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4-17 12:15
사도행전 강해 70강 행 17:10-15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뵈뢰아 사람들과 복음의 능력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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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2-04-18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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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70강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은 베뢰아 사람들과 복음의 능력

기도하겠습니다.
나의 삶의 이적과 기사가 일어날 때는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했으나
나에게 고난이 밀려오면 주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지독히 자기 중심적인 우리는 마땅히 지옥 백성이고
긍휼을 받을 자격도 없으며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이 세상에서는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하기도 어렵지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친히 성령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은혜임을 알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 은혜는 이 세상에서 내가 바라는 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건 속으로 우리를 끌고 가셔서 자기의 부인의 삶으로 우리의 죄가 드러나게 하시고
믿는 자에게는 그 능력만이 보여지게 하시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는 알곡이라고 구원받은 자라고 막연히 생각했었습니다.
하늘에서 심지 않는 것은 다 뽑으신다는 말씀처럼 알곡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며
우리 모두는 가라지로서 다 뽑혀 버려져야 하는 인생임을 알았습니다.
뽑혔던 자리에 십자가의 피가 임하므로 그 속에서 다시 새 생명이 새 창조가 이루어짐을 통해
십자가의 증인이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모이기도 하시고 헤치기도 하시는 주님이 일하시는 현장에서 관람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어떤 식으로 일하고 계신지 볼 수 있는 안목을 성령께서 보여주셔서
십자가만이 드러나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잠언서 21장 16절에서 18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1:16~18)
16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은 사망의 회중에 거하리라 
17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18 악인은 의인의 대속이 되고 궤사한 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되느니라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이 세상에 믿지 않는 자들 악한 자들 마귀의 종들이 활동하는 이유는
주께서 피로 사신 주의 백성을 돕기 위함임을
말씀을 통하여 저희들에게 들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저희들에게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사도행전 17장 10절에서 15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행17:10~15)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지난주 우리들이 살펴본 내용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한 내용이지요.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난 사건은 아주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이들이 복음을 어떻게 전했는가?
복음이라는 것이 과연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내용인가?
거기에 대해서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5절을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살전2: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데살로니가에 가서 복음을 전했죠.
복음을 전할 때 오늘날 한국 교인이라면 뭐 한국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상대를 믿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할 겁니다.
믿게 하려면 상대를 설득시켜야 되겠죠.
상대를 설득시키려면 어떤 말을 해야 되느냐? 라고 할 때는 아첨의 말을 해야 돼요

오늘 집사님이 기도하신 것처럼 사람의 말이 통하지 않는 세계가 천국인데요.
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바울과 그 일행들이 어떤 말을 했는가?
회당에 들어가서 어떠한 내용을 전했는가?
우리들이야 답을 알고 있잖아요. ‘복음을 전할 것이다. 복음을 전했다.’
그건 누구나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근데 복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전파되느냐?가 중요해요.
복음의 특징은 옳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옳은 이야기에서는 십자가가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을 표현할 때 방금 데살로니가전서 2장 5절에도 보았듯이
‘아첨의 말과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라는 식으로 표현을 해요.
오늘날 우리들 같이 정답을 좋아하는 그러한 어떤 시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말들이 불필요하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데살로니가 너희들 가운데 들어갔을 때 복음을 전할 때
’복음만 전했다.‘ 이런 이야기만 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성경을 그런 식으로 단순화시키려고 하느냐?라고 할 때는요
죄인임이 드러나기 싫은 거예요.

오늘 베뢰아 지역도 갔잖아요. 이게 연결이 돼 있기 때문에 그래요.
베뢰아 지역에 가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복음을 전할 때 이들이 아첨의 말을 했는가? 탐심의 탈을 썼는가?라고 할 때는
’그렇지 않았다‘라고 하거든요.

아첨의 말이란 어떤 말입니까? 이 말도 상당히 어렵죠.
왜 어려웠냐?라고 할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아첨의 말과 성경에서 말씀하는 아첨의 말이 달라요.

오늘날 교회는 목사들은 이 아첨의 말을 동일화시켜버립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 2장 5절에서 말씀하시는 이 아첨의 말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냐?라고
할 때는 인간이 입 밖으로 내는 모든 말들이 아첨의 말이 돼요.

사람들이 ’나는 아첨의 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자기들 세계, 강도들 세계죠. 마귀 집단들이잖아요.
그들 세계에서는 아첨의 말이 아닌 것처럼 들려질지 모르지만
이 영의 세계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서는 인간들이 하는 모든 것들이 모든 말들이 아첨의 말이 돼요.

아첨의 말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이 쏟아내는 모든 말들은 사람을 위한 말들이거든요.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격려하는 말이든 인정하는 말이든 칭찬하는 말이든
이 말 그 어디에도 십자가를 위한 말은 없습니다.

데살로니가에 가서 회당에 들어가서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다라는 표현을 한 것은 어떤 의미냐?
’우리가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냐?라고 할 때는
그 회당에서 누구를 믿고 있어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 율법을 배우고 그들이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구제하는
그 모든 것들이 아첨이라는 그 말 속에 다 담겨버리고 탐심의 탈속에 다 들어간다.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들이 하는 모든 종교적 행위들은 아첨의 말이에요.

이걸 요한복음 8장에 근거하면 악마의 말이에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이 발설하기 시작할 처음부터 누구를 위해서 발설합니까?
’네가 어딨느냐?‘라고 질문을 했을 때 찾았을 때 자기 방어로 나서잖아요. 그게 첫 발언입니다.
물론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말은 달라요.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부터는 어떤 말을 해도 아첨하는 말이에요.

그러면 누구에게 아첨을 하는가? 자기 자신에게 아첨을 하는 거예요.
아무리 우상을 찾아서 신에게 경배하고 아첨의 말을 하더라도
그 마지막 자리는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나는 국가와 민족을 헌신한다고 그건 자기 생각이고요.
그 악마들이 만들어 놓은 그 세계 속에서는 타인을 위한 희생, 타인을 위한 봉사, 정직한 말,
직언 이런 말들이 다 통하지만, 십자가 앞에서는 통하지 않아요.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유대인들이 유대인 회당들이 모였으니까
그 이방인들도 유대교로 들어왔을 거 아니에요.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충심으로 섬겼거든요. 율법대로 살았어요.
그러한 그들에게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다‘라는 말은 너희들이 믿고 살아가는 그 모든 행위들과
너희들이 내뱉는 모든 말들 너희들이 가르치는 말이죠.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십일조를 해야 됩니다. 구제를 해야 됩니다.
이레에 두 번 금식을 해야 됩니다.‘ 이 모든 말들이 아첨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볼 때는 별 것 아닌 것 같잖아요.
데살로니가에 가서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다라고 이야기하니까
받는 이 말씀을 듣는 자들이 ’들을 만하네‘ 이렇게 생각을 하지만
들을 만한 내용이 아닙니다. 무엇이? 이 복음이

또 한 가지는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라고 하죠.
탐심이라고 하면 우리가 아는 탐심은 어떤 겁니까?
돈을 탐한다. 여자를 탐한다. 권세를 탐한다. 음식을 탐한다. 그것을 숨기는 거죠.

그런데 표현이 재미있죠. 탐심의 탈이에요. 탐심의 탈
’탐심의 탈을 썼다‘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 대해서 서기관에 대해서 문제를 지적하셨잖아요.
그들은 의롭게 보이려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요즘 강남에 있는 그 교회 목사들은 다 기름을 바른대요.
기름을 바르고 옷도 명품을 입어야 되고 교인들하고 격식을 맞춰야 되니까
제가 아는 게 맞는지 모르지만 그 강남의 큰 교회 대형교회 한국에서도 제일 큰 교회
어떤 분이 말씀을 하시는데

이 바리새인들이 기름을 바르고 경문을 크게 차고 그렇게 하는 모든 일들을 외식이라 했죠.
그 외식을 데살로니가전서 2장 5절에서는 탐심의 탈이라는 거예요.
탐심의 탈이라는 말이 참 재미있잖아요.
탐심의 탈을 썼으면 ’저놈이 탐심을 가득 갖고 있구나‘ 이렇게 인식이 돼야 되는데
탐심의 탈을 쓰는 순간, 이 육에 속한 모든 인간들은
겸손한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오로지 여호와만을 섬기는 자
우상을 배제하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사람 이렇게 인식이 돼요.
그 모습 자체가 ’탐심의 탈을 썼다‘라는 겁니다.

그러니 회당에서 모여서 안식일마다 율법을 읽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면서
자신의 삶들을 말씀 속으로 이렇게 집어넣는 자기를 쳐 복종하는
그런 일을 하는 자체가 탐심의 탈이라는 거예요.

제가 지금 이런 표현을 하는 이유가 사도 바울도 자기를 쳐 복종한다 했잖아요.
이런 이야기는 바리새인들도 다 해요. 새로운 언어가 아닙니다.
그러한 모든 모습들이 탐심의 탈을 썼다는 거예요.

왜 탐심의 탈이냐? 그거 왜 합니까? 물어보세요. 왜 그렇게 해요?
그 목적이 뭐냐?라는 겁니다.
그 유대인들의 목적은 메시야 왕국에 들어가는 거예요.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극락에 들어가는 겁니다.
천주교식으로 표현하면 성경이 없는 것도 지어내어서 연옥에 갔다가
그 수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고생하는 조상을 위해서 전 재산을 바치라고 하거든요.
그게 안 먹힐 것 같죠. 늙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여러분 그런 돈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면
자식들이 분쟁을 일으킵니다. 그건 100프로거든요.
그 순간에는 안 일어나도 시간이 지나면 다 분쟁이 일어나요.
그러니 여러분의 조상이나 여러분들이 천국을 가려면
그 강남의 빌딩을 하나님께 바치면 천국 갈 수 있다라고 가르치거든요.
그 카톨릭 신부가 직접 대놓고 이야기를 해요.

앞으로 이런 이야기가 교회에서도 지금까지 이루어졌지만
’바쳐야 복 받고 받쳐야 하나님 축복 내린다‘고 이렇게 나왔지만
앞으로 교회 안에도 이런 이야기를 노골적으로 할 겁니다.
과거에 뭐 면죄부 팔 때나 그런 소리를 했지
인간의 그 악마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극락, 천국이에요.
거기에 가기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죠.
전 재산을 다 갖다 바쳐도 아깝지 않은 겁니다.
자기 행복을 위해서라면 전 재산 갖다 바치잖아요.
우리 중에 그런 분이 있습니까? 전 재산 갖다 바쳐서 교회에 다 갖다 바쳤는데
이 모양 이 꼴로 복음 듣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하나님을 위한 열심, 그것이 탐심의 탈을 썼다라는 거예요.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고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으니까
’사도바울이 야 괜찮은 사람이었네‘
’목사라면 적어도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아야 되고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아야지‘
이렇게 또 성경을 해석을 하거든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해석합니까?
성경대로 말하면 아니면 탐심을 버리고 목사가 사례도 받지 않고
사례 들어오는 걸 다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런 목사가 적지 않아요.
자기 집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다 구제하거든요.
그들은 뭘 모릅니까?
’네 목숨을 내어준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오‘라는
말씀 자체를 전혀 이해를 못해요.

그렇게 하는 것이 아첨의 말이 아니고
성경대로 말씀을 전하고 탐심을 부리지 않는 그것이 목사된 도리다. 성도의 도리다.
성도들은요 그런 거 없습니다. 성도들은 돈 버는 데 다 미쳐있잖아요.
제가 여러분을 폄하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게 더러워서 또 목사 되려고 하거든요.
요즘은 취미생활로 목사 되는 사람도 많고요.
신학교 자체가 여러분도 목사하고 싶으면 한 학기에 30만 원만 내면 목사 됩니다.

아첨의 말, 탐심의 탈을 사도 바울이 쓰지 않았을 거다.
진짜 진심으로 했을 거다.
인간에게는 진심이 없어요. 인간에게는 진심이 없습니다. 그걸 아셔야 돼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테살로니가전서 2장 5절에서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왜 이렇게 했다라고 말을 합니까? 그 이유는 십자가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것들이 무엇으로 드러납니까? 아첨의 말과 탐심의 탈로 드러나요.
복음 속으로 자기 자신도 빠져든 거예요.
바울은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가 아니고
여러분 그렇게 살 수 있으면 그 사람을 믿어야 돼요. 그분이 바울이 메시야가 돼요.
우리 구권사님 거기 카톡에 메인에 보니까 로마서 7장 8장을 이렇게 체크를 해놓으셨더라고

(롬7:24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 고백이 나오는 자체가 축복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롬7:25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요 위치에 가려고 애를 쓰잖아요.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는 자체가 복이예요.
탐심의 탈, 아첨의 말. 인간은 말만 하면 탐심의 탈을 쓰고 말을 하고요.
복음을 전하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탐심의 탈을 쓰지 않고 아첨의 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하면 여러분이 저를 믿어야 돼요.
예수님 믿으면 안 됩니다. 저를 본받아야 되고. 그런 자들이 교회에 가득하거든요.

지금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을 때 누가 보입니까? 인간들의 눈에는 바울이 보이죠.
그런데 악마의 눈에는 누가 보입니까? 예수님의 활동성이 바울을 통해서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보면 ’바울도 알고 예수도 아는데 너는 어디에서 굴러온 짬뽕이냐‘
이렇게 하거든요. 마귀가.

인간의 눈에는 누구만 보입니까? 예수님 안 보이죠. 성령 안 보이죠.
사도 바울만 보이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을 하니까
그 말하는 내용들을 문자대로 받아들이니까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목사가 복음을 전할 때는 아첨의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이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에요.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죠. 복음만 전해야 되죠.
사람들에게 듣기 좋게 하기 위해서 이 교회에 오래 있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헌금하게 하기 위해서 복음도 아닌 사람을 붙들어 놓으려고 좋은 말하고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 돼요.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그 자체 속에서 모든 것이 날아가게 돼 있습니다.
아첨의 말을 하지 않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다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상대를 쳐내버리죠.

듣는 사람은 굉장히 불쾌한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그 인생 특히 이방인들 중에도 헬라인 중에도
지금 유대교로 들어왔다가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누구를 위해 살았습니까? 자기를 위해 살았거거든요.
자기를 위해 열심을 낸 거예요.

자기를 위해 열심을 낸 그 상태에서 복음이 들어오니까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두 쪽으로 쪼개지는데 놀라운 일이 발생하죠. 먼저 다 뽑아냈죠. 복음으로
기도로 끝내도 설교 안 해도 될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들었는데

다 뽑아낸 자리에 새롭게 생성시켰어요. 창조시켰어요.
그들이 바로 이 데살로니가에서 만들어진 성도들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들이 베뢰아로 넘어가죠.
혹시 여행을 좋아하시면 해외여행을 좋아하시면
이런 쪽으로도 여행을 가보시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볼 만한 것도 많고 유적들도 많고
거리가 만만치 않거든요. 한 80km 정도 된다. 그랬죠. 베뢰아 정도까지는
데살레르가에서 베뢰아까지 한 80킬로 정도 되는데
그쪽에 가서 이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보내지는 방식이

(행17:10상)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왜 밤에 보냅니까? 못 찾았잖아요.
야손의 집에 들어가서 찾아보니까 그들을 이미 다 빼돌렸어요.
우리가 생각하듯이 고상하게 복음은 안 전합니다.
’나 복음 전하는 사람이야 나 나 나 여기서 잡아가‘ 이런 거 없어요.
그 인간이 조작해낸 겁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해서 삼십육계를 놓잖아요.
복음은 그렇게 전파되는 겁니다.

물론 죽음의 자리로도 주께서 세우시고 우리 쪽에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정답이 없어요.
근데 인간들은 계속해서 정답을 찾아내려고 하거든요.
밤에 몰래 베뢰아로 보냅니다. 베뢰아가 약간 외각지거든요.
지금도 가보면 산골 밑에 이렇게 돼 있는데

베뢰아 그 기념교회가 다 그리스정교입니다. 뭐 교인들이 있겠어요?
그 아름다운 교회에 태어날 때 결혼식 때 장례식 때
어차피 그 그리스 지역 전체는 태어날 때부터 천국 백성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나 이미 천국 백성인데 왜 복음을 들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곳에 이제 도착을 했습니다. 그곳에도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어요.
역시 그 안에는 이 귀부인들도 있었고 여러 헬라인들도 함께 그곳에 모여서 천국을 소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특히 여기 베뢰아 지역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과 달랐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이게 참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을 쉽게 말하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모여 있잖아요.
여러분들 이렇게 서로 비교해 보면 다 다르죠.
어떻게 다릅니까?
대화를 해보면 어떤 사람은 굉장히 논리가 치밀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얼렁뚱땅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들은 치밀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믿음이 좋다라고 생각하고
얼렁뚱땅 이야기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다라고 이렇게 인식하는 세뇌를 받았죠.

성경 말씀을 진리를 잘 풀어낸다고 그 복음이 되는 게 아니에요.
오늘 본문은 그것을 완전히 박살 내버립니다.
역시 베뢰아 지역에서도 아첨의 말과 탐심의 탈을 쓰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독특한 것은 ’이 베뢰아 지역 사람들이 신사적이었다.‘ 이렇게 표현하거든요.
신사라고 하면 영국 신사, 사실 영국 신사 들어가면 개판이거든요. 그 시대에
외모만 신사인데. 여기에서 신사적이라는 표현은 뒤에 표현이 나오거든요.

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자리에서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죠. 여러분이 어떤 사람들을 만났을 때 어떤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서 판단을 딱 내려버립니다. ’듣기 싫어‘
어떤 사람은 대화를 하면 ’들어보자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내가 한번 들어보겠다.‘
들은 이후에 그것에 대해서 내가 받아들일지 받아들이지 않을지
사장들은 이렇게 해야 좋은 안건을 많이 끌어모을 수 있지 않겠어요.
그 뒤에 나오는 어떤 말들이 어떤 아이템이 나올지 모르잖아요.
결론부터 들어보면 ’아 그거 들을 만하네.‘

우리들은 결론부터 듣기를 원하잖아요.
그런데 이 베뢰아 사람들은 결론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론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서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이들은 다 유대인 회당 사람들이죠.
그러면 이들은 무엇을 바탕으로 살고 있는 사람입니까? 성경이죠.

비록 헬라인이지만 유대교로 들어왔어요.
유대교로 들어왔지만 이들의 모습은 우리는 신사적이라 이렇게 표현돼 있는데
’고결하다‘ 여러분 이런 사람들이 좋잖아요.
좀 이렇게 진중하고 중후하고 우리 장로님 성함 같은데 좀 그런 어떤 태도
말을 했을 때 가볍게 듣지 않고 잘 들어주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원하거든요.

왜 그렇습니까? 내가 아첨꾼이거든요.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이 아첨의 말밖에 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복음이 중요한데 십자가가 중요한데 인간들은 내가 중요해요. 내가 소중하고
상당히 다르죠. 데살로니가 교회와

우리는 이렇게 비교를 하니까 누가 더 좋아 보입니까?
베뢰아 교회가 더 좋아 보입니까?
아니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더 좋아 보입니까? 베뢰아가 더 좋아 보이죠.
그래서 베뢰아 학파가 생긴 거예요. 김기동
근데 김기동 들어가 보면 신사적이 아니라 완전 개판이죠.
인간의 악마성을 고스란히 다 담아놨어요.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어요. 참 특이하죠.
사도 바울이 아첨의 말을 하지 않고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아서 복음을 전했는데
이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어요.
그러면 이 태도는 어떤 태도인가? 하면요. 배우는 자의 태도예요.
배우는 자의 태도라는 것은 자기 것이 확정되었다라는 말입니까?
확정되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확정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이유는?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진리라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전하시는 이 말씀은 진리의 범주 안에서 벗어났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배격하고 죽여버리는 겁니다.

얼핏 들어보면 이 베뢰아 사람들이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다니까
’굉장히 좋은 태도네‘ 이런 인식이 왜 굳어졌느냐?
예수님을 따라와서 문둥병자가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거는 천박해요. 너무나 즉각적이잖아요. 너무나 자기 욕망을 드러내는 거잖아요.
그러나 베뢰아 사람은 어때요? 안 천박해요.

복음을 이렇게 들려주는 그 과정은요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요.
어떤 사람이 병 낫기 위해서 교회로 왔어요.
얼마든지 올 수 있어요. 우리는 그를 비웃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베뢰아 사람처럼 그게 진리가 있냐?라고 하고 찾아온 사람은 어때요?
그게 천박합니까? 천박하지 않습니까? ’훌륭해 보이죠.‘ 우리들은 판단을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오늘 본문이 너무나 중요한 거예요.
특히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 고학력자들 시대 아닙니까? 모두가 다
배울 만큼 배웠고 모든 것들을 ’나를 설득시켜봐라. 나를 이해시켜봐라‘

복음이 설득이 되고 이해가 됩니까?
그렇게 될 것 같으면 말씀을 가르치면 돼요. 그게 이단들이잖아요.
신천지도 그렇고 뭐 안상홍도 그렇고 다 그렇게 가르쳐요. 개혁주의 장로교도 그렇고
모두가 다 성경을 가르치거든요. ’이렇게 배우면 이렇게 믿으면 됩니다.‘
일종의 그들은 다 베뢰아학파예요.

’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라고 하니까 정말 훌륭한 태도다.
여러분 훌륭한 태도가 아니에요.
지금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인간의 부류가 다양한 겁니다.
다양한 부류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 능력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을 알고 있어요. 여러분도 잘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신사적인 사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 혹시 들어본 적 있습니까? 니고데모라고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선생이죠. 그 장로회 중에 70인 산헤드린 공회 중에 한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 되는데 그 사람은 함부로 판결을 하자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요한복음 7장에도 그렇게 나오죠.

’우리 사람들은 확인도 하지 않고 판결을 내리느냐?
말씀을 근거로 하여서 제대로 알아보고 판결을 내려야지, 왜 이렇게 조급하게 판결하느냐?’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겠다’
한마디만 듣고 돌아가는 이런 태도를 취한 게 아니죠.
끝까지 질문하고 듣고 질문하고 듣고 왜 그렇습니까?
말씀에 대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받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게 받는다고 천국 갈 수 있습니까?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바뀔 수 있어요?

물론 마지막에 이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무덤에 몰약인가 그걸 갖고 오죠.
그걸 갖고 왔다고 해서 구원을 받았느냐? 해석은 두 가지 다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능력을 증가하기 위한 재료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걸 가져온 이유는? 그가 평소에 갖고 있는 사고방식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판단을 했다. 이 사람은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일 거야’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그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해요.
지금 베뢰아 사람들이 복음을 들으면서 말씀을 파고 들어가서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뭘 전했습니까?
앞서서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그리스도라는 분이 해를 받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야 할 것을 성경 전체가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쳤고
동시에 그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증거를 했습니다.
그 내용을 베뢰아에도 똑같이 전한 겁니다.
전했을 때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그런 거에 상관이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그게 믿어졌습니까? 어떻게 믿어지긴요. 주님께서 믿게 하죠.

목사님 그런 방식이 어디 있습니까? 적어도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고 받아들여야 믿죠.
이해되고 납득되고 받아들여서 믿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에요.
나중에 그러면 치매 걸리면 그 믿음 어디 갑니까?
자기가 이해했는데 자기가 받아들였는데 주어 자리에 자기가 있는데
얼핏 읽어보면 베뢰아 사람들이 굉장히 괜찮은 사람들이라 이렇게 보여지는데
꼼꼼히 읽어보면 인간의 악마성이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가?를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구약에도 비슷한 인물이 나와요. 여호사밧이라는 남유다 왕입니다.
이 북 이스라엘 왕, 아합 왕이 ‘길르앗 라못이라는 옛 영토를 우리가 뺏자 아람에게서 뺏자’라고
이렇게 ‘연합군을 결성해서 뺏자’라고 이렇게 제의가 왔을 때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 왕에게 내려가서 아합에게 내려가서 연합군을 이렇게 결성합니다.

그런데 먼저 질문을 하죠.
여호와께 물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까?라고 하니까
이 아합왕이 자기를 지지하는 선지자 400명을 끌고 옵니다.
그 400명의 선지자, 오늘날로 말하면 기름 부음 받은 거룩한 종, 목사들이에요.
왕이 신임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신임하는 그러한 목사라는 거예요.

우리들이야 거짓 선지자라 하지만
그들은 거짓 선지자가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하나님의 영을 받은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우신 선지자예요.
그들의 예언은 ‘이 전쟁에 올라가면 승리할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죠.
그러자 여호사밧 왕이 좀 신중해요.
하나님의 뜻을 더 명확하게 알고 싶은 겁니다.
우리는 명확하게 알고 싶은 것을 좋아하잖아요.
그게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명확하게 알고 싶어서 질문을 했을 때 미가야 선지자를 소개하는데
이 미가야 선지자는 아합 왕이 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꼭 예수님 같은 분이죠.
‘예수님 자신만이 빛이고 너희들은 어둠이다. 너희들 하는 모든 일은 악하다’
제가 앞서 설교에서 말씀드렸잖아요.
‘인간이 하는 모든 말은 아첨의 말이고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은 탐심의 탈을 쓴 행위’라는 거예요.

미가야 선지자가 하늘의 천상 회의를 목격하고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그 내용을 여호사밧 왕과 아합왕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면 여호사밧이 그렇게 꼼꼼했다면 미가야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되잖아요. 듣지 않습니다.

왜 듣지 않느냐?라고 할 때는 지금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렇게 신중해도 결국은 신중함이 누구를 위한 신중함인가?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신중함이에요.
인간들이 무슨 일을 할 때 이게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를 묻죠.
왜 묻습니까? 묻는 이유가 뭐예요. 목적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이면 그 결과에 대해서 어떤 누구에게 책임이 있어요? 하나님께 책임이 있죠.
그리고 하나님이 뜻이면 결과가 긍정적입니까? 부정적입니까? 긍정적이죠.
노림수가 거기에 있었던 거예요. 질문하는 자체가

신중하다. 신중한 이유가 뭐냐? 성도는 신중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기도하고 주님께 묻고 살아가야 돼요.
그 말은 ‘신중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너를 믿지 말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기도하고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신중해야 된다는 거예요.

너의 선택에 조심조심해서 찬송가 있듯이 친구를 골라서 사귀고
주님은 네가 어떻게 해도 자기 백성이라면 십자가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사용해 버립니다.
신중해서 내가 선택을 하면 결국은 그 영광이 자기에게 돌아오게 돼 있어요.
내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았기 때문에 결과가 이렇게 돌아왔다라는 거예요.

만일에 결과가 부정적이면 ‘내가 좀 더 신중했어야지’
자기를 계속해서 쳐서 자기를 낮춥니다. 신이 된 인간의 악마적 모습이에요.

‘베뢰아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런 사람만 있으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 악마성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이 베뢰아 사람들을 붙여주신 거예요.
세상에 이런 사람들도 있거든요. 그런데 이런 사람 치고 예수 믿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여러분들도 복음을 전해보면 이렇게 ‘아 그게 그렇습니까 맞습니까’
결국은 끝까지 질문하다가 질문으로 끝나버려요.
그런 분 못 만나봤어요. 앞으로 만나게 될 겁니다. 복음을 전하면

(행17:11하)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러면 결론이 어떻게 돼요?
날마다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상고했으면 그다음 어떻게 돼야 돼죠?
‘믿었더라’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봅시다.

(행17:12)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성경에 누가가 기록할 때 긍정적으로 기록했죠.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많다’라는 말, ‘적지 않다’는 말 이것은 누구 쪽에서 표현한 말이죠?
우리들 세상이 말하는 숫자 개념이 아니에요.
주님 나라의 숫자 개념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숫자 개념입니다.
한 사람만 있어도 많은 거예요. 물론 숫자가 한 사람은 아닙니다.

없잖아요. 원래 한 사람도 없었어요.
모두가 어두움이었는데 그중에 두 사람만 있어도 한 사람만 있어도 세 사람만 있어도 많은 겁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함께 한다’는 이 말씀이
우리의 자기 변명으로 그 말씀을 사람들이 사용할지 모르지만
그 말씀의 의미가 어떤 의미인가요? 인간들은 수와 양으로 계산을 하잖아요.
천국은 수와 양으로 계산이 안 돼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몸은 두 사람이 있어도 자체가 완벽합니다.
왜 그러면 예수님이 ‘한 사람만 있어도’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처음 창조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죠.
그러면 예수님 있고 나 있으면 안 됩니까? 그거 안 돼요. 두 사람 이상입니다. 반드시
십자가가 나오려면 두 사람이 돼야 돼요. 그래서 두세 사람이라고 표현을 하는 거예요.

복음을 전했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서 신사적이어서
대놓고 바로 반박하지 않고 따져 들어갔습니다. 따져 들어갔는데 믿는 자들이 있었어요.
그러면 우리들은 논리가 ‘아, 이들이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여 그러한가’ 하여 따져보니까
‘아 이게 맞네요. 그래서 믿었더라’ 이게 우리들이 갖고 있는 결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그런 자도 있죠. 그런 자는 가짜입니다.

지금 성경에서는 가짜 진짜를 먼저 드러내는 게 아니에요.
먼저 교회 밖에 있는 자를 교회 안으로 끌고 옵니다.
끌고 와서 교회 안에서 가짜 진짜를 가려내죠. 지금 사도행전이 계속해서 그렇게 진행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랬고 마술사 시몬도 그랬고요.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이단들이 다 교회 안에서 등장하거든요.
일차적으로 먼저 심판하죠. 꼭 구약과 동일해요.
이스라엘을 먼저 선택해서 만들어 놓고 이스라엘 안에서 심판을 해버립니다.
이스라엘 구원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행17:12)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했다
 
이것을 통하여서 복음의 위력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의 위력은요 그러한가 하여서 상고해서 비교 대조해서
‘아 이게 자기 스스로 판단해서 이게 옳다’라고 해서 믿을 수 있는 복음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똑같잖아요. 모든 사람이 지금 조건이 똑같아요.
모두가 다 신사적이에요. 모두가 말씀을 굉장히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는 겁니다.

그럼 우리들은 분석하죠. 어떻게 믿었을까? 어떻게 믿지 않았을까?
우리 쪽에서는 아무리 분석해도 안 나와요.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났습니까? 십자가 사건이 현재죠.
예수님이 달릴 때 강도 둘이 있었잖아요.
한쪽 강도는 구원받고 한쪽 강도는 지옥 갔잖아요.
그 현상이 복음이 전파되는 자리에서 똑같이 일어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30년 40년 전의 사건이라도 20년 전 14년 전의 사건이라도
그 십자가 사건이 한 번의 사건이 영원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겁니다.

누구를 통하여서? 자신들의 예수님의 증인을 통하여서
성령을 받은 자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래요.
이 ‘않고’라는 표현을 잘 이해하세요.
‘십자가만 전했다’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가 볼 때는 그 말이 무슨 능력이 있냐?라고 하지만
그 말이 말씀이 되죠.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지난주에도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그들이 이 바울의 말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않았다’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 말씀 들으면 되겠네요.‘ 이 이야기가 아니에요.
제자들도 얼마나 예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들으려고 했습니까?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가 않아요.

사람들 눈에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디모데와 그들이 함께 복음을 전한 것 같지만
바울의 눈에는 십자가 지신 주님이 다 이루셨음을
그 십자가 사건을 반복시키는 과정 속에서 그 현장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내고 계시는 겁니다.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동일한 복음을 듣고 동일하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상고하는 사람인데
한쪽은 구원을 얻고 한쪽은 구원을 얻지 못해요.
이들은 마치 누구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가룟 유다와 나머지 열한 제자죠.
모두가 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
마지막 유월절을 잡으시기까지도 그들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지,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저주할지 아무도 몰랐던 겁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심판주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열두 제자가 선택을 받았고 그중에 하나는 마귀로서 예수님을 팔아먹고
나머지도 동일하지만 나머지는 긍휼을 입어서 긍휼의 그릇으로서
십자가를 자랑하는 그 은혜를 마음껏 뽐내는 주님의 증인으로 삼으신 겁니다.

특히 오늘날 같이 이 지식을 좋아하는 정보를 좋아하는 사회잖아요. 정보 사회잖아요.
지금은 지식을 내 머릿속에 가질 필요가 없는 사회죠. 검색을 잘 하면 돼요.
키워드만 잘 알면 웬만한 것은 다 소유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어떤 풍조가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온 거예요.

마치 지식을 제대로 갖추면
그리고 지식을 대하는 태도가 이 베뢰아 사람처럼 된다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 생각을 하는데
오히려 이러한 태도가 구원을 방해하는 겁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베뢰아 사람들도 동일해요.
말씀을 좀 배우면 말씀을 많이 알면 우리는 모두가 다 베뢰아 사람처럼 되려고 하거든요.
베뢰아 사람처럼 아니면 뭔가 좀 천박하고 무식하게 보인단 말이에요.

구원받은 강도가 뭐 이런 지식이 있었습니까? 먼저 주님이 찾아와 버렸죠.
사도 바울 본인을 보세요. 사도 바울도 평소에 이런 태도를 가진 거예요.
말씀에 대해서 진중하고 신중하고 그러나 악령이 덮어 쓰이니까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잖아요. 그가 말씀을 상고해서 구원을 얻은 게 아니에요.
주님이 찾아오셔서 구원을 받은 겁니다.

주께서 십자가의 능력을 일으키는 그 현장은요 너무나 다양해요.
어떤 일관성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똑같은 현상은 이 십자가상에서 구원받은 그 강도처럼 구원받는 그 모습만이 동일해요.
그 과정들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어떤 것도 정형화시킬 수 없는 겁니다.

어떤 교회는 이런 베뢰아와 같은 교회가 되기를 원하고
어떤 교회는 데살로니가와 같은 교회가 되길 원하고
그 자체가 아첨의 말과 탐심의 탈을 쓴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피를 빼버리는 이유는?
십자가의 피를 자랑하지 않는 이유는?
그 십자가의 피 자체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번 보세요. 신기하죠.
복음을 전했는데 십자가 복음을 전했는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지옥갈 자와 천국갈 자가 확 갈라져 버리죠.
이것이 바로 주님이 살아계셔서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주셔서
증인 삼은 자들을 통하여서 드러내시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아첨의 말만 하고 탐심의 탈을 쓴 모습으로 살아가는 죄인임을 보게 하시고
십자가에 피 능력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이 십자가 지신 주님이 살아계셔서
친히 일하시는 현장임을 목격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살아있는 십자가 사건 속에 참여하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관리자 22-04-22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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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7 복음을 전하는 방법

복음이 전파되는 방식은 여러 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복음이 잘 전파될 거라.
복음은 언제든지 잘 전파돼요. 어떻게 되어도

근데 어떤 방법을 쓰면 복음이 잘 먹힐 것이다.
그래서 전도 폭발 훈련 같은 걸 갖고 복음을 전하는 비법을 전수하죠.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고 믿는 자가 생긴다.’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사람에게로 말미암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오전에 우리들이 살펴본 뵈뢰아 지역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상당히 이상적이죠.
복음을 접하는 그 모습, 이상적인 모습이고
다음 시간에 살펴볼 아테네에서 일어나는 그 사건도 사실은 이상적인데
약간 어떤 면에 있어서는 극과 극인 것 같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동일한 그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데

빌립보 감옥의 그 간수나 그 가족들이 믿는 믿게 되는 그 과정,
아니면 루디아가 믿게 되는 과정,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믿게 되는 과정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살펴본 베뢰아 사람들이 믿게 되는 이 과정들을 보면 다 달라요.
다 다르다라는 것은 주님의 일은 주님이 홀로 하신다라는 겁니다.

다르다는 것이 왜 주님이 홀로 하셨느냐?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하면
인간들은 항상 그 정답을 찾아내거든요. 복음은 이렇게 전하면 됩니다.

성경은 거꾸로예요.
이렇게 전해도 복음은 전파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이 하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구원이 되지 않는다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의 모든 방법을 복음 전파에 동원시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인간들이 가장 잘 믿을 수 있는 조건이라고 할까요?
그걸 이야기하자면 예수님이 심판주죠.
‘심판주를 직접 보여주면 믿겠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우리들도 은연 중에 그러한 기대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나님이 보고 싶지 않았겠어요.
물론 하나님을 보면 살 자가 없기 때문에 보고 싶지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 같은 경우에는 좀 보여달라고 요청을 하잖아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접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을 것이다’.
그런 생각은 이방종교에서나 유대교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많은 간증들이 있잖아요. 기독교에서도 간증들이 많고요.
주님을 만났고 체험했고 그것들이 과연 믿음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느냐?라고 할 때는
이미 사복음서에 확정되었습니다.
십자가의 피 능력 외에는 믿음이 절대로 생겨지지 않는다라는 사실이죠.

그래서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 속에 여러 가지 방법들이 나오는데
이 방법들이 나오는 이유?는 ‘아니오’를 말씀하기 위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아니오’를 설명하는 차원에서 오늘 오전 설교와 정반대로 말씀을 드린다면
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런가 하여 상고하여서 믿어지게 되었을 때
그들의 고백은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그러하여 상고해서 믿어진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간증과 정반대죠.
오늘날 교인들이 하는 이야기와 정반대입니다.
말씀이 그런가 하여서 상고해 보니까
이 말씀은 ‘도리가 있더라’ 이쪽 동네 말로는 ‘여우따울리(有理)’라고 하거든요. 도리가 있다.
정말 이해가 되고 정말 하나님이라면 그럴 것이다.
‘그래서 내가 믿겠다.’ 이렇게 믿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다 가짜에요.
왜 가짜냐?라고 할 때는 그 안에 자기 부인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오늘 본문을 보면서 속죠. 누구에게 속느냐?라고 하면 주님께 속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은 지옥 갈 자들은 완벽하게 지옥 가게 하는 언약이거든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살해하잖아요.
그들이 살해한 그 바탕이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그 약속을 근거로 하여서 믿음을 만들어 내었고
그 믿음의 범주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죽여버리는 겁니다.

자기 부인의 능력은 인간으로부터 나올 수가 없어요.
오직 십자가 지신 주님께서 성령을 주실 때만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보면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상고하고 그래서 믿는 과정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여기에는 단절이 있죠. 여기에는 십자가 사건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여기에 십자가 사건이 들어가지 않으면 성경이 다 어떤 식으로 해석되느냐?라고 할 때는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가 구원받는 그 조건이
‘달려보니까 더 이상 인생을 믿을 수가 없구나.
이제 곧 죽으니까 저분이라도 한번 믿어봐야 되겠다.’
이건 단절이 아니에요. 나의 연속성이죠.

거짓 나사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로기 때문에 구원 받은 게 아니에요.
거지기 때문에 구원 받은 게 아닙니다.
거지로서는 구원받을 수 없죠.

부자도 마찬가지고요. 부자라고 지옥 가는 게 아니에요.
원래 다 지옥 갑니다. 어느 누구도 천국 갈 자가 없어요.
부자의 특징은 연속성을 주장했죠. 복음을 전하면 죽은 자가 살아나면 믿을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전파되었으니까 그들이 듣고 믿지 않았느냐? 아니에요.
주께서 믿게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항상 무엇을 목격해야 되느냐? 할 때는
‘나는 아니고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 자기 백성을 십자가에서 완료하신
그 완료성을 증인들을 통해서 드러내시고 보여주시는구나’ 그걸 목격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이 한 일이 주의 일이 되고
주의 일이 되면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베뢰아 사람들도 이 정도 되면 자랑할만 하잖아요.
우리는 말씀을 허투로 듣지 않았고 이것이 그러한가 해서 열심히 상고해서 들어보니까
약속대로 메시야가 그리스도가 예수님이 맞더라.
그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 맞더라.
그래서 믿었다.

그런 믿음이 장악된 곳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2천 년 기독교 역사죠.
그래서 결국은 그들이 내세우는 게 교리입니다.
진리 지식을 내세워서 그것을 고백하기만 하면 네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하죠.
여기 어느 곳에도 십자가의 피 능력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말은 하더라도 이용만 할 뿐인 거예요.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모든 방법이 복음을 전하는 방식입니다.
내가 상당히 반대되는 이야기를 드리는 것 같지만
모든 것들이 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식으로서 이용이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