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7-10 20:34
사도행전 82강 행 18:19-28 주님의 일하심과 사람의 일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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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RWpaq3j8ok

관리자 22-07-11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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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82강 주의 일하심과 사람의 일

하나님 말씀, 시편 40편 9절에서 17절 말씀을 함께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시40:9~17)
9 내가 대회 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10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11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12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13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14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15 나를 향하여 하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
16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이 시간 우리를 대표해서 김춘이 권사님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만을 사랑하는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을 허락하셔서
주님의 십자가 긍휼만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입술로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하지만, 마음으론 날마다 새롭게 살고자
어제보다 성장한 오늘을 꿈꾸며, 마음의 평안과 육신의 편안함을 지키고자
날마다 예수님을 살해한 자로 날마다 새롭게 알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십자가새언약 교회 공동체에서 깊은 사랑의 교제를 통해
주님의 말씀은 애초에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소경이요 어둠이요.
예수님의 발꿈치를 날마다 상하게 하는 독사의 새끼인 자로 드러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친히 일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피 안에
하나가 되는 기쁨의 잔치를 허락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2장 6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무리 가르쳐도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저희들을 오늘도 십자가 안에서 부르셨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친히 저희들을 인도하셔서
주님의 가르침 속으로 이끌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사 생명의 말씀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사도행전 18장 19절에서 28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행18:19~28)
19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21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22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25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오늘 본문 말씀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쉽고 어떻게 보면 너무나 어려운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무엇이 어려우냐?라고 할 때는 우리들이 예상하는 바대로 말씀이 기록되지 않는다라는 거예요.
무엇이 예상 하지 않는 바냐?
복음을 전하는 것과 성령의 역사가 일치해야 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것이 일치되지 않는다라는 겁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복음의 진리를 전하면 그 진리의 내용이 십자가 복음과 일치할 경우에
성령의 역사라 간주하지요. 간주합니까? 간주하고 싶습니까?
당연히 ‘야, 정말 말씀대로 전하기 때문에 정말 이것은 복음의 진리이기 때문에 저 사람은 틀림없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성령께서 저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실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되죠.
그런데 이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이것이 서로 사맞지 않아요.
그래서 대충 끼워 맞추려고 이 말씀을 읽어버리는 경향이 우리들에게 있다라는 겁니다.

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이 특이한 장면은 이미 사복음서에도 똑같이 나타났어요.
사복음서에 보면 성령을 받지 못해도 천국 복음을 전해요.
누가 그렇게 전합니까? 열두 제자.
말씀이 상당히 이게 중층으로 엮여있기 때문에 복합 구조로 엮여 있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데
그 제자들도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천국 복음을 전해요.

그러면 그 제자 속에 또 누가 들어가 있습니까?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가룟 유다가 들어가 있거든요.
주님께서 이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약한 것과 병자를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라고 하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럼 열한 제자는 성령에 의해서 복음을 전한다 치더라도
그럼 가룟 유다는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이 엉터리입니까?
분명히 가룟 유다가 전한 것도 천국 복음이었어요.
그러면 우리들은 당장 이런 마음을 품죠.
그것이 주의 일, 주의 일을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주가 되신 이후에 성령을 주시잖아요.
성령의 일이냐? 이렇게 따져 들어가면 여러분은 뭐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

성경 말씀이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에요.
왜 어려우냐?라고 하면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나 중심으로 보거든요.
나 중심이라고 말을 할 때는 내 구원 중심이에요.
그래서 이 구원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성경의 흐름을 다 내 구원 중심으로 끌어당기면 다 이해가 돼요.
납득이 안 되는 게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 자체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말씀이고
십자가를 증거하는 말씀이 되면 이해 안 되는 내용들이 가득해요.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말씀을 읽으면서 납득이 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 성경에 너무나 많이 있다라는 겁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이스라엘을 만들었다면
그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에스겔 20장에서 뭐라 합니까?
‘멸망시킴으로 말미암아 나의 여호와의 이름을 알게 했다’라는 거예요.
이 논리 자체가 여러분 가능합니까?
이미 멸망해버렸는데 이미 죽어버렸는데 어떻게 여호와를 알아요.

에스겔 20장에 나오는 멸망이라는 것은 구약에 속했잖아요.
그럼 멸망은 죽음이잖아요.
죽은 자가 여호와의 이름을 어떻게 압니까? 그건 네가 알 바 아니라는 얘기예요.
여호와의 이름만 남기겠다는 거거든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이해 못한 내용이 이런 부분입니다.
납득이 안 되죠. 자기들이 살아있어야 여호와의 이름을 증거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에요.
내가 사라진 자리에 어떻게 여호와의 이름을 증거합니까? 내가 없는데.
그런데 주님이 일하는 방식은 나를 없애버리고 자기 이름을 증거하는 방식을 취하는 거예요.

우리 김장로님이 질문을 했잖아요. 너무나 중요한 질문이죠.
아니 에베소에 가서 사도바울이 왜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회당에 못 들어오게 하고
자기만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느냐? 여러분들도 다 이 질문을 받고 고민을 하셨죠.
안 했습니까? 감사합니다. 안 했기 때문에 제가 또 설교를 할 수 있으니까.

왜 그렇게 했느냐? 이 문제예요.
우리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고린도에서 합류했고 업이 같으므로 일을 함께 했기 때문에
이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누구 편으로 간주합니까? 바울 편으로 간주해 버리고
그다음 또 어떻게 간주합니까? 이들은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자들이고
그다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들이 복음을 전하면 성령이 임할 것이라까지 예상을 다 해버리죠.

저만의 착각입니까?
주석이나 설교를 봐도 다 그런 식으로 이해가 돼 있어요.
그렇게 이해가 됨으로 말미암아 이 주님의 일은 주님 홀로 한다는 것을 계속 배제시켜요.
뭔가 사람을 거기에 집어 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사람을 집어넣어요.
분명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집어넣고 사도바울도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없는 자로 만들어내죠. 계속해서

복음 전하는 목사를 세워서 목사를 빼버려요.
목사가 그 자리에 올라가면 목사 숭배가 돼요.
‘우리 교회 목사님 복음 정말 잘 전하는데’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예요? 우리 교회 목사님 훌륭하다는 이야기잖아요.
십자가 자랑, 그게 나오면 감사하죠.

지금 사도행전에서 분명히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면 ‘내 증인이 되리라’는 그 말씀하신 분이 내 증인 되리라는 말씀 속으로
자기 백성을 집어넣어버리면 자기 백성은 ‘아니오’라고 하면서 빠져줘야 되는데
인간들은 안 빠질려고 하죠.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별로 안 와닿는데
여러분이 이 교회에 와서 봉사하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주일날 모이잖아요.
이거 했는데 빠질 수 있나요? 평소에는 빠지죠.
근데 못 빠질 때가 있어요. 나를 무시할 때
근데 그걸 무시할 때도 평소에는 괜찮아요.

그런데 이게 딱 아다리가 된다고 할까요? 딱 부딪히면요. 내가 못 빠져요.
그런 마음들이 우리의 중심을 잡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러한 생각으로 말씀을 대하기 때문에
그 말씀 중에도 주님 홀로 일함을 자꾸 빼버리려고 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가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있었잖아요.
그 회당에 들어갈 때 그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할 때
여러분 같으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같이 데리고 들어가겠어요? 혼자 들어가겠어요?
(데리고 들어가죠.) 왜 데리고 가겠어요? 세를 과시해야 되죠.
그러면 과시하지 않더라도 든든하죠. 그렇지 않습니까?

같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인데 어느 곳에 간다 생각하면
‘여러분 잠깐 계세요. 저 혼자 가서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그러면 누가 문제가 발생해요? 화를 내죠. 욕을 하죠.
‘자기만 복음 전하나 나도 복음 전할 수 있는데’ 이런 생각해봤어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을 향해서 ‘자기만 복음 아냐? 나도 복음 아는데.’
지금 복음 아는 이야기가 뒤에 나오거든요.
아볼로를 가르치거든요. 아볼로가 아폴로인데 아볼로를 한 수 가르쳐 줍니다.

복음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고린도에서 함께 있었잖아요. 일년 육개월인가 있었죠.
그동안 배울 만큼 배웠죠. 여러분 일년 육개월 동안 같이 붙어 있어 보세요.
알 만큼 다 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 생각 안 하겠습니까? 여러분.
일 년 육 개월 동안 붙어 있으면
저랑 일 년 육개월 동안 붙어 있어서 복음만 들어 보세요.
지금도 계속 듣지만 매일 듣지만 들으면 그다음 어떤 마음이 들죠? ‘네 얘기 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봅시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할 때
’잠깐 기다려 여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형제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말로는 형제님이라 해놓고 무시하는 거잖아요. 일종의
바울이 무시했을까요? 그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어요.

그런데 주님의 일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그리고 이 사도 바울이 요사이에서
에베소 회당에서 서로 갈라짐으로 말미암아 보여주고 있다라는 겁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복음을 전해도요 성령이 안 임해요.
충격적이죠. 저만 충격적입니까?

뒤에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우리 로마서 16장에 봤잖아요.
이미 사도 바울과 함께 목숨이라도 내어줄 믿음의 소유자예요.
형제가 맞아요. 그런데 이 과정이 있어요. 과정.
그 과정이 지금 우리는 이 과정을, 물론 이 일 자체가 성령의 일이다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일이라는 자체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이 안 돼요.
성령의 일을 먼저 하셔놓고 그다음 성령이 임하는 경우가 사도행전에 등장하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성령의 일이냐? 아니냐?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전에 우리가 가룟 유다의 예를 들었지만
결국은 그가 한 모든 일들은 선택받지 못한 자의 일이었거든요.
그러면 가룟 유다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하면 나는 선택받지 못한 자로서 뭘 전했어요?
천국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거예요.
제대로 전하고 자기는 어디로 갑니까? 지옥 가고
그 천국 복음을 들은 자는 어디로 가요? 그리스도 안에 택한 받은 자는 천국을 가는 겁니다.

이 논리를 지금 사도행전에 그대로 갖고 와야 돼요.
이걸 갖고 오지 않으면 우리는 무조건 ’옳다 맞다‘ 이렇게 들어가요.
제가 지금 상당히 위험한 설교를 하거든요. 지금 본문 해석이

결론적으로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성령받았어요.
그런데 왜 이 장면, 이 사도 바울이 지금 돌아가거든요.
가이사랴는 곳은 예루살렘과 가까운 지역입니다.
갔다가 갑자기 휭 돌아오는 내용을 간단하게 기록하면서
전체적으로는 어디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어요? 에베소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거든요.

바울이 돌아오는 과정 속에서 에베소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들이 머물고 있을 때 예수 믿는 자들이 많이 생겼죠.
생겼을까요? 안 생겼을까요? 당연히 생겼죠.

제가 함정을 놓는 게 아니고 이미 사도행전 8장에 나왔잖아요.
성령받은 빌립이 사마리아성에 복음을 전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물론 권능을 보고 믿는 자들이 들어왔고 세례를 받았거든요.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믿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성령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못 받았거든요.

제가 지금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거예요.
성령 받은 것과 못 받은 것을 구분도 해야 되고요.
구분도 하지 않아야 되는 이 두 가지 요소가 성경에서 동시에 말씀하는 겁니다.
가짜는 잘라내야 되거든요.

사도 바울이 에베소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본문도 참 특이한 게 복음을 전하니까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들어요.
들으면서 뭐라고 얘기하는가? 하면 ’오래 좀 머물러 있어라‘ 그들과 변론을 했거든요.
변론을 했다는 것은 논박을 하고 치열한 싸움을 했다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럴듯하고 맞는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당신이 좀 더 머물러서, 아마 이런 태도도 있을 수 있죠? ’나를 설득해보라.‘
’좀 더 머물러 있으면 네가 좀 더 우리들에게 좀 더 논박을 하고
구약 성경을 제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으로 풀어낸다면 우리가 믿겠다‘라는
태도를 지금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좀 더 오래 머물러 달라고 요청하는 거예요.

우리들은 이들이 복음을 알아가지고 ’복음을 더 전해주세요.‘
그래서 머물러 달라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거든요. 본문을 읽어보면
얼핏 읽어보면 그렇게 돼 있어요.
그런데 지금 앞뒤 전후 문맥을 다 들여다보면 그런 차원이 아니에요.
물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데리고 가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가도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런 논리 자체를 다 깨기 위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도 더더욱 아니에요.
’사도 바울 나만 가서 복음 전해도 충분하다‘ 이런 태도도 아니에요. 지금

우리는 그런 마음이 들잖아요.
’내가 복음을 잘 알면 당신이 안 들어가도 내 혼자 충분하다’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거든요.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성경 자체에서는 숨겨진 내용이 너무 많기 때문에 우리가 함부로 뭔가를 단언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나 이 전체 내용을 들여다보게 되면
십자가 지신 그분이 살아계셔서 홀로 일하심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놀랍죠.
우리 같으면 ‘좀 더 오래 머물라’하면 머물까요? 안 머물까요? 저라면 머물러요
혹시 모르잖아요. 이 중에 주의 백성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러면 머무르면 손해입니까? 이익입니까? 이익이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은요 두말하지 않고 떠나버립니다.
떠난 이유가 뭐냐? 온갖 추론이 다 난무해요.
떠난 이유가 곧 절기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주로 이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 이야기 성경에 나오지 않아요.

더 근본적 배경은 주께서 떠나게 하신 겁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과정을 보면
주께서 가라 하고 주께서 멈추라 하고 주께서 방향을 바꾸시고 그렇게 진행해 오셨죠.

더 머물러 달라고 요청하는 그들에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려요.
그 이유가 뭐냐? 더 오래 가르친다고 해서 복음을 들을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오래 가르치고 더 가르치면 저 사람이 복음을 듣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하잖아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은 분명한데 거기에서는 무엇이 깔려있는가? 하면
들어도 절대로 못 믿는다는 내용이 깔려있어요.

그런데 우리들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니까 어떻게 생각을 해요?
들음에서 나니까 들어보라는 거예요. ‘더 깊이 들어보라 더 열심히 들어보라 더 오래 들어보라’
사도 바울은 이런 것들을 단호하게 잘라버립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말씀은 그런 의미에요.
던졌는데 안 받잖아요. 그럼 안 던져야 돼요.
근데 우리는 오기가 생기죠.
‘자꾸 나무를 찍다 보면 언젠가는 넘어가겠지‘ 열 번째로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잖아요.
그런 우리의 사고 방식, 완전히 배제되는 겁니다.
그래서 열번 찍으셔야 돼요. 방금 모순되는 얘기를 했는데

정답을 찾아 다니는 자는 성도가 아니에요.
이 닥친 상황 속에서 그냥 살면 돼요. 사도 바울이 지금 떠나버리잖아요.
떠나버리면서 누구를 남겨둡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에베소에 남겨둬요. 이거는 희한해요.
그러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에베소에 남겨졌으니까
그러면 이 에베소 교회가 점점점점 흥왕하여 성도가 많아지겠죠.
뒤에 많아졌거든요. 어느 정도 많아지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와중에 어떤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아볼로라는 인물이 등장을 해요. 이름 값 합니다.
마치 삼손 같은 이름과 같은 의미를 비슷하게 담았거든요.
아폴로신 알잖아요. 그 이름이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보면 이 사람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면

(행18:24상)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

알렉산드리아라는 곳은 유명한 도시 아닙니까?
지적으로 충만한 도시죠. 웬만한 서적들은 다 있는 그런 도시일 거예요. 아마
그런데 이쪽 출신의 아볼로 이 사람이 어떻게 소개하는가? 하면

(행18:24하)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학문이 많다라는 것은 이번에 그 필즈상 받은 그 사람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필즈상 받은 그 사람은 수학에만 뛰어나잖아요.
이 당시에 ’학문이 많다‘라는 것은 전 분야에 뛰어난 사람이에요.
근대 현대 이후에 세분화돼 버리거든요.
왜 세분화되느냐? 밥그릇 때문에 다 세분화시켜버렸어요.
신약도 다 세분화시켰거든요. 신약 구약. 구약에서 창세기, 모세오경, 신약 다 나누거든요.
그 돈벌이 때문에 다 나눴는데
이 당시에는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입니다. 얼마나 똑똑한 사람이겠어요.
많은 학문 그리고

(행18:24) ~성경에 능한 자라

구약에 능통하다. 이 얘기입니다.
구약에 능통하다는 말은 뭐 설교하는 저부터 이렇게 이야기하면
’저도 게임이 안 된다‘ 이 얘기에요. 저는 머리가 나빠서 기억을 못하거든요.
이때 당시에 이 사람들은 거의 다 외워버려요. 외워버려
피아노 임윤창입니까? 한번 보세요. 곡 한 시간 반짜리를 다 외워서 치잖아요.
천재다. 천재. 그 곡만 외우겠어요. 책도 다 외워버리는 거예요.

(행18:24) ~성경에 능한 자라
(행18:25)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주의 도를 배웠다하죠. 어떻게 배웠느냐?
아마 이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행18:25)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무튼 번역을 너무 잘해놨어요. 배웠고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는데

(행18:25하)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더라

무슨 얘기입니까? 이게. 예수님의 이 복음,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다 알고 있어요. 구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는 내용까지 다 압니다.
물론 그 수준은 사도바울보다는 낮아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한 수 더 가르쳐주는 걸 보면
구약에 아주 능하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관하여 알긴 알지만
그 아는 부분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뛰어나고 월등하지만
이 사도 바울이나 아니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비하면,
이들은 학문이 많은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바울로부터 배웠잖아요.
그러니 복음의 내용을 더 깊이 안다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누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런데 이 아볼로, 얼마나 똑똑한 사람입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 짐작할 수 있는 게 이런 겁니다.
성경을 똑똑한 사람이 논리적으로 보면 복음 가까이에 접근할 수 있다라는 얘기예요.
아직까지 그만큼 똑똑한 사람들은 제가 못 봤지만, 여러분, 그런 생각 안 들어요.
성경을 좀 복음을 배워보니까 너무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 있잖아요. 똑똑한 사람들하고 대화를 하면요.
제가 그런 사람을 만났는데 복음 전하니까 목사님 말씀이 다 맞다는 거예요.
정말 예수님이 계시고 구약을 제대로 해석하면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결론은 ‘나 못 믿겠다’는 이야기예요.
그게 불가능할 것 같아요? 그 가능함이 지금 여기에 담겨 있어요.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잖아요.
예수님을 이용해 먹으려고 들어가니까
그 모든 예수님의 말씀이 다 받아들여집니까? 안 받아들여집니까? 다 받아들여졌죠.
‘아멘’ 했단 말이에요.

이 아볼로가 얼마나 똑똑한 사람입니까?
그 성경에 대해서도 굉장히 능한 자고 ‘일찍 주에 도를 배웠다.’
일찍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가 뭘까요? 복음을 들은 지 오래 되었다라는 거예요.
25년 24년 30년 다 됐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정도 됐으면 어떨까요?
우리가 주님이라면 성령 안 주겠습니까?

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가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성령이 안 임해요. 이상하죠. 이게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어요.
하나는 성령의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성령의 일을 돋보이게 하게 하기 위해서
이 사람을 통해서 성령이 임하지 않게 했고 이 사람도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
이거는 논리가 좀 빈약하거든요. 왜냐하면 본인이 성령 못 받았잖아요. 맞죠?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봐야 됩니까? 성령 못 받은 자가 복음을 전하는 상황이에요.
정말 신기하죠. 이런게. 지금도 그런 사람 많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듣는 이 복음의 내용은
일반 신학교 일반 우리 한국 교회에 있는 그 사람들의 논리를 다 깨버리거든요.
왜 논리를 다 깰 수 있느냐?라고 할 때는 십자가 자체가 다 부정하니까
자기들도 해보니까 다 엉터린 걸 다 알거든요.

이걸 갖고 가서 이걸 블루오션이라고 하는데. 이 복음의 내용이죠. 내용.
내용을 갖고 와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왜냐하면 오늘날 교인들은 공부 많이 했잖아요.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은 뭘 원하는 거예요?
복음을 원할까요? 지식을 원할까요? 지식을 원하거든요.
그들에게 먹힌다라는 겁니다.

어차피 죄인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죠?
뭘 해도 죄라는 건 누구나 다 받아들이잖아요. 맞죠?
그러면서 뭘 채워줍니까? 지적 욕구를 계속 채워주는 거예요.
그런데 뭐가 없어요? 성령의 역사가 없는 겁니다.
십자가를 보기 좋게 피해가요. 허들 경기처럼.
십자가만 나오면 피해 가버리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죄 덩어리입니다 하는 당신이 바로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마귀자식이에요.‘
그 얘기를 못 하거든요. 그 사람들은
그 얘기 해버리면 안 오잖아요. 삐져서

재밌는 것은 이 아블로가 왔는데 그동안 그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뭐 했을까?
이 아볼로가 에베소에 와서 회당에 들어가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했어요.
성경이 참 재미있는 이런 거예요.
사도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잖아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제쳐놓고
그러면 바울이 떠났으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 내용은 제가 잘 못 봐서 그런지 모르지만 안 나오고요.
오히려 누가 나옵니까? 아볼로가 에베소로 와서 담대하게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해요. 놀라운 것은

(행18:26)~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하나님의 도, 이 길이거든요.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길이라는 것은 ’십자가의 도‘예요. 이걸 달리 표현하면.
물론 그만큼 깊이 알았을까?
복음이라는 자체가 십자가의 도잖아요.

하나님의 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잖아요.
그 길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반응이 어떠했다. 이런 내용은 나오지 않아요.
재미있는 것은 그 설교를 회당에서 들었던 모양이에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들어보니까 뭔가 좀 미흡해요. 그 미흡한 부분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채워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하죠. 26절 하반절에

(행18:26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아볼로도 보통이 아닌데 아볼로가 갖고 있는 그 성경에 대한 지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 복음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세하게 누가 전해줍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전해줬어요.
그러면 성령받아야 안 돼요? 아니 복음을 전했잖아요.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것과 성령의 일을 동일시 하려고 하죠.
제가 일방적으로 그리 생각합니까? 동일시하는 순간 어떤 꼴이 되는가? 하면
‘내 말 들어라‘ 예요. 내 말. ’내가 복음을 전하는 자다‘ 이렇게 돼요.
이러한 어떤 사고 방식을 철저하게 배제해 버립니다.
복음은 주님이 전하지 내가 전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 이 18장 이 하반절, 19장으로 넘어가면서 중요한 시점이잖아요. 지금
복음이 전파되는 중요한 시점인데
이 시점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게 지금 일이 진행되는 겁니다.
사실, 이 사도행전 3장과 같은 이야기예요.
’우리가 한 게 아니고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께서 이 사람을 성하게 했다.‘
(행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이 증거를 지금 말로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과 사람의 어떤 그 상황 속에서, 관계 속에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라는 거예요.

아볼로만 해도 괜찮게 복음을 이해하는 사람이에요.
’복음을 더 자세히 했다‘라는 말은 ’복음이 아니었다‘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우리도 돌아보면 복음이 아니었을 경우도 있지만
복음을 안 이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앎의 뭐랄까요? 이 밀도라고 할까요?
그게 약간 엉성했다면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촘촘해지죠.
문제는 촘촘해져도 성령이 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정말 이상하죠.
여기서 우리들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복음을 아무리 배워도 성령 임하지 않아요.
그 아는 것과 성령이 임함이 달라요.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이 ’앎‘이 ’성령이 임함‘이라고 먼저 간주해버려요.
그러한 사고 방식을 완전히 깨어버리는 게 오늘 본문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도대체 우리가 뭘 붙들어야 돼요? 붙들 게 없다니까요.
성령의 인도하심만 있어요.
목사님 그러면 십자가만 자랑하면 안 됩니까? 그 자랑한 거 또 붙들고 앉았어요.
성령은 눈에 안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계속 대체하려고 하죠.
그 대체물 중에 가장 좋은 게 뭔가? 하면 복음의 내용이에요.

설교 녹취 다 올라오잖아요.
그거 다 수집해서 조금만 기다리라 했잖아요. AI가 그거 수집해서 알아서 정리해 줍니다. 지금.
영화에는 이미 그런 거 다 나왔거든요. 이 뇌 중에 기억 중에 어떤 것까지도 다 뽑아냅니까?
말씀에 대한 기억만 다 뽑아내가지고요.
우리 한 열 몇 명이 이렇게 모여 있으면 그걸 다 뽑아내서
그걸 종합해서 신학 체계로 만들 수 있어요. 불가능할 것 같죠? 그거 가능합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을 소유한 인간들은 진리를 무엇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는가? 하면
이게 마지막 뭐 늘 마지막이었지만 이때도 똑같아요.
아볼로가 등장하는 이유는 지식의 완전히 최고 정점에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 정도 하면 성령 받았을 거고 그 정도 하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가르침을 플러스를 했잖아요.
그 정도 되면 성령 충만 받아서 그가 전하는 내용은 진리다. 진리는 맞죠. 내용.

마치 이 발람 선지자하고 똑같은 거예요.
자기도 어쩔 수 없이 그냥 내뱉는 겁니다. 가룟 유다처럼
주께서 이 사람을 아볼로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성령 안으로 주 안으로
십자가 안으로 끌고 오셨기 때문에 이들은 긍휼의 그릇으로 지금 참여한 자가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는 거예요. 그걸 이미 가룟 유다에서 완벽하게 보여줬습니다.
가룟 유다만 그런 게 아니라 11제자 12제자 모두가 그러한 거예요.

자기들은 할 일만 하고 시키는 것만 하고 복음은 전하고
자기들은 십자가의 원수로서 예수님을 팔아먹고. 그 역할을 이미 다 보여줬어요.
그 사복음서를 깔지 않으면 사도행전 자체가 하나도 이해가 안 돼요
이제 성령의 시대니까 성령 받으니까 이제 성령받은 이후에는 뭔가 인간들이 나설 수 있지 않느냐?
오히려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인간이 나설 수 있는 대목은 하나도 없어요. 거꾸로.

얼마나 당황스럽습니까? 지금
말씀을 일년 육개월 동안 가르쳤다. 그러면 우리들은 뭘 생각해요? ’아, 저들이 더 깊이 있구나’
‘깊이 있다’라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층이 완전히 사라져 가는구나’ 이렇게 해석을 해야 되는데,
우리는 이제 일 년 육 개월 동안 배웠으니까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성경 깊이가 더 들어갔으니까
어떻게? ‘층이 더 두꺼워졌구나’ 이렇게 해석하잖아요.

사도 바울을 보세요. 복음을 전한 이후에 마지막에 뭐라 합니까?
죄인 중에 괴수, 층이 날아가버리죠.
우리는 그 정도의 어떤 시간이 지나면 층이 더 넓어지고 깊어지고 두꺼워지고 탄탄해지잖아요.
정반대예요. 복음은
왜냐하면 죄의 깊이 속으로 더 들어갔기 때문에 그래요.
그건 성령의 일이거든요. 주님의 일이고 나의 일이 아니에요.

나의 일이 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내가 죄의 깊이를 더 아는 ‘나’가 되죠.
죄의 깊이를 더 아는 나니까 ‘너희들 까불지 마라’ 이것밖에 안 돼요. 논리가

그러면 목사님 계속해서 말씀을 배우고 들을 필요가 없습니까? 또 이런 질문 나오거든요.
나와야 돼요. 반드시. 아무 소용 없다고 하니까
그러면 이제 노림수가 이제 다 드러났네요.
그러면 안 배우고 안 듣고 안 모이고 그러면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지금까지 왜 모이고 왜 말씀들었습니까?
그렇게 하면 내가 더 두꺼워지고 더 단단해지고 더 높아질 걸로 생각하니까.
주님을 닮아서 주님 근처에 갈 수 있다고 이렇게 생각해서 지금 복음을 들은 거 아닙니까?
그런 말이 나온다면

말씀을 피해갈 수 없어요.
우리가 어떤 노림수를 쓰더라도 그 노림수는 복음 앞에 다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잔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안 돼요. 주님의 일은 주님이 하시지 사람이 할 수 없는 겁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거예요. 27절에

(행18: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아가야 지역에 고린도 교회가 있거든요.
아테네에서는 교회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지만, 그곳에 건너가고자 하니

(행18:27)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형제라는 표현을 써버립니다. 이것도 되게 어렵죠.
‘형제라고 표현을 썼으니까 이미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우리는 간주하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19장이 넘어가면 이들이 성령을 못 받았어요.
자기들끼리 배운 게 있어 가지고 ‘형제, 자매님’ 많이 해봤죠. 그죠?
배운 게 있어가지고, ‘형제 자매님~’ 한 거예요.

이들은 주님이 홀로 일하심을 보여주는 도구들입니다.
이들이 중심이 아니에요. 그래서 자기들은 형제들인 거예요.
그 속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포함돼 있겠죠.
이 형제들이 격려합니다.
‘저를 장려하며’ 누구를? 아볼로를 격려해서 이제 보내는데
어떻게 보내느냐?

(행18:27)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고린도에 주님의 제자들이 있는 거예요.
형제들 제자들 마구 섞어 쓰죠. 언어를
그러니까 이 언어에 매이면 안 돼요.
언어에 매이는 순간 형제들이라 했으니까 ‘이 사람은 성령 받았다’라고 먼저 들어가잖아요. 벌써

그런데 19장에 보면 ‘어떤 제자들’을 만나거든요.
‘어떤 제자들’, ‘어떤 제자들’이라는 표현을 또 쓰거든요.
(행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그 제자들이 성령을 받았어요? 못 받았어요.
자기들끼리 제자들인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그들을 향해서 ‘너희들 제자 아니야’ 이렇게 하느냐? 그것도 아니에요.
판단자는 주님이거든요. 외부로 나타나는 것 갖고 우리가 누구도 판단을 못 해요.
저 사람이 복음의 진리의 내용을 잘 발설한다고 했을 때
‘저 사람이 성령 못 받았을 거야’ 이렇게 단언하고 못 들어갑니다.
잘 표현 못해도 마찬가지예요.

정말 놀라운 것은 격려하여서 아볼로를 아가야 지역으로 보내죠.
보내면서 형제들에게 편지 쓴 거예요.
‘편지하여 이 아볼로를 영접해 달라’고 합니다.
그럼 누가 봐도 아볼로가 성령 받은 자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이미 간주되잖아요. 맞죠?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이 성령받지 못한 아볼로로 인하여서
이 고린도 교회가 아가야 지역에 있는 교회가 어떻게 지금 상황이 바뀌는가?를 보게 되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27절 하반절

(행18:27하)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렇게 나와요.
여기에서는 뭐라고 표현합니까?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 이들은 성령을 받은 자들이에요.
이 표현이 아주 날카롭게 지금 기록돼 있거든요.

자, 그런데 아볼로가 성령을 못 받았잖아요.
못 받은 자가 성경을 어떻게 했습니까?
‘성경으로서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거하면서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겼다’라고 하죠.

(행18: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성령을 못 받았는데 성경을 같고 ‘예수는 그리스도라’
사람들 대중 앞에서 유대인과 싸워서 이겨버려요. 그러한 모습,
‘말씀을 풀어내는 그것으로 인하여서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줬다’라는 거예요.
뭔가 안 맞죠.
우리는 성령을 받은 아볼로가 이렇게 했다면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이 많은 유익을 얻었다.’ 이거는 논리가 되잖아요.

그런데 지금 아볼로가 성령을 못 받았거든요.
못 받았는데 성경을 갖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명확하게 이렇게 가르치고 증거한다고
표현할 수 있죠. 증거하니까 이들에게 유익이 된 거예요.

주님께서 이상하게 일을 하시죠.
정말 이상하게 일하지 않습니까? 저만 그런가요?
아니 성도들이 유익을 얻으려면 성령 받은 사람에 의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서
복음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야 유익이 된다라고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일을 안 해요.

물론 분명하게 그런 식으로도 일을 하시죠.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그렇게 일을 해오셨고요.
그런데 이 올바른 지식을 갖고 성령받은 자들에게 성경을 가리키면
자기는 은혜 속으로 못 들어가고 누구만 유익하게 해줍니까?
성령 받은 성도만 유익하게 한다라는 거예요.

제 설교를 듣고 반박할 사람들이 엄청 많거든요. 지금.
아볼로가 나중에 성령 받았잖아요. 그건 나중이잖아요. 나중
아직 성령을 못 받았다라는 것은
지금 아볼로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성령의 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성령의 말이 아닌 말은 주의 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 ‘아님’을 갖고 ‘이다’라는 내용을 외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돼요.
자기는 지옥 가고 주의 백성들은 그 외침 때문에 구원을 얻는
그 대열로 들어올 수 있는 주님의 일이 그런 식으로 진행된다라는 사실입니다.

이 복음이 누구를 당황하게 해요?
여기 있는 우리들을 당황하게 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 속에 들어가 있지 않은가?
우리가 아볼로예요. 사실은.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기 때문에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아멘)

그래서 우리들이 지식을 갖고 자기가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고
성령의 역사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복음을 전해보잖아요.
성공한 사람이 있습니까? 만일에 성공했다면 수상한 거예요.
주님은 절대로 그렇게 일을 안 해요.

이 정도 하면 복음을 들을 것 같은데
주님 백성이기 때문에 이 정도 하니까 복음 들을 것 같은데라고 해서 전했는데 안 듣죠. 절대로
오히려 전했는데 설득이 되고 이해가 돼서 교회에 왔어요.
그걸 수상하게 봐야 돼요.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죠.

그러면 목사님 말 빼고 복음 전할 수 있습니까? 없죠.
그러니까 ‘나는 아니오’로 들어가야 되는데
‘자기가 복음을 잘 전한 걸 갖고 이 사람이 믿더라 듣더라‘ 이런 논리가 들어오는 거예요.

그렇게 복음 들은 사람은 그 다음 똑같은 행동을 취하죠.
’나도 저 사람처럼 잘 배워서 잘 들어서 잘 요약해서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해보셨죠? 다.
여러분 그런 동네에서 오셨잖아요. 대부분이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가? 하면 나오는 거는 교만뿐이에요.
’나 잘났다’는 것뿐이에요.

성령이 역사해버리면 아볼로가 어떻게 되죠?
아볼로가 어떻게 되겠어요? 십자가의 원수로 드러나죠.
자기 열심히 전했는 것이 무슨 자랑이었습니까? 자기 지식의 자랑이었어요.
성도들도 이 자리로 들어가야 돼요. ‘아, 지식을 자랑했구나.’

주님이 우리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홀로 일을 하십니다.
그 홀로 일하는 그 과정들을 지금 오늘 본문 속에 고스란히 담아놨어요.
이후에 아볼로도 성령을 받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마찬가지예요.

아마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아까 제가 시작할 때 그런 얘기했잖아요.
‘나도 복음 아는데... 나도 성령 받았는데.. 바울 너만 잘 났냐?
나도 에베소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 전할 수 있어. ’봐, 나 아볼로도 가르치잖아‘
가르쳤는데 나중에 보니까 뭐예요? 성령 안 임하잖아요.

나중에 성령이 임하니까 어떤 결과가 초래되죠?
그 가르침 자체가, 가르침은 가르침대로 내용은 내용대로 흘러가 버리고
주님의 일은 오히려 그 말씀의 역사가 하나도 작동 못하게 만들어 버렸죠.
신기하지 않습니까?

우린 복음을 전하는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어해요.
이 내용을 이렇게 기록한 이유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데 자기가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내가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니까 내가 복음을 전하겠어‘
이미 앞에서 계속 커트를 당했잖아요.
아시아로 가려고 했는데 마게도냐 사람을 불러가지고 그쪽으로 방향을 꺾어버리잖아요.
그 한 개인 속에 담겨 있는 것들을 지금 사람들과 사람들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내는 겁니다.

물론 감사하게도 이들은 성령 안으로 합류된 인물들이지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룟 유다는 어떻습니까? 자기는 천국 복음을 전하고 자기는 지옥가는 겁니다.
이런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은 감사해야 돼요.

남기고자 하는 게 나의 구원이 아니에요.
’내가 복음을 아니까 나 중심으로 복음을 전해야 돼‘ 이것도 아니에요.
십자가 지신 주님이 살아계셔서 홀로 자기의 주되심만을 드러내는
그 사건 속에 우리가 합류한 것에 대해서 감사를 해야 되는 겁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의 진리를 안다고 해서 성령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 능력으로 홀로 일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식을 가진 자들을 사용하셔서
오히려 지식이 복음이 아님을 들추어내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하셔서 죄인됨을 드러내시고 십자가만 자랑케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십자가 지신 주님의 일 속에 날마다 참여 되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