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7-27 22:06
레위기 80강 레 19:19-22 속건제물을 증거하는 이스라엘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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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5ryzG7-lYGU

관리자 22-07-28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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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80강 속건제물을 증거하는 이스라엘

하나님 말씀, 레위기 19장 19절에서 22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레19:19~22)
19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20 무릇 아직 속량도 되지 못하고 해방도 되지 못하고 정혼한 씨종과 사람이 행음하면
    두 사람이 형벌은 받으려니와
    그들이 죽임을 당치 아니할 것은 그 여인은 아직 해방되지 못하였음이라
21 그 남자는 그 속건제물 곧 속건제 수양을 회막문 여호와께로 끌어올 것이요
22 제사장은 그의 범한 죄를 위하여 그 속건제의 수양으로 여호와 앞에 속죄할 것이요
    그리하면 그의 범한 죄의 사함을 받으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라’ 이렇게 명하십니다.
이렇게 명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그 가나안 땅의 환경이 이전 가나안의 풍습이 습관이 지배하고 있는 환경이라는 겁니다.

진공 상태에 있는 그러한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이라는 곳이 가나안인의 풍습,
여호와의 규례와 전혀 다른 규례가 지배하는 땅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약속의 땅은 언약에 따라 땅이 소산을, 소출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배반하면 그 땅은 소산을 내지 않게 되어 있죠.
우리들이 아는 농사법과는 전혀 다르죠.

가령 소를 키운다고 할 때 흔히 소 중에 씨종이 따로 있거든요.
그 소의 그 씨를 취하여서 새끼를 가지게 하면 우량종을 낳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오늘날도 마찬가지죠.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고요.

씨를 고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수한 품종을 골라서 씨로 삼죠.
그게 당연하잖아요. 그게 과학적이고요.
그런데 언약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면 그 땅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레19:19)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왜 이 육축(가축입니다. 집에서 기르는 동물)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라고 하시는가?
이미 이러한 풍습은 가나안 땅이나 애굽 땅에서 흔한 일이죠.
그러면 왜 다른 종류의 이 육축을 교합시키려고 하고 교합시키는가?
그 목적이 무엇인가?
거기에 대한 내용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은 조금 더 나은 품종,
요즘 조금 나은 품종이 나왔죠. 켄타우로스(반인반마)라고 합니까?
몸은 말의 몸이고 머리는 사람이고 인간들이 그런 품종을 좋아하거든요.
그러한 것들을 상상하면서 좀 더 우량한 육축을 가축을 생산하고자 한 거예요.
그것이 성공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는 그러한 풍습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거예요.
흔히 이 본문을 주석하는 사람들이나 설교하는 사람들이
‘창조 원리,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육축을 창조하실 때 순수한 혈통으로
소는 소대로 말은 말대로 그렇게 창조하셔서 그들끼리 교합하게 하셨다.
그러니 그러한 순수성을 유지해야 된다.’
그런 차원에서 해석을 하고 설교를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대주류예요.

그런데 물론 그것도 기본적으로 깔고 있기는 있어요.
이미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인간들의 관심은 조금 더 풍성한 소출과
가축을 키우더라도 우량한 가축이 태어나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것과 함께 무엇이 대조되느냐?라고 할 때는
율법에 대한 순종, 언약을 따라 살아가느냐? 살아가지 않느냐? 이것과 대조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레19:19)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밭이나 논이라는 것은 항상 제한적입니다.
제한된 땅에서 많은 것을 소출하는 방식이
두 종자, 서로의 영양분이 다른 것들을 요구하는 그러한 종자를 심는 방식이
제한된 농토에 많은 수확을 얻는 방식이죠.
그것이 이 가나안 땅이 갖고 있는 이 법칙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어떤 방식은 누구나가 동의할 수 있는 방식이에요.
그런데 말씀대로 살면 어떻게 씨를 뿌려도 풍성한 소출이 나온다.
이렇게 말을 한다면 누가 그것을 믿겠습니까?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마4:4)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말이야 좋죠. 누가 믿어요?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킬 수 없는, 절대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고 계신다라는 사실입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자연법칙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 자연법칙을 깨는 게 언약의 땅이거든요. 약속의 땅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그 자연법칙이라는 것이 인간이 조작을 하고
마음대로 어쨌든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 자신들의 방식을 집어넣어서
그 결과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끌어내고자 하는 그것과
약속의 땅의 원리는 전혀 다르다라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레19:19)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심심해서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는 것이 아니죠.
원단을 계속해서 새롭게 개발하고 더 나은 것을 이렇게 만들어 내는 목적은 누구를 위함이예요?
사람을 위함이고 더 쾌적하고 더 따뜻하고 아니면 더 시원하게 만들기 위함이에요.
그런데 약속의 땅은 옷을 어떻게 입어도 따뜻하고, 어떻게 입어도 시원합니다.

광야 생활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죽신을 신어서 발이 트지 않았습니까? 상하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우리들의 예상으로는 발에 단단히 아주 유명한 메이크 운동화를 신든지
아니면 메이크 구두를 신든지 아니면 그 광야에 가장 적합한 그러한 신발을 신겨서
발을 보호하셨다면 이해가 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상하는 바와 전혀 다르게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거죠.
그러한 어떤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볼 때는 ‘아 주님 알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올지 모르지만
가나안 땅의 형편을 안다면 당장 손들고 그러면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반발심이 튀어나오죠.
그러면서 20절에서

(레19:20) 무릇 아직 속량도 되지 못하고 해방도 되지 못하고 정혼한 씨종과 사람이 행음하면
              두 사람이 형벌은 받으려니와
              그들이 죽임을 당치 아니할 것은 그 여인은 아직 해방되지 못하였음이라
(레19:21) 그 남자는 그 속건제물 곧 속건제 수양을 회막문 여호와께로 끌어올 것이요
(레19:22) 제사장은 그의 범한 죄를 위하여 그 속건제의 수양으로 여호와 앞에 속죄할 것이요
              그리하면 그의 범한 죄의 사함을 받으리라

앞부분에 나온 말씀과 19절 말씀과, 20절에서 22절에 나오는 말씀이 좀 다르게 느껴지는데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이야기를 하고 계신 거예요.
이 말씀을 사람들이 의심 없이 그냥 읽으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하셨구나’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아시다시피 율법은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죠.
그러면 여기에서 ‘해방도 되지 못하고 정혼한 씨종’,
당시에 여종들은 거의 다 전쟁 포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후에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도 여종이 되는 경우가 있겠죠.
그것을 구분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 여종이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들과 섞이는 것과 관련된 내용이기 때문에
앞서 모두가 다 섞는 내용이 담겨 있잖아요.
‘순수성을 유지해야 된다라는 차원에서 같은 의미다.’ 이렇게 해석을 하고
설교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거기에서는 십자가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봅시다.
지금 이 종이 해방도 되지 못했고 정혼한 씨종, 두 종류죠.
해방되지 못한 종도 있고 아니면 정혼한 씨종인데
이 정혼한 시종이 이 결혼할 남자가
거기에 합당한 대가를 이 종의 주인에게 지불하지 않았을 때의 상황입니다.

‘그때 그 주인이 그 씨종과 행음하면 두 사람이 형벌을 받으려니와
그들이 죽임은 당치 아니할 것이오.’
우리 같으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행음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시면 될 일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치 행음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 같죠.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형벌을 받으려니와 죽임은 당치 아니할 것은‘ 분명한 죄죠.
그러면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시면 되는데
그럴 경우에 형벌은 당하겠지만 죽음은 당치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인 정도 되니까 돈이 있을 거 아니에요.
‘속건 제물을 드리면 된다’ 누구에게? 여호와 하나님께

그러면 얼마든지 주인이 여종과 행음하기 위해서
속건 제물을 드리겠다는 것들을 먼저 전제로 깔고 행음하면 되잖아요.
말씀 자체가 만만한 게 아닙니다.

율법은 모든 인간을 죄 아래에 가두기 위함이에요.
그러면 이 율법 안에서 인간들이 끄집어 내올 수 있는 모든 그 경우의 수가 다 튀어나와야 돼요.
그게 율법의 위력이에요. 말씀의 위력입니다.
죄라는 죄는 다 끄집어내요.
그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하는 죄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에 넣으셔서 이러한 삶을 살게 하시는 목적은
‘속건 제물을 드려서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
그러니 너는 살아도 살 가치가 있어 정당성이 부여돼’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이 아니에요.

19절과, 20절에서 22절의 말씀이 상당히 차이 나는 내용이 들어가 있지만
이스라엘을 만드신 목적은 속건 제물을 증거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요 앞서 19절에 말씀한 내용을 절대 지킬 수가 없어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라고 우리 들었죠.
들었는데 뭘로 살아요? 밥 먹고 살잖아요.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의 증인이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 1절에 보면

(요8: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요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오셨어요.
그때 어떤 여인이 잡혀옵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바리새인들이 끌고 오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끌고 와서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
예수께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시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죠. 그리고 난 뒤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을 하시니 나이 든 사람부터 젊은 사람까지 다 떠나가 버립니다.
마지막에는 여자와 예수님만 남았죠. 10절에 보면

(요8:10)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성전을 위한 여인이라는 겁니다.
어떤 여인입니까? 간음한 현장에서 잡힌 여인.

예수님이 참된 성전이시죠.
자신의 피를 흘려서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주님이에요.
예수님 자신이 심판을 받으셔서 심판받을 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성전이라는 겁니다.
그 성전을 위해 이 여인이 간음한 현장에서 잡힌 거예요.
우리의 삶이 성전 되신 주님을 증거하기 위한 삶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전 되신 주님을 증거하는 삶이기에
우리의 모든 형편을 십자가의 피만을 자랑할 수 밖에 없는 상황과 여건 속으로 인도하셔서
십자가의 피로 죄인을 구원하신 그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자리로 인도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성전이신 주님을 증거하기에 저희들이 어떤 자리로 어떤 형편으로 나아간다 할지라도
감사하며 십자가만 자랑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