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6-04 22:39
20240603 신명기 강해 85강 신 15:12-18 자유와 자유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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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4-06-04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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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3 신명기 강해 85강 신 15:12-18 자유와 자유

하나님 말씀, 신명기 15장 12절에서 1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신15:12~18)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 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 그를 인하여 내가 오늘날 이같이 네게 명하노라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지니라 그가 육년 동안에 품군의 삯의 배나 받을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아멘.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는 얼마든지 ‘지키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문제가 뭐냐? 하면
약속의 땅에 종이 있다라는 겁니다.
동일하게 기업을 받았는데 팔리는 종이 생겼다라는 것은 그들이 율법 위반자라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받은 자요.
그러하기 때문에 종으로 팔리게 되는 지경에 이르는 거예요.
그러한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약속의 땅. 정말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땅은
모두가 공평하고 사람들이 살기에 평화로운 그러한 땅이기를 기대할지 모르지만,
율법에 의하면 약속의 땅은 율법을 위한 땅이기 때문에
반드시 팔리는 종이 만들어지고 또 종을 사는 주인이 또 그곳에서 만들어진다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종을 샀을 때 7년째 되는 해는 반드시 놓아주라는 겁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거예요.
그 뒷 구절을 보게 되면 그가 품꾼이 일하는 것보다 2배 정도의 일을 해서
많은 축복을 너희 집에 가져다주었다라는 거예요. 그러니 그를 돌려보낼 때 빈손으로 보내지 말고
재산을 두둑이 챙겨주라는 거예요.

좀 생각을 해야 되는 게 뭐냐? 하면
두둑이 줘서 돌려보냈을 때 다시 종으로 팔리지 않도록 조치를 해야 되는 거예요.
성경에는 재산이 어느 정도인가는 나오지 않지만 그렇게 할 경우에 복을 준다는 거예요.
그런데 계산을 해보면요. 과연 놓아주겠습니까? 종을 놓아주겠어요?
놓아줄 때 두둑하게 해서 주겠습니까?

그리고 어느 종이 ‘나는 이 집이 좋으니까 이 집에서 영원히 종이 될래’ 이럴 사람이 있겠어요?
모르긴 몰라도요. 영원히 종이 되겠다는 사람은 특별히 게으른 사람이라든지,
약간 모자란 사람이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우리들은 ‘내가 이 집을 사랑하여서 종이 되겠습니다’라고 하니까
이 사람이 품꾼으로서 엄청나게 일을 잘해서 종이 될 거라는 그런 망상을 하죠. 망상을.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자기 중심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래요.

예레미야 34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34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율법을 지켰는지 안 지켰는지가 나와요.
34장은 이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과 그 모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칠 때입니다.
이때 남유다가 BC 586년에 망하거든요.
지금 이때가 BC 587년입니다. 1년 정도 후면 예루살렘이 불살라질 것을 말씀하고
그리고 시드기아 왕이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언합니다.
시드기아 왕은 실제로 두 눈이 뽑힌 채로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데
여기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하는 거예요.
이 예언을 할 때 그전에 왕들에게 해도 말 안 듣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안 들어요.

34장 6절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 모든 말씀을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시드기아에게 고하니라 이때에 바벨론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남은 모든 성을 쳤으니 곧 라기스와 아세가라 유다의 견고한 성업 중에 이것들만 남았더라”
그러니까 예루살렘, 라기스, 아세가, 세 성만 남았어요.
나머지는 모두가 다 이 바벨론 왕에 의해서 점령을 당한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을 했고, 이 상황에서 시드기아 왕이

34장 8절에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언약하고 자유를 선언한 후에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시드기아 왕이 자유를 선언했어요. 그 자유를 선언한 내용을 보면 뒤에 보면
이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나 백성들이 다 종을 소유하고 있었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위기 상황에서 시드기아 왕이 왜 자유를 선포했느냐?
신명기 5장 12절 18절에 나오는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자유를 선포했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 전쟁에서 이 종들을 다 자유케 하여서
마지막 결전을 벌여 볼 그럴 심산으로 자유를 선언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요. 이렇게 한 행위를 갖고
바로 신명기를 끌고 와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8절 하반절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그 언약은 곧 사람으로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케 하고 그 동족 유다인으로 종을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이 언약에 참가한 방백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케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하여 놓았더니”
본래 신명기 언약이죠. 그래서 놓았는데
문제는 11절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케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복종시켜 노비를 삼았더라”

10절 보면 “이 언약에 참가한 방백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케 했다”라고 하죠.
이 표현이 굉장히 중요해요.
방백들은 방금 이야기했듯이 고위직이고 모든 백성이에요.
그러면 고위직과 백성들이 종을 소유했기 때문에
조선시대도 그랬고요. 종이 여기에 노비라고 표현했는데 노비가 적절할 겁니다.
이러한 사람들이(노비) 훨씬 많았다는 거예요.

그러니 신명기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지키라는 이 말씀, 7년째는 놓아주라는
이 말씀에 대해서는 지키지 않습니다.
심지어 위기에 처했잖아요.
선지자를 통해서 불살라지고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아요. 왜?

우리 자신을 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죽는지 모르잖아요.
오늘 밤 내 영혼 데려갈지 모르잖아요.
알기는 아는데 아는 거하고 실제는 달라요.
지금 오늘 당장 이 노비들이 없으니까 사는 게 불편하고
이들이 없으면 나중에 어떻게 되죠? 저들이 물러갔을 때 수학을 어떻게 할 거냐?
그 모든 것들에 손실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뜻을 꺾어버립니다.
율법에는 관심이 하나도 없어요.

34장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그래서 이들을 자유케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자유케 해버리는가? 하면요.
아주 흥미롭습니다.

34장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하는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칼과 염병과 기근을 자유케 해버려요. 자유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유’라는 단어를 갖고 그들을 심판 속으로 몰아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고 이후에 돌아옵니다.
돌아오면 그들은 여전히 종이죠.

종인데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을 보겠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렇게 말씀했어요.
그러자 이 유대인들이,
이 유대인들이 누구냐? 하면요.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이에요. 31절에 보면.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8장 33절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놀랍죠? 실제로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 있어요.
그런데 이들은 한 번도 종이 된 적이 없다라는 거예요. 굉장히 영적입니다.
유대인의 신앙이 육적이 아니에요. 분명 종인데 종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구약 말씀에 의하면 이들은 포로로 잡혀가잖아요. 그럼 종이 맞죠?
‘그 종이 진짜 종이다’라고 말씀을 하실 수도 있는데 상대가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종으로 인정한다고 합니까? 안 한다고 합니까?
안 한다고 하죠. 그 종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너희들은 죄의 종이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자신의 피로 자유케 하셨어요.

자유케 하셨으면 그다음, 이 신명기 말씀에 의하면
‘다 종에서 자유케 되어야 되지 않느냐?’라는 생각을 가질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7장 2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자유하라 주 안에서는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예수님의 핏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정말 놀라운 말씀이죠.
예수님께서 진리로 자유케 하셨다면
그다음부터는 이 세상에서 이 육체적인 물리적인 종과 주인이 다 사라져야 되는데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느냐? 하면
종으로 있으면 그냥 종으로 지내라고 해요.
왜냐하면 너희들은 이미 진리로 자유케 되었기 때문에.
어린 양의 피로, 값으로 샀기 때문에 너희들은 자유인이라는 거예요.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요. 똑같아요. 이 당시나 오늘날이나.
예수님께서 비록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면 나중에 에베소서에 나오거든요. 6장으로 가게 되면.
종들이 어떤 태도를 지녔느냐? 하면
주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니까 뭐라고 하겠어요?
우리를 자유케 해달라고 얼마든지 요구할 태세를 보이는 겁니다.
‘네가 십자가를 안다면, 주인이 십자가를 안다면 어떻게 우리를 종으로 부릴 수 있느냐?’
이런 태도가 나와요.

그래서 에베소서 6장 5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말씀을 자기 입장에서 모든 걸 해석해서 자기 중심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신명기에 나오는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의 종에서 자유케 한 이 말씀이 어떻게 이어지느냐? 보면
인간 질서 세계는 그대로 둡니다.
우리 같으면 인간들이 자기가 예수라면 질서를 어떻게 하겠어요?
종과 주인 체계를 다 없애버리고 평등하게 만들 거 아닙니까?

왜 그런 생각을 갖느냐? 하면
약속의 땅을 지금 율법 보세요. 율법은 ‘율법을 위한 약속의 땅’인데
그 약속의 땅을 ‘나를 위한 약속의 땅’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 에베소서 여기에서도 이 종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하면
주인 행세를 하는 겁니다.
그런 태도가 나올 가능성이 다분히 높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종들아 두려워 말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다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충격적이죠.
육신의 상전일 뿐인데 주님께 하듯 일을 하라는 거예요.
주님께 하듯 대하라는 겁니다.

복음은 우리를, 나 자신을 편하게 하고 나를 즐겁게 하는 복음이 아니에요.
그러면 왜 이렇게 말씀하시느냐? 하면요.
십자가 피를 자랑케 하기 위한 성도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들은 십자가의 피를 갖고
자기가 행복해지고 자기가 편안해지고 자기가 많은 것을 소유한 자리로 가기를 원하는데
주님은 그런 걸 허용치 않아요.
물론 자유케 할 수 있거든 자유하라는 건데
그건 주인이 놓아주지 않으면 결코 자유케 할 수 없습니다.

8절에 보면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여기에서 ‘무슨 선’이라는 것은 모든 선은 하나예요.
십자가 피를 자랑하는 거예요.

이 말씀을 갖고 ‘제가 종의 역할을 제대로 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그러면 무슨 태도가 나올까요?
주인 당신도 뒤에 상전이 있거든요.
“상전 너희들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계시기 때문에 너희들은 두려워하고 그 종들을 협박하지 말고 그들을 대하라” 이야기예요.
이게 서로 요구가 달라요.
내가 주인이라 하면 앞부분 말씀을 갖고
‘너 종이지? (직원이 있으면) 너 주께 하듯 해.’ 이걸 요구할 거고

반대로 종은 ‘당신 상전이잖아. 상전인데 당신을 다스리는 상전이 따로 있지 않느냐? 그러니 협박하지 말고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라.’ 이런 요구를 하게 돼 있어요.
말씀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지금 이 말씀을 줌으로 말미암아 종과 상전이 있는 그 집안은 죄밖에 안 나와요.

‘그럼 이렇게 살면 되지 않습니까?’
살아도 죄밖에 안 나와요. 왜? 살았기 때문에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둘 다 살았기 때문에 ‘나 잘났죠?’ 이래 나와요.
지금 이 에베소서 6장 이 뒤에 나오는 모든 성경은, 성경 전체도 그래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일들을 다 이루신 그분의 성령을 성도들 가운데 주셨기 때문에
그 피 공로를 자랑하는 삶의 현장으로 몰아넣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도를 안 바꿔요.

민중 신학자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마치
‘세상을 어떻게 뒤바꾸어서 평등하게 만들고 공평하게 하고 가난한 자 없는 세계를 만든다.’
이거는 성경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성경을 이용하는 자들이죠. 복음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에요.

세상은 계속해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불공평, 차등, 이런 세계 속에서 그대로 흘러갈 겁니다.
돈 많이 버는 사람이 있을 거고, 적게 버는 사람이 있을 거고.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가난한 자가 있을 거고 부자가 있을 거고,
교회 안에서 부자한테 가난한 자가 ‘돈 주세요.’ 이거 요구 못해요.
또 반대로 가난하니까 ‘너 가난한 대로 살아라.’ 이것도 안 돼요.
어떤 것도 용납이 안 돼요.

모든 것이 책망을 받으면서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며 감사하는 자리로 인도함을 받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꿈꾸는 약속의 땅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의 피만 증거 되고 쏟아지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음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