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8-27 09:03
20230827 로마서강해 28강 롬 4:9-13 믿음과 할례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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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08-28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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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7 로마서 강해 28강 믿음과 할례

다 함께 묵상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5장 19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5:19)
“환난날에 진실치 못한 자를 의뢰하는 의뢰는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으니라”

기도하겠습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에 심판의 불바다 가운데
살면서 버려야 될 것이 무 무엇인지를 저희들에게 알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불타 없어질 것을 신뢰하고 믿고 붙드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 피만을 자랑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시편 74편 1절에서 11절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시74:1~11)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옛적부터 얻으시고 구속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의 거하신 시온산도 생각하소서 영구히 파멸된 곳으로 주의 발을 드십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에서 훤화하며 자기 기를 세워 표적을 삼았으니 저희는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이제 저희가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저희의 마음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것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빼사 저희를 멸하소서”

이 시간 서대순 장로님 우리를 대표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예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말씀을 들어도 알지 못합니다.
말씀을 듣고 이해한다 하지만 순간일 뿐입니다.
말씀을 듣고 십자가의 삶을 산다 하나 모든 게 허구입니다.
만물보다 더 부패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주께서 부르신 부름의 십자가의 삶으로 이끄심만을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로마서 4장 9절에서 12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4:9~12)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아멘.

지금 사도바울은 구약을 알고 있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아는 자들이죠. 그 믿음을 아는 자들에게 계속해서
불법의 사하심을 받고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그 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요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씀하는 게 아니에요.
모든 말씀은 성령 받은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로마서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전달되어서 서로 회람하면서
회당이라는 그러한 곳에서 읽혀지게 되면 아마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의 말이 옳다, 그르다. 그렇지 않을까요?
나름대로 다 한 칼 하거든요.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유대교를 거쳐서 복음으로 들어온 자들이에요.
그러면 성경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과 똑같은 거예요.
여러분들이 여기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다른 복음’을 들었고
그걸 유대교로 표현하면 자기들이 ‘다른 복음’을 들었거든요.

말씀이라는 것은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말씀을 우리가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이 살아있다’는 말씀이 사람들은 그것을 우습게 여겨요.
살아있는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다룹니까? 인간의 눈에는 인간이 다루는 것 같잖아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는데 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이야기합니다. 상상이 갑니까?
제가 설교를 했는데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 말씀으로 받는다’ 이게 가능한 일이에요?
관람자의 입장에서는 ‘뭐 그럴 수도 있지.’
모든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무할례자에게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이 축복은, 행복은 누구에게 주시는 겁니까?
할례자에게 주시는 겁니까, 무할례자에게 주시는 겁니까?
성경이 어려운 게 뭔가 하면요 우리가 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니 아브라함이 무할례 때 받았지 않습니까?’ 이 얘기를 하면서 뭘 주장하고 싶은 거예요
‘무할례가 더 좋아.’

인간의 논리는요 항상 옳음을 추구하거든요.
지금 이 “아브라함이 무할례 때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침받았다”는 말은
무할례도 날려버리고 할례도 날려버리는 이야기예요.
앞부분에서 얘기를 해 왔잖아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
심판 아래 있는데, 무할례자라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는 것이
더 우월하다든가 더 괜찮은 조건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나요?

로마서를 사람들이 다 거꾸로 해석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누구 편에 섭니까? 사도바울 편에 서서,
‘나 너 말 알아. 옳은 말만 하라.’
꼭 누구 같아요? 예수님의 12제자.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 말씀하십시오. 듣겠나이다.’ 모르면 질문하고 모르면 연구하고.

이 ‘아브라함의 할례’ 이 얘기를 알아야만
뒤에 나오는 “믿음으로 된 의를 인쳤다”라는 의미를 압니다.
미리 이야기를 하고 할례로 들어갑시다.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 할례거든요. ‘할례’가 뭔가? 하면요
이 남자들의 생식기 끝을 자르는 거예요. 오늘날로 말하면 포경 수술인데,
이것을 자르는 의미가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6장에서 영원한 언약으로 세웠습니다.

창세기 16장을 한번 가보겠어요. 17장에 할례 언약이 등장하는데 16장과 연결이 되어 있죠.
시간은 조금 더 흘렀습니다. 이스마엘을 낳을 때 아브라함이 86세였는데,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때 지난번에 우리도 살펴봤지만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이렇게 말씀을 하셨거든요.
“완전하라”라는 말씀을 흔히 목사들은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제대로 믿으란 말이야. 제대로 신앙생활 하란 말이야.’ 말은 틀린 게 없어요.
말은 맞아요. ‘제대로 믿는 게 뭔가?’를 엉터리로 알려주는 겁니다.

이 “완전하라”는 그 의미가 영원한 할례 언약을 통해서 드러나요.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고귀한 아버지’에서 ‘열국의 아비’로 이름을 바꾸어줍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분명히 하시죠?
“너로 말미암아 심히 번성케 하리라”

아브라함의 생각 속에는 이 이스마엘을 통하여서 이 약속이 이루어질 줄로 확신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약속을 믿었어요. 맞죠? 약속은 보이지 않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거잖아요. 그 보이지 않는 걸 믿었을 때
그 믿음은 반드시 보이는 것으로 드러나야 된다라는 거예요.
히브리서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눈에 보이는 이 이스마엘이야말로 약속의 자손일 거고,
이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는 그 약속을 믿는 겁니다.
이 자손이 많아지지 않으면 무엇도 필요 없습니까?
땅도 필요 없고 복도 필요 없는 겁니다.
‘자식이 한 명인데 복 받았다’
누가 그렇게 생각을 하겠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에게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내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영원한 언약을 삼고”
영원한 언약을 세우고, 그것을 영원한 언약으로 삼은 그 자체가 무엇을 확정하는 내용이냐? 하면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진다. 너로 말미암아 번성케 할 것이다. 이 땅을 줄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 영원한 언약이 뭐냐? 라고 하면 할례 언약입니다. 17장 9절에 보면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너는 내 앞에 완전하라” 하면
언약을 세웠으니까 ‘언약을 반드시 지키라’로 해석을 하겠죠?
‘그 언약을 지킬 때에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뒤에 보면 조금 더 볼게요.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언약의 그 기호.
그걸 아예 몸에 새겨버립니다.
이것은 영원한 언약이 세워졌다라는 의미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라는 그것을
증거로 할례를 하라는 얘기죠.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영원한 언약을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우셨잖아요.
그러면 약속이 이루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여러분들이 아브라함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약속은 반드시 할례 언약을 지켜야만 이루어진다’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요나단이 그러했고 다윗이 그러했잖아요.
블레셋과 싸울 때 저쪽 나라를 뭘로 봅니까? 할례받지 못한 족속으로 보잖아요.
자신들은 할례받은 민족으로 보잖아요.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 까불어대니까 이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이라고 확정하면서
할례받지 못한 자들과 전쟁을 해서 승리하잖아요.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다윗을 보더라도, 요나단을 보더라도
이 영원한 할례의 언약을 지켜야 돼요? 말아야 돼요?
“안 지키면 백성 중에서 끊어버리겠다”라고 하잖아요.
“할례의 언약”을 안 지킬 인간이 있겠습니까?

‘만일에 할례를 안 지키면,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버리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씀을 지금 로마서에서 이야기를 하잖아요. 또 붕 뜹니다. 이 선지서를 지나와야 되는데...

말씀이 어려운 이유가요. 우리의 죄악이 그만큼 촘촘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면 ‘간단하게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간단하게.
본인이 간단하지 않아요. 본인이.
복음은 진짜 간단하거든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복음이라는 것은 우리 구원을 위한 복음이 아니에요.
간단하지만 그 십자가의 사랑은 찬송가에도 나오듯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못 쓰요.’
‘하나님 구라를 쳐도 그만큼 칩니까?’
그건 성령을 못 받아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요한복음에도 그렇게 나오잖아요.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끊어버린다 했거든요.
그러면 이 사상을 누가 담고 있는가? 하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십자가의 은혜를 안다고 하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담고 있습니다.
이것을 멸시할 수 있나요? 무시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영원한 할례’라고 했는데 제가 궁금한 게 그런 거예요.
이 하나님의 교회, 이런 사람들의 문제라기보다 웃기는 게, 왜 ‘할례 언약’은 이야기 안 합니까?
이제 조금 있으면 그것까지도 끌고 올 거예요.
왜냐하면 계속해서 추가를 해야 돼요. 그래야 밑에 있는 민중들이 무식하게 계속 따라오거든요.

왜 할례 언약 이야기하지 않을까요? 하나님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 앞에 한번 서 보세요. 누가 대다수입니까? 예?
한 번 들어가는 사람들, 주일 그들은 안식일날 모이잖아요.
시간 날 때 노시지 말고 그런 데서 한번 구경해 보세요.
여자들이 대다수인데 할례 언약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유월절은 내가 지킬 수 있잖아요. 여자들도.
골라 먹어요. 골라 먹어.
그러면 또 이제 ‘어머니 하나님’에서 또 누구로 바뀔까요? ‘조상, 할아버지 하나님’으로 또 바뀝니다.
혹시 그런 사람이 오면 이런 이야기하세요. ‘손자 하나님 들어보셨습니까?’ 이렇게.

‘영원한 할례 언약’이라고 했거든요.
이 ‘할례 언약을 지켜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이 싸움이 갈라디아서에서 나타나잖아요.
지금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이 언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는가?를 이야기를 하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인친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야~ 이거 ‘인쳤다’라는 이 단어가 우리는 어떤 의미로 들리나요? ‘인쳤다’라는 것은.
도장 쾅 찍는다는 의미로 들리잖아요. 대부분 그렇게 해석을 하죠.
그러면 도장을 쾅 찍었으면, 할례받은 자들은 다 구원받아야 되잖아요.
이 목사들이 자기 모순에 빠진 거예요.

인쳤으면 그다음.
믿음을 갖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갖고 있는 자들이
할례 언약을 행했으면 심판받아야 됩니까? 안 받아야 됩니까? 안 받아야 돼요.
그중에 대표자가 누굽니까? 이스마엘이에요.

이삭보다 먼저 할례를 받은 자가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도 뭐예요?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거잖아요. 아닌가요?
한번 답변해 보세요. 설교 시간에 답변할 수도 있는데...
‘에이 그거 이스마엘이 받은 할례는 가짜야.’ 그 가짜라는 말씀이 어디 나와요? 성경에.
그래서 이 할례 언약이 어려운 거예요.

로마서까지 들어와버리면 할례 언약이 더 어려워지는 겁니다. 왜 그러냐? 라고 하면
할례받기 전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 했는데,
그 인친 것을 이스마엘에게 갖고 오면, 이스마엘은 해당 사항이 없느냐? 이렇게 하면
그게 바로 인친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굉장히 이제 성경을 막 벗어나는 것 같죠?

할례의 언약을 이렇게 체결을 하게 되는데 17장 15절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이 정도 하면 아브라함이 믿어야 돼요, 안 믿어야 돼요?
지금 믿음을 로마서에는 칭찬을 했잖아요.
나중에 보면 “100세가 되어도 믿음이 더 강해졌다.” 이런 표현을 하거든요. 뒤에 보면.

아마 창세기 뒷부분이 없었다면, 다 그렇게 상상을 할 거예요.
그걸 망상이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17장 17절 보세요.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 하리요 하고”
벌써 이미 자식을 낳을 이 생물학적 조건이 끝났어요.
그건 이 상황에서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나중에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여서 자식을 낳거든요.
그건 또 어떻게 되었느냐?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자기도 마찬가지고, 아내도 마찬가지고,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상황이 아니에요.
그러니 웃었어요. 이 웃음은 어떤 웃음입니까? 비웃음이에요.
여러분이 복음을 들으면 비웃음이 먼저 나와야 돼요.
비웃음이 안 나오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에요. 왜? 왜 비웃습니까?
‘이건 불가능해. 하나님 좀 말씀을 되는 이야기를 하라.’ 이 얘기 아닙니까?
여러분 복음을 전해보면
‘제발 좀 말 되는 이야기를 하라.’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라.’ 그런 얘기를 많이 듣잖아요.
우리도 모르게 복음을 전할 때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잖아요.

근데 복음이 제대로 전파되면 비웃음을 사죠. 왜 비웃습니까? ‘그건 불가능해.’
믿음이라는 것은 이 내용을 담고 있어요. 비웃음을 담고 있어요.
그러면 이걸 소급해서 창세기 15장으로 가게 되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으매 의로 여겼다” 할 때
그 아브라함의 믿음은 무엇을 담고 있어요?
‘하나님 (이런 말은 안 했겠죠) 하나님 웃기고 있네.’ 이런 말은 감히 할 수 없었겠지만,
그 말이나 그 말이나 뭐가 달라요?

이 ‘비웃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볼 때는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런 거예요.
그 믿음의 의미가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는 너~무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열국의 아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고. 그리고 할례 언약도 말씀하시고.
그러면 우리들 같으면
‘아 하나님의 뜻은 할례를 행하면 이 약속을 이루어 주겠네요.’ 이렇게 나와야
좀 할례의 언약을 세운 목표가 도달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할례 언약은 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가? 하면 비웃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이 비웃음이 없으면 할례 언약의 원래 그 의미가 사라지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할례 언약이야.’ 약속을 줬는데
‘아유 하나님, 내 나이 100살이고 내 아내가 90살인데 무슨 아이를 낳습니까?’
사람들이, 나이도 100살도 안 된 사람들이 자꾸 이런 말을 해요.
‘내가 이제 70이고, 50이고 60이고 이제 늙었는데 내가 무슨 복음을 전해?’
꼴랑 90살도 안 됐으면서... (아 죄송합니다만은.)
그 비웃잖아요. 여러분.
비웃는데 주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끌고 갑니까?
복음을 자기가 전합니까?
자기가 전한다면 나이가 젊고 머리 빠릿빠릿 돌아가고 그러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데
아무튼 희한해요. 복음 한 30년 40년 들으면 영감탱이가 되어가지고 자기 경험이 다야. 자기 경험이.
‘해보니까 안 되더라.’ 결국은 자기가 한 거잖아요. 복음을.

아무도 안 듣더라도 선지자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조치한 상황과 현실인데.
‘에이 사람들이 늙은 사람 말을 누가 듣습니까?’
젊은 사람 말도 안 들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해도 안 들어요 여러분. 복음은.
자식도 안 듣는데 남이 듣겠습니까? 원래 자식은 안 들어요. 원수이기 때문에.
말씀을 그렇게 안 믿습니까?

맨날 믿는다고 하지만 믿긴 뭘 믿어요?
맨날 우리는 비웃고만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 한번 보세요. 얼마나 이 총명합니까?
현실적으로 좀 생각을 해야 돼요. 현실적으로.

우리 성도님들 몇 명 안 모이는데 ‘어떻게 이게 유지되느냐?’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불가능한 이야기인데, 또 어떻게 미국에 계신 분이 연보를 하셔가지고...
제가 연락할 길이 없네요. 본인은 저를 아는데 저는 그분을 모르니까.
불가능한 이야기가 복음이에요. 복음.

할례 언약이라고 할 때 이 유대인들이 뭘 뭐로 바꿔치기 하는가? 하면
할례의 언약을 가능한 언약으로 바꿔치기 한 거예요.
로마서식으로 표현하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약속을 이루는 언약으로 바꿔치기 한 겁니다.
그런 논리가 되려면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하면,
아브라함이 “네 믿습니다” 하고 믿어야 돼요.
그 논리가 바로 할례 언약을 엉터리로 해석하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어떻게 생각했어요? 할례 언약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잖아요.
할례 언약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게 할례 언약이에요.
그러면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자를 때, 그 언약을 믿는 자들은 자르면서 뭐를 이야기해야 돼요?
‘잘라도 소용없더라’ 이 얘기가 나와야 되는데

이 육에 속한 자들은, 구약에 속한 인물들은
‘잘랐으니까, 영원한 언약을 세웠으니까, 이제 하나님에게서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것을 더 확정적으로 하는 것이 요나단과 다윗의 전쟁이잖아요.
요나단과 다윗의 전쟁은 할례의 전쟁인데
그 의미는 ‘이 전쟁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전쟁이 아니라’는 이야기예요.

우리는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또 온도가 소리가 올라가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승리할 거라는
그 사고 방식은 어느 때의 사고 방식입니까?
블레셋에 언약궤를 빼앗길 때의 사고 방식이에요. 그 방식은 자동적으로
‘언약궤가 우리와 함께하기 때문에 우리는 적들과 싸우면 승리할 것이다’

제가 금요일날 상번제와 임마누엘 설교를 했죠? 안 듣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거하신다’ 하니까 이스라엘이 신이 나잖아요. 그죠?
제자들도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내가 떠나가면 너희에게 유익이고’ 이것은 슬프지만
‘이제는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이 구조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죠? 기대를 잔뜩 하고 있는데

주님이 동행하니까 어떤 꼴이 납니까?
주님이 살았던 그 생애를 고스란히 반복해요.
주님은 그래도 33세까지 사셨잖아요.
스데반 집사님은 복음 안 지 얼마 안 돼 죽었어요. 33년 정도는 살아줘야 되는데.

‘할례를 지키면, 할례 언약을 지키면 백성에게서 끊어지지 않는다’라는 이 이런 해석법.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분명히 이 할례를 하지 아니하면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 했잖아요.
이걸 그대로 믿는 자들이야말로 할례의 언약을 모르는 자예요.
그러면 손들고 ‘그러면 할례 안 하면 안 됩니까?’ 그것도 잘라버립니다.
그것은 할례 언약 자체가 뭔지를 모르잖아요.

아브라함이 속으로, 대놓고. 하나님 앞에서는 속으로 하나 대놓고 하나 똑같아요.
예수님 앞에서 이 바리새인들이 속으로 중얼중얼거리니까
우리는 ‘너 뭐 중얼거렸어?’ 이렇게 나오지만
예수님은 무슨 말을 했는지 다 이야기를 다 해버려요.
속으로 하나 말로 하나 똑같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믿음 있는 척하지 말라고 했죠.
기도 하지 않는다고 뭘 기도 안 합니까? 속으로 이미 다 하고 있는데.
성경을 읽어도 그걸 몰라요.
망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 이 정도 괜찮은 사람이야. 나 이 정도로 복음을 아니까 기도 제대로 하는 사람이야’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 아브라함이 속으로 비웃으니까 ‘하나님이 모를 거라’
이건요 모를 거라 생각을 해도 자기도 그걸 몰라요. 워낙 순간적이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 딱 닥치니까 비웃는 거예요.
이럴 때 이제 ‘믿음 없음’이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릴 때는 어때요? 믿음 있는 채 하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우발적 사건이거든요.
예상했다면 아브라함이 비웃었을까요? 안 비웃었을까요? 절대로 안 비웃습니다.
그다음 나타나면 뭐라 할까요? ‘예 믿습니다.’ 이래 나오거든요. 맞죠?
한 번 경험을 했으니까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그때는 비웃지 않죠.

그런데 이 상황은 우발적입니다. 그다음 한번 봅시다.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람은 90세니 어찌 생사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솔직하게 얘기를 하죠. 이게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이스마엘이야말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 몸에서 날 자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라에게서 날 자가 너의 약속의 자손이 될 것을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그 정도로 믿었다면,
‘하나님 회개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스마엘로 생각을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니까
제 믿음이 엉터리였네요.’ 그렇게 해야 믿음답지 않습니까? 그죠?

지금 여기 한번 보세요.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믿음이 그런 믿음 아닌가요?
‘아니 목사님 그런 거 우리가 알 필요 뭐 있습니까?’
그게 우리예요.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아브라함처럼 솔직하게 하자.’ 인간은 솔직 안 해집니다.
주님 앞에서는 낱낱이 다 드러나게 돼 있어요.
숨겼다라고 생각했는데, 그 숨긴 것 자체가 주님 앞에서는 다 드러납니다.
놀랍게도 약속 앞에서, 인간이 갖고 있던 탐심들이 끊임없이
이것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그러한 샘물과 같이 솟아나는 거예요.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번역을 너무 잘했어요. 이게 ‘이스마엘이나...’
‘아니 하나님, 하나님 정말로 웃기십니다.’
‘내 나이 90인데 90이 무슨 복음을 전합니까? 말도 어눌하고 기억도 안 나고...’
원래 기억 잘 나서 복음을 전했나요? 자기 챙기기 바빠서 그래요.
복음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런 분들한테 ‘잔소리하라’고 해 보세요. 잔소리 2시간 3시간 합니다.
‘돈 이야기해보라’ 해 보세요. 끝없이 이야기하죠. 돈 이야기하면.
‘자식 자랑 이야기하라’ 하면 끝없이 이야기를 하죠. 뭐 거짓말을 해도 유분수지.
‘목사님 왜 자꾸 늙은 사람만 칩니까?’
늙은 사람? 우리 똑같이 가는데요 뭐.
아브라함과 우리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할례 언약이 지금도 작동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아브라함 언약’에서 어디로 넘어가 버립니까? 이삭으로 넘어가 버려요. 언약이.
‘이삭 언약’으로 넘어갔다는 것은 무엇이 담겨 있다는 거예요?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에 있어서 아브라함이 문제가 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안 믿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아브라함 언약 안에는.

이름도 아예 새겨버려요. ‘은’ 얼마나 좋아요? 말씀은.
근데 조금 들어가면 말씀은 말씀처럼 사라져야 되는 의미인데
아예 새겨 놨어요. 부를 때마다. ‘복음만 전하다가 사라져라.’
누구 아드님 이름이잖아요. 그죠?

‘이삭’
아예 아브라함의 그 불신앙을 인쳐놨어. 이게 ‘인’입니다. 이게 인.
부를 때마다 뭐예요? 하나님 속으로 웃었던 거 기억하면서
‘하나님 이스마엘이나, 이스마엘이나...’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십자가를 자랑한다 하니까 십자가만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십자가 자랑입니까?
또 어떤 사람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니까 죄만 자꾸 이야기를 해요. 죄만.
골라잡아요. 골라잡아.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자기의 의로움을 계속해서 드러내려고 하는 겁니다.
‘할례 언약’에 ‘할’ 자도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이것은 믿음이 뭔지도 몰라요.
믿음=할례 언약이에요.
이제 눈치가 빠른 분들은 할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미 대충 아실 겁니다.

20절에 보면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지라 그가 열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철저하게 이 영원한 언약은 이삭과만 세우십니다.
이스마엘은 중대한 민족이 되지만 철저하게
이 언약 밖의 사람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공격하는 자로 이 이스마엘을 굉장히 잘 살게 해요.
힘도 강력한 힘을 소유하게 하는 겁니다.

분명히 창세기 15장에서 믿었다면,
믿었다면 이 할례의 언약으로 넘어와서는 바뀌어야 되지 않습니까?
‘다메섹 엘리에셀이라’ 했다면 ‘이스마엘이라’ 이렇게 안 해야 되지 않나요?
그러면 삼 세판이라 칩시다. 지금 성경이 여기에서 끝났잖아요.
끝나지 않았다면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나이가 끊어졌다 치더라도 그다음 한 번 더 있으면)
아브라함이 바뀔까요? 안 바뀝니다.

왜냐하면 상황과 형편 자체가
반드시 ‘믿음 없음’을 드러내는, 자기의 의견을 개진할 그 형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은 나중에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할 때
열번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불신하고 배반한 내용으로 드러납니다.
‘두 번 정도 알면 세 번째는 괜찮겠죠.’ 아니에요. 네 번째도 안 돼요.
두 번이 안 됐다는 것은 영원히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할례 언약이에요.

그러면 다시 로마서로 와서 봅시다. 로마서 4장으로 오게 되면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무할례자에게죠. 그러면 그 믿음, 그 믿음을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의로 여기셨습니까? 아니면 할례를 안 받았을 때 의로 여기셨습니까?
안 받았을 때 의로 여겼다라는 그 얘기를 하는 거거든요.

그다음 10절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방금 그 얘기입니다.
언제 의롭게 여기셨느냐? 그 시점이 어디냐? 라고 할 때는 할례받기 전이라는 이야기예요.

그다음 구절을 보겠습니다.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의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이 진짜 한글로 봐도 어려워요.
무할례시의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거잖아요.
그러면 ‘인쳤다’라는 것은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믿음에 대해서 확정하는 증거로서 확 도장을 찍은 거네.’ 그 말은 맞는데
그러면 그 믿음을, 창세기 15장에 있는 믿음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아브라함은 어떤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전혀 믿지 않는 믿음’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 믿음을 갖고 있는데

그 믿음을 로마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속으로 합류를 시켰어요.
제가 ‘바꿔치기했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바꿔치기 해버리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면
‘나는 이제 믿음 있는 자야’가 돼요. ‘있는 자야’ 이렇게 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믿는 나를 증거하는 증인이 돼요.

그 모습은 누구의 모습이냐? 하면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자기의 믿음을 증거하는 자라’ 이렇게 의식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을 볼 때 믿음이 있었잖아요.
그러면 유대인들은 그 아브라함을 볼 때
‘믿음 없는 자로서 진짜 하나님의 약속 속에서 그 약속을 보여주는
가짜 믿음을 제대로 뽐낸 믿음의 조상’ 이렇게 해석을 못 해요. 그렇게 못 보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느냐? 하면
그 아브라함이 행했던 모든 것들, 그 믿음,
그 믿음이야말로 정말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실 조건이라는 거예요.
지금 사도바울이 논쟁이 이거거든요.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 할례 전이냐? 후냐?라고 했을 때
그러면 똑똑한 유대인들은 뭐라고 손들고 질문하는가? 하면 ‘그럼 창세기 12장은요?’
‘갈대아 우르에서 모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그것을 버리고 약속의 땅으로 간 것은 믿음이 아닙니까?’
믿음이에요? 아니에요?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할례를 행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뒤에 율법이 나오기 때문에 이 행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계속. 행위를 이야기하는데
지금 주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해서
할례를 갖고 와서 이 할례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죠.
로마서 6장에서는 세례로 이야기 하지만 이 골로새서입니까? 거기에 가면
‘그리스도의 할례’를 이야기를 하거든요. 주님께서 골로새서 2장으로 가면.
로마서 앞부분에서는 ‘성령의 할례’를 이야기를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아브라함을 볼 때, 다윗을 볼 때, ‘믿음이 있는 자’로 간주를 해요.
그런데 로마서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하면 안 돼요. 있잖아요. 지금.
있는데 없다고 하면 안 돼요.

분명히 아브라함도 믿음이 있고 다윗도 믿음이 있죠.
그런데 그 믿음의 내용을 들여다보니까 꼭 데칼코마니 같잖아요. 누구와? 제자들과.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행을 할 때 예수님을 믿었잖아요.
심지어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리겠다고 합니다. 이게 진심이에요 진심.
왜 진심이냐? 라고 하면
가룟 유다가 자기 스스로 목 맬 정도 되면 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립니다. 인간들은.
그런데 주님은 그걸 막아버렸죠.
마포대교 가서 자기 목숨 버리는 사람이 많잖아요. 예? 가잖아요. 간다니까요. 그게.
그런데 주님이 막았어요. 왜 막았는가? 하면
네 목숨 버려도 (뭐가 안 돼요?)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극단으로 몰고 가는 거예요. 극단으로.

그 제자들이 최종적으로 누구의 모습으로, 그들의 12명을 대표합니까? 가룟 유다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고 어떻게 합니까?
“양심에 찔려”
여기에 양심이 나오죠. 지가 판단을 해요. 지가.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점은요
베드로는 지 판단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회개를 했잖아요. 눈물을 흘리면서.
사람들은 ‘가룟 유다는 자기가 회개하지 않고, 주님께 돌아가지 않고 그래서 결국은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이 자살을 했고 베드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했기 때문에 주님을 따랐다.’
뭘 따르기는 뭘 따라요?
눈물 흘려봤자 주님이, 부활한 주님을 만나고도 뭐 합니까?

오늘 이야기를 또 해야 되겠어요. 우리 동기 모임에 카톡이 있는데 하여튼 좀 큰 교회 담임 목사인데
목회 편지를 이렇게 쓰는데 완전 악마의 편지예요. 마지막에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주님이 사랑으로 이 자기 고향으로 고기 잡으러 간 그들에게 찾아갔지 않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합니다.’
들어보면 맞는 말 같죠? 맞는 말 같잖아요. 그런데 그 찾아감에 대해서
성령을 받기 전에는 ‘야 우리의 스승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는구나’
성령을 받으니까 찾아옴이 뭐였어요? ‘네가 나 죽였지?’

지금 아브라함 믿음과 똑같은 거예요.
‘네가 안 믿었잖아.’ 아브라함이 비웃었잖아요.
아주 낯선 해석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죠.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니까...’
맞아요. 그 사랑이 십자가 사랑이에요. 인간의 사랑이 아니고.
십자가 사랑이 되면 그 사랑을 받게 되면 사도 바울처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찾아옴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랑입니까?

나를 위한 사랑이에요? 아니에요.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니었고
자기의 이름을 증거케 하기 위한 사랑이에요.
그러니까 ‘함께 죽고 이제는 네 안에 나를 살리겠다.’ 이런 식으로 제자들을 다루시는 거예요.

그런데 목사라는 자가 ‘주님이 이 정도로 사랑합니다. 어려움이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으면 찾아올 것 같으면 모든 사람 다 찾아가야 되잖아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 딱 그거예요. 말씀을 정반대로 해석하는 거예요.

분명한 것은 맞아요. 아브라함에 대해서 하나님이 사랑을 하신 거예요. 제자들에게 사랑을 한 겁니다.
이 사랑은 십자가 사랑에 의해서 완전히 전복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그런 것과 전혀 다른 언어 체계로 이루어진 사랑이에요.
나의 목숨을 뺏어가는 사랑입니다.

제가 민수기 설교할 때 이 얘기를 했잖아요. 상번제와 임마누엘. 임마누엘 얼마나 신이 납니까?
주님과 동행을 하니까 스데반 집사님이 되고 사도바울이 되고 나머지 열한 제자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이 동행하니까
‘더 많은 걸 주시고, 부자 되게 해주시고, 무병 장수하고 사업 잘되게 해주고...’
‘성경에 대한 지식을 더욱더 많이 알게 해주고...’ 뭐 알기는 해 주시죠.
부자도 되게 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만나는 순간 뭐가 돼요? 그 모든 것들이? 모든 것이 쓰레기잖아요.
집에 천억을 깔아놓으면 쓰레기 더미 위에 사는 거예요.
감사하게도 여러분은 그 정도 쓰레기는 없잖아요.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돼 있죠. “믿는 모든 자의 조상”
그 ‘믿는다’라는, 이 믿는 자들이 저희가 되잖아요.
저희 모든 자들의 조상이 되면 믿는 자들은 누구의 발자취를 따릅니까?
할례 언약을 (세움을 받은) 세운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르게 되죠.

이제 비로소 이 의미가 밝혀지잖아요. “믿는 자들의 조상”
그러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죠?
그러면 우리 모두는 그 믿음의 조상과 같은 라인에 서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믿음 있는 자입니까? 없는 자입니까? 있는데, 없는 자예요. 있는데 없는 자.
헛방이에요. 헛방.
맨날 비웃고 조롱하는 자가 우리예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복음을 알게 되니까 이 복음이 처음에는 은혜라고 왔어요.
왔는데 그다음 어떻게 바뀌는가? 하면
그 믿음 자체나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을 뭘로 바꿔치기 합니까?
우리 자신을 보면 알잖아요.
뭔가 복음의 지식을 쌓으니까 뭐예요? 그것이 나에게 의로움이 되고 행위가 되잖아요. 저만 그런가요?
이건 못 빠져나갑니다. 인간들은.

그래서 주님이 “날마다 서로 모이기를 힘써서 책망을 하고 강퍅케 됨을 면하라” 하거든요.
얼마나 우리가 강퍅하면 매일 안 모입니까?
일주일에 한 번 모이는 것도 짜증 나요. 짜증 나.
‘나 안 모여도 나...’ (죄송합니다. 이 화면으로 듣는 분들. 어쩔 수 없지만)
아무리 이렇게 듣고 말씀을 알아도
모여보세요. 모이면요 다 무너져요. 다.
혼자 설교를 들으면서 혼자 망상을 하는 거예요. ‘나 믿음이 있다.’ 이렇게.

하나님이 찾아오지 않으면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음이 있다라고 생각했어요.
‘믿음이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시를 하니까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어요?
완전히 엉터리 믿음.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쫓는 자들에게도니라”
‘할례자의 조상도 마찬가지야.’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아 할례를 받으면 또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느냐’ 이런 논리가 들어올 수 있는데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할 때는
‘할례의 언약’ 자체에서 무엇을 뿜어내고 있습니까?
비웃음을 담고 있고, 네 믿음은 믿음이 아님을 담고 있는 거예요.
그게 이 생식기 끝을 자르는 거예요.
자른다는 말은 ‘잘라도 안 된다’는 이야기예요.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믿어도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와 동행을 하는 거예요.

성경 좀 배우면 정답을 갖고 와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증거합니다.’ 그러면서 답을 챙겨요. 답을.
답을 안다고 천국 갑니까?
그럴 것 같으면 우리도 이단처럼 답 만듭시다. 성경 해석의 정답을 만들어서 그걸 배우면 되잖아요.

요한복음 7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7장 23절부터인데요.
예수님이 태어나신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어요.
이 정도 되면 머리 좋은 사람들은 간단하게 ‘할례 언약’의 의미를 알 것 아닙니까?
‘할례 언약은 불가능성을 담고 있는 거야.’ ㅎㅎ

22절에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에게서 난 것이라)”
여러분 성경도 괄호 쳐놨나요? 그 괄호 빼야 됩니다. 왜 괄호 쳐놨는가? 하면
‘이것은 사도 요한의 사견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성령을 받아서 요한복음 7장입니다. 7장 22절.
그래서 이 사람들은 ‘사도 요한의 견해이기 때문에 괄호를 쳐놨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말씀을 오해를 해도 어마어마하게 오해를 하죠.

말씀이 뭐 사도요한 말이 있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게 따로 있나요? 없습니다.
계시로 확정된 이상은 모든 것이 성령 받은 증인들의 말씀이고 주님의 말씀이 돼요.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어요.
이 이야기가 들어가야 할례의 본래 의미가 밝혀져요. 그러면서 안식일의 의미가 밝혀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모순된 내용이죠? 맞죠? 모순되잖아요.
안식일에는 오로지 뭐만 해야 돼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처음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했습니다. 초창기에는. 출애굽을 할 때는.

그런데 민수기 이제 월요일날이 올지 안 올지는 모르지만 그 28장 안식일 규례가 되면
“일하지 말라”는 내용은 싹 빼버립니다.
민수기 28장 29장에는 “일하지 말라”는 내용은 다 빼버리고
뭐만 집어넣었습니까? 거기에? 제사만 집어넣어요. 제사만.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고 제사만 드리라”고 돼 있어요.

그런데 안식일에도 할례를 줘야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것은 레위기 12장 3절에 율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이 다시 들어오거든요. 그 할례 언약이.
“대대로 지키라”는 것이 들어온 상태에서,
모세를 통하여서 여호와께서 다시 이 할례에 대한 율법을 주십니다.

12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삼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라”
여기에 보면 이 할례의 언약,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창세기 17장에서 세운 그 할례의 언약과 동일하게 말씀을 하시죠. 칠일.
물론 추가된 내용이 있지만.
그러면 이 할례가 율법입니까? 아니면 율법이 아닙니까?
율법이잖아요. 지금.

그런데 이 사도 요한을 통해서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왜 이걸 말씀하실까요?
조상의 할례 언약을 담은 내용이 뭐가 되죠?
“안식일날 일하지 말라”는 말씀이고, “제사만 드리라”는 말씀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해도 어렵죠?

안식일날 일하지 않으려면,
이 7일째 되는 날은 태어나는 걸 맞춰서 애가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요즘은 맞춰서 이렇게 날짜 맞추고, 이렇게 사주 팔자 좋은 거 나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예 배를 째가지고 그 날짜에 맞춰서 내 꺼내잖아요. 그런 사람 적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러한 운명 속에 살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지금 자식을 낳을 때 그 당시에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7일째가 되려면,
그 7일이 안식일이 되는 경우가
뭐 인구가 100만 명이 태어나면 7분의 1, 7로 나누면 그 숫자만큼
(안식일에 태어나잖아요. 그러면 아 안식일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8일 전에 태어나면,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되는 애들이 7분의 1입니다. 무조건.
그러면 그들은 안식일날 할례를 행해야 되잖아요.
할례를 행하려면
안식일을 범해야 돼요? 안식일을 지켜야 됩니까? 범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님께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이렇게 했다면
뭘 알아야 돼요? 안식일이 뭘 증거하고 있는지?
안식일은 할례를 증거하고 있고, 할례가 뭔지를 이들은 지금 모르죠.

‘이렇게 했다면 알아차려야 되지 않느냐?’라는 이야기예요.
근데 분명히 “안식일날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셔놓고 “할례를 행해야 된다”라고 하시니까
하나님이 모순되는 내용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지금 안식일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따로 있는 거예요.
안식일을 깨는 게 할례잖아요.
그러면 안식일조차도 ‘할례 언약’을 말씀하기 위한 안식이 되는 겁니다.

여기(요7:23)에서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모세의 율법을 지키려면 안식일을 지키면서 할례를 안 행해야 되는데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않으려고 안식일날 할례를 행한다는 겁니다.
만일에 우리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답변해 보라 하면 어떻게 답변하겠습니까?

이미 로마서의 앞부분에서 인간은 선악 구조로 짜여져 있다 했죠.
그 선악 구조 속에서 이 이런 말씀을 보게 되면 인간은 항상 선을 어디에 놓는가? 하면
우선순위 되는 걸 놓아요. 우선순위 되는 걸.
그러면 이들은 ‘모세의 율법’이라고 해놓고 어디를 끌고 오겠어요?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끌고 오는 겁니다.
근데 사실은 모세 율법 자체에 이미 모순을 담고 있거든요.

모세가 준 율법이라면, 모세가 준 율법이라면 동등한 이 권위를 갖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율법이 어느 것은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은 더 경하고 이런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수님도 갈라디아서를 통해 말씀하셨잖아요.
“온갖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범한 것이라”
어느 말씀 하나하나, 하나라도 버린다면 천국에 못 들어가요.
우리들은 경중을 따지잖아요. 그죠?
우상을 섬기는 것과 도둑질하는 것 뭐가 더 나쁩니까?
이 세상에는 사람을 죽이는 거하고 도둑질하는 거 뭐가 더 나빠요? 사람을 죽이는 게 더 나쁘잖아요.
근데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보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우상숭배와 똑같은 게 뭐예요? 탐심이죠. 도둑질도 탐심에서 유래되잖아요. 유발되잖아요.
모든 것들이 그런 겁니다.

지금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예수님께서 안식일날 사람을 온전케 한 그 사건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교훈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요한복음 7장 14절에 보면
“이미 명절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이렇게 얘기를 하면 우리는 뭐라고 해야 돼요?
‘당신 누구에게서 배웠소?’ 이렇게 묻잖아요. 그죠?
‘누구에게서 배우긴 배웠는데 그 사람이 나를 가르친 게 아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예수님의 교훈이 아니라는 거예요.
‘누구한테 배웠느냐? 이 사람이 배우지 않았는데.’
예수님의 답변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다 알려준 내용이라는 거예요.
나에게 다 알려준 내용이라는 겁니다.
대화가 안 되죠. 그러면 이들은 비웃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극단적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한다면,
만일에 너희들 중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내가 스스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너희들이 나를 규정을 할 때 사람으로 규정하잖아요.
‘그건 니가 지어낸 말이 아니냐?’ 이런 이야기인데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한다면
‘내 말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라는 거예요.
왜 이 말씀을 하시는가? 하면 예수님이 안식일날 병자를 고쳤거든요.
안식일날 행하지 못할 일을 했기 때문에 그래요.
진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면 안식일을 지켜야 되잖아요.
그래서 지금 안식일날 할례 행하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좀 더 볼게요. (요 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자기 증거입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모세가 율법을 줬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지키는 자가 없다’라고 선언을 해요.

그런데 지금 이들이 시비를 어떻게 걸고 있습니까?
모세가 준 율법대로 어떻게 하고 있어요?
‘안식일날 일하면 안 된다’라고 하잖아요. 안식일날 일 안 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과 모순이 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라는 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돼요?
진짜 율법을 지키는 분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뿐이라는 얘기예요.
예수님의 자기소개예요.
그것을 성경에서는 ‘율법의 완성’이라 이야기하는 겁니다.
‘율법을 지켰다’라는 말을 문자대로 받으면 안 돼요.

그러면 이 내용과 ‘율법을 지키는 것’과 ‘아브라함의 믿음’과 동일해야 되죠.
아브라함의 믿음과 동일해야 되잖아요. 예수님은 지금 그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아주 교묘하게 뭘 끌고 옵니까? ‘율법 너희들 안 지키지 않느냐?’
뭘 갖고 합니까? 안식일날 할례를 행하는 거 갖고 들어와버려요.
그걸 갖고 한 번 더 깊이 들어가 버리니까 이 할례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지 밝혀지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할례 언약의 성취자죠.
어떻게 할례 언약을 성취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걸 로마서 6장에 ‘할례’라는 표현으로 하지 않고 ‘세례’라는 표현으로 말씀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할례의 언약의 의미를 밝히 보여주신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할례의 언약’이라는 자체가 너희들이 믿는다고 뭐 행한다고 지킨다고
구원을 얻을 수 없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아브라함이 비웃은 내용을 담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안 지킨다는 증거가 뭔가? 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왔다면 자기들이 이 지킴 자체가 누구를 비웃는 거예요?
하나님을 비웃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비웃음을 누구로 바꿔치기했어요?
예수님이 오니까 예수님을 비웃는 거잖아요.
예수님을 조롱하는 거잖아요.
‘니 도대체 이 글도 모르면서 어디서 배워먹은 짬뽕이야?’ 이 얘기거든요. 지금.

우리는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그 랍비들을 통해서 대대로 말씀의 그 지식을 전수를 받아서
말씀을 제대로 전하고 있는데, 배우고 있고, 가르치고 있는데,
니가 말하는 것은 이 전통에서 벗어났다는 얘기입니다. 벗어났잖아요.

그래서 제가 아까 그 창세기 17장에서 말씀드렸잖아요.
아브라함의 비웃음이 아브라함의 믿음 속에 들어있다라는 것을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할례 언약이 안식일을 깨버리죠.
십자가 사건이 안식일을 깨버리잖아요. 그것이 바로 안식일의 완성입니다.
지금 이 유대인들은 그러한 것을 모르죠.

그 내용이 무엇과 연결됩니까?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그게 바로 할례 언약의 성취예요.
그 성취가 되면, 이 할례 언약의 성취가 되면,
이 십자가 사건이 먼저인 건 맞아요. 지금 십자가 사건을 갖고 제가 할례 언약을 해석을 했으니까.
이렇게 되면 이 후에 ‘우리가 믿습니다. 우리가 순종합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습니다’라는 것이 통할까요? 통하지 않을까요? 안 통해요.

지금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괜히 이 내용을 갖고 오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요 이게 육체가 사는 이상은, 육이 사는 이상은 죽을 때까지 자기 행위를 포기를 못해요.
자기가 한 것에 대해서 잊지를 못해요.
이것이 더더욱 믿음에 관한 내용이라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면 그걸 잊어버릴 수 있겠어요?

언제 못 잊는가? 하면요 이 결판할 때 못 잊어요.
처음에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다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근데 상대가 그걸 인정해주지 않으면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왜 날 인정하지 않아’ 해요.
‘왜 나를 무시하고 왜 나를 가볍게 여기냐?’ 이렇게 나오죠.

주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증거합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여전히 이 주의 이름이
믿음이 계속해서 드러나는 현장으로 주님께서 인도를 하시는데
그 믿음이 드러나는 현장은 어떤 자리예요? 아브라함이 갔던 자리입니다.
사실은 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그러한 자들이 우리의 모습이에요.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모순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이 정도로 믿음이 있고 이 정도로 복음을 안다면 하나님 백성이 아닙니까?’라는 것을
잘라버립니다. 그게 할례 언약을 받은 자예요.
그게 이제 ‘성령의 할례라’ 로마서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죠.

그래서 제가 로마서 2장 할 때 ‘성령의 할례를 우리가 무슨 수로 받습니까?’라고 물었잖아요.
로마서 2장 1장입니다. 2장이 맞죠. 성령의 할례. 그 말씀을 하시거든요.
그래서 성령의 할례라는 것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다 이루셔서 주시는 할례예요.

그 할례에 참여한 자들은 계속해서 무엇을 담고 있는가? 하면
내가 믿음이 있다는 자체가 부정당하면서‘하나님을 내가 비웃고 있구나. 죄인 중에 괴수구나’
그 상황과 현실 속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 할례이기에 계속해서 나는 부정당하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님의 일만 고스란히 드러나는 현장으로 저희들을 만들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인생을 홀로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면서
주의 이름만을 자랑하며 증거하는 증인으로 삼아주심을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날마다 십자가 사건 속에서 주님이 죽으신 이유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을 목격하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