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8-21 09:08
20230821 로마서 강해 27강 다윗이 받은 복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21  
https://www.youtube.com/live/G2jR2PK6NlY?feature=share

관리자 23-08-22 00:02
답변 삭제  
20230820 로마서 강해 27강 다윗이 받은 복

다 함께 묵상 기도드리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5장 18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5:18)
“그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살이니라”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부득불 할 일이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까 함이라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 속에
저희들을 합류시켜 주셔서 이웃을 향해 생명의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시편 73편 13절에서 28절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시73:13~28)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이 시간 김기대 집사님 우리를 대표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죄의 종으로 태어나 죄의 종노릇하다 지옥 가야 마땅한 여기 모이게 하신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십자가 안과 밖의 세계를
주님의 주되심을 증거케 하시기 위함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매 순간 십자가에서 끊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말씀으로 붙들어 주시고,
주님 홀로 완성하신 십자가 사건에 참예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배출되는 배설물들을 십자가로 덮어주셔서 율법 외에 한 의로 인쳐 주시고,
주님 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피뿌림의 현장 속으로 참여케 허락하시어
십자가를 증거하며 자랑케 하시는 주님의 피공로의 은혜에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려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로마서 4장 6절에서 8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4:6~8)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아멘.

지금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율법 외에, 율법 밖에 한 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아브라함을 소개를 했고요.
지금은 다윗을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이게 뒤로 넘어가면 아브라함은 무할례자, 다윗은 할례자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대해서는 이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의 악함, 불법, 이러한 것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3절부터 보게 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이 부분에 대해서 어느 누가 시비를 걸겠습니까?
‘이것이 불법이다 악하다.’ 조금 더 강력하게 얘기를 한다면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살해한 것이다. 하나님을 살해한 것이다.’ 이렇게 보이나요?
아무도 그렇게 안 봐요. 이걸.
왜 그러냐? 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미쳤기 때문에 그래요. 악마의 종이기 때문에.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너희 아비는 마귀라” 했거든요.
그 마귀라고 하면 아멘하면 될 일인데 문제는 죽어도 아멘을 안 해요.
‘나는 예수 믿기 전에는 마귀였는데 예수 믿은 이후에는 우리 아비는 마귀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시라.’ 악마가 그런 신앙을 만들어내거든요.

악마가 뭘 겨냥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홀로 행하신 일을 제거하는 일이 악마의 일이에요.
십자가를 제거하는 일이 악마의 일이에요.
그 인간에게는 간단하죠.
‘그래 너희들 원하는 바를 내가 들어줄게. 구원이지 않느냐. 그래 예수 믿고 구원받아.’
심지어 로마서를 갖고 와서 아브라함이 믿으매 의로 여김을 받았다라고 하니까
‘여러분들도 믿어야 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세요.’
믿어버려요. 믿는 순간 무엇을 제거합니까? 십자가를 제거해요.
믿는 것은 순간이거든요.
어느 누가 십자가 안에 머물기를 원합니까?

사도바울이 지금 로마서 4장 3절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소개를 하는데
“행함으로 말미암았다면 자랑할 것이 있거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다”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이유가 유대인들의 시각에는, 유대인의 안목에는
아브라함을 보게 되면 행함으로 자랑할 것이 있어 보이는 거예요.
이삭을 바친 모습을 보면 자랑할 만하잖아요.
자기의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우리야 믿음이 좋기 때문에 ‘아 주님이 약속한 천국에 갑니다’라고 확신하죠? 갑자기 물으니까...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버리고 갔잖아요.
갔으면 그 행위는 칭찬받을 만하잖아요.
히브리서에서는 칭찬하거든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
히브리서에는 십자가의 완료성 입장에서 아브라함을 새롭게 해석하는 거예요.

히브리서도 십자가를 증거하는 건데, 거기에 인간들은 뭘 끄집어내려고 합니까?
믿음이라는 행위를 끄집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하면서 4절에 보면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이렇게 나오거든요.

아브라함은 일을 안 했다는 겁니다.
언약을 위해서 일한 것이 없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라는 이 말씀의 의미는
‘안 믿었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어야 돼요.
안 믿었다는 내용을 담지 않으면 무엇이 나올 수 없습니까? 피가 안 나와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피입니까?’ 얘기하는데 그러니 지옥 가야 돼요.
지겹도록 피를 이야기하는 게 지금 성경 전체거든요.

마지막 최종 심판도 어린 양의 피로 심판을 합니다.
그 피로 덮어쓴 자들은 용서함을 받은 자로서, 생명책에 기록된 자로서 아들의 나라에 참여하지만
그 피를 덮어쓰지 않는 자들은 거기에 참여하지 못해요.
지금 4절에서 ‘일을 안 했는데 일한 대가를 주셨다’라는 거거든요.
‘그러면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잖아요.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겠지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다’라고 할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많이 들어보셨죠?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것도 하지 않아도 구원이 된다’
그렇게 들었잖아요.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여기에서 ‘어떤 일을 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주의 일에 어떤 일도 우리가 보탬이 되거나 더한 적이 없다’라는 의미예요.
그걸 이제 요 후반부에서 5절 하반절에서 급속도로 바꾸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면 아브라함의 죄가, 불법이,
죄라는 것은, 불법이라는 것은 반드시 율법이라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적극적인 죄가 잘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아요. 우리가 보기에는.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볼 때 ‘아브라함은 죄인 중에 괴수야’ 이렇게 보는 사람이 있나요?
아브라함과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다윗을 동일하게 볼까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브라함과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다윗을 동일하게 봅니까, 다르게 봅니까?
우리야 배운 게 있으니까 어차피 죄인이니까 똑같죠.

근데 막상 성경을 읽어보면 뭔가 달라요.
다윗은 정말 나쁜 놈 같고
아브라함은 그래도 나름대로 뭔가 믿음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보려고 애 썼잖아요. 맞죠?
다윗은 애를 쓴 게 아니잖아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생산한다든가 안 그러면 다메섹 엘리에셀을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내세울 때
아니면 애굽에 내려갔을 때 자기 아내를 누이로 속였을 때 그 모든 바탕은 무엇이 깔려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깔려 있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했을 때는 그러한 약속을 믿는 믿음이 눈곱만큼도 안 나오잖아요.
성경을 읽어야 이렇게 좀 차이를 보는데...... 그렇게 다 보시죠? 읽으시고.
너무 달라요.
주님의 안목은 우리와 다르죠. 주님은 하늘로부터 오셨잖아요.
영이시란 말입니다. 영이 보는 안목은 우리와 전혀 다르게 보신다는 거예요.
그게 지금 사도바울을 통해서, 로마서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대표적인 예를 들면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여기에서 “경건치 않다” 이런 표현이 나오잖아요.
이것도 조금 부족하죠. 경건치 않은 정도.

그 정도가 아니라
이제 다윗으로 넘어오면 이 경건치 않음이
“일을 아니할지라도 의롭게 하셨다”라는 이 내용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하면
일을 안 했는데 의롭게 되었는데, 일을 안 한 그 자리에 어떤 일을 했는가? 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일이 뭔가? 하면 그 ‘경건치 않은 일’인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바로 ‘불법’이라는 거예요. 불법. 불법을 행했다는 거예요.
불법이라는 것은 그냥 불법 행하였다. 이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한 판 붙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한 판 붙잖아요. 왜 붙습니까?
내 가는 길 막지 말라는 이야기거든요.

다윗이 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는 그 사건은 어떤 사건입니까?
‘나도 왕이고 (좀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 니도 왕이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왕들의 전쟁입니다.

이것은 미리 앞당겨 보여준 거죠.
다니엘이 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을 하면서 인간이 추구하는 그 자리가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이것도 재미있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생각할 때는 로마가 짐승이라 생각하는데
로마가 짐승이 아니었고
장로들과 대제사장, 서기관들이 짐승이었다라는 사실은 기절초풍할 일이에요.
그들은 남은 자들이거든요.

이스라엘을 선택한 목적이 그거예요.
뭘 보여주겠다는 겁니까? “너희들은 짐승이다.”
그 짐승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이 짐승인 것은 누구나가 공감을 하잖아요.

그런데 누가 짐승이냐?라고 하면
말씀을 듣고 선지자들을 보내어서 계속해서 책망을 받은 자들이
최종적으로 남은 자들로서 짐승의 모습을 보인다라는 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이미 다윗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보여줘도 깨닫지 못해요.

지금 이미 우리는 앞서서 로마서 앞부분에서 그 사도바울이 시편 51편을 갖고 왔잖아요.
시편 51편을 전혀 다르게 해석을 해버렸죠.
“율법 외에 한 의”를 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가
그 다윗을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는 그 사건 속으로, 죄 속으로 몰아넣었다라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모든 인간이 ‘입 다물어’에요. 입 다물어.
구원 얻는 비법을 알려주는 게 시편 51편이 아니에요.

그 불법을 이야기하기 전에 6절에 보면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이 “일”이라는 것은 어떤 일이냐? 라고 할 때 불법을 가리움을 받는, 죄 용서함을 받는 일이에요.
이 일에 대해서 인간은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겁니다.
이걸 뒤집어버리면 무슨 일만 했느냐? 라고 하면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희생을 유발하는 일만 했다’라는 그 의미를 담고 있는 거예요.
그 내용을 지금 다시 아브라함에게 덮어 씌워버립니다.

아브라함이 한 일이 없어요.
의롭게 되는 그 일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조금도 보탬이 안 된 정도가 아니라
그 의를 생산하는 그 인물을 살해한 그러한 당사자로 드러나는 게 지금 로마서 4장 말씀입니다.
지금 계속해서 로마서가 그걸 이야기하고 있어요.

또 잊어버릴까 싶어서 로마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에요.
이것도 충격 아니에요?
아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거 뗐어. 뗐어. 그거 다 알아.’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나 고린도 성도들이나 갈라디아 성도들을
너무 얕잡아봐요.
‘저들은 복음을 잘 모르니까 저런 짓을 하는 거야.’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오리지널 복음을 들었어요. 십자가 피 복음을 제대로 들은 자라는 얘기입니다.

그럼 이 말씀을 왜 이야기할까요? 왜 이야기하겠습니까?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자들이 자랑질 하고 있는 거예요.
‘목사님 이건 유대인들이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런 게 아니고.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옛날 옛날에 호랑이가 살았는데... 이 얘기밖에 안 됩니다. 말씀 자체가.
(휴대폰 꺼주세요. 지금 생명의 말씀이 지금 전파되는데 생존에 붙들리지 마세요.)

놀라운 것은 이걸 “축복”이라 하는 거예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
행복이라고 번역을 해놓으니까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과 똑같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 복은, 이 축복은 세상이 주는 축복과 다른 축복이에요. 로마서 8장으로 넘어가면 나오거든요.
“환란 가운데 기뻐하는 축복” 이건 정신 나간 축복이잖아요.
돌 맞아 가면서도 돌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복 받은 자.
헐벗고 굶주리고 그런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만 생각하잖아요.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잠언서에는 이웃에 대해서 계속해서 쳐서 이웃을 죽이려고 하는 그런 짓거리가 인간들 세계거든요.
나중에 그 잠언서를 물려받은 자들이, 남은 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이 이웃을 향해서 뭘 쳐댑니까? ‘회개하라’고 쳐대잖아요. 세례 요한처럼. ‘말씀대로 살아라’고.
세리와 창기를 얕보고요. 그게 무슨 뭐 하는 짓입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어요? 자기의 몸을 대속물로 내어주시는 거예요.
잠언서를 제대로 해석한다는 자체가 악마적 사고예요.
희한한 것은 진짜 주님이 잠언의 성취자잖아요. 지혜자.
십자가의 지혜를 갖고 이웃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면 그걸 뭘로 여깁니까?
꼭 잠언서 오늘 읽은 본문처럼
‘왜 나를 건드려? 왜 나에게 시비 걸어? 왜 내가 뭘 잘못했어?’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 교회에 와서 책망을 듣고자 하는 게 아니라 교회에 와서 자기를 지지받고자 하는 거예요.
‘이렇게 더운데 말씀 들으러 왔는 것만 해도 얼마나 대단하냐?’ 대단하기는요.
그렇게 되면 로마서 4장이 무너져요.
당연한 게 아니라 은혜입니다. 은혜.

‘아무것도 일하지 않았는데 의로 여기셨다.’
그 의로 여길 요소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지옥 갈 요소들만 가득 찼는데
그걸 의로 여김을 받은 자가 바로 복 받은 자라는 거예요.
근데 이것은 그야말로 우리 말로 표현하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거예요.
우리가 이 뭔가 근거를 잡을 그 라인이 없어요. 라인이.
‘아 다윗이니까 그러한 라인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 라인이 없어요.

‘그러면 목사님, 이 다윗은 창세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그래서? 그러면 사울왕은 안 그랬나요?
‘에이 목사님 우리는 사울왕의 결론을 봤잖아요.’
그러면 당신의 결론을 봤습니까?
이미 다 봤죠. 우리는. 십자가에서 이루었으니까.
그런데 그 이루었다는 걸 믿는 것이 나의 믿음을 보장하는 겁니까?
성경에는 그 믿음이 다 무너지는데.

왜 유대인들이 중요하냐? 라고 하면
그들이 언약을 믿었고, 약속을 믿었고, 그 약속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았어요
그런 믿음을 오늘날 갖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 100% 지옥 가요.
왜냐하면 이건 십자가의 원수이기 때문에 그래요.
‘에이 우리는 저들과 다릅니다.’
보세요. 바리새인 같은 이야기를 하잖아요.

7절에 보면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보다 충격적인 말씀이 없어요. 여러분은 충격적인지 안 충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시편 32편을 한번 보겠습니다. 시편 32편이 왜 어려우냐? 라고 하면
앞서 제가 이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그 사건을 먼저 언급을 했잖아요.
그런데 시편 51편은
 “나단 선지자가 왔을 때”라는 표현을 기록을 해놨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그런데 32편에서는 그 내용이 없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우리아 사건 이후에 32편을 기록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내용 때문에 그래요. 이런 게 인간의 악함이에요.
왜냐하면 자기가 이 내용들을 들여다보고 분석을 해가지고
‘아 이런 사건이 있었으니까 이런 고백을 했을 거라’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주님이 인간의 그 수를 모르겠습니까? 그럴 것 같으면 여기에 아예
‘나단 선지자가 찾아왔을 때, 시편 51편 그 찬양을 한 이후에 썼다.’ 이렇게 기록하면 안 돼요?
하나님의 말씀은요 우리가 못 따라잡아요.
다윗이 선지자죠. 선지자라면 예언자잖아요. 그럼 예언했다라고 하면 끝날 문제잖아요.
그러니까 이 본문이 32편이 그 사건 ‘전’이라 해도 되고 ‘후’라고 해도 돼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후’라고 하는 순간 ‘전’이라는 입장에서 공격을 해버려요.
왜냐하면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말씀이에요.
정답을 이야기하는 말씀이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은 살아 있잖아요.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 우리를 찔러 쪼개버립니다.
십자가 앞에 세워버려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시편을 해석을 하면서
‘이게 나단 선지자가 찾아온 이후일 거라’ 그게 더 설득력이 있거든요. 논리가.

그런데 이것이 그 전이라면 아주 이 말씀이 오묘한 말씀이 돼요.
한번 봅시다. 1절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려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자 이게 만일에 나단 선지자가 오기 전이라면 사울은 미워하고 다윗은 사랑했잖아요.
그러면 다윗은 자기를 어떤 자로 봅니까?
“불법을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로 보는 거예요.
그렇게 보는 걸까요? 그렇게 볼 수밖에 없죠. 만일에 그 전이라면.

그러면 어떻게 이 불법을,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를 이렇게 가리움을 받게 되었는가? 2절에.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이렇게 가는 거예요.
근데 앞뒤가 맞아요, 안 맞아요? 지금.
마음에 간사가 없다면 어떤 의미일까요?
불법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도 될 수 있고,
있는데 그 불법에 대해서 자기가 죄를 다 토설 했다라는 말도 되는 거예요.
논리가 재밌죠.

불법을 가리움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 죄의 가리움을 받았는가?
그걸 이제 거꾸로 역추적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럴 때 마음에 간사가 없고
그다음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그런 자로 자기가 바뀌었다라는 거예요. 거기 보면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 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죄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다라는 거예요. 그다음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주님의 심판의 손이 계속해서 누르니까 이게 죽을 지경인데 그다음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앞부분에 1절에서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라고 했죠. 이게 우선입니까? 안 그러면
“내가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고 주께 악을 구했더니 주께서 악을 사했다”라는 게 먼저입니까?
어느 게 우선입니까?

지금 로마서 4장에서는 이 1절을 갖고 왔거든요.
뭐가 우선이라고 이야기합니까?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이걸 아예 먼저 놓아버리죠.
이렇게 놓아버리면 뒤에 나오는
“내가 내 죄를 자복하고 주께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다 아뢰니까 사해졌다”라는 것이,
요 사해진 요 내용, 요 요소 자체가 어디에 들어갑니까?
나의 행위에 들어가요? 안 그러면 주님의 은혜에 들어갑니까?
은혜에 들어가는 거예요. 지금.

만일에 이것이 다윗이 나단 선지자가 오기 전, 이 사건이 터지기 전의 이야기라면
다윗은 오해를 해도 이만저만 오해한 게 아닌 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도 모르면서 이야기를 했습니까?
당연하죠. 다윗은 선지자이기 때문에.

만일에 후가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비로소 죄를 하나님 앞에 다 아뢰고 기도할 때 용서해 주시는 이 일은 어디에 속한 일이에요?
허물을 사함을 얻는 그 일에 포함이 돼버려요.
내가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내 죄를 사하여서 허물의 사함을 얻고 죄 용서함을 받는
그러한 논리가 어떤 논리였습니까? 이게 제사법이잖아요. 제사법.

제사법은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니가 죄를 지었는데 죄를 깨닫거든 제물을 갖고 성소에 가서 제사를 드리면 용서한다’ 이 말씀을
하셨거든요. 여기에서 순서가 뭐예요?
항상 죄를 짓고, 그다음 내가 깨닫고, 내가 가면 용서하는 순서잖아요.
그런데 다윗 언약으로 와버리면 이 시스템이 다 깨져버리죠.
원래 이미 이 모세 언약 안에도 이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논리는 이런 거잖아요.
‘회개하라 회개하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논리거든요.
맞죠?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을 하시잖아요.
그런데 여러분이 이걸 아셔야 돼요.
예수님이 회개하라 해서, 회개해서 구원 얻은 인간 아무도 없어요.
세례 요한도 회개하라 해서 회개해서 구원 얻은 인간도 없지만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 해가지고 회개해서 구원 얻은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러냐? 라고 하면
회개가 구원 얻는 요소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만일에 회개가 구원 얻는 요소에 들어가면 무엇을 삭제하는 거예요?
어린 양의 피 공로에 대해서 한 발자국 들어가는 겁니다.
주님이 100%. 100%. 어제 어떤 과학자가 목사는 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하는데 100%예요.
주님의 피공로가 100%.
거기에 0.001%가 개입되는 게 회개라는 거예요. 회개.
회개해서 천국 갈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걸 사복음서를 통해서 이미 말씀하셨거든요.

그러면 이 내용이 왜 들어있느냐? 라고 하면
이 절차 속으로 주님이 우리를 집어넣었습니다.
집어 넣어버리면, 놀랍게도 회개하는 자가 두 쪽으로 나누어지죠.
오늘날 교회로 치면
‘나 악한 죄인이었는데 예수 믿고 회개해서 (보세요 지금)
내가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말 어떻습니까? 뭘 집어넣었어요? 십자가에?
자기의 회개를 집어넣은 거예요.
자기의 변화를 집어넣은 거예요.

지금 ‘일한 것이 없이 의롭게 되었다’ 했거든요.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게 되었고
불법을 사함을 받고 죄의 가리우심을 받은 자가 복이라고 하면 그가 무얼 내세워야 됩니까?
어린 양의 피 공로를 내세워야 되는데 자기의 회개를 내세운다는 거예요.

지금 시편에 이런 내용이 나오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말씀을 볼 때 회개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성도들도 분명히 회개를 합니다. 참된 성도들도 회개를 해요.
회개를 하는데 한쪽은 이 회개 자체가 피공로를 자랑하는 회개지만
다른 한쪽은 ‘내가 회개했다’라는, 자기의 행위를 앞장세우는 그 회개를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요소가 어디에 있었는가? 하면
구약의 다윗.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해서
나단 선지자가 찾아올 때 ‘당신이 그로다’라고 하기 전까지 이 다윗은 이 수준에 머물렀던 겁니다.
죄 용서 자체가 어디로 출발합니까?
내가 깨달으면, 내가 회개하고, 제물을 드리면 죄 용서한다는 이 방식을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그러면 이 이야기를 로마서에서 왜 갖고 옵니까? 왜?
이미 우리는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았는데.
구원받았으니까, 이미 용서받았으니까
우리는 십자가의 그 사랑의 깊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면
다윗이 체험했던 그 체험을 다 해야 돼요.
그걸 달리 표현하면 말씀 속에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이미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았다’라고 하는 이런 자들은
이런 말씀들을 어떻게 볼까요?
관람을 하죠. 관람을. 관람을 하는 겁니다. ‘아 이렇게 되었구나.’

그런데 이 사도 바울이 시편 32편을 갖고 와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쏟아붓습니다. 구약 성경을 쏟아붓는 거예요.
‘너희들이, 로마에 있는 너희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니?’라고 물으면
‘어떻게’가 없어요. ‘어떻게’가 없어요.

그러면 앞부분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의로움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아들을 화목 제물로 삼으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신 그 내용을 이야기해야 되는 거예요.
여기에는 나를 위한 구원 자체가 없는 겁니다. 나를 위한 구원 자체가 없어요.
내가 천국 간다가 성경에는 없습니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지 않습니까?
거기에 ‘너’는 나와 우리 집이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뭐가 깨져 버립니까? 예수님이 스스로 모순된 말씀을 하셨죠.
내가 온 것은 검을 주러 왔다 하죠.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그 아들과 딸과 부모가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 말씀은 십자가를 증거하는 말씀이지 한 가정을 구원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에요.

왜 그렇게 말씀이 주어졌냐? 하면 우리의 악마성을 뽑아내기 위함이에요.
성도는 그 말씀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죄인이 되는 겁니다.
지금 문제가 뭔가? 하면요
‘아니 목사님 우리가 회개해서 구원 안 될 것 같으면 회개 왜 합니까?’
이제 이 논리가 나오는 거예요. 지금.

회개해서 구원이 안 되니까 회개 왜 합니까?
기도해서 응답 안 되는데 기도 왜 합니까? 이건 뭐 하자는 거예요?
자기를 말씀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뭘 하려고 합니까?
하나님 행세하려고 하는 것.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6절에 보면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니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로다”
‘회개해서 죄 용서받았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보호한다.’
다윗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논리가.
그런데 이것이 무너지는 지점이 이 암몬과의 전쟁에,
가장 앞장서야 되거든요. 자기 목숨이 잃을 때까지 전쟁을 해야 되는 게 여호와의 전쟁이에요.

그런데 이미 끝났어. 거의 전쟁이 끝났으니까. 이건 요압 장군에게 맡겨도, 그 군사들에게 맡겨도...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언약궤가 그 전쟁 가운데 있잖아요.
그러면 이 전쟁은 이미 끝난 전쟁이라는 거예요.
믿음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궁에 한가로이, 낮잠을 자다가 일어났다 침상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나오는데
낮잠을 잤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다가 일어나서 이 우리아의 아내를 보고
이제 죄가 작동하는 그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 모습을 보입니다.

시편 32편 8절.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이 말씀이 두 가지 의미가 되거든요.
하나의 의미는 ‘우리가 죄에 짓눌릴 때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하면 이 용서하신, 용서받은 이 모습은
허물을 사함을 받고 죄를 가리움을 받은 그 복 속에 들어간다’라고 가르치는 게 뭔가? 하면
다윗이 우리아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사고 방식이에요.
마치 성령을 받기 전의 사고 방식이 그러한 사고 방식의 논리를 갖고 있거든요.
회개하면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 말은 맞는데

그런데 지금 이 말씀이 로마서 4장으로 와버리면 뭘 가르치겠다는 겁니까?
‘회개해도 용서 못 받는다’는 얘기예요.
회개해도 용서 못 받아요.
만일에 회개해서 용서받을 것 같으면 자랑할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나 회개했어.’

우리가, 모든 인간이 죄짐에 눌리잖아요.
그 중세 때, 근세 때는 니이체가 오죽하면 이 기독교를 완전히 싸잡아 공격했겠어요?
법이라는 조항들을 몰아넣어 가지고 사람들을 코너로 몰았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쥐어짜잖아요. ‘회개했습니다. 회개합니다.’
그러면서 정말 자기 자신의 삶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말씀에 어긋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회개해서 용서받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이 뭔가? 하면
그 행위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한 걸?

정반대죠. 성도는 주님의 은혜가 덮쳐지니까
그 세계 속으로 몰아넣어서 이러한 것은 절대로 주님의 용서를 못 받는다는 겁니다.
못 받고, 내 회개가 죄 용서되는 게 아니라
주님이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화목 제물로 삼으신 그분을 통하여서 죄가 용서됨을
그러한 이 과정을 통해서 증거하는 증인으로 삼는 거예요.
그러니 그 기도가, 회개 기도가 자기를 부정하는 기도가 되는 거예요.

전도도 마찬가지죠.
전도도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하는 겁니다’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주님이 할 때까지 기다리죠. ‘시키면 가겠습니다.’
돈 벌 때는 안 시켜도 알아서 잘 하시더라고요. 제가 제일 궁금한 게 그거예요.
복음 전해보면 ‘주님이 시키면 하겠다’하는데 돈은 안 시켜도 잘하던데요.
그러면 또 ‘그건 주님이 시켰습니다.’
그럼 다른 건 안 시킵니까?
‘그건 안 시키던데’ 그러면 제가 인정하겠어요.
책망받고 완전히 십자가 앞에서 죄인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겁니다.

지금 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거든요.
그럼 증인이 되려면 내가 될 수 없어요.
“증인이 되리라” 했잖아요. 되리라 하셨기 때문에
지금 이 로마서의 이 편지를 받는 그 상황 속으로 그들을 몰아넣었어요.
우리는 ‘그 상황이 오기 전에 알아서 기자’하는데 그게 안 돼요. 인간은.

그 상황 속으로 몰아넣어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으로 그들을 초대한 겁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기 전에는 자기가 한 수 가르치겠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나단 선지자를 만난 이후에는 이 32장이 완전히 전복되어집니다. 뒤집혀집니다.
뭘 가르쳐요? 가르칠 게 없다라는 겁니다.
그 내용을 로마서 4장에서 이야기를 하는 거죠.

이제 그 사무엘하 한번 봅시다. 12장입니다.
불법의 종류를 제가 아까 이야기를 했잖아요. ‘하나님을 살해한 죄다’
아니 그게 어디에 나옵니까? 지금 다윗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다윗을 통해서.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이 바침이 어떤 내용으로 들어가게 되는가? 하면
자기가 살해한 자가, 그 살해당한 분이 자기를 살리는 내용으로 합류당하는 내용이 돼요.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으니까 정말 그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구원했다라고 생각을 하는데
예수님이나 지금 사도바울은 전혀 다르게 해석을 하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움으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다윗은 이 내용을 명확하게 알아요.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그러니까 다윗의 입에서 바로 나오는 게 뭔가? 하면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배나 갚아주어야 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드시 무엇을 행해야 됩니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대접해야 되죠.
왜냐하면 자기들도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다라는 거예요.
이 나그네를 계속해서 현장화시키는 이유가 뭐냐? 라고 하면
어린 양의 피 때문에 그래요.
“대접하라”는 것은
그 어린 양의 피를 계속해서 현재형으로 진행시키겠다는 게 하나님의 조치인 거예요.
그걸 다윗 왕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렇게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면서 이렇게 해야 되는데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해서 가난한 자의 양을 뺏어서 그를 대접한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을 위반한 행위가 되죠.
이 고수 아닙니까? 고수.
우리 같잖아요. 우리. 돌려막기하는 거예요. 돌려막기.
인간이 하는 짓이 다 이것밖에 안 돼요.
다윗은 자기가 그러한 사람임을 모르죠.
그러니 율법을 갖고 와서 이 사람을 율법대로 처단해야 된다라는 겁니다.

시편 32편을 이전에 기록했다라고 하면, 알아도 소용없습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그 앎 자체가 다윗을 이렇게 만든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는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확신하고 있잖아요.
‘아 그 정도 되면 네 죄를 네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인간 스스로가 네 죄를 네가 몰라요.

재밌는 게 이런 거거든요.
율법을 받게 되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자기 죄를 깨닫게 되면 속죄 제물을 드리라 할 때 사람들은 그 말을 어떻게 듣습니까?
내가 짓다가 보면 살다 보면 죄를 깨닫잖아요. 양심의 가책이 있잖아요. 여기 또 양심이 나오잖아요.

그 양심은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양심은 어디로 향합니까? 양심은?
제가 오후 설교 때 얘기했죠. 어떤 얘기했습니까?
양심은 내부에 있다 했죠. 율법은 외부에 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양심이 어디에 있어요? 내부에 있죠.
로마서에서는 그 얘기를 안 하는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렇게 돼 있어요.

양심은 내부에서 작동을 해요.
이방인들은 외부에 아무 요소들이 없어요. 아무 요소들이 없는데
내부에서 양심이 작동을 하니까 그것이 최종적으로 어디를 향합니까?
가인 이야기를 했잖아요. 양심이 작동하니까 누구를 살해합니까? 하나님을 살해해버려요.
양심 자체의 최종 지점은 자기가 심판자가 되는 거예요. 자기가.

어제 어떤 과학자 유시민하고 토론하는 걸 박문호 교수라는 아주 똑똑한 분이죠.
자신들이 판단자예요. 심판주가 따로 있는데, 공부를 제대로 하니까 세계 자체가 눈에 뵈는 게 없어요.
자기들이 연구하는 게 다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입 다물고 계속해서 연구를 하자는 거예요.

그 양심 자체가 그렇게 작동을 하는데
율법이라는 요소가 유대인들 가운데서 외부에서 딱 들어오니까 어떻게 작동합니까?
똑같이 작동하는 거예요.
이전에는 법 체계 자체가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니까 어떻게 작동합니까?
그 말씀을 갖고 누구를 살해하죠? 하나님을 살해하는 거예요. 말씀을 갖고.

다윗이 지금 율법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이걸 보게 되면 나름대로 회개는 하고 있는 겁니다. 회개는.
나름대로 회개는 하고 있고 나름대로 죄용서함을 받는 비법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었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것보다 악랄한 게 없죠.
아마 이 정도 악랄하면 우리는 ‘너 지옥!’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런데 요 악랄한 자들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예요.
‘나는 아닌데요.’ 그 사태가 안 벌어져서 그래요.

분명히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고 다윗 왕을 택하여서 많은 것을 주셨잖아요.
뿐만아니라 다윗이 율법을 잘 알고 있어요.
알고 있는데 어떤 일을 벌입니까?
여호와 전쟁에 앞장선 헷사람 우리아거든요.
헷사람은요 가나안 족속으로서 진멸 당해야 될 족속이에요.
진멸당해야 될 족속인데 기름부음 받았다라는 다윗이 누구 짓을 하는 거예요?
이 교체 작업이 일어나는 겁니다.

헷사람 우리아의 자리에 누가 들어가요? “다윗 너 들어가!” 그게 마태복음에 나오거든요. 족보에.
그 자리에 누구를 채웁니까? 우리아를 채우는데 우리아의 이름은 삭제해버리죠.
다윗은 집어넣어야 되고요.

지금 우리는 이 말씀이 그냥 죽였다, 이런 내용이지만
앞부분을 전체를 깔고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여호와의 전쟁에 앞장선 여호와의 장군을, 여호와께서 세우신 장군을 죽인 자가
이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처분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처분은 사울 왕이 있잖아요. 선례가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항상 선례, 선례가 중요하잖아요. 재판을 할 때.
이전에 재판 판례가 어땠는지 한번 살펴보고.
그러면 그 법칙대로 하면 다윗을 버려야 되죠.
그런데 안 버렸다는 사실이에요.

다윗은 착각을 한 거예요.
사울 왕보다 자기가 더 나을 거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이 사건 속으로 몰려가니까 사울 왕보다 나은 점이 하나도 없어요.
하나도 없고 로마서에 오면 뭘 얘기합니까?
자랑할 건 없고 하나님이 자기 의를 내세우기 위해서
그 의를 자랑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나에게 덮어씌워줬네요.
십자가의 사랑을 부어주셨네요. 지금 그걸 알게 된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비교를 하는 거예요. 비교.
우리는 안 그렇습니까?
피로 구원받았다고 해놓고 실제는 어때요? 육이 있는 한.
다 비교해요. 다 비교.

안 비교하는 사람 있습니까? 집이 좀 불행하면 행복해 보이는 집.
들어가서 살아보세요. 다 똑같아요.
여자들의 로망이 ‘우리 남편이 저 사람 같으면 좋겠다.’
살아보세요. 못 삽니다. 죗덩어리인데 그게 뭐 같이 살 만하겠어요?
남의 떡이 더 커 보일 뿐이에요. 인간들은.
그 욕망 때문에 그래요. 욕망.

10절에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이제 저주가 쏟아부어집니다. 이런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용서했으면 저주가 없어야 되잖아요. 그런 생각 안 합니까? 신앙생활 할 때?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았으면 더 이상 저주가 없는 인생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면
저주가 쏟아지는 인생을 살아야 돼요. 그게 축복이에요.

왜냐하면 그래야만 “허물의 사함을 얻었다”는 그것을 뽐낼 수 있는 사태가 벌어져요.
다윗은 이러한 사태 속으로 내몰리죠.
내몰리면서 하나님이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보는 겁니다.
이 모양 이 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그 약속,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다윗의 등불을 계속해서 주시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앞뒤가 바뀌는 거죠.
‘다윗을 위한 다윗의 등불’이 아니라 ‘다윗의 등불을 위한 다윗 혈통’이 되는 거예요.
내일 설교하겠지만 이게 모세의 후계자가 여호수아가 되거든요.
여호수아가 되는데 모세가 계속해서 죽은 자로서
죽은 자의 이름이 약속의 땅을 점령할 때까지 장악하고 있어요.
그걸 모세의 언약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11절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지금 뒤에 보면 죄 용서했다라고 하거든요.
‘죄 용서했으면 더 이상 이런 일들이 없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우리는 자꾸 이야기를 하고 싶잖아요.

지금 이 사태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뭘 알겠습니까?
죄의 깊이를 알고 용서하신 은혜를 자랑하는 그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는 거예요.
‘아니 복음을 알았는데 죽을 때까지 내 인생은 꼬이더라.’ 복 받은 겁니다.
다윗 한번 보세요. 죽을 때까지 꼬였잖아요. 그죠? 솔로몬에게 이 후계자 하나 있는데 이....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에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왜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왜 백주 하겠어요? 너가 목적이 아니라는 거예요.
다윗을 완전히 반 죽여가지고 ‘너 벌받아!’ 이거에 목적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돋보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본래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그렇게 두 눈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목격하면서도
‘여러분 보세요. 다윗을 보세요. 이분이 바로, 이 사람이 바로 복 받은 자라’는 거예요.
믿으시겠습니까? 그걸?
‘저 봐 저 저 봐. 하나님께 죄를 지었으니까 벌 받지 않느냐?’ 이렇게 나올 거 아닙니까? 사람들이.

주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서 십자가 지잖아요.
십자가 지니까 사람들이 조롱을 하거든요. 그 조롱을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는 용서받았으면 더 이상 우리의 인생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편 73편에 나오잖아요.
그 악한 자가 죽을 때까지도 기력이 쇠하지 않고 눈이 말똥말똥하게 재산은 자동적으로 불려지고
100억에서 천억이 되고 얼마나 그 실족할 뻔했냐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잖아요. 미리.
그게 저주인 줄 모르잖아요.

그런데 다윗을 한번 보세요. 그게 저주입니까? 축복입니까?
지금 이런 백주 대낮에,
‘너는 깜깜한 데서 몰래 했지만 나는 백주 대낮에 네 처들로 더불어 동침하리라.’
이게 축복입니까, 저주입니까? 참 제가 말씀을 드리면서도 참...
허물을 가리움을 받은 자의 축복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두고 ‘우리는 다윗처럼 행하면 안 됩니다. 다윗처럼 행하면 이런 저주를 받습니다.’
뭘? 예수님이 저주 다 받으셨고 완료했는데.
우리는 그 완료하신 것을 갖고
그 저주의 내용이 무엇인지?
용서한 사랑이 무엇인지?
그걸 증거하는 인생으로 다시 이 역사를 돌려가지고 이미 완료성 속에서 살려지는,
그걸 증인이라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기에는 내가 주도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조금 더 봅시다. 13절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순식간이잖아요.
32편에는 짓눌리고, 짓눌리고. 이런 게 없다니까요.
그렇게 해서 죄를 회개했다는 것은 자기 관리예요.

그 기도원에 가서 기도한다든가 우리가 요즘도 부흥회 하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어릴 때는 겨울에 한 번, 여름에 한 번 부흥회 하잖아요. 그럼 부흥강사가 와서 쇼를 하잖아요.
쇼를 하면 꼭 하는 게 뭐예요? 회개하는 시간. 회개하는 것.
그런 교회를 안 다녀보신 분은 그런 경험도 없겠지만 여러분 회개 해봤죠?
회개해 보니까 어느 정도 나옵디까? 어떤 사람은요 한 40분 하는 것 같아요.
1시간 회개하는 것 같아요. 저는 회개하니까 1분도 안 되는 것 같던데,
그 기억력이 모자라는 거거든요.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요 회개할 게 많아요. 그런 거 아닌가요?
기억력이 나쁜 사람은 회개할 게 없어요.

그 어떤 사람이 ‘동물은 죽으면 뼈를 남기고, 식물은 죽으면 재를 남기고,
인간은 죽으면 기억을 남긴다’ 하는데 그 기억의 집단이 무의식이 되고
그 기억이 무엇을 담고 있느냐?라고 하면 악마의 본성을 담고 있어요.
그게 양심이거든요.

그 기억이 모이면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기억을 모아놓으면 뭔가 대단한 업적이 있을 것 같죠?
그 기억이 무한대로 가거든요. 아까 그 과학자 그런 이야기입니다. 논의를, 계속해서 연구하는 거예요.
그래서 디모데 전서에서 끝없는 신화와 족보를 버려라 이야기하거든요.
끝없어요. 인간이.
이미 십자가에서 완료한 답을 제공해 줬는데
끝없는 걸 갖고 가는 거예요. 그 갈 때까지 가면 뭐밖에 없습니까? 자기가 먼저 죽죠.
그러면 그들이 연구하는 것은 뭐만 남기는가? 하면
연구하는 인간은 ‘죽었더라’만 남기고, 그 기억만 남기고

그 기억들은 또 거꾸로 작동을 하잖아요.
‘이 기억들이 너를 살릴 거야.’ 또 미끼질을 하면 그 기억을 붙들고 또 그 기억 속으로 다시 들어가죠.
그거 연구잖아요. 연구.
그거 들어가면 또 어떻게 합니까? 자기는 죽고, 아인쉬타인은 죽고...
‘죽고’만 남기거든요. 그러면 그 남긴 그 기억들을 갖고
‘우리가 얼마나 뛰어나고 위대한가?’ 그래요.

어제 얼핏 들으니까 이런 이야기하거든요. ‘인간의 자아가 붕괴된다’라는 이야기를 하거든요.
자아가 붕괴된다는 이야기는 뭔가?
아바타가 생기면 아바타 속에서 내가 갖고 있는 사고와 의식들이 작동을 하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냐? 그건 저거들이 하는 말이고요.

성경에서는 반드시 육과 연관되어 있어요. 육과.
육이 없으면요 ‘나’라는,
로마서에 말하는 ‘나’와 ‘또 다른 나’가 없습니다. 명확해졌죠? 그들에게 속지 말라 이야기입니다.
육이 없는 복음 전파는 복음이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 부인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복음은 반드시 이렇습니다.
사망은 내 속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가운데 역사하는 방식이 복음 전파 방식이에요.
이거 외에는 없습니다. 인터넷 시대니까 뭔가 될 거라고 하죠.
근데 복음 듣는다고 한번 만나보세요. 만나보면 자기 이야기하기 바빠요. 자기 이야기.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였으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셨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
‘아니 훼방할 거리를 얻지 않게 하면 안 됩니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자꾸 해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훼방거리를 얻게도 하는 거예요.
심지어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이런 하나님은 인간에게 없었거든요.

인간이 만든 하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고 완벽한 하나님이잖아요.
조직신학을 배우면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면
‘완전하고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고 못할 것이 없고’ 그것부터 배워요.
근데 그건 십자가 지신 예수님과는 상극이에요. 상극.
왜 그러냐 하면 그 모든 내용을 십자가로 들고 와야 돼요.
들고 와버리면 십자가 속에서 전지전능을 이야기해야 돼요.

십자가 속에서 전지전능을 이야기하면
‘십자가 피 외에는 구원하는 방법을 모르는 분’ 이렇게 나와요. 그게 전지전능한 거예요.
우리가 아는 전지전능은 십자가 외에도 구원할 능력이 있어야 되잖아요.

오죽하면 사람들이 ‘불교에서도 구원이 있고’ 그죠?
‘천도교에서도 구원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왜 하겠습니까?
그게 왜 그런가? 하면 저거들이 생각하는 우상 하나님을 떠올리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를 진짜 제대로 알아야 돼요.
제대로 알아야 그 여호와를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살해하는 그 장면의 의미를 알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방금 이야기하는 그러한 하나님 개념은 다 우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자 이게 진짜 모순되는 이야기잖아요.
죄를 용서했다라고 했는데 용서를 했지만
네가 하나님을 훼방했으니까,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했으니까
니가 낳은 아이, 지금 우리아의 아내를 범했을 때 우리아를 살해한 그 과정에 엮인 그 아이는
죽을 것이라 했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믿음 좋으니까.
아 죽으리라 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죽죠. 그럼 기도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지금.
기도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죽는다 했으니까 내가 기도한들 듣습니까, 안 듣습니까? 안 듣죠.
그러니까 기도 안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악한 거예요.

기도 안 한다고 그 마음이 사라집니까?
죽는다고 할 때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는 마음이 없나요? 제 이야기는.
독일 유학 갔는데 기도 안 돼요? 안전하게 해달라고. 집사님 기도 안 됩니까?
‘몰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그 속에는 무한한 기도의 내용이 깔려 있죠. 무사히 공부하고 무사히 과정 마치고 무사히 돌아오라.
성경이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지금.

이 신하들은 뭘 모르는가? 하면
‘아니 죽으리라 했는데 왜 기도하느냐?’ 이거예요.
나중에 하는 말이 죽고 난 뒤에는 입 싹 닦고 세면하고 목욕하고 음식을 너무 잘 먹는 거예요.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왜 이해를 못하는가? 하면
언약의 세계라는 것은 나를 위한 세계가 아니라 말씀을 위한 세계.
‘율법 밖에 한 의’
화목 제물 되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완료성을 증거하기 위한 그 세계임을
이 신하들은 모르는 겁니다.
모르니까 아니 뭐 죽는다 했으면 ‘믿습니다’ 하고 그냥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인간의 육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없고요.
다윗은 앞장서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을 때 그는 기도를 하죠.
뭘 기도합니까? ‘혹시 살려줄지 모르잖아’라고 기도를 해요.
이게 바로 인간의 본모습이에요.

여러분은 베드로를 보면서
예수님이 십자가 진다고 할 때 ‘십자가 지면 안 됩니다’라고 할 때
‘너는 사단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할 때 우리는 무슨 생각하겠어요?
‘나는 베드로처럼 안 해야지’

이게 악마적 생각이에요. 십자가 증인이 안 되려고 하고
‘안 해야지’라는 마음은 좋아요.
문제가 뭔가? 하면 왜 그런 마음을 품느냐?는 거예요.
그 모든 것이 자기 구원과 관련돼 있어요.
‘주님, 이게 말씀이라면 이게 말씀이라면 이 사건 속으로 저를 인도하셔서
십자가만 증거하는 주의 그 의를 덮어쓴, 주님의 의를 자랑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 기도는 왜 못하느냐는 거예요.

다윗이 기도를 하거든요. 한번 봅시다. 어느 정도 열심히 기도하는가? 하면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곁에 이르러 다윗을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저희로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이 늙은 자들은
‘하나님이 죽인다 했으면 죽는다. 그거 믿고 그냥 할 필요 없는데 왜 쓸데없는 짓을 합니까?’
이 얘기예요. 나는 이만큼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겁니다.
죄밖에 안 나오는 이야기예요. 다윗은.

18절 “이레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이레만, 며칠이에요? 7일. 7일 동안 금식.
우리도 아마 자식이 죽는다 그러면 7일이 아니라 14일은 하겠죠.

“신복들이 아이의 죽은 것을 왕에게 고하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의 죽은 것을 고할 수 있으랴 왕이 훼상하시리로다 함이라”
자기들에게 이제 진노가 임할 것이다.
다윗의 마음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겁니다.
주님의 심판 속에 다윗은 그대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 내용이 나중에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 그 세계 속에 들어가서 다 당하는 겁니다.
다 당하는 거.
우리는 주님이 이렇게 될 거라 하니까 팔짱 끼고 다윗이 관람할 거라 생각하죠.

지금 사도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다윗의 믿음을 갖고 왔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자랑할 것이 없는 그 율법 밖에 한 의를 증거하는,
불법의 사하심을 받은 그 복 받은 자로서 그걸로 끝이 아니고

‘복 받은 자’라는 것은 어떠한 모습인가?를 지금 이미 구약에 다 기록돼 있잖아요.
그 얘기를 안 한다고 사람들은 자꾸 요것만 쏙 빼가지고,
‘불법을 가리우심을 받았고 죄사함을 받은 자가 이렇게 복 받았다.’
그러니 교회가 사기를 치는 거잖아요.
복 받았으니까 어디로 갑니까?
너는 더이상 자기 아들이 죽는다 하더라도 기도할 필요도 없고
저주 받는다 할 때 거기에 너는 관람만 하는,
다윗이 관람해요? 그 속에 완전히 빠져들어가서 범벅이 되잖아요.

“다윗이 그 신복들의 서로 수근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깨닫고 그 신복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까”
이 앞뒤 문맥이 안 맞잖아요.
죽으면 오히려 더 슬퍼서 금식을 해야 되는데
죽으니까 오히려 신나게, 말씀대로 되었다라는 겁니다.
그 말씀에서 자기는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 자신은 이 말씀을 위해서 만들어진 자가 돼요.

이렇게 되면 로마서 4장으로 다시 와서 이제 마지막으로 보겠습니다.
6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지금 이 복, 이 복이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 복을 누가 받았는가? 하면 성도들이 받았어요.

그런데 그 성도들이 받은 그 복은 무엇을 담고 있어요?
십자가의 고난을 담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피로 만드신 복을 소개하기 위해서 저희들의 죄를 사하시고
복을 쏟아부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복을 받았기에 받은 복을 마음껏 자랑하며 증거하며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만을 뽐내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복 받은 자로서 받은 복만 쏟아내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