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2-25 15:55
20240223 신명기 강해 42강 신 6:10-15 여호와의 맹세와 부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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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4-02-25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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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3 신명기 강해 42강 신 6:10-15 여호와의 맹세와 부

하나님 말씀, 신명기 6장 10절에서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신6:10~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아멘.

약속의 땅으로만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이후에 그곳에서의 삶이, 생활 환경이 얼마나 풍족한가를 말씀합니다.
자신들이 건축하지 않은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될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 가득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될 것이고

이 당시에는 우물이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우물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되고,
심지 않은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셔서 배불리 먹게 하실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그 맹세죠.
맹세 이루는 차원에서, 언약을 성취하는 차원에서 이렇게 해 주시겠다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죠.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자신들이 원하지도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는데 로또를 맞은 거거든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대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
제대로 된 성읍, 아름다운 집, 파지 아니한 우물,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어서 배불리 먹게 하셨다라는 거예요.

그럴 때 조심하라는 겁니다. 주의하라는 거죠.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라”는 거예요.
이걸 왜 말씀을 하시느냐? 하면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 종 되었던 자들이잖아요.
종은 자기 소유가 없죠. 먹고 싶어도 배부르게 먹을 수는 없어요.
주인이면 마음껏 먹을 수 있잖아요. 좋은 집도 자기의 소유고, 종은 자기 소유가 없어요.

그곳에서 인도하신 여호와를 잊지 말라는 말은
그들이 어떻게 약속의 땅에 들어올 수 있었는가를 기억하라는 거죠.
잊지 않으려면 앞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겁니다.”
그중에 하나가 그 방식이 자녀에게 집에서든지, 나가서든지, 길에서든지,
아침에든지, 저녁에든지 항상 가르치라는 거죠. 율법을.

심지어는 이 팔에도, 팔목에도, 손목에도 매고,
미간 사이에도 이렇게 상자를 만들어서 말씀을 잊지 말라는 거죠.
집 출입구에도 마찬가지고요. 방문에도 말씀을 새겨놓고.
우리 한국적으로 표현하면 입구마다 부적처럼 말씀을 다 기록해놓는 거죠.
여호와를 잊지 말라는 것은 이 십계명을 지키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배가 부를 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이렇게 말씀하는 거예요.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는 것은 왜 그러냐? 하면
약속의 땅 자체가 열조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로 주어진 땅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이 언약의 체계 속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배가 부를 때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
우리 같으면 어떻겠습니까?
배가 부르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함을 받았을 때
여호와를 잊어버릴까요? 기억할까요? 우상을 섬길까요? 안 섬길까요?

사람들은 말씀을 읽을 때 망상을 해요.
지금 우리가 신명기 방금 6장 10절에서 15절을 읽었잖아요.
하나님께서 지금 일하신 방식을 지금까지 살펴왔잖아요. 창세기부터.

말씀대로 하시는 거예요.
그 말씀대로 하신다는 것은 이 말씀을 내가 지켜서, 이 말씀대로 순종하여서
이 질투하시는 하나님 이심이 안 드러나도록 할 것이다. 이렇게 예상을 하는데
말씀은 말씀대로 되어져요.

이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만 이렇게 해석을 하는데
육에 속한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갖느냐? 하면
‘그래 이렇게 살지 않아야지, 내가 부자가 되어도 우상을 섬기지 않아야지’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사사기 17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사사기 17장에 보면 유명한 사건이 나오죠.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 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이 말씀이 굉장히 이렇게 앞뒤 설명이 없는 상태에서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설명을 하면 방금 신명기 6장 1절부터 15절까지를 다 배경으로 깔고
이 말씀을 보면 의미가 명확해집니다.
엄마가 은 일천 일백을 잃어버렸어요. 집에서.
누군가가 훔쳐간 겁니다.
집에서 누가 훔쳐가겠어요? 도둑이 들어 왔다 갈 수도 있죠.

은 일천 일백은 어느 정도의 가치냐? 하며
은 한 세겔를 보통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한 4만 원... 표현을 하면.
일천 일백이니까 한 4,400만 원입니까? 이 정도 돼요. 옛날 4,800만 원
꽤 돈이 많아요. 이 당시의 가치로는

우리 한 30~40년 전만 해도 대구 같은 경우에는 2천만 원 하면 집 한 채 샀거든요. 표현을 하면.
이 집이 얼마나 부자인가를 볼 수 있는 대목이에요.
어마어마한 부자예요. 그러니까 아들이 은 일천 일백, 4,800만 원쯤 되는데
그 정도를 훔쳐가도 대는 그 정도의 부자입니다.

그런데 돈을 잃어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이 엄마가 저주를 퍼붓습니다.
누구로부터 저주를 받느냐? 하면 여호와께로부터 저주를 받는다는 거예요.
왜 그 저주를 퍼붓냐? 하면
사사 시대의 소견에 옳은 대로 하지만요.
옳은 대로 하더라도 인간들은 복과 저주에 대해서는 굉장히 민감해요.
도둑질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거든요.

그런데 이걸 자기가 지금 잃어버렸으니까 돈을 큰 액수를 잃어버렸으니까
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워낙 부자이기 때문에.
어쨌든 돈을 잃어버렸으니까 이 훔쳐간 자에게 저주를 퍼부었어요.
그러니까 아들이 ‘내가 그것을 훔쳤다’ 이야기합니다. ‘내가 갖고 갔다.’

그러니까 갑자기 미가 엄마가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지금 율법에 의하면 계속해서 가르쳐야 되는 게 뭡니까?
‘도둑질하지 말라’를 가르쳐야 되죠.
그럼 도둑질하면 저주를 받는다라고 가르쳐야 되고
아들이 만일에 도둑질을 했으면 저주를 받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말을 싹 바꾸어서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율법은 알긴 알아요. 내용은 알긴 알아요.
알긴 아는데 이 율법을 이들이 알면서
그 모든 율법에 대한 마음의 중심, 무게 중심이 어디에 가 있냐? 하면
복 받는 겁니다. 내가 복받는 거예요.
그러자 이 미가가 일천 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돌려줍니다.
도로 돌려주니까 이 어미가 희한한 이야기를 해요.

“가로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 차로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이 말이 되게 이상해요.
신상을 하나는 이 조각상을 만들고 하나는 이 부어서 만드는 그 신상을 만들겠다는 거예요.
누구를 위하여? 아들을 위하여.

그러면서 이것을 ‘여호와께 드린다. 거룩히 드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의 아들을 위하여.
신상과 여호와께 드리는 게 이렇게 연결이 돼요? 안 돼요?
우리는 뭐 쉽게 ‘이 짬뽕 신앙을 갖고 있구나’ 이렇게 들어가는데
지금 그 말은 맞아요. 말은 맞는데 지금 이 어미가 이 사사시대에
이들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가를 적나라게 보여주는 장면이 이런 장면이에요.

저주를 퍼부었으니까 저주를 무마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복 받기를 원하는데
복을 받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드는 방식인 거예요.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하죠.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하게 드리노라”
나중에 이 여호와께 드린다 했을 때 그 여호와가 누구냐? 가 나옵니다.
뒤에 보면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하잖아요.

제사장은 누구를 위해서 일을 해요? 여호와를 위해서 일을 하죠.
그 여호와의 자리에 누가 가 있느냐? 하면 미가가 가 있는 거예요.
자기들 마음대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부자거든요.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돌리리라”
이 돌린다라는 말은 결국은 이 아들에게 저주가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돌리는 방식인데... 뒤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그 어미에게 돌려준 것 같은데 돌려줬는데 어미가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신상을 부어 만든 거예요. 되게 복잡한데.
이것을 이 신상이 누구를 위한 신상이냐? 하면 아들을 위한 신상이에요.

아들을 위한 신상이면서 동시에 뒤에 보면
제사장을 세워서 에봇을 입혀서 자기 가정에 축복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잖아요.
그 모든 것들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 라고 하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 집안, 자기 아들을 위한 것이 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부자가 되니까 애굽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함을 받았던 것을 기억해요? 안 해요? 알기는 알죠.
근데 부자가 되니까 어떻습니까? 그 모든 것들이 다 잊어져야 돼요.

지금 신명기에서 모세를 통해서 신신당부하거든요.
신신당부함에도 불구하고 왜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부자가 되었을 때
왜 이들이 말씀대로 살지 않고, 이제 뒤에 보면 우상을 만들어 우상을 섬기잖아요.

문명이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러냐? 하면 환경이 그러한 거예요.
부자만이 살아남는 세계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러면 부자가 더 부자가 되는 방법은 뭐냐? 라고 하면
맹세의 정도가 아니고 여호와께서 맹세하신 그 맹세로 인하여서 약속의 땅에 들어왔을 때의
그 부자보다 큰 부자가 되려면 우상을 섬겨야 되는 겁니다.
우상에게 기도하고 우상에게 절을 하여서 응답을 받는
그 주변 이방인들, 가나안 땅 사람들, 그들을 보면서 배우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무엇이 달라지느냐? 하면
우상에게 절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 신을 자기 손에 갖고 놀 수 있다라는 겁니다.

지금 모세를 통해서 들려지는 말씀은 일방적으로 순종해야 되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지금 이 사사 시대에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부자가 된 이 미가 집안을 보게 되면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조정하려고 하죠.
축복과 저주가 기준이 다 자기입니다.

도둑질 했으니까 여호와를 끌어와서 저주를 퍼붓고
자기 아들이니까 축복을 퍼붓고 그 아들을 위해서 신상을 만들어서
그 신상을 아들을 위해서 만든 것 자체를 여호와께 거룩히 드린 모습이라 이렇게 주장을 하는 겁니다.

사사기에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이후도 마찬가지인데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신명기 말씀을 주신 목적은요.
지키라고 주신 게 아니에요. 이 말씀대로 되어진다라는 겁니다.
되어진다는 내용이 이미 신명기에도 나오거든요.
신명기에 이미 바벨론 포로에서 잡혀가서 돌아오고 예수님이 오시는 사건까지 이미 다 나열돼 있어요.

사람들이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래서 ‘신명기는 나중에 포로 이후에, 바벨론 포로 이후에 기록된 말씀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데
말씀을 세상 역사처럼 보는 거예요.
계시를 계시로 안 보는 겁니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대로 빛이 있었잖아요.
그러면 신명기의 말씀이 주어지면
그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그대로 그 말씀에 휘말려서 말씀을 위한 이스라엘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받을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남은 자들이 있잖아요. 예수님 당시에 남은 자들.
남은 자들이 이 사건을 알아요.
신명기 6장도 알고 사사기 17장도 아는 겁니다.

그러면 이들이 이 말씀을 딱 기억하면서 우리가 왜 멸망 당했고
왜 지금 이 형편이 이 정도의 형편인가?
물론 나름대로 잘 살고 있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들은 그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더 화려하게 살고 싶고 더 영광을 받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상을 안 섬깁니다. 우상을 안 섬겨요.

우상을 안 섬기는 목적이 따로 있어요.
우상을 안 섬기는 목적이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더 잘 먹고 더 잘 살고 더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그게 우상이거든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는 말씀에 화답하지 않는 겁니다.
그들이 원하는 바는 죄인을 부르러 오시는 메시야가 아니라 자신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역사죠.
그 모든 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겁니다.
그러한 것들을 기다렸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약속의 땅에서 정말 풍족하게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모든 결국 이방 나라들이 자기들에게 굴복하는 그러한 나라를 꿈꾸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한 거예요.

이 마지막 우상숭배의 모습은 놀랍게도
사사기 17장에 나오는 이러한 자들의 모습에 의해서 예수님이 살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삶을 살지 않는, 오직 여호와만 경배하는 자의 모습으로 우상숭배가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위한 세상이 아니에요.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분,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의 심판 주되심을 증거하기 위한 세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부지런히 배우고 가르치는 그 목적이
나의 행복과 나의 부를 위한 그러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죄인들을 부르셔서
주님의 십자가의 증인으로 삼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우리의 인생이니 주께서 날마다 긍휼히 여기시사
십자가의 피 공로만을 자랑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