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9-12 20:20
사도행전 강해 39강 행 10:9-22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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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1-09-13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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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39강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을 불러주시고 모이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자 했습니다.
때로는 정의롭게, 때로는 착하게,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아왔음이
십자가 앞에서는 죽음의 길임을 알게 하여 주셨습니다. 
저희 속에 저주의 피가 흐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의 피가 저희에게 덮힘으로
주님의 하신 일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살게 해 주신 걸 감사합니다.
저희가 또 이렇게 안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또 저희 건강을 챙기고
제 자신만을 돌아보고 또 저희 주변에 가족, 회사, 저희 일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땅에 매인 자임을 저희가 또 알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성령께서 홀로 일하심으로 저희가 무익한 자요.
무능한 자임을 알게 해 주심을 인하여, 그것을 인하여 감사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말씀을 전하는 이와 듣는 이에게 동일한 은혜를 주실 것을 믿사오며
이 모든 것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16장 10절에서 15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16:10~15)
10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은즉 재판할 때에 그 입이 그릇하지 아니하리라
11 공평한 간칭과 명칭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추돌들도 다 그의 지으신 것이니라
12 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
13 의로운 입술은 왕들의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히 말하는 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느니라
14 왕의 진노는 살륙의 사자와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쉬게 하리라
15 왕의 희색에 생명이 있나니 그 은택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으니라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세우시고
주님의 죽으심 속에 저희들을 합류시키셔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고
죄에서 자유케 하셔서 우리의 인생을 의의 종으로 삼으시고
주님의 죽으심만을 증거하는 자로 만들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사도행전 10장 9절에서 23절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행10:9~23)
9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 시더라
10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15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23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가이사랴에 있는 백부장 고넬료와 베드로가 만나게 되어진 그 과정을 지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먼저 백부장 고넬료에게 찾아가서 
‘욥바에 있는 피장의 집에 지금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찾아가라.’ 이렇게 알려주셨고
그 이튿날 고넬료의 종들이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지금 욥바를 향하여 가고 있는 그러한 상황입니다.
거의 다 도착했을 그 즈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지금 여기에 보면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다’ 이렇게 말하고 있죠.
‘시간은 제 육시더라’ 이렇게 흔히 이야기를 합니다.
유대인들은 당시에 하루에 세 번 기도를 했는데
3시, 6시, 9시, 3시는 오전 9시고, 오늘날로 말하면
6시는 정오 12시 정도, 9시는 오후 3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이전에 사도행전 3장을 볼 때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 그러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오후 세시 경에, 세시죠. 구시. 기도 시간.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시간을 그렇게 정해두고
그 시간에 맞추어서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든지 아니면
성전과 거리가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은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든지 그렇게 했던 모양입니다.

율법에는 ‘하루에 세 번 기도하라’ 이런 내용은 나오지 않아요.
나오지 않는데 이러한 어떤 기도의 관습이 율법처럼 이렇게 굳어지게 된 그 배경이
아마도 다니엘 6장 10절에 나오는,
다니엘이 하루 세 번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그 장면과 연관성을 갖는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단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왕의 명령을 어기고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그 다니엘의 신앙을 본받아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을 보게 되면 하루에 세 차례 성전을 향하여서
아니면 성전 가까이에 있는 인물들은 성전으로 올라가서 기도하는 그러한
어떤 습관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것은 제가 습관이라고 표현했지만, 율법과 별반 다르지가 않아요.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것이 우리들이 생각하기에는 그냥 뭐
장로들의 가르침, 율법의 추가 내용이라 이렇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 유전 자체가 율법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죠.
그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거냐? 라고 할 때는
지켜야 하는 세세 항목들이 반드시 따라와야 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율법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 이 베드로가 육시 기도 시간에 기도하러 올라갔어요. 의외죠.
우리가 사복음서를 보게 되면
베드로가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라 그렇게 느껴지는 본문들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성경을 잘 몰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베드로가 정말 율법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바리새인에 비교하여도 결코 뒤지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할 만한 그러한 어떤 본문들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 베드로는 이 기도 시간에 기도하러 올라갔어요.
사람들은 이걸 갖고 목사들이나 주석가들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베드로는 기도의 사람’이라고. 그러면 교인들이 또 ‘아멘’ 이렇게 또 하죠.
기도의 사람은 맞긴 맞아요. 모든 성도는 기도의 사람이에요.
어떤 기도의 사람인가 하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성도는 다 기도의 사람이에요.
기도의 사람이 아닌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기도의 사람이라고 말함으로 말미암아
뭔가 대단한 사람이냥, 믿음이 좋은 사람이냥, 이렇게 추켜 세우고 싶은 거죠.
목사야 할 일이 없으니까 기도하는 시간이 많겠죠.
성경 보고 말씀 준비하는 게 다잖아요. 그럼 늘 기도할 수밖에 없죠.
말씀을 보면서 기도하면서 말씀을 보지, 기도하지 않으면서 말씀 보는 목사가 있겠어요?
물론 뭐 공부하는 사람들이야 뭐 기도가 필요하겠습니까마는

어떤 교회는 기도하는 성도를 만들기 위해서 영성 기도를 매일 쓰게 한대요.
영성 기도 들어보셨어요?
정 집사님 들어보셨죠? 영성기도 써보셨죠? 안 써봤습니까?
자신이 영성기도를 씀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영의 사람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은 거죠.
목사가 ‘당신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걸 무의식적으로 계속 주입시켜주는 거예요.

제가 이런 내용을 어떻게 아는가 하면 (잘 몰라요.)
어제 어떤 분하고 통화를 했는데, 그분이 그런 걸 이렇게 전해줬어요
서울에 있는 그분이 서울에 있는 대형교회를 이렇게 다녔으니까 지금도 다니고 있으니까
대형 교회들이 어떤 식으로 교인을 후려치는지를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 아이디어는 옛날부터 다 있었거든요.
그리고 교인들은 교회 오면서
‘자신이 영의 사람이다.’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이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매일매일 확인하는 거예요.
영의 기도, 영성 기도 뭐 이런 걸 써보세요. 자기가 영의 사람이라는 거죠.
부처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성도는 모두가 다 기도의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성도를 할 수가 없죠. 다 찔리지 않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러니 이런 말씀을 두고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된다‘라고
이렇게 외치는 그러한 자들은 악마들입니다. 악마들. 마귀 새끼들이죠.

지금 베드로가 기도를 하는 이 장면을 보면
베드로가 여전히 철저하게 유대교에 지금 매여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 같으면,
‘아니 과거 습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셨다면 그 기도 시간을 지킬 필요가 있느냐?’
이렇게 따질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여러분이 교회 열심히 다닐 때 새벽 기도를 다녀보셨잖아요.
새벽 기도를 다니다가 복음을 듣는 순간 새벽기도 안 가요.
안 가면서 하는 말이 뭐라는가 하면
‘나는 이 베드로보다 수준이 높다’ 라고 이야기를 하죠.
‘나는 복음을 안 이후에는 그런 법에 매이지 않는다’ 라고...

주님은 우리를 죄인으로 부르셨는데,
그런 사람들은 자기는 자기를 새벽기도 안 가는 ‘의인’으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자기의 행위를 계속해서 의롭다 여기고 싶은 거죠.
자기의 선택과 자기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인생을 살고 싶은 거예요.
물론 주님께서 새벽 기도를 가게 하시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주님의 일에 들어가겠지만요.

지금 베드로가 배가 되게 고팠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이 배고픈 그 시점과 기도하는 시간이 겹쳤어요. 이 당시에는 두 끼 먹었대요.
제가 뭐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책에 있으니까 그렇게 아는데.
오전에 조금 늦게 먹고 뭐 저녁에 먹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먹을 게 없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만일에 농사를 지었다면 두 끼 먹고 일을 못해요. 먹을 게 없을 경우에는 뭐 두 끼를 먹겠지만,
그래서 어릴 때 보면 뭐 두 끼를 먹더라도 ‘중참’이라고 이런 소리 여러분 들어보셨습니까?
우리 동네에 살던 사람들은 다 중참을 알아듣는데... 간식을 먹는 거죠. 오늘날로 말하면.
여름 같은 경우에는 새벽 5시에 일 나가면 8시 되면 몇 시간이 지나는 겁니까? 도대체.

아무튼 지금 이 베드로가 되게 배가 고팠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가서 당연히 성전을 향해서 기도했겠죠.
그리고 사람들은 지금 음식을 만들고 있어요. 이런 본문을 보면서 이런 상상을 해봤어요.
여러분들도 아마 이런 생각을 해봤을 거예요.
아니 음식 만드는 사람들은 기도 시간에 왜 기도하러 안 올라갔을까요?
아마 기도하는 사람은 남자들만 했을 가능성이 되게 높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되게 높고요.

이슬람 같은 경우에도 지금부터 기도를 하는데, 여자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남자들만 기도를 하는데, 시간이 있어요. 알람을 맞춰놓고,
터키나 이런 데 가면 시간만 되면 새벽에 종이 울려요.
종이 울리면 메카를 향하여 합니까? 그곳을 향하여서 기도를 하죠.
또 점심 때 그 정오되면 또 종이 울리고, 제가 사는 동네에도 이슬람 교회가 많아요.
그래서 뭐 지나가다 보면 계단 밑에서도 기도하고, 아무튼 모든 곳이 기도하는 장소예요.
그러니 그들의 신앙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우리들이야 기도하려고 하면 장소 찾아가잖아요.
그들은 모포 하나 끼고 가가지고 조금만 기도할 만한 공간이 되면 펴놓고 엎드려 기도하니까.
아마 그런 어떤 습관들이 그대로 영향을 받았는데

어쨌든 지금 베드로도 이 다니엘의 신앙을 본받아서
하루에 세 번 기도를 하는 시간을 가졌던 모양입니다.
예수 믿는다면, 성령을 받았다면, 지나간 모든 구습을 버려야 되는데 왜 버리지 않았느냐?
사람들은 그 구습이라는 것을 오해를 하고 있죠.
지나간 구습이라는 것은 악마에게 속한 삶이죠.
십자가의 용서함을 모르는 삶이 지나간 구습 속에 포함되는 삶인데,

지금 주님께서는 이 베드로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그 내용을 살펴보게 되면
우리들이 예상하는 바와 전혀 다르게 인도하신다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사도행전을 말씀드리면서 계속해서 드리는 말씀이 그 내용이죠

성령을 받았고, 성령 충만을 받았으면,
‘이제 나는 주님과 한 편을 먹어서 주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게 오늘날 교인들이 갖고 있는 사고 방식이죠.
‘성령을 받으면 목사님 설교 100% 다 알아듣고,
말씀 읽으면 다 알아듣고,
주의 뜻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는 그런 인생이 되어야 된다.’라고 마음속에 다 먹고 있잖아요.
그런 기대감을 다 품고 있거든요.
우리의 마음속에 악마가 들어 있어서 그래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네 눈이 밝아져서 정녕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하나님과 같이 배고픈 그 욕망이 육신이 살고 있는 한, 육이 살고 있는 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대할 때도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거죠.

베드로가 성령 충만을 받았다면, 더 이상 교정 받을 일도 없고, 주님과 한 편이 되어서,
주님이 나와 동행하니까 ‘내가 하는 일이 모두가 다 주의 일이다’
그 얘기를 하고 싶을 거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많아요.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기도하는 그 유명한 선교사 있잖아요.
책 써 가지고 인기도 많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강의하는 그런 사람들.
주님의 뜻을 따라서 산다는 거예요. 물론 중간중간에 이렇게 교정은 받지만.
주님의 뜻을 따라 산다면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가 되어야 되죠.
그런데 그 간증을 들어보면 자기는 주의 뜻을 따라 살아요.
잘못된 거는 주님이 시정을 해줘서, 자기가 하는 모든 일들이 시정이 되어서,
자기가 하는 모든 일들이 주의 일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 교인들이 얼마나 그 사람을 좋아하겠어요?
자기가 원하는 바거든요.

아마 사도행전을 읽으면 짜증 날 겁니다.
그 사람의 설교가 더 마음에 들지.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베드로의 이 모습은 수준 낮아요.
성령 충만 받았으면 기도 시간? 다 뭐가
‘항상 기도하라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는데, 무슨 기도 시간에 올라가서 기도합니까?’
‘믿음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이렇게 이야기할 거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그러면 당신은 아침에 뭘 먹어요?’ 내가 묻고 싶어요.
유대인처럼 빵 먹습니까? 옷을 어떻게 입어요? 머리 색깔은 어때요?
살아가는 모습이 바뀐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 마치 자신은
‘성령을 받았으니까 주님과 동행하면서 다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다’라고 그렇게 주장을 하는 겁니다.

배가 고픈 상황에서 기도하러 올라갔어요. 제가 이걸 보면서, 꼭 우리 같죠.
배가 고플 때 기도하는데, 기도하면 뭐가 떠오를까요?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오르는 그 생각이 딱 드는 거예요.
배고플때 여러분이 기도를 해보셔야 되는데.

이게 주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가 볼 때는 베드로의 현실 상황과 동떨어져서 일할 일하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배가 고플 때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봤습니다.
환상을 봤는데 환상의 내용을 들여다 보니까 먹는 거였어요.
근데 이 꿈이 완전히 악몽이죠.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내려와야 되는데, 보자기에 싼 내용물을 들여다 보니까
내가 싫어하는 거예요.
뱀고기, 쥐고기, 메뚜기... 뭐 이런 것들만 들어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안 좋아하는 개고기 이런 것들이 들어 있는 겁니다.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이 내려온 그 내용을 들여다 보니까 어떤 내용물이 있는가 하면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여기에 보면 내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 짐승과 조류들.
그 종류들이 지금 있는 겁니다. 그걸 보여주면서 소리가 났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너 지금 배고프지 않냐’ 지금 성경에 보면 아주 심이 배가 고팠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실제로 보면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엄청나게 배가 고팠던 거예요.
꿈이 현실과 잘 분간이 안 되잖아요.
이것은 지금 환상이지만 마찬가지입니다.

먹으라 하니까, 베드로가 얼마나 율법적인 사람이었는가 하면
꿈 속에서도, 자기가 꿈이 깨어 있을 때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죠.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달리 표현하면
‘부정한 음식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먹은 적이 없다’라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음식은 먹을 수 없다’라는 거예요.

베드로는 이 상황을 자기를 시험하는 상황으로 이해한 겁니다.
여기에 보면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잖아요.
이미 주님은 십자가 지신 주님 외에는 주님이 없습니다.
환상 중에 지금 이 베드로가 이 보자기 안에 쌓여 있는 그러한 음식들,
짐승과 조류들 그러한 것들을 먹으라고 할 때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그런 어떤 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의하면 이런 것들은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베드로는 먹지 않겠다고 하죠.

여기에서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
‘나는 이런 음식은 어려서부터 한 번도 먹은 적이 없다’라는 거예요.
정말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 아니에요?
사복음서에 보면 이 제자들이 이 정도로 율법에 충실했는지 잘 나와 있지 않아요.
그 대표적인 경우가 안식일 날 밀밭 사이로 갈 때 제자들이 밀을 까먹었거든요.
우리는 그걸 보면서 제자들이 예수님과 다니면서
안식일날 그 당시에 안식일 지키는 규례를 자유로웠겠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지금 이 사도행전에서 들여다보게 되면 자유로웠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들에게 안식일날 밀밭 사이를 지나가게 하시면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면서 밀을 까먹지 아니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은 거예요.
이 사도행전이 없다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그 말씀 속에 합류하여서
이 율법에 전혀 메이지 않고, 안식일날 밀 이삭을 까먹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지금 사도행전을 들여다보면 제자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할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리고 또 어떤 본문에는 이런 게 나오거든요.
음식을 먹을 때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어요.
이게 기본이거든요. 그 당시에 장로들의 유전이.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그 상황을 마련하신 거죠.
주께서 그 상황을 만드셔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 제자들이 율법에 대해서
막무가내로 ‘지키지 않겠다. 상관없다.’ 이런 태도를 가진 제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번도 먹은 적이 없다’라는 거예요. 제자들도 만만치 않죠.

물론 이들은 이 부자 청년이나 날 때부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 살아온 그들과는 약간의 차별성이 있죠. 부족함이 있지만
나름대로 이들도 율법에 충실한 자로서 말씀대로 살았다라는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을 받았으면, 우리는 이미 다 배웠잖아요.
배웠으니까 이제 거룩과 비거룩 개념이 다 사라져 버렸잖아요.
그러면 먹으라면 먹으면 되잖아요.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주님이 먹으라고 했잖아요.
‘주님이 먹으라면 먹어야지 베드로 자기가 뭔데 못 먹겠다라고 이렇게 거부하느냐?’
이렇게 우리가 지적을 할 수 있지만,

주님이 베드로를 시험하는지?
그것이 주의 뜻으로서 먹으라 하는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베드로가 그런 판단 능력이 있을까요?
주님이 시험하는 내용인지, 
진짜 이것을 먹어도 된다는 건지,
율법에 의하면 시험하는 것이 되고, 그다음은 잘 몰라요.

레위기 11장에 보면 여기에 대한 규례가 나오죠.
부정한 짐승과 부정하지 않는 짐승에 대한 규례, 1절부터 8절까지를 보면
땅에 거하는 육지에 거하는 동물들 중에 거룩한 동물과 거룩하지 않는 동물
깨끗한 동물과 깨끗하지 않은 동물을 나누면서
먹어야 할 동물, 먹지 말아야 할 동물.

9절부터는 물 속에 있는 물고기 어류들 있죠.
어류들에 대해서도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될 것을 말씀하시고.

13절부터는 이 조류들, 조류들 중에 먹어야 할 것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그리고 그 중간중간과 그 뒷부분에는 이들의 모든 주검, 시체죠.
시체는 다 부정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시체를 만진 경우에도 부정하고
혹시 어떤 부정한 곤충이 밥그릇에 떨어지면 그 밥그릇도 부정하게 되고
그러한 내용들이 지금 11장에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릇에 그것이 묻으면 그릇을 깨뜨리라고 해요. 이게
33절에 보면 부정하기 때문에 그릇을 깨뜨려라.
그 그릇이 1억짜리면 어떻게 하겠어요?
지금 이 내용들이 레위기 11장에 이렇게 가득 차 있는데 그 끝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레11:44~45)
44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

이 말씀을 듣게 되면 당연히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이 말씀을 지키려고 하겠죠.
특히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남은 자들이기 때문에 율법에 목숨을 거는 자들입니다.
물론 바리새인처럼 그 정도로 율법을 지키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그 당시에 이 베드로나 제자들을 보게 되면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최소한도의 율법 준행은 하고 있었다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라든가 이 먹는 문제에 대해서. 이러한 것들은 제대로 지켰다고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럼 이 말씀을 보게되면
당연히 지키라고 주신 말씀이지 이것을 어기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베드로가 성령 충만을 받았잖아요.
성령 충만을 받았을 때 이 성령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신 성령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냐?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잖아요.
그러하다면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이러하다면 이 율법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죄를 용서하셨지만
‘여전히 유효하냐? 하지 않으냐?‘를 따지게 되면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율법은 유효하다‘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잖아요.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변괴함이 있으면 안 돼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언약의 하나님은 바뀌는 하나님이냐? 라고 할 때는 바뀌지 않는 하나님이거든요.

율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율법에 대해서 이것을 먹지 말라. 이걸 먹으면 부정하다라고 말씀을 하셨다면
이 율법의 원칙이 이 세상 끝날까지 영원하게 지속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당시에 유대인들의 사고 방식입니다.
사실 이 사고 방식이 우리들도 똑같이 갖고 있는 거죠.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면 바뀌면 안 된다는 거죠.
바뀌어버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뭔가 하나님답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말씀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베드로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단순히 과거 습관에 매인, 이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라는 게 베드로의 생각이죠.
그래서 오늘날 그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이 이 율법서를 보면서 법을 세 가지로 나누잖아요.
여러분이 많이 들어보셨죠?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 신학교 가면 다 가르쳐주거든요.
도덕법과 시민법은 영원불변한 법이라는 거죠.
안 그래도 그저께 우리 딸이 C.S.루이스 이야기를 하는데
그 사람이 이제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선악에 대한 법들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게 이제 다 이 성경을 갖고 와서 기독교적 사상을 갖고 와서 하는 그런 이야기인데
그럼 의식법은 그러면 무시해도 되는 겁니까?

모든 율법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고, 십자가를 이렇게 증거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법들을 나누어 버리죠.
그러면 그렇게 된다면 결국은 레위기 11장을 안 읽어도 된다는 이야기거든요.
레위기 11장이 필요 없잖아요.

오늘날 여러분이 음식 가려 먹습니까? 안 가려 먹잖아요. 다 먹잖아요.
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가 싫어하는 음식은 부정하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깨끗하죠.
이게 아마 개고기 먹지 말라고 하는 인간들은
개고기 먹는 것은 부정하고 개고기 안 먹는 것은 정하다 이런 논리예요.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가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그냥 단순히 개를 키우니까, 귀여우니까, 사람과 동반자니까 먹지 말자.
그건 자기 생각이고요. 그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면
이러한 율법에서 말씀하는 이런 ‘모든 것들의 거룩과 비거룩을 내가 정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그러한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거예요.

아니 개고기는 먹으라고 주셨다고 말씀하셨으면 먹으면 되는데.
그걸 안 먹는 게 마치 의로운 사람이냥 괜찮은 사람이냥...
돼지를 한번 키워보세요. 돼지고기 먹을 수 있는지?
돼지 새끼 낳자 말자 집에서 한번 키워보세요. 못 먹어요.
병아리도 집에서, 방 안에서 키워보면 먹을 수 있겠습니까?

거룩과 비거룩을 자기가 나누는 겁니다.
지금 베드로가 이 율법을 잘 알고 있거든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지시하셔도 못 먹겠다라고 하죠.
이것을 세 번이나 그렇게 합니다. 세 번이나 했다는 말은 베드로가 동의를 했단 말이에요?
안 했다는 말이에요?
여기에 보면 먹으라 할 때 베드로가 뭐라 했습니까?
나는 한 번도 먹은 적이 없다고 하죠.

(핸10:15)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니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그렇게 말씀을 하실 때 베드로는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맞긴 맞는데요. 아니 나는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으니까 못 먹어요.’
세 번이나 그렇게 자기는 못 먹는다 했어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그러한 어떤 능력이 없습니다.

율법을 줘버리면 그 율법을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그 율법을 자기가 지키려고 해버려요.
그것은 율법에 대한 순종이 아니거든요.
율법에 대한 순종이 되려면 성령님이 오셔야 되죠.
지금 이 율법에 대한 그 순종 속으로 주께서 인도하시는데
지금 베드로는 그 인도하심을 거부하죠. 계속해서.

우리 같으면 한번 만에 알아듣게 해야 되잖아요.
왜냐하면 베드로가 지금 성령 충만 받았잖아요. 성령을 받았잖아요.
성령을 받았다면 주님이 한 번만 말씀하시면
‘제가 듣겠나이다’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 주목을 해야 돼요.
그 이유가? 뭔가 하면요.
주님의 일은 주님이 홀로 하시기 때문에 지금 그러하다라는 얘기입니다.
주님의 일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성령 받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목사님 성령 받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면 누가 합니까?
성령 받은 자가 해요.
‘성령 받은 자가 한다’는 말은 == ‘주께서 하신다’는 말씀이지,
그 인간이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내가 성령을 받았으니까 이제 내가 주의 일을 하겠다’라는 그런 인간들이 가득하잖아요.
그러한 것들을 완전히 지금 말씀을 통해서 막아버리는 겁니다.

베드로조차도 성령충만 받았고, 3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했고,
그 정도의 경험과 체험이 있고, 성령을 받았다면,
성령을 받은 이후에 주의 뜻을 알아서 자기가 처리를 해나가야 되지 않느냐라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복음 전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욥바에서 가이사랴로 베드로가 원해서 가지 않죠. 빌립 집사님도 마찬가지였잖아요.
앞으로 복음 전파되는 모든 과정들, 이동하는 모든 과정들이,
자기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잖아요.
제자들이 주도권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공생애 기간 동안.
그걸 보여주시는 이유는 예수님의 일은 주님의 일은 주님이 홀로 한다는 건데,
인간들은 주님의 일을 자기가 할 수 있다라고 한다는 거예요.

성령이 마치 자기 속에 들어오면, 성령이 나를 사로잡는다는 말까지는 맞거든요. 사로잡으면.
성령이 인도하심을 따라 이끌림을 받게 되죠.
이끌림을 받으면 ‘나는 아니오’라는 것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이 쏟아져 나오고,

지금 베드로처럼 보세요. 얼마나 엉터리입니까?
성령 받았으면 이미 거룩하니까 더 이상 엉터리가 나오지 않아야 되는데
성령 받고 나니까 본격적으로 엉터리가 나오죠.
주의 뜻이 뭔지도 몰라요.
주께서 지시를 해도 ‘저는 아직도 한 번도 안 먹었기 때문에 먹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이렇게 나와야 되죠. 그래야 주님의 일이 주님의 일로만 드러나기 때문에 그래요.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의심했다라는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 당황했다라는 거예요.
너무나 당황했다. 헬라어 단어를 보면. 당황스럽죠.
율법을 주신 분이 율법을 어기라고 지금 지시가 내려왔으니까
얼마나 당황스러운 이야기입니까?
‘도둑질 하지 말라’는 분이 ‘도둑질 하라’고 하면 여러분 도둑질 하겠습니까?

지금 여기에서 먹는 문제지만 그 율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살인하지 말라’는 분이. ‘살인하라’면 살인하겠습니까? 쉽지 않죠.
다윗은요.
‘간음하지 말라’는 분이 ‘간음하라’ 해서 간음해버렸어요.
‘살인하지 말라’는 분이 ‘살인하라’고 해서 살인해 버렸어요.

베드로는 율법이 자기를 위해서 있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이 율법을 지키는 이유는 간단해요.
‘하나님이 거룩하니까 너도 거룩하라’
그래 거룩하니까 그다음 뭐예요? 무엇을 주겠다라는 겁니까?
하나님이 축복을 주고, 영생을 주고, 이러한 내용들이 들어있으니까
율법 자체가 자기를 위한 율법으로 다 바꿔치기 된 거예요.
율법 자체가 십자가 지신 주님을 증거하기 위한 율법이거든요.

그러면 이 거룩한 음식과 비 거룩한 음식을 나눈 그 이유를
지금 여기에서는 어떻게 끌고 옵니까?
이 유대인과 선택받은 유대인과 언약안에 있는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그 관계를 두고,
이 둘을 두고, 지금 이 음식을 부정한 음식과 부정하지 않는 음식을 끌고 온 거죠.
이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내가 거룩한 것은 먹고, 거룩하지 않은 것은 먹지 말라고 율법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주신 이유가 뭐냐? 라고 하면 이걸 깨기 위해서 주신 거죠.
‘그러면 너는 왜 못 깨느냐?’ 물어보면 ‘나는 거룩을 사수해야 됩니다’
‘주님의 죽으심’보다 더 중요한 게 ‘나의 거룩 사수’예요.
‘내가 어릴 때부터 처음부터 한 번도 이 부정한 음식은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괜찮은 인간입니까?’

참 이것도 말도 안 되죠? 그죠.
성령받았는데, 예수님을 주로,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주로 세웠다라고 자기가 설교를 다 했어요.
율법과 선지자의 증거를 받은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다 이야기를 했는데
그 정도 되면 이런 얘기가 안 나와야 되잖아요.
목사님 환상 중에 베드로를 통해서 그냥 유대인들의 사고 방식을 보여주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뒤에 가보면.

여전히 유대인과 상종하는 것은 거룩한 행위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중에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베드로가 외식하잖아요.
유대인 속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외식을 하잖아요.
베드로가 지금 이러한 환상을 보고 당황스러워 했습니다.
율법을 주신 분이 ‘율법을 어겨라’ 이거는 상상도 못한 일이죠.

우리들이야 지금 말씀을 많이 들어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주시고, 안식일을 범해버리잖아요. 안식일의 주인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주셔놓고 ‘율법을 범하라’ 그것은 율법의 주인공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지금 이것을 말씀하고 있잖아요. 그럼 있으면
우리들은 ‘아 성령이 오면 내가 가르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이렇게 했으니까
‘성령이 왔으니까 이제 사복음서가 제자들 머릿속에 다 떠올라서
어떤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라서 예수님 뜻대로 한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잖아요. 저만 그렇게 갖고 있습니까?
그 말씀의 의미는 ’주님께서 친히 너희와 함께 하면서 일을 하신다’는 얘기예요.
그게 주님의 동행입니다.

지식을 갖고 있는 인간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지식을 자기 머릿속 들어오면
이제 그 지식을 갖고 이제 본격적으로 자기가 주의 일에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성경 말씀을 배우면, ‘내가 배웠으니까 이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게 인간들이에요. 몰라서 못 전하지, 알면 전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전한 사람들은 항상 하는 말이 ‘내가 전했어요’라는 이야기밖에 못해요. 그러면
‘내가 전했으니까 너희들도 내가 전한 걸 배워서, 익혀서, 알아라’
이렇게 가르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베드로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사고 방식은
우리가 갖고 있는 첫째 아담 속에 있는 모든 자들의 사고 방식이에요.

주께서 이러한 베드로를 통해서
성령을 받은 자가 어떻게 주님의 증인이 되어지는가? 를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주님이 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내용을 친히 이루심을
지금 이 베드로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제가 사도 사도행전 10장 1절에서 8절 말씀을 전하면서
이 사도행전 10장 말씀이 성경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부분이라 제가 그렇게 말씀을 드렸잖아요?
다른 부분도 똑같이 중요하지만.
특히 사도행전에서는 더 중요하죠.
사도행전을 사람들이 읽으면 다 ‘우리가 주의 증인이 되자’ 이렇게 결론 났잖아요.
교회가 다 그렇게 가르치잖아요

거꾸로예요. 사도행전은. 우리가 증인 될 수 없어요.
지시에 따라 움직입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그 속에는 항상 무엇이 들어가게 되는가 하면? 인간의 악한 죄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는데, 베드로는 무엇을 붙들고 있어요?
자기의 거룩을 붙들고 있죠.
이게 또 논리적으로 안 맞잖아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면 자기는 죄인이 돼야 되는데,
죄인 된 베드로는 여전히 율법을 붙들고 있으면서, 거룩한 음식만을 먹으면서,
‘나는 거룩하다’라는 것을 계속 유지시키고 있는 거예요.
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십자가의 원수.
이 베드로의 이러한 사고 방식을 깨는 겁니다. 깨어도 소용 없어요.
깨어도 다시 제 자리로 갑니다. 나중에 보면.

우리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생활 습관들이나 사고 방식들이 복음을 들을 때는 ‘아멘’으로 다가오지만,
돌아서면, 그 상황 속에 가면요. 그 습관 속으로 그냥 살아요.
주께서 그걸 계속해서 쪼개버리죠. 그게 성도의 삶인데...

이 베드로가 지금 당황해 하고 있는데,
그 시몬의 집을 찾아와서 베드로라 하는 사람을 지금 만나서
우리가 이 고넬료에게 보냄을 받아서 지금 여기 왔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보면 17절 하반절을 보면

(행10:17)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행10: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에 우거느냐 하거늘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이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환상에 대해서 생각할 때, 성령께서 이 말씀을 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이 질문.
그냥 생각할 때 보낸 사람들이 왔다는 소리가 들려서, 내려가 보면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잖아요?
그런데 성령께서 알려주죠.
‘두 사람이 너를 찾으러 왔다.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이 말씀을 기록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복음을 듣고자 하는 자와 전하는 자가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이 주동적으로 들을 수 있는 자격 요건도 없고, 전할 자격도 없다’
얘기입니다. 지금. 모든 일이 주께서 하는 일이에요.
듣는 고넬료도 부정되어지고,
복음 전하는 베드로도 부정되어지는 내용이에요.

아마 우리가 글을 썼으면
성령께서 지시한 이 내용, 이 내용을 빼서 썼을 겁니다.
이 정도 되면 환상도 보여줬으면
이제 베드로가 환상을 봤으니까, 고민했으니까, 무슨 뜻일까? 당황스럽네.
근데 고넬료가 왔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왔다
‘아! 그러면 우리도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잖아요.
우리는 너무 믿음이 좋고 말씀을 너무 잘 알아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주님 입장에서는 ‘베드로는 하나도 모른다’ 얘기입니다.
그래서 가르쳐요. ‘가라’는 겁니다.
모든 일이 주의 일이에요. 성령 받은 사람들은. 자기 일이 없어요.
자기 일이 없으려면 이 베드로처럼 계속해서 부정당해야 돼요.
매사에 인도하심이 주님의 인도하심이지. 내가 알아서 가는 게 없어요.
나중에 성경에 기록할 때 앞부분도 나오지만 그 모든 요소 요소들이, 그런 걸음들이
주님이 친히 이끄시는 걸음이고, 성령에 인도하신 걸음이라는 겁니다.

듣는 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이걸 놓치게 되면 어떤 상황이 되는가? 하면
‘아! 내가 가서 전했는데 저들이 안 믿더라. 왜 안 믿을까? 왜 안 들을까?’
이 10장을 곰곰히 묵상해 보면, 안 듣게 하시는 것도 주님이죠?
그럼 문제가 누구한테 있는 겁니까? 지금. 자기한테 있는 거예요. 자기에게.
주님은 자기 백성을 치시지 자기 백성 아닌 자는 안 쳐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를 치는 겁니다. 자기 백성을.
근데 우리는 계속해서 저쪽을 자꾸 쳐야 되는데 왜 안 치냐고 자꾸 지금 발버둥치잖아요.
우리는 10장을 보면서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가 구원받았다.’ 여기에 초점이 있는데,
지금 고넬료가 문제가 아니에요.
베드로가 문제예요.

주님이 자기 백성에게 관심이 있지. 자기 백성 아닌 사람에게 관심이 있겠어요?
고넬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지 나름대로 의롭게 살았고, 경건하게 살았고,
그걸로 천사가 왔다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성령 받고 나니까 어떻게 돼요? 정복이 아니고 전복(顚覆) 당한 거예요. 전복.
완전히 뒤집어진 거죠.
‘그 자체가 십자가의 원수였다’라는 것을 이 사도행전 9장에서 그대로 보여줬잖아요.
사울에게 찾아오신 주님에 의해서.
‘예수를 핍박하는 자’ 주님의 원수입니다. 원수.

이러한 세세한 내용들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나와 서로 대척관계에 있는,
나의 바램과 서로 충돌 관계에 있다라는 겁니다. 주의 인도하심이.
그래서 은혜라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를 계속해서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십자가의 피 능력으로 우리를 이끄시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뭐 밖에 나올 수밖에 없는가 하면 ‘나의 의’밖에 안 나와요.
겉으로 보면 똑같죠. 겉으로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와서 가서 전하는 거
그거는 변함이 없는 사실이잖아요. 인간들이 볼 때.

그런데 그 내용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주님의 죽으심’이 담기느냐? 안 그러면 ‘자기 의’가 담기는가?
나중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똑같이 전할 거 아니에요.
그러면 이렇게 우길 수 있죠.
‘아 주님이 보내서 왔다.’ 거기까지는 가능하죠.
보내서 왔으면 전하는 내용이 십자가여야 되지.
‘주님이 보냈습니다. 주님이 시켜서 했습니다.’ 이런 얘기 얼마나 많이 합니까? 다 그렇게 하죠.
그럼 시켜서 했으면 시켜서 했다라는 증거를 좀 보여보라는 거예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고요. 십자가의 피 능력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렇게 해도, 주님께 우리가 의로움이 될 수가 없어요.

오히려 이 베드로 속에 주님은 자신의 죽으심을 집어넣어버리는 겁니다.
계속 죽어야 돼요. 베드로는.
날마다 죽어야 십자가를 증거하거든요.
죽음이 일어났다는 것은 십자가 사건이 반복된다는 거거든요. 지금도 보세요.
베드로는 멀쩡히 살아 있거든요.
성령을 받은 본인이 살아 있으니까, 주님의 죽으심 속에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베드로는 이러한 어떤 것을 예상을 못했어요.
왜냐하면 베드로나 우리나 똑같거든요.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했고
‘성령을 받으면 내가 너희에게 가르킨 모든 것을 가르치고 깨닫게 하겠다’라고 했으니까
이제 성령이 왔으니까 자동적으로 될 거라 생각했는데,
자동이 아니고 수동입니다. 수동.
본격적으로 수동이 된 거예요. 본격적으로.

주님이 다루지 아니하면 이 기계가 어디로 가는가 하면
자기의 욕망을 좇아, 자기 이름을 위하여서 움직이게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전할 때도 이방인에게는 안 전해요.
왜냐하면 저들은 이미 선택받은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하나님의 법이거든요.
개 돼지처럼 여겨야 돼요. 개 돼지처럼.
그게 이 베드로가 갖고 있는 사고 방식입니다.

베드로의 문제는 이런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잖아요. 자! 성령까지 받았잖아요. 안 받은 게 아니죠.
받았는데, 이 베드로가 갖고 있는 생각은
자기가 예상하는 성령충만, 그리고 주님의 뜻, 이런 것들을 새롭게 이 그대로 이 뭐라고 할까요?
정리시켜 놓은 거예요.
주님의 일하심은 항상 우리의 생각과 달리 일을 해요.
‘성령 받았으니까 나의 뜻과 동일하겠지요’ 라고 생각하면요. 그건 착각입니다.

요나서를 보게 되면 요나가 뭘 생각해요?
요나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 라고 할 때는
하나님께서는 언약대로 하신다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언약대로 하셨을 때는 요나가 선지자니까 두 가지 내용을 잘 알고 있어요.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심판한다는 내용도 알고 있고요.
회개하면 용서하시는 것도 알고 있어요.

문제는 이 요나가 갖고 있는 생각은 ‘하나님의 뜻은 나의 뜻과 일치해야 된다’는 거예요.
딱 우리 같죠. 저만 같은가 모르겠는데...
주님의 뜻은 내 뜻과 일치해야 된다는 거예요.
베드로가 갖고 있는 생각이 그런 생각이거든요. 지금.
‘내 뜻과 주의 뜻이 일치해야 된다는 사고 방식.

성령이 왔으니까, 성령이 나에게 임했으니까 그거는 객관적 사실이잖아요. 다 봤잖아요.
그러면 내가 하는 이 일들과 내가 결정하는 이 모든 일들이
주의 뜻과 일치하는 일이 되어야 된다라고,
지금까지는 일치했거든요. 앞부분에 보면 베드로가 일치했어요. 일치 됐으니까
그 다음에도 일치할 거라 예상하는데,
그 일치가 지가 그 생각을 해서 일치한 게 아니라
주께서 그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일치했는데
베드로는 ’자기가 일치되었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시점에서 왜 이렇게 어긋나는 모습으로 보여주느냐? 할 때는
주의 뜻은요 우리의 뜻과 일치 할 수가 없어요. 죽을 때까지.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도 그랬잖아요.
자기 몸에 사단의 가시가 있을 때 자기의 소원은 뭐예요?
’가시를 빼주면 훨씬 더 복음 전하는 데 유리하다‘는 겁니다. 그건 제 생각이에요.
주님은 ’은혜가 족하다‘ 하거든요. 은혜가 족하다라는 겁니다.
그 부분만 그런 게 아니고요.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계속해서 내 뜻이 주의 뜻이기를 간절히 바라죠.
’복음을 잘 전했으니까 이것은 주님 뜻대로 한 거야‘ 얻어 터져야 됩니다.
얻어터질려고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얻어터지면서, 복음을 전하면서, 또 얻어터지죠.
완전히 자기 생각 자체가 완전히 무너지는 거예요.
그 증인의 모습입니다.

그게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육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예상을 하잖아요. 예상을.
이제 복음을 알았으니까 알았으면 그다음 우리는 뭘 해요? 판단하기 시작하죠. 그때부터.
그 판단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고요.
하지 말라고 해도 인간은 다 판단을 해요.
그 우리 마음대로 판단하시고요. 마음대로 사시면 돼요.

베드로 보세요. 지금. 마음대로 하는 거거든요. 진짜 자기 마음대로.
주님이 시키는데도 ’제 생각은 그게 아닌데요.‘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하죠? 한 대 맞아야 되죠.
애들도 제 마음대로 하다가 얻어터지잖아요.
얻어터지면 ’아 잘못했구나.‘ 뭐 그 정도 되면 뭐 괜찮은 애지만.
얻어터지면 얻어터질수록 더 제 마음대로 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면 성령이 없는 사람이죠.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증거하기 위한 증인이에요.
그러하기에 계속해서 이 베드로는 자기가 갖고 있던 신앙,
그리고 성령 받은 이후에 생각을 했을 거 아닙니까? 바보가 아니잖아요. 성령 충만 받았으니까.
그러면 이제 이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하신 말씀을 다 떠올릴 거 아니에요.
그러면 예상하겠습니까? 하지 않겠습니까? 하겠죠.

여러분들이 성경을 더 많이 배우고 많이 배우셨겠지만 더 알면, 예상을 다 해버리죠.
어떤 예상합니까? 믿을 놈 믿고 안 믿을 놈은 안 믿고.
그러니 뭐? 그다음에 어떻게 하자? ’나 안 전하겠다.‘ 이래 나오거든요.
이게 얻어터져야 되는데.

말씀이라는 것은 우리를 그 속에 집어넣어서 말씀을 이루게 하시거든요.
집어넣어버리면 이 주님의 자기 백성은 주님의 죽으심 속에 합류당해요.
복음이라는 것은 기쁜 소식이죠.
이 기쁜 소식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면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는 자기 몸이 고난 속으로 들어가야 돼요.

베드로가 자기가 갖고 있는 이 생각이 무너지는 것이 우리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지만요.
평생 자기가 살아왔던 그 체제가 무너지는 거예요.
그거 음식 먹는 거 하나 뭐 그거 뭐 뭐가 중요하냐?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집에서 20년 동안 지켜왔던 ’새벽기도 하지 맙시다.‘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새벽기도 20년 동안 제가 여기 있을 때 어떤 분이 저한테 자랑을 하더라고요.
제가 이곳에 와서 꽤 됐어요. 한 10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한 15년 동안 새벽기도 한 번 안 빠지고 다녔더라고요.
그 사람한테 ’그 새벽기도 다닌 게 바로 악입니다.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그 얘기예요. 지금.
근데 그것이 뭐가 나쁘냐는 거예요. 뭐가 나빠요? 말씀대로 지켰을 뿐인데.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걸 위해서 주님이 새벽기도 15년 동안 가게 하셨구나‘
’정말 십자가의 원수 중에 이런 원수가 없구나를 알게 하기 위해서 나를 그렇게 보냈구나.’ 하면
그게 얼마나 감사가 돼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하니까. 은혜가 얼마나 넘칩니까?
또 은혜가 넘친다 하니까 또 인간은 뭘 또 이야기합니까?
‘그래 봐. 새벽기도 괜찮은 거 아니냐.’ 이래 또 나오는데...

우리는요. 우리의 길을 가야 돼요.
육은 육의 길을 가야 됩니다.
문제는 우리는 자꾸 육의 길을 안 가려고 하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잖아요.
살려고 한다는 말은 벌써 머릿속에 그다음 과정이 다 답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냥 사세요. 그러면 주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우리 속에서 적용시키면서 십자가를 밝히 보이는 인생으로 인도하실 겁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무너지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고
십자가 피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기쁨과 소망이 되게 하셔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님의 완성 속에 살아감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마음껏 우리의 육적인 모습을 펼치게 하시고,
그 속에서 주님의 일하심만이 오롯이 드러나는
주님께서 다루시는 주님의 성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corded by 구 성모 허 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