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5-08 12:49
20220508 사도행전 강해 73강 행 16:26-31 정하신 사람으로 정하신 심판날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15  
https://youtu.be/7AwN_qi30RA

관리자 22-05-09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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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73강 정하신 사람으로 정하신 심판날

시편 36편 1절에서 12절 말씀을 교독하시겠습니다.

(시36:1~12)
1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2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3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4 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
5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6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
7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8 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9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10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11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12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잠언서 21장 23절에서 24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1:23~24)
23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24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입과 혀를 지키는 자를 보존하신다라고 말씀하셨기에
수많은 인간들이 입과 혀를 지키려고 애를 쓰고 노력하고 침묵 수행하는 그러한 모습을 보입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이 악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이
말씀의 의미를 자기 자신을 신으로 만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그런 악함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인생들입니다.
우리가 말을 하든 말을 하지 않든 십자가 앞에서 죄인임을 알게 하여 주시고
죄인으로 드러나는 기쁨으로 십자가의 피 공로에 대해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사도행전 17장 26절에서 31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행17:26~31)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사도 바울이 아레오바고 지금의 아테네죠. 지금도 그 아레오바고가 있습니다.
언덕이라고는 할 수 없고요.
돌덩이가 이렇게 좀 있는 그 위에 아레오바고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에서 지금 이 아테네 사람들이죠.
지금 이 아레오바고에 모인 사람들은요 그 당시에 최고의 종교적 엘리트
그리고 철학자들 중에는 최고의 철학자들이 모여 있다라고 보시면 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철학 전문가들이죠. 철학 박사 위에 박사들
(요즘 뭐 유튜브나 들어가면 그런 게 되게 많거든요.)
대부분의 박사들을 완전히 무시하면서 자기는 그들보다 훨씬 뛰어난 철학자라 이렇게 주장을 하는
그들이 즐비한 그런 자들이 즐비한 곳에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내용을 보게 되면 약간 뭐라고 할까요?
사도 바울이 복음에 대해서 약간 후퇴하지 않았는가? 그런 어떤 느낌도 들거든요.
왜냐하면 앞부분의 이 내용 ‘천지의 주재시니’ 이 부분은 우리 지난주에 설교를 했으니까요.

(행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다

이 얘기를 들어보면 이게 과연 복음이 되느냐?
이 정도는 이 신을 믿는 자에게는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러한 내용입니다.
신이 세상을 만들고 세상을 만든 신이 한 사람을 만들었고
그 사람으로 인하여서 모든 민족을 모든 족속을 만들었고
그들을 온 땅에 퍼지게 했고 그리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곳도 정하셨다.
이 정도는 복음과 관련 없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도 바울의 이 설교를 26절을 읽으면서 무엇이 떠올랐습니까?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잘 이렇게 생각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교회를 좀 다닌 사람은 이 구절을 읽게 되면 창세기가 떠오르죠.
창세기가 떠오르면서 적어도 이 내용은 누가 믿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믿고 있어요.
이슬람교도 믿고 있고요. 뭐 카톨릭도, 수많은 이단들도 믿고 있는 거예요.
브라질입니까? 어딥니까? 그 애들 다섯 명 죽은 그 집단들 그들도 똑같아요.

이 정도는 다 믿어요.
문제는 사도 바울이 이 똑똑한 철학자들 과거의 역사를 꿰뚫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 당시에 BC 400년 500년에 얼마나 똑똑한 철학자들이 많습니까?
여러분이 말만 하면 아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다 나오거든요.
이 정도는 뭐 받아들일 수 있지 않느냐? 이렇게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이 성령을 받아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니까 그 말하는 내용 자체가 옳고 진리일 거라 예상을 하죠.
물론 맞아요. ‘옳고 진리다’
근데 옳고 진리가 육에 속한 자들에게는 어떻게 들리느냐? 라고 할 때는
이것이 육으로 들려요. 진리로 들리지 않는다라는 겁니다.

무슨 얘긴가? 하면 지금 사도 바울이 이 얘기를 하면
만일에 이들 중에 유대인들이 있다면 ‘그래 네 말이 맞아’ 유대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 믿는 사람이고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고 아담을 만들었죠.
한 사람 아담을 먼저 만드시고 그 이후에 범죄한 이후에 인간들이 퍼져나가고
노아 홍수 심판이 있었고 그 이후에 다시 민족들의 경계가 정해지고 언어들이 나누어지잖아요.
이러한 내용들은 유대인들이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이 얘기를 왜 하느냐?라고 할 때는 유대교도 쳐버리고요. 이방인도 쳐버립니다.
조금 달리 표현하면요.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뭔가 괜찮은 인간들이라 생각할 가능성이 다분하죠.
누구에 비해서? 유대인들에 비해서

그런데 이 사도 바울의 설교를 보게 되면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려면 그 과정이 어느 쪽으로 흘러가야 돼요?
유대교로 흘러가지 않으면 예수님을 못 믿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 달리 믿음으로 곧장 구원을 얻으니까
이 구원의 방식이 훨씬 단순화되었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로마서를 읽어보든 지금 사도바울의 오늘 본문의 설교를 보든
이방인들도 궁극적으로는 누구를 똑같이 닮았느냐?라고 할 때는 유대인들을 똑같이 닮은 거예요.

만일에 이 앞부분에 사도 바울이 설교하는 ‘천지의 주재시여‘부터 시작해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다’ 이런 얘기가 얼마든지 가능하죠.
이 스토아학파들은 범신론을 믿는 자들이거든요. 그 로고스가 우주를 지배한다는 겁니다.
로고스를 신으로 환원시켜버리면
신이야 당연히 인간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다라고 되거든요.
그렇게 믿는 자들이 오늘날에도 적지 않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이 말씀을 들을 때 이들이 어떤 식으로 듣고 있고
사도 바울은 어떤 의도를 갖고 말씀을 하는지
그 모든 일들은 성령께서 두 쪽으로 쫙 갈라버리는 겁니다.
두 쪽으로 가르시면서 이 사도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먼저는

(행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다

이걸 믿어도 지옥 갑니다. 이걸 ‘아멘’으로 받아들여도 지옥 가요.
그런데 이걸 ‘아멘’으로 받아들이면 천국 갑니다.
왜 그러냐?라고 할 때는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과 성령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과
육으로 이 말을 듣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어요.

인간들은 오해하는 것이 이 사도바울의 설교 마지막에 심판주를 소개하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주입니다’라고 소개를 하거든요.
그렇게 소개를 하니까 인간들은 이 앞부분에 있는 내용들을 그 속에 집어넣지를 못해요.
마치 창세기를 보면서
창세기 안에 십자가가 들어있는 게 아니라 십자가 안에 창세기가 들어있거든요.

그러한 안목들을 인간들은 갖지 못한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할 때 사도 바울은 이 모든 말씀들이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거고
누가를 통해서 사도행전을 기록했을 때도 성령을 통해서 기록했기 때문에
이 말씀 하나하나에 모두가 다 성령의 역사가 되어지고
성령의 역사라는 것은 십자가 지신 주님이 보내주신 영이 되잖아요.
그러면 이 말씀 안에 십자가 사건이 고스란히 녹아있다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이 얘기를 하면 ‘그래 네 말이 맞지’
그런데 이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행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듭니까?
아마 성경을 좀 읽은 분들은 로마서 5장에 당장 떠오를 겁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하는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하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고 한 사람을 통해서 만들었고
각자를 이렇게 흩어져서 각 민족을 흩어져서 살게 하셨다.’ 지금 그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한 혈통이라는 표현을 하죠. 혈통이라는 단어는 없거든요. 헬라어 성경에는
그냥 하나로 붙어 만드셨다고 해요. 하나
그 하나가 누구냐? 한 혈통이라는 말을 써버리니까 조금 이상한 의미가 되는 거예요.
그 하나가 아담이거든요. 이 하나가 나와야 다른 하나가 등장하거든요.
다른 한 분이 누구예요?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철학자들에게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안 됩니까?
여러분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되는 것은요.
복음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명확하게 설명한다고 믿어지는 게 복음이 아니에요.

오늘 본문을 쭉 읽어보면요.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이렇게 설교를 해도 믿는 자가 있다라는 거예요.
전혀 설득이나 납득이나 이런 것들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거든요.
그 명색한 자들, 아레오바고 관원있잖아요. 관원이라면 보통 사람은 아니잖아요.
사도 바울의 설교가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고
‘그래 내가 그거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어’ 이렇게 해서 받아들이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저에게 당신은 왜 이렇게 그 내용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들어가느냐?라고 할 때는
이 의미가 깔려 있는 거예요.
그럼 깔려 있으면 깔려 있는 내용을 제대로 믿으면 구원 얻습니까?라고 물으시면 못 얻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성경을 우리에게 다 주셨잖아요. 계시를 다 주셨고
이 계시에 대한 이 복음의 내용들을 또 수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했거든요.
그러면 인간은 어디까지 따라잡느냐?라고 할 때는 정답을 다 따라잡아요.
다 따라잡아서 다 받아들입니다. 옳으면
옳은 걸 받아들여서 구원 얻는 길은 없다라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제가 그 의미를 말씀드리는 거예요.

‘한 혈통으로 만들었다.’ 이 말씀은요,
다 죄인이라는 겁니다. 다 불심판받아 마땅하다는 이야기예요.
이렇게 보셔야 오늘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되지
이렇게 보지 않으면 관람자가 되죠. 말씀에 대해서

‘이 말씀은 그 아테네 아레오바고에 모여 있는 그들에게 하는 말씀일 거야
아니야 교회 안 다닌 사람에게 하신 말씀일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권사님 기도하셨듯이 오늘도 새롭게 우리를 창조하시는 거예요.
복음이 새롭게 들리지 아니하면 성도가 아니에요.
‘어제 내가 복음을 알았다.’ 어제 안 것이 어떻게 오늘까지 연결됩니까?
그게 인간이 갖고 있는 역사적 안목이잖아요. 그게 유대교거든요.

‘어제 믿었던 그 믿음이 오늘까지 내가 지속될 것이다.’
그래서 내 어제 그 기억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한 둘이가 아니거든요.
그 기억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느냐?라고 할 때는
그때 알았던 그 지식이 칼날이 됩니다.
칼날이 되어서 누구를 공격하느냐? 주님을 공격해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하나로 붙어 ‘에크’라는 단어를 써놨는데요.
하나로 붙어 만들어셨다. 이렇게 말하면서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온 지구 표면 위에 흩어져 거하게 하셨다라는 겁니다.

거하게 하시는 그 방법이 어떤 식으로 거하게 하셨느냐?
여기에 보면 거주의 경계와 그리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셨다.
저희의 연대 연대라는 이 단어는 크로노스가 아니고 카이로스입니다.
카이로스는 때입니다. 때. 사건을 이야기할 때도 때라고 하든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차이는 여기에서 분명해지는 거거든요.
카이로스는 자기들이 관리할 수 없어요.
크로노스는 그냥 자기들이 그 세계 속에 사는 겁니다.
그들의 연대를 정하셨다라는 것은 때를 정하셨다는 거예요.

때, 때 생각하면 여러분이 무엇이 떠오릅니까?
전도서가 떠오르죠. 죽을 때도 있고 죽지 않을 때도 있고 앉을 때도 있고
앉는 것을 멀리할 때도 있고 이 때
이 때를 인간이 관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오늘 여러분 말씀 들으러 오셨잖아요.
이게 때거든요. 이 때를 여러분이 관리해서 왔습니까? 안 그러면 주께서 주신 은혜입니까?

‘내가 시간을 내어서 이 말씀을 듣고 내가 시간을 내어서 이렇게 복음을 듣기 위해서
주의 이름으로 모였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때를 자기가 주장하는 거죠.
사도 바울의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는 거예요.
때를 정하셨다는 것은 주님의 때입니다.

사람들은 핑계가 많잖아요. 무슨 핑계 무슨 핑계 대면서 온갖 핑계를 다 대는데
‘자기가 그 모든 것들을 정할 수 있다’라고 생각해요.
‘주일날 교회 가서 말씀을 들어야지’ 그 마음 먹지 말라는 게 아니고요.
그 마음 먹으시고요. 이 때에 의해서 무너져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 ‘저희의 때를 정하셨다’는 말은 그 때의 최종 때가 뭐냐?라고 할 때는
그 모든 때를 다 모으면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십자가 사건을 위한 때를 정하셨다는 거예요.
그 십자가 사건을 위한 때를 정하신 것 중에 하나가 죽음입니다.

지금 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복음을 듣는 이 대상자들이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거든요.
이들은 죽음에 대해서요. 굉장히 민감한 자들이에요.
에피쿠로스학파는요 죽음 자체를 생각지 말자는 거예요.
생각지 말자는 자체가 죽음에 미쳐 있는 거예요.
죽음을 없애버리려고 쾌락주의라고 우리가 들었는데
쾌락이라는 말이 우리들 말하는 그런 쾌락 수준이 아니에요.
그건 스토아학파들이 자기들의 라이벌 관계에 있는
에피쿠로스학파를 공격하기 위해서 지어낸 거고요.

아주 나름대로 적절하게 사는 부유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고
꼭 잠언서에 나오는 그런 기도, 그런 삶을 사는 겁니다.
자족하는 삶을 산다라고 할까요? 그렇게 삶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제거시키는 거예요.

스토아학파 같은 경우에는 이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할 때는
신의 뜻이라는 겁니다. 로고스의 뜻이라는 거예요.
로고스는 만물의 원리니까. 꼭 전도서 이야기 같아요.
여름이 오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꽃이 피고 이 이야기가 지금 전도서 이야기 같은데
지금 스토아학파에 들어가면 그들의 논리예요. 로고스 신학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철학들을 갖고 성경을 보면 성경이 우습게 보이거든요.
왜냐하면 그 철학 속에 다 담겨 있으니까

죽음 이야기를 했는데 이 죽음에 대해서 이들이 초연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자체가
그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개념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요.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초연을 하자 해야 된다.’
그러면서 그걸 억지로 없애버리든지 안 그러면
‘이것은 우리의 운명이다. 그러니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자’
그래서 스토아학파 중에 어떤 사람들은요 자기가 죽어버려요. 자기가 자살해 버립니다.
그 영향을 받은 근대 철학자들 많아요.
그들을 변명한다고 미친 철학자들도 한 둘이가 아니고요.

대부분 유명한 철학자들은요 정신병자들이고요. 자살한 철학자들이 많고요.
우리가 볼 때는 그들이 뭐 황당하게 자살했다. 생각하잖아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죽음이여 오라’는 겁니다.
내가 죽음을 맞이해서 내가 선택하겠다는 거죠.
그러니까 얼마나 죽음을 두려워하면 그런 짓을 하겠어요.

‘그들의 때를 정하셨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때를 보면서 무슨 때와 연결을 못 시킵니까? 십자가와 연결을 못 시키죠.
그 모든 때가 누구를 위해 있는 때예요? 나를 위해 있는 때예요.
저도 한 24년 정도 여기 있다가 한국으로 가잖아요.
이때가 누구를 위한 때입니까?
사람들은 뭔가 이동하고 뭔가 어디를 갈 때 살려고 가잖아요.
그게 인간들의 생각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이 사건 속에서의 때는 십자가 사건 속으로 합류시키기 위함이에요.

철학자들이 그렇게 똑똑하고 자기들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사건들을 예상하지 못한 것들을 계속해서 접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이렇게 이러한 때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가? 그걸 연구해 보니까 로고스 원리더라.
아니면 그 때를 내가 잘 관리해서 진정한 행복의 단계로 가자.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겁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 때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까 우상에 가서 빌잖아요.
대학 입시를 앞두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성당에서 빌고요. 여기는 다 입시철이거든요. 지금
입시철은 다 기도. 전화하면 ’기도해줄게요 기도해드리겠습니다.‘
뭘 기도해요? 그 우상 숭배자들이 때, 그때가 십자가를 드러내는 땐데
그 때를 다 자기의 이익과 자기의 영생과 자기의 행복을 위한 때로 다 바꿔 치기 위한 거예요.

나중에 사도 바울의 설교 결론이 되면요.
이들은 충격 받을 수밖에 없죠. 물론 못 깨닫습니다.
그러면 누구만 깨닫는가 하면요.
이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 구원 속으로 들어오는 자만 지금 제가 한 설교를 다 알게 돼요.
성경은요 정반대입니다.
’이걸 저들이 알아야 돼’가 아니라 말씀은 ‘이 말씀을 듣는 니가 알아야 돼요.’ 니가
성경을 보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야 되죠.

악마의 권세 속에 있기 때문에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때를 많이 당하잖아요. 지금 때를 여러분 많은 때를 당하고 있죠.
제가 여러분 형편을 다 모르지만
‘그때를 정하셨다.’ 이러면 ‘아멘’하면 되는데 ‘다 들었잖아요. 다 배웠잖아요.’
그게 왜 안 됩니까? 안되는 이유는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예요.

그다음 나오는 이야기가 뭔가 하면요.
그 연대, 카이로스를 정하셨고 딱 정했습니다.
‘천지의 주재시다‘ 했잖아요. 주님의 절차대로 진행되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주님의 절차입니다.
그러면 또 팔장 끼고 ’아 주님의 절차니까 기다립시다‘
지가 또 주 행사하고 있죠? 그러면. 그다음 나오는 이야기가 뭔가 하면

(행17:26하)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다

온 땅에 흩어져 살게 하셨는데 두 가지를 딱 정리해 놓았어요.
하나는 때, 또 하나는 거주의 경계. 민족들의 거주의 경계, 이걸 정하셨다라고 할 때
’우리는 정하셨다‘라는 것이 ’바뀌지 않는다‘라고 생각을 하죠.
이런 것도 인간들이 자꾸 말씀을 볼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틀림없을 거야 변동되지 않을 거야‘
그런 입장에서 들어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데
’천재의 주재시라’ 했잖아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잖아요.
그럼 경계선을 어떻게 합니까? 바꾸죠. 누가 바꿉니까? 푸틴을 바꾸거든요.
제가 볼 때는 전 세계가 백날 소리 질러도요. 내 갈길 갑니다. 역사가 그래 왔거든요.

그 거주의 경계를 누가 정합니까? 천지의 주재되신 누구예요?
하나님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지금 유대인들을 들으면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지금 이 천지의 주재되신 분이 누구예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말도 안 되는 이야기거든요. 이 얘기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요 말도 안 되는 분입니다.

‘그 경계를 정하셨다.’ 이건 이제 다니엘서에 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짐승을 보여주잖아요.
그 짐승이 활동하는 그 활동 영역이 다 경계를 따라 움직이거든요.
그러면서 새로운 경계선이 계속 만들어집니다.

결국은 인간들이 한 혈통으로 출발했다. 하나로부터 출발했다.
아담으로부터 출발해서 온 땅에 흩어져서 그 때를 계속해서 당하면서도
그들은 그 온 땅 영역을 무엇으로 만들어버리느냐? 할 때는
짐승의 땅의 영역으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그걸 달리 표현하면 우상숭배의 장소죠.
‘땅의 경계를 정했으니까 너희들 잘 먹고 잘 살아라‘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각 나라가 짐승이잖아요. 그 짐승의 모습으로 살게 했다는 겁니다.

이걸 거꾸로 올라가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만드셨잖아요.
그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 것이라‘ 예상을 했죠.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선택한 그 이스라엘이라는 그 나라가 짐승이 되는 겁니다.
짐승의 나라가 돼요. 가장 이 우두머리 짐승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누가 죽이자고 합니까?
율법과 성전 중심으로 살아가는 여호와 하나님만 유일신으로 믿는,
그들은 때를 모든 때를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기 위한 때로 믿은 자들이에요.
그들은 땅의 경계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것이 왜 만들어졌는지까지 다 아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우상숭배하지 않아요. 그들이 예수님을 죽여버리죠.
이것을 사도 바울이 하는 이 내용을 이스라엘로 들어가면
그들을 지금 확장시킨 내용이 지금 이 내용이 되는 겁니다.

(행17: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사람들이 이걸 갖고 오해를 하거든요.
로마서 1장에도 ’하나님을 알되’라는 표현이 나오니까
이것을 마치 자연 계시 천지 만물에 보여 알게 하나니 이런 얘기를 하니까
인간들이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얘기가 아니에요.
(롬1:20)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롬1:21) 하나님을 알되~

지금 이 얘기를 고스란히 그대로 풀어버리면
‘더듬어 찾아 알게 하기 위해서 발견케 하려 함이라’ 했는데
그들이 더듬어 찾은 자리가 어디예요? 우상 그리고 이름 없는 우상, 또한 철학이죠.
지금 이 용어가 긍정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으로 쓰는 겁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방금 또 이스라엘을 언급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래 아브라함이 우상숭배 가운데서
선택받아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함을 받았어요. 그리고 이스라엘이 만들어졌거든요.

이스라엘이 만들어진 이후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잖아요.
‘우상을 섬기지 말라 나 외에 다른 신을 만들지 말라’ 그러한 율법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큰 능력과 권세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약속의 땅에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더듬어 하나님을 찾았어요? 더듬어 찾죠.
더듬어 찾아가니까 어디로 갑니까? 우상 숭배하죠.
왜 더듬어 찾습니까? 그 이유가 뭐예요?
‘나 행복하고 싶어요.‘ 부자가 되고 싶다는 거예요.
좋은 집에서 살고 싶고 좋은 차 타고 싶고, 그래서 찾은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오늘날 우상은 돈이죠.
돈이 나를 행복해 하잖아요. 돈 외에는 나를 행복할 게 없어요.
남편도 아내고 뭐고 자식도 아무것도 행복하게 못해요.
아무리 아내가 잘해주고 남편이 잘해줘도요. 돈이 없으면요. 집 나가라 그럽니다.
돈을 가져다 줘야 행복한 거거든요. 그런 시대가 된 겁니다.

돈을 사랑하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이 이 하나님의 말씀이잖아요.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겨요.
그거는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는 게 아니고, 그건 절대 진리입니다.
여러분, 말씀이라는 것은 절대 진리예요.
사람들은 말씀을 우습게 보죠. 가볍게 대하는 거예요.
그냥 세상 교훈처럼 대하니까 말씀이 굉장히 가벼워져 버린 거예요.

그런데 말씀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이 어떻습니까? 온 세계를 다 덮어버리죠.
’돈이 우상이다.‘ 뭐 이야기는요 철학자들도 다 합니다. 심리학자들도 다 해요.
그들이 하는 이야기와 성경에서 하는 이야기는 같습니까? 다릅니까?
겉 모습은 같은데 내용은 다르죠.

성경은요 그래서 돈을 사랑 안 해도 지옥 갑니다.
우상을 안 섬겨도 지옥 가고요. 우상 섬겨도 지옥 가요.
그러면 또 사람들은 ’그럼 우상 섬겨도 천국 가고 우상 안 섬겨도 천국 갈 수 있잖아요?‘라는
논리를 펴면서 ’나 우상 섬기겠어요.‘ 그래서 지옥 가는 겁니다. 그 사람은

양자 물리학 세계 같아요. 주님이 하시는 일이. 관찰하면 다른 결과가 나오는 거예요.
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순간 항상 이 답이 바뀌어버립니다. 그래서 말씀이 어려운 거예요.
말씀에 대해서 옳음을 찾는 사람들은 제가 하는 이런 설교를 못 알아들어요.
정답을 찾아내기 때문에 그래요.
정답이 십자가에 있는데 십자가가 정답이라고 말하면 십자가는 모든 걸 부정해버리잖아요.
날마다 우리를 부정하는 거잖아요. 날마다 우리를 죽이는 거잖아요.
좀 말씀 배우면 ’나 이제 정답 찾았어 이제 복음 알아‘
알기는 뭘 알아요? 우리는 아는 자가 없습니다.

(행17:27상)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친히 알려주고 계시해줘도요. 우상을 찾아가요. 여러분
그런데 무슨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아가요.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각자 다르죠. 여러분도 지리산 같은 데 한번 올라가 봤잖아요.
얼마나 등산로가 많습니까? 저도 뭡니까? 막아놓은 등산로를 타고서 한번 올라가 보고
벌써 한 십몇 년이 지났지만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하는 거예요.

천국 가는 길은 여러 가지지만 마지막 도달 지점은 똑같다라는 거예요.
그들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라고 할 때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몰라서 그래요. 구약을 무시하거든요.
구약을 무시해버리면, 인간들이 신약 성경을 갖고 끄집어내는 모든 아이디어가
그 구약 이스라엘 백성 속에 다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하는 거예요.

(행17:27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마치 ’바로 신이 우리와 함께 계시잖아. 로고스가 우리와 함께 계시잖아‘
우리가 이성을 갖고 있는데 이성이 로고스와 융합을 하죠.
융합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더 적절할 것 같아요.
하나가 되면 진짜 부동의 상태 신과 함께 하는 상태, 신과 동행하는 상태
그 행복한 상태를 누릴 수 있다.
마치 그런 이야기 하는 거 같잖아요.

지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다는 게 어떤 의미입니까?
지금 도끼 들고 있거든요. 도끼 들고. 지금 그 의미예요. 지금 도끼 들고 계신 거예요.
구약이나 사복음서를 바탕으로 깔지 않으면 사도 바울의 이 설교를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가까이 계신다고 하니까 ’찾으면 되네 믿으면 되네‘
사람들이 예수 믿으라고 하면 ’조금 생각해보고요. 좀 시간이 나면요.‘
’말씀 좀 들어오세요’ 하면 ‘지금은 바쁘고요 늙어서 가겠다’고 하는데

요즘 참 재밌어요.
늙어서 빨리 죽으러 오라 하면 좀 기다리라고 하는 그 가사를 이렇게 보면요.
복음을 아는 성도들이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젊어서는 아직 내가 힘이 있으니까 주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좀 더 돈 좀 벌어놓고 말씀에 조금 더 진력하고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데 애쓰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게 무슨 태도예요?

교회 가는 것도 마찬가지죠.
말씀들으러 내일 가나 다음 주 가나 오늘 가나 뭔 상관이 있어요.
주님과의 동행이 없기 때문에 오늘을 살지 못하는 겁니다.
다음 주를 생각한다는 자체가 자기가 주인 행세하거든요.

(행17:27하)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각 사람마다 심판주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이런 의미에요.
가까이 있으니까 신을 찾아서 믿으면 된다.
찾아서 믿을 수 있는 신은 다 우상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행17:28상)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놀랍죠. 이것도 마치 스토아학파 주장인 것 같아요.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고

(행17:28하) ~너희 시인 중에도(예언자라고 표현하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그의 소생이니까 신과 함께 산다는 겁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사도 바울이 그들의 철학 속에 그들의 신앙 속으로 깊이 들어가잖아요.
복음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은 그래요.
철학 이야기하니까 그 복음에 철학 이야기를 왜 합니까? 이야기하는데

저야 철학을 잘 몰라서 얘기를 안 하지만
같이 들어가면 이 육에 속한 자들은 그 말이 마치 철학의 말로 들리는 거예요.
영에 속한 자들은 복음으로 들리거든요.
이 사도 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마치 그들의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 같거든요.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신의 일이다.‘ 이 얘기거든요. 여기에 보면

그런데 아까 나왔잖아요. 때와 경계를 정했잖아요.
그 모든 일들이 주님이 시키는 일이고 맞죠?
주님이 누구를 통해서 시킵니까? 성령받지 못한 자를, 악령을 통해서 움직여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행동 하나하나가 ’살며 기동하며‘
그를 힘입어 하는 모든 일들은 무슨 짓이 돼요? 죄입니다. 죄.
심판받을 이유가 되는 거예요.

지금 아테네에 있는 아레오바고에 있는 그들에게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너희가 하는 모든 행위가 불심판받을 이유라는 거예요.
누구만 이 얘기를 알아듣죠? 성령 받은 사람은

목사님, 사도 바울이 진작 이것을 다 까발려서
구체적으로 그들에게 얘기를 하면 잘 듣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렇게 얘기한다고 들을 인간 없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주님께서 녹음기를 틀어놓고
’야 이 말을 듣고 배우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렇게 하셨겠죠.

성경이 진리가 아닙니까?
진리를 줘도 인간들이 성경 읽고 어떻게 합니까? 우상숭배하잖아요.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어요?
요즘은 헬라어 히브리어 원어 갖고 진리를 찾는 인간들이 적지 않거든요.
취미 생활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분이 그리 얘기했대요. 어떤 분이
뭐 온누리 교회에 그 파이프 오르간 올렸는데 거기 다니는 어떤 분인데
자기한테 이제 복음을 이렇게 묻길래
’히브리어 헬라어를 통해서 진리를 좀 더 알 수 있지 않느냐?‘ 라고 하길래 그런 얘기를 했대요.
예수님도 그 당시에 언어를 말씀하셨는데 아람어도 말씀하시고 코이네 헬라어도 말씀하셨는데
왜 못 알아들었어요?
만약에 그런 식이라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뭘 가르쳐야 돼요? 코이네 헬라어 문법 가르쳐야 돼요.
히브리어 문법 가르쳐야 되죠. 문법을 잘하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면 성경책을 남기지 말고 문법책을 남겨야 되겠죠.

이런 본문을 보면, 그러한 어떤 논리와 이성이 전혀 통하지 않는 세계가 하늘 나라임을 몰라요.
왜 십자가가 어리석은 겁니까? 여러분 논리를 한번 따져보세요.
’십자가의 피가 죄인을 구원하기도 하고 그 지옥 보내기도 합니다‘라고 하면
이게 논리가 있어요? 없어요? 십자가 피 자체가 능력이 있는 거거든요.
논리가 있으려면 그 피를 내가 믿든지 그리고 내가 믿을 때 이 피가 어떻게 화학 작용을 해가지고
내 죄를 용서하지 하는지 이것까지 설명이 다 돼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거 설명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불가능하죠.

(행17:28하)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그러면서 그들을 공격하죠.
’신의 소생이라면 왜 너희들이 어떻게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행17: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사도 바울의 설교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왜 어려운가 하면요. 상대가 타켓이 하나면 이 논리가 한 관점으로 흘러갈 수 있거든요.
그런데 상대가 스토아학파도 있고 에피쿠로스 철학자들도 있잖아요.
그리고 우상 숭배자들도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이 갑자기 누구를 공격합니까? 우상 숭배자를 공격하죠.
철학자로 갔다가 우상 숭배자로 갔다가. 지금 여러분 이걸 이해하셨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의 설교를 들은 자들이 사도바울을 말쟁이라 하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우상 숭배자들이라면 우상 숭배자들을 타켓으로 놓고 그 논리를 계속 펴면서
그들을 ’그것이 아니오‘라고 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된다 이런 생각을 갖는데
지금 이 설교 안에는 철학자들도 공격하고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를 공격하면서
우상숭배자들도 동시에 공격하는데 지금 다시 우상숭배자를 공격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이들은 스토아학파는 이 이야기 들을 때
이건 내 이야기입니까? 다른 사람 이야기입니까? 그건 의미가 없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의 얘기가 나의 얘기예요.
철학을 숭상하는 그 자신이 우상숭배자임이 드러납니다. 이것은 무조건 무조건이에요.

성령이 오지 않으면 자기가 골라내죠. ’요게 죄다 죄가 아니다‘를 골라내는데
사도바울의 설교를 보게 되면 ’네가 죄다 아니다‘를 골라내지 못하게 해버려요.
이거는 저쪽 이야긴데 우상숭배자들 이야기인데 이거는 철학자들 이야기인데 나와 상관이 없는데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니까 이 모든 말씀이 내 속으로 들어가버리죠,
내 속으로 들어가버리니까 내가 뭐가 되죠?
죄인이 되고 예수님을 살해한 그 유대인들이 되고 대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말쟁이라는 말이 이해되시죠.
좀 논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를 하라는 건데 지금 이것저것 막 섞어서 얘기를 해버려요.
사람들은 이 본문을 그렇게 잘 안 읽어요.
왜냐하면 복음을 전할 때 뭔가 논리가 있을 거라 생각하거든요.
논리가 있죠. 어떤 논리입니까? 십자가에서 모든 걸 부정하는 논리입니다.
부정하는 논리이기 때문에 어떤 것들을 다 집어 넣을 수 있어요.

’신의 소생이라면‘ 재밌잖아요. 철학자들 이야기를 우상숭배자로 끌고 와가지고 둘이 엮어가지고
신의 소생이라면 금이나 은이나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뭔가 만들어내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것조차도 육으로 들으면 ’그래 맞지 만들지 말아야지‘ 그랬어요.
재밌는 사건들이 있잖아요. 교회사적으로

’성상을 만들어도 된다. 아니다. 파괴해야 된다‘
그래서 성상 파괴 운동도 일어나고요. 나중에는 그래놓고 또 성화는 돼요.
그림은 또 된다라고 주장하고요. 동방교회 서방교회 싸움보면 웃기지도 않잖아요.
그러면서 이제 3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행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렇게 나옵니다.
이 말씀도 상당히 사람들에게 뭐라고 할까요? 안도감을 준다고 그럴까요.
’알지 못하는 시대에는 허물지 아니하셨다.‘ 간과하셨다. 이런 표현인데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잖아요.
’알지 못했을 때는 구원받을 자는 구원시킬 거고 지옥 받을 자는 지옥 보내게 하셨을 거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후기에 기독교가 들어왔잖아요.
그전에 조선시대나 고려시대나 삼국시대나 한국을 생각하면
그러한 시대에 복음을 못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을 하잖아요.
뭐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그 우리 때는 그런 논쟁을 많이 했어요.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애들하고 논쟁하면
아 그 당시에 복음도 못 들은 이순신은 그러면 억울하지 않느냐? 그런 논쟁 해보셨으니까?
그러면서 그런 사람은 이순신 같은 경우에는 억울하지 않습니까? 세종대왕도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런 사람은 천국 가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걸 이제 이 본문을 끌고 와서 ’모르는 시대에는 허물치 않으신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는 그 나름대로 구원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추론을 갖게 하는데
여러분 지금 사도 바울이 하는 얘기가 그 얘기입니까?

철학자들이 머리가 팽팽 돌아가거든요.
팽팽 돌아가기 때문에 지금 이 얘기를 들을 때 심판주를 소개하잖아요. 지금
지금 소개를 할 때 그러면 이들도 똑같이 반문을 하는 거예요.
’우리의 조상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면 복음을 못 들었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 질문이에요.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하는 얘기가 뭡니까? 너나 걱정해라는 거예요. 너나

이 표현이 되게 불쾌하죠. 여러분. 지금 사도 바울의 얘기가 그 얘기예요.
지금 자기가 불심판받는 입장에 놓여 있으면서 누구를 걱정하고 있어요?
자기 조상을 걱정하고 있어요.
‘우리 아버지는요 우리 엄마는요 우리 할아버지는요 우리 고조 할아버지는요’
자기 구원이 자기가 걱정한다고 될 것 같으면 걱정해도 돼요.

우리 지난주 데살로니가후서 2장을 봤잖아요.
거짓 것을 믿게 하시는 분입니다. 지옥 갈 자들은 지옥 보내는 분이에요.
그래서 복음을 못 전하게 한 거예요.
전도하는 자가 열심을 덜 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못 듣게 한 거예요.

거짓 것을 믿게 하는 겁니다. 신천지나 하나님 교회가 더 성왕해야 돼요.
중국에서 건너간 여호와 뭐 있거든요. 뭐 여호와 비슷해요. 하나님의 교회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교, 전능하신 하나님교.
그것도 얼마나 인기 많아요. 완전히 이상한 집단인데 그것도 세력이 상당하거든요.
그런 것들이 흥왕을 해야 돼요. 지옥 갈 자는 지옥 가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불교가 더 흥왕해야 되고요. 점장이들이 더 판을 쳐야 됩니다. 
물론 그들이 판을 칠 때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그들로부터 미움을 받겠죠.

(행17:30하)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과거는 모르겠고가 이야기가 아니고요. 지금 너희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항상
복음을 여러분 읽어보면요. 항상 지금 너희들이에요. 지금 너희들
선지자들이 과거를 언급할 때도 지금 너희들에게 하는 이야기거든요.
그러면서 어떤 이야기를 합니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회개하라’ 왜 하셨습니까?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돼요? 불심판받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또 논리가 있어가지고 ‘회개한다고 천국 갑니까? 불심판 면합니까?’
이 이야기는 지금 하면 안 돼요. 그 얘기를 하라고 이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다 회개하라고 명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들 지금 회개하라는 거예요.
왜 회개해야 돼요?

(행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이 말씀도 정말 어렵거든요.
지금 사도 바울이 천지의 주재되신 그분이 어디로 넘어왔어요?
이제 정하신 사람이 되죠. 그 정하신 사람이 누굽니까? 나사렛 예수
그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주가 되게 하셨죠.
심판주가 되게 하셔서, 그 심판한 날을 처음부터 정했다는 겁니다.
언제부터? 창세 전부터 지금 결론을 그렇게 맺고 있어요.

그러면 ‘세상을 왜 만들었습니까?’라고 물으면요.
정하신 그분, 나사렛 예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을 심판주로 세워서
지옥 갈 자는 지옥 보내고 천국 갈 자는 천국 보내기 위해서 세상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아담 한 사람을 통해서 모든 민족을 만드시고 때와 경계를 정하셔서 살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들은 할 게 뭐가 있어요? 회개밖에 없는 거예요.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똑똑한 철학자들이나 우상 숭배자들이 이 얘기를 듣고 ‘아멘‘하겠습니까?
온 세상이 십자가 지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날이죠. 한 날

사도행전 2장에 (설교를 다 했습니다.) 한 날,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 사건의 날이 확장이 되면 그 이후에 지금까지 아직까지 재림이 안 됐잖아요.
예수님이 강림이 안 된 이 시기를 다 포함하고요.
이걸 다 포함하게 되면 그 날이 다 어떤 날입니까?
주님이 하늘로서 강림하시는 그 날이 되는 거예요. 그날을 위해서 세상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어요?
’무슨 그날을 위해서 만들었어.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만들었지.’
만일 그런 식으로 만들었다면 우리는 뭐냐? 우리는 뭐기는요.
주님이 정하신 때를 따라서 살게 하면서 ‘너희들은 왜 죽어야 하는가? 왜 지옥 가야 하는가?’
그 이유를 보여주는 인생을 사는 거다라는 겁니다.

이게 대화가 되는 겁니까? 납득을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헬라인은 지혜를 찾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 하잖아요.
지금 여기 이 사람들은 헬라인들 쪽이잖아요.
그럼 이들은 지혜를 찾을 거 아니에요. 이게 어떻게 지혜입니까?
온 세상도 6천년 인간들이 54억년 이렇게 주장을 하지만 그건 저거들 생각이고
54억년이 아니라 5400억 년이 되어도 그 모든 것이 한 날에 들어가 있어요.
그게 칠십 이레라는 이야기입니다. 한 이레로.

한 날이 어디입니까? 십자가 사건 속이에요.
세상을 보는 안목이 이렇게 달라진 거예요.
한 날, 심판한 날, 정하신 분 그 정하신 분이 누구예요? 나사렛 예수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주가 되셔서
주가 되심을 마음껏 뽐내는
십자가의 능력을 마음껏 뽐내는 그날을 위해서 세상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자기 행복을 생각하는 자들, 어쨌든 이 땅에서 자족하면서 살려고 하는 그들,
그들에게 이 복음은 망치로 완전히 호두를 가속도를 붙여가지고 내려치는
그러한 복음이 되는 겁니다.

5월은 가정의 달, 오늘 어버이 주일이거든요. 제가 알기로
한민족으로 만들었고 이걸 작게 하면 한 가족을 만들었죠.
가족을 만들어서 그래서? 심판하는 날을 정하세요. 심판하는 날을 보여주기 위한 가족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서로 싸움을 하고 이 칼을 갖고 와서 쪼개기에서 왔다고 하거든요.

어버이 주일날 설교 중에 가장 좋은 설교가 그 설교입니다.
‘주님이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가족을 완전히 붕괴시키러 오셨다.’
근데 어느 목사가 어버이 주일날 그런 설교를 하겠어요.

심판한 날을 위해서, 한 분에 의해서 심판하는 그날,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위해서 가정을 만들었다라는 겁니다.
그럼 주객이 완전히 바뀌죠.
그럼 십자가를 위해서라면 가정이 다 어떻게 돼야 돼요? 그건 알 수 없죠.
무조건 깨어진다고 복음을 챙긴 게 아니니까
성경에는 복음 때문에 가정이 더 하나가 되는 그런 것도 나오지만

그와 달리 그 하나가 되려면 먼저 깨어져야 돼요.
주님의 죽음 속으로 합류하지 않으면 이 복음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이상한 말을 해요. 방금 읽었지만

(행17:31하)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여러분이 지금 사도바울의 설교를 들으면서 모든 사람들이 믿을 만한 증거를 보셨습니까?
다시 읽어볼게요. 31절

(행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그러면 이 설교를 듣는 이들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걸 목격해야 되잖아요.
증거를 주셨으니까 증거를 봐야 되잖아요.
지금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증거가 지금 깔려 있죠.
육에 속한 자들은 이 증거를 못 보죠.
영에 속한 자들만 이 증거를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의 이 복음은 이 설교는 인간을 설득하는 것도 아니고
이해시키는 것도 아니고 행복을 가져다 주기 위함도 아니에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의 그 피 능력, 한 사람으로 정했다잖아요. 심판한 날을
지금이 바로 심판한 날임을 그대로 증거하고 있어요.

그 결과 두 쪽으로 쫙 갈라집니다. 믿는 자가 있고 믿지 않는 자가 있고
물론 믿지 않는 자들이 훨씬 많죠. ‘보이셨느니라’
그러니 사도 바울의 이 모든 설교는 누구만 알아듣는 말씀입니까?
믿는 자만 성령 받은 자만 ‘아멘’하는 설교가 돼요.

주님이 누구와 함께 계시죠? 사도 바울과 함께 계시죠.
주님이 사도 바울과 동행하면서 십자가의 피 능력을 직접 친히 고스란히 발휘하고 계신 겁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자리가 바로 이러한 자리입니다.
복음을 지식과 논리와 합리성과 증거 이런 것들로는 전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복음 자체는 우리가 전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직접 전하십니다.
직접 전하셔서 갈 자들은 가고 남아있을 자들은 남아있게 하는 거예요.
구원과 이 심판이 일어나는 그 날 속에 성도가 살아있는 거예요.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것은 ‘반드시 십자가 자랑해 나 구원 얻었어’ 이 얘기가 아니에요.
‘십자가 자체가 능력이 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복음의 비밀을 안 자들에게만 죄악의 깊이를 알게 하여 주시고
구원 얻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게 하여 주시고
오직 십자가의 피 능력으로만 구원하셔서 정하신 한 사람만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심판주임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삼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살아있는 십자가의 능력 속에 살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