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7-10 10:43
20240709 신명기 강해 101강 신 18:9-15 덤장이와 무당이 되어버린 예수 이름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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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4-07-10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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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9 신명기 강해 101강 신 18:9-14 점장이와 무당이 되어버린 예수 이름

하나님 말씀, 신명기 18장 9절에서 14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신18:9~1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 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아멘.

이스라엘 가운데는 율법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율법을 들어야 돼요.
오늘날 이 말씀을 읽는 우리들 입장에서는
‘어느 누가 자녀를 불 가운데로, 희생제물로, 불에 태워서 신께 바치겠느냐?’
이렇게 말을 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말은 배가 부르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사마리아가 아람 군대에 의해서 포위되었을 때 아들을 잡아먹는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죠.
그러한 상황들은 관람하는 자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라고 할지 모르지만
말씀대로 응하게 될 경우에는 관람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모세 오경을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지만
성경을 교훈으로 본다는 것은 악마적 방식이에요. 교훈으로 보겠다는 것은
‘내가 저들보다 뛰어나다, 나는 저 시절을 살았다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태도를 갖는데 그것은 교과서죠. 역사 교과서를 보는 태도고
계시가 되어지면 이 말씀을 위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 위반자의 위치로 내몰리게 됩니다.
이 환경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성을 하십니다.

여기에 보면 “복술자,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
한국말인데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단어들이 쏟아지죠.
이들의 특징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정보를 주는 자들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점치는 것이나 뭐 타로점 같은 것들이죠.
요즘 길거리에 가면 뭐 그런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별점도 마찬가지고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아니면 앞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되는지?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자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점쟁이들부터 시작하여서
점을 치는 방식들이 각각 다른 그러한 자들로서의 인간의 앞날.

이 당시에는 간을 갖고 점을 쳤거든요. 동물의 간을 빼서
그것을 떨어뜨렸을 때 그 간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느냐 성경에 나옵니다.
그것을 보고 실제로 군사를 이동하는 그러한 모습을 말씀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이전 레위기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을 하셨거든요.

레위기께서 말씀하실 때는 출애굽 세대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 말씀을 듣는 자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세대들이죠.
항상 그래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는 ‘지키겠다’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들어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하지 말라는 짓만 합니다.
왜냐하면 환경 자체가 그렇게 몰아가요.
특히 우리들이 잘 아시다시피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고요.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이라는 것이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축복과 저주가 내려지느냐라고 할 때는
그렇지 않다라는 거예요. 그것이 또 문제고요.

그러하니 여기에 나오는 자녀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한다든가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를
찾는다든가 요술하는 자를 찾는다든가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를 찾아서
그들을 통하여서 대답을 얻고, 앞날에 대한 문제를 제거하는,
쉽게 말하면 행복한 앞날을 위해서 이들을 끌고 오는 겁니다. 불안을 제거하는 거죠.

관람을 하게 되면 ‘아 나는 이렇지 않을 거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면 이러한 자들을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이러한 자들이 없으면 안 되는 상황 속으로 이스라엘이 내몰리고 살아가게 된다라는 겁니다.

열왕기하 21장 1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남유다가 거의 멸망할 시점인데요. 여기에 보면 이 므낫세 왕이 나오거든요.
므낫세 왕은 히스기야 왕의 아들입니다. 히스기야를 대신하여서 그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되는데
히스기야 하면 우리들 기억으로는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앗수르 군대를 기도로 무찌르고 해를 멈추게 하여서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는
그러한 어떤 하나님의 기적, 이사야 선지자의 그러한 어떤 역할들을 통하여서 도움을 받았던 왕이죠.

그러면 그다음 아들이 뭔가 하나님 말씀에 잘 순종할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열왕기하 21:2절에 보면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그 부친 히스기야의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 왕 아합의 소위를 본받아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하여 섬기며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전의 단들을 쌓고 또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단들을 쌓고 또 그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격발하였으며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을 성전에 세웠더라”
지금 이 므낫세 왕이 왜 이렇게 일월 성신도 섬기고 아세라상을 성전에 세우고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느냐? 사술을 행하고 점치는 자를 신임하느냐? 라고 하면요.

우리가 다급할 때 누구를 찾습니까?
사람들이 왜 사주팔자를 봅니까?
왜 타로점을 봅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죠. ‘심심하니까 그냥 장난으로 본다.’
인간은 장난으로 보는 사람은 없어요.
그 밑바탕에는 다급함이 깔려 있어요.

다급함이 깔려 있다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라고 하면
그 점을 친 사람들이 점쟁이의 말을 들은 이후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태도를 보면 그 점쟁이에게 매이죠. 그 말에.
그래서 준비도 하고 조심도 하고 별별 짓을 다 하죠.

심지어는 엄마들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죠.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오늘 조심해라’
그런 간증도 많잖아요. 그게 무엇과 관련돼 있냐? 하면
율법과 관련돼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복과 관련되어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이 언약 백성으로서 율법에 따라서 살아야 될 자들입니다.

그러면 므낫세 왕이 왜 이렇게 자녀들을 불로 지나게 하여서 신께 바치고 일월 성신을 위하여
단을 쌓고 했느냐? 라고 하면 답답하기 때문에 그래요. 답답하기 때문에.

그런데 답답하면 우상을 섬기느냐? 아니에요.
솔로몬 왕을 보면 잘 나가도 우상을 섬겨요. 더 잘 나가야 되기 때문에.
왕의 자리를 더 강력한 자리로 유지하기 위해서, 더 큰 군사력을 만들기 위해서 우상숭배를 하죠.

율법이라는 것은 지키라고 준 게 아니에요. 죄를 더하게 함인데
특이한 것은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쫓아낸 자들보다 더 심하게 우상을 섬기는 거예요.
열왕기하 21:9절에 보면
“이 백성이 듣지 아니하였고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희한하죠. 율법을 받았고 언약 백성인데
오히려 멸망당한 이 가나안 족속들보다 더 심하게 점쟁이를 찾고, 신접한 자를 찾고, 박수를 찾고,
자녀들을 불 가운데로, 제물로 드렸다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한번 붙어보겠다라는 거예요.
이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이 가나안 땅을 점령했기 때문에 그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라’
예상할지 모르지만 그 가나안 땅이 그러한 땅이 아니에요.
결국 이 일로 인하여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고
이후에는 포로에서 돌아오게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6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지금 이 내용을 깔고 있지 않으면 마태복음이 이해가 안 돼요.
사람들은 ‘구약은 어려우니까 그냥 건너뛰고 신약만 읽으면 구원받지 않느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신약을 읽어버리면 우상숭배가 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우상숭배의 전당이거든요.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무당이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신접자, 점치는 자, 초혼자.
예수님이 그런 역할을 해달라고 기도하잖아요.

마태복음 6장 31절에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이렇게 말씀하죠.
우리가 이 본문을 읽을 때 ‘무엇을 구하느냐?’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것을 뒤집어보면 이방인들은 누구에게 구합니까? 우상에게 구하죠.

우상에게 구할 때 여기에 보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입니다.
그러면 이 필요한 것들을 우상에게 구할 때
우상은 과연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을 하느냐?라는 거예요.

지금 이 말씀은 누구와 연동이 되어 있느냐? 하면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굶주렸었을 때
‘돌로 떡덩이를 만들어보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배고픈 문제를 해결해 줘야 된다라는 거죠.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줘야 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배가 고프면 해결되는 게 아니고요.
배가 고픈 것이 해결이 되면 그다음 단계를 요청해요.
근데 그다음 단계를 요청하는 것도 그 사람에게는 필수적인 겁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자동차, 아니면 내가 살 집들, 이런 것들이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에 해당되는 내용이에요. 그 우상들에게 이것들을 구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방인들이 구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당시에 남은 자 유대인들은 무엇을 구했을까요? 똑같습니다.
무엇을 구했느냐? 하면
메시아가 오신다면 먹는 문제 해결해 주고, 이 질병 문제 해결해 주고,
그리고 우리가 꿈꾸는 그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하나님 나라,
자신들이 권세를 행세할 수 있는 세상, 권세와 영광을 손아귀에 쥐고 행세할 수 있는
그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 나라를 기다리면서 누구께 기도할까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지금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 18장 9~14절을 보셨죠?
이 내용을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고 열왕기하 21장 내용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멸망을 당했기 때문에 이 당시에는
이 남은 자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같이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만 섬깁니다.

여호와만 섬기는데 여호와께 기도하는 내용은 무엇과 관련되느냐? 하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구하는 거예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에덴 동산과 같아서 나의 행복이 영원하고
그 행복은 내가 권세와 영광을 마음껏 부릴 수 있는 행복,
먹는 문제는 당연히 해결되고요. 아픈 문제도 당연히 해결해 주는 그러한 나라를 기다리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들이 지금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고 있다라는 거예요.

심지어 제자들도 마찬가지죠.
제자들이 16장 17장 18장으로 넘어가면 그들이 뭘 추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에서의 권세, 잘 먹고 잘 사는 거예요.

그러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6장 32절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사람들은 이걸 오해를 하죠. “이런 게 있어야 할 줄 안다”
아니까 사도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굶주리게 하고 헐벗게도 하고 매를 맞게도 하고
스데반 집사님 같은 경우는 돌에 맞아 죽게 해버립니다.

‘다 알면 보호를 해야 되지 않느냐?’ 라는 거예요.
보호가 아니라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앞부분에 들풀을 말씀하셨거든요. 들풀을.
들풀 역할을 하면 들풀은 끝나야 돼요.
그 역할을 하라고 성도를 만든 겁니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마6: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의 나라와 의”가 뭘까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는 뭐예요?
십자가로 이루십니다.
제자들은 여기에 관심도 없어요.
오히려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로 만들어진 의에는 관심이 없고
십자가 지지 말라고 하죠. 그게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로 다 이루실 말씀이에요.
이렇게 되면 성도는 어떻게 사느냐? 하면요.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는 자’가 돼요.
그것을 위해서
먹는 문제, 입는 문제, 마시는 문제를 조달해 주는 거예요.
사도바울을 보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만드신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에서 나오는 의를 증거하기 위한 증인으로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인생은 어떤 인생이냐?
이방인들의 특징은 (유대인들도 이방인인데) 그들의 특징은 누구를 위해서 사느냐? 하면요.
하나님도 나를 위해 있어야 돼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무엇이 차이가 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하잖아요.
무엇이든지 구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신다라고 약속을 하셨잖아요.
그 내용이 지금 이 말씀 속에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나 교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뭘 구합니까?
먹을 거 구하고 입을 거 구하고 사업 잘 되는 거 구하고 건강한 걸 구하고
나중에는 천국까지 넣어달라 그러고
심지어는 죽은 자도 천국에 넣어달라고 그렇게 요구를 하잖아요.

그런데 앞서 나온 열왕기하 21장에 나왔던, 아니면 신명기 18장 9~14절에 나온 신접자, 초혼자,
점치는 자, 각양각색 모든 것들을 다 끌어모았어요. 어디에? 예수 이름에.
예수님이 무당이에요. 오늘날 교회는.
그래서 교회에서 십자가는 제거해버립니다.

왜 십자가 피를 제거하느냐? 하면
구원받는 데는 이용 가치가 있지만 그다음에는 쓸모가 없어요.
그리고 십자가를 이야기하게 되면 인간이 부정이 됩니다. 모든 것이 악이 되죠.

이 말씀에 의하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성령이 임한 자는 무엇을 구하겠어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천국을 자랑할 것 아닙니까?
“율법 외에 한 의”를 구하라고 하거든요.
그 의를 자랑하는 자로서 살아가는 인생이 성도인데
오늘날 교회는 예수 이름 자체를 초혼자로 바꿨어요.

그러한 어떤 모습을 보게 되면 오늘날 교회는 교회가 아니고요.
이름은 교회인데 선왕당 정도? 무당 굿하는 곳이 된 거예요. 교인들도 그러하고.
아까 므낫세 봤잖아요. 그 왕도 그러하고 백성들도 뭘 좋아합니까?
십자가의 피로 만든 천국이나 십자가로 보여주신 의를 좋아하지 않아요.
이 땅에서 행복하고 건강하고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어서는 천국(사실 지옥인데), 죽어서는 영원히 죽지 않고 행복하게,
이 땅에서 화목하지 않은 형제들이나 친구들과 영원히 사는 것을 꿈꾸거든요.
그러한 어떤 생각을 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점쟁이나 초혼자, 접신자 이런 예수에 불과하다라는 겁니다.
그건 복음이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라고 말씀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어떤 인간도 이방인 아닌 자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주셨기에
성도는 십자가로 만든 천국과
십자가에서 나오는 의를 구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긴 세월을 통하여서 말씀하셔도 결국은 자기를 숭배하는 남은 자 유대인이요
이 말씀을 대하면서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를 숭배하는 우상숭배자인 저희들을 불러서
십자가의 증인으로 삼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 인생을 긍휼히 여기사 십자가로 만드신 천국만을 자랑하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나오는 의를 마음껏 증거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