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5-01 12:18
사도행전 강해 72강 행 17:17-25 철학, 우상 숭배와 복음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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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Ek5UF7pE8bc

관리자 22-05-0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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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72강 철학, 우상 숭배와 복음

기도하시겠습니다.
의인 아벨에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어
아골 골짜기에서 불태워져야 마땅한 죄인들을 십자가 피 공로를 증거시키기 위하여
생명의 말씀 앞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한 줌 안개와 같은 인생 속에 생명의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닌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짐에 감사합니다.
또한 외식하는 소경인 우리들의 눈을 뜨게 하시어 십자가만 밝히 보이도록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사자를 통하여 선포되는 말씀과 성도 간의 교제를 통하여
우리 안에 권능으로 임재하시는 성령님의 홀로 일하심을 보게 하시고
오직 십자가 외에는 모든 것이 배설물로 여겨지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잠언서 21장 21절에서 22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1:21~22)
21 공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얻느니라
22 지혜로운 자는 용사의 성에 올라가서 그 성이 의지하는 방벽을 허느니라

기도하시겠습니다.
공의와 인자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러나옴을 저희들에게 알려주시고
저희 인생을 십자가 안에서 주님의 긍휼만을 자랑하는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저희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사도행전 17장 17절에서 25절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행17:17~25)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19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수 있겠느냐
20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사도 바울이 아테네, 우상의 도시죠.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모습은 우상의 소굴이었습니다.
‘우상의 소굴이라’ 이렇게 말을 하면 우리는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것과 대조하느냐?라고 할 때는 예루살렘과 대조하여 우상의 도시를 비교하죠.
오늘날로 말하면 절간하고 교회를 비교하잖아요.
‘교회는 절간과 다르다. 교회는 무당이 굿을 하는 것과 다르다‘ 이런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무엇이 중요하냐? 라고 할 때는 물론 앞서서 이방인들이 구원으로 들어오는 사건들이 있었지만
17장을 통하여서 이방의 세계가 과연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아주 분명하게 또렷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이 이방의 나라가 이스라엘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이 회당에서도 복음을 전했고 아고라에서도 복음을 전했는데
회당에서나 아고라에서나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죠.
우리 카톡방에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 뻔하지만,
생명을 전하는 바울과 철학을 이야기하는 자들,
그리고 그 철학을 이야기하는 자들 외에 우상을 섬기는 자들
다양한 무리들이 이 속에 섞여 있었을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에피쿠로스학파나 스토아학파, 그 당시의 주류는 스토아학파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 양대 학파가 그 시대를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것은 ’야 철학자들이니까 우상을 섬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철학자들이 그 시대를 어떻게 표현할까요? 장악은 하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그 주류와 같은 그 시장마다 아고라마다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면
우상숭배와는 좀 거리가 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우리들이 갖게 되거든요.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철학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좀 답답함을 느끼죠.
철학이 나오면 머리 아프잖아요.
물론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긴 있지만, 그건 몰라도 됩니다.
그거 알라고 이 성경을 기록한 것도 아니고요.
’만일에 그거 알아라고 알아야 복음을 안다’라고 하면 사도 바울이 에피쿠로스학파가 뭘 주장했는지,
스토아학파가 뭘 주장했는지, 그 얘기를 소상하게 기록했을 겁니다.
물론 그들이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거기에 대해서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사도 바울이 마치
그 당시에 철학자들이 하는 말들을 끌고 와서 복음을 전하는 것 같거든요.
우리가 방금 읽었지만요.
사도바울이 하는 말 중에 방금 ‘알지 못하는 신’ 이런 용어들이 다 그 당시에 갖고 있는 용어고,
그리고 철학자들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갖고 와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복음을 전할 때 철학적 용어를 갖고 오면요.
‘그것은 철학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요.
오늘날 신학은 다 철학입니다. 목사들이 내뱉는 모든 이야기들은 철학 속에 다 담겨 있어요.

철학자들이라고 하면 ‘우상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 이렇게 해서 예상을 하는데
놀랍게도 아테네는 우상의 도시에요.
여러분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철학자들이라면 나를 믿어야 되지 않나요? 나를?
자기를 믿어야 되지 않나요?

그런데 이 철학자들이 적지 않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 지역에 우상이 가득 찼다라는 것은
이들이 양다리를 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 보겠지만 사도 바울이 설교를 할 때
그 상대들은 에피쿠로스학파도 있고요 스토아학파도 있고
그리고 우상숭배자들이 있는데 이들을 한 묶음 취급해 버립니다.
‘종교성이 많도다’

아마 오늘날 철학자들에게 ‘종교성이 많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뭐 김용옥이나 아니면 좀 똑똑한 철학자들 많잖아요.
그들에게 ‘종교성이 많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이 사람이 미친 소리를 하냐. 우리가 무슨 종교성이 많으냐?’ 이렇게 아마 따질 겁니다.

뭐 악마에게 속한 자들은 자기 자신이 어떠한 성품을 갖고
어떠한 성향을 갖고 움직이는지를 몰라요. 악마의 종은요 다 종교성이 많아요.
그 말인즉슨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도 똑같다.’ 이야기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했습니다.
이것을 전할 때 질문이 튀어나올 거고 여기에 대한 설명이, 설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죠.
가르침이라고 볼 수도 있고요. 선포라고도 볼 수 있고 표현은 다양합니다.

복음을 전하니까 ‘예수님이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이 내용이 나오지만 뒤에 보면 ‘그분이 심판주가 되셨다.’
그리고 앞부분에 우리가 읽어본 바와 같이 ‘모든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시다’
이렇게까지 들어가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심판주가 되셨고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들을 주관하시고 친히 다스린다는 겁니다.
이 한마디만으로도 에피쿠로스가 날아가고요. 스토아가 다 날아가 버립니다.
왜 날아가느냐?라고 할 때는 어떤 철학이 되었든 그 철학의 중심은 인간이거든요.

오늘날 주류는 니체거든요. 니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내가 신이다’라는 이야기예요.
물론 ‘신은 죽었다’는 말이 그 당시에 종교성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맞긴 맞아요.
정당한 비판을 하면 뭐해요? 옳은 것이 진리가 됩니까?
옳은 것이 진리가 안 돼요. 선악 개념을 다 박살 내버리거든요.
이 스토아학파가 그런 경향이 있거든요. 선악을 넘어서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이것은 악해 이것은 너무 선해’ 그런 생각까지 하지 말고
‘모든 것이 신의 뜻이다. 로고스의 뜻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설사 어떤 사람이 나를 죽인다. 할지라도 죽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죽일 때 네가 죽이지 말고 내가 죽겠다라는 거죠.
어떠한 선택도 내가 한다는 겁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선의 기준은 ‘나‘라는 거거든요.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해서 온 세상이 있고 만들어졌다.
그분이 지금도 이 자리에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일하고 계신다.’
이런 이야기를 그들과 논쟁을 하면서 복음을 전한 거예요.
복음이라는 것이 고상하게 전파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에게 비아냥대기도 하고요. 거기에 대한 변론도 하고요.

그 변론할 때 사도 바울이 뭐 신처럼 대단했겠어요?
치열한 싸움을 벌여요. 죄인이 복음을 전하지 의인이 복음을 전하는 거 아니거든요.
만일 의인이 복음을 전해버리면 바울을 주목하고 바울을 우상화시켜버립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식으로 복음은 전파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이런 복음을 전하니까 사람들의 평가가 둘로 갈려집니다.
지금까지는 복음을 전할 때 둘로 갈려졌거든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핍박하는 자와 이 복음 속으로 들어오는 자, 이렇게 갈려져 있는데
이 아테네에서는 두 쪽으로 갈려져 있는데 한쪽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행17:18)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이게 말쟁이가 나오죠. 말쟁이
(십자가 새 언약 교회의 예배는 10시 40분에 시작됩니다.)
이 말쟁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 하면요.
여러분이 그런 경험이 많았을 겁니다.
제가 한 20몇 년 전에 한국에 있을 때 길거리에 보면요.
온갖 것들을 다 보따리에 메고 짊어지고 다니는 머리를 헝크리고 다니는
그런 혹시 약간 정신이 나간 그런 사람들을 보셨습니까? 자주 띄었거든요. 제가 있을 때
이 동네는 그런 사람을 보기가 되게 어려워요. 청소가 되었는지 그거는 모르겠지만
한국에 있을 때 그런 사람을 자주 보거든요.

이 말쟁이라는 말은요 어떤 의미인가? 하면 논리도 없고 논리도 없고요.
뭔가 합리적 추론을, 합리적 사고가 가능한 것들도 없고요.
철학자들은 천재거든요. 이들이 바보들이 아닙니다.
이 천재들은 논리성을 따지거든요. 논리성
만물의 기원부터 출발해서 만물이 뭐로부터 기원하느냐? 불로부터 출발하느냐?
물로부터 출발하냐? 흙으로부터 출발하느냐? 그러한 사상들을 다 깔고 있어요.
그래서 그 논리를 꿰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죽어서 어디까지 가는가? 죽음의 의미가 뭔가?
그 죽음에 대한 모든 것들에 대한 답을 갖고 있는 자들이에요.
기독교도 죽음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이야기할 때
그 답이라고 이야기할 때는요 내가 인간이 이해가 되고 설득이 되고 납득이 돼야 돼요.
그런데 바울의 복음을 들어보니까 이건 완전히 짬뽕이야 짬뽕.

그래서 말쟁이라는 이 헬라어 단어가 어떤 의미인가? 하면요.
온갖 잡동사니 옛날에 그 고물상이 있죠.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우리 동네에 고물상들 그 사람들이 다 갑부거든요.
얼마 전에도 우리도 이사 간다고 고물상 부르면요.
좋은 거 있어도 이거 얼마 안 해요. 이거 못 써요. 그러면서 필요 없다. 그러면서 다 들고 가요.

그 고물상 리어커입니까? 그 당시에 리어커에 온갖 잡동사니들이 다 실려 있잖아요.
그 온갖 잡동사니들이 다 실려 있는,
그 실려 있는 그 내용물들을 끄집어낼 때 일관성이 있어요? 없어요?
들어있는 자체가 잡동사니니까 무슨 일관성이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경운기가 이 고장이 나서 분해가 되어서 그 부속품들이 다 이렇게 해체가 되어가지고
리어커에 실렸다면 하나씩 뽑아내면 일관성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 속에는 숟가락도 있고 고무신도 있고 젓가락도 있고 별별게 다 있잖아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니까 그들의 귀에는 말쟁이로 들리는 겁니다.
말쟁이란 말은 자기가 나오는 대로 막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우리 동네 말로는 ‘주깬다.‘ 그러는데)
막 이야기를 하니까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알아듣죠.

제가 일전에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을 나온 아주 중고등학교 아주 친한 친구가 있는데
요즘은 뭐 거리 두기가 돼가지고 안 만나려고 하죠. 서울에 큰 교회 담임 목사가 됐는데
제가 복음을 이야기하면 ’도대체 네가 말하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래요.
복음이라는 자체가 이들에게는 철학자들에게는
그 논리성을 갖춘 이들에게는 말쟁이의 말로 들리는 겁니다.
여러분이 그걸 아셔야 돼요.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면요. 말쟁이의 말이에요.
말 잘한다가 아니고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무슨 헛소리 하는 거야‘ 이렇게 평가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위한 세상이다.‘
그러면 당장 이 속에서 튀어나오는 게 그러면 우리는 뭐냐? 이거예요. 우리 뭐냐?
그러면 ’뭐긴 뭐야 불살라질 죄인이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럼 우리 살 필요 없네.’ 그럼 죽어라 이야기해요. 성경은

대화가 됩니까? 그건 아니고 예수님을 보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을 만들지 않았느냐?
그러면 지옥은 왜 만들었어요? 그런 하나님이라면 지옥을 안 만들어야죠. 지옥을 안 보내야죠.
진짜 사랑의 예수님이라면 가룟 유다를 지옥 보내면 안 돼요.
삼년 동안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함께. 모든 것을 버리고 쫓았는데요.
그런 제자를 버리는 게 사랑의 예수님입니까? 구약을 전혀 이해를 못해서 그래요.

정말 인자하심이 영원한 분은 어떤 분인가? 하면요. 이방 나라를 진멸하는 분이예요.
어린아이도 배 속에 있는 아이까지도 다 죽이는 분이 인자하신 하나님이에요.

이 철학자들이나 우상 숭배자들,
우상 숭배자들이라 하니까 우리는 무식하다고 생각하는데 무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불교에 있는 그 중들이 무식합니까? 얼마나 똑똑합니까?
물론 밑에 있는 사람들이나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걸로 끝나지만
그 윗대가리에 있는 사람은요 저보다 공부를 더 많이 했고 더 똑똑해요.

우상숭배자 하니까 정말 사람들은 우습게 여기는데 그런 게 아니에요.
나름대로 논리와 경험과 모든 것들이 다 갖춰져 있어요.
무당에게 가서 물어보니까 이렇게 하면 청와대에 안 들어가야 오래 산다 하니까
죽어도 안 들어가잖아요. 발도 안 디디잖아요. 여러분이 뽑은 대통령

그런데 그런 말을 왜 믿느냐?라고 할 때는 대통령에 당선됐잖아요.
그러면 점쟁이의 말이 신뢰성이 가거든요.
그 점쟁이라는 게 별게 아니고 과학이거든요.
유능한 점쟁이는 많이 맞추고
정확도가 프로테지가 10% 이상이 아니라 80% 90% 되면 유능하잖아요.
이 우상 숭배자들도 대놓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왜 아테네는 이 수많은 우상을 만들어 놓았는가?
철학자들도 마찬가지잖아요.
과거의 철학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걸 계속 만들어내면서 더 완벽한 것을 만들어내잖아요.
그러면 우상을 왜 많이 만들어내느냐? 누락이 생기면 안 돼요.
혹시 이쪽으로부터 저주가 들어올까 싶어서 이것도 막고 저것도 막고 다 막는 거예요.
우리가 볼 때는 잡동사니라고 생각하죠. 아니에요.

일본에 가면 신들이 수십만 가지라고 이야기하는데 일본만 그렇습니까?
대한민국도 집집마다 들어가 보세요.
교회 온 지금 한 30명이 100명이 천 명이 앉아 있으면 자기들이 믿는 신이 다 다른데요.
’나는 죄인입니다. 십자가 뿐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몇 프로 될까요?

아테네 사람들이 무식해서 심지어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신까지 믿는 것이 아니에요.
오랜 경험과 그 노하우가 그들 속에 가득 찬 겁니다.
사업을 순식간에 잘할 수 있습니까? 노하우가 쌓여야되잖아요.
이렇게 하면 이 돈의 흐름을 끌고 올 수 있고 막을 수 있고

이 저주와 축복도 마찬가지죠. 이렇게 하면 축복이 들어오고 이렇게 하면 저주가 막혀지고...
이러한 논리성을 갖춘 그들이 복음을 듣기에는 그야말로 이 말쟁이에 불과한 겁니다.
이게 한쪽의 평가예요.
다른 한쪽의 평가는 어떤 평가냐?라고 할 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행17:18중)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잖아요.
수많은 종교들 중에 하나다.
복음을 전하면 이 두 가지 이야기를 꼭 들어야 됩니다.

두 가지 반응 외에는 나오지 않죠.
네 종교는 네가 믿고 내 종교는 내가 믿는다.
신들이 수도 없잖아요. 수도 없으니까
종교라는 것도 수도 없으니까 ’그중에 하나일 거다‘ 이렇게 평가를 내리는 겁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아는 사람이 그런지는 모르지만요.
교회 다니는 사람이 당황하는 게 뭔가? 하면
’너 예수 믿는 것도 하나의 너의 신앙이고 내가 믿는 것도 나의 신앙이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뭐라고 이야기해요? 박수쳐주면 돼요. 박수쳐주면

지금 여기 나왔잖아요. 이게 복음의 위력이에요.
그 사람들 눈에는 자기가 목숨을 걸만한 복음이 없는 겁니다.
목숨은 걸지 않고요. 혹시 알지 못하는 신이잖아요.
혹시 모르니까 이 다리를 하나 걸쳐놓아 보는 거죠.
그래서 강력하게는 부정하지 않죠.
근데 복음이 들어가면 강력하게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 18절에 보면

(행17:18하)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복음을 전하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오늘날 교회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저거는 하나의 분파다‘

기독교에 수백 개 분파가 있잖아요.
세분화해서 더 들어가면요. 우리까지 들어가면 수천 개 넘을 거예요.
각자 다 옳다 하는데 뭐가 니만 옳은 게 어디 있냐? 이 얘기거든요.
그러면서 바울을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행17:19하)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수 있겠느냐

아레오바고는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있는 그 신전, 아테네 신전 아래쪽에 있어요.
국경이 풀리면 한번 놀러 가보세요.
거기 올라가서 설교도 한번 해보시고 별로 대단하게 큰 게 아니에요. 조그만 해요.
그냥 돌덩이 위인데, 광장도 우리가 생각하눈 것만큼 안 커요. 언덕위니까 조그만 합니다.

그쪽으로 데리고 가면서 이들이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철학자들인지 우상숭배자들인지 이렇게 분별해주면 좋은데
성경은 그런 식으로 기록이 안 돼요.
왜냐하면 한 뭉텅이로 보면 모두가 다 악마의 종이거든요.
그래서 이들이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이렇게 질문을 하면서

(행17:20)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왜 그러느냐? 그 뒤에 설명이 나와요.

(행17:21상)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이 나그네 된 외국인들도 왜 여기에 왔느냐?라고 할 때는 철학에 심취해서 온 거예요.
철학이라고 생각하니까 사변적이라 생각하는데 이 당시나 지금이나 철학은요 구원용이에요.
물론 구원용을 이야기하면 이 시대에서는 왕따 당하죠.
그래서 아무리 자기가 철학한다고 해도 하나의 견해일 뿐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 이들은 이게 구원이에요.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는 자기들의 단체를 통한 구원을 주장하는 거거든요.
에피쿠로스 같은 경우에는 평안이거든요. 평안
쾌락이라고 우리가 들었잖아요. 쾌락주의라고 중고등학 때
그 쾌락이라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쾌락은 아니고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 정도로 유지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는 것, 이게 신의 세계거든요.
죽으면 가봐야 되는 거고 그런 거는 생각할 필요도 없고

스토아학파 같은 경우에는 쉽게 말하면 도인입니다.
전혀 요동하지 않는 평안을 추구하는 자들이거든요.
그게 구원의 길이거든요. 그러한 것들을 이들이 추구합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왜 듣고자 하느냐?라고 할 때는
이들은 자기의 것에 대한 확신이라는 것이 완벽하지 않잖아요.
어떤 것도 확신하는 게 없거든요. 인간이라는 자체가

여러분이 이전 교회 다닐 때
’확신합니다. 믿습니다‘ 해도 이 의심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튀어나오거든요.
이들도 혹시 뭔가 새로운 것이 있지 않을까?
이것보다 더 좋은 진리가 나오면 따라가겠다는 거거든요. 한번 들어보겠다.
그래서 이들의 특징이 뭔가? 하면

(행17:21하)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이들이 시간을 할애해 줄 때는 기존에 있던 이야기는 안 들어요.
새로운 걸 이야기하면 듣죠.
오늘날 교인들과 정반대죠.
오늘날 교인들한테 새로운 이야기하면 ’이단 아니냐?‘ 이래 나오거든요.

근데 이들은 새로운 이야기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입니다.
이런 태도를 보면 꼭 베뢰아 사람 같지 않습니까?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때는 ’어쨌든 한번 들어보자‘ 신사적이거든요. 이 정도 되면
이 정도 되면 복음을 전할 만하잖아요.

근데 요즘은 누가 듣습니까? 아예 안 듣죠.
이미 그들마다 기독교라는 것이 이 정리가 돼 있잖아요. 언론을 통해서
그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주님께서 아예 복음을 못 듣게 언론을 통해서 거짓 것을 믿게 해버리죠.
주님의 일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왜 언론이 기독교를 비판해서 비난해서 복음도 못 전하게 하느냐‘ 이렇게 하는데
도대체 누구를 원망해요?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이제 복음을 전하죠.
전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놀랍습니다. 무엇이 놀라운가? 하면요.
구약 이스라엘을 고스란히 갖고 와서 지금 아테네에 고스란히 박아 놓았어요.
그래서 제가 처음 설교 시작할 때 이 17장 이 내용이 이 복음이라는 것이
이스라엘 중심이냐? 아니면 전 세계를 다 포함하고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 분명히 하는 내용이라 그리 말씀드렸죠. 이렇게 얘기합니다.

(행17:22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종교성이 많도다‘ 경건에 대해서는 특별하다라는 겁니다.
왜 종교성이 열심입니까? 왜 사람들이 조상 제사를 열심히 드려요? 그거 다 종교거든요.
왜 드립니까? 님이 그리워서, 님이 그리우면 매일 그리워해야지 왜 제삿날 그리워해요?
혹시 혹시 저주가 미칠까 해서.

’종교성이 굉장히 많다‘ 이렇게 표현을 했을 때
아테네 사람들을 대표로 해서 모든 인류가 그러하다라는 겁니다.
이것을 구약으로 들어가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출을 하셨잖아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출을 하셨을 때 그들의 모습을 보면요. 범사에 종교성이 많아요.
물이 없으니까 물을 달라고 하고요 떡이 없으니까 떡을 달라고 하죠.
이게 종교성이에요.

신이라면 우리에게 먹을 것을 줘야 되잖아요. 우리를 살려야 되잖아요.
나중에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한 그 시내산에 올라가서 늦게 내려오니까
그 아래에서 그들이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뭐라고 합니까?
이 황금 송아지야말로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한 우리를 위한 신이라고 하면서 잔치를 벌이잖아요.
또 범사의 종교성이 누구보다 많았던 자들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행동을 하느냐?
광야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였지만 광야에서는 끌려다니잖아요.
끌려다니니까 그래도 종교성이 조금씩밖에 안 드러나요.
근데 약속의 땅에 정착을 하게 되니까 정착하게 되면 먹고 사는 게 중요하잖아요.
’먹고 사는 게 중요합니까? 복음이 중요합니까?‘ 이렇게 물어야 이제 대답이 확실해지죠

십자가 피는요. 별로 안 기뻐요. 여러분
돈 버는 게 훨씬 기뻐요.
오늘도 만일에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10억을 주는 계약을 체결하자’ 하면
말씀 듣다 갈 거 아닙니까? 그래서 전화기 다 켜놓잖아요.
전화기 왜 켜놓습니까? 여러분. 말씀보다 더 중요한 연락이 올 거라고 예상하거든요.

어떤 교회에 가면요. 전화소리가 계속 울려요.
왜 울리는가? 하면 어떤 때는 볼륨을 껐다가 잊어버릴 때 있거든요.
그거 왜 켜놓습니까? 복음은요 언제든지 들어도 돼요.
돈 벌러 가면서 길거리 가면서 지금 생중계 다 되잖아요.
그게 뭐 가치 있습니까?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셨거든요.
에이 목사님 그거 하나 갖고 뭘 그럽니까?
그거 하나 갖고 이야기하죠. 뭘 갖고 이야기합니까? 그러면

이 종교성이 많은 이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니까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예요. 돈과 권력이 최고입니다.
돈과 권력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여호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는 돈과 권력이 안 나와요.
왜냐하면 그들은 과거 역사를 알거든요.

그저께도 제가 제사장의 죽음, 불살라지는 제사장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마는
이 여호와의 말씀 속에서는요 언약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자기의 뜻과 자기의 의도와 자기의 바람들은 다 묵살 당해요.
그런데 들어가 보니까 이방신을 섬기는 그들은 잘 먹고 잘 살아요.
그러니 그걸 보고 배울 거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되느냐? 어떻게 해야 돼요? 죽자 사자 일을 해야 되죠.
고등학교 3학년이면 좋은 대학 가려면 주일날 교회에 오면 됩니까? 안 됩니까?
그렇게 해서는 좋은 대학 못 가거든요.
여러분 계산을 한번 해보세요.
시간 싸움을 해보면 일당 10만 원을 받으면 주일날 빼버리면 10만 원 날아가잖아요.
이 종교성이 왜 발동되느냐? 할 때는 자기의 행복 자기의 구원이거든요.
그래서 그들이 우상숭배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이사야 44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사야 44장 9절에 보면

(사44:9)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이렇게 백날 이야기해도요.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우상을 기뻐하는 자들은
‘그것이 무익하다’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절간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너희들 그 부처를 믿는 것이 거기에서 기도하는 것이 무익하다‘
아무리 이야기해 봐요. 이미 자기들이 체험이 있고 경험이 있잖아요.
체험과 경험이 있는데 그게 왜 무익합니까? 유익하죠.
부적 붙이고 다녀보고 부적을 집집마다 방마다 이렇게 붙여놓으면
액운이 물러가고 안 들어오잖아요. 체험했거든요.

그런데 그런 자들에게 ’그게 무익하다‘라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게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
내가 경험을 해보니까 우상을 섬기는 게 더 잘 먹고 더 잘 살던데요.
우리가 성경을 잘 읽어야 돼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우상을 섬기겠습니까? 주변 나라 국가들이 우상을 섬기는데 더 잘 살잖아요.
아무리 무익하다고 이사야 선지자가 외쳐도 이건 무익하지 않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어떤 짓을 벌이는가? 하면 예루살렘의
예루살렘에 뭐가 있어요? 성전이 있죠.
성전 안에 뭘 만들어버립니까? 우상의 전당으로 만들어버려요.
온갖 우상들을 다 끌고 들어와버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못 버려요. 왜? 인간 자체는 겁나거든요.
혹 누수가 생길까 싶어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그 사이에 다 끌고 들어오는 겁니다.

오늘날 기독교 같죠. 점쟁이도 들어오고
점장이 얼마나 많아요. 교회 안에 권사들 ’기도해 주겠습니다‘ 하면서
말씀이 눈앞에 있는데 그렇게 있는 권사들은 다 죽여야 됩니다. 율법에 의하면
목사들이 왜 용납합니까?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장사가 되거든요.
교인들이 몰려오거든요. 웬만한 큰 교회는 다 점쟁이들이 있잖아요.
’누구 기도 잘하더라 누구 권사 기도 잘하더라‘ 여러분도 다 가보셨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보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체험이 우선이죠. 아테네에 있는 우상숭배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에피쿠로스학파나 스토아학파를 이렇게 추종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예요.
모든 것을 경험해보고 경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죠. 이성적으로
그래서 이 스토아학파는 이성을 가장 중요시하죠.

인간의 이성 속에 로고스라는 신이라고도 이야기하는데 하여튼 만물을 돌아가게 하는 원리,
그 원리가 이성 속으로 들어오면 진짜 현자가 된다는 거예요. 부처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선악의 구분 개념 자체도 사라지는 그 세계
도무지 어떤 외부적 환경이 일어나더라도 요동하지 않는 꼭 찬송가 안 같아요? 요동하지 않으면
파도가 치더라도 요동하지 않는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를 이들은 갈망하고 있거든요.
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긴 거예요. 10절에 보면

(사44:10) 신상을 만들며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뇨
(사44:11) 보라 그 동류가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 장색들은 사람이라
              그들이 다 모여 서서 두려워하며 함께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결론을 이야기하셨거든요. 우상을 누가 만들어요? 사람이 만들어요.
사람이 만들었는데 사람이 가서 섬겨요. 이것보다 코미디가 없죠.
부적을 누가 씁니까? 사람이 써요. 사람이 썼는데 그 사람이 쓴 걸 갖고 신이라고 하고

그런데 이들을 하나님께서 불로써 심판한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심판은요 가봐야 알죠. 여러분 다 그렇잖아요. 죽어봐야 알잖아요.
죽어봐야 죽음을 알지 죽어보지도 않았는데 무슨 죽음이 있습니까? 심판이 있습니까?
말씀이 말씀대로 되어짐을 목격하는 그 속에 살면서도
그들은 말씀의 위력을 전혀 보지 못하는 거죠. 그게 구약입니다.
멸망시키기 위해서 구약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러한 겁니다.
좀 더 볼게요.

(사44:12) 철공은 철을 숯불에 불리고 메로 치고 강한 팔로 괄리므로
              심지어 주려서 기력이 진하며 물을 마시지 아니하여 곤비하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요.
우상을 만드는 인간이 목마르고 주리고 힘들고 힘 다 빠졌는데
그 만든 그 사람이 만든 우상은 어떠하다?
절대로 달려가도 피곤치 않고 끊임없이 우리를 지지해주고 그렇게 믿고 있다라는 겁니다.

(사44:13) 목공은 줄을 늘여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정규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인형을 새겨 집에 두게 하며
(사44:14) 그는 혹 백향목을 베이며 혹 디르사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혹 삼림 중에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택하며 혹 나무를 심고 비에 자라게도 하나니

이것을 어떤 것들은 이 불쏘시개로, 배고팠을 때 떡을 구워 먹는 용도로 쓰고
또 어떤 것들은 우상을 만드는 거예요. 우리 다 아는 이야기잖아요.
다 아는 이야기를 지금 말씀을 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 우상보다 좀 더 강력한 우상이 철학이에요.
철학은 타인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어떤 형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믿어버리죠.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들을 향해서 뭐라 합니까?

(행17:22하)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철학자들 너희들 종교성이 많다. 이 얘기예요.
지금 대화가 안 돼요. 대화가
상대는 육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하는 설교를 못 알아듣죠.
우리는 철학자지 우상을 안 섬겨.

그래서 사도바울의 입장에는 바로
’너를 위하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니까‘
’형상 안 만들었으니까 우리는 우상 안 섬기죠?‘ 이 얘기가 아니잖아요.
너를 위하여. 너 뭐 만들었어요? 철학을 만들었잖아요. 철학이 우상이에요.
과학도 마찬가지죠. 과학을 누가 만들었어요?
누구를 위해서 만들었습니까? 나를 위해서 만들었잖아요. 그게 우상이에요.
여러분의 직장도 우상이죠. 어떤 것도 우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눈에는 십자가만 밝히 보여야 되는 거예요.
17절을 보면

(사44:17)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이 철학자들은 좀 머리가 좋기 때문에
아무리 형상을 만들어서 기도해봤자 나를 구하지 못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우상을 어디로 끌고 옵니까? 자기 속으로 끌고 와요.
그러면 나를 누가 구원합니까?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그 사상을 통하여서 나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사44:18)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 못하며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라

우리는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한 사도바울이 상당히 답답했을 것이라 생각을 하죠.
왜냐하면 그들은 철학자들이고 우상 숭배자들이잖아요.
여러분 그런 생각 안 듭니까? 상대가 대학 교수고 무슨 철학 박사고
뭐 그러면 복음 전할 때 뭔가 뒤로 물러나고 싶지 않아요? 똑같애요.

우리가 볼 때는 사도 바울이 뒤로 물러난 것 같은데 전혀 그런 게 아니에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게 쉬울까요? 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게 쉬울까요?
여러분 참고하세요.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좀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저 구약을 알기 때문에 복음을 더 잘 들을 것이라 쉬울 것이라‘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똑같습니다. 나중에 이방인들도 똑같죠.
본디오 빌라도도 힘을 합쳐서 예수님을 죽이잖아요.

아테네 사람들이나 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예수님을 살해한 유대인들이나
왜 그들이 예수님을 죽여버리는가? 왜 복음을 듣지 않는가?라고 할 때는
그들의 눈이 가리웠다는 겁니다.
문제는 눈이 가리웠고 귀가 막혔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어요? 없어요?
없으니까 자기 스스로 똑똑하다라고 구원 얻는 비법 행복해지는 비법을 찾아낸 겁니다.
그것을 두고 사도 바울이 ’너희가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알고 나면, 복음을 알고 나면 이 사도 바울의 이 말이 완전히 비아냥대는 것도 아니고
엄청나게 심한 말을 하는 거예요.
그냥 보면 칭찬하는 것 같잖아요. ’종교성이 많도다’
육에 속한 사람은 종교성이 많다면 ‘그래 우리가 좀 열심이지’ 이게 뭐 비아냥대는 겁니까?

그런데 복음 앞에 이 종교성은 어떤 모습이 되는 거예요? 헛짓이죠.
구원도 가져다 주지 못하는 거기에 모든 것을 걸잖아요.
맨날 검소하게 하고 절제하고 참고 참고 이 스토아학파는 재미있는 일이 많죠.
참고 참고 모든 것을 자기가 결정하기 때문에 자기가 죽여버려요. 자기 자신을
자살을 자기가 한다고요. 모든 선택을
그것을 무슨 뜻이다? 로고스의 뜻이라는 겁니다.
로고스의 뜻은 내가 구현하는 거지. 로고스가 구현하는 게 아니다. 이런 쪽이에요.
자살하는 사람들의 그 원천을 찾아가면 스토아학파에 다 나와요.

(행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이 얘기를 하니까 마치 알지 못하는 신을 만들어 놨잖아요.
만들어 놨으니까 사도 바울이 마치 그것을 옹호하는 것 같은데 옹호하는 게 아니에요.
이미 복음을 전했잖아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 알지 못하는 그 단어를 끌고 와서 그 알지 못하는 신이 어떤 분이냐?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너희가 알지 못하는 진짜 신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증거를 주셨다.’ 뒤에 나오거든요.

증거를 주셨다는데 보여야 증거가 있죠.
사도바울이 지금 말만 하거든요. 말만
독특하잖아요. 지금 다른 곳에서는 기적을 행했거든요. 표적을 보여줬습니다.
근데 아테네에서는 기적과 표적이 없어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들을 설득하기에는 표적만한 기적만한 그러한 것들이 없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주가 되셔서
지금 그 주님을 지금 여기에서 보여주고 있다라고 말만 해요. 말만
놀라운 것은 이 말이 말씀이 되고
이 말씀이 지옥 갈 자를 지옥 보내고 천국 갈 자를 천국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행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 이 얘기를 하면
그 로고스 사상과 비슷하지 않느냐? 이래 들어가거든요. 사람들이
그런데 이미 말씀했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이 창조주다‘ 이 말씀은 이미 전제에 깔려 있어요.
그렇게 되면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들은 다 유물론이거든요.
’모든 만물의 기원이 뭐 불에서 왔다. 물에서 왔다. 흙에서 왔다.‘ 다 그것의 확장성이에요.
신조차도 흙으로부터 출발해서 신이 나온 거예요.
이런 자들에게 ’만유를 지으신 신이 따로 있다.‘
여기에서 먼저 쳐버리죠? 한 번. 요건 유대교죠.

여기에서 치고 들어가면서 그 만유를 지으신 신이 누구냐?라고 할 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그 주님,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이 한마디로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그리고 모든 우상 숭배자들을 산산조각 내버리는 거예요.

우리는 관람자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바울의 이 말이 그들을 얼마나 자극하는 내용인지를 잘 몰라요.
그러나 이들의 어떤 그 기본 바탕이 어떠한가?를 생각한다면 이 말 자체가 충격적이죠. 그리고

(행17:24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표현했잖아요.
그럼 철학자들은 우리는 손으로 지은 전에 안 있어요.
에피쿠로스학파는 저거 정원에 모여가지고 나름대로 행복한 평안한 삶을 사는 인간들이고
그 스토아학파들은 나름대로 자기들끼리도 생활하는 사람이니까, 우리는 전에 있지 않다.
그 전이 어디야? 네가 만든 그곳이 전이에요.

여기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뭔가? 하면 뒤에 나오죠.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행17:25상)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게 가장 충격적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는 분이라 생각해요.
이걸 철학자들에게 확장하면 신께 가려면 우리의 노력과 애씀,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는 다 애씀이거든요.
백날 자연의 순리대로 살자 해도 그 자체로 자기 애씀이에요.

자연의 순리대로 살려면 선택을 해야 되거든요. 어떤 상황에 있어서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자기가 선택을 하잖아요. 순리대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천지의 주재’라는 말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주라는 말이거든요.
주라는 말의 의미는 로마서 11장에 나오는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주’예요.
십자가 지신 주님이 홀로 다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너희들이 할 일이 뭐냐? 할 일 없어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일이 없고 천국 가기 위해서 너희가 애써서
뭔가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행위를 보탤 일도 없다라는 얘기입니다.
마치 사도행전 7장 설교를 보는 것 같죠.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님이 성전에 대해서
‘하늘은 나의 발등상이요 땅은 나의 보좌요’
(행7:49)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죠. 그 얘기를 똑같이 반복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앞서서 ‘종교성이 많도다’
너희들이 출애굽할 때부터 지금까지 우상을 한 번도 안 섬긴 적이 있느냐?
한 번도 안 섬긴 적이 있느냐? 그걸 사도행전 7장에서 그대로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걸 지금 아테네에서 똑같이 설교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들에게 너희들은 우상숭배자라고 하고
지금 여기에는 우상을 믿는 이들, 철학을 믿는 이들에게 우상숭배자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사람은 뭐냐? 사람은 뭐긴요. 주님이 하시는 그 결과물로서 드러날 뿐입니다.

(행17:25)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왜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가?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에요.
인간들은 만물이 누구를 위해서 있다고 생각하죠? 나를 위해서 있다고 생각하죠.
신이 누구를 위해서 있다고 생각합니까? 나를 위해서 있다고 생각하죠.
그러니 그들이 믿는 신은 다 우상이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잖아요.
여호와 하나님을 얼마나 열심히 섬겼습니까?
그러니 우상숭배자인 예수를 공격했죠. 예수 믿는 자를
그런 그가 예수님이 찾아오게 되니까 그 자신의 열심이 자기 이익을 위한 열심이었음을,
달리 말하면 여기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이렇게 섬김을 받아가지고
그게 그것이 기뻐가지고 자기를 구원해 줄 뿐이라’ 이렇게 생각했던 거예요.
그것이 예수님을 살해한 동기가 된 겁니다.

하나님은요 우리의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고요.
주님은 주시는 분이에요.

우상 숭배자의 특징은요 어떤 모습을 띄는가? 하면요.
내가 주를 위해서 무엇을 했다라고 합니다.
주를 위해서 섬겼고 주를 위해서 기도를 했고 주를 위해서 봉사를 했고...
주님은 주시는 분이지 받는 분이 아니에요.

십자가 지신 그분이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면 내어놓는 모든 것들은 십자가 피를 자랑하는 요소들이 되는 겁니다.
구원은 십자가에서 오는 것이지
인간의 행함과 인간의 섬김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돌아보면 우상숭배자요.
주님을 섬겨서 뭔가 받고자 하는 그런 얄팍한 노림수를 갖고 살아가는 죄인임을
말씀을 통하여 알려주시고 오늘도 십자가의 피 능력 속으로 저희들을 인도하셔서
십자가 사랑 속으로 이끄시어 주님의 죽으심만을 자랑하는
주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십자가의 피만을 자랑하며 주께서 주신 것만을 내어놓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