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7-25 07:34
사도행전 84강 행 19:8-20 말씀의 권세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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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FBqlzyENnc

관리자 22-07-25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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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84강 말씀의 권세

이 시간 심순근권사님 대표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몸이 늙어가듯 소멸되어지고 오직 내가 주인이 아닌 피조물인 우리임을 알게 하시고
나라는 존재는 없음을 저주받아 마땅히 죽은 자임을
이 세상은 십자가에서 이미 심판받아 끝났음을 알게 하옵소서.
지금의 환경과 상황들이 내 책임이 아닌 주님이 만드신 재료들임을 알아
망함이나 고난이나 핍박들을 감사함으로 받는 우리들 되게 하옵시고
오직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증인으로서의 삶만이 사명인 줄을 알게 하옵소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책망 받기를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올려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2장 8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2:8)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오늘도 주의 이름으로 모이게 하시고 저희들에게 긍휼을 베푸사
나오는 것마다 악뿐인 저희들을 사용하셔서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는 증인으로 삼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도 저희를 긍휼히 여기사 주께서 베푸신 사랑의 깊이를 아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사도행전 19장 8절에서 20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행19:8~20)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7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사도 바울이 에베소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석 달의 기한, 안식일마다 그렇게 했는지 넌 모르지만, 아마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높겠죠.
사도바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강론했다는 거예요.

사도행전 28장으로 가도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행28: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그 내용에 대한 것들은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그냥 ‘하나님 나라를 전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성경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요소들을 다 끌고 와서
이것이 하나님 나라일 거라 그렇게 주장을 하거든요.
(생중계 안 돼도 돼요.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말씀듣는 게 중요하니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강론했다.
‘강론하다’라는 것은 표현이 어떤 내용이냐?라고 할 때는 토론도 하고 비난도 하겠죠.
왜 강론하며 권면했느냐?라고 할 때는
상대가 누굽니까? 유대인들이죠. 물론 헬라인 중에 이 유대교로 들어온 그인물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어요.
우리들도 말씀을 들을 때 이미 나의 생각을 갖고 있어요. 기존에 들었던 복음의 내용과
내가 살아온 환경과 여러 가지 요소들이 다 우리 속에 지금 담겨 있듯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유대인들이나 유대교로 들어온 이방인들도 여전히
똑같이 그러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다라는 겁니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이런 논쟁이 있어요.
선포냐? 가르침이냐? 케리그마냐? 디다케냐? 뭐 이런 얘기를 논쟁을 하는데
복음은 선포예요. 사실은.
근데 선포의 방식은 디다케도 될 수 있고, 논쟁도 될 수 있고, 변론도 될 수 있어요.
복음의 내용이 들어가면 다 선포가 되는 겁니다.
말씀이 일을 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보기에는 설득하는 것 같고 납득시키는 것 같은데 말씀이 이해를 해요.
문제는 영이 없는 사람들은 설득으로 구원시키려고 하죠.
이해와 납득으로 이 복음을 듣게 하여서 예수 믿게 하려고 하죠.
이해와 납득은 십자가와 상충되죠.
십자가는 이해로 믿는 게 아니고, 납득해서 믿는 게 아니고, 설득이 되어서 믿는 게 아니잖아요.
물론 그 과정 속에서는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고, 설득되는 내용들이 다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강론하며 권면을 했는데, 상당히 특이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쳤으면
이 구약 성경 전체를 갖고 하나님 나라가 어떠하다라고 가르쳤으면, 어떤 결과가 나와야 됩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어요.
우리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잖아요.
사도 바울이 이 자리에 와서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잘 들을 거라고.
그걸 조금 더 들어가면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을 전하면 잘 들을거라고.

누가 와서 전하느냐에 따라서 복음을 잘 듣고 안 듣고의 문제가 아니죠.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주가 되셨죠.
그 주의 능력을 고스란히 복음을 전하면서 드러냅니다.
지옥 갈 자와 천국 갈 자를 갈라버리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석 달 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강론하고 권면한 결과
두 쪽으로 쫙 갈라집니다.

뒤에 보면 재밌는 표현이 나오거든요. ‘제자들을 따로 세웠다.’ 이런 표현이 나오잖아요.
‘제자들을 따로 세웠다’는 이 표현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석 달 동안 이 말씀을 들을 때 모두가 다 바울의 제자가 되었다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많은 믿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서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다’라고 하셨거든요.
(요6:53)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그 말을 할 때 ‘야 참으로 어렵도다 누가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라고 다 떠나가버립니다.
거기에 예수님은 더 떠나가도록 말씀을 해버리죠.

그러면서 누구만 남깁니까? 열두 제자만 남기죠.
‘너희도 가려느냐?’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요6: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그건 자기 선택이고 제자들의 생각이에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였다. 그러나 하나는 마귀다.’
우리들은 사람들을 설득해서 복음을 전해서 끌어 모으는데 관심이 있잖아요.
사도행전은 지옥 갈 자는 확실히 지옥 보내는 내용이에요.

선교사들 이야기하면 사도행전은 꼭 복음을 전하라고 한다. 말은 맞아요.
그 복음을 전하러 가면 어떤 복음을 전해야 됩니까?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되죠.
십자가 복음은 사람을 좋게 하는 복음이 아니에요.
사람을 위하는 복음이 아니죠.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석 달 동안 강론하며 권면한 결과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해요.
석 달 동안 바울의 제자로서 이 에베소에 있는 회당에서 말씀을 들었던 거예요.
이전에도 ‘좀 더 머물면서 말씀을 좀 더 들려달라’고 요청을 했잖아요. 처음 에베소에 방문했을 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사도 바울이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얘기를 할 때
처음에는 굉장히 호의를 갖고 듣다가 들을수록 이들의 마음이 (구약적 표현을 하면) 강퍅케 되었다.
로마서식 표현을 하면 강퍅케 됩니다. 참 신기한 일이죠.

복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바로 왕처럼 더 강퍅하게 되어서
그 석 달이 지난 시점에 이들의 강퍅함이 표출이 되는 겁니다.
복음에 대해서 비방을 하는 거예요. 이게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을 안 전하면 이러한 강퍅한, 이 마음의 굳음이 나오지가 않아요.

복음의 능력이 사람의 마음을 굳게 해버립니다.
이 바로왕을 보게 되면 우리는 ‘이미 바로왕은 강퍅한 자다’ 이렇게 들어가는데
처음부터 강퍅한 게 아니었죠.
강퍅함이 모세와 아론을 파견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전할수록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면 임할수록, 우리 같으면 어떻게 돼요?
우리는 한 대 얻어터지면 어때요? 마음이? 망해보니까 어때요?
마음이 강퍅해져요? 부드러워져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드러워졌다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강퍅이에요.

맞고 나면 마음이 ‘아 하나님이 내가 뭘 잘못했느냐?’ 잘못하면?
원래 지옥 가야 할 인간이 뭐 맞고 안 맞고가 없어요. 원래 그렇게 사는 겁니다.
욥을 보면 중보자를 증거하기 위한 인생이었잖아요.
거기에는 잘 되고 못되고 자체가 없어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데 사람들은 뭔가 잘못되면 강퍅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누구를 찾아요?
예수님을 찾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전도할 때 누가 잘 끌려옵니까? 망한 사람.
아니면 주변에 뭐 우리 집사님 말씀하신 누가 죽으면, 복음 전하면 끌려오죠.
그것이 주님이 이용하는 방법은 맞아요.

그런데 십자가 안에서 보게 되면
그 마음 자체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 마음이잖아요. 망했고 뭔가를 찾잖아요.
찾아서 어디에? 뭘 하려고?
‘찾아서 십자가와 함께 또 망하겠습니다. 이 땅에서는’ 이런 태도로 주님을 찾는 경우는 거의 없죠.

나를 쳤으니까 시작은 미약하였으니까
이 악마의 말을 그대로 들고 와서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 이 논리를 나도 모르게 그건 마귀새끼의 말이거든요.
물론 그것이 나중에 주님의 말로 또 바뀝니다.
근데 인간들은 그걸 마귀 새끼의 말로 먼저 받고 난 뒤에 주님의 말씀으로 바꿔야 되는데
주님의 말씀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노림수를 갖고 접근하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가 도대체 어떤 나라입니까?
도무지 육에 속한 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에요.
그 육에 속한 자의 대표자들이 바로 누구냐?라고 하면 유대인들 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천국에 대해서 세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31절부터 보게 되면

(마25:31~33)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심판주가 양과 염소를 나눕니다.
그런데 이 나누는 것을 보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으로 나누죠.
늘 말씀드립니다마는 율법에 의하면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고, 안 지키는 자는 저주를 받아요.
율법을 안 지켰는데 달리 말하면
나의 행위가 아무것도 없는데 천국 가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라는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먼저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25:34중)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그러면 이 말을 딱 듣는 순간 ’아 이들은 뭔가 조건이 갖추어졌구나‘ 이렇게 생각하죠.
그 조건을 뭐라고 하는가 보면

(마25:35)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마25: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느니라

이것만 보면 이들이 행위가 있어요? 없어요? 있죠.
행위가 있으면 요한 계시록에 의하면 어디로 들어가요?
행위책에 들어갑니까? 생명책에 들어갑니까? 행위책에 들어가죠. 그럼 지옥 가야 돼요.

성경이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거예요. 앞뒤가 안 맞는 게 너무 많거든요.
자기 구원론 중심으로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은 말씀 자체가 이해가 안 돼요.
그래서 이 이단들은 하나의 논리를 뽑아내고, 반대되는 논리는 다 없애버리고,
자기가 주장하는 논리만 뽑아오는 겁니다.
그러자 의인들이 뭐라고 합니까?

(마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서로 심판주와 오른편에 이 양의 편,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의 대화가 안 맞아요.
안 맞는 이유는
지금 이들의 행위를 누구 안에 집어넣어버립니까? 십자가 안에 집어넣어버렸거든요.
주님이 보시기에는 십자가 안에 든 그 행위가 그들의 행위로 간주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 안에 있는 성도는
자기가 하는 모든 행위가 자기 행위가 아니고, 십자가 지신 주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걸 보고
’야 겸손하니까 마음을 낮추니까 주님이 천국으로 인도하시는구나.‘
우리도 일을 다 한 후에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해야 될 일 했을 뿐입니다‘라고 하면
’주님이 옳거니 너는 양의 편에 가자 천국에 들어가자‘ 이렇게 생각을 하죠.
고거 지옥 갑니다. 그 사람들은.

행위책은 반드시 지옥가게 돼 있어요.
행위책에 들어간 자들은요 십자가가 안 나와요. 십자가를 이용할 뿐이죠.
이용한 이후에 무엇이 나옵니까? 자기 행위가 나오게 돼 있어요.
방금 이야기했듯이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이거 행위거든요.

제일 큰 행위가 뭐예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하니까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저들 같이 행위를 통해서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과 다릅니다.‘
그런 논리를 펴는 겁니다. 그게 주님께 통하겠어요?
말은 잘 알죠. ’주님은 중심을 보신다‘
중심을 보시면 그러면 내가 뭘 노리고 있는지 잘 알 거 아닙니까?
’나는 주님만 사모하는데요.‘ 그것도 맞긴 맞아요.
근데 문제는 자기가 자신을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왜 모릅니까? 마귀가 지금 잡고 놀고 있잖아요. 마귀가 여러분보다 한 수 더 높아요.

바로 왕이 마귀의 종이라는 것을 자기가 알아요? 몰라요?
마귀가 시켜서 제가 이스라엘을 안 보냅니다. 이거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가룟유다가 그걸 압니까? 자기가 자기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몰라요.
베드로도 마찬가지고요.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 뭐 자기는 진심을 다하는데
그 배후에는 누가 있어요? 마귀가 있죠.
마귀가 있다는 말은 목숨을 버려서 그다음 무얼 얻겠다는 노림수가 그 속에 깔려 있는 겁니다.
주의 자리에 앉고 싶은 거예요.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려는 자들은 이 심판주와 대화를 할 때 서로가 맞지 않으십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마는 겸손하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게 아니에요.
지금 천국이라는 것은 십자가로 만들어진 나라거든요.
이와 달리 이 지옥 가는 자들, 그들에게 지금 이런 말씀을 합니다. 41절에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저주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십자가에서 나오죠.
인간의 행위로 인하여서 저주받는 일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피 능력을 증거하기 위한 저주죠.

그런데 저주 받는 자들은 십자가의 피 능력을 부정합니다.
그 부정하는 방식이 뭔가 하면 그 심판주가 이렇게 이야기를 할 때

(마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 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마치 심판주가 행위를 갖고 이야기하는 거 같잖아요.
행위를 갖고 이야기하니까
아까는 이 양의 편에 선 사람은 서로 대화가 안 맞죠. 상반되는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심판주가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대화되는 이야기해요.
’우리가 언제 안 했습니까?‘ 이래요.

했다라고 하니까 안 했다 하고,
이들은 ’너희는 하지 않았다‘라고 하니까 ’우리가 언제 하지 않았느냐‘ 표현이 애매하지만
그 의미를 뉘앙스를 담고 있는 거예요. 마태복음 7장에 나오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마7:22)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어떤 주석을 보면 여기에 나오는 주와 거기에서 나오는 주가 다르다 그러면서
뭔가 이 피해 가려는 그런 꼼수를 펴는 사람도 있어요.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왜 그 얘기를 하는가? 하면
’주의 이름으로 했다‘라는 것이 지금 여기에는 부정당합니까? 긍정당합니까?
지금 지옥 가는 자들이 ’언제 안 했느냐?‘라는 것은 ’했다‘라는 이야기를 지금 깔고 있는 겁니다.
44절에 보면

(마25:44) 저희가 대답하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공양했으니까 당연히 천국 가야 되죠.
문제는 주님을 우리가 모른다라는 거예요.
’소자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한다‘라는 말씀의 의미가
그 소자를 우리가 알아보면 주님을 영접한 자가 되거든요.

(마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리라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예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떤 처분을 내렸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어요.
만일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인 걸 알았으면 죽이겠어요?
왜 하나님의 아들을 몰라 봅니까?
그들은 어디에 의지했어요? 육에 의지했죠. 지식에 의지했죠.
그 지식은 무엇을 바탕으로 합니까? 구약 율법을 바탕으로 하죠.

성령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주님으로 못 알아본 거죠.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지식의 세계,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의 의미를 파악할 길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전했다 했잖아요.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이 내용을 다 담고 있다라고 보시면 돼요.
그러면 이게 대화가 됩니까? 안 됩니까?
사도 바울이 구약을 풀어내면서 ’십자가 지신 주님을 위한 세상이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모든 것이 이처럼 주를 위하여 주가 만들었고 주를 위하여 만들어졌다‘라고 할 때
(골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 주가 누굽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거든요.

그 주님을 위한 세상에서
주님이 십자가 지신 그 일의 결과물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구현된다라고 하면
누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겠느냐? 이 얘기입니다.
그것은 성령을 받은 자만,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만 그 말씀에 아멘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간들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행위에 의존하죠.
그러니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전하면 전할수록
하나님 나라 이야기하니까 지난번 말씀드린 것 같이 천국에 뭐... 이 얘기가 아니에요.
전하면 전할수록, 하나님 나라가 십자가로 만들어졌잖아요. 십자가 안이 하나님 나라잖아요.
그럼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그들의 마음은 더욱더 강퍅하게 된 겁니다.
강퍅하게 되면서 둘로 쪼개져버립니다.
그중에 제자들을 따로 뽑아서 다시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고.

나머지는 어떻게 합니까?
자동적으로 핍박을 하고 비방을 하니까 그들은 핍박자에, 가해자 쪽에 서고.
이 복음을 전하는 자,
사도 바울과 이 복음에 대해서 아멘하는 자들은 핍박을 받는 쪽에 설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 같으면 사람 많은 게 좋잖아요.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가 십자가로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에 십자가 복음 자체가 둘로 쪼개버립니다.
지옥 갈 자는 지옥 가야 되고, 천국 갈 자는 천국 가야 되는
그 내용을 지금 여기에 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들이

(행19:9중)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두란노라는 것은 사람 이름인데 어쨌든 지금도
                  가면 두란노 서원이라 그러면서 있는데 거기에서 날마다 이 말씀을 강론하며
                  두 해 동안을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다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행19:10)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이 말씀도 오해를 하지 마시고요. 복음이 전파되는 겁니다.
그곳에서 두 해 동안 복음을 전했으니까 이 지역은 중심지잖아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인구도 만만치 않고
어쨌든 지금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이 주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라고 볼 수 있어요.

’들었다’라는 것은 ‘구원받았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복음을 들었다라는 의미에요.
그런데 이 두 해 동안 이러한 복음을 전할 때 어떠한 사건들이 있었는가? 그 내용이
그 11절부터 쭉 나오는 내용입니다. 11절에서 20절 사이에. 물론 그 뒤에도 나오지만. 여기에 보면

(마19: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마19: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강론하고 권면했죠.
그러면 그때도 어떤 일을 했는가? 하면 이러한 일을 했다라고 볼 수가 있어요.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를 전하실 때, 천국 복음을 전하실 때,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잖아요. 희한한 능력을 행하셨거든요.
그러한 일을 행할 때 왜 강팍해졌느냐?라고 하면
바울이 그 내용 자체를 뭐로 설명합니까? 십자가로 이야기를 한단 말이에요.

’주님이 살아계셔서 이런 능력을 행합니다. 이런 기적을 행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따를 만하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그것을 믿고, 놀라면서 따르고자 하는 그 모습을 보일 때
사도 바울은 ’그것이 바로 악마의 모습이다‘라고 지적을 해버리는 거예요.

사도행전을 볼 때 사복음서가 깔려 있지 않으면 하나도 이해가 안 돼요.
왜 그게 악마의 모습이냐? 마태복음 4장에 나왔잖아요.
마귀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로 떡덩이 만들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네가 발끝 하나 다치지 않는 그 시편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해야 하나님 아들을 답다‘라는 거거든요.
2년 동안에 이러한 능력을 행하면서 똑같이 제자들을 따로 세웠는데
이게 재미있는 게 제자들을 따로 세워서 또 복음을 전하는데 또 제자들이 또 모여들었어요.
능력을 행하니까. 모여들 거 아니에요. 희한한 능력을 하니까.
재밌는 것은 이런 겁니다.

(마19:12)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자 이 사건을 여러분이 본다면 이 일이 주의 일입니까? 안 그러면 악마의 일입니까?
이게 진짜 어려운 내용이거든요.
’사도 바울의 앞치마를 갖고, 손수건 갖고 얹으면 병도 낫고 악귀가 떠나더라‘ 어떻습니까?
이게 흉내내기입니까? 안 그러면 진짜 주의 일입니까?

주님이 그러한 것들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일을 하면 사람들이 그 일이 무슨 일로 봐요? 주의 일로 보죠.
그러면 주의 일로 봐버리면 무엇이 빠져버립니까? 십자가가 날라가버려요.
그래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어떤 자들이 여기에 등장하는가? 하면

(마19: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이렇게 했을 때 통했을까요? 안 통했을까요? 이게 또 되게 어렵죠.
뒤에 보면 이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하니까

(마19:16) 악귀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도망쳤잖아요.

그럼 우리들은 이 마술하는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때
귀신이 나갔을까요? 안 나갔을까요?
그들이 능력을 보였을까요? 안 보였을까요?
조금 전에 치마를 갖고 와서 앞치마를 갖고 와서 했을 때 병 나았어요? 안 나았어요? 나았죠.
그러면 마술하는 자들이 여기에 보면

(마19:13)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그렇게 했을 때 악귀가 다 뛰어들었을까요? 이 사람에게? 스게와의 일곱 아들처럼?
그런게 아니에요. 나갔어요.
왜냐하면 지금 앞치마를 갖고 온 사람들이 믿음이 있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잖아요.
지금 여기에 보면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났다고 했잖아요.
이들이 믿은 자입니까? 안 믿은 자입니까? 그게 안 나오죠.
믿은 자로도 볼 수 있고, 흉내쟁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가짜들이 다 쏟아져 나옵니다. 가짜들이.
사도행전이 만만한 게 아니에요.
우리는 손수건 얹어서 앞치마를 해서 병이 나았으니까
’야 주님의 큰 능력이라‘ 주님의 큰 능력이라 하는 순간 무엇이 날아갑니까?
십자가가 날아가게 돼 있어요.

’악귀가 나갔으니까 이거는 축귀니까 제대로 된 일이 아니냐?’ 이런 논리를 펴는데
누가 악귀 들렸어요?
거라사인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이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잖아요.
그럴 때 거라사인 지방 사람들이 이 돼지떼가 몰살을 하니까
재산적 손실을 입으니까 예수님을 어떻게 합니까? 떠나달라고 간청하죠.
누가 악귀 들렸어요? 다 악귀 들렸어요. 다.
모두가 다 저거 아비를 마귀로 두고 있어요.
‘악귀가 쫓겨났다 했으니까 진짜 이 마귀가 물러갔구나’ 이런 생각을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그렇게 보면 안 돼요. 왜냐하면 뒤에 보면 여기에 대한 내용이 나와요.

주 예수 이름으로 이 귀신을 쫓아내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겁니다.
되니까 이들은 마치 예수의 이름을 뭘로 생각했어요? 부적처럼. 주문처럼 생각한 겁니다.
여러분이 안 믿으시는 표정인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잖아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권능을 행했다’라고 하잖아요.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고 하잖아요.

여러분들도 그런 걸 목격하셨을 건데요. 장로님 목격 안 했어요? 서장로님 목격 안 해보셨어요?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이 나가는 거 봤을 거 아닙니까?
저기 베뢰아 같은 경우에는 귀신 쫓아내고 하거든요.
그게 귀신입니까? 자기가 귀신인데.
무당이 뭐 이렇게 귀신 불러 올린다하잖아요. 자기가 귀신인데.

이런 내용이 여기에 담겨 있는 게 왜 중요하냐? 할 때는
그런 일을 한다고 해서 성령을 받은 게 아니라는 얘기예요. 얼마든지 그 일을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많이 하거든요.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니까 병이 나았고 문제가 해결되었다.
예수 이름으로 안 해도 다 돼요. 부적 붙여도 되는 사람 많아요.
우리 처가집에 가면 요즘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방마다 부적 붙여놨거든요.
그럼 문제 해결 되면 다 부적 때문이에요. 부적 때문.
내 절에 가서 기도해서 된다라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안 들어가도 된다니까요.
아니 중도 귀신 쫓아내잖아요. 그죠? 맞죠? 무당도 쫓아내잖아요.

그들이 십자가를 자랑합니까? 십자가를 증거합니까?
그 모든 것들이 누구를 위함이예요? 사람을 위함이거든요.
지금 이들이 사도 바울이 하는 일을 보고, 외형적으로 흉내를 내는 거예요.
아볼로 같은 경우에는 어땠습니까?
말씀의 내용을 촘촘하게 담아냈죠.
말씀의 지식, 복음의 지식을 완벽하게 받아들여서 그것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성령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어요? 오늘은? 능력을 막 보입니다. ‘앞치마(를 얹었더니) 나았더라’
그래서? 나았는데 그래서?
(손수건, 앞치마)들고 가서 했는데 그래서? 그다음 뭘 얘기하고 싶었냐는 거예요.
‘나았다 봐! 이 주의 이름이 이런 권능이 있어.’
그러니까 너는, 너희 아비는 마귀라는 얘기예요.

안 믿으시는 표정인데... 그런 능력을 행하면 어떻게 그게 마귀냐?
그러면 이것은 사도 바울의 능력은 능력이 아닙니까? 능력 맞죠.

그 능력은 무엇을 드러내는 능력이에요? 둘로 쪼개버립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심판의 나라잖아요.
능력을 딱 행하는 순간 육에 속한 자들은 무엇을 주목해요?
병 낫는 것, 귀신 쫓겨나는 것, 여기를 주목하죠.
영에 속한 자들은 어디를 주목합니까? 십자가를 주목하죠. 참 희한합니다.
십자가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고,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런데 능력은 눈에 보이고 경험할 수 있는 내용이란 말이에요.

이들은 주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지금 주님이 일하고 있는데, 자기들은 그 이름으로 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와중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렇게 행했는데, 이 사건은 독특한 사건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렇게 한 거예요.
어떻게? 주의 이름으로 한 거예요. 했을 때 그게 먹힌 겁니다.
진짜 귀신이 나간 거예요. 그렇게 했을 때.

그런데 지금 스게와의 일곱 아들만큼은 나갔습니까? 안 나갔습니까? 안 나갔죠.
뭐라고 합니까?
‘내가 바울도 알고 예수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충격적이에요. 우리는 별로 충격적이 아닌데...

그러자 벗은 몸으로 도망갔거든요.
이들은 이 악마가, 이 귀신이 아니라 마귀가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 못했고,
그와 동시에 주님이 지금 살아계셔서 친히 십자가의 능력으로 일하고 계심도 생각을 못한 겁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니까 17절에 봅시다.

(행19:17)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행19: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이런 표현을 하죠. 외형적으로 보이는 사건입니다.
바울도 알고 예수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라고 하면서 악귀가 뛰어들었죠. 벗은 몸으로 도망갔죠.
그 사건을 보는 두 가지 시선.
달리 말하면 사도 바울이 희한한 능력을 행했을 때 그것을 보는 두 가지 시선.
사도 바울은 그것을 두 가지 동시에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고 있어요.
하나는 십자가의 능력과
동시에 악마가 요구하는 바가 뭔지? 그 내용을 동시에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스게와의 일곱 아들에게 악귀가 뛰어드니까 이 사건 자체를 보는 두 가지 안목이 있죠.
한쪽은 뭘 봅니까? 십자가 지신 주님이 친히 일하고 계심을 보고,
다른 한 쪽은 뭘 봅니까?
’이거 큰일 났네. 이거 장난이 아니네.‘ 이런 안목이 동시에 나타나요.
그럴 때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이 일을 알며 두려워했죠.
두려워했으니까 여기에 보면

(행19:17)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행19: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무얼 행했습니까? 이들이.
주의 이름을 높이고 자복하며 와서 행한 일을 고했다. 하잖아요. 행한 일이 뭘까요?
마술가들 주의 이름으로 막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 행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한 사건을 갖고,
한쪽은 정말 주의 이름 앞에 굴복하는 모습으로 나오고,
다른 한쪽은 이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도리어 귀신이 덮어 쓰이는 그 장면을 보고 두려워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 나오는 겁니다.
계속해서 세분화 돼요. 계속해서 갈라져요.

물론 지금 여기에서는 다 믿는 자들이라. 이렇게 표현 돼요.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다시 말씀 드립니다마는 믿은 자들이,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했다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막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쳤는데,
스게와의 사건을 보니까 이것이 어떤 차원에서 행했다?
마술 차원에서 행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표현을 하면.

겉으로 보면 성령의 일이 안 보이잖아요.
그러한 것들이 노골적으로 나타나면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상당히 쉽겠다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그러한 내용들이 담겨 있지 않는 거예요.
외형적으로만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가지고?

(행19: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5억원 어치. ’그걸 팔아서 헌금이나 하지.‘ 우리의 논리는.
사람은 돈밖에 계산 안 하거든요.
어쨌든 엄청난 양의 이 책들을 불살라 버렸어요.
주님의 일하심 속에, 살아계심 속에, 그들이 합류했다라는 겁니다.
우리가 볼 때는 그냥 외형적이고 전혀 이 뭐라고 그럴까요?
눈에 보이는 것이 다(전부)인 것 같지만,

이 스게와의 일곱 아들 사건으로 인하여서
주님께서 친히 일하심을 이 본문에서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좀 이 본문이 우리들이 보기에 명료하게 쫙 기록돼 있으면 참 좋을 터인데, 그렇지 않아요.
사복음서도 마찬가지죠.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사람들의 눈에는 병자 고치는 것, 능력으로 보였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그들에게 소개한 거죠.

육에 속한 자들은 외형적으로 보이는 그러한 능력에 주목하지만,
성령을 받은 자들은 십자가로 승리하신 그분이 주님 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러한 사건을 일으킨 거예요.
십자가의 능력은 어느 정도냐?라고 할 때는 병 고침 받아도 지옥 보내버립니다.
’주님이 나를 고치셨네요.‘ 그걸 믿어도 지옥 보내는 게 십자가의 능력이에요.
그걸 위해서 주님이 병을 고치시는 거예요.
육에 속한 자들은 그것이 그렇게밖에 안 보이는 겁니다. 20절에 보면

(행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말씀의 능력인데.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말씀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잖아요. 그럼 인간은 흉내 낼 수 있는 것 같잖아요.
아볼로도 흉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흉내 낼 수 있었어요? 없었어요? 흉내 못 내요. 모방만 할 뿐이에요.

병 고치는 것도 얼마든지 모방이 가능하죠.
모방을 해도 복음은 전파되었잖아요. 복음이 떨어졌잖아요.
떨어졌는데, 그 떨어진 그 복음이 말씀이 힘이 있어요. 여기에 보면

(행19:20)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말씀 자체가 일을 해버립니다.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주님이 살아계셔서 친히 일하신다는 내용이에요.
사도 바울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전했잖아요. 그게 말씀의 내용이에요.
’아 그게 도대체 어떻게 힘이 있고, 어떻게 스스로 흥왕하고 세력을 얻어 나갈 수 있느냐?‘
얻는다라고 표현은 조금 맞지 않지만, 어쨌든 이 권세가 있느냐? 라고 할 때는
주님이 살아계시니까 그래요. 사도바울이 일하는 게 아니에요. 여기에서는.

인간들의 눈에는 사도 바울이 하니까, 자기도 할 수 있다라고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마지막 20절에서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이야기로 결론을 내려버려요.
말씀 자체의 능력이에요.
이걸 무슨 수로 우리가 파악하고 믿을 수 있겠느냐? 얘기입니다.

말씀 자체가
인간이 보기에는 사건인데,
그 사건을 보는 그 안목을 둘로 쪼개버리죠.
하나는 육의 안목으로, 하나는 영의 안목으로 주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의 능력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이론 같아서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십자가의 능력을 고스란히 발휘하는
그러한 사건을 저희들에게 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이 주신 영의 안목과 육이 갖고 있는 그 안목을 저희들에게 허락하여 주셔서
십자가의 능력만을 보게 하시고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친히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심을 믿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말씀의 능력 속에 합류 당하여서 늘 죄인으로 드러나고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만이 우리들 가운데 드러나기를 소원하는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