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9-13 23:29
출애굽기 111강 출 23:25-26 브닌나와 한나 (축복 받은 자와 저주 받은 자)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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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H07j_rFgyQ

관리자 21-09-14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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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11  브닌나와 한나(축복 받은 자와 저주 받은 자)

하나님 말씀, 출애굽기 23장 25절에서 26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출23:25~26)
25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
26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잉태치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

‘여호와를 섬기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여호와를 섬기면 너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시고 병을 제하실 것이다.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잉태치 못한 자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조금 주목해야 되는 부분이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에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면 이스라엘은 당연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겨야 되는 것이잖아요.

이것을 명하시는 이유는
이들을 애굽 땅 종되었던 곳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 능력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달리 말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물과 양식에 복을 주겠고 병을 제할 것이다.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잉태치 못한 자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애굽 땅 종되었던 곳에서 인도함을 받은 이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어떠한 모습을 보일 것이냐‘를 지금 미리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제가 늘 그렇게 말씀드린 바와는 같이
말씀이 먼저 있고 이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환경 속으로 집어넣어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의 백성의 삶인 거예요.

사무엘상 1장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1장에는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한나와 브닌나 사건이 등장합니다.
여기에 엘가나라는 사람이 등장하죠. 레위의 후손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2절에 보면

(삼상1: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한나가 먼저 기록되었다라는 것은 한나가 엘가나가 사랑했던 여인이라고 볼 수도 있고요.
첫 번째 아내, 본처라고도 볼 수 있고,
어쩌면 이 본처가 아기를 못 낳아서
아기를 낳기 위해서 브닌나를 다시 취했는지 그럴지도 모릅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이렇게 들 수가 있겠지만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이름의 의미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한나의 의미는 어떤 걸 담고 있는가 하면요 ’은총을 입었다‘는 그러한 어떤 의미를 담고 있어요.
브닌나는 어떤 의미인가 하면요. 인간들이 되게 좋아하는 의미에요. ’기름진‘ 그런 뜻이에요.
’기름지다‘라는 것은 축복을 많이 받았다는 의미거든요.

한나는 은총을 입은 자고 브닌나는 기름진 자예요.
우리들에게 교인들에게 여러분들은 한나가 되기를 원합니까?
브닌나가 되기를 원합니까?라고 하면
인간들이 기도하는 게 뭐예요? 은총을 입어서 기름진 자가 되겠다 하는 거죠.
아니 욕심꾸러기들이죠.
실제로 구하는 것은 ’기름진 자, 브닌나처럼 되게 해달라‘ 그렇게 구하는데

여기에 보면 이 브닌나는 자식이 있어요.
’자식이 있다‘라고 할 때 성경을 들여다 보면
히브리어 성경을 들여다 보면 아들들과 딸들이 있었다 이렇게 기록돼 있거든요
브닌나에게는 최소한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라는 겁니다. 이름대로 기름지죠.
그리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자식이 없었어요.

이미 지금의 상황은 벌써
이 자식이 네명이 있는 그 브닌나와 자녀가 하나도 없는 한나의 어떤 그런 상황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지금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가? 사건을 들여다보기 전에
방금 우리들이 읽은 출애굽기 23장 25절 6절 말씀에 근거하여서
이 둘을 한 번 복을 받았는지 저주를 받았는지 한번 살펴보고자 하는 거예요.
여호와를 섬기면 잉태치 못한 자가 없다고 했죠.

그러면 한나는 자식이 없었고 브닌나는 자녀가 네 명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면 출애굽기 23장 25절 26절에 의하면 누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입니까?
브닌나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예요.
우리는 이미 말씀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브닌나는 나쁜 사람 이런 선입관으로 들어가지만
말씀에 근거하면요 율법에 근거하면 브닌나는 축복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럼 한나는 어떤 사람인가?
한나는 잉태치 못했으니까 여호와를 섬기지 않았다라는 겁니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여호와를 경외했다. 경외하지 않았다‘를 어떻게 판단하느냐라고 할 때는
그가 처한 상황과 받은 복을 들여다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은 그것밖에 모르죠. 율법이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그래서 자식이 많은 것이 ’이 하나님의 저주와, 저주를 이 덮어쓴 긍휼이 이렇게 덮였다‘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겁니다.
자식이 네 명 이상인데 율법에 의하면 복받은 자지, 누가 그 사람을 저주받았다라고 하겠습니까?
달리 말하면 기름진 자지, 누가 은혜를 받았다라고 하겠어요?
분명히 하나님을 섬기면 잉태치 못한 자가 없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이 브닌나가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것과
곁에 있는 한나를 판단을 할 때 율법에 의해서 판단을 하는 겁니다. 지금
사사 시대라고 해서 율법이 없는 게 아니에요.
브닌나는 이 율법에 근거하여서 자신은 축복받은 사람이고 한나는 저주받은 사람이예요.

그러면 이 남편 엘가나는 어떤 사람이냐?
엘가나도 우리가 볼 때는 중립지대로 볼 수 있죠. 남편이 엘가나잖아요.
그럼 엘가나는 저주받은 사람입니까? 축복받은 사람입니까?
말씀을 들어가게 되면 엘가나나 브닌나나 똑같은 인간들입니다.
한나도 사실 별반 다르지 않는데요. 이들이 이제 이런 모습을 보이죠. 여기에 보면. 3절에 보면

(삼상1:3)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매년 한 차례씩 실로의 성막이 있는 그곳에 가서 제사를 드렸다라는 겁니다.
원래 율법에 의하면 일 년 세 차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곳,
성막이 있는 그곳에 가서 얼굴을 보이고 제사를 드리고
그곳에서 먹고 율법을 배워서 돌아오게 돼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지금 이 엘가나가 식구들을 다 데리고 가죠.
식구들을 다 데리고 가는 것도 괜찮아요. 율법에 그게 나와 있기 때문에.

그러나 이 본문에 의하면 엘가나를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이렇게 볼 수가 없는 겁니다.
뒤에 보면 그게 나와요. 어떤 사람들은 매년 이렇게 했으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이지 않느냐.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엘가나의 신앙이 금색 들통나요.
자! 들어가 봅시다. 이 매년 그렇게 제사를 드렸는데 4절에 보면

(삼상1: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삼상1: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이렇게 표현하거든요.
신명기 14장에 보면 어떤 말씀이 나오는가 하면요. 14장 26절입니다. 여기에 보면

(삼상14:26) 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집이 멀면 돈을 받고 와서 돈을 갖고 갔어 그곳에서 돈으로 마음에 드는
                  하나님께 드릴 것을 사라 그렇게 말씀하는 내용인데 그다음 부분에 이런 게 나와요)
                  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이렇게 나옵니다.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 드려져야 될 게 기름과 피,
그리고 제사장에게 돌아가야 될 뭐 넓적다리 같은 것
그 외에는 이 제사 드리는 자들이 먹는 것들이 있어요.
그래서 ’각자 먹을 분깃대로 받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하라‘고
지금 명하고 계십니다.

죄 용서받음 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미 죽은 자로서 용서받은 그 은혜 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즐거워하라는 거거든요.
아! 내 죄 용서받았으니까 살았습니다. 그 즐거워하라는 의미는 아니에요.

자! 그런데 지금 여기에 보면 브닌나와 자녀들에게 그 분깃을 줬다고 했잖아요.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먹는 음식이에요. 사들고 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뒷줄이 약간 문제가 되거든요.

(삼상1: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우리 성경에는 갑절을 줬다고 하거든요.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게 안 맞아요. 율법과
갑절을 주면 다 먹을 수 없거든요. 하나님 앞에서 먹는 분깃을 받는 거거든요. 지금

그래서 이 히브리어 단어를 보면 ’얼굴‘이라는 단어가 쓰여져 있어요. 그걸 이제 갑질로 썼거든요.
그래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루터 같은 경우에는 ’슬픈 마음으로‘ 이 한나에게 음식을 분깃을 주었다. 이렇게 번역을 하고
그 ’얼굴 앞에서‘ 뭐 분깃을 주었다. 이렇게도 하고요.

우리 한글 성경에는 대부분이 ’두 몫으로‘ 이렇게 번역돼 있는데
공동 번역 같은 경우에는요 다르게 돼 있어요.
한 몫 밖에 줄 수 없었다. 이렇게 기록했어요. 번역을 했어요.
제가 보기에는 그게 가장 적절한 번역인 것 같은데.

이렇게 번역하든 저렇게 번역하든 누가 문제가 되는가 하면
엘가나가 문제가 돼요. 율법에는 갑절로 주라는 내용이 없거든요.
지가 사랑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각 분깃에 따라서 함께 먹고 즐거워할 분깃을 줘야 되는데
지가 사랑한다고 해서 두 배 주고 세배 주고 네 배 주고 그런 법이 없어요.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지금 두 갑절을 줘도요.
두 몫을 주어도 율법을 범하는 위법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좀 부정적으로 본다면
아! 정말 아내를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슬픈 마음으로
브닌나는 브닌나의 몫과 자녀들의 몫까지 다 가져갔잖아요.
한나는 자기 목밖에 못 받으니까 슬픈 마음으로 애타는 마음으로 분깃을 주었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역을 해놨습니다.
뭐 이렇게든 저렇게든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는데

문제는 이제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어떤 사태가 발생하는가 하면요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셨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삼상1:5하)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그래서 이 엘가나는 더욱더 그 한나에 대해서 원래 사랑하는 것도 있고
더욱더 그 애절한 마음도 있죠.
이 마음 자체가 이 두 몫을 주었다라는 자체도 문제가 되는 이유가 뭔가 하면
율법에 의하면 잉태치 못하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에 잉태치를 못한 거잖아요.
그러면 죄인으로 나아가야 되는데 오히려 한나를 두둔하는 모습을 보인단 말이에요.

여기에서 또 한 가지 또 생각해야 되는 게 잉태치 못했다라는 것이
’여호와께서 잉태치 못했다‘라고 했을 때 이 사무엘 저자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요.
브닌나도 마찬가지고 뒤에 보면 엘가나도 마찬가지고 한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가 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잉태치 못하게 하신 이유가 뭐냐라고 할 때는
󰊝브닌나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서 잉태치 못한 거고
󰊞그럼 엘가나는 모르겠다라는 거고
󰊟한나는 이게 세모를 이야기해야 돼요. 몇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 조금 더 봅시다. 6절

(삼상1: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이미 대적이라는 표현을 써버렸잖아요.
그러면 이미 이 한나 중심으로 말씀을 하겠다는 거고 사무엘 상을
대적이 이 한 나를 왜 그렇게 분노를 일으키게 했느냐? 이 얘기예요.
그 이유는 간단하죠.
’자기는 하나님을 섬겨서 하나님만 섬겼기 때문에 잉태하여서 복을 받았고
너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서 저주를 받았다‘는 이 말을 듣고 한나가 분노한 거예요.

그 분노의 이유가 뒤에 보면 나오거든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한나가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한나는 잉태치 못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요. 왜냐하면 이 시대가 사사 시대거든요.
소견에 옳은대로 행합니다.
’잉태했다‘라는 자체가, 자녀를 네명 이상 낳았다는 자체가 비정상이에요.

왜? 비정상인가 한번 봅시다.
여기에 보면 제사를 드렸잖아요.
브닌나의 분깃과 그 자녀들의 분깃, 한나의 분깃을 줬잖아요.
’그러면 함께 권속이 먹고 즐거워하라‘ 했잖아요.
즐거워 하기는 커녕 오히려 어떤 일이 발생되어집니까?
한나는 슬퍼서 밥을 안 먹어요. 음식을 안 먹습니다. 그 7절 하반 절에 보면

(삼상1:7)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지금 이 본문이 굉장히 중요해요. 올라갈 때마다 그랬다라는 거예요.
그럼 언제부터 그랬을까요? 지금 아들이 네 명 이상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첫째 아들 낳을 때부터 브닌나는 한나를 이런 식으로 분노를 일으키게 한 거예요.
한두 해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성경을 읽으면 단순히 이 순간만 그랬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한두 해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렇다면 이 엘가나가 지금 이 사태에 대해서 율법적이지 않다는 것을
’율법에 지금 순종하지 않다‘라는 것을 매년 지금 확인하는,
아까 신명기 14장에 봤잖아요. 권속에 함께 먹고 즐거워라 했잖아요.
제사들이면 함께 먹고 즐거워야 되는데
함께 먹고 즐거워 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은 울며 먹지 않아요. 그 사태가 계속 발생한 겁니다.
엘가나 하는 말이 보세요.

(삼상1:8)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한나의 마음을 몰라요.
달리 말하면 주님의 마음을 엘가나는 전혀 모릅니다.
왜 슬퍼하는지 왜 분노하는지, 지금 한나의 분노는 주님의 분노거든요.

율법에 의하면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잉태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낳는다라는 거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브닌나는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그를 덮쳤다라는 건데
이 긍휼을 브닌나는 어떻게 해석하느냐라고 할 때는
자기가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자식을 낳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은총을 입은 자가 은총을 안 입었다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지켜서
그러면서 지금 한나는 잉태치 못했죠.
’잉태치 못했다‘는 것은 ’말씀대로 되어졌다‘라는 거예요.
’말씀대로 되어졌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한나는 ’마땅합니다. 옳습니다‘라는 자리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브닌나는 이 한나를 어떻게 취급합니까?
’너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서 저주받았다‘라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한나가 분노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나가 기도해서 자식을 주시면 나실인으로 드리겠다고 하잖아요.
그 기도의 끝을 들여다보면
’여호와께서 심판하셔서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불을 높이시리라.‘
심판을 고대하는 겁니다.

결국 누가 핍박을 받아요?
한나는 말씀대로 언약대로 잉태를 못했잖아요. 그러면 한나는 말씀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브닌나는 자기가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가 이 말씀 안에 거하고 있는 한나를 분노를 일으키게 하면서 슬퍼 울게 만든 거예요.

결국 이 한나의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왕 되심을 버리는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말씀을 지킨 자들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예수님을 살해해버리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말씀대로 살아야 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서 예수님처럼 닮아야 한다.
말이야 다 맞죠.
예수님처럼 닮으려면 이 세상을 향해서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외쳐야 되죠. ’어둠‘이라고 외쳐야 되죠.
’이 세상은 불로서 심판받는다‘라고 외쳐야 되는데
그들이 말하는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부처가 되자는 얘기에요.

그들에 의해서 누가 미움을 받느냐라고 할 때는
’이 십자가의 복음이 미움을 받는다‘라는 사실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라는 것이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을 위해서 있음을 저희들에게 알려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여전히 말씀을 지켜서 주님께 영광 돌리자고 하는 그들에 의해서
십자가는 외면받고 조롱당하는 그러한 시대를 살고 있는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사
주님의 고난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corded by 구 성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