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9-05 12:39
사도행전 강해 38강 행 10:1-8 고넬료와 구제와 기도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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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0ih1T1qnRd0

관리자 21-09-05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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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8강 고넬료의 구제와 기도

부족한 저희들을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전국 각지에서 모이게 하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사랑, 그 십자가의 사랑을 증거하시기 위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입어 잃어버린 자로 찾은 바 되었고
잃어버린 자의 심정으로 살아가게 하심을 감사드리옵나이다.
우리의 인생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 좋은 일 모든 것들이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게 되어진다는 것을 인정하는 삶이 되게 하옵시고
오늘 또한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심을 위함임을 고백하며
죄속에 가득한 저희들의 삶 또한 주님의 십자가의 증인된 삶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전적인 계획 속에 있다는 것을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늘도 부족한 죄인,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16장 1절에서 9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16:1~9)
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6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7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은 우리의 계획을 나름대로 세우고 장래를 걱정하고 염려한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을 증거케 하기 위해서 우리의 인생을 친히 인도하시고
주께서 친히 우리의 인생들의 삶 가운데 환경을 조성하셔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말을 증거하도록
이끄심을 말씀을 통하여 들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말씀을 따라가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사도행전 10장 1절에서 8절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행10:1~8)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들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사도행전을 읽어가게 되면 덜컥 이렇게 걸리는 본문이 사도행전 10장입니다.
방금 우리들이 함께 읽어본 본문은 우리가 지금까지 들었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이 내용과 서로 상충된다는 그러한 느낌을 받게 되죠.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이달리야의 군대 장관 로마 군대 장관입니다. 백부장이죠?
이 백부장이 유대교로 들어 온 모양입니다.

이 사람을 평가를 할 때 이렇게 평가를 하죠.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한다’
’경건하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여전히 두려운 마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이라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기 때문에 단순히 개인적으로 율법에 순종하는 그러한 인생이 아니라
이 사람이 너무나 경건하기에 온 가족이 여기에 보면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렇게 나오죠.
이 당시에 로마의 군대 장관 백부장이기 때문에 가족들도 있었을 거고요.
자녀들도 있을 거고 사춘기에 있는 중2도 있었을 거고요. 그리고 종들도 있을 거예요.
그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를 경외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놀랍죠? 오늘날 그 우리들 가정을 보면 애들 말 안 듣잖아요.
왜 안 들을까요? 배고파서 좀 굶어봐야 좀 들을 건데,
너무나 풍족하기 때문에 들을 마음도 없죠.
우리들도 마찬가지잖아요. 자식들에게 다 해주잖아요.
어릴 때부터 안 해주는 게 뭐가 있습니까?

이 자녀들에게 자녀들이 부모에 대한 두려움이 없죠.
부모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당연히 없다라는 거고요.
자기가 가장 이 세상에서 잘났다라고 생각하고

이 백부장은 놀랍게도 이 모든 가정에 있는 모든 가족들뿐만 아니라
종들도 여호와를 경외하게 그렇게 가르쳤다라고도 볼 수 있고요.
본을 보였다라고도 볼 수 있고요.
뿐만 아니라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이렇게 나오죠.
그 당시에 뭐 가부장적 사회이기 때문에
남편이 구제하는 것에 대해서 아내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이런 말씀들을 합리화시켜주실지 모르지만
앞서서 이미 이 온 가족이 다, 온 집이 다 여호와를 경외했기 때문에
백부장이 구제하는 일에 대해서
그 아내가 되었던 온 가족이 모두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구제했다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항상 기도했다‘라고 하죠.
’기도를 했다’라는 것은 기도의 원천을 보면
성전을 향해서 기도했다고 볼 수 있고요. 자기가 죄인이라고 인정했다고 볼 수 있고
기도의 내용은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어쨌든 ‘항상 기도였다’
당시에 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그런 입장이었다면
그 나라를 기다리면서 기도했다라고도 볼 수 있는 겁니다.

이 정도 되면 구원받아야 되죠? 여러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기 자신만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가족뿐만 아니라 자기 집에 딸린 종들조차도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냥 단순히 자기들 집안 식구끼리 ‘우리는 여호와를 경외합니다’ 이런 것이 아니라
구제를 했다라는 것은
구약에 있어서 구약 율법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율법적 요소죠. 구제하는 부분.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대접하는 이일.

‘이 구제를 했다‘는 말은
다른 부분도 백부장이 제대로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다라고 보여지는 겁니다.
이 정도가 되면 구원받아 마땅하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만일에 예수 안 믿는 사람 중에 너무나 착하게 살고
남을 구제하면서 살고 선한 마음으로 악한 짓 안 하고 정직하게 사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저런 사람이 예수 믿으면 저런 사람이 예수를 믿어야 되는데‘
그런 생각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갖게 되거든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뒷부분이 없다 치면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만이 아니고
이 뒷부분을 다시 집어 넣어 보면 하나님의 생각도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의 사자가 환상 중에 밝혀 보여 이 고넬료를 부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부르는데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
방금 제가 말씀드린 그 내용대로죠.
하나님의 사자가 이제 고넬료에게 나타나서 하시는 말씀이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 기도와 구제가 상달되었기 때문에
이제 뒤에 보면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서
‘너를 복음 속으로 너를 구원하겠다’ 이러한 느낌을 우리에게 주고 있죠.

그래서 사도행전 10장에 와서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이 본문을 읽게 되면
어떤 생각을 갖게 되는가 하면?
구원이라는 것은 행위 + 믿음.
그러니까 행위 + 은혜, 이렇게 이제 이해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구원 얻을 만한 자격 조건이 백부장 고넬료에게는 있다라는 겁니다.
이게 성경대로 보는 거잖아요.

이게 성경대로 맞죠.
분명히 천사가 나타나서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하였다’
그래서 ‘이 욥바에 있는 피장의 집에 머무르고 있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서 그를 청하라’
이렇게 지시를 내리잖아요.
성령이 없게 되면 성령을 받지 않는 사람이라면
방금 그런 식으로밖에 이 본문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밖에 없어요.
순서대로 고넬료가 경건하였고
온 집안이 여호와를 경외했고 그리고 구제와 기도에 힘쓰는 사람
그런 모습을 보였기에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오셨다.
구원은 이런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으신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누가복음 7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역시 로마 군대 장관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등장을 하는데
이 사건은 가버나옴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방금 사도행전은 가이사랴 그쪽에서 일어난 사건이고요. 여기에 보면

(눅7:1~9)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쌔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눅7: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여기에서는 백부장이 어떠한 사람인가가 먼저 이렇게 소개가 되지 않는데
한 모습을 통해서 이 백부장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고 있어요.
여기에 보면 ‘사랑하는 종’이라고 표현을 하잖아요
종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죠. 종은 부려먹지
자식은 사랑하죠? 자식은 사랑하는데 종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건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
백부장은 단순히 종이 죽으면,
노동력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것이 아까워서 이 종을 살리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종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입장에서는 이 병들어 죽는 것이 너무 안타까운 겁니다.
백부장의 입장에서는 죽는 것은 안 좋은 거고 병든 것은 안 좋은 거고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이 선이라 생각하는 거죠.
이 백부장도 우리가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이 고넬료처럼 유대교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뒤에 보게 되면

이 사람이 이제 예수님이 가버나움 지역으로 오신다는 그 소문을 듣고
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이 상황 속에서
‘예수라는 분이 죽은 자도 살리고 병자도 고친다’라는 그런 소문을 들었기에
자기가 직접 가지 않고 유대인 장로들을 보내어서 몇을 보내어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유대인 장로 몇이죠?
유대인 장로, 장로 몇이라고 그러면 좀 목이 빡빡한 사람들이거든요. 표현을 하면
그런데 이들이 이 백부장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가서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기꺼이 응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그 이유는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나와 있어요.
예수님께 와서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을 고쳐주세요’라고 이렇게 구할 때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죠. ‘이 일을 하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다’
‘예수님! 당신이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을 고쳐주는 것은 이 백부장에게는 합당한 일’이라는 거예요.
당신이 만일에 하나님께로 왔든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가 되었든지
그러하다면 ‘이 백부장이 원하는 것은 무조건 들어줘야 된다‘라는 것이 이 장로들의 생각이에요.

그 이유가 무엇이냐? 뒤에 보면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다‘ 이렇게 말을 해요.
유대민족을 사랑해요. 점령군인데. 유대교로 들어와 버렸죠? 완전히
유대인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위해서 회당까지 지어줍니다.
돈을 좀 많이 쓴 거예요.
지금도 예배당 하나, 이렇게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들잖아요.
세를 얻으려 해도 돈이 많이 들지만, 그런 것까지 다 해준 거예요.
이 사람이 살아가는 그 평소의 모습이 어떠한 모습이냐라고 할 때는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이 백부장의 기도는 예수 당신이 마땅히 들어줘야 된다‘라는 겁니다.

이 유대인들의 이 신앙, 이 장로의 이 신앙을 누가 고스란히 갖고 있는가 하면?
이 백부장이 고스란히 갖고 있어요.
자기가 나름대로 여호와 앞에서 여기에서 나오지 않지만
여호와를 경외하고 종들을 사랑하고 여기에 보면 ’유대인들을 사랑했다‘ 하잖아요.
’사랑했다‘라는 말은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구제도 하고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많이 했다라는 거거든요.
이러한 일을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만하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 와중에 이 그리스도라 하는 이 예수라는 사람이 이 가버나움 동네로 왔으니까,
사람을 이 장로들에게 청하여서 가서 자신의 사랑하는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건 마치 자기가 권리가 있느냥, 예수님께 요구하는 모습입니다.
주도권이 백부장에게 있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지금 장로들도 마찬가지죠.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셔야 된다라는 것이 지금 유대인 장로들의 사고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요청에 대해서 두말하지 않고 따라갑니다.
따라가는 중에 어떤 일이 생기는가 하면
이 백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을 드리죠.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앞서서 장로들을 보냈을 때는 자기가 가는 것이 아니라 장로들을 보내오면 유리한 점이 있죠.
이방인과 함께하면 더러워진다는 그런 어떤 규례들이 있었으니까
거기에 대한 존중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고
달리 표현하면 자기가 백부장이니까 장로들만 보내어도
자기가 직접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와서 자신의 원함을 들어줄 것이라는
뭐라 할까요? 뻔뻔스러운 당당함이라고 할까요? 그런 태도를 보였다면

지금 벗들을 보내어서
예수님께 말씀드리는 내용은 완전히 자신이 정복된 상황에서 이 벗들을 보낸 거거든요.
뭐라고 다시 한번 보면.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시면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당신이 내가 요청하면 우리 집에 와서 내 사랑하는 병자를
내 사랑하는 종의 병을 고쳐줘야 된다는 게 백부장의 생각이었는데
이 장로들이 간 사이에, 장로들이 예수님께 요청하는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혼자 스스로 생각해 보니까 ‘아 이건 아니야’ 그렇게 된 걸까요?

우리는 주님이 하시는 일이,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의 어떤 영역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이 사이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보려고 하지 않죠.
주님께서는 이 백부장을 통하여서 예수님 자신이 어떠한 분인가를 지금 소개하고 있어요.
자기 증거를 하고 계시거든요.
백 부장이 왜 갑자기 이런 태도를 취하느냐? 그 원인이 누구에게 있느냐?
분명히 앞서서 백 부장은 이러한 태도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런 태도로 어떻게 바뀌었느냐라는 겁니다?
그 태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백부장이 자기 반성을 거쳐서 자기 부인을 거쳐서 이렇게 태도가 바뀐 것이 아니라
그 뒷부분에 보게 되면 백부장의 고백을 통해서 보게 되면
백부장이 어떻게 이렇게 바뀌었는지가 나옵니다. 좀 더 보겠어요.

(눅7: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왜냐하면 백부장은 상대가 심판주임을 알았어요.
십자가 지신 심판주임을 알기 때문에 나아가기를 감당치 못하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갔을 때
물고기를 베드로가 가득 잡았을 때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눅5:8)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는 것과 같은 의미예요.
(사6:5)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것은 마치 이 세례 요한이
‘나는 그의 신들메,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다’라는 그런 표현과 마찬가지입니다.
(요1:27)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궁금한 게 이런 거잖아요.
굳이 이미 십자가 지신분이 심판주되심을
예수님에 대해서 알았다면 ‘이런 병을 낫게 안 해달라’ 해야 되잖아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이 이전의 백부장은 자신의 여종이 사랑하는 여종이 병 낫기를 원해서 예수님을 초대했다면
지금은 말씀만 하옵소서.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지금 자기를 소개하시잖아요. 자기 증거를 하심을 마음껏 펼치세요. 라는 얘기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누구신지를 내 하인을 낫게 하셔서 마음껏 자신을 증거하세요‘라는 차원에서
지금 이 백 부장이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 예수님은 창조주시니까 하나님이시니까, 말씀만 하시면
창조주가 우리 집에 들어오는 걸 내가 감당하지 못하고
말씀만 하면 얼마든지 낳을 수 있으니까 낫게 해 달라’ 이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인간의 관심은 뭐 보세요.
결국은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자기 소원 들어주는 거잖아요.
백부장은 자기의 바램과 자기의 소원이
완전히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는 그 일에 함몰당하는 겁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이런 내용들이 안 보이죠.

‘말씀만 하옵소서 낫겠나이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 십자가의 피능력으로 사망에서 생명을 옮기는 그 죄를 용서하는
본인이 대속물이 되셔서 그 사랑을 이렇게 덮어씌우는
그분임을 증거하는 차원에서 지금 이 일을 하옵소서 하는 거예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이 백부장의 이런 태도를 의아해 할 수밖에 없어요.
여기에 친구들 나오고 장로들이 나오잖아요.
장로들이 주님을 알았다. 그런 게 전혀 없어요. 이들은 그냥 이용될 뿐이에요.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걸 보면서 참 억울하겠다.
장로들도 억울하고 친구들도 억울하고, 아! 이 사람들은 구원을 못 얻어요. 여기에 보면

이 백부장을 구원하기 위해서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 주님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긍휼을 베푼 이 백부장,
이 백부장을 위해서 지금 이 장로들도 동원되고 친구들도 동원되는 거예요.

아마 이 본문을 설교할 때 친구들을 주제로 잡고 설교를 하면 아주 재미있겠죠.
이들은 백 부장 이야기를 듣고 다 가서 얘기를 해요. 뭘 전합니까?
‘제가 우리 집에 오면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이 말을 고스란히 전하죠.

전달한 본인은 그 말씀의 의미를 전혀 몰라요. 꼭 오늘날 목사들 같죠.
목사들이 성경을 있는 그대로 설교를 하거든요.
있는 그대로 설교를 하는데, 자기는 전해놓고 그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라요.
자기들 방식으로 이해를 하죠.

요즘 한국 교회에 그 유명한 찬양이 있다는데, 제가 뭐 그런 걸 안 들으니까 알 길이 없는데
어떤 분이 저한테 이렇게 알려주는데 찬양 제목이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제목이 들어보셨어요? 들어보신 분 있나요? 아! 예, 들어보신 분 있네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성경에 다 있는 이야기예요.
‘주께서 참 소망이 되시느라’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이 마징가 제트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거든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은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게 하시고’ 너희들 까불지 말라는 거죠.
나의 비전이 하나님의 비전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성품이 되게 하시고’
나 예수라는 거예요. 너희들 감히 날 건드리지 말라는 거죠.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게 하시기를’
너희들 다 죽었어, 검찰총장이 되고 싶은 거예요. 대통령도 감옥에 집어넣는

들어보면 다 맞는 말이거든요. 근데 얼마나 사람들을 위로하는 말이에요.
사람들을 위로하는 이런 위로는 악마가 하는 위로죠. 맞는 말을 다 해요.
‘예수님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 그리스도의 형상까지 자라라‘ 이런 표현들이 나오니까
성경에 있는 이야기는 다 해요.

사실은 이 내용을 제대로 보게 되면
’주님 함께 죽게 하옵소서‘ 이거거든요.
사실은 근데 어느 사람들이 이 찬양을 부르면서 주님과 함께 죽게 하옵소서.
이 세상에서 거짓처럼 살게 하소서. 거지 나사로처럼 살게 하소서.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게 하옵소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게 하옵소서.
이런 식으로 이 이런 찬양을 하겠어요.
그럴 것 같으면 아무도 안 하죠.

성도가 뭐 이 세상 살아갈 힘이 없어요? 원래 없는데
원래 처음부터 은혜로 살잖아요.
그러니까 기독교를 예수를 하나님을 성령을 이 부처처럼 만난 거예요.
나를 도와줄 우상, 우상 예수인 겁니다.

교회를 찾아올 때 자기가 어렵고 괴롭고 힘들 때 찾아왔잖아요.
그러니 상대는 예수님은 나의 힘들고 괴로움과 슬픔과 그 뭐랄까요?
이 세상에서 짓눌리는 그러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분으로서 예수님을 상상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니까 그러한 능력도 있고 하나님의 비전도 있고 뭐 다 나오니까
자기를 우상으로 섬기는 인간이기에 얼마나 안성맞춤인 성경 내용이 그대로 들어있겠어요.
처음부터 출발 자체가 십자가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어떤 찬양을 부르면서 자기 위로를 삼는 겁니다.
복수심에 불타는 겁니다

친구들이 가서 백 부장의 말을 전하지만 이들은 자기들이 전하는 내용이 뭔지를 몰라요.
그러면서 이제 이런 말을 전하죠.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대로 가라 하면 가고 저대로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들은 이것을 하라면 하나이다’ (눅7:8)
이렇게 고백을 해요.

이 고백을 방금 일어난 이 사건,
지금까지 이 백부장이 유대교로 들어와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에도 힘쓰고 유대인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회당도 지어준 이 모든 일들,
뿐만 아니라 자기의 하인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된 것
그리고 그 죽게 된 상황에서 자기가 이 사랑하는 하인을 사랑하니까 장로들을 보내어서
유대인 장로들을 보내어서 예수님을 청하여서 이 병을 낫게 해달라는 이것과
그리고 친구들을 보내어서 수고하지 마옵소서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제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이 모든 내용들이 지금 이 말씀(눅7:8) 속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주되심,
심판주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하셨다라는 얘기예요.

나는 유대교로 들어왔는데 그 들어와서 나의 믿음을 소유한 것도 주께 하신 거고요.
이 믿음이 가짜 믿음, 엉터리 믿음이라는 것을 주께서 알게 하셨다라는
내용까지 다 들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이 백부장은 주님이 시키는 일을 그대로 한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시키신 일을 고스란히 했으니까
오늘도 권사님이 기도하셨지만 그 기도의 내용과 동일하게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의 명령에 의해서 되어졌다라는 얘기입니다

지금 백부장은 그 십자가의 능력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거예요.
아마 이 백부장 외에는 이런 식으로 보겠죠?
가라면 가고 오라고 오라면 오니까 예수님이 주님이다, 창조주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병 낫습니다. 이런 식으로밖에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눅7:9)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 이 말씀은
‘이런 믿음을 가진 자가 없다’라는 겁니다.
왜 없는 거고 하면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의 피로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이런 믿음은 이스라엘 중에 찾을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 친히 믿음을 주셔야만 이러한 믿음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면 그 믿음은 주님이 받지 않아요. 다 가짜 믿음입니다.

백부장의 첫 번째 믿음은 자기로부터 출발한 믿음이죠.
구약에 근거해서, 말씀대로 살아가고 선하게 살아가니까
하나님은 이런 자를 돌아보시지 않겠느냐? 내 소원을 당연히 들어주시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해서 장로들을 보냈는데

주님은 내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 아니라
내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는 이러한 죄인 속에 들어오셔서
십자가의 피로 죄를 용서하시고
주님의 소원을 이루시는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을 이루시는
그 일 속으로 자신을 집어넣어버리는 그러한 분임을 이 백부장이 알게 된 겁니다.

이런 백부장의 이 믿음,
이 믿음을 지금 오늘 사도행전 10장에서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라고 보시면 돼요.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백부장이나
(사도행전)10장에 나오는 고멜료라는 이 사람의 어떤 모습이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고넬료의 이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냐라고 할 때는
‘육이었는데 영으로 바뀌었다’라는 거예요

조금 더 이제 어렵게 한번 해봅시다.
방금은 제가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백부장의 예를 들었는데
앞서서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 나오죠.
사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사울이 어떤 사람일까요?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한 사람이었죠.
왜 예수 믿는 자를 핍박했습니까? 조금 더 쉽게 질문을 할게요.
그 사울이 살아갔던 삶의 모습과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의 모습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사울의 삶의 모습이 고넬료의 모습에 뒤질까요? 뒤지지 않을까요? 뒤지지 않습니다. 절대
우리는 선입견을 갖고 있죠. 사울은 예수 믿는 자를 핍박했으니까.

그러면 이 고넬료는 예수 믿는 자를 핍박 안 했을까요?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겼잖아요.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했다면 예수 믿는 자를 당연히 핍박을 했겠죠.
아니면 만일에 이 가이사랴 지역에 빌립 집사가 같기 때문에
빌립 집사로부터 복음을 듣고 다시 차후적으로 들어갔다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내용은 지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이 고넬료의 어떤 그 모습은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그 원인을 갖고
지금 이 베드로를 만나게 하신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빌립이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약간 거리를 둬야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하다면 이 고넬료의 모습과 사울의 삶이 어떨까요? 이 비교해 보면
사울도 뭐라고 합니까? ‘나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했잖아요.
그러하다면 사울이 구제에 힘썼을까? 힘쓰지 않았을까요? 당연히 힘썼죠
아! 그거 기본이잖아요? 기본.
그럼 기도 안 했을까요? 당연히 기도를 열심히 했죠.

그러면 그 사울과 고넬료를 비교해 보면?
사울의 그 행위는 하나님께 상달이 안 되었고
이 고넬료의 행위는 하나님께 상달이 되었다라는 논리가 되죠.

이걸 어떻게 봐야 되느냐는 겁니다?
‘상달되었다‘라는 말은 주님이 찾아오시게 되면 어떤 의미로 바뀌어버려요?
’사울이 주님을 만난 것과 똑같은 짓이였다‘라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자신의 어떤 사랑하는 것,
자기의 종을 사랑하는 것, 유대인들을 사랑하는 것, 구제하는 것, 회당을 지어준 것
이것이 하나님 상달이 된다라고 생각한 거예요. 쉽게 말하면.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까 주님께서 작업을 하셨죠.
성령을 주시니까, ’그 생각 자체가 십자가의 원수로서 한 생각이었다’라는 것이 밝혀진 겁니다

사울이 이 백부장 고넬료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만나게 하니까
이 사람은 구제와 기도를 힘썼으니까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이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게 해주실 자격 요건이 갖추어졌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칼빈 같은 경우에도 그 주석을 보면 이 부분을 부정하지 않아요. 긍정해요, 긍정.
그러나 부족하다라는 거예요.
여기에서 플러스 뭐를 해야 되는가 하면 ‘이 복음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표현을 하면

이게 말이 안 되는 게 성령을 받거든요.
이 고넬료가 성령을 받아요. 성령을 받아버리면 십자가 영이 들어버리죠.
십자가 영이 들어와버리면
자신이 한 모든 일들은 십자가에서 죄가 되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은 주님이 하신 일이 돼버리죠.
그러면 자기가 한 일이 부정된다 얘기입니다.
오히려 자기의 행위가 복음의 걸림돌이 된 거잖아요

사울이 그런 고백을 하잖아요. 사도 바울이.
이 자신이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구제도 하고 십일조로 하고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한 이유는
주님이 찾아오시기 전까지는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시니까
모든 것들이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는 짓이었다라는 것을 고백하잖아요.

고넬료도 다르지 않습니다.
고넬료가 지금 이렇게 한 모든 일들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한 것이었어요.
성령을 받기 전에는 그걸 몰라요.
이러한 사건이 왜 등장되느냐라고 하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은 이런 고넬료 같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어떤 인식을 하는가 하면?
성령이 없으면,
이런 사람은 마땅히 구원받아야 됩니다.
이런 사람을 구원 안 해주면 누가 구원합니까?
이런 논리를 인간들이 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누가복음 7장에서 미리 보여준 겁니다.
저자 누가가 동일하잖아요. 사도행전도 누가가 썼고요.
이걸 완전히 뒤바꾸어서 보여주는 겁니다.

특히 이 9장에서 사울을 만나시는 사건과 10장에서 고넬료를 만나는 사건,
사울은 유대인이고 고넬료는 이방인이죠.
사울이 강조되어지는 것은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게 강조된다면
고넬료는 이 구제와 기도에 힘쓰는 자를 강조하고 있죠.

그러면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 같이 사울이 구제와 기도에 힘 안 썼어요?
육으로 난 자들은 말씀이라는 자체가 심판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증가하기 때문에 육으로 난 자들은 지옥 보내야 됩니다. 반드시

아무리 이 말씀을 읽어도
십자가가 밝히 보이지 않고
고넬료의 구제와 기도가 밝히 보인다면 육으로 난 자입니다.
아까 그런 식으로 만일에 표현이 된다면
그러면 어떤 식이 되는가 하면 세례와 창기는 반드시 지옥 가야 됩니다.
저런 인간은 구원받으면 안 된다, 이 논리가 되거든요.

고넬료와 같은 사람은 당연히 천국 가야 된다면
고넬료와 같지 않고 이 구제와 기도에 힘쓰지 않는 악한 짓만 하는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 같은 경우에는 이거는 지옥 가야 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십자가가 이 우리 속에 들어오지 않으면 그 보는 안목 자체가 이런 식밖에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걸로 판단하는 거죠.
십자가라는 그 뭐라 할까요? 안경을 갖고 보게 되면 그 보이는 모든 것들은 악한 겁니다.
십자가가 자랑 되어지고 십자가가 높여지려면 죄 아닌 것이 없어야 되잖아요.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의 이 마음은
에덴 동산으로 들어가는 그 동편의 문을 뚫고 갈 수 있는 방식이
저쪽에서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만들어진다라는
들어갈 수 있다라는 것을 이 배제하고 그건 전혀 배제하지 않더라도,
어쨌든 나의 선악의 행위를 통하여서 선한 행위를 통하여서 그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라는
그러한 생각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이러한 마음은요. 성령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이 육 가운데 사는 겁니다.
지금 말씀은요
주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지 성령받지 않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에요.
성령받지 못한 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를 못하죠.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시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이러한 마음들이 있다는 거죠.
아! 내가 이제 복음을 알았으니까 그걸 또 선으로 집어넣어버리거든요.
나는 내가 부인이 되니까 나는 이제 진짜 이 참 복음을 제대로 이해했으니까
그걸 선이라는 것으로 선악에서 이게 선이라고 바꿔치기 하면
그것이 결국은 원인이 되어서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다’ 이런 생각을 인간들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고넬료의 구제와 기도를 들으시고 찾아오신 것 같지만
주님이 찾아오시는 경우는 딱 한 번 이 경우밖에 없죠?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이죠.
성령을 받게 되니까
이 찾아오심 자체가 십자가 속으로 내몰기 위한 찾아오심이었다라는 것이 밝혀지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서 이방인이라는 그러한 특수한 경우가 지금 이렇게 보여지고 있습니다마는
이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10장을 볼 때
9장에 나오는 사울을 찾아오신 주님과 이 고넬료를 찾아오신 주님이 같은 사건으로 봐야 돼요
사울은 나쁜 놈이고 고넬료는 착한 놈이고,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나 9장에서 찾아오신 주님과 10장에서 찾아오신 주님이 동일합니다.
똑같은 거예요.
‘고넬료야!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런 식으로 찾아오게 돼 있어요. 성령이 오시면
십자가가 나와야 되는데 자기의 구제와 기도가 나오잖아요.

주님은 우리의 구제와 기도를 듣지 않죠.
모든 것이 성도는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돼 있고 예수의 이름으로 구제하게 돼 있죠.
그렇게 되어지면 예수의 이름으로 되어진다면 구제와 기도 모든 것들은 죄 뿐입니다. 죄
구제와 기도가 죄라고 생각하는 인간이 어디에 있겠어요?
이 고넬료도 마찬가지죠. 얼마나 선한 사람입니까?

어제 어떤 분하고 통화를 하는데 본인이 이제 교인들을 보면 너무 안타깝대요.
본인이 다니는 교회가 목사가 부처니까 교인들도 다 가면을 쓰고 있잖아요.
가면을 쓰고 있으니까 너무나 착하고 너무나 선한 마음이 있고
그래서 제가 그분한테 그런 말씀 드렸어요. 가면 쓰고 가면 놀이 하는데
마침 또 오늘 고넬료가 나오니까 고넬료가 자신이 가면 썼다라고
자기가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죠.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몰라요.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그 사울을 주님께서 만나주시기도 전까지는
자기가 악마라는 것을, 마귀의 종이라는 것을 눈꼽 만큼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성도가 세상을 보는 안목은 주님이 세상을 보는 안목이 되어야 되죠.
그렇게 된다면 세상은 다 악마들 뿐입니다. 마귀새끼들 뿐이에요.

그런데 어느 누가 자기 자신을 마귀의 종이라고 인정하겠습니까?
성령 받은 자뿐이에요.
고넬료처럼 살고 사울처럼 율법의 의로는 흠이없게 살아간다면
어느 누가 자신을 이 마귀의 앞잡이라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무리 자기 자신을 둘러봐도 악한 게 없어요.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그거잖아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 자신을 아무리 둘러봐도 악한 게 없어요.
율법대로 살아가고 말씀대로 살아가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구제하고
자기가 자기의 기준이 되니까. 율법이 기준이라고 하지만
율법 자체가 눈을 가리게 만드는 거거든요.
사도행전 7장 할 때 말씀드렸잖아요.

이사야 선지자가 보냄 받은 이유가
눈을 가리게 하고 마음을 어둡게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잖아요.
(사6: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그러니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미 눈이 어두워진 상태에서
마음이 이미 어두워진 그 상태에서 이 말씀을 대하는 겁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고.
소경이 아무리 성경을 연구해도 뭐 알 수 있어요. 내용을.
유대인들의 해석은 바리새인들의 해석은 소경의 해석법이에요.

그 모습에 앞장선 자가 바로 이 사울이죠. 그 사울의 모습을 보게 되면
어느 누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베냐민 지파고
이런 얘기를 쭉 하면, ‘야! 정말 당신은 구원받을 만하네요’
우상 숭배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제거시키잖아요.
그게 선지자들이 원했던 바 아닙니까?
엘리아가 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칼로 죽여버리잖아요.
지금 사울이 하는 일이 그 일이거든요.
남은 자들 가운데 우상 숭배자가 있다면
자기는 엘리야의 심정으로 이 우상 숭배자를 제거하겠다라는 겁니다.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는 남은 자들 입장에서는 그 사울의 행위가 얼마나 의로운 행위겠어요?
그런 모습을 보일 때 사람들은 ‘야! 저 정도 되면 주님이 찾아오셔야지’
찾아오셨죠. 찾아오시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가 한 모든 일들이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는 일이었다는 겁니다.
정말 신기한 일이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이유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연구한다’ 이렇게 이야기가 돼요.
이 말귀를 사람들은 못 알아듣죠.
인간 자체는 이미 선악과를 먹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마귀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말씀대로 가더라도 그 말씀대로의 마지막 자라는 자기가 있어요. 자기가
자기를 섬기기 위해서 말씀을 연구하고
자기를 섬기기 위해서 말씀에 순종하는 겁니다.
그것은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에요.

성령이 오지 않으니까 이것은 다 주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죠.
방금도 아까 뭐 찬송가, 제가 뭐 찬양 한국에서 핫한 찬양을 가사를 불러줬지만
‘이건 다 나를 위한 게 아닙니다. 다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겁니다.’ 이렇게 얘기할 거 아니에요.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게 하시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게 하시고
성령님의 능력이 나의 권능이 되게 하시고, 이건 나를 위함이 아니라는 거죠
찬양 부르는 사람들 보세요. 얼마나 겸손한지 몰라요.
주님이 찾아오시기 전까지는 자기가 얼마나 주님의 핍박자인지 대적자인지를 알 수가 없는 겁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백부장도 마찬가지죠.
사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고넬료도 마찬가지예요.
만일에 고넬료가 자기의 구제와 기도로 구원을 얻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괜히 지신 거예요.
그것이 조금이라도 원인이 되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100%가 아니라 99.99%밖에 안 돼요.
요즘 흔한 거 있잖아요. 그 반도체에 들어가는 순도가 99.99999%, 100%는 아니거든요.
그건 그 인간들은 그 0.0000 10조 분의 1, 1%를 집어넣고 싶은 거예요. 인간들은
그 이유가 무엇이냐 영점 10조 분의 1을 딱 집어넣으면
그 10조 분의 1이 99.999%를 다 삼키게 돼 있거든요

선물인지 모르죠. 여전히 이 이방인 고넬료 같은 경우에도 구약에 속했잖아요.
이렇게 하면 당연히 구원을 얻을 줄 알았죠.
그런데 성령을 받아버리니까 구원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율법대로 살아가는 그 모습 자체가
누구를 핍박하고 누구를 죽인 짓이었느냐라는 것이 밝혀지잖아요.
그것은 이미 9장에서 다 드러났죠. 10장에는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내 이 모습이
바로 예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살해하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복음을 전해 보면 그런 사람이 있거든요.
저 사람은 법이 없어도 사는 사람이다. 나는 예수 없어도 얼마든지 착하게 살고 있다.
당연하죠. 비교 대상이 인간밖에 없으니까
비교 대상이 십자가 진, 주님이라면
󰊝뭘 해도 죄가 되는데
󰊞뭘 해도 지옥가도 마땅하고
󰊟뭘 해도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그 짓거리가 되는데
비교 대상 자체가 들어오지 않았잖아요.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하고 그러한 말을 하는 겁니다.

가장 악마적인 사람이 누구냐? 바로 백부장 고넬료 같은 사람이에요.
가장 악마적인 사람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울 같은 사람입니다.
그럼 이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었습니까? 그들이 원한 바가 아니었어요.

앞서 누가복음 7장에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온다’ 하죠.
십자가 지신 주님이 예수님이 주님입니다.
그 주님이 자신의 주되심을 증가하기 위해서 긍휼의 그릇으로 고넬료를 부르신 거예요.
사울도 마찬가지죠. 긍휼의 그릇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기 위해서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도 있고요. 임금들 앞에 세우기 위해서 이 사울을 부르신 겁니다.
여기에는 그 어떠한 사울을 위함이 없고 고넬료를 위함이 없어요.

백부장은 빠져버리죠. 자기는 그 역할을 하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누가복음 7장에는 이름, 이름도 안 써놨어요. 백부장 이름도 안 써놨어요.
이게 아주 중요한 겁니다. 사도행전 10장에는 써놨잖아요. 이름을
사도행전의 이름이 좀 등장하거든요. 9장에는 사울이 등장하고 10장에는 고넬료가 등장하고

그 정도 되면 누가복음 7장에서 이름을 기록해야 돼요.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면 그 이름이 대대로 기록해야 돼요.
이걸 갖고 소설을 쓴 사람도 있는데.

이름이 없어요.
그러면 여기에는 이름을 왜 기록했느냐? 부정하기 위한 이름이죠.
고넬료가 이 십자가 속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고넬료가 되죠.
사울은 나중에 바울로 바뀌죠.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그 내용을 지금 이 속에 그대로 담아놓은 거예요.

주님이 찾아오셔서 십자가의 피능력으로 바꿔주지 아니하면
인간들이 보기에 충분히 구원 얻을 만한 자격 요건이 갖춰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로 악마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아직도 납득이 안 되죠.
왜냐하면 천사가 찾아와서 ‘네 기도와 구제가 상달되었다’라고 했으니까.

십자가 사건이 먼저입니다.
그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이 고넬료는 이 모습을 보여준 거예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앞에 서게 되니,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들이 죄임을 알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에 그 선물을 주셨기에
저희들에게 믿음을 보이게 하시고.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로 우리들을 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나의 의로움을 세우는 인생이 아니라
나의 의로움을 뚫고 들어오셨어
주님께서 주님의 피로 다 이루신 주님의 의만을 자랑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corded by 구 성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