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7-06 11:42
20240705 신명기 강해 99강 신18:1-5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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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4-07-08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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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신명기 강해 99강 신18:1-5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 말씀, 신명기 18장 1절에서 5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신18:1~5)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지니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물과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 그들이 그 형제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은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니라 제사장이 백성에게서 받을 응식은 이러하니 곧 그 드리는 제물의 우양을 물론하고 그 앞 넓적다리와 두 볼과 위라 이것을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또 너의 처음 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너의 처음 깎은 양털을 네가 그에게 줄 것이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택하여 내시고 그와 그의 자손으로 영영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서서 섬기게 하셨음이니라”아멘.

이 말씀에 대해서는 레위기에서도 말씀을 하셨고, 민수기 18장에서 아주 세세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지니”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물과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 ‘여호와께서 기업이 되시면 참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겠죠.

문제는 여호와께서 내 뜻대로 움직이시느냐? 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사사기로 가보면 기업이 없는 이들에게 3절 이하에 나오는
십일조와 맏물을 레위 지파나 제사장에게 드리느냐? 라고 하면 안 드립니다.

민수기 18장은 출애굽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요.
물론 가데스 바네아에서 대반역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38년 광야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주신 말씀이고
그 말씀을 들은 자들은 38년 광야 기간 동안 죽었어요.

죽고, 지금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이후 세대에게 주시는 말씀인데
아직 안 들어가 봤잖아요. 이게 문제인 거예요.

쉽게 예를 들면요.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느냐? 하면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네’라고 해서 교회로 들어가게 되면
그 예수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이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펼쳐져 있어요.
그 말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때 예수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가 비로소 드러나게 되거든요.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면 레위나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이 ‘나 기업 없어도 돼’라고 하지만
막상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나머지 11지파가 십일조를 하지 않게 되고 첫 맏물을 드리지 않게 되고요.
제사 제물은 자기들이 원할 때 가끔 드리고 뭐 그런 상황이니까
누가 이 말씀을 좋아하겠느냐? 라는 거예요. 아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죄를 드러내기 위함이에요.
인간의 악마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겁니다.
물론 실제로 기업을 받지 않아요.
그리고 어쨌든 십일조도 바치고 첫 맏물도 드리지만, 이것이 모든 것이 와해가 됩니다.

여기에 보면 왜 이 제사장과 레위 지파 이들에게 첫 맏물과 십일조를 내야 되느냐?
그것은 그들에게 바치는 게 아니라 여호와께 드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 열두지파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기들이 바치는 것을 누가 먹어요?
레위 지파가 먹고 제사장이 먹으니까
‘쟤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도 하지 않고 먹는다’ 이렇게 판단할 거 아니에요.

여기에 대해서 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택하여 내시고 그와 그의 자손으로 영영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서서 섬기게 하셨음이니라”서서 섬기는 거예요.
상대가 십일조를 하는 그들이 볼 때는 일도 안 한다라고 보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대응 관계로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서서 섬긴다.

사실은 이들이 희생물이고요. 레위 지파가 속건제고요.
제사장이 나중에 속죄물이 됩니다. 대제사장이 속죄물이 되죠.
그 기능을 이들이 감당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호수아 전쟁을 통하여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후에
지켜지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사사기를 보더라도 그렇고, 사무엘의 상하를 보더라도 그렇고.

아무튼 이런 말씀들을 통하여서 인간은 어떤 사태로 내몰리느냐? 하면
구약을 보게 되면 말라기까지 전개되는 그 방식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조차도 말라기를 보면 ‘흠 없는 것을 드려라’ 했는데 흠 있는 것을 드리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잖아요.
그러면 에스라, 느헤미야 정신을 좀 이어받아서 제대로 된 제사장 기능을 해야 되는데,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요.
우리는 그 말라기를 읽으면서 ‘왜 제사장이 흠 있는 걸 드릴까?’ 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 상황 자체가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성경을 읽는 방식이 문제가 있어요.
목사들이 설교를 할 때 이 구약을 설교할 때 교훈식으로 하는 것이 왜 악마적이냐? 하면
자신들은 이렇게 봐요.
‘광야 생활에서 물이 없을 때 왜 원망하느냐?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 기다리면 되지 않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보가 아니에요.
불과 구름 기둥이 그들을 그 상황 속으로 내몬 겁니다.
그래서 구약을 교훈으로 보는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를 조롱하게 돼요.
구약은 교훈이 아니에요. 계시입니다.

계시라는 것은 그 상황 속에서 완벽하게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는 말씀이 돼요.
그걸 보고 ‘이렇게 바꿔야지 이렇게 바꿔야지.’
그렇게 바꾼 자들이 말라기 이후에 400년이 지나서 등장한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자 그들은 어떻게 살았느냐?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했지만 의와 인과 신은 버렸으니까
저들은 외식하는 자들이라’ 이렇게 말하지만,

여러분들이 헌금할 때 어떻게 합니까? 의와 인과 신을 다 갖고 합니까?
역으로, 바리새인에게 물어보면 ‘우리는 그걸 갖고 했다’ 라고 해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 의와 인과 신, 이것을 합쳐서 한 내용이 십자가예요.
예수님이 십일조가 되시거든요.

그 내용을 십일조 하는 자들에게 제시하면 그들이 예수님을 십일조로 인정하겠습니까? 안 하죠.
왜? 십일조를 말라기 선지자가 지적할때 지적할 거리가 없는 십일조를 해버렸기 때문에 그래요.
십일조를 한 그들이 예수님을 살해해버렸어요.
많은 사람들은 여기까지는 다 알고 있죠.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이 오늘날 성도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렇게 말을 하잖아요.
‘예수님이 십일조가 됐으니까 이제 우리가 더 이상 십일조 바칠 곳도 없고 첫 맏물을 드릴 곳도 없고.’ 그 말은 다 맞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서 말씀을 완성하신 이후에 신약의 세계가 펼쳐지죠.
고린도전서 9장 1절을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해요.
예수님이 십일조가 되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십일조 하면 지옥 간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십일조를 해도 지옥 가고 안 해도 지옥을 가요.
헌금을 해도 지옥을 가고 안 해도 지옥을 가요.

왜 그러냐? 하면 십자가의 피 능력이 천국을 보내고요.
십자가의 피 능력이 지옥을 보내는 겁니다.
인간의 행위 여부에 따라서, 십일조 했기 때문에 지옥 가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은요.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옳은 걸 추구해요.

그래서 창세기부터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내용을 갖고
‘십일조의 옳은 의미가 뭐냐?’를 끄집어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믿으면 되지 왜 십일조를 하느냐?’라는 이야기를 해요. ‘헌금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라고 주장해요.

이 사람은 십일조 되신 예수님을 뭘로 보는 거예요?
옳은 지식으로 보는 거예요. 그게 선이에요.
그러면 그 선은 자기한테 유리하죠. 유리하니까 십자가를 믿어버리는 겁니다.
믿어버리니까 십자가가 필요 없어져요.

그러면서 그 사람은 어떻게 살까요?
예수님이 십일조 되셨는데 그다음 어떻게 살까요?
주님이 십일조가 되셔서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주시게 되면 성도는 주의 증인이 됩니다.

그럼 주의 증인이 어떻게 되느냐? 그러한 내용들이
이제 서신서를 통해서 쫙 펼쳐지거든요. 물론 사복음서에도 그대로 나옵니다.

그 내용이 이제 (고린도전서) 9장에 나오는데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했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자유자라는 말은 죄에서 자유케 된다라는 거예요. 주님의 종이라는 거고

“사도가 아니냐”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도죠.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여기에 용어도 참 어려운데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거예요. 십자가 못 박히신 예수님이 주님인데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자들이 우리라는 겁니다.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놀랍죠. 고린도 교인들이 주 안에서 사도바울이 행한 일이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찌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고린도에 가서 아덴에 갔다가 고린도에 가서 천막을 기우면서 복음을 전했잖아요.
그런 상태에서 이제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로 인정을 한 거예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도바울을 비판하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사도바울을 비판을 하는데 어떻게 비판하느냐? 하면요.
이들의 비판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옳은 말씀을 갖고 사도바울을 공격해요.

그 옳은 내용을 사도 바울이 이야기를 합니다. 13절에 보면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바로 이거예요.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은 주께서 명하신 대로
자기가 직접 일을 하지 않고 성도들이 연보하는 것을 갖고 복음을 전하고 생활을 해요.
심지어는 아내를 데리고 다녀요. 아내를 데리고 다닌다는 것은요. 비용이 더블 든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 라고 하면 ‘이들이 정말 예수님이 가르친 대로 하고 있다’라고 주장해요.
누가? 사도바울을 비난한 자들이.
사도 바울은 자비량하고 직접 돈을 벌면서 복음을 전하고 그렇게 하니까
사도 바울이 돈을 일부러 헌금을 안 받은 경우도 있고 받는 경우도 있는데
어쨌든 ‘네가 진짜 사도바울이라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도다움을 보여야 된다’는 거예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으니까.
‘근데 넌 왜 그렇게 안 하느냐?’ 라고 비판을 하는 거예요.
이 사건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 중요하냐? 하면요.
인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이루신 일들을, 완성하신 일에 대해서 옳음을 찾아내려고 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을 옳음으로 봐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옳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를 증거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면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종이잖아요.
그러면 말씀대로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되잖아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스스로 증거하는 거잖아요.

근데 사도 바울이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이 말을 하는 것은 ‘나한테 헌금을 해라’ 이 말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사도바울을 공격하는 자들은
왜 예수님 말씀대로 니가 다른 사도들처럼 아내도 데리고 다니면서 여기에 보면 ‘권한’이라 하거든요.
정말 이 놀라운 말씀을 하는데

4절에 보면
“우리가 먹고 마시는 특권이 없겠느냐”라는 얘기예요.
특권이 있다라는 겁니다. 특권이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당연히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살 수 있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내용이 십자가를 전해야 되는데
문제는 이 내용이 오늘날 목사들이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우리는 복음을 전했으니까 복음으로 살아야 돼. 그러니까 성도 너희들 십일조는 나에게 해’
실제로 그런 교회가 많아요. 교단들이 있어요.
십일조는 목사가 다 가져갑니다.
그 외에 사례를 또 따로 받는 교회도 있어요.

이들의 문제가 뭐예요?
이 9장이 해석이 안 되는 겁니다. 9장이. 다른 본문도 마찬가지고.
지금 이 본문은 십자가를 증거하고 있는데 그들은 정답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니 그들은 정답을 갖고
‘나는 이런 특권이 있으니까 십일조는 내가 챙길 거야. 나는 사례를 당연히 받아야 돼. 너희들 왜 헌금을 안 해?’ 이런 식이 되는 거예요.

이런 것뿐만 아니고 은사도 마찬가지죠.
은사는 십자가를 전하기 위한 은사인데
방언이나 뭐 예언이나 통역이나 이런 은사를 주님이 주시니까 그 은사를 갖고 뭐 합니까?
남하고 비교하죠. 그렇게 만들어서 십자가를 증거하게 하는 거예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왜 그러냐? 하면요.
여기 보면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영적인 것으로 심었으면 육신으로 거두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거예요.

복음이라는 것이 마치 우리가 볼 때는 이 조건이 뭐냐? 하면
‘내가 영적인 것으로 투자를 했으니까 육적인 것으로 받는다’라고 설명을 하거든요.
근데 이 땅에서는 그 방법밖에 없어요. 설명이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 방식으로밖에 복음이 전파 안 돼요.

문제는 사도바울이 십자가의 증인이라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베드로와 달리 자비량하는 방식으로 밀어붙인 거예요.
사도행전에 보면 쫓겨다니면서 물론 연보를, 헌금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내몰리지 않아요.
그 사태를 만듦으로 말미암아 고린도 교회에서 이런 사도바울을 향한 비판을 만들어낸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어떤 문제를 지적해내는 거예요?
성령으로 책망받지 않는 자들은 정답을 찾는 거예요. 정답을.
그래서 만일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을 공격한 자들이 목사가 되면 어떤 짓을 하겠습니까?
‘나는 복음을 전하니까 너희들 헌금해’ 이 논리가 되는 거예요.
이러한 논리들을 이 사도바울의 경우를 들어서 주님께서는 철저하게 책망하고 ‘아니오’라고 하면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의 문제가 뭐냐? 하면
이 본문을 갖고 어떤 깨어 있는 목사들은 ‘자비량하는 목사가 말로 진짜 훌륭한 목사다’라고 해요.
이런 인간들은 더 악마적이에요. 교인들도 이런 목사를 원하거든요.
자비량하고 자기 돈 자기 벌고 그러면서 설교하라는 거예요.

사도바울을 보세요. 할 수 없었어요. 할 수 없는 상태로 내몰렸어요.
어쩌면 고린도 교회에서 천막 장사를 먼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서 복음을 전할 그 여력들이
이렇게 성도들이 없으니까 그 일을 하니까
그런 상태에서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오늘날도 똑같아요. 헌금 안 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럼 천막 장사 해서 먹고 사는데 왜 연보하겠어요?
그런 상황들이 펼쳐진 거예요.
그것이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에요.
물론 ‘옳다. 그르다’가 항상 나옵니다.

근데 오늘날 교회에서 뭔가 훌륭하다는 목사들 ‘자비량 해야 된다.’
어쩔 수 없어 자비량이지 자비량이 안 훌륭하다는 말도 아니에요.
사례받고 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에요.
사례를 받고 하든 자비량을 하든 나오는 것이 십자가뿐이어야 된다는 거예요.

문제는 선악과를 먹은 자들이 정답을, 옳음을 계속해서 추구하기 때문에
옳은 목사는 어떤 목사여야 되고 옳은 교회는 어떤 옳은 교회여야 되느냐? 라는 것을
계속 제시하면서 악마의 노리개가 돼요.
옳은 교회가 되면요. 십자가를 자랑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이니까 진리죠.
옳음을 말씀하신 이후에 그 말씀으로 인하여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을 만들어요.

예수님의 말씀은 특이해요.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어요.
‘복음을 전하는 자는 니 돈 벌어서 살아라’ 이 얘기를 안 해요.
제자들을 파송할 때 그걸 말씀을 읽는 성도들은 명심을 해야 돼요.

왜 그 말씀을 하시냐? 하면
원래 인간들은요. 구약, 이스라엘 백성 보세요.
자기한테 이익이 안 되면 십일조 안 합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말씀들을 주셔서 인간들을 성령에 의한
이 십자가 앞에서 책망하는 사건 속으로 몰아가면서 십자가를 자랑하게 하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에 다 이루신 그리스도를 저희들 가운데 넣으셔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말씀 앞에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앞에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셔서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자로 만드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을 자랑하기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당하신 그러한 형편 속으로 인도하심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관리자 24-07-08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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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