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8-22 12:45
사도행전 강해 36 행 9:26-31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33  
https://youtu.be/mdQFHtZm4o4

관리자 21-08-23 00:32
답변 삭제  
사도행전 36 나의 판단으로 핍박받는 복음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를 부르시고 말씀 앞으로 인도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일하심이, 주님의 창조하심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하신지요.
날마다 만나를, 일용할 양식을 주시면서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니라
주님의 심판주되심을 위한 인생임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성령의 책망속에서 저희들의 죄를 들추어내시고, 심판속에 함몰케 하셔서
죄용서와 날마다 다시 출애굽시키시는 그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눈을 뜨나 눈을 감으나 항상 탐욕을 일어나게 하셔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님의 놀라운 피능력을 보게 하시고
우리의 인생을 죄인 만드셔서 십자가만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게 하심을 또한 감사드립니다.

오늘 주의 말씀을 사모하며 함께한 성도들은
’저 천당 갈 수 있어요‘라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심판받아야 될 하나님은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한테 심판받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으로부터 가짜 하나님이라는 것이 들통나겠습니까?
도대체 진짜 하나님이, 진짜 구원자, 진짜 심판주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말씀 앞에 섰습니다.

주께서 주의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과
그 말씀을 듣는 저희 성도들을 긍휼히 여기사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 전해지는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죽으신 이유를 보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구원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님을 위한 복음이며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니라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님의 심판주되심을 위한 인생임을
말씀에 의해서 해석되어지는 인생임을
말씀대로 살려지는 인생임을 주께서 늘 깨닫게 하시고
성령의 책망 속에서 십자가의 피만 밝히 보이는 저희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15장 25절에서 29절 말씀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15:25~29)
25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
26 악한 꾀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라도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
27 이를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사느니라
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악인의 입에서는 악만 쏟아져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들을 그리스도 안에 넣어주시고
우리의 인생을 주의 피로 의롭게 하셨기에
우리의 입에서는 십자가의 피만을 자랑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밀씀, 사도행전 9장 26절에서 31절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행9:26~31)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은 이미 자신이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위치를 판단자의 위치, 재판관의 위치에 두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철학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언어에 대해서 이 말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어요.
이 말이 폭력성을 갖는다라는 거예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죠.
나로부터 나가는 말은 이미 내가 스스로 판단한 이 고정된 틀로서 말이 나가는 겁니다.
그 말이 나가는 순간 그 어떤 인간도 그 말 속으로 들어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말이 폭력적이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런 이론에 대해서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죠.
방금 들어보니까 그럴 듯한 내용이잖아요.
그래서 이 말에 대해서 좀 이해해 주고 들어준다면
그 사람을 내 편으로 내 말을 이해하는 사람으로 그렇게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언어를 굉장히 폭력적이다.
그래서 ‘입 다물어라’ 이런 얘기를 하면서 침묵 수행을 하는 겁니다.

제가 한 30년 전이니까 30년이 넘었죠. 대학생 시절 때
우리 거기 써클에서 엠티 같은 것들을 갔는데
거기 경주 쪽에 가면 감포 쪽에 아주 오래된 절이 하나 있어요. 신라 시대 때 만든 절이라는데.
‘기림사’ 인가 아무튼 그런 절이였는데 그 당시에는 뭐 절간이든 어디든 아무 데나 가서 놀았어요.
텐트 아무 데나 치고 지금처럼 엄하지가 않았는데.
저희들이 이제 가서 텐트를 치고 같이 찬양 부르며 놀고 있으니까
이제 중 한 사람이 내려왔어요. 그 사람이 내려와서 말을 안 해요. 말을
처음에는 벙어린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말을 하지 않고 지팡이로 땅에 글을 쓰는 거예요.
나는 지금 침묵 수행 중이다. 묵언 수행 중이다.

말을 안 한다고 해서 그 마음이 말을 하지 않고 있나요?
그런 인간들, 그런 자기들의 도리라 하죠.
그런 도를 주장하는 인간들의 특징이 무엇이냐라고 할 때는?
본인 자기 자신이 악마라는 것을 몰라요.
말의 문제가 아니에요. 말을 내뱉는 그 인간 육이 문제죠.

언어가 폭력이라는데 누가 폭력을 행합니까? 말하는 사람이 폭력을 행하는 거예요?
듣는 사람이 폭력을 행하는 겁니다? 둘 다 폭력적이거든요.
말하는 사람도 폭력이고요. 듣는 사람도 폭력을 행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둘 다 재판관이거든요.
재판관은 두드리기만 해요. ‘내가 이렇게 판결하노라’
그래 너 그렇게 판결했니? 나도 이렇게 판결하노라‘
그러면 어떻게 공감을 갖게 되느냐할 때는? 서로가 이익이 되고
서로가 손해가 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 판결에 그냥 잠정적인 휴전을 취하는 거죠.
그러다가 이 판결에 대해서 기분 나쁘다라고 하면 자신의 판결을 내려서 잘라버립니다.
아무리 기분 나빠도 돈이 되면 굽신거리죠.

요즘은 젊은 MZ세대라 뭐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튼 뭐 인간들은 나누는 게 취미니까. 나누어야 싸움이 붙거든요.
그래야 언론들이 할 말이 있고 재밌거든요. 돈벌이가 되니까
요즘 그 세대들은 이 세대들은 힘든 일은 하기 싫고요, 편안하게 살고 싶대요.
여러분이 자녀들을 어떻게 키웠는가 돌아보면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청소 다 해주고 빨래 다 해주고 밥 다 해주고,
그러니 회사 같은 데 가서 위에 사람이 시키는 그 뼈빠지는 일을 하겠어요?
누가 그걸 하고 싶어 하겠습니까?
나중에 개고생을 해봐야, 아! 어쩔 수 없이 하는구나.
뭐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게 처음에는 좋죠. 힘이 있을 때는.
나중에는 국가의 도움을 받아야 돼요. 생활보호대상자가 되어 가지고,
안 그러면 부모들이 뭐 집 한 채 물려주든지 부모만 쳐다보고 있죠. 빨리 돌아가시기를
빨리 빨리 돌아가시라고. 그래야 내가 그 집을 내가 차지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이 판단자의 위치에 있고 심판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어떠한 것을 말하게 되더라도 어떠한 것을 듣더라도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복음을 전하고 있잖아요. 이미 언어 폭력이 나가는 거예요.
그럼 여러분은 이 폭력에 무엇으로 대응하느냐 할 때는 폭력으로 대응해요.
우리 젊은 친구들은 ’설교 언제 끝나나?‘ 이런 폭력으로 대하고
좀 이렇게 말씀을 공부한 사람들은 ’내가 아는 걸 이야기하나‘
각자가 다 자기의 답을 갖고 있고 자기가 최종 권위자이기 때문에
이 말씀 앞에서는 모두가 다 자기 스스로가 우리 각자가 심판주로 행세한다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어떤 사건이 나오죠.
사울이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광주리를 타고 도망을 쳤습니다.
도망친 이후에 예루살렘으로 가게 돼요.
갈라디아서 1장을 보면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갈라디아서와 이 사도행전만 다른 게 아니고요. 사도행전 자체에서도 다른 내용이 많아요.
그걸 억지로 끼워 맞출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젊은 MZ세대들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세대들도 가장 먼저 따지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 맞느냐?
그게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인가 하면요.
여러분이 배우는 역사 자체가 역사적 사실이 맞느냐라고 스스로 질문해 보면 다 가공된 이야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여러분이 지금 이 예배드리는 장면을 찍어서 내일 다시 보세요.
보면 ’이게 역사적 사실이야, 설교를 저렇게 했어‘라고 이야기해도
여러분이 위치한 자리에서 해석한 해석법이 다 달라요.
상당히 의도가 깔려 있죠.
역사적이냐 사실이냐 이러한 것들을 왜 자꾸 묻느냐?라고 할 때는
이 속에 악마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악마는 무엇을 믿지 않는가 하면요. 이게 참 재밌는 게
악마 자신도 영이거든요. 악마 자신도 영인데 영의 세계를 막아버려요.
물론 뭐 귀신이나 무당이나 뭐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런 세계는 영의 세계가 아니고 육과 연결될 수 있는 가능한 세계죠.
얼마든지 인간 쪽에서 다가갈 수 있는 세계잖아요.
무당 신내린 것도 심리학에서 들어가면요. 일종의 정신병입니다. 그게 다 규명이 되거든요.
그 자기는 신내렸다 그러거든요.
신내린 인간들이 하는 일이 뭘까요? 돈밖에 안 봅니다. 돈 벌이에나 쓰죠.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신내림 받아서 돈 벌이 나선다는 게.
돈 안 되면 그거 집어 치워야 돼요. 죽어야 되잖아요, 돈이 안 되면
사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는데 왜 예루살렘으로 갔느냐?

갈라디아서 1장에 근거하면 사도들을 만나가지고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을 만나서
자신의 어떤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올라간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게 되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이렇게 나오죠.
여기에서 제자들 그리고 다메섹에서 제자들 이렇게 나왔죠.
제자들을 누구라고 지칭하느냐라고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믿는 자들을 제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사도들은 제자들 속에 들어가죠. 제자들이 더 큰 집단입니다.
그 집단 속에 부분 집합으로 사도들이 있는 거예요.
지금 이 사도행전은 이 본문에서 상당히 의도적으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대충 사건을 나열하는 게 아닙니다.

사도들이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제자들 중에 있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앞서서 살펴보았듯이 사도들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내용이 있잖아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라고 할 때
항상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출발해야 된다. 모든 복음은 우리가 관할하게 된다.
그리고 그 예루살렘의 중심에는 누가 있느냐?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던 사도들이 있다
그런 식으로 인식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인식을 지금 로마 카톨릭이 그대로 갖고 있거든요.

사도들은 아직까지 무엇을 잘 모르느냐라고 할 때는
주님께서 세우신 그 성전은 중심점이 없습니다. 십자가가 중심이기 때문에
제가 출애굽기 20장에서 말씀드렸죠. 19장에서 보면 출애굽기 19장을 봅시다. 여기에 보면
출발 자체를 어떻게 보느냐라고 할 때는
많은 사람들은 한 지점이라 한 장소라 이렇게 보고 있을지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한 장소를 말씀하시는 게 아니에요. 출애굽기 20장 24절에 보면

(출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이렇게 나오죠.
여기에 보면 ’네게 토단을 샀고 그 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옛날 성경 개혁 한글이나 개혁 개정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지금 만일에 뭐 새 번역이라든가 공동 번역이라든가 킴 제임스 번역을 갖고 있으면
이게 한 곳이 아니고 복수로 되어 있어요.
’기념하는 곳들 모든 곳에 강림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거예요.

이 말씀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이났죠.
자기들이 토단을 아무데나 쌓고 나중에 북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남유다도 마찬가지고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예루살렘 중심의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산당 중심으로 살아요.
각 산당에 좀 우리 조상들이 머물렀다, 뭔가 이름이 있다 하는 곳 뿐만 아니라
용하다 싶은 곳마다 다 기도원을 짓는 거예요. 절간을 만들고
왜냐하면 성경을 근거로 하여서 그들은 산당을 짓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산당을 지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니까
응답을 해준다는 사실이에요. 그러니 헷갈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예루살렘에서 솔로몬 성전이 지어진 이후에도
남유다 같은 경우에는 각 곳에 산당을 세워요.
왜 그렇게 세우느냐 할 때는?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마다 한 지점이 아니에요. 모든 곳이에요.
제자들은 이 말씀을 역사적으로 해석을 하니까
많은 곳이었는데, 예루살렘 성전 한 중심으로 이렇게 모아졌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그 남유다가 망한 이유가
예루살렘에 있는 그 성전 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각 산당에서 여호와를 섬기고 우상을 섬기고 그런 짓을 했기 때문에 멸망했다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한 사고 방식을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이들이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으면 그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야 되지 않습니까?
다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죠.
제가 설교할 때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요.
지금 우리의 심뽀 자체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어서 복음을 좀 들으면 다 안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성령 충만 받은 사도들도 몰랐어요.
그러면 그들이 성경 연구를 우리만큼 하지 않아서 모르는 겁니까?
우리는 그러면 이들보다 수준이 더 높아요?
시간이 지나왔기 때문에 복음의 명료성을 우리가 더 잘 아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께서는 뭐 하세요?

시간이라는 그 신학적인 그 과정 속에서 2000년의 신학의 그 과정 속에서
축척이 되어서 이제 비로소 이 성경의 진술을 우리가 깨달았다.
그럼 그동안 성령께서 뭐 하셨어요?
지식이야 늘었겠죠. 정보야 늘었겠죠.
복음에 대한 인간들의 오해라는 것이 그런 식이죠.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이 못 알아먹게 돼 있어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성령만이 아시죠.
자기가 보지 못하고 자기가 듣지 못하니까 성령의 일을 무시해 버리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아는 이 모든 일들이 성령의 일이니까?
모르는 너희들은 성령의 일이 아니지 않느냐.
뭐 아는 게 성경이 일 같으면 공부합시다. 우리 날마다 공부하고 배우고 지식 정보를 익히고

말씀이라는 것은 거꾸로 들어오거든요. 독특한 게 한 보세요.
성령 충만을 받았으니까
성령 충만이 너희들이 생각하는 성령 충만과 전혀 다르게 진행된다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아무것도 몰라예요.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주의 뜻을 알아갈수록 아무것도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그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건데
이건 세월이 지날수록 더 잘 알아요. 선악과를 먹은 그 티를 내는 거죠.
‘네가 선악을 아는 일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
이제는 이 복음에 대해서 정보를 많이 들은 자들이 하나님과 같이 된 거예요.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이 ‘사귀고자 한다’라는 이 ‘하나’라는 이 단어가 페이라조라는 헬라어 단어데 ‘노력했다’라는 거예요.
갈라디아서에 보면 이 제자들 중에는 사도들도 들어가 있거든요.
우리 같아도 사도들과 사귀고자 하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사울은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기 때문에
갈라디아서를 보니까 사도들과 사귀려고 안 했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지금 여기에서 ‘사귀고자 한다’라는 말의 의미는 이 사도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주님이 찾아오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물과 사귀고 싶은 거예요.
주님이 새롭게 만드신 피조물을 만나고 싶은 거예요. 지금
그래서 만나고 싶어한 거예요.
요즘 사람들은 교회들은 이런 마음이 별로 없어요. 귀찮잖아요.
주님이 새롭게 만든 피조물들은 하나죠? 하나, 개별이 아니라.
손가락이 자기 발가락 차지하는 하는 건 당연하죠.
보고 싶을 거 아니에요? 안 그런가요? 손가락이
보고 싶으면 필요한 게 있을 거 아니에요.
발가락이 가려우면 손가락을 긁어줘야 되고 손에 움직이고 싶으면 발이 움직여줘야 되고

지금 이 사도 바울은 아직까지 이름은 안 바뀌었지만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자신과 함께 고난 받는 자들을 만나보고 싶은 거죠.
‘뭔가 사귀어서 사도들이 나를 인정했다’ 정말 우리는 이런 마음이 강하잖아요?
여러분들은 뭐 저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없겠지만, 사람들은 그런 거예요.
예를 들어 제가 만일에 유명하다 그러면
야! 누구는 정 목사님이 인정했어. 그런 소리 많이 듣잖아요.
우리 신학 대학원 다닐 때 많이 들었어요.
어떤 유명한 목사가 인정했어. 인정하면 그다음 후계자가 되죠. 그 큰 교회에

사람들의 관심은 그것밖에 없어요. 인정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베드로가 십자가를 졌습니까? 베드로의 인정이 왜 필요해요. 사도 바울에게
여러분들이 저의 인정이 왜 필요하죠? 제가 십자가를 졌습니까?
사람들은 은근히 인정을 받고 싶어 해요.
그게 인정 욕구라 하잖아요. 인정 욕구에 미쳐 있는 거예요. 인간들이
그래서 목사들이 인정을 잘해주는 겁니다. 인정을
인간의 심리가 여러 가지를 다 담고 있어요.
인정 욕구만 있는 게 아니라 얻어터지는 욕구도 있거든요. 다 정신병자들입니다.

대체로는 설교 시간에는 요즘은 때리면 안 돼요.
요즘은 위로와 치유의 목회를 해주고, 만날 때는 훌륭한 상담가가 되어주는 거죠.
그러면 인정받는 느낌,
교회가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정 받으러 가거든요. 나를 인정해 달라는 거예요.
사업 망했으니까 인정해달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인정해 줍니까?
주의 선한 뜻이 있어서 주께서 당신을 그렇게 인도하셨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얼마나 신이 나요.
‘망해도 마땅합니다. 지옥 가도 마땅합니다‘ 이렇게 설교했다가는 교회 안 오죠.
’뭔가 선한 뜻이 있어서 망하게 하셨다‘ 희망을 줘야 되죠.

사울이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아서 도망쳤죠. 비겁하게 도망쳤습니다.
도망쳤음에도 불구하고 이 심리 자체가 완전 두 가지 요소를 지금 그대로 갖고 있거든요.
이게 사울을 보면 정신병자예요.
겁나가지고 도망쳐놓고 거기 가서 또 복음 전하고 있거든요.
인간들이 보기에는 이상한 사울이지만 주님께서 사울을 그렇게 다루는 겁니다.

우리가 사울을 볼 때는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이해를 못해요.
이것은 마치 어떤 장면과 같은가 하면 구약의 여러분이 악신 들린 사울 있죠.
악신 들린 사울이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했잖아요. 그죠? 그렇죠.
그러면 그 악신 들린 사울이 자기 마음대로 못했다는 것은 다윗도 어땠다는 거예요?
자기 마음대로 못했다는 이야기예요.
주님의 언약을 위해서 다윗은 시키는 대로 움직여졌다는 얘기입니다.

사울이 그렇게 악신에 의해서 움직여지듯이 다윗도 똑같이 그렇게 움직이는 겁니다.
이건 마찬가지예요. 사울도
그래서 심리학한 사람들은 사울 같은 경우에는 정신병자라고 얘기하고
다윗도 마찬가지고요. 왔다 갔다. 그냥 왔다 갔다.
뭔가 일관성이 없거든요. 이렇게 했다가 저렇게 했다가

지금 이제 사울도 마찬가지인데
형제 이 ’예루살렘에 있는 그 사람들과 제자들과 사귀고자 하나‘ 노력했어요. 되게 노력했어요.
우리 이런 장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갖잖아요. 노력할 필요 없이 핍박받아 왔으니까.
성령께서 아나니아에게 지시하듯이 친히 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지시해서
저 핍박받는 저 사람을 영접해라.
그러면 가자 말자 영접하여서 위로하고 치유해주고 안아주고 고생했지 괴로웠지
이렇게 하게 하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게 우리들이 갖고 있는 이 악마성이에요

주님은 지금 사울을 위로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십자가의 증인으로 사울을 불렀기 때문에
이런 어떤 만남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십자가 피만 증거 되도록 주님께서 상황을 만드시는 거예요.
우리는 정답을 갖고 말씀을 들어가잖아요.
들어가니까 이렇게 해야 되는데 왜 이럴까?
아마 목사들이 이 본문을 설교를 하면
우리들은 복음 때문에 핍박받고 오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두려워해서 밀어내지 맙시다.
사실 오늘날 다 밀어내잖아요. 어차피. 자기 편들면 다 안 들어내지만
밀어내야 돼요.

복음을 듣고 왔는데 기쁨으로 받아줘야죠? 그게 우리들의 생각이에요.
여러분이 갖고 있는 교회관이잖아요. 교회라는 것은 사랑이 풍성해가지고
누구나 오면 누구나 다 사랑으로 받아가지고 이해시키고 받아들이고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죠?
그러면 이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 이들이 잘했느냐 잘못했느냐를 따지면 엉터리죠.
또 인간들이 얼마나 웃기는가 하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 교회에 오는 사람들을 또 일부러 쳐내야지‘ 주님이 쳐내게 하시면 쳐내면 돼요.

왜 주님께서 이 아나니아에게 나타났듯이 예루살렘 교회 그곳에 사도들이 있잖아요.
사도들에게 지시하여서 다메섹 성에서 이 사울이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러 가다가
내가 그를 만나 나의 종으로 삼았다.
그러니 그곳에서 지금 굉장히 위기에 처해서 죽을 위기에 처해서 도망왔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이 사울을 잘 영접하여서 내가 준 사명을 잘 감당하고 할 수 있도록
서포트해라 도와줘라, 이렇게 지시를 하셔야 좋잖아요.

우리 그런 마음 없어요.
복음을 전할 때 ’왜 이 사람이 안 받아들이지? 왜 안 믿지?‘ 이 얘기가 그 얘기예요.
내가 복음을 제대로 전하면 다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해요.
주님이 우리의 종입니까? 우리가 주님이 종이죠.

사귀기를 되게 노력했어요. 주님의 피로 사신 형제들이니까.
너무나 보고 싶고 같은 주의 고난에 참여한 자들이니까 자기가 핍박했던 사람들이잖아요.
자기가 핍박했던 사람들이니까, 자기도 그 핍박 속에 들어왔으니까.
서로 만남 자체가 서로 위로하는 거고
그런데 그곳 사람들이 다 두려워해요. 이게 정말 재미있죠. 표현이 ’다 두려워했어요‘
그래서 앞부분에 ’제자들과 사귀고자 하나‘ 이럴 때
제자들이 누군가 하면 이 제자들 속에 사도들이 같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사도들조차도 다 두려워했어요.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들 자체가 성경 자체가 진짜 모순 덩어리거든요.

이 베드로가 이 사두개인들한테 제사장한테 복음을 전할 때 두려워했어요? 안 했어요? 안 했죠.
두려워하지 않았잖아요.
그러면 이 사울이 사귀고자하고 들어오려고 할 때 두려워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우리 같으면 믿음이 좋아가지고 ’믿습니다. 주님께 보내주셨으니까 주님이 알아서 하시겠죠‘하고
받아들여야 된다라고 우리는 또 생각하잖아요.

지금 사도행전 자체가요, 완전히 우리 인간적 표현으로 하면 엉망진창이에요.
어떤 질서를 못 뽑아아냅니다.
근데 인간들이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사도행전을 볼 때
뭔가 질서가 있다라고 생각하고 질서가 잡혔다고 생각해요.
어떤 모양을 어떠해야 될 것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조작해내는 거예요.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했다면 왜 이 두려움이 나옵니까? 두려움은 뻔하죠.
이 놈이 가짜로 투항해가지고 우리 속에 들어와서 예수 믿는 자를 다 파악해가지고
다 잡아가지고 핍박하고 죽이려고 하려고 하지 않느냐. 이 두려움 그것 밖에 없어요.

그런데 앞부분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설교를 할 때 하나도 안 두려워 했거든요.
안 두려워한 것과 여기에 두려움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냥 사는 거예요. 그냥 사는 거
주도권이 제자들에게 있는 사도들에게 는 것도 아니고 제자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주님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께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자리는 십자가를 증거하는 자리라는 겁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서 흉내 낼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들이 사도행전처럼 지금부터 사도행전이 지속되니까.
우리가 이 사명을 감당하며 나갑시다. 지가 나간 게 없다니까요? 여기에 보면

아마 다메섹에서 사울을 죽이고자 안 했다면
사울이 계속해서 다메섹에 머물러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스데반 집사로 인하여서 핍박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모두가 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간이 알아서 가는 게 없어요. 알아서 가려고 하면 주님이 막아버리죠.

’사울이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 아무도 안 믿었어요.
이게 선입견이죠? 선입견. 내가 갖고 있는 답.
어느 누가 사울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거라 생각했겠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생각을 못한 거예요.
지금 이 제자들은 벌써 어떤 위치에 가버렸습니까?
자기들은 종이요, 증인인데 이들은 심판주에 위치해 가버렸어요.
자기가 판결을 다 해버립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이 펼쳐지는 세상인데
자기들이 좀 배웠다고 좀 경험했다고 체험했다고 판결을 하는 거야. 판단을 내리는 겁니다.
증인은 증인일 뿐이에요. 주님께서 증인으로 내몰면 그냥 그렇게 살면 돼요. 증거하면서

그럼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하면? 저 사람한테 복음을 이전에 전했는데 안 듣더라.
근데 분명히 주님께서 증거할 상황을 밀어넣어 주셨는데 자기가 먼저 판단해 버려요. 귀찮거든요.
핍박받는 게 두려운 겁니다.

그걸 제일 쉽게 이렇게 변명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이 나오죠.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 제가 지난번에도 그런 말씀드렸는데
그런 식의 이야기가 된다면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가 계속해서 돼지에게 복음을 안 던져요.
주의 말씀은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성취하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내시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명령은 잘 받으려고 하죠. 그 주를 위해 죽으라는 명령은 안 받죠.

그의 제자들이 믿지 않은 이유가 자기의 경험이죠. 자기의 경험, 자기의 역사
’이전에 저 사람 복음 전해 보니까 아니더라
얼마 전에 내가 저 사람 만나 보니까 아니더라‘ 자기가 다 판단해요.
분명히 주님의 종으로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살면 되는데
자기가 심판주가 되어가지고 우리는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면 되는데
이걸 들여다 보면 다 내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내 마음에.

이미 자기들 나름대로 이 예수를 믿으려면 이러이러해야 된다라는 인식이 먼저 박혀 있는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비난하기 바빠요. 욕하기 바쁘고 복음을 전하라 하니까 비난해요.
비난하면 속이 시원하죠. 지가 잘 났다고 생각하니까
남을 욕하는 것보다 더 신나는 게 없거든요. 그 비난 누가 못해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성도가 이렇게 부여받은 사명이죠.
놀라운 것은 이 사울, 주님이 찾아오신 사울 조차도 못 알아봤다라는 게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제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충격적 아닙니까? 충격적. 제가 볼 때는 충격이에요.

우리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라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소자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한다‘고 했잖아요.
이 소자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복음 쪽에서는 사울은 굉장히 개무시할 만한 그러한 존재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소자가 찾아왔어요. 소자가 찾아오는데 소자를 영접합니까?
왜 영접을 안 해요? 내가 보니까 너는 소자라는 거예요.
소자를 영접하라니까 우리는 소자를 영접하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영접하고자 하는 소자는요. 소자가 아니에요. 이미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영접하는 겁니다.
소자가 찾아올 때는 우리 눈에는 다 소자예요. 무시당할 만한 사람이에요.

야고보서에 보면 재미있는 사건이 있잖아요.
부자들은 환영하고 높은 자리에 앉히고 가난한 자들은 무시하잖아요.
우리는 그걸 보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들 나름대로 소자 규정을 따로 만든 거예요.
우리가 볼 때는 일반적으로 들어가버리면 부자는 마음에 드니까 이렇게 영접했고
가난한 자는 좀 무시한다 이런 식의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상식이고요.

성경은 계시잖아요.
계시니까 그들의 영적 수준을 너무 낮잡아 보지 말고 좀 높여 보게 된다면
부자들이야말로 소자인 거예요.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 귀보다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려우니까
자기 나름대로 변명이 다 있는 겁니다

아마 이 사도들은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죠.
걔가 뭘 알아? 우리를 핍박했는데
연세 든 분들이 이 복음을 듣게 되면
이 젊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갖고 있는가 하면 저도 젊었거든요, 아직.
젊었는데 아! 늙은 연세 든 분이 뭘 알겠어? 물론 똑똑한 분들은 알긴 알겠죠.
근데 세월이 지나면요. 자꾸 퇴화하잖아요.
그러면 농사 짓는 사람은, 못 배운 사람들은 뭘 알겠어?
말로는 성령, 성령 운운해 놓고
실질적으로는 이 성령을 어디에 가둬버리는가 하면
이 자기들이 배운 이 신학 내용 속에 다 가둬버려요.

복음을 들으면 은혜만 남으면 되거든요 십자가만 남으면 돼요.
다른 거 남을 게 없어요. 그건 구원 못 해요.
주님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고 그 피가 생명으로 바꾸잖아요.
그러면 감사가 되는 건데 다 알아들었습니까? 다 이해했습니까? 기억 속에 저장했습니까?
요즘 항상 한참 유행하는 게 메타버스라는 건데, 메타버스가 외부에 있잖아요. 지금은
인터넷 안에 있고 유튜브 안에 있고 그죠? 외장 카드 있고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 메타버스가 우리 뇌 속으로 들어옵니다.
뇌 속으로 들어오면 다 기억할 수 있어요.

그게 복음입니까? 악마는 선악을 아는 지식을 계속 가지라고 요구를 하죠.
근데 예수님은 자기의 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거예요.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졌어요. 어디가? 예루살렘 교회가, 사도들과 제자들이.
예수 핍박하는 자들은 이건 복음과 관련없는 자, 이건 악이야.
그럼 우리는 선이야. 27절에 보면

(행9: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이 바나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앞부분에 보면 이 복음을 들은 이후에 4장 36절에 보면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이죠. 레위지파 소속인데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그 바나바라, 바나바라고 이름을 따로 지어주는 겁니다.
이것도 재미있는 표현이죠.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는데 사도들이 바나바로 이름을 바꿔주죠.
마치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꿔주듯이
’자기의 밭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그 모든 바깥 밭을 내어놓으니까‘ 이건 경험이죠? 경험.
믿을 만하다는 겁니다.

믿을 만한 바나바가 사울이 어떻게 주님을 만났고
어떻게 그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받았는가
그렇게 얘기를 하니까 이들이 받아들이는 겁니다. 표현을 하면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다‘ 이렇게 표현하죠.

그러면 이 바나바의 일이 어떤 일이에요?
성령의 일이에요? 사람의 일이에요? 성령의 일과 사람이 같이 있죠.
이렇게 말함으로 말미암아 이 제자들의 그 악마성을 그대로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성령께서 일하시는 대로 그들을 이 바나바의 말을 통해서 이 사울조차도
주님께서 찾아오신 주님의 피로 사신, 새로운 피조물임을 알려주는 겁니다.

소개했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게 아니에요.
소개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만 소개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성령의 교통 속으로 넣어주신 거예요.
육에 속한 자들은 아는 것은 이것 밖에 없죠. ’제가 보증합니다‘ 그런 경우가 많아요.

저도 지금 중국에 머물고 있으니까
이전에도 여러분들한테 제가 한국에 있는 복음 전하는 목사님들 잘 몰라요?
교재를 제가 깊이한 목사님들은 거의 별로 없으니까
어쨌든 복음을 전하는 분들이니까 소개를 해서
이렇게 교회를 소개해 주면 한 두 번 가다가 안 가요. 거의 다.
보증 받는다고 해서 소개한다고 해서 갈 인간들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자기가 판단자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 들어야 가요.
어떻게 하든 저떻게 하든 우리는 죄 밖에 안 나와요.

지금 여기에서는 이 사울과 함께 교제하는 그 이유가
근거가 바탕이 어디 있느냐라고 할 때는? 성령입니다. 성령.
우리 눈에는 성령이 안 보이죠? 성령이 인도하심이, 이렇게 인도하는 거예요.
성령이 인도하신 것 같으면 아주 순리대로
’내 길을 순적게 하옵소서‘ 우리 늘 기도 그렇게 하잖아요.
그 순적케 하는 방식이 완전히 꼬이는 방식이에요.
죄란 죄는 다 드러나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과정들이 싫잖아요? 왜 싫어요?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종은요 시키는 대로 시킨 거 다 하는 거예요. 누가복음에 보면
하루 종일 일하고 ’주인님 나를 위해 밥 차려 놨습니까?‘ 이런 소리 할 수 있어요?
근데 요즘 교인들을 보면 내 일했으니까, 밥 차려놨어요? 내놓으세요, 이 얘기해요.
주님이 종이죠? 종. 마땅히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지금 이러한 모습을 주님께서는 이들 속에서 드러내고 계시는 거예요.
자기들의 죄는 죄대로 드러나고
십자가는 십자가 대로 제대로 증거되어지는 그러한 어떤 사건 속으로 이들을 몰아넣는 겁니다.
28절에 보면

(행9: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행9: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이 표현도 정말 재밌어요. 뭐가 재미있는 가 하면요,
왜 사도들은 헬라파 사람들과 변론하고 이 변론이 논쟁이거든요. 치열한 논쟁.
복음을 전하니까 치열한 논쟁이 펼쳐지는 겁니다.
어떤 논쟁? 복음 저쪽에는 율법을 해석을 할 때 자기들의 방식이 있죠.
그 육적 방식으로 풀어내면
그 육적 방식을 이 사도 바울이 박살을 내죠. 영적으로 풀면서
갈라디아서나 이런 내용들이 다 그런 내용이잖아요. 로마서나

그런데 여기에서 독특한 것은 헬라파 유대인들이라는 거죠.
헬라파 유대인들이 하면 쉽게 말하면 디아스포라 사람들.
헬라 제국들로 흩어져 있다는 그런 사람들과 관련돼 있다고 보시면 돼요.
헬라인들 중에 유대교로 들어온 자들일 수도 있고요. 헬라파니까.
안 그러면 유대인인데 헬라 교육을 받은 사람들 그 문화 속에 들어 있으니까
헬라 교육의 특징이 뭡니까?
헬라인들은 무엇을 구해요? 지혜를 찾죠? 지혜. 사람의 지혜.
이 헬라판 유대인들도 그러했던 모양입니다.

그들이 유대교로 들어올 때 따진 거예요. 헬라적 사고가 다 그렇잖아요. 지금 우리들도 똑같잖아요.
우리들은 다 헬라파들입니다. 헬라파.
헬라판데 이제 간혹 뭐가 섞여 있는가 하면 유대파가 히브리파가 섞여 있죠.
무속 신앙이 그대로 담겨 있으면서도 교육을 받았으니까 헬라파가 그대로 있는 거예요.
이 두 종류가 같이 있어요.
아예 무속 신앙을 날려버렸잖아요. 우리 교육을 할 때 그죠?
그것은 하나의 민간 신앙이라, 하나의 그런 일이 있었다 이렇게 들어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몸 자체는 다 무속이잖아요. 무속
이 두 종류가 같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잘 되려면
지혜를 찾든지 안 그러면 무당을 찾던지, 이 두 요소를 제공해주면 교회가 잘 돼요.

제가 사는 이 동네도 마찬가지입니다.
돌아다니고 돌아다니면 여행 가면,
뭐 요 앞에만 나가도 이 우리 지금 이 문 앞에만 나가도 복, 복.
복을 거꾸로 쏟아지게 막 다 붙여놓잖아요.

마치 이 율법서 같아요.
율법에 보면 그 옷, 옷 끝에 술에 뭔가를 초록색인가 달라고 했거든요.
그것은 지 죄를 알라고 달았는데
여기는 차 뒤에 보면 빨간 끈을 다 달아놨어요. 죄를 알게 하는 빨간 끈입니다.
이게 저주 날아가라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원하죠. 딱 우리입니다. 우리
아! 말씀이 어떻습니까? ’명확하게 알려주세요. 명확하게 알면 제가 믿고 따르겠나이다‘
이게 뭐가 나쁘냐? 나쁜 게 아니고요.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한쪽은 기적을 보고 믿으려고 덤벼들고 다른 한쪽은 이 지혜를 통해서 덤벼들어요.
근데 복음이라는 것은 이것을 박살내버리죠.

왜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사도들은 왜 헬라파 유대인들과 이 치열한 논쟁을 하지 않았는가?
사두 개인들과는 뭔가 다툼이 있어요. 다툼이 있는데
헬라파들과는 약간 이런 부분에서 약간 이렇게 멀어졌다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야 자기들이 살았던 삶의 영역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어요.

어쨌든 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들과 함께 제자들과 함께 이렇게 지내면서
주 예수 이름을 담대히 말했어요.
아무튼 성경이 이게 참 재미있어요.
스데반도 톡 튀어나와서 말하다가 돌이 맞아 죽었거든요.
그러면 우리 같으면 베드로부터 앞장서 가지고 여러분 우리가 주를 위해 죽읍시다.
다 길거리 나가서 스데반이 외친 복음이잖아요.
그거 다 전하다가 다 돌 맞아 죽자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그렇지 않아요.

주님께서 도망치는 마음도 주시고 튀어나오는 마음도 주시고
그렇지 아니하면 의가 누구로 누구에게로 돌아가는가 하면요.
그 복음을 전한 그들에게 돌아가게 돼 있어요.

그래서 오늘날 교인들이 그 목사들이 선교사들이
’내가 주를 위해 헌신했다‘하는 그 인간들을 간증들을 다 들어보면 영광을 자기가 다 봤잖아요.
많이 들어보셨잖아요. 간증들을.
내가 내가 내가 주어 자리에 다, 나에요. 나.

어떤 분이 어제 통화를 했는데 어떤 사람하고 복음을 아는 사람과 통화를 하는데 미치겠대요.
왜 미치는가 하면, 전화만 하면 옛날 이야기만 한 대, 옛날 이야기
’옛날에 어땠는데, 옛날에 복음 모르는 인간이 어땠는데, 어떤 목사가 이랬는데‘ 지겨워 죽겠대요.
자기도 사실 그랬거든요. 옛날 이야기, 그거 재미있었거든요.

옛날에 복음 모를 때 이야기 이야기가 아니라
’그 정도로 죄인이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참 좋은데
복음 이야기는 일분도 안 하고 옛날 이야기를 2시간 3시간 한다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복음 아는 사람 입장에서는 짜증나는 일이겠어요.
저 같으면 그만하세요. 이거 나올 건데
저 같으면 끊어버립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헬라파 유대인들은 지혜를 원해요. 그 히브리파 사람들은.
히브리인들은 이 기적을 원하고
놀라운 것은 이 사울이 헬라파 유대인들과 극렬한 논쟁을 하면서
마지막 어떤 자리에 도달하게 됐냐 할 때는 그들의 살기를 떠올린 거예요.
이 헬라파 유대인들도 대단하죠. 살기가 떠오를 때까지 대화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지지 않겠다는 그러한 어떤 마음이 이들 속에 있는 겁니다.
이게 헬라 바다의 특징이에요. 다 똑똑하니까.

그래서 좀 이렇게 공부 좀 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 이 정도 도달해요.
그런데 헬라파도 아니고 무당파들이죠. 대부분
그 사람들은 이 말씀 이야기하면요. 시끄럽다 듣기 싫다.
’난 내만 믿어. 난 믿어. 니는 니 믿고’ 이거 전부 다 이 히브리파입니다. 표현을 하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능력 보여주면 믿는다’예요. 이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께서 그래서 이 히브리파 사람들이나 헬라파 사람들은 모두를 박살내는 복음을 전한 거죠.
히브리파 사람들은 기적을 원하니까, 그 기적을 원하는 자들이 누구였어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기적을 행해라’ 그 마귀였잖아요.
그들의 마귀됨을 고스란히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거예요.
그 기적을 행하시면서 십자가를 전해버리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리는 겁니다.

좀 똑똑한 이 바리새인들, 바리새인들은 약간 헬라파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데
말씀을 열심히 배웠잖아요.
그래서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이 성경은 내게 증거한다’ 이러니까 대화가 안 되잖아요.
대화가 되려면 접점이 있어야 되고
대화가 되려면 서로 서로 주고 받으면서 흘러가면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어야 되는데.
처음부터 건널 수 없는 강, 너는 너 길, 나는 나 길
그 철로를 보면 하나는 상행성, 하나는 하행선 이래 가는 거예요. 대화 자체가
대화하면 할수록 더 멀어져요. 더

그러면 우리들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잖아요.
헬라파 유대인들과 이 치열한 논쟁을 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들 중에 대표자들이 누구예요? 이 디아스포라 사람이잖아요.
스데반이 이들과 이미 한 차례 논쟁을 해서 돌에 맞아 죽었잖아요.
그런 인물들과 인물들과 다른 인물들일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 인물들과 동일하다고도 볼 수 있고요. 어쨌든 예루살렘 쪽에 있기 때문에 그렇죠.

그러면 이미 그들이 자기가 주도하에 돌들고 죽였잖아요.
그러면 우리 같으면 ‘저 놈들 안 들어. 돌 들 거야. 안 전해’
이런 생각을 갖는데, 이 밀어붙여요. 누가?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밀어붙이기 때문에 이 불나방이 불타 죽으려고 뛰어드는 것처럼 그건 지가 뛰어드는 거고.

성경에 보면 주님께서 그런 방식을 취하게 하셨는데 이 사울을 주님께서 내 모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합리적으로 따지자는 거예요. 합리적
합리적으로 따지는 자들이 누군가 하면 헬라파들이에요.
그러면 이 사울은 그러면 비합리적으로 따지느냐?
비합리적이 아니에요. 성령의 인도하심이예요. 인도하심.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것을 바탕으로 하여서 판단할 거리를 만들어 놨어요.
안경을 이미 확정 지었죠.
이 지금 이 사건이 여기에 있는 이유가 우리가 볼 때는 별 내용이 아니잖아요.
굉장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시작하면서
이 내용이 여기에 기록돼 있다는 것은 사도들 자체도 엉터리라는 얘기예요
사도들이 엉터리라면 사울도 엉터리고요.
우리도 엉터리라는 얘기예요.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뭐였습니까? 자기들은 엉터리가 아니라는 거거든요.
왜 엉터리가 아니냐 할 때는 말씀대로 연구했기 때문에 엉터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복음은 누가 전하십니까? 주님이 전하시죠.
주님이 전하려면 증인들은 모두가 다 어떤 자들이 돼야 되는가 하면
죄인이 되야 돼요. 엉터리가 돼야 돼요.
그렇지 아니하면 죄인이 영광을 받게 돼 있어요. 사람이

엉터리로 만들어도 인간들은 베드로를 주목하잖아요. 지금 엉터리인데
캐톨릭이 베드로를 주목하잖아요.
십자가 지지도 안 했는데 주목하고 앉았잖아요. 지금
우리는 캐톨릭을 욕하죠? 똑같은 인간들입니다.
여러분들도 똑같이 복음 전하는 목사를 주목하게 돼 있어요.
그 이유는 간단해요? 뭔가 안정성을 얻고 싶어서 그렇거든요. 안정성
그리고 인정 욕구도 또 있고요. 그 속에서

복음은 주님이 전하십니다.
말씀을 주님이 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은 말씀하신 분이 반드시 이루어내세요.
그러면 인간은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그 자리에 증인으로 거기에 투입될 뿐이죠.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을 증거는 증인이잖아요.
그럼 여기에서는 죄들이 막 쏟아져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죄만 쏟아져 나오면 됩니까? 이렇게 질문하는데

죄가 쏟아져 나오는 방식이 어때요? 헬라파 유대인들과 치열한 논쟁을 하는 거예요.
이런 거는 또 안 하려고 하죠. 사람들은.
많이 했다는 거예요. 나 많이 해봤어. 과거에
많이 해보니까 사람들이 안 듣더라.
그건 무슨 말이에요? 원래 안 들어요. 원래 복음은 안 듣게 돼 있어요.

그러면 ‘많이 해보니까 안 되더라’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핍박을 면하기 하기 위해서, 자기가 괴로운 게 싫은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을 들어도 뭐만 듣는가 하면?
봐 죄만 드러나잖아. 그런 것만 빼가지고 자기 유리한 대로 다 적용해 버리죠.
주님이 하시는 일 속에 참여하기를 꺼려하는 그 죄인됨이 드러나야 되는데
자기가 이미 복음을 알았기 때문에 심판하는 자리, 판단하는 자리에 올라가 버린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 속에 살게 하신 이유는 주님의 증인 삼게 하기 위해 살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피가 우리에게 이미 덮쳐졌기 때문에
그 피를 증거라기 위해서 우리를 흩어버린 거예요.

그게 이제 야고보서에 보면 흩어진 나그네, 새로운 이스라엘이거든요.
흩어졌으니까 뭔가 복음을 전하는 뭔가 괜찮은 자리 이런 걸 우리들은 자꾸 상상을 하는데
여러분이 있는 모든 곳이 피가 덮힌 자리고요.
감사할 수 있는, 감사할 수밖에 없는 자리라는 얘기예요.

복음을 전하니까 죽이려고 할 수밖에 없죠.
오늘날은 죽이려고 하지 않죠? 목사의 경우에는 이래요.
목사가 복음을 전하면 목사를 죽이는 방법은 가장 간단합니다.
설교를 못하게 해버리죠. 그래서 목사를 면직시켜 버립니다.
목사를 면직시키면 설교를 못 하거든요.
요즘은 면직시켜도 소용 없어요. 아무 데나 다 목사 안수주고

저도 지금 뭐 교단에 속해 있는지 아닌지도 몰라요. 떠나온 지가 뭐 하도 오래돼 있으니까
나를 이단해가지고 뭐 제명한다 이런 이야기가 들렸는데
그다음 소송한다고 오라고 안 해요. 교회에서
옛날에 인천에 있을 때 그 담임 목사가 건축을 하는데 ‘제가 이건 교회가 아닙니다’라고 하니까
새벽에 열 받아가지고 정 목사 내려와 그러면서 당장 잘라버리면서 이단이라,
이렇게 교회에서 선언 해가지고 나중에 이제 노회에 고소를 해가지고
목사 면직하니 마니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연락이 안 와요. 복음을 전할 기회니까
그런 식으로 잘라버려요.

아예 전도사 때는 복음을 전하면 아예 강도사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옛날에는 그게 통했어요.
지금은 안 통합니다. 지 혼자 목사 안수받아 가지고 지가 이렇게 해가지고
성부와 성자 이름으로 목사 안수 주노니, 이렇게 해버리거든요. 지금
혼자 가기 좀 그러면요. 같이 해버려요. 둘이 앉아가지고

유명한 일화가 있어요. 비행기 타고 유학 간다 해서 미국 가면서 둘이 비행기 안에서
서로 안수해 가지고 목사 안수받아 가지고 갔다가 내가 미국 가서 받았다.
그거 어디서 봤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거 신학교가 한두 개도 아니고
한국 같은 경우는 지방 신학교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쨌든 그런 식으로 이 복음을 못 전하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사람들이
지금도 아마 죽일 수 있는 권세가 있다면 죽여버리겠죠.
왜 죽이려고 할까요?
인간은 자기가 신인데, 이 자기의 신됨을 용납하지 않잖아요. 복음 자체가
그리고 십자가가 지혜라고 하니까 너무나 불쾌하죠.
십자가가 지혜라는 말은 우리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 자신을
심지어 내가 믿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십자가거든요. 그게 지혜예요.

사람의 지혜는, ‘내가 믿으면 그게 구원이 된다’라는 게 사람의 지혜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라는 자체가 나로부터 나오는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십자가의 지혜예요.

그러면 목사님 나의 진정한 성령의 고백은 인정이 되지 않습니까? 인정이 되죠.
왜 됩니까. 성령의 고백이잖아요. 네 고백이 아니고.
자기가 말을 해놓고 자기가 말한 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성령의 고백이라면 ‘나는 아니오’가 들어갈 거 아니에요. 거기에는
그걸 누가 용납하겠느냐? 그 얘기예요.
복음을 아는 나니까, 적어도 인정해 줘야 되지 않습니까?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긴데.
골방교회 강의할 때 어떤 분이 ‘이 정도 하면 인정받을 만하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을 이 ’형제들이 알고 급히 사울을 가이사랴로‘ 서쪽 지역이죠.
지금 예루살렘이니까 서북쪽으로 가이사랴가 있으니까
거기에 가서 다시 사울의 고향 다소 길리기야 이 지도를 보면 지금 터키 쪽입니까?
위쪽에 시리아 이쪽이니까 이쪽 부분으로 이제 피신을 시키는 겁니다.
이러한 내막들을 우리들이 파악할 수가 없어요.
되는 대로 사는 겁니다. 지금 표현을 하면.

이걸 달리 표현하면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하시는 거고요.
왜냐하면 우리들이 늘 주목해야 되는 것은 이런 거예요.
주님께서 자기 이름을 어떻게 증거하는 가에 관심이 있어야 되지,
주의 이름이 어떻게 증거되는지에 관심이 있어야 되지.
우리는 자꾸 무슨 생각을 갖게 되는가 하면
’사울이 주님을 만난 이후에 어떻게 했는가‘에 관심을 두죠. 그게 부럽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 것들을 지금 이 말씀을 통해서 완전히 부서뜨리고 계시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성경 한 구절을 더 보고 31절 보고 마치겠습니다.

(행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수가 더 많아진 것은 맞죠.
그런데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죠.
수가 더 많아졌다고 했을 때 그 수 안에는 항상 누가 담겨 있어요?
가짜가 담겨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됩니다.
가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짜로 인하여서 오히려 교회가 보호받는 꼴이 돼요. 참 특이하죠.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해야 되는 게 여기에 보면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이렇게 돼 있죠.
지금 우리가 살펴본 이 교회의 모습 사마리아 성의 교회의 모습, 평안의 모습이 어땠어요?
지금 여기서도 마찬가지죠. 예루살렘 교회도
지금 평안합니까? 평안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분명히 요한복음 14장에서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에 주는 평안과 다르다 했죠.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러면 이 말씀을 주님의 말씀으로 읽어야 되는데 우리는 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갔다.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는 모습을 표현하면요? 완전히 박살 나는 교회에요.
사람의 숫자는 많아지는데 계속해서 복음에 의해서 깨어지는
지금도 보세요. 예루살렘 교회가 사울이 들어오니까 깨어지잖아요.
그 자체가 제대로 된 평안의 모습이고 제대로 든든히 서가는 모습이예요.

우리는 든든히 서간다니까,
우리의 생각은 야! 점점점점 하루하루 지날수록 교회가 단단해진다. 조직도 갖추어진다.
이제 더 이상 이 교회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이런 생각을 갖고 있잖아요.
예수님이 든든히 서셨어요. 어디에서? 십자가에서
십자가 피만 나온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사람들 숫자가 더 모여가지고
뭔가 장로도 기존 장로는 다 잘라버리고 권사고 뭐고 다 잘라버리고
다 시험을 다 쳐가지고 그래 해봤자, 목사 마음에 드는 사람 밖에 장로 안 뽑습니다.
목사가 반대하면 장로가 안 되잖아요.
그런 식으로 조직을 만들어 가지고 이제 든든히 서가서 예배당도 짓고 이 얘기가 아니에요.
지금 이 말씀 자체는

지금까지 살펴봤잖아요. 뭐만 남았습니까?
숫자가 많아질수록 복음이라는 내용이 그 속에서 완전히 활동력이 강력하게 움직이죠.
그래서 잘라낼 자들은 잘라내버리고.
오히려 복음을 안다는 자들을 완전히 무너뜨려서 그 속에서 십자가의 피만 자랑하도록
주께서 교회를 이끌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가 왜 이렇게 썼습니까?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해 서가고 주를 격려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성령의 위로가 이런 거예요?
사울을 투입시켜가지고 예루살렘 교회에 ’너 엉터리지’ 이게 성령의 위로예요.
성령의 위로니까 나를 위로하더라.

내가 지금 코로나 때문에 장사도 안 되고 사업도 안 되고
직장인 최고죠? 지금. 월급 나오는 사람 최고입니다.
재택근무해도 돈 나오고 안 가도 돈 나오고 이 교사들 땡 잡았잖아요.
교사들 죽는다고 말을 하지만 제가 볼 때는 땡 잡은 겁니다.
그런데 자영업자들은 어때요? 죽을 지경입니다. 미칠 지경이잖아요.

평안이라는 것은 인간이 줄 수 있는 평안이 아니에요.
그런 평안은 절간에 가면 주고요. 대순진리회에 가면 평안을 줘요.
이럴 때 대순진리회 같은 데 가야 돼요. 여러분. 신천지는 가면 안 되고
신천지는 여러분 그걸 다 빼내는 족속들이고
대순진리회는 안 그러면 대순진리회도 빼내는 인간들인데 처음에는 줘요.
안 그러면 이 일본 종교 남녀호랑개교 이 사람들은요, 이웃 사랑을 실천해요.
어려울 때 그런 데 가야 돼요.
안 그러면 그 이전에 우리 탕자 교회 밑에 있던 하나님의 교회 그런 데 가세요.
처음에 가면요, 천국 생활을 만끽하게 해주거든요.
그 대접을 실컷 받고 가지 마세요. 그냥.
배고프면 그쪽에 가세요. 가서 사기를 좀 치세요.
나 사업을 하고 돈 좀 뭐 이렇게 있다 그러면서,
알고 싶다 해서 가서 그런 평화를 그들이 원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그런데 지금 여기서 말씀하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에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그 평안.
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그 내용이 더욱더 확고해지는
십자가가 더욱더 눈 앞에 밝히 보이는 그 든든함,
그 든든함을 주님께서 드러내시기 위해서 사람의 숫자를 더 하는 겁니다.
사람의 숫자가 더하면 더할수록 뭐가 더 드러날까요? 죄가 더 드러나죠.

우리가 지금 이렇게 다 화면으로 만나잖아요. 몇 명 안 되지만
직접 한번 만나보세요. 모여보세요.
이미 부러운 사람이 있고요, 부럽지 않은 사람이 있고요.
보기 싫은 사람이 있고 보고 싶은 사람 다 있는 겁니다.
사울 같은 사람이 복음 가운데 들어왔으니까 얼마나 사울이 싫겠어요?
다 여러분이 사울을 환영했을 것 같죠? 그런 상상하지 마세요.
교회가 부처가 모여 있는 게 아니에요. 죄인들의 모임이에요.
근데 우리들은 자꾸 부처의 모임이라 생각한단 말이에요.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만을 남기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신 겁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죽으심만 고스란히 드러나는 저희들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corded by 구 성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