라는 것은 이미 천지창조에서, 그리고 율법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 안식하신 날,
그 날을 담고 있는 내용임은 누구나 부인할 길이 없습니다.
이와 함께 수송아지 숫자를 칠일 동안 다 덧셈을 하면 머리 좋은 사람은 벌써 덧셈을 했을 겁니다.
칠십 마리가 나와요. 일흔입니다. 일흔.

여기에 보면 칠이 둘이나 겹치고, 또 칠십을 나누면 칠에다가 십을 더한 거죠. 표현을 하면.
그래서 이스라엘 정통 유대인들은 ‘칠은 완전 수고 십은 충만한 수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그런 얘기를 한다고 해요.
‘이 칠십 마리의 송아지가 온 인류의 죄를 대속했다.’
그렇게 이야기해도 뭐 나쁘지는 않은데 뭐 그건 복음이 아니에요.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해야 되는 부분은 오늘날 이 초막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초막절을 지키는 집단이 있죠.
제가 사는 동네 옆에도 초막절을 지키는 동네가 있거든요.

여러분이 방금 읽어보셨잖아요.
초막절을 지키려면 뭘 해야 돼요? 돈 내라는 겁니다.
칠일 동안 한번 계산해 볼까요? 소 13마리부터 시작해서
소만 있습니까? 수양 둘이 있어야 되고 수양 열넷이 있어야 되고
그리고 소제도 있어야 되고 (곡물 제물도 있어야 되고)
또 속죄제 수염소 한 마리도 있어야 되죠.

초막절을 지키려면 이 법을 그대로 갖고 와야 돼요.
자기 마음대로 초막절을 지킨다고 해놓고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내용을 다 빼버리면 그거는 사기꾼입니다.
왜 말씀대로 안 지킵니까? 초막절을 지키자고 해놓고.
그러니 자기들의 입맛대로 맞추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가짜 집단만, 이단 집단만 이 초막절을 지키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몇 달 전엔가 어디 운동장에서 모였는데 모세 지팡이 짚고 등장한 유명한 목사가 있거든요.
서초동에 가면 큰 교회 하나 있잖아요.
초막절을 지키자고 하거든요.
앞으로 그 사람만 그럴 게 아닙니다. 웬만한 교회는 그러한 법들을 끌고 와요.
초막절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이 초막절 첫날을 수확절이라고 하거든요. 장막절이라고 합니다.
모든 추수를 다 끝낸 이후에, 창고에 들인 이후에 지내는 절기라는 거예요.
이 말의 의미는 어떤 의미인가? 하면
이미 그들이 십일조 생활을 제대로 했고 율법대로 살았고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땅의 소산을 축복해 주신 거죠.

축복해 주셔서 창고에 들이고, 그리고 그들은 장막으로 나가서 유유자적하게 아주 여유롭게,
왜냐하면 집 안에 있는 창고에는 먹을 것이 가득하잖아요.
그 초막생활을 하면서 광야 생활을 떠올린다라는 겁니다.
들어보면 그럴듯한데, 말씀을 보게 되면 그럴듯하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을 시킬까요? 지키기야 지키겠죠.

그런데 이 초막절의 의미를 들여다보게 되면
이 성막에서는, 이 날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으로 가야 됩니다.
성막 앞으로 아버지들은 다 가야 되고 남자들은 다 나아가야 되고, 거기에서 율법을 배워야 되고,
중요한 것은 성막에서는 칠일 동안 계속해서 화제가 드려진다라는 사실이에요.

그러니 광야 생활을 돌아보면서 추억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그걸 떠올리는 게 아니라
지금도 어떻습니까? 유월절 어린 양이 그때만 피를 흘린 게 아니라 지금도 제물이 피를 흘리고 있죠.

이 말인즉슨 그들이 초막절을 지킨다라는 자체가 무엇을 담고 있는 거예요?
여전히 희생물의 피가 화제물에 계속해서 불살라지고 있다라는 사실이고
속죄 제물이 피 흘려진다라는 그 내용을 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목사들이 흔히 말하듯이 초막절이니까 이제 농사를 잘 지었으니까
창고에 가득 들이고 초막에 들어가 가지고
이제 편안하게 그렇게 초막절을 지키면 되지 않느냐? 과거를 떠올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세요. 과거를 떠올릴 겨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선지자들은 과거를 기억하라고 할 때
그 과거를 기억하라는 말이 그 과거의 말씀이 현재이기 때문에 그래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 모든 말씀들이 현재로 보지 않거든요.
그래서 이런 말씀들을 볼 때
초막을 짓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떠올리는 겁니다.

요즘은 그 유대인들이 초막을 어디에 짓습니까? 베란다에 짓거든요. 아파트 같으면.
얼마나 코미디입니까? 말씀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7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 초막절이 나오죠. 7장 1, 2절을 보면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거죠. 유대인들이.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다니려고 아니 하신 거예요.
그러면서 이 사건을 무엇과 연결시키는가? 하면
유대인들의 명절인 초막절과 연결을 시키고 있다라는 거예요.

초막절을 연결시키면서 그 형제들이 등장을 하거든요.
형제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형제들도 비꼬면서 이 형을 몰아붙이죠.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어쩌면 이 형제들도 자기의 맏형을 통하여서 한 자리를 차지하기를 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성경에서는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아니하였다라고 이야기를 하죠.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예수님의 때를 몰라요.
십자가를 모르는 겁니다.

그러면 이들이 하는 모든 말들은 자신들의 탐욕일 수도 있고,
어쩌면 예수님과 비교하면서 질투일 수도 있는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이 무엇과 엮여 있는가? 하면 초막절과 엮여 있는 거예요.

사실은 이 내용은 이후에
예수님께서 성도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떤 일을 당하는 것과 동일하냐라고 하면
자기의 가족, 친척, 부모로부터 미움을 당한다는 그 말씀과 일치하게 돼요.

조금 뛰어넘어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성도의 삶 자체는 초막절을 사는 거거든요.
초막절을 산다라는 것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추수가 끝나가지고
이제 초막에 가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속하셨는가? 어린 양의 피로 구원했지.’
그걸 떠올리는 그런 삶이 아닌 거예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인데.

조금 더 보겠습니다.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다가
이 세상의 행사를 예수님께서 악하다 증거하셨기 때문에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 올라갈 것 같았는데 명절에 올라가셨어요. 가시고 14절에 보면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이 명절이 초막절입니다.
성전에서는 제사가, 화제가 드려지고 있겠죠.
예수님이 여기에서 가르치시는데 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증거를 하신 거죠.

예수님의 가르침의 모든 내용은 예수님의 때에 대한 내용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다 이루시는 그 내용을 가르치신 겁니다.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그러한 내용을 제자들도 알지 못하고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거예요.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앞서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라고 했거든요.
예수님이 스스로 모순되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보내심을 받은 자는 보낸 분의 영광을 구한다 했잖아요.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보낸 분의 영광을 먼저 이야기하고 자신의 영광을 이야기해야 되는데
요한복음 5장에서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상대들은 육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리가 없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전에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왜 성전에서 말씀을 하시느냐? 라고 하면 예수님이 제물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화제물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9절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예수님의 말씀 해석법은 너무나 과격하죠. 극단적입니다.
너희가 율법을 알지 못한다라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라고 하죠.

자기들 스스로나 주변의 사람들이 다 보더라도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를 죽이려 한다라는 그들의 마음,
이 마음을 아시기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라고 말씀하시고

20절에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귀신 들린 말씀이 되죠.
왜 그러하냐? 지금 이들의 태도나 형제들의 태도가 동일한데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그들에게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분명히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 이런 논리를 예수님이 펴셨고.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미친 자, 귀신 들린 자의 모습이다. 이렇게 말을 하면서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이들은 스스로 자기를 속이고 있다라고 볼 수 있고요.
왜냐하면 1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는 것이 이미 확정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우리는 너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고요.
이걸 달리 표현하면 이들은 만일에 죽이려고 하는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결국 예수님을 살해할 것이라는 그 말씀을 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어떤 일을 펼치셨는가?
이것이 이 예수님께서 초막절을 완성하셨거든요.
유월절도 완성하셨고 칠칠절도 완성하셨고 나팔절도 완성하셨고
그리고 이 명절 끝날, 7:37절 이하에 나오는 이 내용.
우리가 오늘 본문, 읽지 않은 그 후반부 민 29:35절 이하에 나오는 그 날도 완성을 하셨어요.

그런데 이것들이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자기 몸을 대속물로 내어주셔서 이 말씀을 완성을 하신 거예요.
문제는 인간들이죠.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이 초막절을 앞서 제가 말씀드린 대로 그렇게 이해를 하는 겁니다.
끊임없이 지키려고 하죠.
초막절이 율법적으로 보면 즐거운 축제의 날이죠.
추수가 끝나고 일주일간 축제를 벌이는 날이죠. 일반적으로 세상 나라에서는.

그런데 이 민수기 29장에서는 일주일간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화제물만 드리는 날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이 초막절, 초막절을 기다린다. 이렇게 표현을 해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완성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성도는 성령을 받았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도는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느냐? 나그네의 삶을 살죠.
왜 나그네의 삶을 사는가? 나그네를 달리 표현하면 초막 생활을 하는 겁니다.
주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초막 생활을 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7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14절 보면 14절부터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셨다”라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러한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게 되면 지금도 성도들은 어린 양이 우리의 목자죠. 맞잖아요.
생명수 샘으로 인도를 하잖아요.
지금 요한계시록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하면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양쪽으로 겹쳐 놨어요.
무슨 얘기인가? 하면 여기에 보면 흰옷 입은 자들이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이잖아요.
이들은 어린 양의 피 안에서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이 하얀 옷 입고 주님 맞이하려 하는데

그 얘기가 아니라 “어린 양의 피 안에서 그 옷을 희게 씻음을 받았다”라는 것은
그들이 무엇만 나오는가? 하면 이 땅에 살아갈 때
큰 환란 가운데 나왔다 했잖아요. 다 죽었어요. 이들은.
‘나 흰옷 입었어요’ 하는 게 아니라
죽임 당한 어린양의 피만을 자랑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는 겁니다.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하면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는 모습이에요.

사람들은 지금 주님이 우리와 동행을 하잖아요.
동행을 하는 게 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인도하시는 게 아닌가요? 자꾸 딴 생각을 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어떤 사고를 갖고 있는가? 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살해할 때 갖고 있던 안목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자기의 꿈을 꾸는 겁니다.

마지막에 초막절이 이루어지면, 초막절이 완성이 되면 우리를 이렇게 살게 할 거라는,
자기의 망상이죠.
지금 요한계시록 자체는 꿈을 꾸라는 얘기가 아니라
이 말씀 자체가 너희들이 살고 있는 현장, 사도 요한이 대표적이죠. 사도들이 대표적이고.
그들이 주님과 동행하는 그 현장 자체가 지금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사는,
십자가의 능력 속에서 사는 삶이고,
 그 십자가의 삶 자체가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라는 이 말씀에 해당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꿈꾸고 있는 자들은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겠죠.
이것을 꿈꾸는 자들은 십자가를 여기에 가기 위한 도구로 쓰겠죠.

그런데 성령을 받은 자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라는
그 말씀의 의미가 명확해지고 분명해지는 그러한 말씀으로 다가오게 되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이 땅에 살 때 성도는 죽임당한 어린 양의 피만을 자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멸시당하고 조롱당하고 비웃음당한 그 길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초막절을 완성하셨기에
오늘도 저희들을 십자가의 피 능력 속에서 살게 하시고,
피만을 자랑하기에 주님이 초막절에 당하셨던 그 모든 일들을 똑같이 당하게 하셔서
주님이 참된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샘으로 인도하심을 늘 확인하며 살아가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감사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관리자 23-09-12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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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