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7-18 06:57
사도행전 83강 행 19:1-7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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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I6Xp5GZ96s4

관리자 22-07-18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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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83강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하나님 말씀, 시편 41편 1절에서 13절 말씀을 함께 교독하시겠습니다.

(시41:1~13)
1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2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4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5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6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7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8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10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11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12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13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아멘 아멘

이 시간 김기대집사님 대표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과 같은 허무한 인생들에게
십자가 증인 만드시기 위하여 말씀의 자리로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피로 사신 죄인들의 몸을 통하여 날마다 십자가 사건 속에 함몰시키시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게 하시고
소경들의 눈을 통하여 죄의 깊이를 알아가게 하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어
오직 성도의 몸에서 남겨질 것은 새 언약인 십자가뿐임을 알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사자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이 사람의 말로 들리지 않고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심판의 말씀으로 들리며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성도의 고백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올려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2장 7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2:7)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이 시간도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사
주께서 만드신 주의 종으로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씀을 통하여서 들려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사도행전 19장 1절에서 7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행19:1~7)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상당히 낯선 질문이죠.
오늘날 사람들을 미혹하는 방식 중 하나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는 순간 당황하셨죠.

성경 말씀은 악마가 갖고 노는 칼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악마가 갖고 놉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신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 아버지를 마귀로 두었거든요.
그들이 무엇을 가르쳤느냐? 라고 하면 율법대로 가르쳤어요.
아직까지도 이런 말이 낯설게 느끼는 분도 계실지 모르지만
흔히 교회에서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이 바리새인을 공격하는 것,
그 바리새인은 그런 바리새인이 아니에요.
우리가 말하는 그 외식, 그 외식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외식이 달라요.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어떤 제자들에게 한 질문입니다.
이 말씀이 들려지는 순간, 읽는 순간, 인간들은 유혹에 빠지죠.
다르게 표현하면 탐심이 작동을 합니다.
유혹에 빠지는 것은 스스로 반문하죠. ‘내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는가?’
그거 알아서 뭐 하시려고 그래요? 그게 더 궁금하죠.
‘아버지, 제가 아버지 아들 맞습니까?’ ‘한 대 맞아라 이놈아.’

또 한 가지는 바울 행세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런 마음이 끓어오르지 않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할 때 이 사람이 성령을 못 받았는데
복음을 전하는 순간 성령받은 증거가 나올 수 있도록...’
순복음이야 여기 나오죠. 여기에. 우리 순복음 장로님 계시는데,

여기에 뭐라고 나옵니까?
‘사도 바울이 안수를 하니까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옳지. 바로 이거야.’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하면요. 백이면 백 ‘그게 뭐예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성령은 실체가 없거든요. 성령은 실체가 없어요. 신기하죠.
그런데 실체가 있는 것처럼 성경이 말씀하고 있어요.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더라.’
그러면 성령 받은 증거가 어떤 증거냐? 방언. 예언.

사람들 갖고 놀기가 너무 좋아요.
구인사 절에 가서 거기도 예언도 하고 방언도 하거든요.
우리 집 앞에 여기 우리 집이 아니니까 하도 집에서 설교를 하다 보니까...
예언을 해요. 그런데 장군법사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예수 이름으로 하면 어떨까요?
그 사람이 장사를 너무 못해요. 간판을 바꿔줘야 돼요.
‘예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예수 이름으로 방언을 하도록 여러분들을 돕겠습니다.’
성령의 증거예요. 못 할 것 같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것들이 불가능할 것 같잖아요.
이런 것들은 종교를 공부해 보면, 종교의 영역에서는 다 있어요.
예언도 있고 기적도 있고 치유도 있고 온갖 것들이 다 있습니다.

구인사에서 나온 간증집을 보신 분 있어요? 혹시.
할 일 없으면 그 서점에 가서 한번 간증집을 사지는 마시고 읽어보세요.
기도해서 암이 나았고, 기도해서 예언이 터졌고, 방언도 하고... 다 해요.
그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 교회 목사님만 그러한 능력이 있다’라고 이렇게 착각을 하죠.
왜 그런가? 하면 교인들의 생각은
‘절은 우상이고 우리는 참 하나님이다.’ 이런 논리를 먼저 끌고 오거든요.
‘에이 그래도 저들은 우상의 이름으로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지 않습니까?’
그 논리가 주님 앞에 먹힐까요? 안 먹힙니다.

마태복음 7장에 나오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
(마7:2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이 얘기는 진심으로 한 거예요. 진심으로.

자기가 가짜로 했다면 주님 앞에, 심판주 앞에 그런 소리 하겠습니까?
주님 앞에서는 진심이 안 통해요. 왜냐하면 그 진심이 악마의 진심이기 때문에 그래요.
진심으로 아무리 주님을 경외해도 그 진심 안 통합니다.
왜냐하면 네 몸이 누구의 몸이에요?
우리는 ‘주님의 몸입니다.’ 이렇게 먼저 들어가고 싶잖아요.

주님의 몸으로 들어갔으니까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심판주 앞에 섰을 때
“제가 주의 이름으로 진짜 선지자 노릇 했습니다”라는 주장을 펼치는 거예요.
‘제 몸이 마귀의 몸인데요.’ 그러면
주님의 심판 앞에 주의 이름으로 했다라는 말이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안 나오죠.
진심은 주님 앞에 통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귀가 이용하기 가장 좋은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써먹어보세요.
하나님의 교회는 뭐라고 묻습니까? ‘어머니 하나님을 아십니까?’ 이래 물어요.
이 얘기가 ‘성령을 받았습니까?’라는 말을 바꾼 거예요.
이걸 달리 표현하면 ‘구원받았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면 받았다고 하면 뭐라고 해요? 언제 받았냐?고 물었죠.
그러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해야 돼요.
‘성령 받았습니까?’ 물어야 돼요. 반대로. 당황스러운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아는 것은 방언하고 예언하고 이것밖에 없어요.

혹시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 사람들이 전도를 하면 이렇게 물으세요.
‘손자 하나님을 아시냐?’고
‘증손자 하나님을 아시냐?’고 이게 나오게 돼 있어요. 앞으로.
왜냐하면 통일교는 문선명이가 죽으니까 자기가 하나님이라 했다가
그다음 자기 와이프를 뭘로 만들었어요?
독생자가 아니고 독생자는 자기이고, 독생녀를 만들었죠. 혹시 들어보셨어요?
그럼 어머니와 하나님 있으면 나중에 손자하나님, 손자하나님. 이게 안 통할 것 같죠?
이미 벌써 하나님 개념 자체가 혈통적 개념으로 다 바꿔버렸기 때문에
손자 손녀 증손자 나중에는 증조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하나님 다 나와요.
그래야 자기 가계가 지배할 수 있는 그 군주 체제라고 할까요? 그 체제를 만들 수 있거든요.

하나님 나라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다라고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을 해도
자기들이 예수교라고 해놓고 예수님 말씀을 죽어도 안 들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세상이 갖고 있던 논리가 다 깨지는 거예요.
어떤 것도 맞지 않습니다. 왜? 육이기 때문에.

심지어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해도 ‘너 아니야’ 이야기예요.
그럼 선지자 노릇 할 때 사람들이 보기에 가짜 선지자처럼 노릇했겠어요?
그러면 누가 따르겠습니까?
여러분이 기존 교회를 다닐 때 그 목사들이 말을 할 때 성경대로 해요? 성경 밖에서 이야기해요?
이만희나 하나님의 교회도 성경대로 해요. 제 마음대로.

이만희도 마찬가지죠. 성경대로 끌고 와요.
성경에 선지자들이 계시를 받잖아요. 자기도 청도 그 산에서 올랐는데 빛이 비치더라.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겠어요. ‘나는 그 빛을 비추는 걸 봤다’라고 이야기하겠어요.
그러면 네 증거가 어딨냐? 그 증거가 어딨어요? 내가 증거지.
이만희가 증거잖아요. 근데 그런 논리에 사람들이 먹혀 들어가요.
앞으로 그런 이단들이 나올 수도 있어요. 제가 너무 앞서가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가 안산홍이가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걸,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할 것을 나는 다 봤다’라고
해버리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어요.
물론 그건 좀 지지자가 있어야 되겠죠.

선지자들이 노릇을 할 때 다 성경을 갖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너는? 나도 성경을 갖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그러면 어떻게 분간하느냐? 분간해서 뭐 하시려고요?
물론 성경에는 분별하라고 나오죠.
분별하라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주님이 분별케 합니다.

성도의 입에서는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 복음을 전하죠.
나중에 이것조차 마귀가 따라오기 때문에.
우리는 몰라도 돼요. 그냥 살면 됩니다. 받은 대로.
받은 대로 사는데 한쪽은 거짓 선지자로 가고, 한쪽은 참 선지자로 바뀌죠.
그게 주님의 심판대잖아요.

그런데 그 심판이 이미 우리 가운데 들어와버립니다.
‘목사님 그러면 가봐야 되지 않습니까?’ 이 사람은 구원 못 받은 사람이에요.
제가 이렇게 설교를 하면,
‘그럼 최종 심판 자리에 가봐야 누가 구원받았는지 지옥 가는지 알지 않습니까?’
제가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를 해요.
그럼 가봐야 알잖아요. 그러한 말들을 끄집어내기 위한 설교예요.

자기 속에 받은 것이 없는 사람은 항상 말씀을 들으면 자기 중심으로 생각을 해요.
지금 사도 바울이, 성경이 아주 오묘하죠.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 아볼로 이름을 지금 끌고 들어오는 겁니다. 이 본문에서.

왜 끌고 들어오는가? 아볼로가 에베소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거든요.
우리가 보니까 복음 안 전했잖아요. 예수님에 관해서 자세히 말했잖아요.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가 아가야에 가서 전한 내용을 보면
(행18:27하)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행18: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게 복음이잖아요.
그 내용을 기록을 할 때 에베소서에서는 비켜가게 기록한 거예요. 표현을 하면.
복음을 전했단 말입니다.
문제는 복음을 전했는데 이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만 알더라‘는 거예요.

그러면 흔히 교회에서나 목사들이나 아니면 여러분들 같으면
그런 걸 안 들었으면 좀 상상력이 풍부할 건데,
하여튼 인간들이 교육을 하는 순간 상상력이 줄어들 겁니다.

‘요한의 세례’라고 하는 순간,
벌써 ‘아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각 지역에 흩어져서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해서 전했다.’
이런 생각을 먼저 떠올리죠. 맞죠?
그렇게 성경을 해석하면 유리한 점이 뭘까요?
유리한 점이 ‘나는 아니라’는 이야기를 그 속에 담고 있어요.
제가 너무 멀리 갔습니까?

‘요한의 세례’라는 말은, 그 의미는 그 일층의 의미라고 보시면 돼요. 일차원적인 의미.
근데 요한의 세례의 의미는 인간 세계 전체를 다 담아버립니다.
누가가 성령을 받아서 기록했다는 것을 우리는 늘 잊어버리죠.
우리라고 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성경을 읽을 때 말은 성령을 받았다고 해놓고 어느 순간 성령 빼고 성경을 읽죠.
여러분들은 다 성령을 다 넣어서 읽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라는 인간이라는 자체가 이 육의 세계에 속해있기 때문에
말씀을 읽을 때 항상 육적으로 접근을 합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죠.
지금까지 계속해서 성령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고, 주님이 어떻게 일을 하시면서,
육의 요소들을 계속 배제해 나가면서 십자가의 능력을 지금 보여주시는가?
십자가로 다 이루신 그 사건들을 이렇게 펼쳐내시는가? 그것을 말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이 말씀에 도달하게 되면 갑자기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면
다시 원래 자리로 가서 성경을 읽고 해석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신학자들이나 목사들도 똑같아요.
앞부분은 그렇게 이야기했다가, 이 부분이 오면 갑자기 학문적으로 해석을 해요. 논리적으로.
요한의 세례라고 하니까 요한의 세례는 간단하죠. 물로 세례를 주는 거.

그런데 그게 앞뒤가 안 맞아요. 무엇이 안 맞는가? 사도 바울이 묻잖아요.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럼 뭘 믿었어요? 이들이? 주 예수를 믿었어요.

빌립보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외쳤잖아요.
그 외침을 똑같이 한 거예요.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이 질문 자체가
예수님이 아니고 그냥 막연한 이런 차원이라면,
그 ‘믿을 때’라는 말 자체가 요한의 세례 정도로 이렇게 집어넣을 수가 있지만
앞부분에 18장 후반부에 나오는 그 아볼로가 전한 복음이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전한
그 복음의 내용을 들여다보게 되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다 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이 시대에 이 본문은 너무나 중요한 거예요.
오늘날 이 시대만 그런 게 아니라
이미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믿음을 무엇으로 다 바꿔버렸습니까?
‘신학 지식’으로 다 바꿔버렸어요.
우리가 백날 뛰어봤자 벼룩이에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못 넘어섭니다.
철저하게 말씀 중심이에요.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라고 했을 때는 육에 속했다라는 거예요.
그럼 육에 속했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전할 수 있는가?
그건 지난 시간에 제가 충분히 말씀을 드렸죠.
육에 속해도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얼마든지 전할 수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는 그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된 자들이잖아요.
자기의 목숨을 바쳐가면서 복음을 전한 자들이에요.
그러니까 심판주 앞에서 큰소리 치는 거예요.
한 것이 없으면 큰소리 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심판주 앞에 이렇게 큰소리 칠 수 있어요?
난 이렇게 큰소리 안 치기 위해서 아무것도 안 하겠다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본문을 자세히 보면요.
천국 가는 자들도 똑같이 일을 했어요. 똑같이 일을 하는데
한쪽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라고 외치고,
한쪽은 없어요.

물론 마태복음 25장에 가면
양의 편에 선 자들이 나오죠. 한 게 없다고.
또 한 게 없다니까 또 흉내 내잖아요.
‘저는 한 게 없습니다.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무익한 종입니다.’ 그것도 안 통해요. 주님께는.

그러한 짓을 누가 다 했습니까? 바리새인의 기도 잘 알죠.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바리새인의 기도가 뻔뻔하다고 생각하잖아요. 우리들은.
근데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보세요. 그 기도 하잖아요.
‘주여 저는 저들과 다르게 살게 해주심을 감사하나이다.
순복음 교회 그 목사와 다르게 해 주심을 감사하나이다.
그들과 다르게 복음을 듣게 하심을 감사하나이다.
십자가 은혜를 알게 해 주심을 감사하나이다.
나 저 하나님의 교회 저들과 다름을 감사하나이다.’ 그거 하잖아요. 아니에요.

말씀은 성도에게 하는 말씀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어느 자리로 가야 됩니까?
바리새인의 자리로, 바리새인이 하는 기도 자리에 우리를 집어넣어요.
주님은 우리를 만일에 세리의 자리에 집어넣어버리면 우리는 어떤 소리를 하게 되는가? 하면
반드시 바리새인의 기도를 하게 되죠. 그건 성도가 아닙니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또 사람들은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늘 바리새인이 돼야 되겠네요?’
또 논리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겠죠. 그래서 주님은 세리를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럼 세리를 누가 만들어요? 십자가 지신 주님이 만들어버립니다.
그 사건 속에 넣어버리죠. 넣어버리는 순간 세리가 됩니다.
세리가 된 순간 다시 어디로 가죠? 바리새인으로 바뀌어버립니다.

논리 체계로는 죄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니까 이제는 생명의 삶을 산다라고 하니까
‘나는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제는 세리입니다.’ 말 자체가 벌써 모순이잖아요.
세리라는 말은 죄인 중의 괴수라 말이잖아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은 자기가 어떤 자란 말입니까?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고 저 바리새인처럼 기도하는 그런 인간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는 자입니다.’
이 얘기를 하는 거잖아요.
그럼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내 편, 네 편을 딱 나누잖아요.
나눠가지고 내가 유리한 거, 내가 믿음이 있는 부분은 내가 다 취하고
아닌 것은 다 누구? 지옥 갈 너나 다 가져가라. 그렇게 성경을 분리해 버리거든요.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눈을 부릅뜨고
‘성령을 받았느냐? 했을 때 도대체 성령을 받은 게 뭐냐?’
아니면 사도 바울이 그들을 보자마자 ‘딱 보면 안다’ 그런 사람 되게 많아요.
자기가 영의 눈이 있어가지고 눈 마주치거든요.
다 마주치면 눈빛을 피하는 사람은 다 성령 못 받은 사람이다.
뭔가 뭔가 꿀리는 게 있는 사람들은 성령 못 받는 사람이다.

그러면 상대가 뭐라 합니까? 할 말이 없어요.
왜냐면 성령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게 교회에 통하는 거예요. 안 그럴 거 같죠?
그 목사가 좀 성경 공부를 좀 제대로 하고 간이 크면, 크게 해먹을 수 있어요.
여러분은 안 그럴 것 같죠? 뭐 성경 아니까. 알아도 소용없어요.

사도 바울이 지금 이 에베소에 왔잖아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까? 안 전했습니까? 이전에. 전했죠.
물론 1년이나 2년 3년이 지났을 수도 있는데,
전했다면 성령 이야기를 이 동네에서 알까요? 모를까요?
근데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서 이 ‘어떤 제자들’이라는 이에 대한 설명이 하나도 없다라는 거예요.
그게 난감한 겁니다. 그래서 18장에 보면 ‘형제들’이라는 표현을 쓰거든요. 여기에 보면

(행18: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격려하여 이런 표현이 나오잖아요. 이 형제들을 대부분의 사본에는, 성경의 원본이 없어요.
미안한 얘기지만. ‘원본 찾아 삼만리’ 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백날 찾아도 안 돼요.
찾아봤자 원본이 될 수가 없어요. 딜레마에 빠져버립니다.
자기가 원본이라는 주장을 백날 해도 그게 원본이 될 수 있어요?

지금도 똑같잖아요.
이게 생명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하니까
각자가 다 생명의 말씀의 의미가 다 다르죠. 신천지가 다르고, 다락방이 다르고, 장로교가 다르고,
순복음이 다 달라요. 그러면 너는? 나도 달라요.
복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전파돼요.

만일에 ‘나는 특별하게 뭔가 있다’라고 하면 그것이 뭐예요? 다 이단입니다.
이단들의 특징이 뭐예요?
‘장로교가 진짜 참 진리의 복음을 사수한 교회야’
‘고신이 진짜 이 신사 참배에 절반만 했고,
재건파는 진짜 제대로 신사 참배에 대해 회개를 한 그 교회야.’ 그러니까 이단 집단이죠. 그들이.
그들이 십자가를 이야기하겠습니까? 우상숭배 안 한 자들인데.

여기에 ‘형제들’ 사본 이야기하다가 넘어갔는데 ‘형제들’
형제들의 이 표현이 배자 사본이 그런 게 있어요. 저도 잘 몰라요. 아무튼 여러 사본들이 있는데,
어떤 사본에는 뭐라고 써 놨는가 하면 ‘고린도에서 온 어떤 사람들’ 이렇게 집어넣어놨어요.
그래서 앞뒤 문맥을 보면 지금 이 에베소에 있는 이 인물들이, 형제들이,
형제들과 이들을 약간 분리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또 더 문제가 생겨요.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지금 그들이 에베소에 영향을 줬잖아요. 영향을 줬거든요.
영향을 줬는데 이들이 무엇밖에 모릅니까? 요한의 세례밖에 몰라요.
요한의 세례라는 것은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거든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요한의 세례’라는 것은 ‘성령을 받아본 적이 없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단순히 이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느냐? 요한의 세례를 받았을까요?
아니죠.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빌립 집사님이 사마리아에 가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했거든요.
전할 때 그들이 믿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어요.
세례를 받았는데, 이들은 그 세례를 어떤 식으로 이해를 했느냐?
세례요한의 세례식으로 이해를 하는 거예요.

그럼 ‘세례요한의 세례’는 어떤 세례냐? 설득이 다 돼요. 납득이 다 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라고 할 때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하면 돼요?
회개하면 돼요. 옷 두 벌 있는 자는 한 벌 나눠주고,
군인들은 남의 것을 강탈하지 말아라고 하죠.
독사의 새끼들아 하면 ‘독사의 새끼입니다.’ 인정하면 돼요.
그러한 세례가 요한의 세례예요.

심지어 예수님에게 물 세례를 줄 때 성령이 하늘로부터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것을 목격을 했어요.
목격했죠? 그런데 나중에 뭐라 합니까?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여러분 이해가 돼요? 성도들에게도 이 요소가 같이 섞여 있어요.
모르고, 알고, 나중에 알고 나니까 모르는 게 알려지고, 이런 요소들이 다 섞여 있습니다. 성도에게.
그 이유는 간단해요. 우리가 주가 아니에요. 우리는 증인이에요. 증인.

사도 요한 같은 경우에는 구약에 속했잖아요.
구약에 속했으니까 구약의 대표자들이 누굽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이거든요.
그들의 논리를 그대로 담고 있는 거예요.
담고 있으면서 세례요한만 싹 뽑아낸 거예요.
만일에 그 인간이 갖고 있는 논리라면
세례요한이나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나 다를 바가 없어요. 왜냐하면 몰라봤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께서 이 세례요한의 세례를 자기의 십자가로 합류시켜버립니다. 거꾸로.
순서를 바꿔버리죠.
십자가 사건을 먼저 세워놓고, 잘 모르는 세례요한이 와서 십자가 사건을 증거한 거예요.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까?’ 물었을 때
‘눈먼 자가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걷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 하여라‘
세례요한이 그 얘기 다 들었거든요.
세례요한이 그 소문 다 들었잖아요. 똑같은 말이거든요.

지금 이해가 안 되시나요?
세례요한이 세례를 전한 이후에 감옥에 갇혔을 때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했어요?
죽은 자 살리고, 똑같이 천국에 대해서 복음을 천국 복음을 전하셨고,
병자 고치고, 눈 먼자 눈 뜨게 하셨잖아요. 그 얘기 세례요한이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알았죠.
그런데 질문한 세례요한에게 똑같은 답변을 하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생각하는 심판은 어떤 심판이었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고대하는 메시야 왕국이 임하는 심판이에요.
진짜 도끼 들고, 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지 않고 율법에 위반하는 자들을 도끼로 찍어서,
쟤들은 아웃시키고, 이 유대인들, 남은 자 유대인들이죠.
자기들을 구원하는 그러한 메시야로서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가 오기를 기다렸던 겁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들어보니까 눈 먼자 눈 뜨게 하고, 죽은 자 살리고...
우리 같으면 그게 대단하잖아요. 그게 대단합니까? 안 그러면 메시야 왕국이 대단합니까?
우리는 쪼잔해가지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밖에 안 보기 때문에
이 병자 낫는 게 이게 더 좋다 생각하는데요.
병자 낫는 것보다 더 좋은 세계가 메시야 왕국이에요.
노골적으로 물을게요. 천국이 더 좋습니까? 내가 병 낫는 게 더 좋습니까?
내가 여기에서 갑부 되는 게 더 좋습니까?
천국에 사는 게 더 좋습니까? 갑부. 아 솔직하시네요.

천국이 이루어지면 갑부는 덩달아 다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준이 낮다라는 거예요.
천국이 이루어지는 순간 모든 병이 다 고쳐지고, 그런 소소한 정도가 아니라
완벽한, 이사야에 나오는 어린 양이 독사굴에 손을 넣고 뛰어놀고,
사자들이 어린 양과 함께 뛰어노는 그 에덴 동산보다 더 좋은 에덴 동산.
에덴 동산하고는 비교가 안 돼요.
더 이상 흠이나 악마들이 놀 수 있는 그러한 어떤 영역이 아니에요.
그것이 어디에 이루어집니까? 그 약속의 땅에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또 그걸 믿고 또 이스라엘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또 먹히거든요. 성경 대로이기 때문에.
그러한 어떤 메시야 왕국을 기다렸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볼 때는
예수님이 하시는 그 일이 시답지 않은 거예요. 이게 참 표현이 멋진 것 같아요.
너무나 우리가 볼 때는 대단한 일이잖아요.
병자 고치고, 죽은 자 살리고... 그죠? 저는 자 걷게 하는 이 일이 대단하잖아요.
그런데 세례요한의 눈에는 세례요한은 육이거든요. 아직.
그 육의 눈에는 그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묻는 거예요.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까?‘
그거는 다 어디에 속했어요? 다 그림자에 속했다는 겁니다.
진짜 참은 메시야 왕국이에요.
진짜 도끼 들고 믿지 않는 자들을 어떻게 찍어버리고,
믿는 자들을 천국에 넣는 그러한 어떤 현상의 모습을 보여달라는 게 세례요한의 물은 질문입니다.
그가 갖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그 증거예요. 이분이 바로 그분이다.
그런데 하시는 일을 보니까
도무지 자기가 예상하는 천국과는 전혀 다른 심판주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묻는 거예요.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그러면 세례요한이 전한 게 옳았습니까? 틀렸습니까? 다 옳았죠.
내용은 다 옳았잖아요. 주의 뜻대로 전했잖아요.
그런데 그 내용 속으로 들어가서 해석을 해보니까 다 누구 중심으로 해석을 한 거예요?
세례요한 자기 중심으로 해석을 한 겁니다. 그게 요한의 세례예요.

우리는 단순히 요한 성경을 읽으면서 마태복음 11장에 그런 질문이 나오는데
세례요한이 증거한 그 내용과 세례요한이 나중에 몰랐구나 그걸 가볍게 넘어갈 수 있잖아요.
가볍게 넘어가는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사도행전 19장에서 요한의 세례를 언급하는 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가운데 요한의 세례가 가득 찬다는 얘기예요.
그게 아굴라같이, 아볼로같이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안 전하는 게 아니에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내용이 다 누구 중심으로 바뀐다는 거예요? 자기 중심으로.

요한의 세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아볼로도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 중심이라는 거예요? 자기 중심이에요. 자기 중심.
자기가 예상하는 천국. 독특하죠. 이런 것들이
’성경 말씀대로‘라는 자체가
우리가 말씀대로 읽을 때 그 읽는 모습 자체가, 해석한 그 내용 자체가, 다 자기 중심이라는 거죠.
그게 요한의 세례예요.

성령을 받지 않으면 뭘 모르죠? 뭘 모릅니까?
성령을 받지 않으면 십자가를 모른다라고도 표현할 수 있고,
성령을 받지 않으면 자기 형편을 몰라요.

정말, 이 본문이 놀라운 것은 성령을 못 받았는데 자기 형편을 알아요. 이상하죠.
성령은 분명히 사도 바울이 안수한 이후에 임했잖아요.
그런데 성령이 안 임했는데 어떻게 자기형편을 알아요?
내가 성령 못 받았는 걸 어떻게 알아요?
받았다. 못 받았다. 확실히 못 받았다는 거거든요.
’우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해버려요. 표현을.

그런데 진짜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잘 모르겠다‘라고 하죠. 사도행전이 그래서 어려운 겁니다.
우리의 순서는 성령이 임해야 그다음 무엇이 일어나요? 회개가 일어날 거 아니예요.
아니면 어떤 인간들은 회개를 먼저 해야 성령을 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주님이 찾아오시지 않으면 회개 자체가 안 돼요.
성령이 우리를 생각하듯이 그저 그렇게 시간적 논리를 갖고 일하는 분이 아니에요.

사도행전 앞부분에도 나왔잖아요. ’어찌할꼬?‘라는 이런 고백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라고 할 때 ’어찌할꼬?‘ 하잖아요.
이미 그 전 단계부터 성령께서 역사하신 거예요.
왜냐면 성경은 우리 구원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에요.
이런 과정을 통하여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주님을 지금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들은 당신의 논리라면 성령이 없었네요. 그렇게 보셔도 돼요.
성령을 못 받았다고 나오니까
근데 우리는 그 성령을 받았다. 못 받았다를 무엇으로 연결시킵니까?
구원론과 연결시키잖아요. 그게 무서운 겁니다.
지금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보자마자 알았느냐? 그건 몰라요.
눈으로 보니까 딱 보니까 알더라 이게 아니라,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복음을 전한 곳에는 전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힘썼다라고 하죠.
왜냐하면 남의 터에 내가 틀을 세우지 않겠다라는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러면 이 무리들은 어떤 무리들이냐?
바울이 처음에 에베소 회당에서 전했던 무리들이냐? 제자들이냐?
지금 12명밖에 안 되거든요. 숫자가 별로 안 됩니다.
아니면 아볼로에 의해서 전도 받은 사람이냐?
안 그러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의해서 전도 받은 사람이냐? 그건 몰라요.

그런데 어쨌든 이들이 믿고 있잖아요.
그 믿고 있으면 자기의 논리라면 다시 복음을 전하면 안 되잖아요.
이 성경에 앞뒤가 안 맞는 게 한두 개가 아니에요.

이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무엇을 뽑아내느냐?라고 할 때는
인간의 악마성을 뽑아내면서, 이 주님의 일을 인간들이 어떻게 사람의 일로 바꾸느냐?
거기에 대해서 지금 여기에서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18장 후반부가 연결되어 있죠.

이들은 철저하게 말씀으로 무장된 사람입니다.
그럼 이렇게 되면 어떤 자가 되죠? 복음을 아는데 주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를 받았으니까 자기가 성령 받았다고 하겠어요? 안 받았다고 하겠어요? 받았다고 하죠.
왜냐하면 세례 받을 때 누구보다도 우리가 세례 받을 때는
열두 제자 외우고 성경에 몇 개 나오는 거 외우고 세례받았잖아요.
세례를 안 받아보신 분도 계시겠지만, 제가 어릴 때는 그랬거든요.
문제 좀 알려주고 그것만 알면 받잖아요.

그런데 이들은 그런 수준이 아니죠. 복음의 내용을 꿰뚫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의 내용을 꿰뚫고 있지만 이들은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는 거거든요.
이런 표현도 참 어려워요. 아무리 듣지 못했지만 그럴 수도 있어요?
시간이 벌써 30년 이상 흘렀거든요.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한 후에는.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있잖아요.
그러면 그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거 아닙니까?
이런 표현들이 반어법일 수도 있는 겁니다.
성경을 문자대로 봐야 되죠. 이렇게 들어오면 문자대로 보면 해석이 하나도 안 돼요
어쨌든 이들은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한 거예요.

그러나 이 성경 전후 문맥을 보면 듣지 못했을 확률은 거의 없어요.
왜냐하면 주 예수를 믿는다는 자체가 이미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주님께서
이 제자들에게 가르칠 때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이들은 오직 세례요한의 증거만 받았느냐? 그렇게만 말하기는 안 맞거든요.
주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놀라운 것은 이 상황을 통하여서
이들은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고 말함으로 말미암아 무얼 증거하고 있느냐?라고 할 때는
십자가의 피 능력이 구원을 하지,
인간이 배운 지식으로는 구원이 안 된다라는 이야기를 지금 여기에서 하고 계신 거예요.

뒤에 보면 방언과 예언을 한다고 하잖아요.
방언과 예언을 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앞부분에 이미 다 나왔고,
사복음서에 방언과 예언이 무엇인지 다 나왔거든요. 눈이 있어도 깨닫지를 못해요.
사복음서에 방언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었죠.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하나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은 사람이 없어요.

분명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다라고 생각을 했죠.
그런데 알아들었다고 한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팔아먹고 모른다고 하고 부인하고 저주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왜 방언이냐?
원래 구약에서는 다른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온다라고 하면서
이방 나라가 와서 그들을 심판한다라는 표현을 해요. 그걸 방언이라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디에서 오셨어요?
다른 나라에서 왔어요. 미국에서 온 것도 아니고 세계가 다른 세계에서 오셨어요.
세계가 다른 세계에서 왔는데, 말은 그 당시에 코이네 헬라어나 아람어를 했다고 칩시다.
말은 똑같은 말을 해요. 똑같은 말을 하니까 다 알아듣는다고 생각한 거예요.
다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는데, 성경을 보니까 하나도 못 알아들었죠.

왜 못 알아들었습니까?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귀를 왜 못 알아들었어요?
우리들은 니고데모가 수준이 낮아서 이렇게 생각하죠.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공회 회원이었어요.
오늘날로 말하면 신학자들 중에 신학자, 박사들 중에 박사,
박사들 중에 박사는 어디 있어요? 신학교에 있거든요.
지금은 신학교가 워낙 많아가지고 그렇지만,
레벨이 최고 높은 자리에 있는 지식 수준을 갖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가 대화를 하는데 못 알아듣겠어요?
여러분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 똑똑한 사람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 수준이 엄청 높아요. 여러분이 복음을 아니까 별거 아니라 하지만요.
그들은 상대가 말하는 게 무슨 말인지 다 알거든요. 그 정도로 똑똑해요.
니고데모가 그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과 대화를 할 때 못 알아들었죠.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할 때 여러분은 뭐라고 답변하겠어요?
’아 그거 성령 받으면 안 되느냐?‘ 이렇게 나오거든요. 논리가.
성령 받아봤습니까? 그것도 배운 거거든요. 지식으로.
니고데모는 그 수준이 다 돼요. 질문을 그는 이렇게 하잖아요.
’어떻게 다 큰 사람이 엄마 배 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날 수 있습니까?‘ 이 논리 외에는 없어요.
왜냐하면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 자체도 말이 안 되잖아요.
단어가 거듭난다는 단어가 애가 두 번 난다는 거잖아요. 표현 자체가.
’에이 그건 상징이지‘ 상징의 의미가 아니잖아요. 표현 자체가.

예수님은 영이시거든요.
그러면 영의 말씀은 성령을 받지 않고는 절대로 깨닫지 못하는 게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그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뭐가 됩니까? 방언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복음이잖아요. 복음이 방언이 돼요.
’아 복음을 전했는데 왜 못 알아들을까?‘ 당연히 못 알아듣죠.
여러분이 지금 복음을 전했는데 한국말로 전하는데 다 방언이에요.

한국 사람 중국 말 하나도 못 하는 사람에게 중국 말로 막 하면 알아들어요? 못 알아들어요?
’저거 뭘 욕하고 있나?‘ 산동 사람들은 더 심하거든요.
산동 사람들이 경상도 사람하고 억양이 비슷해요. 대화하는 걸 보면 완전히 싸움이예요. 싸움.
그럼 미국 사람들이 경상도 사람들 대화하는 걸 보면 뭐라 하겠어요?
’저거 미쳤나?‘ 이야기할 거 아니에요. 그런 게 복음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복음의 독특성은 그런데 못 알아듣는데 알아듣는 내용이 있어요.
자기를 공격한다는 건 다 알아듣거든요.
자기를 부정한다는 거는 다 알아듣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불쾌하는 게 복음이에요. 그게 방언입니다.

그 예언과 방언을 한다 했죠. 예언은 뭘까요? 요엘의 예언이 임했잖아요.
예언이 성취되니까 너희 젊은 이들은 꿈을 꾸고 늙은 이들은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할 것이며...
이런 얘기가 쭉 나오잖아요.
사람들은 그걸 또 어디로 들어갑니까? 구약에서 했으니까 신약도 그럴 것이다.
요엘서의 예언을 구약적 용어를 갖고 설명한 거예요.
그 모든 내용이 어디로 모여집니까? 소실점이 어디예요? 십자가입니다.
예언도 방언도 환상도 다 십자가예요.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들이 예언하고 방언하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고린도 전서에 가면 다 나와요.
그 내용이 뭘까요? 예언하는 내용이? 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예요.
’앞날이 뭐가 되겠습니까?‘
어제 제가 장로님이 이상한 데 내려주셔가지고 이상한 데로 왔거든요.
인사동으로 들어가니까 타로, 제가 표현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타로 점, 무슨 점... 쫙 깔려 있잖아요.
그런 점을 사람들이 왜 봅니까? 앞날을 알고 싶은 거죠.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이 다니면서 그 예언, 예언 이야기하다 그 얘기했는데
앞날을 알고 싶잖아요. 결혼할 수 있을까요? 말까요? 잘 살까요? 못 살까요?
그게 궁금하거든요. 사람들은 젊은이들은.
좋은 대학 갈까요? 좋은 직장 갈까요? 말까요? 궁금하죠.
하나 알려드릴게요. 좋은 대학 가도 지옥 갑니다.
좋게 결혼해도, 행복하게 살아도 지옥 가고요. 천국 갈 길이 없어요.
그게 성경의 답변이에요.

근데 인간들은 그 예언을 다 뭘로 바꿉니까?
나의 행복과 꿈으로 다 바꿔치기 해버리죠. 그러니까 이런 말씀들이 싹 들어오는 거예요.
’성령 받으면 예언한다‘
그러니까 나 예언하니까 논리가 뭐예요? 성령 받았다.
그래서 교회마다 큰 교회마다 점장이 권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만나보셨습니까? 혹시. 점장이 권사들 많죠. 순복음도 많죠. 점장이 권사들,
’저 권사님 (점장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정말 기도에 용한 분이에요.‘
’얼마나 영적으로 뛰어난 분인지 저분한테 가면 주님께서 나의 앞길을 알려주시는데.‘
돈벌이를 그렇게 해요.
깃대만 안 꼽았지, 모두가 다 무당이에요. 교회가.

근데 거기에서 왕무당이 누굽니까? 목사거든요.
목사가 뭘 교회에서 제공합니까?
여러분 예수 믿으면 천국 가고, 여러분이 인생이 풀리고, 행복하고 병든 자는 병이 낫고...
병 백날 나아도요 늙어가는 걸 막을 수 있어요?
38년된 병자 나았습니다. 죽었어요. 지금 아직 살지 못했거든요.
병만 나으면 좋을 것 같은데 병만 나으면요. 혜택이 하나도 없어요. 죄송하지만.
오히려 정상인이 장애인이 되고 싶어하거든요. 장애인 혜택이 많잖아요. 안 그런가요?
제가 잘못 알았나요? (급수가 높아야 돼요. 높은 급수라야)
제가 옛날 같으면 장애인이었거든요.
근데 지금 가니까 지금은 안 된대요. 의사를 뭐 돈 주고 사야 되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눈 앞에 보이는 것밖에 안 보이죠. 뭘 못 봅니까?
멀리 못 봐요. 멀리 못 본다는 것은 눈 앞도 못 본다는 거거든요.
십자가가 밝히 보이면 멀리 보는 자고 눈 앞도 보이는 건데,
사람들은 십자가가 밝히 안 보이니까 자꾸 어디만 봐요? 자기 몸만 보는 겁니다.

그러한 예언, 방언은 또 신비한 신적 능력이라 하잖아요.
방언은 백날 해도 통역을 안 하면 하지 말라 하죠. 왜? 유익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말 못 알아듣거든요.
이 이야기를 하니까 어떤 방언하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 통역을 하거든요.

이전에 제가 대학원 다닐 때 인천에 엄청나게 큰 교회 목사인데 유명해요. 이름도 생각 안 나네
자기 혼자 채플 시간에 와가지고 방언 막,
’여기 중에 방언하는 사람 일어서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방언을 해요. 근데 방언하는 사람은 자기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거든요.
대부분 교인들은 100% 몰라요.

근데 안다는 사람은요 간덩이가 부은 사람이에요.
자기가 진짜 좀 과격한 표현을 하면 씨부렁거려놓고
자기가 아는 성경 구절을 꺼내서 해석을 다 해버려요
아니면 거기에 덧붙여서 그 사람에 해당되는 이야기를 다 해버려요.
근데 누가 압니까? 예? 누가 알아요?
누가 거기 손 들고 목사님이 통역한 게 엉터리라고 누가 이야기해요?

저도 못 했거든요. 왜 못하는가? 하면 낙제되니까.
그 수백 명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누가 그 얘기 해요.
목사들이 그런 걸 갖고 장난치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통역을 누가 해줍니까? 통역을 누가 해요? 성경에는?
우리가 볼 때는 사람이 하는 것 같죠.
그 사람이 통역해도 성령이 없으면 그 통역이 완전히 무용지물입니다.
말씀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못 들어가죠.
이런 걸 갖고 사람들을 현혹하고 미혹하고 마지막에는 자기 종 만드는 거예요.
두 눈으로 수십 년 동안 목격하셨죠. 마지막은 그거예요.

말로는 말씀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십자가가 빠져버리면 마지막은 ’나를 섬겨라‘예요.
그러면 너는? 저도 똑같아요. 저도. 육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이 없으면 결국은 사람 숭배로 빠지게 돼 있어요.

지금 ’이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이 하나의 그 문장을 갖고
오늘날 교회는 사람들을 완전히 요리 둘러치고 조리 둘러치지요.
사람들이 ’성령 받았느냐?‘ ’못 받았는데요.‘
’그러면 내가 받는 비법을 알려줄게.‘ 그러면 비법이 몇 가지가 있어요.
’우리 교회에 오면 됩니다.‘ 이게 이제 가장 전통적인 비법이잖아요. 우리 교회.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니까 우리 교회로 오면 된다
이 논리를 신천지도 끌고 오고, 하나님의 교회도 끌고 오고,
요즘은 뭐 미인계도 쓰고, 미남계도 다 쓴답니다. 대학 가면. 그 애들한테 조심해라.
그 신천지 애들이 미인계 써서 꼬셔서 마지막에 데려갈려고 하는 것이 그거고요.

하여튼 중국에서는 ’전능한 하나님의 교‘가 있어요. 혹시 들어보셨어요?
혹시 끌려가 보신 분 있습니까? 저기 대림동 쪽에 아주 들어가면 살벌하대요. 못 들어봤죠.
’전능한 하나님의 교‘. 저기 구로동 그 옆으로 가면 부천 쪽인가?
거기 아주 괜찮은 건물 하나 있어요. 전능한 하나님의 교.
아무튼 ’전능한 하나님‘은 다 써요. 인간들이 그걸 좋아하잖아요.
전능한 하나님이 내 편이 돼야 돈도 떼돈 벌고 건강하고 잘 먹고 잘 살고.
아마 지금 집 없는 사람들은 전능한 하나님이
’하나님, 이 윤석렬 정부를 통하여서 집값을 10분의 1로 떨어지게 하소서‘
이게 전능한 하나님이에요. 혹시 그렇게 기도하시는 분 없습니까? 여기 있네요. 여기.
전능한 하나님을 자기 쪽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그러한 것들을 목사가 제공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성령 받은 증거가 뭐냐?라고 하면 예언과 방언을 이야기하고
예언과 방언을 간 큰 사람이 한다고 그랬죠. 간 큰 사람 외에는 함부로 이야기를 못 하거든요.
’나 방언한다‘ 못하고 그러니까 성령 못받았다.
성령 못 받으니까 ’할렐루야‘를 ’할ㄹㄹ아~‘ 방언 해버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도들이 이렇게 다 죽고 난 뒤에 계시가 완성이 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악마가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예수님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서 적 그리스도라고 하는 거예요.
적 그리스도라고 했을 때는 우리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하면
’예수님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거야‘ 이런 생각을 저만 합니까?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적 그리스도.
우리 제가 어릴 때 중고등학교 보면 오멘이라는 영화라든가 이런 게 많잖아요.
보면 무시무시하잖아요.
’저런 게 적 그리스도야. 바코드 받고 해서 자기를 섬기게 할 거야‘ 천만의 말씀이에요.

성경에 나오는 적 그리스도는요 너무나 예수님을 닮았어요.
천사와 같고요. 하는 능력이 예수님이 하는 능력을 똑같이 해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중에 뭐라고 합니까? ’내가 예수다‘라고 하죠.
내가 예수라고 하는 사람, 수준 이하인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벌써 미화 돼버리잖아요.
더 나간 겁니다.
성령을 받았느냐?를 갖고 ’나 성령을 받았어.‘
’성령 받았어‘에서 더 나가면 뭐예요?
예수님이 성령 받았으니까 ’나도 받았으니까 나도 예수다‘ 이래 가는 거예요. 논리가.
근데 목사들이 감히 그런 말을 못하니까
’나는 성령 받았어.‘ 그다음 뭐예요? ’까불지 마‘ 이거예요. 논리가.

지금 사도 바울이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십자가 지신 주님이 살아계시다는 거예요.
그 복음의 세계는 너희가 배우고 듣고 학습하고 반복해서 들어갈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18장 후반부부터 19장에 나오는 이 복음의 세계에 들어온 이 말씀으로 충만한 자들이죠.
그들의 한계성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유튜브에 한 천 몇 개가 있는데 그걸 다 듣는다 해도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구원은 십자가 지신 주님이 합니다.
그러면 또 손들고 ’그러면 들을 필요가 없네요.‘ 그러니까 구원 못 받은 거예요.
’그러면 들어야 되네요.‘ 그러니까 못 받은 거예요.
’어쩌란 말입니까?‘ 그냥 사시면 돼요.

왜냐하면 천국과 지옥은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에요.
지금 얼핏 보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잖아요.
복음을 전하니까 마치 사람을 설득해서 구원시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잖아요.
그런데 지금 사도행전을 우리가 계속 살펴보지만 사도 바울이 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구원을 일으키는 일에 계속 배제당해요. 배제.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말을 하는 순간, 사도 바울은 ’나는 아니오‘가 들어가 버려요. 벌써.
우리는 ’안수하니까 예언하고 방언을 하더라 성령이 임하더라‘ 이렇게 들어가니까
사도 바울이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죠.
대단한 일을 한 게 아니고, ’나도 아니오‘라는 것을 안수로 표현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걸 뭘로 다 바꿔버렸어요? ’나는 이요.‘
아까 예배 시간 전에 뭐 안수할 때 흔들고
우리 제가 어릴 때 부흥회 때는 중고등학교 때 부흥회를 많이 다녔거든요. 집사님도 잘 아시겠지만
오산리 기도원 가면 안수하잖아요. 때가 되면 이렇게 박수 한 번 치고 막~그죠?
’오 은혜 받았네~♪‘ 은혜 주신 주 한번 부르고 다 해보셨죠?
그러고 돌아다니면서 허연 옷(흰옷) 입고 안수할 때 어떻게 합니까?
막~이거(머리에 얹은 손을 막~ 흔들면서) 보통 대부분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그냥 넘어가요.
안 넘어가면 확 밀어버리죠. 근데 밀었다는 얘기를 못하죠. 감히.
왜? 다른 사람은 은혜 받은 간증을 다 이야기하는데, 나는 밀렸더라.

근데 나중에 뒤에서 뭐라 합니까?
’나 안 넘어지려고 했는데, 저 부흥사가 밀어대니까
내가 어쩔 수 없이 버티다가 버티다가 내가 불쌍해서 넘어줬다.‘ 이 얘기하거든요.
다 해봤잖아요. 그거. 거기에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성령의 세례는 구한다고 주는 게 아니에요. 찾는다고 얻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구하면 찾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이렇게 표현할 때
사람들은 그 말씀을 완전히 오해하죠.

지금 사도행전을 보세요.
구해도 안 돼요. 안 구한 자에게 찾은 바 돼요.
그러면 그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친히 다 이루어내버립니다.
그 이루어내는 자리에 바울이 들어가는 거예요.

바울이 딱 들어가니까 사람들은 다시 반복합니다마는
이 본문을 갖고 자기가 뭐가 되려고 하죠?
증인이 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자리에 앉아서 주님 행세 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아볼로예요.
성령을 못 받은 아볼로. 말씀으로 무장해 버리죠.

말씀으로 무장하면 여러분 그 사람 앞에 꺼뻑 죽을까요? 안 죽을까요? 죽죠.
나오는 족족 성경 말씀을 다 끌고 와서 복음을 이야기 한번 해보세요.
기 죽어요? 안 죽어요?
진짜 성령 받는 사람은 뭐라 하겠습니까? ’그래도 구원 못 받는다‘ 이야기해야 돼요.

구원은 어디서 나옵니까? 십자가에서 나오거든요.
그러면 뭘 자랑하죠? 피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그럼 우리는 배울 필요가 없습니까?
아볼로가 성령 받게 되죠. 받아버리면 뭘 이야기해요?
사람의 지혜로 하지 않는다라고 하죠. 그게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하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지혜를 완전히 어떻게 해버려요? 어리석음으로 만들어 버려요.
그 사람의 지혜 속에 무엇이 들어갑니까?
복음의 내용이 들어간다는 것이 오늘 말씀이에요.
그렇게 되면 그러한 내용조차도 요한의 세례 속에 포함되는 겁니다.

주님이 살아계셔서
오늘도 십자가의 피 능력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셔서
그 피공로를 자랑케 하는 감사하는 성도로 만드시는 겁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배우는 족족 요한의 세례밖에 모르는 인생들인데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완성하신 분이 오늘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를 주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그 은혜를 알게 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인생이 나의 구원을 목적하는 인생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님만을 증거하는 인생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십자가 지신 주님의 일하심 속에 늘 동참하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