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9-10 21:08
20230910 로마서 강해 30강 롬 4:17-25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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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09-11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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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0 로마서 강해 30강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다 함께 묵상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5장 23절에서 24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5:23~24)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기도하겠습니다.
인간의 욕망의 끝은 홀로 높임을 받고 어떠한 다툼도 없는 곳에서
유일하게 왕 노릇 하고자 하는 그러한 탐심을 지혜의 말씀을 통하여 들추어내심을 감사드립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이게 하셨기에 이 지혜의 말씀이 우리의 죄를 드러내시고
십자가의 지혜로 저희들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시편 75편 1절에서 10절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시75:1~10)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사를 전파하나이다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을 당하면 정의로 판단하리니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거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셀라 내가 오만한 자더러 오만히 행치 말라 하며 행악자더러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끼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하나님 말씀, 로마서 4장 17절에서 25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4:17~25)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아멘.

오늘 본문은 엄청 어려운 본문입니다. 왜 어려우냐?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런 얘기를 했어요. 로마서가 너무 어렵다고. 당연하죠.
왜 어려우냐? 라고 하면 로마서는 사복음서를 깔고 있어요.
사복음서를 깔고 있으면서 동시에 구약 전체를 깔고 있습니다.
단순히 아브라함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과 함께 이야기를 하잖아요.

또한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이죠.
여러분들은 우리들은 모두가 다 악마의 교육을 받았어요.
특히 미국 교육의 영향을 100%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미국이 하는 일을 교육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가는 게 한국의 교육이거든요.
그들의 사고방식이 뭐냐? 청교도 사고 방식이에요. 그것이 주류입니다.
청교도 사고 방식이 왜 미국의 주류냐? 라고 하면
그것이 자본주의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본주의와 청교도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상관이 아주 밀접하게 있습니다.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 칼빈의 소명론을 다 배웠죠. (공부 안 하시는 분들은 기억 안 나실 건데)
칼빈의 소명론을 배웠잖아요. 칼빈 전에 루터가 있었죠.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그 당시에 대표적인 사건이
‘부자들은 돈만 내면 땡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천국으로 들어간다’라는
이 면죄부 이론이 주를 이루었죠.
지금 오늘날 교회를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달라진 게 있나요?

거기에서 핵심 사항이 뭡니까? 돈으로 천국을 샀다가 아니에요.
‘천국을 무엇으로 갈 수 있느냐?’라는 방법을 제시한 겁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바로 명목은 돈인데,
이걸 다르게 바꾸면 뭐예요? 행위입니다. 행위.
‘인간의 행위를 통하여서 천국에 갈 수 있다’라는 걸 이 로마 카톨릭이 가르친 겁니다.

로마 카톨릭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구약을 살펴봐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제대로 깊이 있게 탐구를 하게 되면
행위 말고는 구원을 얻을 길이 없어요. 왜냐하면 심판의 기준이 행위였잖아요.
성경을 깊이 연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말에 동의를 못해요.
왜? 성경을 안 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왜 멸망당했습니까?
왜 앗수르 제국에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하고 남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왜 멸망당했습니까?
선지자들의 외침은 율법에 순종하지 않았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심판을 한 거잖아요.
믿음 좋은 사람들은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선택이다.’
선택을 그런 식으로 집어넣게 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면요 십자가가 필요 없어요.
십자가를 제거하는 게 선택 교리예요.

성경에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않았느냐”라고 할 때 이 선택.
그중에 하나는 마귀죠. 긍휼히 여길 자와 강퍅케 할 자를 주께서 선택을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 구원론을 어떻게 보느냐? 심판론을 어떻게 보느냐? 할 때
선택론으로 이야기를 해버려요.
그렇게 돼버리면 무엇을 제거합니까? 십자가를 제거하는 거예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선택은 십자가의 완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같이 복음을 전하다가 나간 어떤 목사님이 ‘창세전 언약’을 갖고 복음을 전하거든요.
창세전 언약. 듣기만 해도 어떻습니까? 마음이? 안도감이 들지 않습니까?
“창세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라는 이 말씀이
나의 구원에 대해서 확정적이잖아요. 예정론이거든요. 예정론.
청교도와 이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루터가 처음에 싸움을 할 때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완료성을 갖고 구원이 된다는 주장을 펼쳤어요.
여기에는 어떠한 행위가 개입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선함과 인간의 선택을 철저하게 배제합니다.
물론 그전에도 이 펠라기우스입니까? 어거스틴 시대에.
어거스틴 같은 경우에도 흔히 그렇게 주장을 했다라고 해요. 그렇게 믿어봅시다.
루터와 동일하게 ‘인간의 행함 인간의 선택 어떤 것도 구원을 이루는 데 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사실 있잖아요. 이 논리 자체가 약간 문제가 있어요.
둘 다 어디에 미쳐 있습니까? 구원론에 미쳐 있는 거예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 시대에 그들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그건 주님이 판단할 일이고요.
그때 당시에 펠라기우스가 인간의 행위를 주장을 했거든요.
신학교 가면요 펠라기우스라고 하면 무조건 이단이에요. 아니죠. 제가 다닌 신학교.
알미니안 계통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단이 아니고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거기에는 ‘인간의 선택, 인간의 행위가 구원을 좌지우지한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은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장이 틀렸다라고 할 것 아닙니까.
과연 틀렸을까요? 성경 본문 하나하나를 보고 따져 가볼까요?
여러분이 지금 교단이 다 다른 쪽에서 왔기 때문에
어떤 쪽은 펠라기우스 쪽에 있고 알미니안 쪽에 있고 어떤 쪽은 칼빈주의 쪽에 전적인 은혜다.

근데 칼빈주의도 이제 들어가기 시작하면 루터에서 칼빈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면
어떤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면
‘은혜로만 구원받으면 끝나느냐?’ 이 문제를 지금 거론을 하기 시작해요.
은혜로 구원받는다면 그다음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흔히 듣던 방종 문제가 발생해요. 방종.

성도는 방종하며 살수 있느냐? 그다음 나오는 게 ‘그럴 수 없다’라고 하면
방종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뭐가 나와야 돼요? 법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법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이게 칼빈이
‘구원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구원받은 자의 모습은 나타나야 된다’라는 거예요. 모습은.

여기에서 이제 ‘예정론’이 들어가게 되면 그 당시의 갈등이 이런 거죠.
지금도 마찬가지잖아요.
구원파가 왜 득실득실대느냐? 라고 하면,
신천지가 왜 힘을 발휘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왜 이렇게 강한 힘을 발휘하느냐?
그 이유가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이 구원론에 대해서 기존 장로교 계통들은요 확정적인 구원론을 제시하지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 예정론 때문에 그래요.

예정론은 하나님이 예정했지 우리가 알 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여기에 이제 청교도들은 미국에 건너간 청교도들.
그 사람들은 예정된 이 사실을 내가 살아가면서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그들의 주장은 이걸 행위를 통해서 구원받고자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정말 예정 받았다. 창세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받았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겁니다. 그걸 거꾸로 표현하면 예정되었다라는 사실을 확정하고 싶은 거예요.
뭘로? 자기의 행위를 통하여서.

이게 칼빈주의와 연관이 있는데 칼빈이
성도들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각자 이 직업에 대한 소명을 주셨다는 거예요.
소명 이야기가 들어가게 되면 게으르게 살아야 돼요? 부지런하게 살아야 돼요?
부지런하게 살아야 되죠.

그런데 지금 문제가 뭐냐? 하면 구약을 모르면 사람들이 딜레마에 빠지는 게 뭔가? 하면
‘예정론을 가져오면 인간의 행위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어떤 이런 부분이라든가
그와 달리 성도가 구원받았기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많이 들어봤죠?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여기에 대해서 엉터리 주장을 펼치게 되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보면 어떻습니까?
게으르게 살았어요? 성실하게 살았어요? 방종했어요? 어떻습니까?
구약을 이야기하지 않고 로마서로 넘어와 버리면, 구원론으로 넘어와 버리면,
인간들은 두 가지밖에 안 나와요.
‘예정되었으니까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여기에 반발을 해가지고
‘구원받았다면 하나님의 백성다운 면모를 보여라’ 이 두 가지밖에 안 나와요.

제가 구약을 모른다고 했는데 그 구약을 모른다는 것은 성령께서 기록하신 구약이에요.
성령을 배제한 구약을 보게 되면 엉터리로 보게 되지만
성령이 기록한 구약을 보게 되면
이 이스라엘 백성 자체에 있어서
삶이 피동적이냐 능동적이냐 자유자냐 방종이냐 이런 헛소리가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은혜를 이야기하게 되니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 라고 하면
‘그러면 인간은 은혜라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되느냐? 무능력하냐?’ 이 문제를 제기할 것 아닙니까.
맞죠? 그래서 나온 게 자유 의지예요.

자유 의지가 등장하기 시작하면 무엇과 관련될까요?
구원 얻는데 인간의 행위가 개입이 되는 겁니다. 스스로 모순된 신학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또 똑똑한 분들은 ‘당신은 자유 의지를 인정하지 않습니까?’
그거 인정하고 안 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래서 자유 의지 있다 칩시다. 뭘 선택하겠습니까?
무얼 선택을 한 걸 이미 구약에서 다 보여줬고 구약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 이 남은 자 유대인을 통해서 그들의 선택을 다 보여줍니다.

구약의 선택은 뭐였습니까? 율법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선택이었고
신약의 선택은 뭐예요? 구약은 방종이에요. 일종에.
왜냐하면 이 예레미야 선지자나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하는 장소를 들여다보면
그들은 이미 성전이 가운데 있으니까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라고 주장을 펼치잖아요.
그러면서 지 마음대로 살아요. 한 번 선택은 영원한 선택이다 이 논리거든요.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어떻게 사느냐? 하면
그러한 모습이 엉터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대로,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는 주장이에요.
그럼 여기에 자유 의지가 들어갔어요, 안 들어갔어요?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럼 이 전체를 뭐라고 봅니까? ‘가두어두셨다’라고 해버리죠.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떤 의미로 나타납니까?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든 가두어졌다’라는 얘기밖에 안 되는 겁니다.
지금 로마서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이 ‘가두어져 있다’라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면 무엇이 안 나오는가? 하면 십자가의 피가 안 나와요.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갔잖아요. 미국으로 가서 무엇을 꿈꿨습니까?
거기는 내가 믿고자 하는 대로만 했습니까?
내가 믿는 것이 선이 되어서 원주민들을 다 학살해버렸잖아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를 제대로 인정을 한다. 제대로 믿는다.’
그건 내가 하는 것이 다 의로운 거예요. 그게 복음인가요?
만일에 예수님이 그렇게 했다면요 예수님이 청교도라면 예수님은 로마 제국부터 불살라버렸습니다.
헤롯 왕부터 죽여버립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 이쪽 계열들을 다 죽여버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다 제거하겠죠.

성경을 봐도 왜 그렇게 안 보이느냐? 라고 하면
자기들은 나름대로 그 영국에서 어쨌든 네덜란드로 갔다가 어떻게 피해 가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자 하는데 그들의 한계성 속에서 무엇이 드러나느냐? 라고 하면
생존이에요. 생존.
그들은 다니엘을 보면서 다니엘이 다른 나라로 피신 갔습니까?
다니엘이 피신 갔어요? 피지 섬으로 갔어요? 천국이라 그러면서? (뭐 뉴스를 안 보시니까...)
그 타작마당 하는...... 그걸 보면서 그 위에 있는 7명 핵심 멤버들을 이제 소환한다 이야기하는데
소환해봤자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그 남아 있는 사람이 또 그 짓을 하게 돼 있어요. 인간은.
왜? 그게 권력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돈이 있잖아요.

거기에서 그들은 무엇을 꿈꿉니까? 성공을 꿈꾸기 시작하죠.
그 성공을 꿈꾸기 시작하니까 성공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은 증거라는 겁니다.
그게 번영신학이거든요. 여러분 많이 들어봤잖아요.
그 번영 신학이 한국에 그대로 같이 왔거든요. 서로 상부상조한 겁니다.
지금도 휴스톤 교회가 미국에서 제일 크다 그러는데, 그 사람은 대놓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심은 우리 성도들을 유복하게 살게 하기 위함이다.’
이 ‘삼박자 축복’과 똑같잖아요. 조용기 죽었지만.

뭐가 달라요?
그럼 예수님은 바보예요. 바보. 사도바울도 바보고요. 믿음의 조상도 바보죠.
히브리서에 의하면 믿음의 조상들이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본향이 어디 있다 했어요? 여기 없다 했잖아요.
우리가 다 그 믿음의 선진들을 따라간다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들은 여기를 뭘로 생각합니까? 경유지가 아니라 정착지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한 사상들. 그러한 사상들이 미국에 있는 신학교에 그대로 다 장악한 거예요.
그래서 대한민국에 있는 대부분 교회 목사들이 미국 유학 갔다 왔잖아요. 대부분.
물론 영국이나 저쪽으로 네덜란드 갔다 온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도 좀 이상한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도 16세기 17세기로 돌아가자는 정신병자들이고.
이들은 ‘번영 신학’에 미친 거예요. 교인들이 다 그 영향을 받은 거고요.
악마의 교육을 받아 온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와 너무 잘 맞다라는 이야기예요. 특히 대한민국이 가난했잖아요.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이 살이 이렇게 풍족하게 된 연도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1976~78년도예요.
잘 모르죠? 그때는 먹고 살기 어려웠어요. 제 어릴 때만 해도 산에 가서 그 껍질 뜯어 먹었어요.
이런 이야기하면 안 믿겨지죠? 동네가 달라서 그래요. 동네가. 이해 안 되죠? 동네가 달라서 그래요.
제가 1919년도 평양의 그때 당시에 사회를 비추는 유튜브에 보니까 그 내용이 나와요.
그런데 제가 깜짝 놀랐는 게 제가 어릴 때 산 모습이 그 모습이더라고.
그러니까 1970 몇 년도인데 우리 동네는 1910년대를 살고 있었던 거예요. 1920 몇 년도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던 시기가 1980년도 넘어오면서잖아요.
그러니 그 이전에 인간의 욕망이 뭡니까? ‘잘 먹고 잘 살자’잖아요.
미국 잘 먹고 잘 살았잖아요. 그러면 신학이 뭐가 있겠어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그 성경에 나오잖아요. ‘복을 받을 것이라’
그 복이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는 복이라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선교사들도 대부분 성공한 사람들이 왔어요. 맞잖아요. 안 그래요?
여기 서울 시내 관광지 한번 돌아보세요. 그 선교사들이 다 집안이 어떤 집안입니까?
웬만하면 의사 아닙니까?
자기의 신앙을 드러내기 위해서 온 거예요. ‘나 구원받았다.’ 그 배경이 깔려있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만 안 전하는 거예요.
십자가에다가 다른 걸 계속해서 붙여서 전하는 거예요.
의료 행위를 하면서 ‘이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십자가뿐입니다’라고 전해보세요.
그 사람 이름이 남겠어요?
물론 그렇게 하면 역사가 또 조작을 하죠. 그런 얘기는 싹 빼버리고. 언론들은 그런 걸 잘하거든요.
십자가 이야기하면 그건 다 빼가지고 편집을 다 해가지고.

그러한 어떤 인간의 선택이 결국은 하나님의 무엇과 연관이 되는가? 하면
‘예정론’과 연관이 되고 ‘섭리’와 연관이 돼요.
근데 이게 왜 먹히느냐? 라고 하면
여러분이 지금 일 안 하니까 월급 안 나오죠? 집사님 맞죠? 그만두니까.
일하니까 월급 나오죠? 이걸 구약으로 가봅시다.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하잖아요.
그들이 일을 해서 먹고 살았어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 ‘아무것도 안 했다’라는 말은 어폐가 있습니다.
죄만 지었거든요.
그 아무것도 안 했다라는 말은 음식을 먹는 데 있어서 자기들이 어떤 기여도 못했다라는 얘기예요.

그리고 그들은 그 기여를 못함과 동시에 뭐만 했는가?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만 쏟아냈는데
하나님께서는 40년 광야생활 동안 만나를 내려주신 거예요.
안 먹은 게 아니었어요. 실컷 먹이시면서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이걸 미리 보여준 게 광야 생활이고

그 광야 생활을 어디로 이전합니까?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되죠.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6일 동안 힘써 일하라 했습니다.
힘써 일하고 7일째는 쉬라고 하죠.
그리고 일한 그 10분의 1을 레위인에게 바치고
레위인들은 10분의 1을 제사장에게 바치고,
제사장들의 10분의 1은 대제사장에게 받치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이스라엘 ‘약속의 땅’이라는 자체는 광야 생활을 옮겨놓은 땅이라는 의미예요.

그런데 광야 생활에서는 그게 가능하죠. 왜? 농사지을 땅도 없잖아요.
그런데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자신이 힘써 땀을 흘렸잖아요.
그러면 그 결과물은, 소산물은 누구의 노력의 대가입니까?
1번. 대제사장이 대속죄일날 한 차례, 자기의 죄를 위해서는 수송아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는 수염소를 드렸기 때문에. 십일조가 되었기 때문에.
십일조를 위해서 그들에게 땅의 소산을 주신 거거든요.

그런데 어느 누가 그렇게 해석합니까?
지금 우리가 먹고 사는 것이 십자가의 피 공로 때문이에요.
십자가의 피 공로가 아니면요 이미 해는 다 사라졌어요.
아직까지도 자기 백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주께서 강림하시기 전까지 우리의 세계를 연장시켜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하면 미쳤다라고 안 하겠습니까?
아니 내가 공부도 안 했는데 대학 갈 일이 있습니까?
공부를 안 했는데 대학을 갔다면 은혜라 하겠죠.
그런데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을 갔다 그러면 그걸 은혜라 하겠습니까? 이 딜레마에 빠진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답을 갖고 현실을 풀어야 되는데
이들은 현실을 갖고 성경을 해석하기 시작하고, 현실을 갖고 이 진리를 찾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면 항상 공격하는 게 이거예요.
‘너 일하지 않고 먹을 길이 있느냐?’라고 반박을 해요. 그렇지 않습니까?
교인들이 목사를 협박하는 것은 ‘우리가 사례 안 주면 네가 설교할 수 있느냐?’ 이 얘기잖아요.
그게 협박이거든요.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협박을 하는 거예요.
복음을 아는 사람은 주님이 먹이시고 주님이 살리시는 거잖아요.
내가 한 게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런 논리라면 ‘설교를 했기 때문에 내가 밥을 먹고 산다’ 이게 교회잖아요. 오늘날 교회.
오늘날 교회는 여러분도 지난번 얘기했는지 모르겠지만 목사직을 돈 주고 사는 시대거든요.
제가 중국 들어갈 때는 그게 좀 적었어요. 대놓고 이야기는 못 했고, 세습도 대놓고 못 했어요.
요즘은 세습도 대놓고 해요. 교회 교인 한 100명만 돼보세요. 세습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진리에 관심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목사 와봤자 별 거 없어요. 인간은.
내 현장의 안정성을 원하는 거예요.
이 교회가 사라지면 안 된다는 게 인간들의 논리거든요.

지금 농촌교회나 어떤 도시교회에 후임자를 구한다라고 광고를 올리잖아요.
광고를 올리면, 거기에 후임자로 가려면, 최소한 1억 넘게 줘야 돼요.
물론 적은 돈은 5천만 원 준 사람도 있다. 그러더라고.
왜 그 돈을 주고 가느냐? 그 전임 목사가 나갈 때 퇴직금 내놔라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 돈이 교회로 가는 게 아니라 전임 목사한테 주머니로 들어가는 거예요.

아예 대구에 있는 어떤 동X교회는 유명합니다. 그 총신 교수 출신인데
제가 들은 얘기로는 ‘20억 달라’했대요.
근데 교회는 왜 입을 꾹 다물고 돈을 줍니까? 주고 떨어지는 게 자기들 더 편한 거예요.
어차피 복음이 없잖아요. 교회 자체가.

그렇게 교회를 돈 주고 사고 팔고 하는 그런 세계인 거예요.
그러니 퇴직금을 달라는 것은 나도 일한 대가가 있다라는 이야기잖아요.
설교 시간에 총신 같으면 은혜를 이야기하거든요.
은혜라 실컷 이야기해놓고 지가 20년 동안 한 그 대가를 달라는 거잖아요.
‘교인 수 내가 100명 불렸다’ 자기가 불렸습니까? 교인도 아니지만.

사도바울을 실컷 설교해놓고,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그냥 설교할 때만 생색냈을 뿐이죠.
근데 그것이 왜 먹히느냐? 라고 할 때는
설교 듣는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의 피 공로를 감사하는 자가 아니라
말은 십자가의 피공로, 이거는 뭔가 하면 구원용은 십자가의 피고,
모든 생활에 있어서는 나의 애씀과 노력의 대가라는 이야기예요.

왜 하필 내가 일을 시작할 때 윤석열이 나와가지고 일도 못하게 하느냐?
그게 십자가의 은혜예요.
그런데 거기에 만일에 우리가 원망을 하기 시작하면 누구를 향하여 공격하게 되는가? 하면
십자가에 피 흘리신 분이 느부갓네살 왕을 세웠다라는 것을 공격하게 돼요.
짐승은 짐승대로 공격을 해야 되고요.
우리는 그 짐승 아래에서 사는 것에 대해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감사할 수 있어야 돼요.
여기에 왜 분노가 나고 왜 흥분을 하느냐? 라고 할 때는
이 은혜의 세계, 십자가의 피의 세계를 자기의 행위와 선택, 이런 것으로 생각을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 왜 어려우냐? 라고 하면 창세기와 안 맞기 때문에 그래요.
창세기와 무엇이 안 맞느냐? 하면 이 아브라함을 보게 되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죠.
여러분이 이 말씀을 읽을 때 의문을 가졌죠? 안 읽은 사람은 의문 가질 이유가 없는데.
창세기와 이 말씀을 보면 의문이 듭니까? 안 듭니까?

창세기를 봅시다. 또 안 읽은 사람도 있기 때문에.
17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하고요. 그리고 할례 언약을 세우면서 17장 15절에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을 때 이때 나이가 99세예요.
근데 아브라함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나는 100세고 사라는 99세라 이야기예요.
만일에 로마서대로 하면 믿어야 되죠. 그런데 비웃잖아요.
누구를 비웃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비웃죠.

그런데 사람들이 왜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느냐? 이 얘기예요.
안 맞잖아요. 앞뒤가. 제가 잘못 보는 겁니까? 봅시다. 읽어볼게요. 17절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벡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00세가 되었는데도 믿음이 어때요? 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까? 믿음이 아예 없습니까?
어때요? 지금? 로마서하고 안 맞잖아요.
근데 우리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우기기 시작하죠.
‘아브라함이 믿었을 거야’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을 거야.’
약해지지는 않았죠. 어떤 믿음? ‘이스마엘을 통해서 약속을 이룰 것이라’는 믿음.
그러니까 믿음은 절대로 약해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적하는 믿음인 겁니다.

그런데 왜 로마서를 읽을 때, 로마서를 설교할 때, 그 얘기를 왜 하지 않느냐? 얘기예요.
그 이유가 뭐냐? 라고 하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할 때 이 믿음이 엉터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하는 거예요.
칼빈의 신학을 보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하고. 그다음 뭐예요?
그다음 나오는 것이 믿음을 증거하기 위한 삶이어야 되는데
구원받은 자가 보여주는 삶으로 바뀌어버렸어요.

그렇게 되면 구원받은 자가 보여주는 삶이 되면 십자가가 날아가 버리죠.
성경 해석을 다시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루터에서는 십자가 중심으로 갔다가, 칼빈에 가게 되면 뭘로 가버립니까?
다시 바리새인과 서기관 신학으로 가버린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런 질문을 하잖아요. 복음을 전하면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라고 질문하는 그 의도가 뭐예요? 정답을 구하고 있죠.
저한테 그런 질문을 많이 해요.
제가 그래서 정답을 얘기해 줍니다.
제가 어떻게 살아라고 말을 하면 제 말이 정답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냥 사세요.’ 조금 달리 표현하면 ‘주님과 함께 죽으세요.’

‘너무 추상적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추상적이라 생각하죠.
여러분 구약 이스라엘 보면 추상적입니까? 구체적입니까?
굉장히 구체적이고 예수님 당시를 보더라도 구체적이고요.
로마서를 보더라도 추상적인 내용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추상적인 것들을 구체적인 내용 속에 다 집어넣어버렸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믿음이라는 얘기를 할 때도
믿음이 아닌 것을 갖고 믿음이 뭔가를 정확하게 설명을 하는 거예요.
로마서를 읽을 때 왜 이 창세기 17장에 나오는 이 본문을 갖고 오지 못하느냐? 라고 하면
이렇게 되면 자기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다는 이 얘기 자체가 헷갈려버리잖아요.
믿음에 두 요소가 있다라는 사실을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가짜 믿음.
가짜 믿음이 없으면 믿음이 안 나와요.

이 원리는 똑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없으면요 예수님의 피로 만들어낸 이스라엘을 증거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그 이스라엘, 예수님을 살해한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이 등장하지 않고 그걸 삭제해버리고
예수님의 피로 만든 이스라엘만 얘기하게 되면 그게 나 구원받았다 얘기예요.
이 예수님을 살해한 이스라엘이 있어야 이 차이에서 무엇을 증거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증거할 수 있거든요.

성경을 볼 때, 지금 로마서는 성도들한테 하는 말이잖아요.
성도들한테 말하면 이방인들에게도 해당되잖아요.
그런데 왜 아브라함 이야기를 왜 합니까? 율법 행위를 왜 해요?
양심이 있다 했잖아요. 이방인에게.
‘양심이 있다’라는 것은 율법을 주신 취지와 똑같이 이방인도 작동한다는 겁니다.
그게 율법을 받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났고, 그 이전에 노아도 마찬가지고요.
노아의 아들들을 통해서 다 나타난 겁니다.

로마서에서 분명히 창세기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렇게 그냥 믿읍시다’라고 하게 되니까 무슨 믿음을 요구하는가? 하면
믿음, 아까 칼빈이 이야기했잖아요.
그냥 은혜로만 구원 얻고 예정된 자만 구원을 얻는데
예정된 자의 모습은 현실 속에서 나타나야 된다라는 이런 주장이 그 이후에 신학계에 만연하잖아요.

김영환 교수라는 분이 있어요. 굉장히 똑똑하고 저보다 훨씬 세상적으로 훌륭하겠죠.
그분이 이 ‘칭의론’에 대해서
로마서를 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주장을 펼치거든요.
한국교회가 개판이 된 이유가 뭔가? 하면
이 칭의가 종말론적,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제대로 안 가르쳤다는 거예요. 칭의 교리를.

제가 거기에 반박을 해볼게요.
‘예수님이 제대로 안 가르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했습니까?’
예수님이 제대로 안 가르쳐서 배반을 했어요? 안 그러면 그들이 성령을 못 받아서 그런 거예요?

이 사람의 문제가 뭔가? 하면 성령이 하시는 일을 뭘로 바꿔버렸습니까? 지식으로 바꿔버렸죠.
그래서 ‘가르쳐야 된다’는 겁니다. 한국교회가.
어떻게?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는데
이 의롭게 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라고 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제 이렇게 되면 뭘 갖고 오겠습니까? 행위를 갖고 오는 거예요.
이 사람이 뭘 모르는가? 하면 성령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어요.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를 모르는 거죠.

모든 말씀이 십자가를 전한다고 증거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보는가? 하면,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라고 해석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데 왜 문제가 되는가? 하면
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용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를 증거하게 되면 모든 성도의 인생은 십자가를 증거하는 인생이에요.
100억을 벌든지, 거지로 살든지, 대통령이 되든지, 아니면 길거리에 노숙자가 되든지,
무엇이 되더라도 십자가를 증거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겁니다.

여기에는 무엇이 들어가요?
살인자가 되어도 십자가를 전하는 데 부족함이 없고,
창기가 되어도 십자가를 전하는 데 부족함이 없고,
바리새인이 되어도 십자가를 증거하는 데 부족함이 없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사울이었잖아요. 사도바울이었잖아요. 창기들도 있고, 세리도 있고......

인간들은 십자가를 증거하려면 뭔가, 뭔가 나와야 된다는 얘기거든요. 뭔가.
이미 구약과 마지막 남은 자 유대인들을 통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펼쳐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인간, 또 말씀대로 사는 인간, 여기에는 누구도 들어가요?
‘믿습니다’라고 하는 믿음으로 사는 인간도 들어가 있어요.
조금 더 확장하면 예수님을 곁에 지근(只近) 측근에서 붙어 다니면서
그 말씀을 제대로 가르침을 받고 ‘제가 목숨까지 버리겠다’라고 하는 그들도 여기에 다 들어가 있어요.
인간이 나올 수 있는 모든 요소를 다 뭉쳐가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십자가의 원수로서의 일 외에는 나오는 게 없어요.
그러면 손들고 질문할 거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그러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십자가를 전하는 거지, 자기 죄를 짓는 겁니까?’ 이렇게
물으신다면 사도 바울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했잖아요. 자기를 부정해버려요.
왜냐하면 주님이 내 안에 살기 때문에 주님이 자기 증거를 하시는 거지,
주님이 자기 증거를 하시려면 나는 뭐예요? ‘아니요’가 돼야 되고
나로부터, 이 몸이라는 나로부터 나오는 모든 행위들은 은혜가 되어지려면,
은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료성으로 주어진 선물이잖아요.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못 받아들이죠. 왜?
그들은 이미 답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성도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된다?
‘성도답게 살아야 된다’는 답을 갖고 있어요.

그 답을 누가 먼저 제시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서 시내산에서 먼저 율법을 주셨잖아요.
율법을 주셨을 때 갇혀 있는 자들에게 이 율법은 어떻게 들립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율법대로 살아야 된다.’ 그게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신학인 거예요.

마귀가 우리에게 뭘 갖고 고소를 합니까? 뭘 갖고 고소를 해요?
‘너 십자가 믿는다면서 그렇게 살아도 되냐?’ 이게 고소거리거든요. 그게 마귀예요.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자예요.
그 악마의 세계 속으로 계속 몰아넣는 게 이 오늘날 신학입니다.

그 사람 논리를 한번 볼까요? 그 사람 와서 강의를 한다 하면 난 묻고 싶어요.
당신은 어떻게 사냐고. 내가 지근 거리에서 생중계로 한번 찍어보고 싶어요.
찍으면 뭐가 나오겠어요?
욕하지 않는 거, 그다음 도와주는 거, 기도하는 거, 성경 연구하는 거...
그게 구원 얻는 데 도움이 돼요?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분의 피로 영광이 되잖아요.
우리는 영광을 못 돌려요. 이스라엘은 없습니다. 아들은 없어요.
예수님만이 유일한 아들이오. 예수님만이 유일한 참 이스라엘이잖아요.

그러면 이제 새롭게 생긴 이스라엘은, 성도들은
예수님만이 참 이스라엘임을 증거하는 증인이어야 되지.
‘예수님이 참 이스라엘이니까 나도 이스라엘이야.’ 그게 지난주 상속자 이야기잖아요.
예수님이 상속자니까 나도 상속자예요. 맞아요. 성도들이 상속자인데
이 상속자는 ‘나는 상속자가 아닙니다’를 증거하는 상속자인 거예요.

그저께 어떤 복음을 오래 들은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제 책을 갖고 큐티를 하는 모양이에요. 아침에 한 30분씩, 이렇게 꼼꼼히 큐티를 하는데
‘요즘도 큐티하는 사람이 있나요?’ 이렇게 물으신다면 복음을 알아도 큐티를 해야 되는데,
본인은 이제 알았대요.
예수님이 빛이고 성도가 빛이라고 했을 때 그 빛을 증거하려면
‘성도는 빛으로서의 어둠이어야 된다’라는 거죠.
알아들었습니까? 무슨 말인지? 성도를 세상의 빛이라 했잖아요.
제가 마태복음 7장을 할 때인가? 얘기를 한 것 같은데요.
성도를 ‘빛’이라고 했을 때는 성도는 피를 자랑하는 죄인이기 때문에 빛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본문을 다 어떻게 해석합니까?
나를 빛이라 했으니까
‘나는 빛이야. 그래서 난 구원받았어. 나를 따르라. 나를 본받으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성경을 정반대로 해석하는지?
그런 사람일수록 로마서를 더 잘 알 것 아닙니까. 그런데 로마서를 엉터리로 보는 겁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무엇을 노리는가? 하면
내 구원의 확정. ‘나 진짜 천국 백성이야’ 이걸 노리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 말씀은 말씀 자체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살아있는 말씀은 십자가의 증인으로 만드는 현장으로 만드는 거예요. 말씀 자체가.
그 현장 속에서 성도가 새롭게 생성이 되고,
‘새롭게 생성되었다’는 말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다라는 거예요.
새롭게 생성된 자는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이 모습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는다” 할 때
“아브라함의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라고 하니까 ‘여러분...’
이 논리가 어디까지 갑니까? 요한계시록까지 가잖아요.
요한계시록까지 갔을 때 니 목숨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저들이 바코드 찍으라고 할 때 안 찍고....’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다니엘은 가서 잘 먹고 잘 살았어요. 아니 고기는 안 먹더라도 식물은 먹었잖아요.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라는 말씀의 의미가 이미 앞쪽에서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다 했는데 앞쪽에 말씀하신 내용을 다 놓쳐버린 거예요.
제일 이렇게 명확한 내용이 2장 29절에 보면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영에 있고, 성령에 있고) 의문이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나오려면 하나님이 오롯이 한 일만 드러나야 돼요.
그래서 육체의 할례는 인간이 행할 수 있죠?
그래서 육체를 할례한 자들은 유대인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이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요.”
할례는 어디에 하랍니까? 마음에 하라는 거죠.
마음에 하라고 했을 때 이 마음의 할례는 인간이 할 수 없다라는 것을 확정하는 내용이
영에 있고, 성령에 있고, 의문(율법)에 있지 않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했잖아요.
할례를 행했을 때 이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똑같이 적용이 돼야 되죠.
그러면 아브라함의 할례는 무엇을 담고 있고 아브라함은 믿음은 무엇을 담고 있는가? 하면
이 내용을 담고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이라고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라함이어야 아브라함이다’ 이 얘기입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 되지 아니하면 아브라함이 아니라는 이야기예요.

그러면 육신으로 아브람이라도 믿음의 조상이라도 거기에는 이 논리가 들어가면
무엇이 들어가야 돼요? ‘나는 믿음의 조상이 아니다’가 거기에 들어가야 돼요.
지금 히브리서나 지금 로마서에서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니까 ‘본받자’가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면 믿음의 조상이 아니요. 그게 아브람이거든요. 아브람.
이스라엘이라 했을 때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나는 이스라엘이 아니요를 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교인들이 성경을 읽을 때 이러한 말씀들을 구원에 미쳐 있거든요.
미쳐 있으니까 ‘믿음은 확실해야 된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우리도 확실한 믿음을 갖고 싶잖아요. 얼마나 갈망했습니까? 그렇지 않나요?

청교도들이 주장하는 미국 지금 그들이 주장하는 게 먹히는 이유가 뭔가? 하면
예정론은 우리가 알아요, 몰라요? 예정론은 우리가 알아요, 몰라요?
이거 완전 정신병자들이 지가 안다하는데 주님이 예정하신 걸 지가 어떻게 알아요?
그래서 주님이 예정하신 걸 자기가 알기 위해서,
현실 속에서 생활 속에서 끄집어내려고 하는 요소 중에 하나가 ‘믿으라’는 이야기예요.

어떤 분이 오랫동안 모태 신앙이었는데 친구가 구원파에 들어갔대요.
근데 구원파에 와가지고 하는 말이 ‘너 언제 구원받았어?’ 처음에는 반박을 하거든요.
이 사람이 이단인 걸 알기 때문에.

그런데 본인이 거기에 대해서 왜 움찔하고 거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복음을 이야기하지 못하느냐?
할 때는 첫째 자기가 복음을 몰라요. 복음을 모르고
두 번째는 중요한 게 뭔가 하면요 자기도 그것을 갈망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신천지에 교사들이 왜 그렇게 많이 가고, 교수들도 많이 있다고 들었는데 법조인들도 있고
왜 그렇게 그 똑똑한 자들이 들어갑니까?
교회에서는 이미 예정론을 이야기 다 했거든요. 예정론을 다 이야기했기 때문에 확정받고 싶잖아요.
그러니까 자기들이 머리 좋으니까 제일 좋은 방법은
배워서, 외워서 학점 받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어요.
거기에는요. 초등학교 안 나온 사람은 천국 못 갑니다.
왜냐하면 이만희가 가르친 교도를 다 외워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얼마나 비복음적입니까?
‘그러면 어릴 때부터 세례하면 되지.’ 그거야 되죠? 북한처럼.

17절을 보면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 내용이 담기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에요.
그러면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내용이 담겨야 아브라함의 믿음이 돼요.
그러면 그 아브라함의 믿음이 되려면
믿음이 없었는데 믿음이 작동하는 그 내용이 담겨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말씀이 되게 어렵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 했을 때는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갖고 있어야 돼요.
죽은 자를 살리는 내용을 갖고 있어야 돼요.
그렇게 된다면 내가 믿는 이 믿음으로는 구원이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거예요.
‘목사님, 왜 그렇게 복잡하게 가느냐?’ 하면
말씀이 복잡한 게 아니고 니가 복잡한 거예요. 우리가.

악마의 교육 속에서 이 DNA를 물려받아 가지고, 첫째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신학 체계를 다 세우는 겁니다.
그게 유대교거든요.
그 유대교를 추적해 들어가면 악마교가 나오는 게 거기에 있는 거예요. 독특하죠?
이스라엘을 만들어서 율법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마지막 남은 자들이 악마교가 되는 거죠.
짐승의 우두머리가 된다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근데 사람들은 또 그걸 그렇게 안 보거든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했으면 구원할 거야’
로마서에 보면,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한다고 했으니까 나머지 이스라엘도 구원받을 거야.’
그 신학이 사도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의 신학이었어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인간은 새로운 게 없거든요. 똑같은 언어를 표현하면서
십자가의 완료성을 증거하는 내용으로서 바꿔치기 해버리는 겁니다.
똑같잖아요. 구약 성경이 바뀌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다 이루시고?
하나도 안 바뀌었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보는 구약 성경과 예수님이 보는 성경이 똑같잖아요.
똑같은데 뭐가 바뀌어버렸습니까?
십자가의 영으로 보는 구약과 십자가의 영이 빠진 구약 해석이 달라지는 겁니다.
똑같은 겁니다. 신약에도.
십자가가 밝히 보여야 되는데 그것이 밝히 보이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성령 못 받았으니까,
자기 구원으로 빠져버리는 겁니다.

그다음 18절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나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죠.
이 믿음은 맞아요? 믿음이 다른 길이었잖아요. ‘이스마엘이나 살기를 원한다’라고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다음 나오는 게
“그가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정반대로 이야기를 하죠. 그러면 이 말씀이 엉터리입니까? 엉터리예요, 아니에요?
아니죠. 말씀대로예요.
왜냐하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들었잖아요. 말씀대로라니까요.

그러니 아브라함은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신 그 말씀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을 이야기할 때는 자기 부인 이야기를 싹 빼버리잖아요.
십자가로 보게 되면 아벨도 자기를 부인하는 내용을 거기에 담은 겁니다.
노아도 마찬가지고요.

왜냐하면 십자가의 영이 임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어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요.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구원을 얻는 길이고 천국 가는 길이라’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이 누군가 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믿음만 있어서 될 문제가 아니라,
약속을 믿는 그것만 있어서 될 문제가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에요.

똑같은 논리잖아요.
‘십자가의 피로만 구원 얻는 걸 믿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는 게
유대교라니까요. 그러니 아까 그런 교수들은 ‘유대교’가 뭔지를 몰라요.
왜 구약에서 ‘남은 자’를 이야기했고,
그 ‘남은 자만 돌아오리라’고 말씀을 하셨는가? 그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그 말씀을 해야만 악마의 실체가 드러나요. 악마는 말씀을 붙들고 오잖아요.

그래서 마태복음 4장이나 누가복음 4장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을 하다가
마귀가 어디로 갔습니까? 예수님을 떠나.
바리새인과 서기관, 사두개인, 헤롯, 본디오 빌라도, 열두 제자 그 속으로 마귀가 들어가는 거예요.
그 속에 마귀가 들어가 있으니까 그들은 무엇을 붙들고 있어요?
약속을 붙들고 있잖아요.
약속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걸 믿고.

그것만 안 되잖아요. 예수님이 또 새로운 법을 줬잖아요.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쫓아라.” 이렇게 말씀하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쫓는 겁니다.
요한복음 2장 13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에게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네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그다음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본래 지금 이 일을 한 인물은 예레미야 선지자거든요. 예레미야 7장 11절에 보면 한번 봅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런 활동을 했거든요.

그런데 제자들이 무엇을 떠올렸는가? 하면요 시편을 떠올리죠.
왜 시편을 떠올리는가? 하면 시편에 다윗 왕이 이런 대우를 받은 것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시편 말씀을, 시편 69편 9절 말씀을 이들이 기억한 겁니다.
제가 지금 이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요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을 해석을 할 때, 말씀을 해석을 할 때,
이들은 자기들이 기다리는 약속 중심으로 해석을 하는 거예요. 약속 중심으로.

그다음 봅시다. (요2: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네가 예레미야 선지자 정도가 되느냐? 이런 질문이에요. 예레미야 선지자가 되느냐?
여호와께서 보낸 그 표적이 있느냐? 라고 할 때

(요2:19~21)“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유대인들 쪽에서는 성전이 뭐밖에 없습니까?
건물 서는 것밖에 없죠. 성막, 그다음 솔로몬 성전, 그다음 포로에서 돌아와서 지어진 성전,
그다음 지금 헤롯 성전.
여러분이 그 성전 외에 다른 성전이 있는 걸 압니까?
지금 이들이 그 성전 외에 다른 성전을 알고 있어요, 없어요?

하나님이 ‘다른 성전이 있다’라고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분명히 하늘에 있는 모형, 지시하신 대로 이야기를 했긴 했는데
그건 그냥 지시로 받아들였죠.
이들의 입장에서는 눈에 보이는 건축물 성전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몸을 가리켜 이야기했다고 하잖아요.
예수님 몸이 성전이라는 거예요.
“나를 죽여라. 헐라.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 이렇게 소개를 한 거예요.
이게 대화가 됩니까?

제가 지금 로마서 4장을 하면서 이 이야기를 왜 하는가? 하면
성경을 해석을 할 때 어떻게 해석하느냐라고 하면
꼭 제자들, 성령 받지 못한 제자들이나 유대인처럼 성경을 해석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의 해석이나 유대인들의 성경 해석이 가장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에요.
아니 성전이 예수님 몸이 성전이라 하면 우리가 그 시대로 갔다 생각해 보세요.
말이 안 되잖아요.
지금 우리야 우리 몸이 성전이라 하고 그렇게 얘기를 하니까 ‘믿는다’라고 하지만 믿기는...
제가 볼 때는 진짜 X코도 안 믿어요.
오죽하면 예배당 건물을 지어놓고 ‘성전이라’ 하겠습니까?

어떤 약아빠진 사람들은 외부는 어떻게 해요?
약간 이렇게 별로 안 좋게 해놓고 내부에 들어가면 강대상부터 시작해서 황금빛으로 쫙 해놓잖아요.
JMS 그 예배당 보셨죠? 뉴스에 나온... 의자도 황금으로 해놨잖아요.
사기꾼들의 특징이에요. 그런 것들.

지금 이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그 해석법대로
로마서를 ‘말씀대로’ 보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에서 말씀하신
‘백세가 되어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이대로 믿자’는 겁니다.
이대로 믿게 되면 무엇이 빠져버립니까?
말은 맞는데, ‘아브라함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요’가 빠져버리죠.

그래서 제가 요즘 오늘날 로마서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유대교식으로 해석했다라는 얘기예요.
그래서 결국은 뭐를 이야기합니까?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똑같이 유대교예요.

그 ‘믿어야 된다’라는 그 말 속에는
성령이 작동하게 되면 그거 믿어도 소용없다라는 것이 성령 받은 자만 깨닫게 돼요.
그런데 성령 못 받은 자는 붙들어야 되거든요. 누구처럼? 유대인들처럼. 제자들처럼.
그래서 ‘믿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라고 계속해서 그걸 유지하려고 하는 겁니다.
근데 창세기에 가니까 안 맞거든요.
안 맞는 게 있으면 이것도 믿어야 되고, 저것도 믿어야 되고...
자기 스스로 모순에 빠져버린 거예요.

모든 말씀은 십자가를 증거하고 있으면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것은 살해자가 있고 대신 죽은 분이 있다라는 이야기예요.
여기서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되어야만 앞부분에 16절에 말씀하신 로마서 4장 16절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된다라는 겁니다.
은혜라는 것은 선물이죠. 내가 믿었다가 아닌 믿음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만일에 여기에 ‘내가 믿었다’가 들어가면 약속은 헛것이 되고 믿음은 폐해지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분명히 은혜라고 이야기를 했잖아요.

약속의 자손, 이 상속자가 되는 것은 은혜에 속했다라는 거예요. 상속자가 되는 것은.
이것은 내가 상속자가 될 수 있는 이 사다리가 없는 거예요.
아예 사다리 자체가 없어요.
그 없음을 누가 보여주는가? 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100세가 되도록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라는 이 얘기가
그 믿음은 은혜에 속했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후사가 되는 방식은 사다리가 없어요.
그걸 은혜라 하는 겁니다. 선물로 주어진 거예요.
지금 로마서는 계속해서 이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없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야곱이 사다리를 보고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에서 사다리를 이야기하니까
예수님이 사다리가 되어가지고 이제 인간이 사다리 타고 올라갈 수 있다.
사영리 보면 그게 다 나오잖아요.
‘이게 죄와 이렇게 계곡이 있어서 못 가는데 건너가는 방법은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건너간다.’
이것보다 악마적인 복음이 없어요. 뭘 제거합니까?
십자가를 이야기해놓고 십자가를 제거해버려요.

십자가는 철저하게 부정성을 담고 있어요. 할 수 없음을 담고 있어요.
그래야만 그 복음을 전하는 자를 통해서 그 피만 자랑하게 돼 있어요.
‘내가 복음을 전했는데 어떻더라 저떻더라’ 이런 소리를 안 해요.

(롬4: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분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세례를 받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 아들뿐이에요.
그래서 영광을 돌렸다는 거고
요한복음(8:56)에서는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로 확신하였으니”
뭘 확신했어요? 확신하기는요? 헛다리 짚었잖아요. 헛다리.
“이스마엘이나 살기를 원하나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이름을 아예 ‘이삭’이라고 지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성도라 지었잖아요. 우리가 성도잖아요. 맞죠?
‘성도’라 지었다는 것은 뭘 담고 있습니까?
이름을 바꾸면 이삭이고,
아브라함이 아브라함 된 것을 한 자로 표현하면 ‘이삭’이에요.
아브라함 생애 전체를 한 자로 표현하면, 한 단어로 표현하면 ‘이삭’이에요. 이삭.

지금 이 말씀의 모든 내용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이삭’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이삭.
말씀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래야만 너는 아니고 내 아들의 피로 죽음으로 다 이루었다라는 내용이 전파되는 거예요.
‘나는 과거에 아브람이었는데 이제는 아브라함이 되어서 이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갔다.’
이게 성화론이거든요.

성화론이 왜 악마적이냐? 할 때는
철저하게 십자가를 제거하는 겁니다. 그거보다 악마적인 게 없어요. 그거 유대교거든요.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아니 십자가 지신 분 앞에 한번 얘기해 봅시다.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인다고 하시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잖아요. 강도가 둘 있잖아요. 둘 있는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앞에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예수님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다면 어떻게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구원받은 강도가 그 얘기했다 칩시다. 어떻게 살 거예요?
그걸 역사를 돌려버리면 어떻게 돼요? 강도질하면서 산 거예요.

왜 예수님이 하필 그런 강도를 십자가 옆에 달리게 해서 구원받는 자로 만들었느냐?를 아셔야 돼요.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아예 박제를 해버린 겁니다.
십자가가 완료성으로서 영원해버리면 천국 가서도 영원히 죽임당한 어린 양을 찬양하잖아요.
그것이 완료성이 되면
그 십자가 앞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죄인 중에 괴수로 드러나는 거예요.
죄인 중에 괴수로 드러나는 방식이 무엇인가? 하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는 방식이에요.
그 얘기가 사도바울에게 적용하면 돼요.

우리도 언제나 확신을 계속해서 갖습니다. 맞죠? 복음을 들으면서 확신을 갖잖아요.
머리 좋은 사람은요 또 이런 걸 들으면 확신을 안 가지려고 해요.
아~ 도대체 뭐가 되려고 그러는지?

(롬 4:22)“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놀랍죠? 저에게 의로 여기셔야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그 속에서 작동을 해야 되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뒤에 나오잖아요.

(롬 4:25)“주님이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요 내용을 아브라함의 믿음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디에 그대로 넣을 수 있는가? 하면
베드로 속에 그대로 집어넣으면 돼요. 거기에 또 누구를 넣을 수 있어요?
사도 바울 속에 고스란히 집어넣으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나와요.

사복음서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여주는 자들이 있었잖아요. 베드로가 있었잖아요.
그 베드로의 모습을 보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저주하며 맹세하기까지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믿으십니까? 이렇게 하면 피식 웃을 거예요. 비웃을 겁니다.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어요. 처음 아셨습니까?
그 내용을 고스란히 담아야 사도행전이 이해가 돼요.

롬 4:23절 “저에게는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또 이렇게 나오니까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를 위함이다.’ 이렇게 나오는데
믿음의 실체 이 내용.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다”는 것이 선물이죠.
성도 속에 고스란히 무엇이 담겨 있느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성도의 몸이 이 내용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담고 있기 때문에 성도는 무엇을 자랑하느냐? 이 얘기예요.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으니까 ‘나는 의롭다’는 이야기를 할까요?
아니면 주님의 죽으심을 자랑할까요?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의로 여기심을 받은 이야기를 했잖아요.
‘아브라함이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 했을 때 아브라함 속에는 뭐가 담겨있다 했습니까?
‘나는 믿음이 아니요, 나의 믿음은 엉터리요’라는 것을 고스란히 담아있는 겁니다.
그래서 의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으니까, 우리를 의롭다 하셨으니까,
우리는 뭐예요? 의로운 자가 아니요.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한테 지금 이 말씀을 쓰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말씀이 어렵죠?
그래서 이 말씀은 찔러 쪼갬을 당하는 자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말씀이 되지만
찔러 쪼갬을 당치 않는 자는 자기 믿음을 고수하게 되는 거예요.
‘나는 아브라함처럼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거야.’
이제 여러분 아셨죠? 그런 자들이 가장 악마적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이 성도에게 계속해서 작동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마칠게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었다” 했을 때
여기에서 ‘우리’는 나가 부정된 자리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게 이 본문을 갖고 사람들에게 미끼를 던지잖아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게 가짜 복음이에요.
아브라함의 믿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악마가 심어준 믿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믿는 자의 믿음의 본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십자가만이 우리 속에 영원한 자랑거리로 남기기 위하여서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주심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살아나신 이 말씀을
우리 속에 넣어주셔서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대로 담은 성도로 살기를 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