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8-29 12:43
사도행전 강해 37강 행 9:31-43 주를 두려워함과 성령의 권면으로 진행하는 교회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9  
https://youtu.be/EMCgou6UiVA

관리자 21-08-30 19:58
답변 삭제  
사도행전 강해 37 주를 두려워함과 성령의 권면으로 진행되는 교회

주님! 말씀 앞에 인도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죄가 뭔지도 모르고 죄 가운데 살면서 죄를 안 지을려고 애쓰며
이 세상에 살았던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주님의 그 보혈을 입게 하신 그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주님! 그 은혜를 입고 살면서 살아가면서 주님의 그 보혈의 공로를 날마다 만끽하고
날마다 나의 죄악을 보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자유함을 얻게하신 은혜가 너무나 귀하고 귀합니다.
주님! 이 시간도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가 어떤 자인지 깨닫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다가가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찬양하며
증거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모든 것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15장 30절에서 33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15:30~33)
30 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31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 있느니라
32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기도하시겠습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참된 지혜요.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음이라고 놀림 받는 지혜임을
저희들에게 알려주시고 생명의 길로 저희들을 인도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말씀에 책망을 즐겨 받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인생이 나의 소유가 아니라
십자가 지신 주님의 증인으로 살려지고 있음을 늘 깨닫게 하시고
살아가게 하심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사도행전 9장 31절에서 43절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행9:31~43)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32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지 팔 년이라
34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38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39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

먼저 31절 말씀을 우리 지난주 잠시 살펴보았지만, 오늘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들어보면 상당히 기분 좋은 말이고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유쾌한 말씀이라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교회라는 것은 이러해야 되겠죠. ‘든든히 서 가고,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얼마나 듣기 좋은 말씀입니까?
어떤 목사가 개척교회를 했는데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그리고

(행9:31중)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진행한다고 하니까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은 항상 진보적. 앞으로 나가는 것, 점점 커지는 것.
그 뒤에 보면

(행9:31하) 수가 더 많아지더라

교인들 수가 많아져서 대한민국에서 합동측에서 제일 큰 교회
감리교회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되는 그러한 어떤 말씀으로 사람들은 이해를 하고요.
이런 말씀을 볼 때 우리들 마음속에는 이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거죠.
이천 년 교회사를 보게 되면 사실은 교회라는 자체가 다 이러한 교회를 꿈꾸고 있었던 겁니다.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처럼 사라지는 그런 교회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주의 피만 증거하다가
그 피 능력대로 복음이 나오지 않으니까 사라져야 하는 그러한 교회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없더라도 이 교회만은 영원해야 된다‘라는 그러한 생각을 갖고 교회를 키워왔죠.
사람들을 늘려왔고요. 지금 한국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교회와 정반대로 하시는 말씀임을 볼 수 있어야 되는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그렇게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죠.

여기에 보면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이렇게 나오죠.
여기에 나오는 교회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는
유대, 갈릴리, 사마리아 교회라고 했으니까 당연히 복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죠.
어느 교회가 있고 어느 교회가 있고 다 우리는 다른 교회잖아요.
‘이 교회들’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서 성경에서는 이 교회를 ‘단수’로 사용하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단수예요. 교회는 하나뿐입니다.
주님께서 반석 위에 세우신 교회, 그 반석이 베드로입니까? 맞죠. 베드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는 그 베드로 위에 십자가의 피를 덮어버리죠.
그렇게 세워진 교회는 하나뿐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덮혀진 교회, 십자가의 피로 세워진 교회.

사도행전 20장에서는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 피로 값주고 산 교회죠.
그 교회는 이 세상에는 하나뿐이에요.
이 세상이든 죽은 세상이든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 벌써부터 인간의 욕망이 작동한다는 것을 이 말씀 자체가 삭제해 버리죠.
‘나의 교회가 없다’라고 해버리면 이미 인간들은 어떤 것도 할 마음이 생기지 않죠.

그 이전에 소련이 공산주의가 되었잖아요.
공산화가 되었을 때 나름대로 마르크스인지 그런 어떤 이론을 갖고 이상향을 꿈꾸면서
뭔가 멋진 세상이 낙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그런 기대를 가졌지만
인간이라는 자체가 ‘내 것’이 없는 상황에서는 개판이 돼 버린 겁니다.
능력대로 일하고 가져야 할 만큼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는 것이
이론으로는 굉장히 좋은 이론인데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자기만이 유일한 왕이 되어야 되고 일인자가 되어야 되기 때문에
그 모든 소유를 자기 것으로 바꾸지 않는 이상은 결코 그 일에 대해서 열심을 내지 않죠.
내 거가 아닌데 누가 일합니까?

재미있는 현상들이 많이 있잖아요. 사장들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조그마한 식당 같은 경우에도 사장이 없으면 식당이 엉망이 되죠.
그래서 이제 고육책으로 배당을 주죠. 그러면 열심히 일을 해요
학교도 마찬가지죠. 제가 아는 어느 학교 보면 주인이 없어요.
주인이 없으니까 그 학교를 살려야 된다는 이런 마음이 없어요.
어쨌든 자기들만 먹고 살다가 자기 뭐 몇 년인가, 일만 하다가 돈벌이 하다가 떠나면 돼요.

교회도 마찬가지죠.
교회라는 것도 주님의 교회밖에 없다라고 하면 어느 누가 이 교회에 충성을 하겠습니까?
아무도 충성을 안 하죠. 내 교회가 아닌데
내 것이 아닌 것에 누가 충성을 합니까?
우리 가정들도 마찬가지죠. 내 가정이 아닌데 누가 남의 가정에 충성을 합니까?

이 말씀을 보게 되면
교회라는 것은 주님의 피로 세우신 교회인데
이 교회의 특징은 죄가 바탕에 깔려 있고 그 위에는 피가 덮혀 있는 게 교회입니다.

이걸 구약적으로 표현하면 언약궤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언약궤가 움직인다라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 이렇게 표현을 하죠.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평안하다 든든히 서 간다’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니까
‘아! 교회는 분란이 없구나, 싸움이 없구나’ 뭐 이런 생각을 가질지 모르지만

우리가 지금 사도행전 1장부터 살펴본 바에 의하면 교회가 난리죠. 고요한 게 없어요.
아나니아 삽비라도 튀어나오고 마술사 시몬도 튀어나오고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교회에서 이렇게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나오는 ‘평안하여’라는 이 말은 그 헬라어 성경을 보면
‘평안 안에서’ 이미 예수님이 주신 그 십자가의 피로 주신 이 세상과 다른 평안을 받은 교회죠.
그러면 쉽게 이해되잖아요.
교회라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십자가의 피능력이 계속해서 작동을 하죠.
성령을 주셨으니까 이제 더 이상 너는 십자가가 필요 없다가 아니라
십자가의 그 심판성과 동시에 그 피 능력이
그 교회에 계속해서 활동을, 역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살펴보았습니다.

‘그 평안 안에서 든든히 서간다’라는 표현이
‘든든히 서간다’ 더 이상 이 마술사 시몬같은 자가 없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자가 없고
우리가 볼 때는 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죠.
그 많은 교인들 중에 한 사람이 있지 않느냐? 그건 알 수가 없어요.
나중에 보면 교회의 대다수가 다른 복음을 쫓거나
아예 전체가 몽땅 다른 복음으로 가는 그런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러한 모습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평안 안에서 든든히 서 간다’라고 이렇게 말씀을 할 때는
이것은 영의 말씀이기 때문에
육의 입장에서 들여다봐서 해석해서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 말씀을 고스란히 어디에 적용시키면 되는가 하면
고린도 교회에 적용시키시고, 갈라디아 교회에 적용시키시고, 에베소서 교회에 적용시키시고.
사도행전 안에 서신서들이 다 담겨 있잖아요. 교회가 다 담겨 있기 때문에
그리고 아시아 일곱 교회 그대로 넣으시면 돼요.
그 모습 자체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모습이에요.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교회가 아니에요.
어느 정도 숫자가 되고, 뭐 장로가 세워지고, 예배당 건물이 있고, 안정적이고
그래서 야 이제는 주님 보시기에 아!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어서 이 든든한 교회를 유지해 나가자
그렇게 생각을 사람들은 하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세우신 주님의 피로 세우신 교회가 아니라 인간이 세운 집단에 불과하죠.

이것은 마치 똑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하여서
광야교회를 만들었잖아요. 광야 교회를 만들어 놓으시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교회를 뭘로 바꿔버립니까? 우상 숭배 집단소로 바꿔버리죠.
그러한 것과 다르지 않는 겁니다.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교회의 특징이 나옵니다.
주를 경외한다. ‘경외한다’는 말은 ‘두려워한다‘는 거예요.
참 특이하죠.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았는데 주를 두려워할 게 뭐가 있습니까?
이미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가 다 용서되었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어요.
워낙 요즘 사람들은 믿음이 좋아가지고 이런 말씀들은 아예 삭제해버려요.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 위로가 돼 있는데 이것도 번역하는 사람들이
성경에서 번역이 잘 잘못을 따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인간은 자기 입장에서밖에 해석이 안 돼요.
이 위로라는 단어가 권면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거든요.
위로라는 의미와 권면은 달라요. 권면은 책망 쪽이 강해요.
위로라는 것은 ‘힘들지 고생하지 그래 위로 받아야지’, 이런 쪽이 위로인데

물론 이 ‘위로’라는 단어 자체를 이 십자가 안에서 해석을 한다면
진짜 위로라는 것은 어떤 위로입니까? 가짜 성도들은 잘라내는 게 진짜 위로예요.
복음 아닌 것에 대해서는 이 피 흘리는 싸움을 하는 것이 진짜 위로겠죠.
성령의 위로라고 하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여러분 오늘도 주일인데 여러분이 일주일 동안 얼마나 고생을 하셨습니까?
주님의 위로를 받으세요.

그게 위로가 아니고 일주일 동안 살면서 수많은 사건들을 만나잖아요.
돈을 다 잃어버리기도 하고, 자식이 아프기도 하고, 병도 들기도 하고, 이 자체가 위로라는 거예요.
이걸 구약으로 집어넣으면 그 속에서 인간들이 나오는 것은 원망과 불평뿐이에요.
그래서 그들 가운데 언약궤가 함께 동행하는 겁니다.
지금 언약궤가 우리 속에 들어와버렸잖아요.
주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셨잖아요.
주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아보지 못했으니까 자기가 생각하는 그러한 위로를 떠올린다라는 거죠.

그 앞부분에 ‘주를 경외함과’ 주를 경외한다, 주를 두려워한다.
우리들은 말씀속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주를 두려워함이 없어요.
자신이 심판주의 자리에 들어가 버리면 이 복음에 의해서 쪼개지는 이 일에 대해서 관람자가 되죠.

지금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복음에 의해서 쪼개지고 갈라내는 이 일들이 누구의 일로 봅니까?
심판주의 일로 보죠. 교회가
심판주께서 친히 지금 일하고 계심을 목격하고 있는 거예요.
이걸 히브리서에서는 어마무시하게 표현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 가운데 율법을 받았잖아요.
지금은 불보다 더 무서운 심판 속에서 주께서 지금 우리 가운데 일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이에요.
이 말씀 자체가 불은 타버리면 죽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심판하시는 그 심판의 불은 타 죽지를 않아요.
구더기도 타지 않는 곳에서 영원한 고통 속에서 저주받아요.
물 한방울도 구할 수 없는 그런 곳입니다.

겁 주어서 믿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 사건을 성도들은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들이 복음을 받아가지고 전하니까 믿더라 어 믿네. 이렇게 보는 이 대부분이잖아요.
그런데 지금 이 말씀에 의해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분들은
어떻게 지금 그 사건을 보는가 하면?
십자가 지신 그분이 친히 십자가의 능력으로
심판의 능력 구원의 능력을 그 자리에서 계속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빌립 집사님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자기가 전했는데 다 믿었잖아요.
세례를 다 받았으면 당연히 이들은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안수를 하니까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까
그들이 성령이 임하고 그런 순간 쫙 갈라져 버리잖아요. 예상도 못한 일입니다.

베드로가 이와 또 별반 다를까요?
당연히 세례까지 받았으니까 물세례까지 받았으니까 이들이 분명히 구원을 얻었다라고 생각하겠죠.
우리들도 그렇잖아요. 우리들도.
아! 지금 복음 다 들으니까 구원 얻었을 것이다.
우리 다음은 몰라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렇게 돼 있어요.

기겁할 일이죠. 자기들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사건이 펼쳐지니까.
육은 육대로 일을 진행하고, 그 육을 갖고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의 능력으로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고스란히 보여주셨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교회가 두려운 거예요.

주님에 대한 경외, 두려움, 존경심 정도가 아니에요.
헬라어 성경 보면 이 두려움, 굉장히 무서워한다고 돼 있어요.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자신들을 증인으로 세워서 나섰는데 자기들이 뭔가 한다라고 생각했는데
자기들도 그걸 알았잖아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 사람을 고쳤을 때
‘주께서 이 사람을 성하게 했다’라고 말은 했지만
자기들이 가는 길 가운데 주님이 친히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 계실 때와 동일하게 주님의 능력으로 일하고 계심을 목격하니까 얼마나 두렵겠어요?

이 얘기하니까 유기성 목사가 그런 얘기를 한대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주님이 함께 계시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서 정말 주님을 두려워해야 됩니다.’ 들어보셨죠?
이 두려워해야 된다는 이 말 자체가 어떤 의미인가 하면 교인들 겁주는 거예요.
겁 줘가지고 ‘여러분! 두려워 하세요.’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성도 아니라 이 얘기죠. 쉽게 말하면.
말은 다 맞는 말을 해요. 그 말이 맞죠?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나오는 주에 대한 두려움은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이죠.
그러면 이들은 십자가의 능력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이들은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죠.

그런데 그 유기성 목사가 말하는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러면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됩니다. 자아를 부인해야 됩니다.’
죽여야 된다는 말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 교인들은 선한 목자 교회 사람들은
우리 교회 목사님은 진짜 자아가 부인되는 사람입니다.
제가 그 말을 딱 듣고, 아! 부처네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 부처를 본받고 싶어서 교회로 많이 가는 겁니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자기를 부인한다는 의미를 몰라요.
자기를 부인하니까 사람들은 괜찮은 인간이 되었죠. 이렇게 보는 겁니다.
성경에서 자기를 부인하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가 돼요.
우리의 생각은 자기를 부인하면 온전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자기를 부인한 자의 특징이 뭔가 하면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가 자기를 부인하는 자예요.

그런데 그 목사가 하는 얘기는 자기를 부인하면 훌륭한 사람이 되어버려요.
불교입니다. 불교. 절간에 그렇게 많이 다니는 거예요. 사람들이
절간이라는 특징이 그렇잖아요. 나를 위한 거잖아요 이건 유대교랑 똑같아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하는 것과 연구하는 것과
그 성경 빼버리고 부처의 가르침을 상고하고 부처의 가르침 빼버리고
부처 자체가 보리수 나무 안에서 뭐 뭘 뭘 묵상을 하든지 상고하잖아요.
똑같이 상고하면서 인생의 문제가 뭐냐? 결국은 나를 떠나야 된다.
뭐 나를 떠난 그 나는 어떻게 해결하겠어요?

그러한 어떤 모습을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이런 말씀들을 대할 때 다 육으로 봐요. 육으로 보니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이 말씀의 위력이에요.

말씀이라는 것은 지옥 갈 자들을 지옥가게 만드는 말씀이에요.
말씀이 인간이 다룰 수 있다라고 생각하죠?
인간 쪽에서는 다룰 수 있다라고 접근을 합니다. 다루어보세요.
다루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그 말씀에 의해서 지옥 가는 코스로 이 아우토반을 달리게 돼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 말씀 앞에서 십자가가 밟히 보이게 되죠.

문제는 이런 말씀을 보면서 사람들은 뭘 꿈꾸는가? 교회가 보이는 거예요. 교회가
저 멀리 뭔가 괜찮은 교회, 성공한 교회, 그런 교회가 눈에 보이는 겁니다.
왜 사람들이 큰 교회를 선호하겠어요?
물론 장사가 잘되기 때문에, 잘되기 때문에 큰 교회를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있지만요.
그 배후에는 신에 대한 갈망, 내가 신을 믿는다면 나를 어떻게 해줘야 되고
내가 다니는 교회가 어떠해야 되는가? 그러한 어떤 꿈들이 다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 말씀을 보면
‘교회가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더라’
얼마나 완벽한 교회처럼 보입니까?
앞부분에 우리가 말씀을 보지 않았다면 이 말씀의 의미를 전혀 이해를 못하게 되는 거예요.
말씀 속에 들어가 버리면 이 말씀의 의미가 모았다가 깨버리고 모았다가 깨버리고
오로지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분이
심판주되심만 드러나는 교회로서 드러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수가 증가하더라’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증가했다가 잘라내버리고 증가했다가 잘라내고
나중에 사도바울을 보게 되면 증가했다가 잘라내는 숫자가
나중에는 더 많아지고 남는 자가 별로 없어요.
믿는 자가 몇 사람 안 남아 있어요.

여기에 보면 ‘수가 많아졌다’라는 이런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는 이미 다 끝냈기 때문에 다 완성을 했기 때문에
숫자가 증가되고 줄어들고 이 개념이 없어요.
그러면 이 땅에서는 증가되는 것처럼 보이죠.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걸 증가된다라고 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확정된 자들이 이제 들어온다라고 이후에 사도행전에서 나와요.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만 다 믿게 돼 있어요.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육적인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말씀을 이렇게 우리 가운데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사람들이 이런 말씀을 통하여서 앞서도 말씀드린 바 같이 뭔가 꿍꿍이가 있어요.
교회다운 교회, 괜찮은 교회, 그러한 교회를 꿈꾸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민수기 11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민수기 11장 4절에 보면

(민11:4)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섞여서 하는 무리는 출애굽할 때 함께 이렇게 출애굽을 한
아마 이스라엘 자손 외의 사람들이라 이렇게 볼 수 있는데
이들이 어떤 탐욕을 품었느냐? 보게 되면

(민11:4하)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이스라엘 백성들한테 영향을 미친 거죠. 이들이
‘영향을 미쳤다’라고도 볼 수 있지만,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이었는데
입을 꼭 다물고 참고 있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어 죽는 거예요. 한우 고기가 먹고 싶은 거예요.
그것도 아주 값비싼 그런 고기가 너무나 먹고 싶은 겁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하는 얘기를 한번 보세요. 5절에 보면

(민11: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여러분은 수시로 이걸 먹잖아요. 그죠? 생선 외 수박 부추 파 마늘,
제 기억으로는 제 어릴 때만 해도
제가 초등학교 6학년 정도까지도 이 바나나를 본 적이 없어요.
워낙 촌 동네에 살아가지고. 바나나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이들은 애굽에서 먹어본 경험이 있거든요. 그런데 광야길에 이러한 것들이 없잖아요.
우리 흔히 빠진 게 나가면 부추고 이 동네는 되게 싸거든요.
농산물이 진짜 싸요. 가난한 자가 살기 좋은 나라인데

그런데 자나깨나 만나입니다. 자나깨나 만나
우리 같으면 하늘로부터 내리는 알지 못하는 이 만나가 내려진다면
은혜에 감사하면서 날마다 살 거라고 예상하지만, 인간이라는 자체가 그렇지 않습니다.
기적이 계속 베풀어지면 그건 기적이 될 수가 없어요.
십자가 복음도 처음 만날 때는 기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기쁨이 기적이 아니라 당연한 걸로 받아들이게 되고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께서 책망을 하시는 거예요.
잠언서에 나오는 지혜로운 자는 책망을 받는다 하거든요. 견책을 즐겨한다고 하고
어리석은 자는 견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죠.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꾸 책망을 받는다는 것은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건데
책망을 받지 않겠다는 것은 나는 이미 복음을 알아요. 나는 이미 구원받았어요.

궁극적으로 자기가 향하고자 하는 자리가 어디냐?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겁니다.
이들이 잘 보세요. 이 사건이 어디까지 연결되는가 하면요.
이렇게 이들이 원망을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제 10절에 보면

(민11:10) 백성의 온 가족들이 각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참 재미있죠. 처음에는 아무도 안 울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잡족들이 나와가지고 막 충동질하니까 우리에게도 이 만나 외에 수박도 먹어야 되고
참외도 먹어야 되고 복숭아도 먹어야 되고...
이 동네에 제가 처음 왔을 때 복숭아 값이 제일 비쌌거든요.
엄청나게 비쌌어요. 너무 비싸서 사 먹지도 못했는데

복숭아도 먹어야 되고 뭐도 먹어야 되고 그러니까
이 욕망이 처음에는 잠자고 있었어요.
잠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수박 먹고 싶다, 부추 먹고 싶다, 마늘 먹고 싶다...
각 집집마다 천막마다 문 앞에서 방성대곡을 통곡을 하는 겁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죠.
그러자 이제 이 모세가 조금 어떤 열을 내는데 10절에 보면

(민11:10) 백성의 온 가족들이 각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그 진노가 아마 11장 1절에서 나오는 그러한 내용들일 수도 있죠.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서 끝쪽에 있는 사람들을 다 불살라 버린,
그러한 어떤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그러자 이제 모세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11절

(민11:11)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모세도 우리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를 이렇게 와보면 정신이 왔다 갔다 해요.
출애굽기에서는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하면서 저들을 살려달라고 하는데
이제 와서는 뭐라 합니까? 아! 나에게 왜 이렇게 무거운 짐을 저 혼자 다 지게 하셨습니까?
모세는 그림자예요. 모세가 메시아가 아닙니다.
인간들이 자꾸 착각을 하는 게 성령을 받은 자는 증인이에요. 메시아가 아니에요.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증인들은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 깜빡깜빡이는 모습을 보여야 되죠.
깜빡이는 걸 제거시키려고 발악을 하죠.
그래서 자아를 부인하라. 자기를 부인하라.
날마다 주님 앞에 두려움으로 서라. 그러면 주님이 기뻐하신다.

여기에 보면 그래서 모세가
‘어찌 나 혼자 다 짐을 지웁니까? 내가 그들을 잉태하였나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점 없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을 다 쏟아내죠.
쏟아내는 이유가 뭡니까? 왜 나에게 이런 인간들을 맡겼느냐라는 거죠.
주님께서 맡긴 적이 없거든요. 모세에게 맡긴 적이 없어요.
자기는 자기가 맡았다라고 생각해요.

진짜 맡으실 분이 따로 있죠. 십자가 지신 분.
그분이 바로 양의 목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세는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15절에

(민11: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죽여달라는 거죠
사극에 보면 맨날 ‘죽여 주옵소서‘ 이러는데.
성경에도 ’죽여 주옵소서‘라는 인물들이 유명한 인물들이 있죠.
엘리아도 그렇고 요나도 그렇고 여기에 보면 모세도 그렇고
’차라리 죽여 달라는 거지요. 이 짐이 너무 무겁다‘라고 하면서

’우리는 모세처럼 하지 맙시다.‘ 이런 이야기를 지금 하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지금 이 과정 속에서 모세의 역할이 어떤 역할인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자! 그렇게 말을 하니까

(민11: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 백성의 장로와 유사되는 줄을 
              네가 아는 자 칠십 인을 모아 데리고 회막 내 앞에 이르러
              (성막이죠. 성막 앞에 이르러 둘러 줄을 세워라)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러면

(민11:17)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민11:17하)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지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짐을 나눠 주신다‘ 이런 생각을 우리들은 하게 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가르치시는 거예요.
모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죠.

자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와 동시에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하면
그들이 원망한 그 대가로 고기를 주시겠다 하는데 어떻게 주시는가 하면요.
고기를 이 냄새도 맡기 싫다, 꼴도 보기 싫다 하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고기를 주십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무섭게 일을 하시죠?

돈 벌고 돈 벌어서 돈 많이 벌어서 정말 부자가 되고 싶다라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느냐?
돈을 엄청나게 벌게 해서 돈 꼴도 보기 싫다 할 정도로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겁니다.
한번 봅시다.

(민11:19)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 일만 먹을 뿐 아니라
(민11:20)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 개월 간을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고 함이라 하라

냄새도 맡기 싫다. 그런 소리가 나오도록 지금 하나님께서 고기를 주시겠다 하니까
모세가 갑자기 ’이 장정만 60만 명인데 어디서 고기를 구하겠습니까?‘ 이렇게 물어요.
이상하죠? 만나를 내리셨잖아요.
그러면 모세가 하나님께서 이 고기 구하는 건 별 문제가 없다라고 믿어야 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너희에게 내린 하나님의 신을 그들에게도 내리겠다 하는 거거든요.

모세가 하나님의 신이 내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내린 사람이 보이는 이 모습 자체를 보게 되면 누구와 다를 바 없어요?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 없는 겁니다.
고기 먹고 싶다고 원망하는 자나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 육십만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까지 200만 명이라 합시다. 200만, 이 모두를 먹이는 고기를 주신다고 할 때
지금 이 광야에서 도대체 이 많은 고기를 어떻게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얘기하죠. 봅시다 21절

(민11:21) 모세가 가로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일 개월간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민11:22)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민11: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모세는 그림자이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착각했어요.
자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끌고 간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책임진다고 생각했어요. 언약을 생각도 하지 않는 겁니다.
언약이 지금 이들을 끌고 가거든요. 

그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70인 장로를 불러모아라는 겁니다.
70인 장로를 불러 모았어요. 회막문에 둘러섰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서 25절 보면

(민11: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 임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독특한 장면이죠.
칠십 명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셨고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안 했어요.

왜 안 하게 하셨는지요? 그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가 뒤에 나옵니다.
모세는 70명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자기의 일이 분산이 된다라고 생각하는 거죠.
모든 짐을 내가 담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그런데 70인에게 임했다가 다시는 예언하지 못하게 해버렸죠.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뒤에 나오죠.

(26절~)어떤 한 소년이 어떤 장막에 머물고 있다가 거기에 있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그 녹명된 자 중에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가
모세가 호출을 했잖아요. 70명 장로들 다 오라 했는데, 이들이 호출에 거절을 했어요.
가지 않았습니다. 성막 앞으로 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가지 않았는데 자기들의 장막에 머무르고 있는데 예언을 한 거예요.

그러자 한 소년이 쪼르르 달려가서 모세에게 달려가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더이다.‘ 이렇게 고발을 해요. 일러 받칩니다.
그러자 모세를 섬기는, 여기 보면

(민11:28)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나서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

여호수아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여호수아가 모세를 어떤 사람으로 보는 거예요? 지도자로 보는 거예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다‘라고 생각한 거예요.
사실은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있는데
이 눈의 아들 여호수아 조차도 모세가 지도자고, 대장이고 왕 같은 자죠. 일종의.
그럼 모세가 명을 내렸으면 당연히 그 명을 따라야 되죠.
그런데 명을 듣지 않는 저 엘닷과 메닷이 장막에서, 자기 처소에서 예언을 하니까
당연히 ’금해라‘ 그렇게 명을 내려야 된다는 겁니다.

이 사고 방식이 누구의 사고 방식인가 하면 모세의 사고 방식이에요.
왜 나에게 짐을 다 지웠냐는 겁니다. 지가 왕도 아닌데.
다윗왕도 마찬가지죠. 자기가 왕이 아니거든요. 이스라엘의 왕은 여호와 하나님뿐입니다.
자기가 왜 책임을 져요? 자기가. 자기 나라도 아닌데.
여호수아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그러자 모세가 완전히 조금 전에
’내게 왜 짐을 다 맡겼습니까?‘ 이 얘기를 하는 모세가 완전히 되돌아가죠.
방향을 틀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민11: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 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주님께서 친히 백성을 이끄시는 일이라는 겁니다. 이걸 지금 가르쳐 주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은 또 무슨 생각을 하는가 하면
여호와의 신이 다 임했으니까 각자 다 왕 노릇 하려고 해요.
여호와의 신이 다 임하면 모세 꼴 당한다 이 얘기입니다. 모세 꼴 당한다 이 얘기예요.

문제는 제가 왜 사도행전 9장 31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을 드렸는가 하면요.
사람들이 꿈꾸는 게 이런 거예요.
한 사람을 중심으로 이 교회가 힘을 키우고 세력을 키워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령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줘 버립니다.
부어줘 버리면 중심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어요.
중심점이 없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 중심점을 만들려고 하죠. 그 중심점에 누구를 세웁니까?
베드로를 세울 수 있고, 사도 바울을 세울 수도 있고, 고넬료가 나중에 설 수도 있어요.
그 부류 중에. 그죠?
그런 사람들을 중심에 세우고 교회를 확장해 가려고 하는 거예요.

이 내용은 지금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더라‘ 이 표현이 나오죠.
31절에 보면 이 진행한다는 말이 우리가 아는 것은 계속해서 전진이고 확장인 개념인데
헬라어 단어는 완전히 사방팔방으로 흩어진다는 얘기예요.
흩어진다는 것은 모든 것이 중심점이라는 이런 얘기입니다. 지금 이 말씀의 의미는.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말씀을 보면서 목사들이나 교인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교회에 뭔가 중심점을 두고 세력을 모으려고 해요.
그것을 박살내는 장면이 민수기 11장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그럼 우리라고 모세처럼 생각을 안 하느냐? 마찬가지죠.
복음을 전하는 나 중심으로, 복음을 아는 내 중심으로,
이 교회 중심으로, 이 장소 중심으로...
주님은 그렇게 일을 안 합니다.
그렇게 일하려고 하니까 주님이 깨어버리는 거예요.

만일에 그런 식으로 일을 했다면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으면 빌립이 거기에서 개척교회 했으니까
자기가 주도권을 갖고 빌립 중심으로 사마리아 교회를 키워나가야 되잖아요.
왜 떠나 보내버립니까?
예루살렘 교회도 나중에 마찬가지죠.
머무르고 있다가 지금 뒷부분에 그런 내용이 나오지만, 주님께서 다 떠나보냅니다.

교회라는 것은 십자가 지신 주님이 중심이거든요.
그 중심이라는 말은 ‘중심이 없다’라는 이야기예요.
그러면 각자의 교회는 우리는 중심이 없고 중심이 따로 있다는 걸 증거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십자가 피를 자랑하는 거죠.
이런 말씀을 갖고 뭔가 교회다운 교회를 꿈꾸고,
괜찮은 교회, 힘 있는 교회를 인간들이 꿈꾸는 자체가 악마적이에요.
그게 유대교거든요.

조금 더 봅시다. 이제 32절(사도행전)부터 나오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요.
여기에 대한 이 두 가지 예입니다. 앞부분도 예지만 뒷부분도 예 인데요.
한 사건은 이 베드로가 두 사건 다 베드로와 연관이 돼 있는데

(행9:32)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이렇게 나오죠? 사방으로 두루 행했어요. 사방으로.
아직까지 베드로는 여전히 예루살렘 중심을 생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루 행하게 하신 분은 우리가 앞서서 보면 누가 그렇게 하시죠? 성령의 인도하심이죠.
빌립 집사를 주님께서 인도하고 다니시잖아요. 그렇게 행하게 하신 거예요.
그 얘기가 지금 말씀되어 지는데, 어디로 가는가 하면

(행9:32하)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 내려갔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룻다에.
내려갔다라는 것은 예루살렘이 항상 중심이니까
예루살렘에서 위로 가든, 밑으로 가든, 좌로 가든, 우로 가든 다 내려가는 겁니다. 어쨌든.
고도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우리도 서울에 올라간다 그러지. 서울에 내려간다 안 하잖아요.
이게 평안도에 있어도 서울로 올라간다 이러죠. 한양으로 올라간다 이러죠.
그런 표현이라고 보시면 되는데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 내려갔더니’
왜 내려갔느냐? 이것은 앞부분에 보면 성령이 인도하시는 겁니다.
성령이 인도하심이니까 기도 해 보니까
“주님 룻다로 갑니까?” 이렇게 인도하는 게 아니에요.
물론 환상 가운데도 인도하시고요.
여러 가지 환경 속에서 주께서 그냥 이렇게 인도하신 거예요.
최종적으로는 무조건 인도하신 거예요. 결과론적으로는 무조건 인도하심입니다.

인도하셨는데 왜 인도하셨는가 보면 거기에 애니아라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 애니아가 중풍병자 걸린 지 8년째 상 위에 누워 있습니다.
이 사람이 성도는 아니에요. 제가 보니까 여기 본문에는 성도이다라고 안 나오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내려갔는데 애니아 성도라고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뭐 성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여기에서는 이 성도이든 아니든 지금 이 병자를 고쳐줬죠. 여기 보면

(행9:34)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행9: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사건을 보면서
‘자!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쳤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쳤습니다.
베드로도 고쳤습니다. 우리도 고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을 하거든요.
가장 악마적인 해석이죠.
왜 악마적이냐? 십자가가 나와야 되는데 능력이 나오니까 그래요.

지금 이 말씀의 의미는 이런 겁니다.
지금 룻다에 사는 성도들이 어떠한 믿음을 갖고 있는가?
이들이 성도라면 사복음서와 똑같아요.
이들이 성도라면 이 사건을 어떤 식으로 보느냐 하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사건으로 보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 지금 이 현장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는 겁니다. 성도라면.

그런데 성도가 아닌 자들은 어떻게 보느냐? 나오죠.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표현이 재미있죠. 모두 다 주께로 돌아갔어요. 주께로 돌아갔다 하니까
앞부분에 보면 ‘수가 더 많아지더라’ 돌아왔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 말씀의 의미가 앞부분에 더 들어가 보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돌아왔는데 성령 받는 자들은 많지 않았죠. 사마리아 교회 같은 경우에.

그러면 여기에서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권면’
이 내용을 그대로 적용시켜버리면
룻다에 사는 사람들 그 속의 교인들 중에도 어떤 부류가 들어있다라는 거예요?
가짜가 들어 있다라는 얘기입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에 중풍병자를 고칠 때
‘정말 놀라운 능력을 행하셨네. 저분이 우리의 메시아야. 저분이 구원자야.’
이런 능력을 행하면 다 따르지 않겠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잖아요.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단아 물러가라’
무당 들린 귀신을 막 쫓아내면, 그게 귀신 쫓겨났다고 사람들이 난리 법석을 떨잖아요.
‘그 귀신 쫓겨났다’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이 귀신 들린 거예요.

병 고치면 ‘주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렇게 가잖아요.
예수님이 병 고치러 오지 않았잖아요. 병을 고치려면 의사한테 가야 되죠.
이전에는요. 의사가 이렇게 의술이 발달하지 않을 때는 다 기도로 고쳤어요.
안 그러면 다 죽던가. 그러면 의사가 고치면 다 이거 신적 능력입니다.
어떤 의사가 그랬다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수술을 하든지 뭘 치료를 하는데 자기가 배운 바에 의하면
자기가 수술해서 낫게 하는 경우는 없대요.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래요.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실제로 그 원인과 결과를 따져보면 그 말이 맞거든요.

지금 이 사건을 이 교회 가운데
그 룻다에 있는 교회에서 베드로가 사건을 일으켰을 때
진짜 성도들은 무엇을 목격하게 되는가 하면
십자가 지신 주님이 친히 지금 일하고 계신 걸 목격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를 경외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성령의 권면을 보는 거예요.

또 하나는 조금 다른 장면이에요.
욥바로 내려가게 되는데 욥바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를 인하여서 베드로를 초청하는가 하면
가까운 거리니까 이 서쪽이죠. 팔레스타인 서쪽 지역인데
이 욥바에 다비다라는 여자가 있었어요. 여제자 성경에는 여자 제자.
아까 그 병든 자는 남자고요. 애니아는.
다비다는 여자인데 이 다비다라는 이름은 아람어고요.
이 아람어를 번역해서 헬라어로 번역하면 도르가라는 이 말인데.
도르가의 뜻은. 아주 이름이 예뻐요. 사슴이라는 뜻이랍니다. 사슴이라는 뜻인데,

이 여자가 여자 제자인데 예수 믿는 사람이죠.
이 사람이 무엇을 잘했는가 하면요. 선행과 구제를 너무 잘했어요.
그런 사람들이 있거든요. 사람들 중에 선행과 구제를 잘 하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어제 어떤 분과 통화를 했는데, 그 자기 교회에 어떤 장로님은 천성적이래요.
완전히 모든 걸 다 준대요.
신장까지도 떼줬대요. 아무도 모르는 사람한테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그렇게 배워온 거예요. 표현을 하자면.

이 다비다가 선행과 구제 사실은 같은 이야긴데
그 구제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돈은 별로 없었던 모양이에요.
돈은 별로 없고 부지런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사서 줬다 하지 않고 속옷과 겉옷을 보여준다 했죠.
여기에 보면 ‘함께 있을 때 지은 속옷과 겉옷’, 이 바느질이 뛰어났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이 도르가라는 여인은 돈은 별로 많이 많지 않았고.
돈이 많았다면 다 사서 줬겠죠.

돈은 별로 없고 부지런하고 그래서 선행과 구조에 힘쓰다가 죽었어요.
그러자 누가 난리가 나겠어요?
욥바에는 주 세력이 여기 성경에 보면 과부들이라고 볼 수 있어요.
성도들도 있고 과부들이 있는데
이 도르가로 인하여서 과부들이 교회에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일반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굳이 이 도르가가 죽었는데 베드로를 불러와서 살려달라 이렇게 요청할 이유는 없는 거거든요.
이 과부들이 도르가가 죽으니까 이들의 본심이 드러나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떡입니까?
예수님의 피 입니까? 정말 희안하죠. 성경에 보게 되면
분명히 과부들도 성도들이거든요. 이 도르가가 여제자였고요.
그럼 이 여자가 복음을 이야기 안 했을까요? 당연히 했죠.
그런데 이 도르가가 주로 한 일은 선행과 구제였다라고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복음을 잘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맞잖아요?
기도 지금 다 돌아가며 할 건데, 기도 잘 못할 수도 있거든요.
우리는 늘 상상을 하죠.
이 정도 되면 여제자라 했으니까, 막 청산유수처럼 복음이 확 나오고
그렇게 안 나와도 복음을 분명히 얘기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르가 여제자가 받은 은사는 이 선행과 구제에 대한 것들이죠.
그 역할을 감당한 겁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이제
이 여인으로 인해서 교회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겠죠. 과부들이 많았는데,
이 사람들이 교회에 왜 들어왔느냐?를 따져보면 지금 이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여인의 선행 때문이라는 거예요. 이 여인의 선행.
이 얘기하니까 또 그 선한 목자 교회 이야기가 생각나요. 그 사람이.
그 교회가 어려운 사람에게 1년에 만 명을 먹인다던가요? 하여튼. 10만 명인가?
엄청나게 훌륭한 일을 한답니다. 선행을.
그러니까 지역사회에서 굉장히 이렇게 좋게 소문이 난 모양이에요.
좋게 소문 난 게 지옥 가거든요. 나중에 보면.

지금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면 이 도르가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 뭘 생각하겠어요?
‘주님 이렇게 선행과 구제에 힘쓰는 여인을 왜 데리고 갑니까?’ 이 얘기거든요. 살려달라는 것은.
꼭 이거는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
마리아가 자기 오라버니 그 나사로가 죽으니까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가지고
‘사랑하는 자가 죽었나이다.’ 그 한마디만 딱 해요.
그럼 예수님께서 알아서 빨리 오셔서 병을 고쳐줄 거라 주실 것이라는 예상을 한 거죠.

믿음이고 뭐고 하나도 없는 겁니다.
다 알아요. 우리들보다 더 잘 압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십자가 복음 모르는 게 아니에요.
부활도 다 알아요. 예수님이 심판주 되신 것도 다 압니다.
그게 소용 없다는 걸 말씀하는 거예요.
‘아 그건 그들이고요.’ 그게 우리예요. 마르다와 마리아가 우리라는 얘기입니다.

사건이 닥치면 다 소용 없어요.
그러면 주님은 왜 사건을 주시는가?
소용 없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주시는 거예요. 우리 가운데.
평소에는 믿음이 좋은 것 같죠? 막상 도르가가 죽으니까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요.
사람이 없으니까 노골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살려주세요’ 이 얘기하지 않죠.

얼마나 이 사람이 예수를 믿고 선행을 힘썼습니까?
이 사람이 죽으면 복음이 더 전파가 안 될 수도 있고요.
‘이 교회가 이 욥바 지역 교회가 더 선한 일을 행하여서
주위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쳐서 교인 수가 더 늘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이 사람을 살려야 된다’라는 게 이들의 논리예요.
교회 안에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이 베드로가 가서 이 여인을 살려주죠.
우리의 관심은 ‘병 고쳤다 살렸다’에 관심이 있는데,
고 안목에서 좋아하는 자들은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원했던 그 하나님의 아들상과 일치되는 상입니다.

이 속에서 지금 주께서 죽은 자를 살리게 하시는 이 속에서 무엇을 볼 수 있어야 하는가?
사도행전 3장에 나오죠?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가 이 사람을 성하게 했다.
이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그의 십자가가 이 사람의 죄를 용서했다’라는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고스란히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이 본문을 왜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까? 설명할 이유가 없어요.
성령 받은 사람은 그렇게 보이고요.
성령받지 않는 사람은 육으로 흘러야 돼요.
심판성입니다. 심판성.

여전히 이 도르가가 살아났으니까
이들은 ‘구제가 중요하고, 우리에게 옷을 지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육의 사람이죠.

‘아!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옥 갈 이유구나.’
‘이것이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예수님을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구나.’
그러한 내막이 이 속에 깔려 있는 거예요.

그러면 왜 그런 내용을 다 이야기하지 않는가?
사복음서에 이야기 다 했습니다. 벌써.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이 예수님께서 사복음서에 능력을 행했으니까
이제 제자들도 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고,
‘제자들이 했으니까 우리도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 거죠.

주님의 십자가의 그 사건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그 십자가 사건이 반복된다는 건데.
다시 말씀드립니다마는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이 ‘유대인의 왕’이에요. 심판주입니다.
그분이 지금 친히 일하고 계시니까
진짜 주님의 교회들은 주를 경외할 수밖에 없고,
이것을 통하여서 성령의 권면을 받게 되는 거죠. 지금.

중요한 것은 이들은 이미 평안 안에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평안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권면이 주어지지만

이 평안 밖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더욱 더 멀어지게 돼 있어요.
베드로가 와서 병자 고치고 죽은자 살리니까 야 정말 예수를 믿어야 되겠다.
이런 모습 자체가 더 멀어지는 겁니다. 잘라내는 거죠.
그러니까 이 평안 안에 있는 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주를 경외할 수밖에 없는 거죠.
두 눈으로 목격하고 살아가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이 복음에 들어오는 자가 있고, 거부하는 자가 있을 때
주를 경외함을 보아야 되고, 성령의 권면이 우리 가운데 주어져야 되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은 이 복음을 들으면서 지식으로 배웠기 때문에.
자기가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가지고 복음을 전하면서 관람해요.
경외함이 없어요. 관람하니까. ‘그래 넌 지옥 가’ 당신은? 그래 ‘예수 믿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그 사마리아 여인처럼
팔딱팔딱이면서 기쁨이 없어요. 즐거움이 없단 말이에요.
이미 ‘아 옛날여~’이에요. 그 즐거움은 ‘아 옛날이여’ ‘나 그거 다 알아.’

계속해서 평안 안에 있기에
평안 안에 있음을 주님께서는 사건 속에서 계속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과거가 아니라
계속해서 지금도 똑같이 너희들 가운데 지금 역사하고 있다라는 것을 이 가운데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무슨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든든히 하고... 뭐 그게 어디에 나옵니까?
아까 민수기 11장을 제가 언급한 이유는
결국은 그 교회를 세워서 뭘 하겠다라는 자체가, 이런 본문들을
베드로가 가서 병자 고치니까 많은 사람들이 오더라. 
그다음 욥바에 가서도 죽은 자를 살리니까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신이 나서
이제 전도 더 열심히 할 거 아니에요?

그 최종 자리가 무엇이냐? 라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했던 왕, 열방과 같은 왕을 구하는 그 모습이에요.
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지금 그런 모습이잖아요.
교회가, 교회가 중심이에요.
교회를 방해하는 십자가는 가차 없이 잘라버립니다.
그 교회의 중심에는 목사도 있죠.
그 목사에 대해서 대적하고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종용히 불러서 잘라버리죠.
대형교회는요. 손에 피를 안 묻힙니다. 목사 손에 왜 피를 묻힙니까?
정치적 수완이 얼마나 뛰어난데.

어떤 교회는 이렇게 한 대요. 당회를 할 때
이 설교를 그분도 들으실 건데. 뭐 양해를 구합니다.
어차피 뭐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피를 증거하기 위한 재료니까.
당회를 하는데 제일 앞자리에 가장 연장자, 우리 어디서 많이 보던 거잖아요? 모든 교회가.
그다음 둘째 자리에는 점점 이렇게 하다가 제일 먼 자리에는 신참을 이렇게 배치를 한대요.
그건 뭐 당연하잖아요? 성경과 정반대로 하죠. 그죠? 높은 자리에 앉지 마라 했는데...

그런데 정말 재밌는 것은 신참들은 신참 장로들은 조금 개혁적이잖아요. 아닌 것은 ‘아니다’하고
그런 말을 이제 할 것을 대비해서 이 담임 목사가 자기 아버지도 목사였는데,
이 목사가 김홍도 또 누구죠? 그 3김 그쪽에서 부목사를 했대요.
그러면서 자기 아버지도 목사였는데 장로들한테 당하는 꼴을 너무 많이 본 거예요.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배워온 거예요. 이 장로들을 어떻게 다뤄야 될지...
원래 시집살이 당한 그 시어머니가 시집살이를 더 잘 시킨다는 이 말과 똑같은 거거든요.
배운 대로 이 인간을, 이 장로를 어떻게 다뤄야 되는가?

그래서 당회를 할 때 어떻게 하는가 하면 그 앞에 나무 십자가를 하나씩 준대요.
장로들 앞에 나무 십자가를 하나 두고,
말을 할 때는 나무 십자가를 붙들고 십자가 앞에서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우리가 볼 때는 웃기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요 인간들이 복음이 없으면요. 두려움에 휩싸여버립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에 휩싸이기 때문에
어느 장로도 젊은 장로도 이거 들고 얘기 못해요. 이야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그러면 외부적으로는 얼마나 훌륭한 교회입니까?
아무런 다툼이 없고 어떤 문제가 있어도 이 막강한 권력이 모든 입을 막아버리거든요.

대형 교회 되면요. 여러분 뭐 그런 교회 다녀보신 분들 있잖아요.
권력자들 검사도 있고, 뭐 판사도 있고, 별별 인간들이 다 있잖아요.
세상은 법대로 하는 게 없어요. 돈대로 하지. 힘대로 하지.
언론도 마찬가지잖아요. 돈으로 하잖아요. 힘으로 하고.
그런 식으로 교회를 만들어가는 겁니다.
그런 교회에서 무슨 십자가가 나오겠어요?
나무 십자가 대놓고 그 나무 십자가를 뭘로 이용합니까? 자기 권력으로 이용할 뿐인데.

여기에 나오는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권면, 성령께서 친히 인도하시는 교회죠.
주님께서 친히 날마다 새롭게 만드시는 교회. 이런 교회를 인간들은 원치 않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베드로를 어디로 보냅니까? 룻다로 보내고 욥바로 보내죠.
이미 거기는 교회가 만들어져 있으니까, 보내어서, 그 교회를 완전히 흔들어버립니다.
단순히 베드로만 그러냐? 아니에요.
그 속에서도 여전히 주님께서 이러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지금 이 베드로를 통해서 보여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지금도 친히 살아계셔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심판주의 일을 하고 계시는 그 증거물들이 바로 주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친히 일하시기에
이미 주님이 주신 평안 가운데서 주를 경외하게 하시고
성령의 권면 속에서 십자가의 피만을 자랑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corded by 구 성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