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11-06 19:40
20221106 사도행전 99강 행 23:11 예루살렘과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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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glD6veg44EY

관리자 22-11-07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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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99강 예루살렘과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3장 1절에서 3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3:1~3)
1 네가 관원과 함께 앉아 음식을 먹게 되거든 삼가 네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생각하며
2 네가 만일 탐식자여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3 그 진찬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간사하게 베푼 식물이니라

기도하시겠습니다.
이미 탐심의 몸이기에 무엇을 보더라도 탐할 수밖에 없는
나만 섬기는 우상 숭배자임을 주께서 저희들에게 알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죽으심만을 자랑케 하기 위해서
탐심의 몸을 저희들에게 허락하심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시편 50편 16절에서 23절까지 말씀을 함께 교독하시겠습니다.

(시50:16~23)
16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17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18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19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20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 도다
21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 도다
22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이 시간 김중우 장로님 우리를 대표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다 같이 기도 드리겠습니다.
주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오늘도 사도 바울의 행적을 쫓아 이 말씀의 성취가
주님이 친히 일하셔서 이루어가심을 보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했던 그 십자가 피가, 오늘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들에게까지 흘러 이르렀습니다.
그 피의 능력이 우리들 가운데 역사하시어 오로지 십자가 공로만 드러나게 하시어
주의 영광의 이름만 찬양하게 하옵소서.
복음이 선포될 때 성령의 역사로 우리들에게 눈과 귀와 마음이 열려
우리의 죄와 주의 긍휼의 은혜를 알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사도행전 23장 11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행23:11)
1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아주 유명한 본문이지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선교와 관련된 얘기를 하면 이 구절을 얘기 안 할 때가 없죠.
꿈에 부풀어 오르는 말씀, 희망이 보이는 말씀,
뭔가 태양이 떠오르는 듯한 그러한 말씀으로 이해되어지고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방금 우리가 읽을 때도 사도 바울에게 주께서 친히 나타나셨잖아요.
오랜만에 나타나셨거든요. 친히 말씀하셨어요.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여러분이 만약에 사도바울의 입장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사람들은 복음을 몰라요.
복음이라는 것은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내용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사건은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이 힘을 합쳐서 하나님을 제거한 사건이에요.

이 땅은 이 복음에 대해서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이방인인 우리들은 예루살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습니까?
예루살렘이라고 하면 지금의 그 이스라엘 땅, 팔레스타인 땅,
그쪽에 있는 그 예루살렘을 떠올리게 되겠죠.

문제는 사도 바울이 주님이 찾아오신 이후에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했거든요.
정확하게 몇 차례 올라갔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최소한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이 오순절 전에
20 몇 년이 지나서 올라간 이 사건은 분명하게 나타났고

그 이전에 사도행전 9장에
주님을 만난 이후에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광주리를 타고 도망을 쳤죠.
도망친 이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사도들도 사도 바울을 두려워하면서 안 만나주려고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나타난 바나바가 사도 바울을 소개를 한 거예요.
주님이 찾아오신 것과 그가 다메섹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가를 이야기를 하니까
이 사도들과 만났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를 보게 되면 또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거든요.
갈라디아서를 한번 보겠습니다. 1장 14절부터 보면

(갈1:14~17)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이렇게 기록되어 있거든요.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다메섹에서 곧장 예루살렘으로 갔어요. 사도들을 만나
’여러 날 후에‘라는 말씀이 나오거든요. 21장에 보면
(행21:15) 이 여러 날 후에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거기에 이게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 보통 신학적으로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집어넣어도 좀 어색해요.

주님은요 우리의 이해를 구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는
이게 인간의 이해를 구할 일입니까?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었거든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그들에게 이해를 구하면서
’이해되니? 내가 이 땅에 친히 와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내가 심판주가 되겠다.‘
그 ’나‘라는 것이 이름이 바꾸어 버리죠.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나사렛 예수가 되는 겁니다.
그게 설득이 되느냐? 이야기예요. 납득이 되느냐? 이야기입니다.

신학자들이 제가 볼 때는 돈벌이 하는 거거든요. 목사들도 마찬가지고
이해 안 되는 걸 그냥 이해 안 되게 남겨둬야 돼요.
그러면 왜 그걸 이해시키려고 하고 납득시키려고 하느냐?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렇잖아요.
복음을 설명할 때 우리가 얼마나 납득시키고 이해시키려고 합니까? 맞죠? 오집사님 맞죠?.
복음은 납득이 안 되거든요. 근데 우리가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요. 애들이니까.
애들이니까 이해시켜야 되고 납득시켜야 되고 설득시켜야 되고

우리도 납득이 안되거든요. 귀신 씌여서 그래요.
’복음을 사람이 좋아하는 것으로 바꿔버리겠다‘는
그러한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복음을 설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충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쯤에 곧장 올라가지 않았고
다메섹에서 아라비아로 갔다가 그 아라비아가 어딨냐? 그거 가지고 싸우거든요.
시내산 쪽이냐? 지금의 저쪽이냐?

지난번에도 그런 얘기했지만 시내산이 지금의 시내산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오거든요.
저쪽 아라비아 쪽 뭡니까? 사우디 아라비아 쪽 그쪽의 아라비아다. 그런 주장이 나오고
그런 증거는 소용이 없어요. 창조론을 믿느냐? 안 믿느냐? 그게 구원이 안 되거든요.
이슬람교도 다 창조론을 믿어요. 처음 아셨습까? 이슬람교도 창조론을 다 믿어요.
유대교도 창조론을 믿는다니까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거.
그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어요.

증명하고 증거하여서 사람을 설득하고 이해시켜서, ’보라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믿은 자들이 예수님을 살해한 유대인들입니다.
알라신이 여호와거든요. 여호와가 살아계시다니까요. 그들에게는.
그걸 믿는 것이 구원과 상관이 있어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 여호와를 뭘로 바꾸면 돼요? 부처로 바꾸면 돼요. 그 여호와나 부처랑 똑같은 겁니다.
그게 오늘날 교회에서는 예수.
예수 이름을 또 아예 그것도 이제 저리 가라 얘기해요. 지금 요즘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해야 우상숭배에 특화된 인간들이거든요. 받아들이기가 쉬워요.

예수 이름은 처음에는 구원받는 데는 조금 유용한데 자꾸 들어가 보면 성경하고 안 맞거든요.
앞뒤가 안 맞으니까 예수님 이름을 슬쩍 빼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처음에는 예수님 중심으로 읽죠. 교회에 왔을 때는.
’예수님 믿으면 구원 얻는다’ 이렇게 중심으로 읽는데
갑자기 구약으로 넘어가면 다 누구 중심이에요? 다 여호와 중심이에요.

개혁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다 이 다는 아니고, 다라고 하면 다 오해하지만
일부 99.99%,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얼마나 위험한가? 하면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순간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야 돼요.

그러면 여호와도 믿어야 되고 예수님도 믿어야 되고
그 당시에 캐톨릭이 교황이 말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과 그 이상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렇게 하니까 들고 나온 게 ‘말씀 중심으로’ 들고 나왔거든요.
말씀 중심으로 들고 나오는 순간 곧장 어디로 갈까요? 유대교로 갑니다.

그리고 오늘날 개신교는 다 유대교예요.
제가 요한복음 3권에 그 기독교 문서 선교에서 나온 그 책에 서론에
원래는 그게 아닌데 또 다른 글을 좀 썼었는데
첫 번째 기독교는 2천년 역사가 아니라 6천년 역사죠. 기독교는 유대교와 연결돼 있으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론이에요. 거기에서 못 벗어났습니다.

캐톨릭도 구원론 중심이었다면 구원론 중심이었거든요.
그러면 개신교는 어때요? 역시 구원론 중심이에요.
십자가 중심인 사람들은 중간중간에 등장해도요. 그들은 빛을 보지 못해요.
우리야 성경에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대단한 것 같지만
갈라디아만 보더라도 사도 바울을 완전히 개무시 하거든요.

이 예루살렘이 어떠한 모습을 보였느냐? 사도행전 9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23절입니다.

(행9:23~26)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정말 이런 것들이 되게 재밌죠.
자신들이 예수님을 부정하고 팔아먹었거든요.
그런데 성령이 임해서 나사렛 예수가 주님임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어요.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 자기에게 이루어졌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 사울이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다가 갑자기 바뀌었어요.
그러면 그 바뀐 사람을 우리 같으면 자기 경험에 의하면
자신과 동일화시키면 받아들일 수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있어야 되죠.
여러분 다 그 생각 안 합니까?

그런데 주님은 일을 그렇게 안 해요.
성령 받았으니까 다 받아들인다. 그런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죄인의 한계성이 드러나는 거예요. 사도들도.

오순절날 성령 충만 받은 자들이 사도들이잖아요.
그러면 그들의 안목이 누구의 안목처럼 돼야 되죠?
예수님의 안목처럼 돼야 되는데 왜 예수님의 안목처럼 안 되나요?
우리는 예수님의 안목처럼 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살기를 간절히 원하잖아요.
그게 탐심입니다. 어떤 탐심이냐? 하면 나도 예수님처럼 되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에 한 30년 전입니까?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그런 책들이 히트쳤잖아요.
다 읽어보셨죠. 아 안 읽어본 사람은 성경에 관심 없는 사람.
남권사님 읽어보셨죠? 안 읽어 봤습니까? 그때는 권사님 연세가 많으셨구나.
우리 세대는 웬만한 사람 다 읽어봤죠.
자신이 탐심임을 몰라요. 예수님처럼 되고 싶거든요.

지금 여기에서 사도들이 무서워하거든요.
아니 앞서서 복음을 전할 때 두려움 없이 전했잖아요.
앞뒤가 안 맞는 게 너무 많아요. 모순되는 게.
그때는 네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으면
지금은 그 사울이 돌아왔다는 것이 함정일지 모르니까 조심해야 된다.
지금 여기 있는 여러분들은 조심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러분은 조심할까요? 안 할까요? 믿음이 워낙 좋기 때문에 조심할 필요가 뭐 있어요. 전진, 전진

그럴 때도 있고 안 그럴 때도 있는 거예요.
그 이유는? 이들은 십자가의 증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신의 완전을 증거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이런 상황에서 바나바가 등장을 해서

(행9:27)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벌써, 사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가 맛이 살짝 갔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제 사도들은 흩어버리죠. 사도들을 흩어버립니다.
흩어서 복음 전하는 곳으로 한 달 두 달 전에 우리 장로님이 올렸죠. 단체 톡에
12사도가 어떻게 죽었는지 어디로 갔는지 그냥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이 돼 있는데

어쨌든 그렇게 돼 있는 겁니다. 그거 없어도 돼요.
야고보는 미리 죽었고요. 그다음 베드로는 어디 갔느냐?
사도 바울의 행적 속에 모든 사도들을 담으면 돼요.
이들을 그곳에 머물러 뒀다면 어떤 꼴이 날까요? 지금 사도 바울이 올라와서
이 마게도니아 지역과 헬라지역과 아시아 지역의 대표자들을 데리고 왔잖아요.
거액의 연보를 갖고 왔을 때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벌써 이 교회는 다 누구가 장악했어요?
누가 장악했습니까? 교회가. 법조인 교수들이 장악한 거예요. 표현을 하면.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서기관 중심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이미 자리를 잡은 겁니다.

만일에 우리 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저한테 집을 하나 사주고 사례를 주고 그런데 교인들이 한 100명이 된다.
그런데 복음 아는 10명은 헌금 안 하고 90명은 헌금을 하고 그러면 판이 어떻게 바뀔까요?
여러분은 저한테 기대하겠죠. ‘안녕히 계세요’ 하고 갈지 그건 아무도 예측을 못해요.
주님의 일은 주님이 하시지 우리가 못해요.
그렇게 예측하는 것을 미래를 준비한다라고 하죠.

그런데 주님의 일은 확 들이닥쳐 버립니다.
들이닥치면 우리가 준비하고 뭐하고 그것이 전혀 안 먹혀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준비해야죠. 준비
근데 주님이 준비하는 것들을 용납합니까? 안 합니까? 안 하죠.
예측하는 대로 일을 세상의 일들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여러분 경제 예언가, 정치 예언가, 윤석열 예언가, 이재명 예언가가 다 있잖아요.
그대로 됩니까? 안 됩니까? 확률 게임이라고 했죠.
이미 그러한 자들은 점쟁이들은 죽이라고 한 이유가 뭔가 하면
말씀은 언약만을 증거하기 위한 사건들로 이루어진 세상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점쟁이는 그중에 하나가 들어맞는 한 50% 60% 들어맞는 30%가 들어맞는
그걸 끌고 와서 누구의 세계로 바꿔버립니까? 인간을 위한 세계로 다 바꿔버리는 겁니다.
28절에 보면

(행9: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행9: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이렇게 돼 있거든요. 앞서서 사도행전 23장 11절에서

(행23:11)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그러면 그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결과물을 떠올리죠.
복음을 전하면 결과물이 있을 거 아닙니까?
지금 사도행전을 여러분이 살펴보면서
‘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니까 결과물이 많더라’ 이렇게 느낍니까?
아니면 결과물이 하나도 없더라로 느낍니까?
인간의 본능은요 ‘많더라’로 느껴요. ‘있더라’로 느끼지, ‘없더라’로 안 느껴요.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없다’라고 느껴야 돼요.
왜 그런가 하면 그 결실은 주께서 친히 십자가의 피능력으로 구원하셨기 때문에 그래요.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 구원받은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정말 이 재미있는 것은 방금 사도바울이 주님을 만난 이후에
곧장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 복음을 연구해서 다메섹으로 갔다가 복음을 전하다가
거기에서 광주리 타고 도망갔다가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보통 이렇게 신학을 해석 하거든요. 그냥 그렇게 알아도 돼요.

그렇게 가서 전했는데 정말 재밌는 것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구원 얻는 자를 한 사람도 못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그게 기록이 안 돼 있어요. 성경에.
출입하며 복음을 전했는데 믿더라라는 내용이 앞서서 등장하잖아요. 복음을 전했을 때

그런데 여기에서 ‘주 예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말했으면 결과가 나와야 될 거 아닙니까?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서 결과가 나온 것도 있고 안 나온 것도 있잖아요.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한 사람도 믿는 자가 없었다는 겁니다.
오히려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가?

(행9: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힘썼어요)

바울이 복음을 제대로 알잖아요.
우리는 바울이 주님이 찾아오셔서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셨다는 사실을 굉장히 대단한 일로 여기죠.
사도들 입장에서는 그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온 120명의 사람들은 그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바울의 경험이.

여러분 그런 생각한 적 있습니까? 120명 입장에서는 바울의 경험이 별거 아니에요.
자기들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잖아요. 그리고 승천하는 주님도 목격했거든요.
찾아오는 것은 부활한 주님이 찾아온 경험도 있었잖아요.
그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고 믿는 자가 생겼을 수도 있죠.
그건 나중에 보면 있는데 과연 그들이 믿는 자인가? 아닌가? 그것이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정말 성령께서 누가를 통해서 성경을 멋지게 기록한 것 같아요. 제가 못 찾았는지 모르겠지만.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이 일어났어요. 여기에 보면.

‘말하며 변론하니’ 다툼이 일어난 거예요. 논쟁이 일어난 거예요.
신학적 논쟁하는 걸 여러분은 ‘아 그거 나쁜 거야’ 나쁜 게 아니고 성경이 다 논쟁이에요.
스데반 집사님도 논쟁이고요. 붙으면 이깁니까? 집니까? 반드시 이기죠. 상대가 게임이 안 돼요.
왜냐하면 다른 세계에서 보기 때문에
그 세계가 알고 있는 것과 영의 세계를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안목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에 논쟁을 하면 질 리가 없죠.

그들은 답을 갖고 있잖아요. 인간 중심.
근데 복음은 인간 중심을 깨고 십자가 중심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논쟁을 하면 질 리가 없습니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그건 세상의 방식이고 예수님은 진 적이 없어요.
예수님이 말싸움에서 지는 거 봤으니까? 말싸움에서 이기니까 죽여버리잖아요.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고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

그럼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어땠느냐?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바울의 얘기를 어느 정도 수긍했다라고 볼 수 있어요.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독특하죠. 그러면 헬라파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인가?
디아스포라 중에 본토 땅에 없이 살고있는 그 사람들을 헬라파 유대인이라고 흔히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사도바울을 보면 어릴 때부터 비록 교육을 받았지만
유대적 전통에 의해서 교육을 받았지만 전체 교육은 헬라적 사고를 갖고 있는 겁니다.
헬라적 사고의 특징은 뭐 인간 중심이고 인간 행복이잖아요. 그리고 합리적이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 했잖아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둘 다 마찬가지인데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니까 약간 비논리적인 것을 받아들일 수 있잖아요.
구약 자체가 비논리적인 게 워낙 많기 때문에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들은 굉장히 논리적이고
그 논리적인 것이 결국 어디를 향하느냐?라고 할 때는 나의 행복으로 향하고 있죠.
사실은 히브리나 유대인이나 똑같습니다.

근데 그들은 어쨌든 바울과 대적하지 않는데 주께서 그러한 만남을 허용치 않았을 수도 있고요.
헬라파 유대인과 변론을 하니까 그들이 열받아 버려요. 살기가 떠오른 겁니다.
마치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과 똑같죠.

왜 헬라파 유대인들이 바울의 복음을 듣고 논쟁을 하다가 왜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까요?
사람이 언제 타인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길까요?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무너질 때 상대를 죽이고 싶은 거예요.

어제 저기 시청 앞에서 한 뭐 5만 명 6만 명 모였고 그들은 누구를 죽이고 싶을까요?
이태원에서 죽은 그 애들 대신 대통령을 죽이고 싶은 겁니다.
본심을 좀 드러내면 좋은데 그걸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비인간적이라서
그러면 광화문에 모인 그 이름 이제 발설을 안해야... 전xx 있잖아요. 500억 아들에게 물려준 사람
그거는 그 사람은 누구를 제거하고 싶을까요? 김정은은 절대로 죽이면 안 돼요.
김정은이 죽어버리면 자기의 존재 의의가 사라져요. 북한은 영원해야 돼요.
영원해야 되고 그럼 누가 누구를 죽이고 싶을까요? 이재명 죽이고 민주당 죽이고
또 올라오면 또 죽이고 그래야 자기의 세계가 영원하거든요. 법이 그걸 막고 있잖아요.

성경에 나오죠. 그 법은 왜 막고 있습니까?
복음 때문에 그 법을 통해서 함부로 못 죽이도록 막고 있는 거예요.
그 법이 막고 있지 않으면 저도 벌써 죽었습니다.
복음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주께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열받았습니다.
나름대로 이들도 구약 성경을 믿고 있고 철저하게 그것을 분석하죠.
헬라파하고는 좀 다른 차원이라고 볼 수 있죠. 유대인들의 사고 플러스 헬라적 사고.
우리는 구분하려고 하는데
두 가지를 동시에 갖고 있으면 수준이 히브리파 유대인들보다는 더 레벨이 높겠죠.

그러니까 사도 바울과 논쟁을 하는데 갑자기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상대가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왜 죽이고자 하는 겁니까? 사도바울이 그냥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옳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죽이려고 할까요? 대놓고 이야기하죠.
’네가 바로 십자가의 원수야 네가 죽인 그 예수가 심판주야‘ 거기에는 뭐까지 깔려 있습니까?
너는 그 심판주에 의해서 불심판 받아 마땅하다가 깔린 거예요.

헬라파 유대인이나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우리들 수준과 다르다고 했죠.
우리들 수준은 구약을 깔고 있지 않잖아요. 저도 잘 모르는데요.
이 사람들은 밥만 먹으면 말씀 중심이에요. 말씀 중심.
그러니까 개혁주의들이 얼마나 엉터리예요.

말씀 중심이니까 십자가를 교회에서 제거해버립니다.
제거하는 방식이 뭔가? 하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거기에 십자가가 없어요.
정말 재미있죠.
차라리 예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그러면 약간 동의할 수 있는 그것도 엉터리예요.
사실 이게 본심을 가리는 거예요. 사실은 교회 중심이에요.

교회를 위한 성경, 교회를 위한 하나님이에요.
어느 인간도 이 교회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게 신앙 고백서고 교리에요. 그거 갖고 전쟁을 펼치잖아요.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립니까? ’내가 옳다. 네가 옳다.’

결국 예루살렘에서는 바울이 한 명도 구원하지 못하고 도망가죠. 빼돌립니다.
가이사랴로 가서 다소로 보내죠.
이것이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한 그 모습이에요.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에 대해서 증거한 것 같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이제 약간 강요죠.
로마에서도 어떤 일이 펼쳐질 거다? 믿는 자의 수가 늘어날 거다?
십자가 사건의 현장의 반복이에요.
아무도 믿지 않는 겁니다.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사도행전을 우리가 이해할 때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니까 ‘믿더라 믿더라’ 여기에만 미쳐 있죠.
그러다 보니까 23장 11절에 나오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한 것 같이 로마에 가서도 전하여야 하리라‘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야 신난다. 가서 복음 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런 게 아니죠.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이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지금 사도 바울이 자기도 어떻게 됐어요? 예루살렘에서
자기도 율법 준수하는 자임을 보이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가서 결례를 행했잖아요.

사도 바울 자신도 날아가 버립니다. 예루살렘 자체가 날아가 버려요.
예루살렘을 왜 날리느냐? 이게 중요해요.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을 날렸거든요.
날리면 날려야 되는데 오늘날 많은 교회가 ’백투더 예루살렘‘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왜 그렇게 이야기하느냐? 구약 때문에 그래요.
구약적 예언을 확실하게 받들어 믿은 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었거든요.
그들이 예수님을 살해했잖아요.

그러면 구약 말씀을 근거로 하여서 믿고 살아간다면
이들은 모두가 다 어떤 자들이냐? 할 때는 예수님을 살해하는 자들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라고 하는 자들은 다 예수님을 살해하는 자예요.
그들에게 십자가 이야기하면 비웃죠. 이사야 2장을 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사2: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사2: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여기에 보면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죠. 유다의 중심은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산이 있죠. 아모리 산 위에 성전이 세워져 있잖아요.
그러면 2절에 나오는 ’말일에‘ ’마지막 때‘입니다.
’마지막 때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전의 산‘이라는 것은
예루살렘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고 시온산을 이야기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시온산라고 보시는 게 더 타당할 수도 있어요.
이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서 있다는 겁니다. 모든 산.
비유죠. 전 세계에 모든 산꼭대기에 서게 되고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하나님의 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모여들 것이라는 게 지금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이것은 포로 이후에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칠십 이레가 완성이 되면 이 말씀이 성취가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러한 말씀에 대해서 알고 있고 놓치지 않고 있어요.

특히 누구도 놓치지 않는가? 하면 사도들도 놓치지 않는 겁니다.
좀 이상하죠. 우리는 성령 받으면 구약을 다 꿰뚫을 거라, 생각하잖아요.
얼마나 우리가 그걸 간절히 원합니까? 성령 받아서 말씀 다 알기를.
주님의 일은 주님이 하시면 되고 주의 말씀은 주님 혼자 알면 돼요.
우리는 시키는 대로 살면 돼요.
그런데 왜 그런 탐심이 생기느냐? 할 때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기 때문에 그래요.

사도들도 여전히 머물러 있죠. 예루살렘에
스데반으로 인하여서 핍박을 받아서 이 헬라파 사람들은 다 쫓겨났는데
히브리파 사람들은 여전히 머물러 있는데 그 이후에 언제 이들을 흩어버리는지는 모릅니다.
언제 나갔는지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아직까지 사도들이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물론 지금 야고보지만 23장에서는 야고보고요. 그전에 다 나가는 겁니다. 3절에 보면

(사2: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오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니라
(사2: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칼을 쳐서 보석을 만들고
          (다시는 칼을 만들지 않는다.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오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니까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예루살렘 중심으로 전 세계가 재편되고
그리고 율법이 거기에서 가르치는 그 내용에 따라서 이제 열방이 다 굴복하게 되고
그렇지 않는 자들은 다 심판을 받는다’ 이런 논조로 지금 선지자가 외치고 있거든요.

그러면 예루살렘을 포기합니까? 안 합니까? 지금 여기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죠. 열방을 그리로 모은다고 했거든요.
근데 이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하고 똑같이 이야기해요.
예레미야 3장을 한번 봅시다. 15절에서 18절을 보면

(렘3:15~18)
15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목자들이거든요. 목자가 목자들이 됩니다. 나중에)
1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 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언약궤 자체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못 알아들었죠.
    요한계시록 보면 언약궤가 없거든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왜 못 알아듣는가? 하면 말씀을 읽으면
    항상 나 중심, 이스라엘 중심, 예루살렘 중심, 유대 중심으로 읽기 때문에 그래요.
    한국 교회는 한국 교회 중심, 우리 교회 중심으로 성경을 다 해석하거든요. 17절)
17 그 때에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예요.)
    열방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치 아니할 것이며
18 그 때에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하여 북에서부터 나와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기업으로 준 땅에 함께 이르리라

북방으로 잡혀가잖아요. 남북이 갈라지고.
하나가 되어서 돌아온다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게 언제 이루어집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잖아요.
언제 이루어지느냐? 라고 질문을 한다는 자체는
이 말씀을 보고 자기가 상상하는 바가 이미 올라왔다라는 겁니다.
그 상상하는 바를 기다리기 때문에 언제 이루어지느냐고 묻는 거예요.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이 묻잖아요.
성령을 준다고 하니까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까?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잖아요.
이런 질문 자체가 자기의 상상하는 바가 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나 예레미야, 나중에 미가 선지자하고 똑같은 이야기를 하거든요.
미가서 4장에 보면 이사야 2장에서 한 얘기를 거의 반복을 합니다.
그러면 이 예루살렘이 종말을 고할까요? 안 고할까요? 이게 문제예요.
사도행전이 중요한 내용 중에 하나가 이 얘기입니다.
예루살렘을 날려라는 얘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요 항상 구심점을 찾아요.
‘우리 교회가 구심점이야’ 우리 교회가 구심점이 아니에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출발점이고 중심점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구약의 예언들이 모두가 다 예루살렘 중심으로 말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스가랴 14장 8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구약 성경 끝부분입니다. 14장 8절에서

(슥14:8)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슥14: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여기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나와서 동으로 흐르고 서로 흐른다‘ 이렇게 나오죠.
그리고 그 날에는 누가 왕이 돼요? 여호와가 왕이 되죠.
’예수님, 나사렛 예수가 왕이 된다. 심판주가 된다‘라는 예언이 성경에 없어요.
여호와가 왕이 된다는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중심이 되면 나사렛 예수를 왕으로 세울까요?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세울까요? 백이면 백이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 되는 거예요.
각 교회가 자기 교회를 성전이라고 하거든요.
성전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아세요? 성전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 교회가 예루살렘이 되요.
말이야 여러분이 있는 곳이 여러분이 모이는 곳이 성전이다.
성전이라면 완전히 뭉개지고 망가지고 부서지고 깨어지고 ’아니오‘가 나와야 되는데
성전이라고 하면서 ’이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성전은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죠. 예수님의 몸은 자기 몸을 대속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분 앞에 성전이 된다면 자기는 어떤 자가 돼요? 죄짓는 자밖에 안 돼요.
예수님을 살해한 죄인밖에 안 돼요.

그런데 여기에 보면 베들레헴의 성전, 거기는 뭐예요? 여의도 성전.
또 어디 성전이 있어요? 무슨 성전. 다 이야기하잖아요.
저 서초동도 얼마 안 가요. 좀 있으면 지금부터 성전이라 합니까? 좀 있으면 성전이에요.
다 성전이라 합니다. 어디든지.
그러면 성전이라고 하는 순간 예루살렘이 되는 겁니다.

목사들이요 머리가 비상합니다.
돈을 내게하는 방식이 여러분 이만희가 얼마나 큰 부자입니까?
그건 뭐 공식적으로 나왔으니까. 궁궐 봤잖아요. 우리가. 이재명이가 가가지고.
궁전에 살잖아요.

목사들이 돈벌이 하는데 도사입니다. 도사.
돈벌이 중에 가장 좋은 돈벌이가 뭐예요? 종교입니다.
그러니까 점집이 얼마나 많아요. 길거리에.
투자 얼마 안 하고 투자 대비 수익이 이게 만만치 않거든요.
제가 어떤 분은 굿 한번 하고 1억을 받쳤어요. 1억을
여러분, 무섭죠. 1억만 받치겠어요. 10억을 받칩니다.
어떤 분은 뭐 본인 작은 아버지인가 10억을 바쳤대요. 그 이상을 바쳐요.
왜 바칠까요? 거래거든요. 거래. 그걸 목사들이 이용을 하는 겁니다.

예루살렘에서 샘물이 나오고 생수가 나오고 여호와께서 친히 왕이 되시고 10절에 보면

(슥14:10)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까지 미칠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높이 들려 그 본처‘ 원래 있던 자리에 있을 것이요.
이렇게 되니까 이 예루살렘을 성령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어떻게 해석하느냐?
좀 여러분이 좀 뭐라 그럴까요?
이 말씀에 대해서 너무 자기가 신의 자리에 올라서 해석하려고 해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성령을 받으면 다 알거라 생각하는데 성령을 받으면 아무것도 몰라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희한하게 인간은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뭔가를 안다‘라고 덤벼들잖아요.

사도행전을 보면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구약을 제대로 알았다.‘ 그러면 어디 중심으로 해야 돼요?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령이 임했잖아요.
그럼 이 예루살렘 교회는 영원해야 됩니까? 영원하지 않아야 돼요?

모든 복음이 예수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여러분이 예루살렘을 버리겠어요? 안 버리겠어요? 안 버리겠죠.
그건 인간의 본심입니다.
마찬가지예요. 이들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이 예루살렘을 주께서 어떻게 날려버렸냐? 할 때는 사도 바울을 거기에 투입시켜요.
사도 바울을 투입시키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할 때
어떻게 복음을 전했느냐?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할 때 한 사람도 구원을 못 얻었잖아요.
예수님이 실패했습니다. 여러분 처음 알았어요?

사도 바울도 사도 바울은 열두 제자의 대표예요.
그 대표로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도 결례를 행할 뻔했는데 실패했으면 그 유대인들이 어떻게 해석하겠어요? 그걸.
율법 준수하는 자들이. 수만이나 되는 그들이.
’봐봐 복음은 이런 거야 복음을 믿더라도 십자가를 믿더라도 율법을 준수해야 돼. 바울도 저렇잖아’

그러니까 바울을 통해서 완전히 지옥 갈 자들을
완전히 한 트럭, 두 트럭이 아니라 몇만 명을 태워서 보내는 거예요.
‘예루살렘에서 어느 누구도 바울의 설교를 통하여 구원 얻지 못했다‘라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에서도 전하여야 하리라.‘

사도행전 28장을 봅시다. 제가 이때까지 설교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다 아는 이야기인데 뭐 새삼스럽게 하느냐? 이렇게 보실지 모르지만 16절에 보면

(행28: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행28:17)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렇게 돼 있거든요. ’유대인들 중에 높은 사람들‘ 상당히 특이해요.
                유대인들 중에 높은 사람들을 청하였어요. 그들이 왔습니다.)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 바 되었으니

여기에서 예루살렘이 등장해요. 또 예루살렘에서
나는 이 유대인들을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조상의 규모를 배반한 적이 한 번도 없다라는 거예요.
이 말이 맞죠. 맞는데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성령을 받은 입장에서는 이게 아닌 거예요.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줬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은 아웃.
그런데 좀 더 봅시다.

(행28:18)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행28:19)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행28:20)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노라
(행28:21) 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행28: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소문은 들었는데 직접적인 것에 고소는 못 들었다.
그래서 도대체 네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자 하기 위해서 왔다는 거예요.
지금 로마에 들어와서 지금 들어왔는데 이들을 청하였어요. 봅시다. 그다음

(행28: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강론을 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바울의 말에 대해서 24절에 보면

(행28: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있었어요.)

그러면 여기에서 믿는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일까요? 아닐까요?
재밌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25절

(행28: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져요. 그러면 믿은 사람들은 떠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 이들이 올 때는요 우리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하나가 되어 왔어요.
그런데 바울의 복음을 들은 이후에는 완전히 찢어져 버렸어요.

찢어져 버렸으면 우리의 예상에는 찢어버린 그 나누어진 그들 중에 믿는 자들이 있다. 했으니까
바울에게 남아 있어야 할 자가 있어야 되지 않느냐?라고 생각하지만 흩어져 가버렸어요. 다.
싸움만 일어나고 가버렸어요.

이건 무슨 얘기가 하면 ’네가 옳다. 내가 옳다.‘ 이 싸움이에요.
’믿었다‘라는 것이 우리가 볼 때 그러한 어떤 신앙의 믿음이 아닌 겁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보면 뒤쪽에 바울이 이사야로 이렇게 말씀하신

(행28:25)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흩어질 때에
성령이 개입되면 성령은 십자가의 영이거든요.
그러면 이사야에게 십자가의 영이 임했잖아요.
그러면 십자가의 영이 임해서 외치는 그 말씀은 어느 누구도 믿을 자가 없다라는 겁니다.
그게 이사야 하는 일이거든요.
듣지 못하게 하고 눈을 감기게 하고 깨달아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누가 하는가? 하면
이사야가 했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행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앞서 분명히 ’믿는 자도 있고‘라고 표현을 했잖아요. 앞뒤가 안 맞잖아요.
’조금 믿는 자도 있고‘ 했으면 그러면 전면 부정은 안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지금 이사야의 예언에 의하면 전면 부정입니다.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라는 거예요.

(행28: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오히려 돌아올까 걱정을 해서 눈을 감기게 만들어놓는 겁니다.
그게 복음의 능력이에요.

(행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그러니까 이들을 모두가 다 어떤 자들입니까?
’믿었다‘라고 하는 자들도 눈 감긴 자에요.
만일에 흩어져서 믿은 자가 흩어져서 사면서 복음을 깨달았다면 자기를 어떤 자라고 보겠어요?
이사야 말씀의 성취니까 자신은 죄 중에 괴수, 눈먼 자로, 깨닫지 못하는 자로 인식하겠죠.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 표현이 너무나 일방적이예요.
’어느 누구도 깨닫는 자가 없다’라고 하면서
그래서 복음을 누가 들을 것이다? ‘이방인이 들을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행23:11)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로마에서 어떻게 됐어요? 31절 봅시다. 30절부터

(행28: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행28: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이게 결론입니다. 복음을 전했는데 ‘누가 믿었더라’ 이 얘기가 안 나와요.

그러니 ‘예루살렘에서와 같이 로마에서도 전하여야 하리라’
이 말씀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 다른 말씀이라는 겁니다.
십자가의 증인으로 삼겠다는 이야기예요.

그러면 구원 목적이 아니죠.
구원 목적 아니면 어떤 목적입니까? 증인 목적이죠.
아까 우리 장로님 기도하신 대로 증인 목적이잖아요.
그래서 담대하라고 한 거예요.
담대하라고 했으면 얻어 맞을 때 나타나서 담대하라고 하시든지, 미리미리 좀 하셔야 되는데
이제 와서

(행23:11)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담대하라’는 의미가 어떤 의미인가?
물론 그 어려움과 위협 이런 것들도 포함할 수 있지만 복음 전파는 듣는 자가 없다라는 얘기예요.
힘을 실어주는 거죠. 그래 예루살렘에서 네가 복음을 전하니까 나름대로 이렇게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 준수해서 해보니까 돼? 안 돼? 안 돼요.

그럼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 될까? 안될까? 안 된다는 거예요.
누가 구원합니까? 오로지 주님만 자기 백성을 구원할 뿐이에요.
그래서 사도행전이 결론이 어떤가? 하면 예루살렘과 똑같이 돼 버려요.
‘아무도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는 없고 복음은 막을 자가 없더라‘
이것보다 신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결과에 대해서 관심을 갖잖아요.
’몇 명 모이느냐? 몇 명 전도했느냐?’ 여기에 관심을 갖잖아요.
예수님은 한 명도 전도를 못했다는 걸 아셔야 돼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주가 되셔서 긍휼히 여길 자는 긍휼히 여기고 그래서 구원하신 거예요.
그 구원은 자기 이름을 증거하기 위한 구원이에요.

그러면 예루살렘은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예수님 따라 하늘로 가버렸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 10절을 보겠습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이제 마칠 시간 됐으니까 10절 11절

(계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계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아멘)

예루살렘이 어디로 가버렸어요? 하늘에서 내려와요.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우편에 감춰져 있죠.
이렇게 말씀을 해도 인간들은 땅을 포기 못해요.
교회를 할 때 땅을 사서 건물을 짓고자 하는 게 우리가 볼 땐 단순한 탐욕을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깊은 바닥에는 뭐가 있는가? 하면 하늘로부터 오는 예루살렘은 채워라 이 얘기예요. 채워라.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죠.
그래서 뭔가 좀 모임이 되고 사람이 모이면 다 뭘 건축합니까? 성전을 건축해요.
여기가 바로 예루살렘 성입니다.

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예루살렘 성이 신부거든요.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이 신부들은 누구냐?
주의 이름,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고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할 때
아무도 안 믿었잖아요. 그런 증인으로 남아 있는 자들입니다.
안 믿을 뿐만 아니라
이들은 복음 때문에 미움받고 핍박받고 죽임당한 자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저희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으로 만들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을 담대하게 하시고 십자가만 자랑하고 증거하는 것으로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날마다 우리의 육신을 죽이시고 우리 속에서 참된 성전이신 주님만을 끄집어내시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