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5-17 22:29
레위기 50강 레 12:6-8 죽음 속의 구원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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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XAEiEcqz1c

관리자 22-05-2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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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50강 죽음 속의 구원

하나님 말씀, 레위기 12장 6절에서 8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레12:6~8)
6 자녀간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거든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년 된 어린 양을 취하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취하여 회막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7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자녀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8 그 여인의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인간들은 이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 파악하고 생각합니다.
어제 말씀드린 내용을 잠시 한 번 더 말씀드리면 남자를 낳았을 때 아들을 낳았을 때와
그 여자를 낳았을 때 부정한 기간이 다르죠.

이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직접 이 세상을 친히 주관하신다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돈이나 아니면 자녀나 아니면 IQ나
이 모든 것들을 동일하게 주셔야 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 없는 자들은 이런 말을 많이 하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런 독재가 있을 수가 있는냐? 이런 불공평이 있을 수 있느냐?
남녀를 차별하고 뭐 좀 다르다고 해서
차별하는 이러한 제도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거든요.
그들의 주장들은 다 성경에서 끄집어냅니다.
성경이 마치 인간을 위한 성경으로 그렇게 해석을 하는 거예요.
앞으로는 아마 이러한 설교도 못할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아마 이러한 설교를 했으면 감옥에 갈지도 모르죠.

오늘 본문에서 이 자녀 이야기를 또 하죠.
우리가 지금 세 번째 이 12장을 보고 있는데
이 세상에서 아들을 낳고 딸을 낳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 목적은 자기 기쁨을 위함이에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자녀 생산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약속된 여자의 후손, 남성 단수입니다.
그 여자의 후손, 약속의 자녀,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의 자녀
그 자녀가 태어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망하고 있고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목적도
그들 가운데 여성들로 하여금 자녀를 생산케 하는 그 목적도 여자의 후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 입장에서는 여자의 후손이 오면 자신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고
쫓겨났던 에덴 동산의 삶을 회복할 것이라는 그러한 기대를 품게 되겠죠.
아브라함의 약속은 그냥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었고
창세기 3장 15절에 약속하신 그 말씀에 구체화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강대한 나라, 강대한 제국이죠. 띨것이다
그 제국의 모양은 에덴 동산의 모습을 띨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사야 11장에도 그러한 내용이 나오거든요.
에덴 동산 같은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독사굴에 손을 넣고 놀아도 독사가 물지 않고
사자가 염소와 함께 풀을 뜯어 먹고 살아가는 그 세계.
지금이야 유전자 변이 해버리면 그런 세계를 인간들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에덴 동산을 꿈꾸면서
약속의 자녀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기를 고대한 겁니다.
이와 달리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어떤 소망과 달리
같은 소망 위에 다른 의미로서의 약속이 이루어지는데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약속의 자녀,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기 위해서 너희들은 부지런히 자녀를 생산해야 된다는 겁니다.

아마 이런 말을 하더라도 상당히 불쾌하죠.
우리 인간이 약속의 자손을 위해서 여자의 후손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자녀를 낳고 아들을 낳고 딸을 낳는 것이 여자의 후손을 위한 것입니까?
따질 인간들이 대부분이죠.
인간은 근본적으로 범사에 감사할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아들을 낳았을 때 40일 부정, 딸을 낳았을 때 80일 부정을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차면 속죄 제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여자의 후손에 대한 것을 잊지 않도록
그리고 이 자녀 생산은 여자의 후손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러한 장치를 주신 겁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러한 말씀을 대하게 되면
‘아 딸을 낳았을 때 아들을 낳았을 때
부정한 기간이 지나서 속죄 제물을 드리면 깨끗해지고 죄가 용서되는구나.
그럼 죄 용서받았으면 내 나의 아들과 딸들과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면 되는구나’
이런 생각을 갖게 되죠.

또한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아 이 약속의 자녀는 내가 지금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이 산모,
자녀를 낳은 이 여인은 살아있잖아요.
‘살아있는 자가 속죄 제물을 드리는 거니까 무사히 딸을 낳고 아들을 낳아
살아있는 채로 속죄 제물을 들여서 용서받으면 되는구나’
그러한 식으로 이 본문을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출산의 이 모델이라고 할까요.
그 모델은 어디에서 왔느냐? 창세기 35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창세기 35장 16절을 보면

(창35:16)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창35: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창35: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아들을 낳고 죽어가면서 그 이름을 베노니라고 불렀죠.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흔히 ‘엄마를 죽이고 태어난 아들이다.’ 뭐 그런 의미도 담겨있겠죠.
아니면 이 라헬 입장에서는 그렇게 기다리던 둘째 아들이 태어났고
그가 장성하여 하나님의 그 장자권을 이렇게 부여받는
그런 것을 목격하지 못하고 죽는 것에 대한 억울함일까요?
그래서 베노니라고 이름을 지은 겁니다. 슬픔의 아들이라고

여기에 야곱이 그 이름을 베냐민으로 바꾸어 부릅니다.
참 특이해요. 베냐민의 뜻은 ‘오른손의 아들’,
오른손의 아들이라 하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의 자리에 앉으시죠.
라헬, 죽으면서 베냐민을 낳고 죽었죠.
죽으면서 태어난 그 아들을 이 베냐민이라 이렇게 이름을 바꾸어 줌으로 말미암아
여자의 후손, 약속의 자녀가 어떻게 어떤 상황에서 태어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순서가 뒤죽박죽 되기 때문에 우리들이 말씀을 볼 때는 되게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레위기 12장에 나오는 이 자녀 출생, 아들의 출생, 그 자녀들의 출생은
궁극적으로는 약속의 자손을 낳기 위함이고
약속의 자녀가 태어나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야 되느냐?라고 하면 산모가 다 죽어야 돼요.

산모가 죽지 않고 태어나는 약속의 자손은 없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처녀로 예수님을 잉태한 겁니다. 워낙 많이 들어서 별거 아니고.
요즘이야 처녀가 잉태하는 것은 기본이고 그런 처녀가 아니죠.
그러나 어쨌든 외부의 시선에서는 ‘처녀가 잉태했다’라는 자체가 수치죠.
그 당시에 세계에서는 죽음과 같은 그런 수치를 당하는 겁니다.
약속의 자녀가 태어나는, 약속의 자녀가 낳아지는 그 배경은 그 여인이 죽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을 거꾸로 돌리게 되면 속죄 제물을 드리죠.
어떻게 죄가 용서되는가?
예수님께서 속죄 제물이 되십니다.
자신이 낳은 아들 아들로 인하여서 죄가 용서받는 거예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지만 순서가 뒤바뀌어버립니다.
자신이 낳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서 마리아는 죄 용서함을 받는 겁니다.
그 죄 용서함을 받은 마리아이기에 다시 시간의 순서를 바꿔 보게 되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합류 당한 자로
처녀가 잉태하게 된 것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서 속죄 제사 드리면 죄가 용서되어서 구원을 얻고
장차 약속의 자녀가 태어나서 우리를 이전 에덴동산과 차원이 다른 그런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그러한 기대감을 품고 있는 모든 자들의 악마성을 이 말씀을 통하여서 들추어내시면서
진정한 구원은 어떻게 오며, 이 세상은 그 구원하는 분, 달리 말하면 심판하는 주님이죠.
그분을 위해서 세상이 만들어지고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해서 자녀를 낳고 원치 않아서 안 낳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 모든 일들이 누구를 위해서 되어지느냐?라고 할 때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그러한 일들이 되어지고 있다라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모든 것을 끝내셨기 때문에
끝난 일들이 오늘날 우리들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라는 겁니다.
이 말씀이 성도에게 하시는 말씀이죠.

그럼 성도는 이 땅에서 어떠한 인생을 살게 되는가? 앞서서 말씀드릴 때 순서가 왔다 갔다 했죠.
라헬이 죽었죠. 그 죽음은 주님의 죽음을 앞당겨 보여주는 죽음이고
그 죽음이 하나님 우편의 자리로 올라가게 되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죽음 속에 합류당한 자만이
하늘 우편에 오르신 그분에 의해서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이 순서는 바뀌어도 돼요.
이미 하늘에 오르신 그 주님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기에 성령을 받았기에 예수님의 죽으심에 참여하는 겁니다.

우리를 이 땅에 살아가게 하시는 이유는 행복하게 살기 위함이 아니에요.
우리의 구원을 위함도 아닙니다.
자녀를 낳아서 ‘오늘 우리 딸이 처음 걸었다. 오늘이 우리 딸 생일이다.’ 실제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축하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일들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주님의 피공로를 자랑하라고
날마다 죄인 만드는 자리로 우리를 이끄시는 겁니다.

이 세상을 나를 위한 나의 가족을 위한 나의 민족을 위한 나의 국가를 위한 세상으로 보는 자들은
예수님을 살해한 바리새인과 서기관, 사두개인들 헤롯왕,
본디오 빌라도와 전혀 다르지 않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십자가를 나를 위한 구원용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의 피를 자기 구원 용도로 바꿔치기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은, 십자가 지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들의 노림수에 놀아나지 않습니다.

그 속에 우리들을 자기 백성을 투입시키셔서 주님이 당하신 그 고난 속으로 합류시키시고
그 속에서 십자가의 피 능력을 오늘도 친히 이 땅 가운데 펼치시고 계시는 겁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가정과 나의 민족과 나의 국가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을 위한 것임을 말씀을 통하여 들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인생을 레위기 12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위한 일생으로 날마다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